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을 신어야 할 때가 언뜻 다가선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더니 드러낸 발목이 마냥 썰렁하게 한기가 느껴진다. 바지를 찾아 입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어제부터는 긴 소매 티나 남방을 걸치게 되었으니 진정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갑갑한 것들을 몸에 걸치고 내년 봄까지 살아야 할 생각을 하니 끔찍하기도 하다. 도대체 사람들은 이런 거추장스러운 옷이나 양말들을 왜 허구한 날 덧입는지 모르겠다. 좋은 시절이 끝났음이 틀림없다. 오호 통재라! 세월이 정말 무상하도다.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할 것이다. 나이도 먹은 사람이 갑자기 양말을 신어야 하겠다는 둥, 바지를 새삼스레 꺼내 입었다는 둥 하면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을 것이다. 파주에서 철강공장을 영위한 지가 벌써 스무 해가 다 되어간다. 파주 월롱의 야산 기슭에 공장을 차리고 네 해 전부터는 아예 부부가 관사에서 살림을 차린 터다. 아이들은 성장해서 모두 밖에 나가 있고 하루 종일 보는 사람들이라고는 직원들뿐이요. 특히 여자라고는 안 사람 밖에 없다. 동네가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공장이 외진 곳이어서 마을사람들을 보려면 운동을 하거나 일부러 왕래하여야 볼 수가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간혹 회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야 화물운송기사나 아니면 거래선 직원들뿐이다. 그러니 도대체 남의 눈길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예의범절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규범이다. 옛날 유학자들 말씀을 빌면 수신기독이라 하여 그 홀로 있음을 더 삼가고 마음을 바로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없어 남이 보지 않으면 그저 내 편한 대로 멋대로 행동하고 움직인다. 신발도 온통 너덜너덜한 것들이어서 새로 산 신발이 무엇인지 찾을 수도 없다. 최근 십여년간 구두를 산 것이 한두 번 될까, 그것도 삼만원이 넘지 않는 것들이지만 언제 산지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유는 딱 하나다. 구두를 신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두툼한 털신이면 충분하다. 그것도 구입한 지가 벌써 다섯 해가 넘는다. 올해는 새 털신을 사야할 처지다. 여름이면 그냥 슬리퍼나 샌들을 신는다. 맨발로 말이다. 서너 해전에 산 가죽 샌들이 이제는 너덜너덜하다. 몇 번 가죽끈을 수선하였지만 이제는 밑창이 뻥 뚫리고 말았으니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내년이면 새로 사야 할 것이다.
옷이나 신발의 기능은 예의범절도 있지만 또한 멋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패션이나 유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사람이 살려면 최소한 따라가고 또 준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패션이다. 남의 눈치도 있고 또 무시당할 우려도 있고 해서 사람들은 패션을 따라하고 멋도 내고 높은 값을 지불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멋도 멋이지만 남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패션을 가미한 옷을 찾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집사람이나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하지만 나 같은 위인에게는 그저 마이동풍이다. 어떻든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패션이나 멋은 남의 일이어서 나는 옷의 기능이라고는 실용적인 면밖에 모른다. 치부를 가리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이며 동시에 추위를 막아주는 것들이 바로 양말이요 신이고 또 옷들이다.
사업을 하는 거래선 사장님들은 이제 내 앞에서 무슨 브랜드니 유명한 이름의 상표라니 하는 이야기들을 하지 않는다. 나 같은 숙맥 앞에서 아무리 자랑을 하고 멋진 패션을 보여주었다 해도 도시 반응도 없고 또 무엇보다 뜻도 모를 이상한 외국어 상표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 평가할 능력도 없으니 그들은 재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으쓱거리며 자랑을 하면 샘이 나거나 감탄을 해주어야 하는데 눈치코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골프 티셔츠 하나에 수십만원이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그저 웃으며 내가 입고 있는 티는 시장에 가서 만원에 두 장 사온 것이라 대꾸한다. 골프채라고는 내 생에 잡아본 적도 없으니 골프에 맞게 티도 사야한다는 사실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터다. 티라면 면이 많이 섞여서 땀만 잘 흡수하고 또 살갗에 촉감이 좋기만 하면 그만이니 값이 무슨 문제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솔직하게 고백을 한다면 나도 상표에 대해 알만한 것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여야겠다. 특히 먹고 마시는 것들에서 그렇다. 먼 옛날 유럽에서 오래 살았었는데 당시에 사람들이 루이비똥 가방을 사달라거나 아니면 본차이나 그릇 가게로 안내해 달라고 하면 잘 못 알아듣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술이나 음식점 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져서 입이 헤 벌어질 정도로 맞장구치며 설명도 해주고 좋은 곳으로 인도해주기도 한 터다. 도대체 유럽에 터를 잡자마자 제일 먼저 착수한 일 중의 하나가 리쿼숍을 찾아다니며 온갖 술을 맛보는 것이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아직도 그 버릇은 남아서 서양의 술은 모두 섭렵하였으니 최근에는 동양 특히 중국의 술에 흠뻑 빠져있는 터다. 베트남이나 태국 등지의 곡주 증류주도 또한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근래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결국은 자기 좋은 것은 어쩔 수 없고 관심이 덜 한 것은 모른다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다.
