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문예] 2012 겨울호 기고
그는 키보다 가슴이 크다
- 이원규가 작가 이상문의 삶을 말하다 -
200 X 83매
이 원 규
이무기처럼 큰 지네
나는 소설가 이상문 형과 대학 선후배로 만나 40년 이상 교유해 왔다. 그 긴 세월 동안 1년 후배인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대드는 일이 많았는데도 그는 통이 큰 가슴으로 잘 받아 주었다. 올해 예순여섯 살, 이쯤에서 누군가 그의 생애를 이야기해도 좋겠기에 내가 하기로 결심했다.
이상문 형은 키와 눈이 작은 편이다. 그러나 키 큰 인간들보다 높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눈 큰 인간들보다 더 넓게 세상을 안다.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가 사뭇 범상치 않아서 그의 성(姓)에다가 공자, 맹자, 노자 식으로 자(子) 자를 붙여야 마땅하다. 「유자소전」을 쓴 이문구 선생처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이자(李子)’라고 하면 자칫 좋지 않은 뉘앙스를 가진 동음이의어로 오해될 수 있고 자칫 생을 정리하는 노경의 인간에 어울릴 수 제목이라 그러지 못한다. 그는 심신이 매우 건강하여 살아갈 날이 창창하다.
60여 년 살아온 그의 삶이 범상치 않았음을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몇 해 전 그의 부친상 때다. 문상을 간 나는 장례식장의 드넓은 주차장 마당에 가득 들어선 조화(弔花)의 숲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광주광역시 다운타운에 있는 그 장례식장은 최고급 시설에 1천 평 가까운 마당을 갖고 있었는데 조화들이 실내에서 넘쳐나서 200~300개는 마당으로 밀려 나왔던 것이다.
내가 ‘가득’이라는 부사를 썼다고 해서 조화들이 마당 전체를 전남 담양의 대나무 숲처럼 빽빽이 메우고 있던 걸로 오해하시지 말기 바란다. 그것들은 마당 한 쪽에 두 겹으로 세워져 입장 통로가 되어 있었다. 나는 검정 리본을 단 국화들 사이 통로를 걸어서 건물 입구로 들어갔고 국화꽃 조화들이 또 그렇게 늘어선 계단과 복도를 지나갔는데 문상객으로서 가져야 하는 슬픈 마음을 저절로 지우게 되었다. 고인께서 미수(米壽)를 누리신 터라 호상(好喪)이라는 느낌도 느낌이지만 ‘아들을 잘 두어 이만큼 꽃이 왔으니 만족하시겠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빈소로 가서 절하고 나오다가 그의 모친께 인사를 드렸다. 얼굴에 슬픔이 배어 있지만 단아하고 편안한 표정을 가진 분이셨다. 접객실에 가서 저녁을 먹는데 그의 모친이 그를 잉태하고 낳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이상문 형보다 몇 달 늦게 태어났고 국문과 직속 후배인 내가 도대체 그걸 어떻게 회상한단 말인가. 대학시절에 술을 마시며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5백여 개의 조화로써 아버지와 사별하는 성공한 아들, 그것은 출생에 깃들인 신이(神異)를 생각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전라남도 나주군 세지면 산성리 101번지. 인터넷으로 항공사진 지도를 불러보면 영암군과 경계에 있고 지리산 줄기와 닿아 있는 산골이다. 지금은 산자락에 골프장도 있고 큰 도로도 스쳐 지나가지만 경작지가 적어 지독하게도 가난한 마을이었구나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이 이상문 형의 출생지다.
젊고 아름다운 새댁이던 그의 모친 영암댁은 장지문 너머에서 시아버지 이흥보(李興甫) 씨가 시누이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간밤에 꿈을 꾸었노라. 이무기처럼 큰 지네가 동굴 같은 대문이 있는 큰 집으로 들어가는 상서스런 꿈이었노라. 이승만 대통령네 집이라 하더라. 이는 태몽이 틀림없노라. 딸아, 너는 새아기에게서 잉태의 말을 들었느뇨?”
시누이는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영암댁은 부끄러워 혼자 뺨이 붉어지고 놀람으로 인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간밤에 자신이 꾼 꿈과 똑같았던 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똑같이 꾼 상서로운 태몽, 독자 여러분은 이를 과대포장하기 위한 구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란다. 내가 비록 소설을 쓰는 인간이긴 하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의 전기를 쓰면서 어찌 천기(天氣)를 거스르는 과언(誇言)을 한단 말인가.
