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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은 요하 동쪽을 가리킨다. 지금은 중국 영토지만 고조선과 부여를 거쳐 고구려시대에는 우리 땅이었다. 한때는 요서도 우리 땅이었다.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시대에도 요동은 우리 한민족의 땅이었다. 그러나 서기 926년에 발해가 망한 이후 1,000년이 넘도록 단군의 자손,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인 우리는 찾아가 볼 길이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있었던 고수전쟁이나 고당전쟁 같은 역사적 대사건과 을지문덕․강이식․연개소문․양만춘․수문제․수양제․당태종 같은 인물들에 얽힌 대부분의 이야기도 오래도록 잊혀져왔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서에 나오니 그 이름이라도 전해왔지만, 연수영은 사정이 달랐다.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연수영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지 1,400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가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무상한 세월의 흐름에 밀려 망각의 바다로 아주 가버린 것은 아니었다. 고당전쟁 당시 그녀가 활약하던 요동 땅 곳곳에 전설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었다. 『서곽잡록』과 『비망열기』같은 야사집에도 들어 있었다. 전설뿐만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도 살아남았다. 그녀의 이름이 1,400년의 두터운 세월의 장막을 뚫고 부활한 것은 그녀의 이름과 자취가 새겨진 이들 비석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 비석을 새겨서 후세에 남긴 사람들은 시기적으로 볼 때 고구려의 후예 발해 사람들로 추정된다. 발해인들이 연수영의 숨결과 자취가 서린 요동반도 곳곳에 그녀의 위업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서 남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중국의 역대 사가들이 애써 감추려 했던 고구려 수군 대장 연수영의 이름, 그리고 고당전쟁 당시 고구려 수군의 눈부신 활약상과 당 수군의 기막힌 패전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당전쟁 당시 최전방 격전지인 건안성 인근 청석관 유적에서 연개소문과 연수영(연개소정) 남매와 관련된 비문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1930년대에 요녕성 개주 현장(縣長)을 지낸 신광서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때였고, 항일전쟁 중이었으므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60년에 들어서 비사성 등의 발굴을 계기로 요동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하였다.
1970년에는 고당전쟁 당시 해전의 격전장이던 요동반도 남해안의 벽류하 상류 성산산성(석성)과 외패산성(오고성), 장해군도와 묘도열도의 유적이 줄줄이 발굴되었다. 중국학자들의 청석관 유적 연구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중국학계의 동향과 더불어 연수영의 이름도 우리 학계에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몇몇 사학자도 심양과 금주 등 요동의 현지로 찾아가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관련 유물과 유적을 독점하고 있는 중국 측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발굴된 비석은커녕 탁본조차 중국 당국의 철저한 비공개로 접근할 수 없으니 연구가 제대로 될 턱이 만무했다. 현지에 가서 현장을 답사하고 돌아온 일부 학자가 연수영의 이야기를 전했지만 연수영은 전설 이상의 신빙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학자로 가장 먼저 건안성과 청석관 일대 연수영의 유적을 답사하고 비석의 사본 일부를 구해온 이는 고구려사 연구가인 한민족역사연구소 김금중(金錦中) 소장으로 알려졌다. 그는 1995년 여름에 청석관 유적에서 최초로 연수영 관련 비석을 발굴했다고 한다. 이어서 당시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경대 서길수(徐吉洙) 교수, 고구려 해양사를 연구한 동국대 윤명철(尹明喆) 교수 등이 현장을 답사했는데, 현장에 서 있는 것은 중국 측에 의해 새로 세워진 안내판에 불과했다고 한다. 내용도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전설이 있다는 식이었다.
김금중 교수는 2006년에 펴낸 요동 답사기 『동방의 빛 고구려』에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했다.
1995년 네 번째 요동 답사 때 발해대학 한창희 교수와 함께 청석관 유적에서 연개소문 남매의 설화가 새겨진 비석을 발굴했는데, 그 비석은 앞서 언급한 만주국(1934~1945년) 시절 개주 현장을 지낸 신광서가 세운 청석관고비중수비(靑石關古碑重修碑)였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 판독하기 어렵지만, 비석 앞면 상부에 ‘만고유방(萬古流芳:만고에 빛나리)’이란 넉 자 외에 청석관이 고당전쟁의 전적지로서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지시에 따라 그의 여동생 연개소정이 쌓고 지키던 곳이며, 당나라 장수 설인귀와 싸운 내력 등이 새겨져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 새 국가(만주국)의 영광이다. 강덕(康德) 원년(1934년) 8월 3일 현장 신광서’로 끝났다고 한다.
