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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발병
"아부지 나 죽소잉! 어이구 배야! 어이구우우-" 아이를 트는 아낙처럼 누군가가 계속하여 소리를 질렀다. 분명 사내의 음성이긴 했지만. "어이구우-속절없이 죽네요오! 어이구 배야! 어국-" '아니 저거는 주갑이 소리 아니가? 어디서 또 진탕 마싰구나. 빌어묵을 자석. 헌데 내 팔은 와 이리 천근겉이 무겁노?' "아부지이! 갑이놈 정녕 죽을 것인개비여? 고향산천도 못 보고 늙으신 아, 아부지 얼굴도 못 보고오 씨종자 하나 없이 객사 죽음이라, 어이구 몽다리귀신 되야 물밥 한술 못 먹고 불쌍한 혼백이 처처를 헤맬 것인디 분하고 억울하야 참말 눈을 못 감겠으라우! 어이구 배야! 어구구!" '지랄하네. 또 지랄해.' 용이는 눈을 떴다. 꿈은 아니었다. 육중한 무게가 오른팔을 짓누르고 있었다. 임이네의 무거운 머리통이었다. 신음은 옆방에서 들려오고, "제에기!" 용이는 화가 나서 왼팔로 임이네를 떠밀어낸다. '미븐 강아지 웃주둥에 똥 싼다 카더마는,' 임이네는 입맛을 다시며 잠꼬대하듯 중얼중얼거린다. "어이구, 어이구 배야!" 용이 벌떡 일어나면서 "보래!" 임이네를 흔들어 깨운다. "와요!" 잠은 임이네가 먼저 깨어 있었던 눈치다. "썩은 나무둥지맨치로 떠덩구칠 때는 언제고 깨우기는 와 깨우요." 판자 덧문에 가려 달빛도 막힌 방안은 굴간처럼 칠흑이다. 용이는 바짓말을 치키며 "주서방이 벵난 모양이다." "..." "어서 일어나라고," "이 밤중에 벵이 난들 우짤 기요? 나는 의원 아닌께." 돌아눕는다. "소가지도," 하다 말고 주갑이 신음 소리에 용이는 허둥지둥 방문을 떼민다. 달빛이 소나기처럼 방안에 들친다. 서늘한 야기가 밀려들어온다. "주갑이! 와 그라제?" "어이구 배야! 성님 나 죽소! 창자가 막 터지는 것 같소. 어이구, 이게 무슨 날벼락이랑가?" "곽란이까?" 방안으로 들어간 용이는 등잔에 불을 켜 대고서 방문을 닫는다. "아니, 이땀 좀 보게?" 산발한 머리칼이 엉겨붙은 주갑의 얼굴은 땀에 흠신 젖어 있었다. 새우처럼 모로 꾸부리 고 누운 주갑은 연신 허위적거린다. "이럴 기이 아니라 좀 주물러보자." "주물러서 나을 벵 아닌 성싶소. 어이구 배야! 서, 성님 이러크름 아픈디 어디 살겄으라우? 어이구 배야!" "아프다고 관대로 죽나? 배나 한분 주물러보자." "아, 아니여라우," 용이 손을 뿌리치고 주갑이는 데굴제굴 구르며 벽에 가서 꽝 부딪는다. "허 참, 그라믄 객구나 한분 물리보까?" "객구나 손구나 무슨 소용 있을랍디여? 그보다도 성님." "..." "나 죽거들랑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미친 소리 마라!" "머리털 한 줌 짤라서 향여 늙으신 울 마부지 만내시면은 날 본 듯이 으흐흐흣흣... 어이구우 으흐흣..." "허허어, 와 이리 청승이고. 아프다고 저저이 다 죽었으믄 세상에 사람 씨나 남었겄나. 그만 시끄럽다. 가서 내 영팔이를 깨워 올 긴께 좀 참아봐라." 용이는 급히 방을 나섰다. 신발을 찾아 신으며 "봐라! 임아!" "..." "좀 일어나서 토장물 맨들고, 사램이 아파서 죽는다 산다 하는데 처자빠져서," 그러나 임이네는 못 들은 척 '내 그럴 줄 알았지. 게걸든 거맨치로 뒤져서 그걸 다 처묵었이니 소배지가 아닌 다음에야, 물독다, 둘독해.' 이불자락을 끌어당기며 두 다리를 쭉 뻗는다. '꼴에 꼴방망이 차고 남해 노량 간다 카더마는 제집 천신도 못하는 주제에 머 우쩌고 우때? 성님, 성님은 다 좋은데 단이 없어야. 합당허지 않으면은 부모 자식도 딱 의절을 하는 법인디 그까짓 제집, 나 겉으면은 벌시 옛날 고릿적에, 아 그까짓 되놈한테나 주어버맀일 것이요잉, 급살해 뒤질놈의 인사, 그눔의 인사가 뒤져도 큰일이제? 