(시작 기도)
주님,
오늘은 지체의 자녀 결혼 잔치 축하로 파주에 갑니다.
주님의 생명싸개 손 안에 있는 아름다운 새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버스로 오고 가는 긴 시간 성도의 귀한 교제가 넘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부질없는 가식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본문 주해)
1~2절 :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은 죽어가도, 오신다는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자 여러 가지 혼동이 일어났다.
그런 때를 틈타서 주의 강림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의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서신(베드로전후서의 두 서신)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그 받으실 고난과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였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메시아가 오셨다.
이제는 사도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에 대하여 세월이 가면 갈수록 확신을 하는 사람은 적어지고 오히려 조롱하는 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3~4절 : 종말의 약속을 조롱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이요, 이 땅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상들’은 구약성경의 선조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다 죽은(잠든) 신자들이다. 이들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었으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 되고 만다.
5~7절 :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는 것과,
또 물로 그 때 세계가 홍수에 잠겨 망하여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불사르기 위하여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날까지 유지됩니다.”(새번역)
그러자 베드로가 ‘세상이 창조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있다’라고 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처음 세상(하늘과 땅)은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홍수 심판으로 인해 처음 세상은 멸망하였다.
(그들은 이를 알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심판을 말하지 말고 정욕대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현재의 하늘과 땅(세상)은 ‘처음 창조된 세상’과 장차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의 중간 사이에 놓인 세계이다. 그리고 이 현재의 세계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재의 하늘과 땅은 장차 불살라지기 위해 보존되고 있고, 그날에 경건하지 못한 자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를 것이다.
8~9절 :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으시는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시간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며, 모든 때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시간에서 2천 년이라도 하나님의 시간으로 이틀에 불과하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90:4)
그러므로 종말의 지연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주의 택한 백성들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그 대상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신 자들, 창세전에 미리 예정된 자들, 택하신 자들을 가리킨다.
아직도 이 땅에 주의 택한 백성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 되고, 주님의 택한 백성들이 다 돌아오게 되면 지체 없이 오실 이가 오실 것이다.
(나의 묵상)
나는 이 세상의 종말을 믿는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다 불로 심판받을 것이지만, 그때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붙들고 있으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전염병이 돌고, 세계 전쟁이 발발하여 이 세상이 망할까 걱정하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심으로 세상이 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현재 내 삶에 고난과 고통이 심해서가 아니요, 나의 삶의 모습이 주님 앞에 온전해서는 더욱 아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 세상 최고로 기쁜 일이며, 인간이란 하루를 더 살면 그만큼 더 죄 짓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실이 얼마나 나 중심인지 선한 말 속에도 이기적인 냄새가 풀풀 나고, 선한 행위 속에도 자기의가 넘치는 존재이다.
잘 포장해서 남들에게 좋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면 깊숙이 들어가면 자기 사랑만이 가득한 자인 것이다.
몸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며 한숨을 쉰다.
하지만 이런 비참하고 비열한 내 모습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그것을 보기에 주님만을 찾게 되고, 십자가 보혈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매일 주님을 생각하니 자주 종말을 생각하는 자, 주님을 기다리는 자가 된다.
그래서 나는 종말을 현재로 사는 자가 되었다.
종말을 현재로 사는 자는 매일 십자가를 붙든다.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포하며,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고 기대한다.
종말을 현재로 사는 자는 자기 모습 때문에 절망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계시기에 소망을 가지는 자이다.
‘나’라는 존재가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종말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어리둥절하지만,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니 감사만이 넘친다.
그리고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간다.
(묵상 기도)
주님,
종말을 현재로 사는 자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연약하고 변덕스러운 자입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오니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개인적인 종말이 오든
주님께서 다시 오시든
기쁨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