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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나의 금강경 공부 16]
일체는 무아(無我)이니
아상(我相)을 없애라!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부처는 아상이 없다
"이렇게 하여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이는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제3분, 제17분, 제24분). 그러면서 제14분에,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떠난 사람이 곧 부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금강경은 아상을 없애라는 경전인 것이다. 아상이란 ‘나’가 있다는 생각이다. ‘나’라는 변치 않은 실체, 나라고 하는 변치 않는,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아상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아상이 있다고 믿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변치 않는 실체인 자아, 아트만(Atman)이 있다고 믿고 있다. 죽으면 아트만이 영원히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기독교에서도 영혼이라는 게 있다. 죽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토록 산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다르다. 일체는 무아인 것이다. '나'라하고 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가 없다. 무아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공(空)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四相)이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말한다.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아상이 있으면 자연이 ‘너’도 있다 하는 인상(人相)이 생기기 마련이다. 너에게도 변치 않는 너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상인 것이다. ‘나’라는 생각 그리고 ‘너’라는 생각이 있으면 또한 우리 모두가 있다는 중생상이 생긴다, 여기서 말하는 중생상은 오직 사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알로 태어난 것, 태로 태어난 것, 습으로 태어난 것, 등등 모든 생명체를 말한다.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가 아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살고 있으면 자연 수자상(壽者相)이 생긴다. 여기서 수자상은 오래 산다는 생각이지만, 자기가 죽은 후에도 계속 해서 자기 영혼이 있기에, 자기가 죽은 후에도 천당에서 영원히 산다는 그런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일체는 무상이다
사람들은 변치 않는 ‘나', 아트만이나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다. 아트만의 사상을 부정하기 위해서, 부처는 일체는 무아(一切無我)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치 않는 실체가 없다고 말했다. 일체는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또한 없어지는 것이다. 현재 나라고 하는 ’나‘는 여기 있지만, 변치 않는 실체가 있기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연기에 의해서, 전생에 지어놓은 업에 의해서 지금 ’나‘가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이 내가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는 아닌 것이다. 매일 매일 나라고 하는 나는 변해가고 있다. 10년 후면 나는 다른 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병들고 죽으면 현재 살아 있는 나는 죽고 없어지고 만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면서 업을 만들어놓는다. 업에 따라 다음 생에 나가 생겨나지만, 지금의 나는 무아인 것이다. 지금의 나는 연기적으로 보면 공(空)이고 무아(無我)이다.
금강경 제10분에,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맞부딪침과 어떤 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라.”라고 했다. 왜 우리가 형상에 머물게 되는가? 바로 아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상이 없으면 어떤 형상에도 머물지 않는다. 아상이 없으면 소리·냄새·맛·접촉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기에 어떤 형상이나 어떤 법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런데 육조혜능 대사는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금방 깨쳤다.
우리가 무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 ‘나라는 생각’이 없어진다. 아상이 없어지면 자연 인상이 따라 없어지고, 중생상 그리고 수자상도 따라 없어진다. 아상이 없어짐과 동시에 사상(四相)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상이 없어야 어떤 형상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게 되는 것이다. 아상이 없어진 후에야 부처가 되는 것이고, 부처가 되면 아상은 없어진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 이유는?
만약 ‘나’라고 하는 변치 않은 실체가 있다면 우리는 전생을 다 기억해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죽었다가 살아서 되돌아온 사람들이 쓴 책에 보면, 천당에서 이미 돌아가신 부모하고 일가친척을 만나보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전생에 대해서 전연 모르고 있다. 모르는 이유는, ‘나’라고 하는 자아, 그리고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죽으면 없어져버린다. 하지만 사람은 살아 있었을 때 업을 만들어 낸다. 업이 또한, 인연 따라, 다음 세상의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생의 ‘나’하고 지금의 ‘나’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오직 업이 전생의 나하고 지금의 나하고를 연결시켜주는 것뿐이다. 연관이 없다고 했지만,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연관이 없다고 했지만,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전생을 아신다. 왜냐하면 도를 깨쳤고 그리고 천안이며 불안이며 혜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 다시 태어나는가?