영암댁은 다음날도 꿈을 꾸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남자가 나타나 은빛 찬란한 칼집에 든 장검을 주며 “이걸 잘 갖고 있으면 집안을 잘 이끌어갈 수 있으리라.”하고 말했다. 그것을 받아 방 윗목에 세워 놓으니 검의 끝이 천장에 닿았다. 소설가 이상문은 그런 신이한 태몽들과 함께 잉태되어 태어났다.
젊은 아버지 이름은 순길(順吉) 씨였다. 그는 어린시절 10리를 걸어 면 소재지까지 나가 보통학교를 다녔으나 중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아버지 흥보 씨는 장남인 그를 농투성이로 만들기 싫어서 양복 짓는 기술을 배우게 했고 차남에게 농사일을 맡겼다. 순길 씨는 이름 그대로 순탄하고 길한 생을 살았다. 영산포읍에서 양복점을 열었고 손님과의 신용을 소중하게 여겨 단골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어도 신용을 버리지 않는 것은 절대불변의 DNA로서 이상문의 정신 속에 유전(遺傳)되었다. 그는 정말 신의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
산령(山嶺)의 슬픈 전설들
이상문 소년은 아버지와 숙부들이 걸었던 산길 10리를 그대로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다. 산길은 험하고 힘들었다. 여름날 갑자기 소나기가 몰려오면 꼼짝없이 비를 맞아야 했으며 겨울에는 찬바람이 회초리처럼 얼굴을 때렸다. 더 무서운 것이 덕고개라는 이름을 가진 산령에 있었다. 거기서 문둥이들이 기다렸다가 아이들을 붙잡아 큰 칼로 배를 갈라 간을 뽑아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분단의 현장이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밤에 거기서 빨치산들이 내려와 마을을 점령해 식량을 징발하고, 낮에는 국군이 들어와 협력자를 처벌했다. 마을 사람들은 양쪽 시달림을 피하기 위해 해가 질 무렵 영산포읍까지 12Km를 걸어 나가 밤을 새우고 아침에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덕고개의 오리나무, 졸참나무 들은 산길에서 일어난 많은 전설을 가지 위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이 고개에서 문둥이에게 잡혀 먹힌 아이들이 몇 명인 줄 아느냐? 빨치산에게 맞아 죽은 귀신이 바위 밑에 엎드려 있는 걸 너는 아느냐? 덕고개의 나무들은 그렇게 속삭였다. 이상문 소년은 때로는 두려움 속에, 때로는 깊은 고독감 속에 수많은 상상을 하며 그 길을 걸었다. 그것은 뒷날 그가 쓴 분단소설의 바탕이 되었다.
아버지의 양복점 일이 잘되어 어머니와 여동생과 두 남동생은 영산포로 나갔는데 이상문 소년은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 남았다. 대를 이을 장손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논밭으로 끌려 나가 김을 매거나 소 먹일 꼴을 베러 다니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 우리가 대학에 다니며 소설을 쓸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힘들고 두려웠던 산길은 나의 상상력의 보물창고였지. 내가 아버지 곁으로 가지 않고 혼자 남겨진 것도 그랬어.”
숙부 두 사람은 외톨로 남겨진 조카에게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큰숙부는 그 마을 최초의 중학 졸업자였으며 작은숙부는 최초의 고졸자였다. 이상문 소년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갖게 해준 것은 작은숙부였다.
작은숙부는 고등학교 졸업 후 군에 입대할 때까지 산성리 집에 머물며 농사일을 거들었다. 무논에 벼가 패기 시작할 무렵 새막에 앉아 놋세숫대야를 징처럼 두드리며 참새를 쫓는 일, 원두막에 앉아 참외 수박을 지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새막에서 시집을 읽었으며 원두막 천장에 시집과 시조집을 끼워 넣기도 했다. 등잔불 밑에서 먹지를 대고 연극 대본을 써서 마을 청년들과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어느 날, 이상문 소년은 시조집을 들여다보다가 숙부에게 말했다.
“삼촌, 여기 무명씨라는 사람은 이름이 이상해서 사람들이 놀렸겠어요, ‘무명씨 목화씨’ 하고.”
