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배웅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여행객카트에 커다란 짐을 두어 개 실은 그의 손을 그저 바라보았다.
밤비행이라 아주 피곤할 것이라던 그의 말처럼 목소리는 꽤나 짜증이 묻어져 있었다.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억지로 우겨 나왔던 자신을
잠시나마 후회하는 수연이었다.
연인이라면 당연히 유학 간다는 것을 말렸어야 했지만
그럴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의 유학길을 배웅해주는 것 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잘 다녀와.”
수연의 작은 목소리에 지태의 옷깃이 잠시 바람에 흔들렸다.
그의 손끝에 여전히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그 바람의 뒤를 따르고 난 후에야 그가 답했다.
“좋은 사람 만나.”
“돌아 올 거잖아.”
무엇 때문에 그가 돌아올 것이라 확신했느냐 묻는 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쓸쓸할 때 만나는 엔조이라는 말을 달리 받아들였을 수연에게 지태는 말이 없었다.
작은 불씨가 필터까지 갔을 때야 그는 옆에 놓여진 휴지통 철제에 불씨를 문질렀다.
아주 잠시, 잠시 동안 작은 불씨가 이미 흘러간 연기를 뒤따라 흩날렸다.
“돌아가 봐. 혼자 갈게.”
“가는 거 보고 갈게.”
“우리 이러지 말자 제발.”
잔잔한 듯 울리던 그의 목소리가 수연의 코끝을 아리게 만들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해 지태의 손만을 바라보던
수연의 눈동자가 짜증스러움이 가득 담긴 지태의 얼굴을 담아냈다.
“그냥 서로 즐겼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자꾸만 서로 피곤해지지 말자 우리.”
마디가 굵고 제법 큰 그의 손이 그의 입가를 훑었다.
난감하거나 지루할 때 나타나는 그의 행동을 수연이 모를 리 없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나 들어갈게. 잘 지내.”
가을이라 제법 쌀쌀해진 바람에 옷깃을 여민 그가 돌아섰다.
카트를 손에 쥔 채 앞으로 걸어가는 그에게 수연이 낮게 말을 내뱉었다.
“개새끼.”
그 말을 들었는지 잠시 주춤했던 그의 발걸음이 자동문을 지나 사라져 갔다.
“개새끼만도 못한 새끼.”
흐르는 눈물을 훔친 수연이 뒤 돌아 깊은 한숨을 쉬어내는 그 순간이었다.
*
“유감이예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얗게 떠오른 병원의 시멘트벽들에
누군가 검은 물감을 일순간 뿌려버린 것처럼 하얀 가운을 입은 채
무거운 듯 안경을 내려 쓴 의사의 교만한 얼굴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수연이 정신을 바로 잡았다.
분명 교통사고라는 단순한 사고로 인해 병원에 실려 왔던 저인데,
의사는 다른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 임신이었다고. 그런데… 그런데….”
차마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연희의 표정에 수연은 할 말을 잃었다.
오진일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쳐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뻐끔거리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목을 타고 넘어오는 말들이
쉽사리 밖으로 꺼내지지 않았다.
수연을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한 사람이 그저 쪽지에 ‘당신 유산이래요.’ 라는
건조한 말투로 비웃 듯 전해준 것처럼 마냥 딴 사람의 일만 같았다.
차갑게 손과 발이 식어가고 머릿속에 희미하고 자욱한 연기가
가득 차 오른 것처럼 붕 뜬 기분이었다. 좋아서도 슬퍼서도 아니었다.
단지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 그게 전부였다.
“설마, 몰랐던 거니?”
두 눈 가득 연희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 눈에서 흘러야 할 눈물을 대신 흘려주는 연희의 모습에
목이 건조하게 말라오는 것을 느끼는 수연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이내 반사적으로 행하는 것 마냥 물 잔을 찾아 헤매는
제 눈동자에 병실 침대 오른편에 놓여진 탁자에 잘 닦여 말라있는 유리잔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그 유리잔을 들고 있지만 안타깝게 자신을 바라보는
간호사들과 의사, 그리고 혼절해버릴 듯 울어버리는 연희는
잔을 채워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쨍그랑-.’
질끈 두 눈을 감는 그 순간 온 몸에 힘이 빠져 나갔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임신, 그리고 유산.
그 두개의 단어가 물밀 듯 급한 속도로 흘러 들어와 감당이 되질 않았다.
웃으며 출국하는 그를 배웅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그리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 하나의 생명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얼굴도 채 보지 못한 아기의 대한 애정이 아닌 당황스러움일 것이라
치부하는 수연이었다.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햇볕이 따스하다 못해 따갑다는 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산산히 부서져 흩어진 유리알들 사이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유리잔의 잔해가
위협적으로 수연의 눈동자에 담겼다.
“오빠한테, 알려야 하는 게 …….”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안타까운 고개를 떨군 간호사들과 의사의 발자국 소리가
문 밖으로 멀어져 갔다. 울먹이며 겨우 말을 내뱉는 연희의 부산스러운 손짓에
수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 마.”