김금중 교수는 그때 청석관 서쪽 비운채(飛雲寨) 남쪽 우우산 기슭에 연개소정의 무덤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서 교수는 그때 인근 사람들을 품삯을 주고 사서 땅속에 파묻힌 이 비석을 발굴하여 깨끗이 닦고 잘 세워놓았는데 2004년에 현지를 다시 가서 보니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는 것이다.
같은 책을 보면 요동의 옛 고구려 성 가운데는 연개소문과 연수영의 전설이 서린 곳이 많다고 한다. 특히 봉황성에는 연소정이 누각 위에서 머리를 빗고 있다가 연개소문이 설인귀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나머지 빗을 떨어뜨렸고, 비탄을 견디지 못해 누각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전설도 서려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중국인들이 꾸며낸 ‘진짜’ 전설에 불과하다.
이런 전설은 많다. 지금도 고구려의 크고 작은 성들이 있던 요동지방에 가면 여러 곳에 연개소문과 연수영의 전설이 생생하게 서려 있다. 특히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가 머물던 곳에서는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이라도 이세민보다는 연개소문을 신장(神將)처럼 추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2004년 11월 27일자와 12월 4일자와 「료녕신문」에 실린 기사 두 건이 이런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료녕신문」은 중국 요녕성 심양시에서 한글로 발간하며, 당시의 기사 제목은 ‘개주시 옛 건안성과 청석관’, ‘연개소문과 연개소정에 대한 전설이야기’로서 료녕신문 윤재윤 기자와 김상곤 씨가 썼다.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 개주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 얽힌 전설을 한두 가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개주시 청석령진 고려성촌에 고구려의 건안성(고려성산성)이 있었는데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발해를 통해 쳐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연개소문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 설인귀가 공격하여 마침내 성을 함락시켰다….
연개소문을 중국의 일부 사서에서는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했지만 이곳에서는 마치 신처럼 받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수염을 보기 좋게 길렀으며, 두 어깨에는 늘 두 자루 칼과 활을 메고 다녔다. 연개소문이 칼을 쓸 때는 공중에서 번개처럼 휘둘렀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으며, 말을 달리면서 쏘아도 백발백중의 신궁(神弓)이었다. 그는 무예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도 명필이었고, 천문지리에도 통달했다고 한다. 마을노인들은 연개소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마치 자신이 직접 본 듯이 묘사하며, 그와 같은 뛰어난 장수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
이번에는 연개소정, 즉 연수영에 관한 전설이다.
- 고려성촌에서 대련-하얼빈도로를 넘어 서북쪽으로 약 1킬로미터쯤 떨어진 비운채라는 큰 마을이 있다. 이곳은 1,400년 전 고구려군의 기병연마장이었다고 전한다. 고당전쟁 당시 평곽성과 건안성이 당군에게 함락되고 연개소문이 도망치자 그의 애첩인 마비운도 달아나다가 당군에 잡혀 죽었는데 비운채라는 마을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 연개소문은 건안성을 지키면서 그의 여동생 연개소정에게 비운채에 거주하면서 청석관을 지키게 했다. 개소정은 무예가 출중했고. 특히 비도(飛刀)를 잘 날렸는데 백보 거리에서는 백발백중이었다.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청석관을 공격하자 개소정이 뛰어나와 설인귀와 접전을 벌였다. 수십 합을 겨루자 개소정은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것이 유인책인 줄 모르고 뒤쫓던 설인귀는 말과 함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개소정은 설인귀에게 항복하여 이곳에서 함께 살 것을 권했다. 설인귀는 거짓으로 응하고 개소정에게 술을 잔뜩 권해 취하게 한 뒤 죽여 버리고 곧장 청석관을 점령했다. 청석관과 비운채가 함락되고 개소정이 죽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연개소문은 건안성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개소정이 죽은 뒤 설인귀는 그녀의 시체를 청석관 부근 우우산 양지쪽 비탈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개평현 향토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비운채 남쪽 비탈 밭에 봉분 하나가 있었는데 봉분 남쪽에는 약 3척 높이의 윗부분이 둥근 비석이 있다. 개소정의 묘라고 전하는 이 묘지는 문혁(文革) 때 평분운동을 하면서 트랙터로 밀어버렸다. 비석은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행방불명이다.’ -
나의 장편역사소설 <연수영> 제2장 요동 편에서도 묘사했지만 사서에 연개소문이 영류왕 때 요동에서 천리장성 축성공사를 했고, 다른 비문의 발췌본에 따르면 연수영이 소형(小兄)으로 청석관을 지켰으며, 이세민이 패주할 때 연개소문이 정예군을 이끌고 추격전을 펼쳤다는 기록을 볼 때 연개소문 남매가 건안성과 청석관에 머문 것은 사실일 것이며, 이런 전설은 그때 비롯됐을 것이다.