숙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조카야, 무명씨는 이름이 아니란다. 누구의 작품인 줄 몰라서 그렇게 쓴 거란다.”
그 무렵 초등학교에서 좋은 스승을 만났다. 사범학교를 막 졸업하고 온 정주석 선생이었다. 옆 반 담임으로서 특별활동 문예반을 맡고 있었는데 첫 시간에 ‘나팔꽃’으로 시를 쓰라고 했다.
우리집 담장의 나팔꽃
해가 뜨면 부끄러워 입을 가리고
해가 지면 웃으며 피어나요.
아침이면 몸을 오므리고
저녁이면 몸을 열며 피어나지요.
문예반 선생은 이 시 한 편으로 이상문 소년이 될성부른 떡잎이란 걸 알아보았다.
“너는 문학의 재능을 타고 났구나.”
그렇게 극찬을 하고는 교내 게시판 이곳저곳에 붙여 놓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홀로 뜬 별처럼 빛났으니까.
이상문 소년은 열심히 시를 쓰고 정 선생님에게 첨삭지도를 받았다. 원고지를 쓰는 법도 배웠다. 신바람 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운문정신과 산문정신
이상문 소년은 영산포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산골 마을을 떠났다. 산골마을과는 또 다른 환경이 펼쳐졌다. 영산포읍에는 유장하게 흐르는 영산강이 있었다. 남도 3백 리를 흐르는 강, 황포 돛을 단 풍선(風船)이 젓갈과 어물을 싣고 거슬러 올라오고 선창에서는 어물시장이 열렸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삼태기로 재첩을 잡기도 했다.
이상문 소년은 고향인 산골보다 영산강이 더 좋았다. 푸르른 풀이 돋아나고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강변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때로는 흐르는 강물이 괜히 슬퍼졌다. 그래서 시를 썼다. 보여줄 선생도 없었고 칭찬도 들을 수 없었으나 자꾸 썼다. 영산포중학교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광주로 나가 미션스쿨인 살레시오고등학교를 다녔다. 미션계 학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학교는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 지도를 중시했다. 문학을 하는 학생들은 문예반이라는 명칭 대신에 ‘가로수 동인’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에게 건방진 생각을 갖게 한 지도교사는 뒷날 시인이 된 문도채 선생이었다.
광주는 이 나라 최고 예향의 도시, 고교생들의 문학적 수평도 높았다. 일주일에 한 번 시를 써서 서로 낭송하고 합평을 했는데 2~3학년 선배들은 겉멋들이 들어서 아무도 이상문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았다. 영산포에서 왔다고 촌놈 취급을 했다.
이상문은 그 때 산문으로 돌아섰다. 선배들이 안 알아준 것도 원인이지만 그의 안에 고여 있는 산문정신, 고향마을 산길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가슴 아픈 전설들이 끌어당긴 것이었다.
그리고 산문으로 그를 이끄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2학년 때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학교 설립주체인 살레시오수도회가 개교 초기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해 시행착오를 겪어 벌어진 일이었다. 학교 교장과 부교장, 교감이 모두 이탈리아 인 신부들이었고 교사들 중에도 수사들이 여럿이었다. 맹휴는 격렬했다. 학생들이 교감 선생을 운동장에 나오게 하여 해명을 요구하고 일부 성급한 학생들이 화장실의 오물을 퍼다가 끼얹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이상문 형은 학생회 간부가 아니었으나 학생들은 그의 곁으로 모여들어 의견을 물었다. 그는 시골에서 온 촌놈이었고 장래 희망이 소설가였으므로 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물은 주머니 속에 있어도 빛나는 법. 그가 목소리가 크진 않으나 조리가 있고 진정성이 가득한 표정으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장을 가진 걸 학생들이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는 수습을 위한 학생 대표로 나섰다. 오물 사건 때문에 광주 시내의 여론이 학생들 편이 아니었고 경찰도 개입했다.
그때 그는 손아래 누이와 남동생 상국 씨(고교시절 중거리 육상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뒷날 프로야구연맹 사무총장을 지냈다)와 함께 3남매가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밤, 자취방에 있다가 담을 넘어 들어온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 형사들은 도주하지 못하게 혁대를 풀게 했다. 자지러지게 놀란 두 동생에게 그는 마치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독립투사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영산포의 부모님께는 알리지 마라.”
