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는 2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오랜 전통도시다.
영산강과 바다가 어우러지고 너른 나주평야를 끼고 있어 각종 문물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무려 삼한 시대부터 마한의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부족국가의 유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고려가 후백제를 압박했던 후방의 거점이자 이후 1000년동안 전라도의 중심으로 위상을 넓게 떨치기도 했고,
1895년 전남 중심지가 나주에서 광주로 옮겨간 후에도 영산포를 주축으로 한동안 명성을 유지했었다.
전국 5대도시에 들 정도로 세가 컸기에 부자도시가 망했어도 족히 반 세기는 갔지만,
광복 이후 도시화의 바람이 불고 전통과 역사의 영산포마저 없어지면서 전례가 없는 쇠락을 맞았다.
농사에 의존했던 시절엔 나주만큼 좋은 데가 없었지만 공장과 서비스업이 흥하면서부터 광주에 모두 쏠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60년대부터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한 인구는 지금도 좀처럼 돌아올 줄 모른다.
버스터미널도 마찬가지다. 1번국도 선상에서 오랫동안 번영했지만 크게 쇠퇴한 지금은 옛 영광의 흔적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사람은 여전히 많지만 대부분 대도시로 가는 사람들이며 버스 수가 많아도 역시나 광주가는 것들 위주다.
2천년 동안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보내야만 하는 아픈 현실을 간직한 곳.
소소한 꿈을 희미하게나마 간직하고 있는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2009년에는 갔다왔던 곳을 다시 들리는 터미널이 꽤 많았다.
나주도 그 중 하나인데 불과 1년 가지고는 강산이 변할 수 없었나 보다.
친구 카메라를 빌려서 갔을때나 전용 카메라를 들고 갔을때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장이 열려서 주변이 무척 복잡했다.
나주와 영산포시내를 다 합쳐도 4만이 채 되지 않는 인구에 신호등조차 없는 2차선 골목길들 뿐이지만,
사람이 많고 혼잡하기는 여느 시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대부분이 노인이었지만 젊은 사람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띄었다.

나주성 4대문 중 동쪽의 동점문 부근에 나주버스터미널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앞에 100년 넘는 전통의 나주재래시장이 있는데다 인도가 있어야 할 공간엔 택시로 채워져 있어 무척 복잡하다.
깔끔하게 리모델링된 2층짜리 건물은 간판만 없으면 버스터미널임을 전혀 눈치 못 챌 정도로 그냥 상가같다.

건물 양 옆으로는 승차장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있다.
이렇다할 택시 주차장이 없어 공간이 생기면 어디든지 택시가 꼭 한 대씩은 들어가 덩치 큰 버스가 드나들기 힘들고,
신호등이 없고 도로가 너무 비좁아 버스가 한 번 나오면 양 차선이 자꾸만 엉키게 된다.
차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횡단보도 없는 길을 지나다녀야해 사고 위험도 높다.
유일하게 좋은 점은 바로 뒤에 하천과 언덕이 있어 조망이 좋다는 것.
하지만 경치가 좋은 것과 사람-버스-자가용-택시가 한꺼번에 뒤섞이는건 전혀 별개의 문제니 아쉽기만 하다.

건물 중앙의 간판 밑으로는 대합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1년 전과 마찬가지로 터미널 입구이자 의문의 '의원입구'이기도 하다.
휠체어 하나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비좁지만 드나드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나주터미널은 대도시 대형 복합터미널의 축소판을 보는것 같다.
외부만 상가건물 같은게 아니라 내부까지도 건물에 임대해서 대합실을 소소하게 마련해 놓은 것 같으니까 말이다.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옛날 중심도시였던 영광을 간직하기 위해서,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일부러 상가의 비중을 많이 높여놨는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대부분 에어컨 바람 솔솔 나오는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터미널에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로 언제나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물론 대부분은 노인이고 간혹 학생, 아주머니, 관광객들만 보이는 정도다.
대체적으로 젊은이들은 거의가 자가용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은 노인이나 학생 비중이 높은 편인데,
나주는 유독 터미널에 사람도 많고 노인 분들도 많이 보이시는 것 같다.
다른 지역보다 노인 비중이 높아서 버스를 이용하는 비중도 그만큼 높은 건지,
좁디좁은 건물 안은 조용할 틈이 없이 언제나 시끌벅적 왁자지껄하다.