송장 치다꺼리는 누가 할 기며?' 임이네는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팔자 사나운 년은 간데쪽쪽, 빌어묵을, 한 나이나 젊었이믄 청국놈 첩이나 돼서 호강이나 하제. 이 세상에 내 일신 하나뿐 자식이고 소나아고 다 소용없다. 무신 소용 있노.' 용이는 등을 꾸부리고 영팔이네를 향해 급히 걷고 있었다. "환장하게도 밝다! 어이구우!" 끝없이 펼처진 것 같은 들판은 한낮처럼 밝았다. 멀리 멀리 저승 골짜기까지 이어지는가 싶게. "그자가 지 말대로 죽지나 않을란가?" 영팔이 집 큰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영팔이!" 큰방 문이 열렸다. "이 밤중에 웬일입니까?" 판술네가 내다보며 말했다. 기화, 임이도 얼굴을 내민다. 그들은 잠들지 않았고 밤 깊은 줄 모르게 얘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서방이 다 죽게 생깄소. 영팔이가 객구나 한분 물리봤이믄 싶어서." "이 밤중에 큰일났구나. 보소 ! 판술아배요!" 판술네가 작은방으로 건너가서 남정네를 깨우는데 "어이구 참, 노대인댁에 의원이 한 사람 와 있다 카든데," 임이가 높은 목정으로 말했다. 용이는 임이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니는 와 여기 와 있노. 밤 가는 줄 모르나?" 나무란다. "우짭니까 구야아배기 막 때리직일라 카는데, 피신 안 왔십니까. 멧돼지맨크로 한분 성이 나믄 물불을 안 가린깨 집에 있다가는 맞아죽십니다." "니 행사가 좋음사? 찬물 마시고 속 채리야 할 기다." "누가 살고 저버 사는 죽 압니까 짝도 거이방해야," 뾰루퉁한다. "주서방이 아프다구?" 잠이 덜 깨어 눈을 비비며 영팔이 나온다. "가서 객구 좀 물리야겄다." 기화는 부엌바닥에 앉아 쇠고기볶음을 먹던 주갑이 생각이 나서 웃음이 치민다. 영팔이 임이를 보고 "아니 임이는 우얀 일고?" "피신왔십니다." "흠! 허서방도 사나아 구실 하는구마. 시작한 김에 다리몽댕이 딱 뿌질러 앉히잖고," 침을 퉤! 뱉는다. "어서 가자." 용이 재촛한다. "아이 참 내 정신 좀 봐. 노대인 집에 의원이 와 있다. 카든데 그라믄 거기 가보고 와야겄소." 그러나 두 사내는 임이 말은 들은 척하지 않는다. 삽짝을 나서면서 영팔이 "한 가랑이 두 다리 끼고 가볼 일이다, 제에기이." "아제는 내 말이라 카믄 자다가도 장대 즐고 나온다 카이." 하면서도 영팔이 말마따나 한 가랑이 두 다리 끼는 심정인지 임이는 사람이 아픈데 어쩔 거냐, 중얼거리며 밤길을 나갔다. "언제부터 저리 인정이 많아졌는고? 노대인 집만 아니었단 봐라, 숨이 넘어간다 캐도 갈기든가." 판술네 말이었다. "그래도 지 엄마보담은 독하진 않지요?" 기화 말에 "그건 그렇다. 칠칠치 않고 눈치코치 없고 제집치고는 파철이지마는 에미보다는 악기가 적은 편이지. 그나저나 주서방이 아파서 큰일이구마." "체했는가 부지요." 기화는 오갈솥을 안고 손가락으로 고깃덩이를 집어먹던 주갑이 꼴이 생각키어 웃음이 나올 것 같다. "밤이데 제집들이, 우우 몰리갈 수도 없고... 우리가 간다고 벵이 낫일 것도 아니겄고 큰일이구마." "임이 엄마하고는 새가 안 좋은가보든데," "앙숙이제. 하기야 임이네하고 잘 지낼 사람이 어디 있겄노. 건들건들하고 실없는 소릴 해싸아서 그렇지 주서방 그, 사람 좋네라." "예, 좋은 사람 같았어요." 기화는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봉순이 니 와 그리 웃어쌌노?" "내가 웃어요?" 