그래서 부모님은 끝내 알지 못하셨다.
맹휴가 적당한 조절과 타협으로 끝난 뒤, 그는 글쓰기에 매달렸다. 『현대문학』정기구독을 시작했으며 2학년 말 건국대의 고교생 작품공모에 응모해 특선을 차지했다. 손목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시인 작가를 최고의 명예로 생각하는 아버지 이순길 씨는 동네방네 아들을 자랑했다. 3학년 여름방학에는『연세춘추』의 고교생 공모에 당선되어 작품이 실렸다. 그래서 연세대 국문학과에 입학원서를 냈다. 무조건 붙여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거기서 낙방한 그는 동국대로 발길을 돌렸다.
문학도의 베트남전 참전
동국대는 남산 중턱에 있어서 비탈길을 오르느라 학생들은 종아리에 알이 뱄다. 정문은 퇴계로 필동 쪽에 있었다. 지금 정문이 있는 신라호텔 쪽은 골짜기였고 당연히 문도 없었다.
필동 쪽 비탈길은 가팔랐지만 어려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초등학교에 다닌 이상문에게는 별 것 아니었다. 다른 학생들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를 들으며, 예쁜 여학생의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걸 흘깃흘깃 보며 걸어 올라가다 보면 장려한 모습을 한 황건문(皇建門)이 두 팔을 벌려 맞아 주었다. 평양 서궁(西宮)의 정문이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남산의 일본인 사찰 조계사로 옮겼으며, 조계사가 떠나고 그 자리에 문만 남아 있던 것이었다. 이상문은 이 문 밑을 지날 때마다 ‘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이 대학에 왔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빗나간 희망이었다. 동국대는 소설을 가르치는 교수가 없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간 것이었다.
이상문 형이 입학했을 때 동국대 국문학과는 기라성 같은 문학도들이 몰려와 있었다. 하덕조 ‧ 박제천 ‧ 문효치 ‧ 홍신선 ‧ 마종하 ‧ 홍희표 ‧ 김정웅 ‧ 문정희 ‧ 이계홍 등이 상급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이계홍 형을 빼고는 뒷날 모두 시인이 되었다.
교수진도 쟁쟁하여 미당 서정주 교수가 시론을, 양주동 교수가 영시와 신라가요와 고려가요를, 『현대문학』 주간인 조연현 교수가 평론을 지도했다. 고전문학과 국어학도 이병주 교수(두시언해), 이동림 교수(중세국어학), 김기동 교수(고대소설) 등으로 국내 최고의 명성을 가진 분들이 강의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소설가 교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2학년 때 그는「실험」동인을 만들었다. 동기생인 김창범(시인) ․ 이명주(시인) ․ 김병길(전 중앙일보 기자), 그리고 한 해 후배인 최순열(시인, 동국대 교수) ․ 임성운(전 순천대 교수) 등이 그때 작품을 쓰며 우정비평을 했던 멤버들이다.(나는 그 무렵 막 입대를 해서 거기 끼지 못했다. 하필 내가 떠난 뒤에 동인을 묶을 게 뭐냐고 편지로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3학년이던 1969년 9월 이상문 형은 육군에 입대, 전주 예비사단 훈련소를 마치고 일반행정 병과를 받았다. 배치된 부대는 전주의 98육군병원, 도대체 근무가 힘들고 내무생활이 고되어 견디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베트남 파병을 지원했다.
미군 수송선 바레트 호를 타고 8일간 항해하여 도착한 베트남전선, 그는 지금 최고의 휴양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나짱(영어식 지명 나트랑)의 100군수사령부 헌병참모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에서 휴가 기간까지 24개월을 보내 사병 복무기간의 대부분을 때웠다. 헌병대인데다 병과가 일반 행정인지라 위험은 적은 편이었다.
때로는 전사한 한국군 유해가 미군 헬기에 실려 줄줄이 도착하는 것도 보고, 전쟁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인 베트남 사람들의 비극을 목도하면서, 그것을 조국의 분단현실과 조응시켰다. 그것은 뒷날 그의 출세작인 장편소설「황색인」의 바탕이 되었다.
