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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2호-제1146호, 92.12.11 지정, 佛敎典籍類)
제1142호 : 선문삼가념송집<권제1>(禪門三家拈頌集<卷第一>) (재)아단문고
이 책은 고려의 혜심(1178∼1234)이 지은 선문념송집(禪門拈訟集) 30권 가운데 설두(雪竇), 천동(天童), 환오(환悟) 3사람의 것을 뽑아 편집한 것이다. 고려의 승려 구암(龜庵)이 엮었으며, 전체 6권 중 권1이 남아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26.8㎝, 가로 17㎝이다. 표지는 나중에 다시 고친 것으로 보이며, 각 장마다 정안(正安), 손창(孫昌), 유립(有立) 등 판을 새긴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간행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기림사 비로자나불의 복장유물(보물 제959호) 중의 하나인 선문삼가념송집 권6과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959호에 있는 기록을 통해 고려 고종 33년(1246)에 최이(崔怡)에 의해 만들어진 판본을 바탕으로 조선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刊經都監: 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새겨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제1143호 : 자비도량참법<권제4∼6>(慈悲道場懺法<卷第四∼六>) (재)아단문고
이 책은 자비도량참법 중 권 제4∼6을 목판에 새겨 볏집이 섞인 닥종이에 찍어낸 것이다. 원래 책을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기 위하여 1판에 20행씩 글자를 새겼는데 이것을 10행씩 찍어내 책으로 만든 것이다. 3권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으며, 크기는 세로 37㎝, 가로 21.2㎝이다. 표지는 검푸른색의 비단으로 만들어졌는데, 2줄의 금색으로 그린 직사각형 안에 금색으로 쓴 제목이 붙어있다. 권6의 제21, 22장은 새로 보충해서 넣은 것이며, 본문에는 둥근 점을 찍어 읽기 편리하게 했다. 이 책은『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권7∼10(보물 제875호)과 동일한 판본인데, 보물 제875호의 책 끝에 있는 기록을 통해 고려 공민왕 1년(1352)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이의 질, 책의 형태가 조선 초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고려시대의 목판을 가지고 조선시대에 다시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제1144호 : 예념미타도량참법<권제6∼10>(禮念彌陀道場懺法<卷第六∼十>)
여주 木芽불교박물관(제1144-1146호)
참법이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을 말하며,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미타참법(彌陀懺法)이라고 한다. 이 책은 미타참법의 절차를 수록한 것으로 성종 5년(1474)에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6에서 권10까지를 1권의 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33.4㎝, 가로 22㎝이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공혜왕후 한씨뿐만 아니라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종친 등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펴내는데 동원된 사람들이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고, 이들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목판 인쇄기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제1145호 : 묘법연화경<권제1>(妙法蓮華經<卷第一>)
이 책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 7권 가운데 제1권으로,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다.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26㎝, 가로 10.6㎝이다.
검푸른 빛이 도는 표지에는 금색으로 제목이 써 있으며, 책의 맨 앞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해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져 있다.
간행기록이 적혀있는 권을 잃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1년(1401) 신총(信聰)이 태조의 명을 받아 만든 수능엄경(보물 제759호)과 본문 글씨가 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1146호 : 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권제24>(大方廣彿華嚴經貞元本<卷第二十四>)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 책은 당나라의 반야삼장이 한문로 번역한『화엄경』정원본 40권 중 권 제24인데, 방대한 분량의 화엄경에서 보현행원품만을 따로 분리시킨 것이다. 내용은 보현보살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10가지 방법을 설법한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있으며, 크기는 세로 30.5㎝, 가로 12.3㎝이다. 검푸른 남색의 표지에는 금·은색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그 가운데 제목이 금색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정원본임을 표시하는 ‘정(貞)’자가 금색으로 쓰여 있다. 이 책은 해인사고려각판(국보 제206호)에서 찍어낸 것으로, 판을 새긴 시기는 12∼13세기로 추정되며, 찍어낸 시기는 표지장식·종이질·인쇄상태 등으로 볼때 1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제1147호-제1152호, 93.1.15 지정)
제1147호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재) 아단문고
이 책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 7권 가운데 권3∼4와 권5∼7을 각각 한 책으로 묶은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5.6㎝, 가로 21.6㎝이다. 표지는 나중에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본문에 끊어 읽는 곳을 알려주는 점이 찍혀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성종 1년(1470)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일찍 죽은 둘째 아들 예종과 더불어 세조, 덕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은 판을 새긴 후 처음 찍어낸 것이며, 후에 다시 찍은 책으로는 성종 13년(1483)에 찍은 것(보물 제936호)과 성종 19년(1488)에 찍은 것(보물 제950호) 등이 전하고 있다.