아상이 있기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아상이 있기에 욕심이 생긴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남을 괴롭히고, 그리고 살인까지 한다. 우리가 삼독(탐·진·치)을 갖고 있기에, 이게 업보가 되어, 우리는 죽으면, 그 죄과(업)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설령 극락이나 인간으로,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난다고 해도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왜 괴로움인가? 삶에는 노병사(老病死)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면 아상을 없애야 한다. 아상이 없어지면 깨치게 되고, 생사윤회에서 해탈하게 된다.
인욕정진
금강경 제14분;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는 말하기를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찢길 적에, 내가 그때에 나라는 상이 없었으며, 남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중생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수명에 대한 상도 없었노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팔과 다리가 마디마디 찢겨지고 무너질 때에 그때에 만약 나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분노의 불을 뿜고 원한을 품었으리라.”
청담스님의 설법을 한번 들어보자.
인욕(忍辱)이라 함은 참는 겁니다. 욕을 해도 참고 때려도 참는 것입니다. 욕되는 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날 나쁘다고 입으로 욕을 하든지 매로 때리든지 칭찬을 하든지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인욕에 대해 참 굉장한 얘기가 나옵니다. “어째서 그것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느냐 하면, 수보리야, 내가 저 옛날에 가리왕이란 폭군에게 사지와 몸뚱이를 찢겼지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어서 성내거나 원한이 없었느니라.”고 하십니다. 가리라는 말은 포악(暴惡)이란 뜻인데, 아주 포악한 성질을 가진 임금입니다. 이 포악한 가리왕이 깊은 산으로 사냥놀이를 갔습니다. 자기 궁녀들이 산 속에서 수도하고 있는 인욕선인과 얘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노했습니다. 칼로 사지와 온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인욕선인이 과거세의 부처님의 전신이니, 석존이 전세에 참는 공부를 하는 도인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인욕시절의 내가 온 몸을 찢기어 죽어가면서도 그 가리왕에 대해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때 이미 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그때 배까지 잘라서 창자를 끄집어낼 때 내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그 즉시에 원한이 일어나고 성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때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아픕니다. 우리가 당장 코를 벨 때, 참으려 해도 참지를 못합니다. 아주 지독한 사람은 참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픈 것을 억지로 참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는 인욕바라밀이 인욕바라밀이 아닌 경지에서는, 아공·법공·구공(我空 法空 俱空)이 드러나 있게 되니까, 이 몸뚱이를 탁 잊어버리면 전신을 송곳으로 쑤시고 불에 그슬리어도 하나도 뜨거운 줄 모르는 겁니다. 마음이 무심경계(無心境界)에 들어가서 생각이 없으면 경계가 침범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참는 것도 참는 것이지만, 참는다는 생각이 없이, 생각 없이 참는 것이 정말 참는 것입니다.(510쪽; 금강경 대강좌; 청담스님).
눈알 빼준 사리불 존자
다음 이야기도 청담스님의 “금강경대강좌”에서 따온 이야기이다.
부처님의 제자 사리불 존자가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사리불 존자에게 말을 걸었다. “스님은 자비하신 불타의 제자시죠?” 사리불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스님, 제가 왼 눈이 하나 필요한데 빼 주실 수 있습니까?”
사리불은 두말없이 자기 왼쪽 눈을 뺐다. 그리고 주었다.
그 사람은 왼눈을 받더니만, 더럽다면서 침을 뱉는다. 눈알을 땅에다 버린다. 발로 비벼서 짓이겨 버린다. 고맙다는 인사는 없이, 그것도 자기 바로 눈앞에서, 자기가 빼준 눈알을 짓밟아버리니, 아무리 사리불이라고 해도, 속으로 화가 안 날수가 없다. 고약한 놈이라고 마음속으로 사람을 꾸짖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사리불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서 한 마디 해준다.