서로 연락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 해 후배인 내가 지프차로 1시간 거리인 닌호아의 백마부대 사령부 예하 공수특전단에 와서 목숨 걸고 장거리 정찰을 하는 걸 알지 못했다.
그때 우리가 만났다면 펄펄 뛰며 끌어안고 진탕 맥주를 퍼마셨을 것이다. 캔 맥주 하나가 10센트밖에 안되었으니까. 그리고 함께 여자를 사러 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었고 5달러면 여자와 그 짓을 할 수 있었으니까.
1972년 9월, 이상문 형은 대학으로 돌아왔다. 소설을 지도해 주는 스승도 없이 소설을 공부하는 선후배들이 그를 맞았다. 동기인 김원석(소설보다는 드라마 작가로 대성했다), 동화작가로 일가를 이룩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정채봉, 그리고 나였다.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는 단 한 학기도 소설 창작 강의를 듣지 못했다. 비슷한 과목이 있긴 했다. 장호 선생님의 ‘현대산문 강독’이었다. 소설 쓰는 학생들은 불만이었다. 왜 국문학과에서 소설을 안 가르칠까. 우리는 소설 교수를 안 데려오는 학교를 원망하면서도 위안을 갖는 것이 있었다.
“조정래 선배, 김문수 선배, 황석영 선배, 모두 소설가 교수 없이 소설을 써서 등단하지 않았는가. 까짓 거 우리도 열심히 하면 되지.”
지금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소설은 안목 있는 문우들끼리 경쟁하고 격려하며 써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어서, 당선의 고비 최종심에서 차점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안겨준다. 만약에 서라벌예대의 김동리 선생, 경희대의 황순원 선생처럼 우리에게도 소설 스승이 있었다면 이상문 형은 20대 중반에 작가가 됐을 것이다.
이상문 형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린시절 10리 산길을 걸으며 몸에 밴 인내심 때문인지 그는 자기가 최종심에서 떨어졌을 때 내색하지 않고, 내가 떨어져 절망할 때 조용히 손을 잡아 끌고나가 술을 사 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복학생 시절에도 상대를 편안히 해 주고 후배들을 잘 챙겼다. 그와 나는 베트남 전쟁에 다녀온 공통의 과거가 있어 서로 연민하고 격려하며 지냈다. 아직 베트남 전쟁 소설을 쓸 수는 없는 시절이어서 우리는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그 다짐은 우리가 졸업해 나가고 15년이 지나서 실현되었다. 그는 「황색인」을 쓰고 나는 「훈장과 굴레」를 썼다.
당시 문학을 한 국문과 출신들이 그랬듯이 그는 졸업하자마자 밥벌이에 나섰고 한국제지공연연합회에 일자리를 얻었다.
장편 「황색인」으로 날아오르다
이상문 형은 1983년 단편소설 「탄흔」이『월간문학』에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다. 당선작 「탄흔」은 한국전쟁의 현실 속에서 몸을 팔아 혼혈아를 낳았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베트남의 꽁가이 집(娼家)에서 만난 여자를 오버 랩 시킨 소설이다.
그는 소설 따위를 잊고 인천 인문계 고교에서 3학년 담임을 하고 있던 나를 자신의 당선 축하 모임에 불러올렸다.
“이형, 난 소설 안 쓰고 살 자신이 없어서 다시 시작했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후배들과의 스터디 그룹을 제안했다. 후배를 잘 챙기고 돕고, 모임으로 만드는 일, 사람들이 흔히 귀찮아하는 일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었다. 장가가고 아들 딸 낳고 서른 댓 살이 된 남자들이 그의 성화에 못 이겨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멤버는 이상문 · 정채봉 · 나, 그리고 후배인 정찬주 · 유한근 · 고광욱 등이었다. 정채봉은 동화작가로서 정점에 서 있었고 유한근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한 터였지만 아직 소설을 꿈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우리는 대학 시절처럼 소설을 썼다. 매달 소설 두 편을 놓고 치열한 우정비평을 했다. 우정비평이라는 문학용어는 없다. 작품의 부족한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개작방향을 제시하는, 그러나 결코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극진한 격려를 동반하는 유익한 비평을 우리는 그런 용어로 정의했다. 젊은 날에 소설공부를 하고 한동안 중단했던 문학도들에게 권하고 싶은 최선의 방법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합평을 하며 감각을 되찾았다. 그리고 하나씩하나씩 등단의 문을 밟았다.