왕실에서 주도하였던 까닭에 당시의 일류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판의 새김이 매우 정교하며, 인쇄와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제1147-2호 : 묘법연화경권제1~2(妙法蓮華經 卷第一~二) 수덕사성보박물관
제1148호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명지대학교박물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는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수행자를 위해 저술한 수행 지침서로 불교의 필수 교과목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당나라 종밀(宗密)이 저술한『법집별행록』을 간략하게 줄여서 싣고, 여러 문헌을 인용하여 지눌의 선(禪)사상을 바탕으로 참다운 수행인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조선 성종 17년(1486)에 간행한 것으로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며, 크기는 세로 25.7㎝, 가로 16.3㎝이다. 우리나라 고승의 저술로는 드물게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현존하는 판본이 22종이나 되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보조국사 지눌의 선사상(禪思想)이 결집되어 있는 한국 최고(最古)의 철학서이자, 불교 이론과 실천의 결정체로 그 가치가 크게 평가된다.
제1149호 : 신간표제공자가어구해(新刊標題孔子家語句解) 명지대박물관
공자가 당시의 공경사대부 및 72명의 제자들과 문답한 것 중 『논어』에 편입된 것을 제외하고 여러 서적을 모아 기록한 것에 원나라 왕광모가 각 장별로 제목을 달고 자세하게 풀이한 것을 붙인 것으로 박은이 강릉감영에서 간행하였다. 박은(1370∼1422)은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7년(1398)의 제1차 왕자의 난과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 책은 박은이 강원도도관찰출척사로 임명받고 부임하였을 때 이 책이 우리나라에 간행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그곳에서 번각(飜刻:한번 새긴 책판 등을 본보기로 삼아 다시 새김)해 낸 것이다.
이 책판은 조선 전기의 지방관이 주도하여 만든 판본으로서는 비교적 정교하여 조선 전기 출판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151호 : 청동 옻칠 발걸이(靑銅黑漆壺등) 국립경주박물관
말을 올라 타거나 달릴 때 발로 디디는 부분을 등자라고 한다. 그 중에서 호등이란 발 딛는 부분을 넓게하여 쉽게 발을 넣거나 뺄 수 있게 한 것으로, 둥근 테만 있었던 삼국시대의 윤등이 발전된 것이다.
이 호등은 높이 14.7㎝, 폭 12.1㎝, 길이 14.9㎝로 말 안장과 쉽게 연결할 수 있도록 사각형모양으로 튀어 올라오게 하였고, 아랫부분에는 작은 구멍을 뚫었다. 등자 표면에는 꽃과 사선·불꽃무늬·물고기 뼈을 정교하게 새기고, 그 위에 검정색 옻칠을 하였다.
삼국시대의 등자가 출토되기도 했으나 통일신라 것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일본 정창원에 이것과 유사한 1쌍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희귀성으로 보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제1152호 : 경주 죽동리 청동기일괄(慶州 竹東里 靑銅器一括)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죽동리에서 출토된 초기철기시대에 만들어진 이 일괄유물은 출토 유물이 입실리유적 출토 일괄유물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중국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철기가 함께 출토되는 청동기 유적으로는 거의 마지막 단계인 기원전 1세기초로 추정된다.