“스님이 발심을 덜 했군요. 스님은 나한테 눈알을 하나 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내가 그 눈알을 똥 속에 집어넣거나 발로 밟아버리거나, 그것은 내가 하는 짓이요. 스님은 무심해야 할 게 아니겠소. 그런데 스님의 안색을 보니까 속으로 마음이 동한 것 같으니 아무래도 응무소주(應無所住)한 보시가 아닙니다.”
말을 끝마치고 난 후, 그 사람은 자기는 제석천인데, 사리불 스님을 시험해 보느라고 그랬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제석천의 본신(本身)을 나타내 보였다.
제석천은 “내가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나는 그것도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제석천에게 눈알을 빼서 달라고 하면, 자기는 눈알을 빼서 남에게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한편, 사리불 존자는, 응무소주한 보시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서, 부끄러워했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응무소주(應無所住; 머무른 바 없이)는 아무 것에도 마음을 머무르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준 것에 대한 애착도 갖지 말고, ‘내가 주었네’ 하고 주었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말고, 내가 눈알을 주었기에 그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었네, 등 자랑도 하지 말라 이다. 한번 주어버렸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마땅히 어떤 것에도 ‘머무름 없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욕을 하고 비방을 하다
부처님이 슈라바스티이 제타숲 급고독 동산에 계셨다.
때에 비의(卑疑)라고 하는 소년이 부처님 처소에 왔다. 부처님 앞에서 좋지 못한 말과 뜻으로 세존을 꾸짖으며 온갖 비방을 했다. 붓다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비의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였을 때 붓다는 조용히 물었다.
“너는 길일(吉日)에 친척이나 집안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때, 너의 친척이 만약 식사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하는고?"
“먹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밥은 남을 뿐입니다.”
“비의야, 네가 여래에게 욕을 하고 아무리 비방하여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욕은 누구에게로 돌아가겠느냐?”
“아니, 아무리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한번 주어버린 이상 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떤 것을 주었다 하고 어떤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까?”
“비의야, 잘 들어라, 욕을 들었을 때 욕으로 보답하고, 분노에는 분노로서 갚고, 때리면 같이 때리고, 싸움을 걸면 함께 싸운다. 이것이 준 것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을 하고 아무리 화를 내고 때리고 싸움을 걸어도 잠자코 있는 것은 주었지만 받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무리 비방을 받아도 화를 내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그때 붓다는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성냄이 있지 않는 이는
무엇에 성을 내겠는가
조복되어 바른 생활을 하는 이는
성냄이 없다는 것 너는 알라야 하리
성내지 않음이 성냄을 이기며
착한 일 함이 악함을 이기고
보시가 인색함과 탐냄 이기며
진실한 말함이 거짓말을 이기네.
젊은 비의는 드디어 붓다 앞에 끓어 용서를 빌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별역잡아함경; 동국역경원; 141-142쪽)
위에서 청담스님은 “억지로 참는 것도 참는 것이지만, 참는다는 생각이 없이, 생각 없이 참는 것이 정말 참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었다. 아상이 있으면 참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참는 것이다. 그런데 아상이 없으면 참는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참아지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였으나---
제17분; 부처님께서 수보리에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내여야 한다. ‘나는 반드시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노라. 그리고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였으나 한 중생도 실을 제도한 것이 없노라’ 라고 하라.”