등단 다음해인 1984년, 그는『월간문학』출신 작가들을 묶어 ‘창작’ 동인을 결성했다. 문예지라고는『현대문학』,『문학사상』,『월간문학』,『한국문학』이 전부여서 발표지면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화술의 소유자이므로 혼자 나서더라도 자기 소설의 지면쯤은 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놔두고 혼자 가는 위인이 못된다. 더구나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이 나서주면 좋겠소’, 하고 말하면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정치하는 자들처럼 나팔을 불며 주목을 끄는 사람이 아니다. 잠자코 있는데 사람들이 앞서 달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것이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안심시키는, 그에게 맡기면 아무 걱정 없이 잘될 것 같은 신뢰를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상문을 앞세운 동인들은 김호운 · 강인수 · 최병탁 · 강승원 · 오태완 · 김만태 · 이상문 · 고시홍 · 고영엽 · 곽의진 · 이원규 · 김예나 등이었다. 동인지 제1집이『태어난 새는 날아야 한다』였는데, 평론가 김윤식 교수가 말했다. 신인들이 발표 지면이 없어 스스로 동인지를 만들며 날아오르겠다고 소리치고 나왔는데, 모두 다 날아오르지는 못하고 작가 정신이 치열한 몇 사람만 날아오를 거라고. 그 말처럼 몇 사람이 문단 말석을 떠나 날아올랐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상문 형이었다.
그가 날아오른 것은 알려진 바처럼 장편소설 「황색인」이었다. 1986년『한국문학』에 집중 분재된 소설이다. 당시『한국문학』을 경영하던 조정래 선배가 국문과 직계 후배의 숨겨진 가능성을 보고 한 번에 원고지 500매씩 3개월 분재라는 파격적인 기회를 주었다.
「황색인」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주인공이 연합군의 비리를 보고 진정한 민족주의 정신을 각성하게 되고, 자기 앞에 가로놓인 사회적 역사적 모순과 맞부딪쳐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내용을 가진 작품이다. 3회 분재를 끝내자마자 출판되고 50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36세가 되어 등단해 무명작가로 머물고 있던 그는 일약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문예지의 편집자들이 앞 다투어 원고청탁을 하는 위상에 올라섰다. 그리하여 창작집『살아나는 팔』,『영웅의 나라』, 『은밀한 배반』,『누군들 별이 되고 싶지 않으랴』, 그리고 대하소설 『방랑시인 김삿갓』등 36여 권의 소설집을 상재했다. 상복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대한민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상, 한국펜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편 구수한 화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말솜씨를 가진 이상문을 방송사들이 놓아 둘 리가 없었다. KBS TV의「아침마당」,「사랑방 중계」에 고정 출연했으며. EBS TV의「함께 사는 사회」의 진행을 맡았다. TV에 하도 얼굴이 자주 나와서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 볼 테니 나쁜 일도 못하겠군.”
중년 고비에 들어선 선후배들이란 부도덕한 비밀을 들키거나 조금은 자랑스럽게 털어놓기도 하는 게 아닌가. 이상문 형은 그 시절에 어떤 나쁜 짓도 하지 못했음을 내가 보증한다.
모교인 동국대도 그를 놔두지 않았다. 학교에 와서 후배들에게 소설을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그는 겸임교수로 임명되어 12년 간 직계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지금 한창 잘 나가는 작가들, 손홍규, 박진규, 윤고은, 염승숙 등 10여 명의 작가들을 길러냈다. 재학 중 소설 가르치는 교수가 없어 탄식하며 애태웠던 그는 그 한을 제자들을 통해 풀었다.
문예지들도 그의 경영능력을 높이 사서 주간으로 초치했다. 그는 『문학과 창작』, 그리고 『PEN 문학』의 주간이다.
그는 동국대 출신 문인들의 모임인 동국문학인회 회장도 지냈다. 2년 임기를 끝내고 물러나면서 기념비적인 일을 한 가지 했다. 동문 문인들의 숙원인 동국문학 100년사『최후로 생각할 것을 생각하는 문학』을 자비를 들여 출간한 것이다. 스승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에서 제목을 딴 그 책은 ‘최후로 해야 할 것을 하고야 마는’ 성격을 가진 이상문 형의 결심으로 만들어졌다.