“수연아?”
“연락 하지 마.”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연희는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연희를 바라보는 수연조차 조용했다.
촘촘하고 작게 깨알같이 엮인 거미줄이 병실 곳곳에 쳐있는 것만 같았다.
한 마디라도 입을 열었다간 그 거미줄 끝에 달려진 눈물방울이
비가 되어 흐를 것만 같았다.
“너, 왜 그래? 나한테 말 못 한거 있는거지. 그렇지?”
언제 눈물 흘렸냐는 듯 놀란 눈을 뜨고 물어오는 연희의 시선을 애써 피한 수연이
고개를 묻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사랑이었다고 말했었던 자신에게
축하한다며 웃어보이던 연희의 얼굴이 생각나, 그저 저 혼자만의 집착이었다고
그게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이내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도저히 말할 용기가 서지 않았다.
“이제, 남이야. 남남….”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굳은 연희의 시선을 피해 수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병원 가득 피어오른 불안의 기운과 건조함에 매말라 버린 입술이
예전처럼이나 촉촉이 젖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 더는 필요 없다고 보기 싫다고 …….”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연희는 더 물어오지 않았다.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수연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들이 대신 한 것만 같았다.
너무도 과분했던 사랑이 아픔으로만 끝이 나야 했는지 하늘에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대기업의 사원으로 반듯한 그의 품성에 반한 것도,
그렇다 해서 훤칠한 키도 그의 말쑥한 용모에도 반한 것은 아니었다.
유학을 떠난다던 그의 옷자락을 잡을 수 없는 제 처지가 원망스러워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을 뿐인데, 이런 아픔을 남기실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한 여자 민수연이 한 남자 차지태를 사랑했다는 것이 그토록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는지,
누군가 나타난다면 꼭 묻고 싶었다.
“여자 뭣같이 보고, 필요할 때만 찾고,
싫증나면 버리고, 그런 사람 필요 없어 난.”
눈물이 흘러 흐느끼는 제 목소리가 반쯤 열린 병실을 타고 흘러
사람들의 시선을 불러 모은 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질끈 깨문 입술에 핏기가 베일 때 까지 수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단호하게 내뱉는 말투의 끝이 키보다 낮게 달려
반쯤 열려진 창문 사이로 새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턱 없이 높게만 보이는 병실 안의 천정, 아니 이 높은 건물이
일순간 무너져 내릴 것처럼 가만히 서있는 연희의 모습마저 흔들려 보였던 것은 착각일까.
곧이어 연희가 제 겉옷 주머니에 넣어져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길게 눌려진 버튼 음의 끝에 몇 번의 신호음이 가지 않아 커져 있던 수화음에 의해
수연의 귓가에 익숙한 여자의 음성이 낮게 들려왔다.
‘고객의 사정에 의해 착, 발신이 금지 되어진…….’
마치 어린아이가 된 마냥 마음속으로 쌓았던 수 높은 벽이 허물어지는 듯
실망감이 밀려왔다. 혹시 받아주지 않을까.
이런 소식을 듣고 맨발로라도 아니, 천천히 걸어와도 좋으니 와주기만이라도 했으면.
“해도 소용없어.”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급하게 외치는 연희의 목소리에 수연은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가까운 거리에 긴 장막이 쳐져 마치 홀로 말을 하 듯
수연이 기운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없어. 한국에 그 사람 없어.”
헤어졌다고, 자신이 그를 버렸다고 말을 하기에
여느 때처럼 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하는 눈동자가 미웠다.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이, 숨을 쉬는 제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 수 많은 교통사고의 잔해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더라면,
그래도 그랬을까 싶었다.
“왜 그랬어. 왜 헤어지자고 했어. 니 애 아빠라잖아.
못 들었어? 너 그 사람 아이 가졌다잖아!”
가득 고인 눈물이 속눈썹의 끝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 무거운 눈물들이 쉴 새 없이 흐르는 힘겨움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
수연이 이불 속으로 고개를 묻었다. 어깨를 타고 흐르는 흐느낌도,
다그치는 연희도 답답함은 마찬가지였다.
“사랑했어. 정말, 너무 많이 사랑했어.
들고 있기에 무거워서 그냥 내려 놓은 거야.
내가 지쳐서, 너무 아파서…….“
“너, 미쳤어. 지금 제정신 아니라 그래.
다시 연락 해봐. 니가 전화하면…”
“안와. 올 사람 아니야 그사람. 안와… 안와…….”
숨소리조차 내는 것이 눈치가 보였었고,
혹 화난 표정을 지으면 돌아서 가버리는 그의 모습만을 봐왔기에
이 자리에 그가 있다는 것조차가 우스운 이야기 였다.
수연을 한심하다는 것처럼 수치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되려 큰 소리를 치던 그의 모습이
오래 전 즐겨 보던 비디오테잎을 보다가 정지 시킨 화면처럼 굳어져 있었다.