용이 집에서는 한 바가지 토장물에 식은밥 한 덩이를 말아서 임이네가 들고 나왔고 마당에 끌려나온 마당에 끌려나온 주갑은 배를 움켜쥔 채 어이구 배야 어이구 배야! 영팔이는 식칼을 들고 서 있었다. "머하노? 어서 안 해오고," 용이 임이네를 노려보았다. "어디 몸뚱이 두 개요?" "악다구니는 무신 악다구니고 ! 사램이 아파서 죽겄는데." "내가 벵나라 캤소! 날 보고 와 이라요." "멋이!" "여 있소! 해갖고 왔는데 공연히 트집이네." 임이네는 토장물 든 바가지를 쑥 내민다. "아따 쌈은 나중에 하고," 영팔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고 주갑은 동헌 뜨락에 끌려나온 중죄인같이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연신 앓는 소리였다. 이때 삽짝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그의 뒤를 임이가 졸졸 따라들어왔다. "의원이 왔인께 객구는 나중에 물리이소!" 임이 언동은 전리품을 들고 오는 병사처럼 의기양양했다. "머라꼬?" 용이와 영팔이 동시에 말했고 주갑이 소리를 질렀다. "어이구! 의원님! 날 살려주시쇼!" "야아가? 니는 우짠 일고? 의원은 또 우찌 된 거며?" 임이네가 딸을 빤히 쳐다본다. "노대인 집에서, 나중에 얘기 다 하께요." 의원이 말했다. "예!" 영팔이와 용이 주갑의 겨드랑이를 잡고 두 다리를 떠메듯 급히 방안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용이는 등잔의 심지를 돋구었다. 의원은 신음을 참으며 땀을 흘리고 있는 주갑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두 사내는 장석같이 선 채 주갑을 내려다본다. 벽면에 비친 상투머리 그림자가 증잔불 따라 가늘게 흔들린다. 이윽고 의원은 염낭 속에서 침을 꺼내었다. 그리고 주갑의 손을 끌어당겨 엄지손가락 사이에 침을 꽂았다. 장골 두 사람은 숨을 마시듯 의원의 동작을 내려 다보았고 주갑은 눈알을 빙글빙글 돌렸다. 트림을 한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난다. "어, 어이구우 쬐깬 숨이 트이누마요잉." 의원은 다시 다른 쪽의 혈에다 침을 꽂았다. 주갑의 배에선 맹렬한 소리가 났다. 배에서뿐만 아니라 아래서도 방귀 소리가 연달아 났다. "어이구매 이자 살겄어라우!" "채했던가배요?" 용이 물었다. 의원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사관을 틀 것도 없구먼." 하며 침을 거두었다. "고맙구마이라우. 이 은혜를 워쩔 것이여?" 주갑은 벌떡일어나 앉으며 의원에게 절을 했다. "온 사람도," 용이는 어이없는 듯 웃었고 영팔이는 화난 음성으로 "넘은 십년감수 시켜놓고 지 혼자 멀쩡하네." "아, 아니랑께요. 내가 엄살부린 거 아니란 말시. 편작 겉은 선상님을 만냈인께로 씻은 돗," 비로소 용이와 영팔은 당황해 하며 의원에게 인사를 한다. "고맙십니다. 선상님." 의원은 빙그레 웃을 뿐이다. 머리는 깎았고 턱수염도 깎았는데 돋아나기 시작한 수염과 머리털은 반백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크고 꼬리가 긴 눈은 아주 유순해 보인다. "여기 오신 지 오래되셨소?" 묻는다. "오래됐다 할 수는 없고 조선서 온 지는 사오 년 되는가배요." 영팔가 대답한다. "음, 그러면...나는 여기서 자고 갔으면 갔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소?" "괜찮고말고요. 잠자리가 험해서, 노대인댁이," 용이 당황한다. 이부자리가 없다. "아무데나 자야 할 길손인데 청인보담이야 우리 동포 집이 마음은 편하겠소." "너무 누추해서," "나를 의원 대접 마시오. 