그 책에는 동국문학 흐름을 알게 하는 32명의 글이 실렸다. 동국대를 졸업하지 않은 신봉승 ․ 김승환 ․ 허영자 ․ 정진규 ․ 유안진 ․ 윤후명 선생의 글도 받아 실었다. 그의 노력과 신경림 선배의 노력이 합해져 세상에 나왔다.
홍보담당 사원에서 CEO로
이상문 형에게 경이로운 것 중 하나는 전업 작가들처럼 열심히 소설을 쓰면서 직장 일에도 충실해 한 계단씩 승진했고 마침내 CEO가 됐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이다.
1974년 대학을 졸업하고 거기 취직해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나는 술 한 잔을 얻어먹으러 사무실에 갔다. 한국이 바야흐로 경제개발의 순풍을 받아 기적적인 성장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대여섯 명의 직원으로 운영해 오던 제지공업연합회는, 이제 우리도 직원을 늘리고 회보를 만들고 홍보물도 제작해야 하니 글 잘 쓰는 국문과 출신 똘똘한 직원 하나를 뽑자고 해서 이상문 형을 채용했던 것이다.
국문과 출신으로 홍보물을 만들기 위해 기업체에 입사하면 대개 10년 안에 용도 폐기되게 마련 아닌가. 이상문은 살아남았다. 사무실 직원들은 늘어났고 그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올라가 과장이 되고, 차장과 부장이 되고, 상무 전무가 되고, 30년 만에 이사장이 되었다. 그런 연합회의 이사장이란 3년 임기를 보내면 치받아 올라오는 후배들에 넘겨주고 나오는 자리가 아닌가. 이상문 형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탁월한 조정 능력은 경쟁 관계에 있는 여러 제지회사들의 생산량을 균형 있게 조절하고 펄프의 수입과 완제품의 수출의 길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기에 충분했다.
첫 임기를 마쳤을 때, IT산업의 발전으로 인쇄물이 급격히 줄어들고 중국산 종이가 밀려오고, 해외의 수출망이 중국산에 밀리는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제지업계는 살아남기 위해 다시 이상문 형을 눌러 앉혔다.
“이 위기를 돌파할 사람은 이사장님밖에 없습니다.”
이상문은 손을 내저었다.
“허허, 나는 이제 물러나 못다 쓴 소설이나 쓰려고 했는데….”
그는 결국 두 번 세 번 재신임을 받고 지금은 제지업계 오너들이 돌아가면서 맡아온 제지연합회 회장 자리에 있다.
작가 이상문의 슬픔과 행복
나처럼 헐렁하게 산 자가 이상문 형에게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36권의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이상문은 슈퍼맨인가. 도대체 소설은 언제 썼을까. 그는 남들이 퇴근하고 난 뒤 회사에 혼자 남아 소설을 쓰고 자정이 넘어 귀가했다. 그것은 슬픈 상처도 남겼다.
돌아가신 부인 심경숙 여사가 세 남매를 다독이며 반듯하게 키웠다. 딸 현승은 중앙일보 기자를 하다가 현재 헤드헌터 관련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커리어 우먼이다. 둘째인 아들 경현은 체육심리학 박사이고 셋째인 아들 석형은 삼성엔지니어링 대리로 있다.
첫 형수 심경숙 여사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집 걱정은 하지 마세요. 당신이 잘 돼야 애들 장래도 밝아지니까요.”
그런 말과 함께 남편의 성공을 위해 내조하며 자기를 희생한 분,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 병을 얻었다. 그의 부부와 우리 부부는 대여섯 번쯤 하룻밤 자고 오는 여행을 한 터라 부인의 심성을 나는 잘 안다.
이상문 형은 이런 글을 썼다
그녀가 스물다섯 살의 봄에 전라도 출신의 볼품없는 월급쟁이와 결혼한 것은 그가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사실에 정서적으로 끌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낭만적인 사고는 여지없이 그녀를 다시 고단한 삶 속으로 밀어넣었고 그 때문에 몸속에서 기회를 엿보며 새살거리고 있던 당뇨병 인자가 일찌감치 때를 만나 본색을 드러냈던 것이 다.