1) 간두령(높이 15.4㎝, 15.5㎝) 2) 혁금구(지름 4.3∼4.6㎝) 3) 투겁창<동모(현 길이 28.2㎝)> 4) 꺽창<동과(길이 23.4㎝)>
5) 세형동검(길이 30.2㎝) 6) 소동탁(높이 5.2㎝) 7) 동대(높이 4.8㎝) 8) 칼자루끝 장식<검파두식(높이 3.6㎝, 4.4㎝)>
(제1153호-제1159호, 93.4.27 지정)
제1153호 : 묘법연화경<권제1∼3>(妙法蓮華經<卷第一∼三>) 한솔종이박물관
이 책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 가운데 권1∼3을 하나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며, 크기는 세로 27.5㎝, 가로 16.5㎝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져 있고, 악귀를 쫓는 일을 하는 신장(神將)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의 밑에는 ‘보능(寶能)이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앞장의 아래쪽 모서리가 파손되었으나 본문은 상태가 양호하며, 본문에 끊어읽기를 표시한 토(吐)가 적혀있어 누군가가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책의 끝에는 황진손이 글씨를 쓰고, 옥룡사의 스님 신민(信敏), 대선사의 스님 신의(信義) 등이 시주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은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유물(보물 제793호)에서 나온 묘법연화경과 같은 판본이다.
제1154호 : 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권제31>(大方廣佛華嚴經貞元本<卷第三十一>)
인천 가천박물관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마치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6㎝, 가로 12.3㎝이다. 검푸른 빛의 표지에는 금색으로 제목이 써 있고 끝에 ‘정(貞)’자가 있어 당나라 삼장반야(三臟般若)가 한문으로 번역한 정원본임을 알 수 있다.
화엄경 정원본(貞元本) 40권 중 권 제31에 해당하는 이 책은 고려 숙종때에 간행한 해인사고려각판(국보 제206호)에서 찍어낸 것으로, 간행시기는 13세기에서 14세기로 추정된다
제1155호 : 경률이상<권제1>(經律異相<卷第一>) 인천 가천박물관
이 책은 경(經)과 율(律)에서 요점을 각 주제별로 뽑아 출전을 표시하여 학습하는데 편리하게 엮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목판을 새기고 제본한 것으로 짐작하여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체 50권중 제1권에 해당된다. 또한 새긴 사람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데, 새긴 사람의 솜씨에 따라 정교하고 조밀함의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고려시대 대장경을 연구하는데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제1156호 : 경률이상<권제8>(經律異相<卷第八>) 국립중앙박물관
이 책은 경(經)과 율(律)에서 요점을 각 주제별로 뽑아 출전을 표시하여 학습하는데 편리하게 엮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고려 고종 30년(1243)에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목판을 새기고,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체 50권중 제8권에 해당되는데 『고려대장경』을 제본한 것이다. 또한 새긴 사람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데, 새긴 사람의 솜씨에 따라 정교하고 조밀함의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고려시대 대장경을 연구하는데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제1157호 : 성리대전서절요<권제1∼4>(性理大全書節要<卷第一∼四>) 국립중앙박물관
이 책은 조선 중종 32년(1538)에 김정국(1485∼1541)이 방대한 『성리대전』의 내용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을 간추려 4권으로 편집한 것이다. 원래『성리대전』은 중국 명나라의 호광 등 42명의 학자들이 송나라 때의 성리학설에 원나라때 성리학자의 학설까지 편집해서 만든 것으로, 세종 초에 수입된 이후 우리나라 학자들 사이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었다.
중종 32년(1538)에 호남관찰사에 부임한 김정국은 도사 김회백과 의논하여 나주목에 있던 목활자에 부족한 글자와 빠진 글자를 새겨 작업을 실시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학자들의 필독서인『성리대전』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새로 구성했다는 점과, 임진왜란으로 인해 중종 때에 만들어진 지방관 목활자본이 거의 없어진 상태에서 그 전질을 새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제1157-2호 : 성리대전서절요권1∼4(性理大全書節要卷一∼四) 청주고인쇄박물관
제1158호 : 고금운회거요<권제27∼30> (古今韻會擧要<卷第二十七∼三十>) 국립중앙박물관
원래 이것은 중국 원나라 황공소(黃公紹)가 편집한 것을 태충(態忠)이 보완하여 해설을 달아 30권으로 편성한 음운서이다. 이 판본은 조선 세종 16년(1434)에 경상도도관찰출척사로 부임한 신인손이 『운회거요』가 간행되지 못한 것을 알고 세종에게 이를 아뢰어 경주부와 밀양부에서 간행하게 된 것이다.