이 구전설화의 내용을 볼 때 연수영과 설인귀의 싸움은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요택으로 퇴각할 때 시간을 벌기 위해 벌인 전투로 추측된다. 다만 연개소문이 설인귀에게 패했다거나, 연개소정(연수영)이 설인귀에게 잡혀 죽었다느니, 비운채 인근에 무덤이 있다느니 하는 전설도 날조된 허구에 불과하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 6월에 중국 측이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 동안 국내에선 연수영이건 연개소정이든 그 이름 자체도 인정하지 않다가 비로소 최소한의 관심이나마 표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국이 유네스코에 등록한 설명문 가운데 연개소문과 연수영에 관련된 전설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당의 해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모셔놓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내 학자 가운데 학술논문을 통해 연수영의 이름을 거론한 사람은 서길수 박사가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벽류하 유역의 고구려 산성」 중 ‘석성․위패산성’ 부분에서 소장루(梳妝樓)에서 발견된 비문과 관련해 일부를 인용한 것이 그것이다. 이 내용도 원래 비문이 아니라 근래 중국인들이 만들어 세운 안내판에서 발췌한 것이다.
서 박사는 ‘현지에서는 연개소문의 여동생이 쓰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현장에 설치한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고 한 뒤 이렇게 그 내용을 소개했다.
- 소장루는 길이와 너비가 모두 5m인 2층 누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자기 누이 개수영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연개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수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수 없기 때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연개수영은 문□ 군략 무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소장루도 날마다 군무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梳妝樓是一座長寬各五米的二層樓閣 相傳是盖蘇文爲其妹盖秀英所建 原樓閣不存 此爲復修 因是女將 不與其他將領同住內城 獨住此樓 盖秀英 文□武略武藝超凡 爲守城主將 故此梳妝樓也是處理日常軍務之要地) -
그리고 이어서 ‘소장루는 여자가 화장하던 누각이라는 뜻으로 여자 영웅이 등장하는 전설이다. 이와 같은 전설적 소장루는 위패산성에도 남아 있어 흥미롭기는 하지만 정사(正史)에 연개소문의 누이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장루 설은 전설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소장루는 석성뿐 아니라 이웃 오고성에도 있었지만 정사에 나오지 않으므로 연수영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중국 측의 관보 자료와 유네스코에 영문으로 기재된 등재자료의 내용을 살펴보자.
- 청석관 유적은 개주 현장이었던 신광서가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발굴 탐사하여 고려(고구려)의 관문임을 확인했다. 그곳에선 우물․난간․봉화대 등에서 이곳의 관문을 지켰던 연개수영(연수영)과 연개소정(연수진)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는 석각(비석, 금석문)이 발견됐다.
청석관은 고려 개모성의 배후를, 건안성의 전면을 방어하는 곳으로 고려가 멸망한 뒤인 668년부터 개주라고 불렀다가, 발해왕 대무예가 차지하여 진주라고 불렀다. 그 뒤 요가 차지하여 개주라고 불렀으며, 청조에 이르러 개평현으로 개칭했다가 다시 개주가 됐다.