제24분: “왜 그러냐 하면 실로 여래에게는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여래에게 중생이 있고 또 여래가 제도함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장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여기에서, 부처는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였으니, 한 중생도 실은 제도한 것이 없노라,’ 라고 하라”고 하셨다. 한 중생이라도 제도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이미 아상에 걸려 있는 것이다. 가령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A학점 맞은 학생에게, 교수가 “내가 잘 가르쳤기에 네가 A학점을 갖게 된 거야, 그것은 나의 가르침이 훌륭했기 때문이야.” 하고 자기 자랑을 한다면, 그것은 대학교수가 아상에 걸려 있는 것이다. 가르쳐주는 것은 대학교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자기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지 내가 잘 했네, 하고 아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다
제5분; “무릇 있는바 모든 현상은 다 이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일체는 무상(無常)이기에, 모든 것은 변해가고 있다. 변치 않는 실상이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실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따져놓고 보면 다 허망한 것이다. 아녹다라삼먁삼보리(최상의 깨달음)라는 생각도 다 허상인 것이다. 부처라는 생각, 보살이라는 생각, 보시했다는 생각도 다 허상인 것이다. 부처도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면, 이 이는 곧 삿된 도를 행하는 자라. 여래를 길이 볼 수 없으리라.”(금강경 제26분)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참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니다”라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위의 구절을, “금강경의 핵심은 물론이고 반야6백부 전체의 뜻을 유감없이 표현했다는 뜻에서 반야제일게(般若第一偈)”라고 말했다.
무비스님의 설법을 여기서 들어보자:(금강경강의; 57쪽)
무릇 있는바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합니다. 세상만사가 허망한 것은 보통 사람들도 다 느끼는 바입니다. 이 세상 만물은 다 인연으로 잠깐 얽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분해하면 실체가 없어집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이 뿔뿔이 흩어지듯이 컴퓨터도 여러 가지 부속품을 다 하나하나 분해해버리면 없어져 버립니다. 공(空)을 이해하는 데 크게 세 가지 차원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그대로 현상만 보는 것은 중생소견이요, 설명을 듣고 나름대로의 사유를 통해서 공을 이해하는 이는 소승의 성문연각이요, 문화재 감별사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척 알듯이 보자마자 공인 줄 아는 것이 대승보살입니다. 모든 형상에서 형상 아닌 것으로 보는 중도정견으로 여래를 본다는 것은 대승보살의 안목입니다.
부처라는 상도 허상이다
다음은 <임제록·법안록>(74, 75쪽)에 써진 글이다.
임제스님은 말했다: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 한다면 남에게 끄달리지 않기만 하면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며,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 자유 자재해진다.”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말이다. 어찌 감히 부처를 죽인단 말인가? 만약 부처를 만나면 우리는 부처 앞에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면서 대접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이것은 분명히 지옥에 갈 말이다. 만약 서양에서 중세기 때,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라 라고 말했다면, 이것은 잡히어서, 산채로 불에 태워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을 듣고서, “아, 그 말 한 번 좋구나!” 하고 오히려 감탄을 해버린다. 이게 불교인 것이다. 이게 다른 종교하고 다른 점이다.
부처에게 집착하게 되면, 응무소주 이생기심(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다)이 생기기 않아버린다.
아상을 없애는 방법
아상을 없애라고 말하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아상을 없애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해내야 하는 것이다. 해내려고 하면 해낼 수는 있는 것이다. 아상을 없애기 위해서, 붓다는 팔정도(八政道)를 행하라고 위빠사나(Vipassana) 참선을 하라고 했다. 대승불교는 육바라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을 닦으라고 했다. 선불교는 참선, 특히 한국에서는 간화선을 하라고 했다.
아상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지 않는다. 무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아상을 없앨 수 있다. 아상이 없어지면 이게 해탈이다. 생과 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금강경은 우리에게 아상을 없애라고 가르치고 있는 경전인 것이다. 아상이 없어지면 인상·중생상·수자상은 저절로 따라서 없어진다.
부처도 먼 과거 전생에서부터 도를 닦아왔다. 우리도 금강경을 공부하다 보면, 이게 인연이 되어 어느 땐가는 도를 깨치게 될 것이다. 오늘 깨치지 못한다고, 마음을 조급하게 먹을 필요는 없다. 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깨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다는 것”만은 알고서 참선을 해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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