한방을 좀 배우긴 했으나 장사꾼이오. 병자 옆에서 잠시 눈 붙였다가 떠날 테니까." "이거 황송무지하야 참말 워쩐디여잉?" 잠시 눈 붙였다가 떠날 거라 말한 의원은 잠잘 채비를 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영팔이와 용이 역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경청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헌디 떠나신다면 워디로 떠나실랑가요?" "해삼위로 가는 길이오." "아이구매 그런디 이러크름 생명의 은인 아니여라우? 성씨에 이름 함자라도 알아야 쓰질 않겄소잉?" "성은 강가요. 돌팔이의원 이름은 아나마나." "하, 지는 성이 주가구마요. 그런께로 주갑이고 여기 기신 성님은 이씨 성에 이름은 용이, 저기 저 성님은 김씨 성에다 영팔이여라우. 아따! 경상도내기 뚝뚝하다는 걸 모를까봐서 그러고 있소?" "무신 소릴 하노?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 카든 주둥이가, 어이구우 잘도 나불거린다." 모두 웃는다. "참말이여. 이런 경우를 두고 천행이라 하는 건디, 언제 그랬드냐, 날아보라면 날 것이여. 하하핫..." 말이 많아도 구수하고 능청스러웠는데 오늘 밤 주갑이는 적잖게 수다스럽다. 고통에서 벗어나 기뻐서도 그랬겠지만 낮에 기화에게 초라한 꼴을 보였을 때부터 주갑의 신경은 안정하질 못했던 것이다. 병의 원인을 알고 있는 만큼, 그것 때문에도 마음이 온전할 수 없었다. "체증이니 망정이지 창자라도 터졌더라면 별수없었지요. 양지바른 곳에 뭊힐 수밖에," "어이구 선상님 말심 낮추시쇼. 보니께 우리보담 한 돌금은 연세가 위실 텐디." "소년 대접이 어렵다오 그보다 사는 형편은 어떠시오?" "고생이지요." 영팔이 말했다. "경상도에서 어찌 여까지 오시었소? 혹 철도 공사." "아니여라우." 주갑이 손을 내저었다. "이 성님들은 의병질하다 쨏겨왔었지라우." "아아 그러시오?" "저 사람 말 믿지 마시이소. 허풍이 심해서, 저거들이 무신, 그런인야나 되겄십니까?" "허어, 사람은 첫눈에 면 안단 말씨. 걱정 안 혀도 좋겄구마. 철도 공사라면 이 주갑이 경우랑께요. 본시부텀 동학인디, 저이 부친을 말심드리잘 것 겉으면은 민란 때마다 앞장섰었지라우. 이 못난 자석이 속아서 왜놈 노가다 일을 하지 않았겄소! 천상 이리 되고 본께로 오랑캐 땅의 거름밖엔 될 게 없을 것이여." "그렇게 말한다면 다 마찬가지 아니겠소? 고생을 낙으로 삼고 살아야지. 당신네들 보기에는 염낭에 침이나 넣어 다닌다고 고생을 덜하려니,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은 다 마찬가지요. 이리 다니다가 밤이슬 맞으며 돌베개 하고 잠자는 것두 한두 번이 아니며 차마 말로는 다못할 고초가 있소이다. 또 나만 그렇다는 것도 아니오.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 마음가짐 아니고서는 하룬들 어디 부지하겠소? 오로지 나라 찾을 일심으로, 그게 또 보람 아니겠소? 우린 배부른 돼지는 될 수 없으니 말이오." "그, 그러니께 선상님께서는 독립운동," "독립운동이랄 것도 없고 내 마음이 그렇다는 얘기요." "암요, 암으니라우. 배부른 돼지는 될 수 없을 것이요, 사람인디." "나도 본시는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조실부모하고 서럽게 자랐소. 지금은 소싯적에 배운 한방으로 호구지책을 삼고는 있으나 한때, 기천 원 자본금으로 장사도 했소만 내 품 에 넣을 돈도 아니요, 그럴 시절도 아니잖소? 