여자의 30대 중반은 제 숟가락 찾아들고 밥 먹기도 어려운 때가 아니던가. 그녀는 둘을 넘어 셋이나 되는 아이들과 소설을 씁네 하고 정신이 없는 남편과 전쟁을 하느라고 겁나 고 겁난 당뇨병과 제대로 싸워볼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결국 작년 11월 19일 새벽에 집 안의 거실에서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로 실려갔고, 거기서 64일을 버티다가 쉰넷의 나이로 그만 생명줄을 놔버렸다.
부인을 보내고 나서 이상문 형은 수십 번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같이 술을 마실 때마다 내가 목동 아파트 단지까지 따라가서 치킨집에서 한 잔을 더하고 집으로 들여보내곤 했다.
그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아내를 돌보지 않는 나쁜 인간으로 오해하시지 말기 바란다. 그는 부인의 치유를 위해 외국으로 모시고 나가고 국내의 공기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심경숙 여사가 병이 깊어졌던 해, 내 사위가 세브란스병원의 수련의로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소중한 선배인 이상문 선생의 부인이시다. 불편하신 게 없나 어서 병실에 가 봐라.”
내 명령을 받고 주치의를 만난 사위가 절망적인 상황임을 보고하면서, 이상문 씨가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이야기할 때 나는 가슴이 아팠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세상을 사는 남편 이상문을 묵묵히 내조하다가 쓰러진 부인에 대한 연민, 그리고 그가 모든 정성을 다 기울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심경숙 여사는 남편 이상문이 성공해 CEO가 되기 직전 세상을 떠났다.
첫 부인을 잃고 만 3년이 지나 열 살 쯤 아래인 김선희 여사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두세 번 깊은 밤에 전화를 해서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오늘 함께 호텔 프랑스 식당에서 달팽이 요리를 먹는데 갑자기 목이 메는 거야. 죽은 집사람과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어.”
이상문 형은 그렇게 자신에게 솔직한, 바탕이 착한 사람이다. 평생 처녀의 몸으로 살려고 했던 김선희 여사는 그걸 알기 때문에 그의 가슴의 텅 빈 곳을 채워주려고 결혼했다.
결혼식 주례는 신경림 선생이셨다. ‘세월회’라는 동국대 국문과 60년대 학번 문인 모임이 있다. 갑년을 전후한 세월회의 중늙은이들이 신랑 친구로서 사진촬영을 했다. 나중에 그 사진을 봤는데 모두가 싱글벙글 웃고 있다.
류재엽 교수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말한 때문이었다.
“내가 결혼 주례를 백 번도 더한 몸인데 신랑 친구로 사진을 찍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이네.”
그 말에는 처녀장가를 가는 친구에 대한 약간의 부러움과 안도가 들어 있었다. 십여 명 멤버가 똑같은 마음이어서 싱글벙글 웃었는데 그 순간 찰칵 카메라가 작동했다.
그의 집 냉장고에는 고향 영산포에서 모친이 보내주신 홍어가 있다. 그걸 먹고 싶다는 핑계로 가끔 그의 차를 타고 집까지 묻어 간다.
재혼은 초혼보다 어렵다. 아, 이상문 형이 재혼에 실패하면 어떡하나 하고 내가 얼마나 조바심했던가. 그는 그 고개를 성공적으로 넘어섰다. 고맙게도 김선희 여사는 이상문 형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는 쓸쓸하고 우울했던 홀아비의 너울을 벗고 마음이 청년처럼 젊어졌다. 회사에서 거듭 재신임을 받고 왕성하게 다시 소설을 쓰는 에너지도 복원했다. 김선희 여사의 내조가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게는 이보다 안심되고 고마운 일이 없다.
이상문 형은 지금 젊은 시절처럼 활력으로 충만해 있다. 나는 그가 가진 에너지를 오로지 소설 쓰기 하나에만 집중했다면 한국문단을 넘어서는 불멸의 작가로 우뚝 섰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30년 전『현대문학』 장편소설 공모 당선으로 나를 뽑아 주신 이청준 선생은 이상문 형과 내 나이 쯤 되셨을 때 내가 찾아뵈면, “나 아직 결정판을 쓰지 못해서….”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상문 형이 지금까지 쓴 소설들은 탁월하고 빛나지만 그것들 모두를 넘어서는 대작을 써 주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놔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조절하고 이끄는 것이 천성이고 팔자인 걸 어쩌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