(당) 태종이 고려의 연개소문을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요택으로 패주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이 안시성을 얻지 못하고, 고려 해군 장군 연수영이 해로를 막은 탓이었다. 퇴로가 막혀 요택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설인귀와 계필하력에게 각각 기병 1만을 주어 청석관을 치도록 했다.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추격하다 개모성 후방의 청석령이 공격을 받자 군사를 급히 빼고, 추격이 잠시 지체된다. 그것은 후방이 위험해지자 급하게 원군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 원군이 닿기도 전에 진영이 무너지게 생기자, 연개소문은 그의 여동생이자 고려의 해군 장군인 연개수영에게 가까운 거리에서 수천의 군사를 내어 전투를 벌이게 했다. 연개수영은 보기 3,000을 청석관에 보냈는데, 청석관과는 인연이 있었다. 스물세 살이던 고려 영류왕 21년(서기 638년), 소형 벼슬을 받아 천리장성을 쌓고, 관문을 수비하는 장수로 발탁되어 근무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연수영이 휘하 장수 고성운과 장운형과 함께 보기 3,000으로 계필하력의 기병 1만과 대적했다. 연개수영과 격전하던 계필하력은 청석령 부근에서 군사의 십중팔구를 잃고 도주하고, 설인귀는 연개수영과 격전하던 계필하력의 군사들이 궤멸하여 달아나자 양쪽에서 포위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는 군사를 건지고, 고려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허장성세를 부리다가 형세가 위급해져 금전산에서 매복했던 연개소정(연수진)에 의해 포위되었다.
설인귀는 살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하고 투항하였다. 연개수영이 평소 수전에서 큰 군공을 세워 군략과 지혜가 비범해 그녀의 손에 넘어가면, 살아날 가망이 없음이 우려되자 그녀에게 문초당하기 전에 달아날 궁리를 했다. 성정이 오만한 연개소정이 자신을 잡고 의기양양하자 설인귀는 기회를 엿보다가 연개소정과 술과 벌을 놓고 내기를 했다. 이기는 자는 술 먹고, 지는 자는 채찍으로 맞기로 했다. 연개소정이 이에 응해 자신은 술을 마시고 설인귀는 매를 맞았다. 개소정은 부하들이 장수가 전장에서 술을 계속 마시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지만, 승리감에 들뜬 나머지 이 충고를 듣지 않았다.
연개수영이 계필하력의 군사를 쫓아낸 뒤 청석령 부근의 진을 정비하고 연개소정에게 전황을 물었다. 소정이 언니를 골탕 먹이기 위해 ‘적군이 쳐들어와 상황이 안 좋으니 오라버니(연개소문)가 보낸 원군과 함께 빨리 오라’고 했다. 연개수영은 곧 군사를 이끌고 소정을 구원하기 위해 갔지만 허탕을 쳤다.
설인귀는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고 계속 맞으면서 연수진이 계속 술을 마시도록 만들었다. 허탕을 친 연수영의 군사와 연개소문의 군사들은 청석령 남쪽과 북쪽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설인귀는 기회를 잡아 연개소정을 기습 공격하여 붙잡았고, 군사들과 함께 기습하여 금전산의 진영을 마구 무너뜨렸다.
정신이 번쩍 난 연개소정은 설인귀에게 패해 부상을 입었고, 군사들이 혼란에 빠지자 연개수영과 연개소문에게 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또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전령이 핀잔을 받았다. 그러다 불길이 솟고 금전산 진영이 무너지자 연개수영이 날랜 군사 1,000명을 보냈다. 소정은 군사를 모아 설인귀에게 대항했으나 비운채에서 100명이 넘는 군사를 잃고 우왕좌왕했다. 설인귀는 도주하고, 소정은 비운채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 -
이런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보면 청석관에서 신광서가 발굴한 최초의 원본은 중국정부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중국에서 입수한 자료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기에 소개한다. 벽류하 상류 석성 점장대의 비문 일부다.