기천 원 아니라 기십만 원 기백만원인들 이 시국에 내 돈이거니 믿어서도 안 되고 양전옥답을 자손에게 물린다는 생각 자체가 욕스러운 것 아니겠소? 나라를 빼앗긴 못난 백성이 가산 지키기에 급급, 그게 얼마나 가겠느냐 그 말이오. 다만 자손들을 가르칠 일이오. 피가 나게 가르쳐 깨우쳐야 할 것이오, 내 나라를 잊지 않고 내 나라 찾을 길을. 장신들의 고생스러움이야 내 물으나마나 훤히 알고 있소이다. 제발 낙심 마시고 가난과 고통을 낙으로 삼으시오. 당신들은 순결합니다. 이렇게 다녀보면 입으로만 큰소리치면서 동가식 서가숙 하는, 일없는 무리들이 여간 많지 않소." "지가 바루 동가식 서가숙 하고 있구만이라우." 주갑이 풀죽은 말을 했다. 의원은 빙긋이 웃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마찬가지, 동가식 서가숙이오.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그야 이 몸도 남의 공밥은 안 먹은께로, 허기사 공밥도 쬐깬은 골통에 먹물이 들어야 흐흐흣... 안 그렇지라?" "얼씨구? 주갑이 신나누마." 장안에 웃음 소리가 터진다. 혈에다 침을 꽂아 기가 통하여 체증을 고치듯 사람들의 마음도 그 기가 통했음인지 한결 편안하고 비록 누추한 방이나마, 네 사람이 무릎을 맞댈 만큼 그득히 들어찬 방이나마 느긋한 여유가 감돈다. "참말로 이런 밤에 술이라도 있었이면은 얼매나 좋을까잉?"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는 얘기는 작년 이맘때쯤 했는지 모르겄네?" 시치미를 딱 떼고 하는 용이 말에 한바탕 웃음 소리다. "미련한 가람 객담 내놓을 것 겉으면은 참말이제 감당할 재간 없단게로. 그보담 선상님 술상은 없지만도 좋은 말심 더 듣고 저븐디," "내가 여기 오기론 작년, 재작년인데 당신들은 사오 년 나보다 선배구먼. 뿐이겠소? 왜놈들과 싸운 경력을 보나, 허허어헛..." "저이들이야 머, 눈먼 말이 요령 소리 듣고 따라간 기지요." "바로 그거요. 요령 소리 듣고 따라간다는 그것, 따라가는 백성이 많았으면 우릴 내 나라를 빼앗기진 않았을 게요. 오소리 감투가 둘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중간히 눈 밝은 자들이 큰일이라. 결국은 순결한 마음 순박한 열정만이 저어 수만 리 장천을 날으는 철새처럼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는 게요. 그리고 수만 리 장천같이 왜놈이 망하여 내 땅에서 물러가는 날도 멀고 험난하니 우리는 우리 당대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싸우다 죽으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독립 정신을 이어주어야 하고 양전옥답 물릴 어리석은 생각 말고 피땀나게 자손들을 가르쳐야 하는 게요. 내가 이런 얘길 하는 것은 밤이 길어서도 아니요 잠이 안 와서도 아니오. 이 얘기가 즉 내게는 일이란 말씀이오. 당신네들이 내 얘기를 듣고 자식을 가르치고 또 남에게도 그러기를 권하다면 나는 조그마한 씨알을 하나 뿌린 것이 될 것이오. 내가 만주 벌판 이곳 저곳 방황하며 침이나 찔러주고 약처방이나 지어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호구지책을 위한 그것만이라곤 할 수 없고 한푼이라도 교욱 사업에 보태 쓰자 그 심정인 만큼," 하는데 강의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헌디 지헌티는 그놈의 가르쳐볼 아들딸이란 게 없들 않겄어여? 철천지 한이구만이라우." 주갑은 영팔이를 바라보며 맥없이 말했다. "아들딸이란 반드시 내 아들딸만이겠소? 