그 간행에 있어 신인손 이외에 도사 박근, 경주부윤 김을신 등 여러 관리가 관여하였고, 판을 새기는 데에는 대선사(大禪師) 홍희 이하 20여 명의 승려와 이종생 이하 여러 민간인 등 총 109명이 참여하였다.
비교적 정교하게 새겨졌으며, 인쇄가 깨끗하여 원래 판본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또한 이 책은 세종 29년(1447)에 완성된『동국정운』의 기본이 된다는 점에서 음운학상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159호 : 음주전문춘추괄례시말좌전구독직해<권제62∼70>(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
傳句讀直解<卷第六十二∼七十>) 국립중앙박물관
이 책은 『춘추좌씨전』을 중국 송나라 임요수가 읽기 어려운 글자에 주를 달고 글 전체에 걸쳐 해설을 한 것으로 원래의 판본을 바탕으로 다시 새긴 것이다. 세종 13년(1431)에 전라도 관찰사 서선(徐選,1367∼1433)이 간행하였다.
이것의 간행작업은 세종 12년(1430)에 전라도관찰사 신개(1373∼1446)가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본을 간행하여 널리 펴내고자 도사 김치명과 의논하여 그 해에 금산에서 판을 새길 것을 알리고, 다른 군에서는 구재모공의 협조를 지시하여 실시되었다. 하지만 그는 세종 12년(1430)에 대사헌으로 전직됨에 따라 완성을 보지 못하고 후임 관찰사 서선이 그 간행을 이어받아 세종 13년(1431)에 완성하였다.
지방관에서 새겨 비교적 새김이 정교하고, 초기에 인쇄된 것으로 원래 판본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1160호-제1165호, 93.6.15 지정)
제1160호 : 진충귀개국원종공신록권(陳忠貴開國原從功臣錄券) 국립중앙박물관
녹권이란 공신으로 인정하는 증서를 말하는데, 이것은 의주목사를 지낸 진충귀(陳忠貴)에게 공신도감에서 태조 4년(1395)에 발급한 녹권이다. 종이질은 닥종이 두루마리로 가로 634㎝, 세로 30.8㎝이며, 한쪽 끝에 축을 달아놓아 말아서 보관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한 행에 약 15∼18자 정도의 글자가 쓰여 있으며, 적혀 있는 공신의 수는 106명이다. 만들었을 당시의 나무축이 그대로 달려있고, 보존된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책의 끝머리에는 공신도감, 이조 등 녹권을 발급하는데 관련된 임원 15명의 직위와 이름이 적혀있고, 이들 가운데 10명의 이름밑에 수결(서명)을 하고 있다. 이들 공신 가운데에는 당시 이미 고인이 된 변왕란, 김천우 등을 추가로 적어놓았다.
이들 공신에게는 각각 밭 30결, 노비 3명을 상으로 주고,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내리도록 하며, 그 자손들에게는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벼슬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교시를 내리고 있다.
제1161호 : 이태조3년왕지(李太祖三年王旨) 국립중앙박물관
태조 3년(1394)에 진충귀(陳忠貴)에게 내린 의주목사로 임명하는 사령서이다. 진충귀는 태조 2년(1393)에 청절제사로 양광도에 파견되었으며, 태조 5년(1396)에 경사에 파견되고, 태조 6년(1397)에 양천식 등과 경사에서 돌아왔다. 태종 12년(1412)에 사망했다. 이러한 사실은『조선왕조실록』에 간략히 기술되어 있을 뿐 다른 사서에서 진충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 왕지는 조선을 세울 때에 활약했던 인물들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이며, 성주도씨 문중의 왕지와 함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162호 : 묘법연화경삼매참법<권하> (妙法蓮華經三昧懺法<卷下>) 대한불교천태종 구인사
이 책은 법화경을 근거로 펴낸 상·중·하 3권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하권 1책으로, 크기는 세로 34.3㎝, 가로 19㎝이다. 목판의 형식이나 글자체 등으로 보아 고려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을 조선 성종 3년(1472)에 닥종이에 찍어낸 것이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선조들의 명복과 임금·왕비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목판이 보관된 곳을 찾아 인쇄하게 하고, 김수온이 발문(跋文:책을 펴내게 된 동기나 경위 등을 적은 글)을 써서 붙인 것이다. 이때 찍은 20벌의 참법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책이다.