- 3년 을사〔645년〕 봄 3월, 당 매괴왕 이세민이 수륙 105만 병사로 요동지역을 침범했다. 비사성의 성주 우소가… 묘도로 출병했다. 석성도사 연수영이 이르기를, 출병하여 가는 길이 역류가 일고 군선이 뒤집히니 출병은 옳지 않다. 또 묘도는 적지이며 적세가 강하니 출병은 불가하다. 그러나 우소부는 이에 따르지 않고 묘도로 병사를 보냈다. 결국 역풍이 불어 군선이 부서지고, 묘도에서 적을 만났다. 적장 장량은 기다렸다가 사방에서 공격해왔고, 형세가 매우 위급해져 대다수 군사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연수영이 곧 수군을 이끌고 나가 구원을….
(三年乙巳 春三月 唐埋魁王李世民 水陸一百五萬之兵 侵入遼東界 卑沙城之城主 于炤□ □□□□ 出兵妙島 石城道使淵秀英之請爲 曰 行路出兵爲的中 逆流澐之軍船顚覆 出兵不可 又□□ 妙島之敵地 敵地强勢 出兵不可 于炤夫不從强遣之 兵至妙島境 逆風軍船破 妙島相遇 敵將張亮俟四方合戰 形勢危急 兵斬煞蕩盡也 淵秀英之 水軍救援出兵爲 □□□□) -
이번에는 신광서가 확보했던 석성 인근 오고성(위패산성)의 비문 일부를 보자.
- 이때 연정토가 갑자기 수군장군이 되었다. 관민이 근심하고, 불만이 컸으며 고성운․온사문․장운형 등은 병이 나고 말았다. 정토가 공과 벼슬을 탐내 군주 자리를 얻고자 다른 남매 수영을 참소하여 수영을 부여성으로 유배를 보냈다.
개화 7년 봄 2월….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공격했다. 그는 우리의 보병, 기병 5,000명과 역산에서 조우하여 우리 군사를 이겼다. 그날 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신감의 배를 습격하다가 신감의 복병이 출동하여 패배했다.
(時淵靜土驟登水軍將軍 官民憂懣 高成雲溫沙文張熉炯等發病 靜土貪公官位取大軍主 異妹秀英讒簒秀英夫餘于串 開化七年春二月 水軍軍主靜土自新城道下磨米城泛海唐來擊攻浹亮谷 多所疑忌不克形勢危急 唐將古神感攻奔走卑沙城北離軍 溫沙文高成雲等邀唐奴浹亮谷 形勢不利力戰敗之…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戰於易山破之其夜 我軍萬餘人襲神感舡 神感伏發乃敗) -
한편, 비사성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 …태왕 4년(645년) 8월 15일 수군 군주 연수영은 당과 싸우기 위해 비밀리에 출전을 명해 병선을 움직였다. 적은 10만 대군에 1,000 척이 넘는 배로 오고 있었다.… 대장산도에서 흑산도까지 난전에 난전을 거듭하여 서로를 죽였다. 그 결과 당병은 5만이나 죽고, 남은 배는 수백 척에 불과했다.…(원문 생략). -
또 한편, 오고성에서 발굴된 비석은 연수영의 최후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 개화(開化) 12년 신해 8월 태대형 연정토, 을상 선도해, 대신 계진 등이 태대사자 연수영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참소하니 태왕도 연수영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태왕이 고심하다가 태대사자 연수영을 파면했다. 풍문에는 연수영이 반역을 꾀했다는 참소로 사사되었다고도 하고, 전리로 방출되어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나라사람들은 연수영의 무죄를 믿었기에 이를 매우 통탄했다…(원문 생략) -
개화는 보장왕의 연호로 보이는데, 보장왕 12년은 653년으로 계축년이고, 신해년은 651년이다. 이 정도로 이야기해도 여전히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수영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정말 곤란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중국 측이 청석관에 이어 비사성과 석성과 오고성 등 다른 연수영 관련 유적지를 잇달아 유네스코에 등록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결국 동북공정의 또 다른 형태인 해양공정을 위해서다. 중국이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데 이어, 연수영의 사적인 청석관을 일방적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또 다른 유적지들을 등록하려는 시도는 한중 역사전쟁에서 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다. 그 와중에 우리 고대사 최초의 여걸이며, 고구려 최초의 여장(女將)인 연수영은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 ‘중국 변방 소수민족 조선족’ 사람이 될 위기에 빠졌다.