조선의 아들딸, 일꾼이면 모두 내 아들 내 딸이거니 생각해야, 가르친다는 것도 옛날같이 사서삼경을 외게 하는 그 따위는 아니지. 우선은 우리가 뒤진 신학문을 배우게 하는 거지만 그보다 근본을 가르쳐야, 근본이 뭔고 하니 애국애족하는 마음, 내 나라 내 겨레를 잊어서는 아니 되고 배반해서는 아니 되고 한길 한마음 빼앗긴 조국을 찾아야 한다, 그 근본을 심어주는 것이 가르치는 것 아니겠소. 그것은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도 누구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오. 낫 놓고 기격자 모르는 사람도 가르칠 수 있는 일이오. 고되다 하지 말고 서럽다 하지 말고 정직하게 부지런히 내가 조선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그게 다 교육이오 당신네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아지기 위해서는 내 자신 발바닥이 닳아빠지는 한이 있어도 만주 땅 상상 골골... 훌륭한 사람들도 많소. 왜놈이 먹어들어온다고 실망 마시오. 밀정놈들이 우글거린다고 겁낼 것 없고. 한겨울에 모포 한 장어깨에 둘러메고 내 겨레를 위해 뛰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시오." 밤 가는 줄 모르게 강의원은 나직한 음성으로 얘기를 했다. 그간 국내에서의 의병 종태에 관한 것으로부터 혁명이 일어난 청국의 사정도 알기 쉬운 말로 얘기해주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용이는 용정촌의 최서희가 이런 사람에게 군자금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연추에 있는 이동진의 청도 거절한 서희고 보면. "참말이여라우. 조선의 닭 돼지가 될지언정 어째 왜놈이 될까보냐, 그러크름 말심혔다니, 암이라우. 종자가 있는디 골백분 죽어도오 왜논 될 것이라? 그 의병장은 참말로 지당한 말씸 혔소. 조선 사람은 성씨도 안 바꾸는디," "하지마는 이곳에서는 청국 사람으로 넘어간 사램이 적잖다 카든데." 영팔이 강의원을 힐끔 살펴본다. 강의원은 가늘은 한숨을 내쉬었고 말은 없었다. "그거야 머 땅 때문이고 몇몇 사램이 그렇기 해주었으니 조선 사람이 땅을 가질 수 있는거 아니겄나." 1909년 청일간에 맺어진 소위 간도협약이라는 것에 의해 표면상으론 조선인의 토지소유권이 인정된 것이었으나 여전히 청국 관헌에서는 귀화하지 않는 조선인에게는 토지소유권을 인정치 않았느므로 결국 귀화치 않는 조선인 토지 소유자는 지방 주인이라 칭하는 귀화 조선인의 명의를 빌려 지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을 두고 한 용이 말이었다. "말하잘 것 같으면 정조를 팔아서 동포를 도와준다 그것인디, 어디 내실이 그렇단가? 횡폐가 여간 아니란 말 들었지야. 고런 놈 중에 친일파나 없었이면 쓰겄는디 아 용정촌에선 고놈의 앞잽이가 조선인 탈을 쓰고 내밀히 왜놈의 돈으로 땅을 산다 말시. 청국놈의 핍박이 심허다 혀도 그러나 대국 아니더라고? 나도 지금은 청인헌티 품팔일 허고 있지마는, 더럽다는 생각도 허지마는 그 따위 섬놈 들보담이사 나을 것이여. 가만히 본께로 청국 사람들은 우리 조선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이여. 성님 생각혀보더라고? 그 양가죽을 쓴 왜놈우 새끼들이 까매기 깐치 집 채듯이 남의 나라를 뺏아 들앉아서, 아 금매 성님 생각혀 보더라고? 그런 놈의 새끼들이 처국허고 시비만 헌달 것 겉으면 뭐이 워쩌고 워째야? 간도에 있는 조선 사람을 보호헌다? 