이 책은 역대 중요한 여러 불경들의 목록에서 빠져있어 자료가치가 크며, 천태종 및 신앙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제1163호 : 선종영가집<권하>(禪宗永嘉集<卷下>) 김민영
선종영가집은 당나라의 영가 현각선사(玄覺禪師)가 선을 수행함에 있어 필요한 것을 정리한 책에 송나라의 행정이 주를 달고, 정원이 수정하여 항목별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은『선종영가집』에 세조가 토를 달고 신미(信眉) 등이 한글로 번역하여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刊經都監: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에서 목판에 새긴 것을 연산군 1년(1495)에 찍어낸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2.8㎝, 가로 21㎝이다.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대비가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각사에서 대대적으로 간행한 경전 중의 하나로, 책의 끝부분에는 고승 학조(學祖)가 쓴 간행기록이 나무활자로 찍혀있다. 이 나무활자는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모든 경전에 똑같은 내용의 간행기록을 붙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인경자(印經字)라고 부르며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다.
『선종영가집』(보물 제774호)의 권 하와 동일한 판본으로 인쇄가 정교하고 종이질이 좋아 책의 품위가 돋보인다.
제1164호 : 묘법연화경<권제3∼4>(妙法蓮華經<卷第三∼四>) 대한불교천태종 구인사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4.4㎝, 가로 21.8㎝이며, 전 7권 중 권3과 권4를 1책으로 엮은 것이다. 간행기록은 없지만 보물 제936호, 보물 제950호와 비교해 볼 때 글씨체가 같아 같은 목판에서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목판은 성종 1년(1470)에 세조의 부인 정희대왕대비 윤씨가 둘째 아들 예종과 세조, 덕종의 명복을 함께 빌기 위해 새긴 것이다.
각 장의 오른쪽 아래에 목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어서 여러사람이 번갈아 새겼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는 읽기 편하도록 둥근 점을 찍었다. 본문에 대한 별도의 해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은 불경 암송용으로 새긴 것 같으며, 당시 왕실의 불교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여겨진다.
제1165호 : 예념미타도량참법<권제3,4,7,8>(禮念彌陀道場懺法<卷第三,四,七,八>)
참법이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을 말하며,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미타참법(彌陀懺法)이라고 한다. 이 책은 미타참법의 절차를 수록한 것으로 성종 5년(1474)에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3-4와 권7-8을 1권의 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37.3㎝, 가로 23.6㎝이다.
간행에 관계된 기록은 없지만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 6-10(보물 제949호)과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보물 제1144호)을 비교하여 보면 동일한 판본으로 보인다. 이들 책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공혜왕후 한씨 뿐만 아니라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간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종친 등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1166호 : 여주 출토 동종(驪州 出土 銅鐘) 국립중앙박물관, 93.09.10 지정
고려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67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고철 수집 때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크기는 길이 84㎝, 입지름 55㎝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는 한마리의 용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은 6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용통의 각 부분마다 덩굴무늬를 양각하였다.
종의 상단과 하단,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둘러싼 사각형의 유곽에는 가늘게 연이은 구슬 모양의 띠를 돌리고, 그 내부에 모란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유곽내의 유두는 꽃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종 몸통에 있는 비천상은 천흥사종(국보 제280호)과는 달리 4곳에 있으며, 특히 대칭대는 곳에 보관을 쓴 2구의 보살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역시 종 몸통에 보살상과 교대로 4곳에 있다. 종 몸통 아랫부분에는 제작 연대와 중량을 알 수 있는 글이 새겨 있어, 고려 문종 12년(1058)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제1167호 :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淸州 雲泉洞 出土 銅鍾) 국립청주박물관
청주시 운천동에서 금동불상과 징 모양의 금고(金鼓)와 함께 출토된 동종이다.