중국이 연개소문이나 연수영을 고구려의 인물로 인정하여 그들의 숨결과 자취가 서린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할 것으로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중국 땅에 있으니 연개소문도 연수영도 ‘중국 변방 지방정권 고려’의 인물로 만들려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손자,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의 경우 우리가 그의 묘지석 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삼국사기』와 『당서』 등에 나온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반면 연수영이나 고원부나 고량 같은 사람은 비석이 나오고 그 존재가 새롭게 알려져도 정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존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 학계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중국학자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원래 비문에 없던 내용을 날조하여 유네스코에 등록해도 좋다는 말인가. 이를테면 설인귀가 연개소문을 패퇴시켰다든지, 연수진을 죽이고, 그 긴박한 전쟁 중에도 시체를 묻어주었단 허튼소리도 모두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야 하는가 말이다.
그리고 유네스코 등록 작업을 위해 고구려 최고의 수군 요충이던 비사성도 박작성처럼 중국식 성벽으로 개조 중이라고 한다. 일부는 이미 유네스코에 등재됐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비사성의 유래 소개에 이어, ‘고려의 해군 장군 연수영이 645년 8월 15일에서 29일까지 약 보름간 장산군도에서 대 해전을 벌여 당군을 이겼다’는 내용이라고 전한다. 당군은 10만 명 또는 7만 8,000명으로 묘사했고, 고구려 수군은 1만 8,000명에서 2만 5,000명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한편, 장해도의 석성(성산산성)도 현재 유네스코 등록 절차를 밟고 있는데, 성벽은 이미 등록이 완료됐다고 전한다.
중국학자들이 무슨 까닭에 이처럼 고구려의 대승과 당군의 참패를 인정하고 나올까.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지방정권’이고, 고구려인들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기에 이런 기술(記述)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하는 해양공정의 정체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증주의의 탈을 쓰고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탈취 기도에 여전히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또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이제 민족이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민족적 자존심도 주체성도 없는 일부 사학자가 여전히 강단에서 활개 치는 사실도 참으로 개탄스럽다.
근래 들어 중국이 만리장성의 길이를 계속 늘이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 고대사를 탈취하려는 역사공정의 연장이다. 그동안 만리장성은 하북성 진황도시의 산해관에서 감숙성 가욕관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런 통설을 뒤집고 만리장성 동단을 산해관이 아니라 압록강 하구인 요녕성 단동시 호산(虎山)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호산산성은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중국은 호산산성을 만리장성의 기점으로 만들기 위해 산성을 중국식으로 증축하고, 역사박물관을 신축하면서 기존의 고구려시대 박작성 유적을 대거 훼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중국은 이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단동보다 훨씬 동쪽인 길림성 통화현에서 만리장성 유적을 발견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 졸본성과 국내성 코앞까지 만리장성이 늘어서 있었다는 황당무계한 헛소리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역사지도집’은 만리장성 동단을 한반도 내륙으로 그려놓았다. 또 웬만한 박물관 지도에도 만리장성 동단을 황해도로 그려놓고 있으니 이처럼 터무니없는 일도 없다. 이런 사태의 밑바닥에는 이런 빌미를 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신채호(申采浩)와 정인보(鄭寅普)가 없으니 사학계의 태두 자리를 차지하고 단군과 고조선도 부정하던 자와 그 제자들이다.
중국이 이처럼 끊임없이 만리장성 동단을 늘이는 저의는 결국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의 영토였던 요서․요동․만주가 모두 중국의 영토였고, 이 땅에 세워졌던 나라는 모두가‘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란 날조된 궤변 망언을 강조하려는 데 있다. 중국의 우리 고대사 왜곡과 탈취 기도는 거의 편집증적이다. 고구려․발해사 왜곡도 모자라 이제는 고조선․부여사까지 중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동북아 고대문명 전체를 중국사의 일부로 둔갑시키려는 것이다.