어떻든 이런 지경으로 답답하고 아둔하게 사니 옷은 그나마 마냥 거추장스럽기만 해서 올 들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적이 한 번도 없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이지만 무슨 높은 명예직이나 권력을 다투는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무슨 귀한 모임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또는 새로운 애인이라도 생긴다면 한껏 점잖게 멋을 부릴 터인데 그럴 기회도 없고 생각도 없다. 애인을 사귀려면 아무래도 그 댓가가 큰데 무엇보다 마음과 돈에서 모두 자린고비인 나 같은 영감에게는 그런 노력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봄만 오면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양말부터 시작해서 바지로 그리고 다음에는 윗도리까지 서서히 진행하는데 한 여름이면 그 극단의 정점에 이른다. 한창 삼복더위에는 그저 웃통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반바지만 겨우 걸치고 사무실과 공장, 마당과 밭을 서성거린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일지도 모르고 사람이라면 원시인이 틀림없거나 못 배워먹은 막 된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도 감각기능은 고도로 발달되어 우리는 기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저 날씨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할 뿐이다. 웃통을 벗었는데도 더우면 하루에도 몇 차례고 공장 구석 한켠에 만들어 놓은 우물터에 가서 훌러덩 발가벗고 찬물을 끼얹는다. 그 시원함이란 말할 수가 없다. 더불어 정신까지 상쾌해서 우주 만물이 나와 함께 노니는 듯하고 평소 생각나지 않던 사물의 은밀한 속삭임까지 모두 들리는 듯하다. 정신이 맑아야 몸도 좋다고 하지만 실은 몸이 시원하고 개운해야 생각도 맑아지고 건전해지는 법이다. 변명이고 궤변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처지와 생각이 바로 그렇다.
내가 이렇게 산다고 남들이 옷을 입거나 패션을 추구하는 것에 별다른 생각을 가졌다면 그것은 또 오해다. 내가 할 줄 모른다고 해서 남들이 잘 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멋진 옷을 걸치고 한껏 모양새를 낸 남정네들이나 아낙들을 보면 나는 침을 흘릴 정도로 민감하게 감탄을 하게 된다. 멋은 멋이고 예쁜 것은 예쁜 것이며 점잖고 품위 있는 것은 역시 예의가 넘치고 사람답게 보임도 잘 안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었다든지 목에 아름다운 스카프나 목도리를 새롭게 걸쳤다면 어느 모임에서라도 아마 제일 먼저 인사치레를 하는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사에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도대체 머리카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눈에 보일 정도로 사람이 예민하니 남들 치장한 것에 그저 둔감하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스스로에 만족하고 또 남들이 그렇게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런 마음의 흐름을 놓친다면 그야 말로 예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본인 자신은 왜 그리 둔하게 사는가? 나도 모른다. 게으름 탓이려니 생각도 해보지만 그만은 아니어서 도대체 스스로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구속 받는 것이 싫어서일까. 아니면 천성이 제멋대로 생겨 먹어서 그럴까. 아니면 무슨 자유에의 의지라도 있어서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일까. 생각건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아마 본능에 따르기만 하는 원시인을 닮아서 그럴 것이다. 본능에 충실하다 보니 절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거다. 실제적인 이유도 사실은 없을 리가 없다. 이곳은 시골동네이기에 농사를 짓는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그들에게 일을 하며 양말을 신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나도 또한 그러해서 쇠똥거름을 듬뿍 끼얹은 밭에서라도 일을 하면 온통 흙투성이 천지가 된다. 이럴 때 양말은 정말 불필요한 물건이다. 씨앗을 부릴 때면 발뒷굼치로 꾹꾹 누르고 씨 몇 톨을 넣는데 양말을 신고 할 일이 전혀 아니다. 옛 선비들은 궁경躬耕이라 하여 버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책을 읽었다 했거늘 그런 경지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양말을 신어야 할 때가 다가온다. 쑥부쟁이가 만발하기 시작하고 흰벌개미취꽃이 짙은 향내로 온 세상을 덮으려 하고 있으니 내 발목이 분명 춥다춥다 하고 이야기 할 터이고 나는 충실히 그 소리를 따라 서랍장에서 양말을 찾아 신을 것이다. 정말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두툼한 옷으로 무겁게 걸친 내 마음도 한결 더 추워 오들오들 떨고 있을 터이니, 오호 통재라! 세월은 왜 흘러가기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