총 길이가 78㎝, 종 몸체 높이 64㎝, 입지름 47.4㎝인 중간 크기의 종으로 위·아래 단에 어떠한 문양도 없이 단순하게 처리된 것이, 오히려 이 종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사각형의 유곽 너비부분에는 3구의 비천상과 당초문, 3보 문양으로 꾸몄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 몸통에는 2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으로 장식한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2개 가지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현재 용통은 일부 없어졌으나, 종의 고리부분인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입을 벌리고 목을 구부리고 있는 형태가 완전히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말기(8∼9세기 경)의 종임을 짐작하게 한다.
제1168호 : 청자상감매죽학문매병(靑磁象嵌梅竹鶴文梅甁)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만들어진 높이 33㎝, 아가리 지름 5.2㎝, 밑지름 11㎝인 매병이다.
아가리는 서 있고 어깨에서부터 풍만하게 벌어지다가 서서히 좁아지고, 다시 아랫부분에 와서 벌어지는 고려시대 전형적인 매병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늘고 긴 매화와 대나무를 그렸고, 그 사이에는 위에서 내려오거나, 위로 올라가거나, 땅 위에 서 있는 율동적인 3마리의 학들을 섬세하고 회화적인 흑백상감으로 나타냈다. 병 일부에 있는 빙렬의 틈으로 흙물이 스며있다. 굽다리는 안쪽을 깎아 세웠고 일부가 결손되었다. 만든시기는 병의 형태와 문양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으로 짐작되며, 파손된 청자 잔의 조각과 함께 경남 하동에서 출토되었다. 이것과 비슷한 매병이 현재 미국 보스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병 아가리부분이 수리된 것으로, 완전하고 문양이 잘 나타난 이 매병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귀한 것이다.
제1169호 : 백자태항<내·외>과태지석(白磁胎缸<內·外>과胎誌石) 호림박물관
조선시대 백자 태항아리로서 외항아리는 전체 높이 30.9㎝, 아가리 지름 21.4㎝, 밑지름 14.1㎝이고, 내항아리는 전체 높이 19.2㎝, 아가리 지름 10.6㎝, 밑지름 8.3㎝이며, 태지석(胎誌石)은 26.6㎝×26.7㎝×4.6㎝이다. 태항아리란 왕실의 왕자나 왕녀가 태어났을 때 태를 담는 항아리를 말하며, 이것과 그 주인공의 이름, 생년월일을 기록한 태지석을 함께 묻는다.
외항아리는 아가리가 넓으며 밖으로 살짝 말려있다. 짧은 목에 위쪽이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을 하고있다. 어깨의 4곳에는 고리를 달았으며, 냄비 뚜껑같이 생긴 뚜껑의 꼭지에 나있는 4개의 구멍과 연결하여 고정하도록 되어있다. 백자 유약으로 전면을 고르게 칠하였으며 광택이 있다. 내항아리는 외항아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가 조금 더 작다.
태지석은 정사각형 모양의 검은 돌로, 앞·뒷면에 새겨진 글로 보아 1643년에 제작된 태항아리로 왕자 아지(阿只)의 태를 담은 것으로 1639년에 태어나 1643년에 태를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제1170호 : 자비도량참법<권제1∼3>(慈悲道場懺法<卷第一∼三>) 호림박물관
이 책은 나무에 새긴 다음 닥종이에 찍어 낸 것으로, 권1∼3이 1책으로 묶여있다. 원래는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기 위해 한 판에 20행씩 글자를 새겼던 것을, 10행씩 찍어내어 책으로 만들었다. 크기는 세로 29.2㎝ 가로 17.4㎝이다.
검푸른 색의 표지에는 이 책의 다른 명칭인 ‘양무참문(梁武懺文)’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으며, 권의 첫머리에는 지장보살도와 불·보살이 묘사되어 있는 변상도(變相圖)가 있다.
이 책은『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권7∼10(보물 제875호)과 동일한 판본으로, 보물 제875호 책 끝에 있는 간행기록을 통해 고려 공민왕 1년(1352)에 수한(守閑), 신규(信珪) 등의 주선으로 판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이의 질이나 책의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