나주 시내버스터미널 시간표.
거의 대부분이 나주 곳곳을 오가는 180번 시간표다.
180번이 사실상 노안, 남평을 제외한 나주의 모든 면지역을 오가는 시내버스나 마찬가지인데,
각각 방향별로 다른 번호를 달고 운행중이다.
-1번은 넓은 나주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지는 서남부(왕곡, 공산, 동강)로 가며,
-4번은 영암·강진가는 중간 길목인 동창과 동남부(봉황, 다도)를 들어가며,
-5번은 주로 서북부(다시, 문평, 나산)을 샅샅이 훑으며 대부분이 다시면내를 경유한다.
10여년 전만 해도 각 노선마다 10~20분의 짧은 배차를 자랑했지만,
농촌 인구가 현재도 빠르게 줄고 자가용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지금은 배차가 크게 늘어났다.

건물 바깥에는 자그마한 승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보통 건물에 바짝 붙어 지그재그형으로 놓인 대부분의 승차장들과는 달리,
수시로 버스가 드나들기 때문에 빠른 회전을 위하여 일(ㅡ)자형으로 놓여있다.
덕분에 상행 하행별로 각각 다른 위치에서 승객을 태우기 때문에 잘 보고서 타야한다.

영광과 마찬가지로 나주도 버스터미널 건물이 두 개다.
하지만 역할은 조금 다른데 도로에 마주한게 나주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전용이고,
외진 벽돌건물로 타지로 나가는 시내·시외·고속버스가 모두 들어온다.
같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지로 나가는 버스보다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역할만 보면 이 벽돌건물이 더 중요할 것 같지만 의외로 수요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아보인다.
아무래도 생활 패턴상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경우보다 가까운 곳을 오가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
이런 차이 때문에 행선지는 구건물 쪽이 훨씬 다양해도 사람 수는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빨간 벽돌건물에서 새로 지어진 신터미널을 바라본다.
'180번 전용 터미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차량도 사람도 많은 곳.
하지만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도 결코 만만치는 않다.

여기도 역시 대부분이 안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많다.
서울과 목포·영암·해남 등으로 가는 전남 남서부 시외 노선들이 많이 들어오지만,
광주시내 곳곳을 쑤시고 영산포까지 들어가는 160번을 비롯해 송정리행 196번까지 광주방면 시내노선도 자주 들어온다.

대체로 광주광천터미널에서 전남 남해안 지역의 중간 다리 위치에 있어서 남쪽가는 버스가 무척 많다.
이쪽 라인이 딱히 이렇다할 고속도로가 없고 직행을 뚫어도 수요를 보장할만한 구간도 아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해남, 영암, 완도, 강진, 진도, 장흥 등지로 가는게 편리한 편이나 역시나 배차가 크게 줄어드는 추세여서,
해남, 강진, 영암을 제외하면 이미 배차가 한 시간을 넘어버렸다.
그나마 전남 남쪽 노선이 많기에 망정이지 이것 빼고는 거의 '버스 실종'이라 봐도 될 정도다.
쭉쭉 뻗은 호남선과 이웃 광주광천터미널의 거대한 쌍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울행 하루 5회와 성남 2회, 인천·부천 2회 외에는 전남 밖으로 나가는 버스가 없다.
심지어 같은 전남이라도 1번국도의 함평-무안-목포조차 고속도로 개통으로 버스가 죄다 그쪽으로 달리는 바람에 배차가 눈에 띄게 줄었으며, 동부권의 여수·순천·광양행조차도 가는 버스가 없다.
워낙 수요가 없어 이럴 수밖에 없기는 하겠지만 내가 여기에 산다해도 어지간해선 나주역이나 광주광천터미널로 나갈 것 같다.