참말로 웃일 일 아니랑가? 그건 그렇다 허고 따지고 보면은 억울한 일 한두 가질 것이여? 여그는 본시 우리 조상의 땅 아녀? 선상님 그렇지라우? 여그를, 칠칠헌 숲을 쳐헤치고 농토로 맨든 것도 조선 사람 아니여라우? 헌디 청인이 와서 내놔라! 허니 복통 칠 일이여. 그런 사연을 생각헌달 것 겉으면은 피눈물날 일이여. 허나 과서지사를 생각혀서 왜놈의 영사관으로 모일 것 이여? 싸가지없는 놈들! 옛말에 도둑을 피한께로 강도를 만낸다안 헙디여. 왜놈은 조선 삶 보호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허고 지각 없는 조선놈은 얼씨구 허고 늑대 품을 어미 젖줄 찾듯이 몰리가니 청국놈눈에 쌍심지 안 켜질 것이여?" 강의원은 다소 놀란 눈으로 주갑을 쳐다보고 있었다. 신이 난 주갑은 "내가 이래뵈야도 성님들맨크로 착하지는 안 혀요. 안 댕기본 데가 없인께로 보고 듣고 무식혀도 알 만치는 안단 말시. 일진회놈들 땀씨 속아도 보고오 왜놈우 새끼 거둥도 많이 봤이야! 결국으는 고놈의 새끼들 대국도 들어묵을 판이디 당허는 사람끼리 손잡아야혀.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아 섬놈의 새끼, 언감생심이제? 대국을 먹어야? 선상님 말심대로 가르쳐야 허는디 대국 사람들허고 손잡아야 허는 것도 가르쳐야 헐 것이여. 그렇지라?" 닭이 홰를 친다. 달은 엄치 기운 모양이다. "주씨 말이 옳소, 옳아요.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면 백만대국이 무섭잖을 것인데..." 날이 회뿌옇게 밝아왔을 때 강의원은 떠나야겠다면서 나섰다. 세 장정은 무척 아쉬워하는 얼굴로 문밖에까지 따라나왔는데 "들어가보시오. 내 지나는 길이 있으면 또 들르리다." "예. 꼭 그렇기 해주시이소." 주갑이만은 아무말이 없었다. 강의원이 눈으로 인사하며 돌아서려는데 주갑이 힐쭉 웃는다. 몇 발짝 걸어가다가 주갑의 웃음이 마음에 걸렸던지 강의원은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주갑은 힐쭉 웃었다. 웃고 나서 주먹으로 코언저리를 쓱쓱 문지르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웃긴 왜 웃어? 묘한 사람이구먼.' 강의원은 어이구! 배야! 엄살만은 아니겠으나 간밤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미소를 흘린다. '아무튼 재미있는 친구야. 그러면은, 짐을 찾아서 떠나보는 거다.' 크고 꼬리가 긴 눈을 깜박거린다. 새벽녘에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데 눈동자는 씻긴 듯 맑고 빛났다. 성큼성큼, 젊은이 못잖게 힘찬 걸음걸이다. 초로에 다다른 사람답지 않다. 노대인과 안면이 있어 유하게 된 강의원은 조그마한 손가방을 그 집에서 찾아들었다. 비대한 노대인은 조반을 먹고 가라고 원했으나 강의원은 그것을 정중히 사양하고 대신 소작하는 조선인들 특히 용이 일행을 보살펴 줄 적극적인 임이를 떠올렸던 모양이다. 강의원이 들판길을 나서서 얼마나 걸었을까. 동편 산 언저리가 벌겋게 물드는데 길편에 한 그루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 한 사내가 앉아 있다가 가까이 가는 강의원을 보자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이 사람아." "선상님, 여그서 선상님을 기다렸지라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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