웃는 모습을 보기란 수 많은 풀잎 들 속에서 네잎크로버를 찾기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려운 일 이었기에.
“어떡하지, 어쩌지 연희야?
나, 그사람 정말 안 오면… 그러면 어떻하지?”
“바보야. 이 바보야…….”
무섭고 시리게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동료의 손을 놓아버린 것처럼
돌아온다고 말했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아 다급해져 우는 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수연을 연희가 말 없이 감싸왔다.
등에서 느껴지는 그 온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한 참을 그렇게 울기만 하는 수연이었다.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아니, 조금만 덜 사랑할걸 그랬어요.
정말 나쁜 여자한테 잔인할 정도로 마음을 다치면,
그땐 나한테 와줄까요. 그땐, 내 이름 불러줄까요.’
*
늦가을의 밤이라 그런지 강변의 바람은 꾀나 쌀쌀했다.
반쯤 바랜 푸른색 글자로 프린트 되어 병원의 이름이 찍힌 하얀 옷 위에
급히 나오느라 미처 챙기지 못해 연희 옷을 빌려 입은 회색 가디건의 옷자락이
살짝 살짝 흔들렸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도 간질이며 콧등을 스치는 것 조차
의미가 없다는 듯 수연은 검게 그을린 강을 바라보았다.
그저 강이 보고 싶기에 조용한 곳에 오고 싶어 연희를 졸라
기어코 안 된다며 허락해주지 않는 간호사를 간신히 꼬득여 두시간의 텀을 낸 것이었다.
그 조차 주지 않는 것이라며 생색을 있는 대로 내는 간호사를 욕하는 연희의 표정엔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 외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좀, 쌀쌀하다. 뭐 따뜻한 거라도 사올게. 여기 있어.”
복잡하게 미로처럼 얽혀버린 시장 통에 어린 아이를 달래 듯 연희의 목소리는
강물과도 같이 잔잔했다.
가을밤을 보러 나온 사람들의 속으로 어느새 섞여 버린
연희의 뒷모습을 잠시나마 바라보다가 수연이 시선을 다시 옮겼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외려 저 사람들 속에 그가 나를 보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찰칵-.’
짧은 셔터음의 끝으로 두 번의 밝은 빛이 수연을 감쌌고,
그 갑작스러움에 얼굴이 일그러진 수연이 제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서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가만있는 사람의 모습을 찍었다는
죄책감 하나 없이 밝게 웃어보이던 남자가 가만히 수연의 곁에 와서 섰다.
“안녕하세요?”
그 짧은 한마디에 수연은 짜증이 묻어진 눈빛으로 그 남자를 흘겨보았다.
제법 값나가 보이는 카메라를 목에 건 채 아직 춥지도 않은 가을인데
두터운 외투를 겹겹 껴입어 둔하게만 보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 그냥 기자인데요. 뭐 기사에 실을 건 아니지만,
사진 찍는 게 취미라서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하구요. ”
아무 것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실실 웃는 그의 모습이 바보같다는 것 외에.
직설적인 수연이기에 그의 그런 모습이 꼭 유아 프로그램에 나오는
방긋방긋 웃는 햇님의 모습과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를 참은 수연이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레 손을 내미는 수연의 행동에
그가 잠시 주춤 하더니 익숙한 일이라는 듯 지갑을 꺼내들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내밀려 할 때였다.
“아, 뭐 대단한 직업은 아니고요.
작은 신문사에서 기자 일을 하고 있…”
“말고, 뿌꾸있어요?”
“네?”
“담배 있냐고요.”
기자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 였기에 반듯하게 펴진 명함을 내밀었을 때
그런 그의 손의 위로 다시 수연이 손짓으로 담배를 요구했다.
지갑을 꺼내느라 반쯤 보여지는 담배로 이미 수연의 시선은 머물러 있었다.
멋쩍은 듯 실 웃음을 지어보이며 담배 갑을 열어 한 개피를 꺼내 수연의 손에 건넨 후
몇 초가 흘렀는데도 수연은 손에 쥐어진 담배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아, 좀 여자들이 별로 안 피는 종류죠?”
차갑게 흐르는 정적을 깨려 머쓱한 한마디를 내뱉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연이 담배를 반으로 뚝 잘라 버렸다.
그 모습에 당황한 남자가 수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필터를 입에 물며 입을 열었다.
“물고만 있으라고요? 불 안줘요?”
아차! 하며 급히 라이터를 꺼내드는 남자의 손으로부터
라이터를 낚아 챈 수연이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들이마신 숨을 내뱉으며
잔뜩 빈정 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센스 없어 진짜.
누가 보면 한국사람 사망률 90프로가 얼어 죽는 줄 알겠네.”
<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 그 기억의 처음으로 당신을 불러봅니다 >
- 미 행 尾 行 -
첫댓글 오, 저 사진기자.....ㅋ 잘 보고 갑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재밌어요. 너무 기대됩니당..^^ 에즈원 노래랑도 잘어울리는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