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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는 날과 장소 - 2020년 09월12일.(9월 둘 째 토요일) 10:00. 3호선 지하철 독립문역 4번출구. 준비물 - 걷기편한 신발과 복장, 모자, 색안경, 스틱, 생수와 차류, 간편한 행동식 그리고 개인적으로 소중한 물품 등 주제 - 서울의 역사, 문화 산책. 동선 - 3호선 지하철 독립문 역 4번 출구 - 독립문을 중심으로 탐방 - 서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관람- 안산 자락길 걸음 여행 - 무악재 구름다리- 인왕산 정상 - 사직터널, 또는 윤동주 문학관 - 창의문으로 하산 주의 - 평소 코로나 예방수칙 잘 지키기, (각자 철저한 예방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1). 3호선 4번 출구 모인 후 독립문, 서재필박사 동상, 1919, 3,1 운동 탑 등 탐방 2). 서울형무소 역사관을 관람 3). 안산자락 길을 걸어 정상에 올라 서울의 서남권역을 조망한 후 안산 북동사면으로 하산, 걸음 여행 4). 무악재 구름다리 이동 5). 인왕산 정상 치마바위에 오른 후 북악산, 북한산 등 서울시내 중앙권역과 동부권역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아차산, 남한산성, 검단산, 예봉, 예빈, 용문산 등을 조망한 후, 사직공원 방향으로 하산, 또는 6). 부암동 방향 - 윤동주 뮨학관 - 창의문으로 하산. 서울형무소 유래. 1905년 을사늑약과 1906년조선통감부 설치로 인해 정부의 법집행의 자율성이 일제에 의해 크게 침해되고, 1907년 일본인이 감옥 관리 인력으로 대거 기용됨에 따라 감옥 운영의 주도권은 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어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의 설계에 의해 경성감옥(京城監獄)이 건립되었다. 이 감옥은 본래 1907년 8월에 완성되었으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의 의병 가담과 순종황제 등극 이후 시국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 바로 개소되지 못했다가 1908년 10월에야 비로소 개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2년경성감옥이 마포 공덕동에 신축 옥사로 이전함에 따라, 현저동에 있던 기존의 감옥시설은 ‘서대문감옥’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대문감옥 산하에는 종로출장서(옛 전옥서), 대평동 출장소 및 영등포·인천·춘천분감을 두었다.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로부터 오늘날 일반인에게 익히 알려진 ‘서대문형무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재 1930년에 작성된 「서대문형무소 배치도」가 남아 있다. 해방 후에는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불렸다. 1961년 행형법(行刑法) 개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고, 1967년부터 1987년까지는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현재 서울구치소는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해 있다. 1987년서울특별시는 이곳을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고 서대문 독립공원을 조성했다. 1998년에는 체계적인 전시와 홍보를 위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개관했다. 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許蔿, 1854∼1908),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이인영(李麟榮, 1867∼1909) 등 후기의병의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1908년 10월 현재 수감자 2,019명 중 내란죄는 192명, 폭동죄 44명, 강도죄 710명, 절도죄 314명, 준강도가 134명 등이었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본감옥(本監獄)을 세웠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특히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유관순(柳寬順, 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곳이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재소자에 대해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또한 옥사 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동사(凍死)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처우가 가혹하였다. 鞍山(안산)은 북한산과 북악산을 이어져 온 맥이 인왕산을 품고 내려 오다 안산에서 멈추게 됩니다. 안산은 동봉과 서봉으로 둘로 나누는데 두 봉의 연결능선이 꼭 소와 말 잔등에 올려 놓는 안장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현저에서 홍제를 넘는 고개를 길마재로 불렀습니다. 즉 안현(鞍峴)이란 뜻입니다. 풍수지리학상 안산을 가마솥을 엎어 놓은 형상이라하여 金型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재물을 쌓아 놓은 모습이라하여 부봉산(富峰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영향이었을까요. 안산을 안고 산 연희동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이 여유롭게 사는 곳이라 정평이 났습니다. 또한 모악산(母岳山)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연유는 북한산에 있는 인수봉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수봉을 다른 이름으로 부아악(負兒嶽)이라 불렀습니다. 이뜻은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어느날 아이를 업고 집을 나온 어머니가 안산을 이르러 더 갈 수 없자 어머니의 직분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발 길을 돌려 가정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의 영향으로 모악산으로도 불렀다는 일도 있던 산이 바로 안산입니다. 그리고 영조대왕은 아버지 숙종이 모셔진 명능(明陵)을 바라보면 생전의 모습을 기렸다는 뜻으로 추모재라 하였고 한양 이북지방에서 외침을 알리는 봉화불을 받는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는 부르던 사실도 있는 곳이 바로 안산입니다. 이조를 개국하면서 궁궐의 터를 잡는 진산이 될 수도 있었던 산이니 남산보다 25m 더 높은 산에 불과하지만 서울 서쪽에 방향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는 명산인 것 만은 사실입니다. 안산 자락 길. 무악재 하늘다리 높이가 338m에 불과한 산인 인왕산의 원래 이름은 서쪽에 있다하여 조선을 개국하면서 서산(西山)이라 불렀으나 세종대왕 때에 와서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의 이름을 빌려 인왕(仁王)산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 의하여 仁旺(인왕)산이라 바꿔 부르는데 깊이 들여다 보면 성할 왕자(旺)를 사용하여 일황과 연관되게 왜곡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잔재는 무려 1995년까지 이어집니다. 1995년에 들어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 건물을 폭파시킨 김영삼 대통령에 의하여 원래의 이름으로 바꿔 성할 왕자를 버리고 임금왕 자를 다시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왕산에는 각종 바위들이 있어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암벽등반 슬랩코스로 유명한 치마바위는 슬픔이 새겨진 바위로서 그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박원종 등이 앞장서서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공신들은 새로 등극한 중종의 비 신(愼)씨의 아버지가 반정 때 피살되었는데 정적의 딸인 신씨를 왕비로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강압적으로 폐비시켜라하여 중종은 할 수 없이 왕비페위시키게 됩니다. 사가로 나간 왕비신씨는 인왕산 아래 옥인동 부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13살 때 당시 12살이었던 중종과 결혼 한 신씨는 증종과 금술이 상당히 좋았다고 전해 내려 옵니다. 신씨는 20살에 폐비가 되어 사가로 나갔는데 폐비 신씨는 중종을 매일 그리워하며 슬픔 젖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면서도 신씨는 종을 시켜 경회루에서 마주 보이는 너럭바위에 자신의 붉은 치마를 널어 두었다가 저녁이되면 겆어드렸습니다. 백성들이 이모습을 보면서 치마바위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바위도 유명한 전설을 안고 있는데 현장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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