요금이 오르기 전 나주터미널 요금표이다.
전남 남부쪽은 고속도로가 없어 국도요율을 받기 때문에 요금이 대체로 비싸고,
수도권 노선도 서울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저렴한 편은 아니다. 인천이 이미 2만원을 넘었고, 성남도 2만원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노선 수와는 상관없이 이 곳 시외터미널도 수많은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다들 어디로 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게 대합실 안에 꼭꼭 숨어 어딘가를 향해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광주로 나가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남해안으로 가는 사람들일까, 단순히 더위를 피해 피서를 온 것일까.
저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보내고 있었다.
2천년 역사의 유구한 전통도시지만 지금의 현실은 광주의 위성도시, 아니 위성도시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너무나 작아져버렸다.
정치적인 이유, 산업화의 이유 등등 수많은 상처를 멍든 자국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프다 할지라도 혁신도시와 같은 조그마한 꿈은 가득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한 그 곳.
갈 때마다 붐비는 지금의 모습처럼 미래에도 많은 사람들도 붐비는 모습을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장날이라 그런가 오랫만에 북적이는 터미널을 보게 되네요...구경거리도 많아 보입니다.
저도 사진 정리하면서 북적이는 터미널을 참 오랫만에 봤던 것 같네요. ㅎㅎ
좋은 사진 잘 봤습니다. 외갓집 갈때 지나만 다녔지 이렇게 터미널 안쪽까지 보는건 처음이네요.
지방도시, 특히 호남권쪽이 많이 썰렁해졌는데, 사진엔 그나마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
가는 날이 장날이라 더 붐볐을 수도 있지만요, 항상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
제 고향이 밑에 지방이라 그런지.
나주라는 곳이 참 정겹게 다가옵니다.
나주 터미널 부근의 텍사스 촌도 예전엔 유명했는디...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네요.
ㅎㅎㅎㅎ
혹시..
송정리쪽은 안 가보셨는지?
송정역 옆이라고 해야할지 모르지만...
전에도 얘기드렸지만
송정에도 터미널이 있었습니다.
주로 영광이나 목포가 다였지만...
그래도 차는 자주 있었죠.
제 기억에는 직행 완행이 같이 다닌듯..
또 하나 예전에 영광통이라는 곳에 영광행 직행 정류장이 있긴 있었는데...
암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송정리쪽도 기차나 지하철로 친척집 방문할 때 몇 번 가보기는 했습니다만 터미널의 흔적 같은건 찾을 수가 없었네요^^; (찾을 여유가 없었다는게 더 맞는 표현인가요) 영광통이라는 곳에도 직행정류장이 있었군요. 광주광천터미널이 생기고 나서 전부 통합이 된 건가요...~
현재 영광통에는 직행정류장이 있습니다. 영광행과 하루 1회 운행하는 무안공항 버스가 정차하고 있습니다. 송정리역 앞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저도 직접 본 적은 없네요. 근데 영광통에 목포행이 다녔었군요.
제가 알기론 지금도 나주쪽으로 가는 160번이 다니지 않나요?
그 당시 완행이나 직행이 몇 편 있었어요.
나주, 영산포, 경유해서 목포로 가는....
제가 언제 고향에 내려가면 한번 찾아보죠..
제가 그 위치를 어렴풋히 기억하거든요.
ㅎㅎㅎㅎ
제 나이가 벌써 40대 후반에 접어드니..
꽤 오래된 추억의 한 페이지네요.
^^잘 봤습니다..나주하면 먼저 나주배가 생각나고요..예전 "태조왕건" 드라마에서 나주(금성)을 뺏긴 견훤이 전전긍긍 골칫거리를 앓고 있던 장면이 떠오르네요..그만큼 나주가 전략적 요충지였고 군사적 경제적 가치가 엄청난 곳이였죠..
요새 날씨가 하도 덥고 찝찝해서 나주배가 땡기네요. ^^; 실제로 나주/영암 지역에서 마한 유적도 가장 많이 나온다하고, 태조왕건이 직접 공략에 나서고 덤으로 첫째 황후까지 얻었을 정도라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