중국이 이토록 집요하게 황당무계한 역사 왜곡과 날조를 자행하는 근본 원인은 중국사의 뿌리가 한국사보다도 짧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중국사의 시원(始原)은 황하문명설이 주류로 자리잡아왔었다. 그러나 지난 1980년대부터 발해만․요하 유역에서 기원전 7,000~1,500년의 신석기․청동기유적이 대거 발굴되었는데, 빗살무늬토기․비파형청동검 등 고조선문명의 대표적 특징인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측이 위기를 느낀 것은 기원전 1,700~1,100년대의 은허(殷墟) 유적보다 훨씬 오래 전의 갑골문(甲骨文)이 바로 이 지역에서 출토된 사실이다. 이는 고조선의 발해만․요하문명이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앞섰다는 움직일 수 없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일부 학자가 ‘단군신화는 중국 황제족(黃帝族)의 곰 토템 신화에서 비롯됐다’는 허황한 주장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중국이 고대사 왜곡 날조와 탈취에 집착하는 데에는 중국사를 돌이켜볼 때 한족(漢族)의 역사는 별 볼일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족이 세운 나라는 한(漢), 그리고 동진(東晋) 이후 송(宋)과 명(明)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나라 역사가 중국사의 일부라면서 몽골의 영웅 칭기즈칸을 중국인으로 둔갑시킨 게 아닌가.
중국이 자기 땅에 있던 나라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라고 강변하는데 우리라고 해서 중국사의 뿌리는 고조선사라고 당당히 주장하지 못할 것도 없다. 고조선의 발해만․요하문명이야 말로 황하문명보다 천년이나 앞선 고대문명이 아닌가.
중원을 차지했던 원나라의 몽골족, 요나라의 거란족, 금나라와 청나라의 여진족의 뿌리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 그렇다! 따라서 우리도 요․금․원․청의 역사는 고조선 역사의 연장이고,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왜곡․날조의 밑바닥에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주변국은 모두 오랑캐라는 오만방자한 중화사상과 역사패권주의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표출하는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에 대해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되겠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계속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길밖에는 없다. 영어교육에 기울이는 열성의 절반이라도 역사교육에 쏟아보라.
우리 사학자들은 이제 융통성 없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사서에 안 나온다고 무조건 무시하고 깔아뭉개지 말고, 전설이나 구전설화에 불과하더라도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로 망각의 세월 깊이 파묻힌 역사의 진실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학문에는 국경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이제는 중국학자들만 연수영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적인 해전사 연구가들이 연수영의 출중한 리더십, 탁월했던 전략, 전무후무한 위업을 연구하며 찬탄하고 있다고 한다. 형편이 이러함에도 연수영을 계속해서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장수로 내버려둘 것인가.
첫댓글 눈이 아파서 글을 못읽겠습니다.
다른 것은 차지하고 요 금 청등의 기원을 단군조선에서 찾는 것은 일종의 대민족주의가 아닌지 의심스럽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곳 카페의 성향과 같이 고구려사에 대한 매우 애착을 가지신 분으로 아는데 왠 뜬금없는 부정적인 민족주의?????
제가 연수영 작가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민족주의자란 말씀은 듣기 거북하군요.
하균횽을내작품에님과 삼한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평해거사님// 다소 제 발언이 거슬리셨다니 죄송합니다. 이 글에서 조금은 자민족 중심주의로 치우친 감이 느껴져 그렇게 표현했지만 제가 봐도 말이 격하긴 했군요. 다만 만주족을 우리와 같은 뿌리로 볼 수 있는지는 저는 의문입니다. 진수의 삼국지를 보더라도 우선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 문화도 전혀 동질적인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런 발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금,청의 기원을 단군조선에서 찾는 것은 무리입니다. 고조선은 만주에서 요동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해서 만주 사회에 영향력이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요는 동호계의 거란,금은 숙신계의 여진에서 나온겁니다. 그리고 동호계,숙신계는 시작부터 예맥계와 다른 민족으로 시작했습니다. 숙신계의 경우 흑룡강 하구에서 두만강 하구까지 끊임없이 남하하며 예맥계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에 예맥계와 가깝다고 느껴질만 하긴 합니다만... 끝까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고수했습니다.
근데 이 글은 왜 검은색 바탕이 들어가 있습니까? 쥬르센님말씀대로 눈 아파요.
중국에서 8년째, 아무리 보고.듣고.말을해도 이곳에서는 배울게 없다는 결론,
고당전쟁의 전황(날짜 등등)이 세세히 적힌 연수영 관련 사료는 어디에서 볼 수 있으며, 그 비문은 현재 검증이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