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사랑
2021년 12월 12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9-12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4: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8:29-30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형제의 시작은 예수님부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부르신다고 해서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3-14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개입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형제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성도란 인간들이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제품입니다. 예수님의 친히 자신의 제품이기에 성도 본인이 자신을 성도 아닌 것으로 무효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인간에게 있어 ‘나의 것’보다 더 우세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위치한 자리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기가 되고 싶은 바를 이루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지정하는 순간, 그것은 죽은 물체나 사물이 되어버립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인형을 갖고 싶어하는 심정과 같은 겁니다.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갖고 싶어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보다 많은 자유가 확보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같은 세계를 꿈꿉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자리요 위치입니다. 주님이 만들어내는 자리와 위치는 인간들이 여망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만을 좋은 나무로 확정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저 열매로 만족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17-19에 보면,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즉 성도는 주님의 열매로서만 등장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그대로 실감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기 위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의심에 의심을 멈추지 말라야 합니다. 그것은 안정감있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모든 시도는 이상형을 졍해놓고 그 목표를 향하여 자신의 현 형편을 뛰어넘는 초월자로 행세합니다. 자신을 대단한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속이는 겁니다. 즉 현실적으로 지금 아니지만 나중에는 내가 원하는대로 매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자기 다짐을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기를 향한 자기 속임수입니다. 평소에 이런 식으로 살아가니 타인이 나를 속이는 것을 “너는 나를 속이려 하는구나”라고 고려해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확정적인 하나님 뜻을 위해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확정된 인간성을 평생 경험토록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일하라”라는 겁니다. 일이란 ‘만남’입니다.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것은 나의 원대로 만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현실 그 자체는 “누구를 만나서 돈을 벌어 내가 궁핍을 면하는 일들의 공간의 장”입니다. 그러니 너무나도 지독하게 사적(私的) 공간입니다. 이 사적 공간이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공적 공간을 어떻게 방해하는지는 역대하 19:18-22에 나옵니다.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즉 인간들은 악마가 집어넣어준 속임수의 환경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장래 일을 묻는 왕에게 미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가로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저희가 왕의 손에 붙인바 되리이다”(대하 18:14)
즉 왕과 거짓 선지자들은 악마가 집어넣어준 환경에 국한해서 자신들의 관심사와 목표점을 정할 수밖에 없음을 미가야가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질문 자체가 악마적이요 거짓말차원이라는 겁니다. 바로 성도된 자는 이런 경험을 세상에 나가 누구를 만나든지 친히 경험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은 결코 하나님의 형제를 목숨바쳐 사랑할 수 없는 자아상으로 현실 속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5-16)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일만 생각하며 살아가고 바로 그 ‘인간의 일’은 주님께서 제시한 말씀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더 이상 ‘내가 만들어 가는 신앙적 환경’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경’ 속에서 용서받는 대상이 됨을 압니다.
이런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집니다. 내가 시도하는 나의 일과 주님의 말씀이 스스로 형성시키는 환경 사이의 차이를 보면서 성도는 ‘나’보다 ‘주님의 만들어낸 ’자리‘가 더 우세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기도합시다.
『모든 것이 다 허사임을 미리 알고서 세상에 나가 일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21-12-12 17:59
16강-데살로니가전서 4장 9-12(형제사랑)21121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9-12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9-12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형제라는 것은 예수님의 형제가 기본입니다. 인간끼리 형제는 소용없습니다. 주님과의 형제가 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냥 친목 단체가 되겠지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를 택하신 것은 예수님이 맏아들 되기 위해서 주님이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는 그 형제가 되는 겁니다.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 코스대로 하나님께서는, 주님은 자기 형제를 만들어나가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이 운명이라 할까요, 성도의 입장이 어떤 거냐 하면, 성도가 성도 스스로 성도이기를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성도 되는 것도 자기 맘대로 아니듯이 성도를 취소하는 것도 나 이제 성도 안 해, 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도 아닌 게 아니게 돼요.
왜냐하면 성도는 교회가 만들어내는 기성품이 아니고 주님의 수제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직접 성령을 줘야 성도가 되기 때문에 소위 성도를 성도 쪽에서, 인간 쪽에서 그걸 취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내가 성도 되고 싶어서, 천국 가고 싶어서 교회 나오고 성도 되느냐, 아니면 정말 주님의 수제품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없이, 끝없이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해줘야 돼요. 끝까지, 그것도 아주 즐겁게, 자신감으로 안정성 있게 계속 의심을 해줘야 됩니다. 나의 한계 자체도 그것도 벗어날 수 있도록, 나의 한계마저도, 어떠한 한계마저도 훌훌 벗어날 수 있도록, 내가 이런 것 저런 것 했기에 내가 성도 되었다 하는 그러한 것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그게 제거되도록 해야 돼요.
그 방법은 의심하는 것밖에 없어요. ‘나 성도 아니야. 나 신자 아니야.’ 신자 아니라는 말, 그걸 성경적으로 보게 되면 나는 사람 아니다, 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요모조모 따져봐도 나는 인간이 아니므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남하고 비교할 잽도 안되고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 그 정도 지경까지 나가 줘야 돼요. 남과 비교해서 좀 나는 낫잖아, 라는 그걸 삶의 위로로 삼아서는 안 돼요.
그것조차 벗어나 버려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성도가 될 때 “성도가 되었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이런 성도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도가 되었느냐? 이제부터는 내가 너한테 지시할 거야. 너에게 내가 명령할 거야.” 주님의 지시와 명령과, 내가 인간 되고 싶어서, 내가 사람 앞에서 칭찬받고 싶어서 하는 내 짓거리하고 철저하게 이게 끝까지 비교 되어야 돼요. 끝까지 비교해야 됩니다.
만약에 내가 신자 되기 위해서,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어떤 수작을 부린다면, 어떤 노력을, 선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한테 주어진 주의 일을 모독하는 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만드는 것밖에 안 돼요. 분명히 성경에서는 주님이 자기 형제나 자기 백성이나 자기 성도는 주님이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을 통해서 친히 만드는데 이게 뭐 내가 자꾸 성도답게 되려고 하고 신자답게 된다는 말은 분명히 성령 안 받았거나, 안 그러면 받아는 놨는데 내심 뭔가 불안한 요소가 있고 ‘혹시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일주일 뒤에 큰 벼락 맞는 일이 벌어질까? 그러면 나만 손해지.’라는 나의 손실과 이익을 자꾸 계산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 몸이 죽을 때까지 멈추지를 않아요. 그래서 미리 제가 당부합니다만 자기 자신을 의심 든다고 불안해하지 마시고요, 아예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의심해 버리세요. ‘나 아니야. 나는 아니야. 나는 신자 아니야.’ 그걸 불안해서 하면 안 되고 그걸 즐겁게 해야 돼요. 자신감으로.
제가 지난 목요일에 약간 멀리 여행을 가서 누굴 만났는데 그분이 대뜸 차에서 내리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저 신자도 아닌 저를 왜 만나러 오셨습니까?” 신자도 아닌 저를 왜 만나러 오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했습니다. “오랜만에 복음 듣습니다.”
이건 뭐 중하고 부처하고 선문선답 하는 것도 아니고요. 왜 내가 성도 아니라고 그걸 자신만만하게 할 수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성도라는 것이 성경에 보게 되면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공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나 개인적인 운명, 미래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전체 천국을 어떻게 주께서 만들어내냐에 관해서 우리가 휘말려 들어간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그냥 말려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 공식 하나 또 만들어냈습니다. 어떤 공식이냐 하면, “나보다 더 위치가 우세하다”라는 공식입니다. 나보다 자리가 더 우세한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되느냐, 보다도 내가 속해있는 이 자리 중심으로 하나님은 일하시는 겁니다. 위치 중심으로.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내가 노력한다고 내가 원하는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그 상황, 환경, 이 환경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성도 되게 하고 천국 백성 되게 하는 그런 낯선 환경에 우리가 속해 버렸어요. 그래서 내 결심보다도 하나님의 주신 자리가 더 힘이 센 거예요. 더 세력이 강한 거예요. 그 힘이.
따라서 내가 속해 있는 그 환경의 실재, 실재성, 진짜 그런 환경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는데 실제로 나보다 더 센 환경을 실제로 느끼기 위해서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환경과 늘 대조하면서 의심하는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조성해 가는 나의 미래를 위한 내가 만든 환경과 삶의 정황과, 그걸 개무시하시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집어넣는 환경, 그 환경에 어떤 차이가 있음을 알 때, 그 차이를 극복하라는 말이 아니고 차이 있음을 확인하는 거예요.
우리는 끝까지 나는 아니니까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주님의 성령의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좋든 싫든 상관없이 나로 성도 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한다면, 그것이 힘이 더 우세하다면 우리는 그 우세한 힘에 도발해보는 거예요. 대들어 보는 거예요. 반항하고 저항해보는 겁니다. 그게 의심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저항하고 반항할 때 ‘나도 이제 주님 안 믿는다, 해볼까?’라고 그렇게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가만있으면 속에서 ‘주님은 뭐 나한테 해준 것 뭐가 있노?’라는 생각, 또 ‘내가 주님 믿는 게 이게 지금 그냥 성경에 농락당하는 게 아닌가?’라고 스스로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에 가만 계세요. 가만 계시면 저항 안 하고 싶어도 매일같이 주어진 삶 속에서 하나님께 분노하고 하나님께 반발하고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제가 전에 목요일에 경상북도 북쪽으로 올라갔었는데 바다에 파도가 굉장히 쳤어요. 파도를 가만 보고 있으니까 참 이런 좋은 점이 있어요. 그 파도가요, 득달같이 해변가에 있는 나에게 막 달려들었어요. ‘나한테’입니다. 왜? 아무도 거기에 없었으니까요. 그 넓은 바닷가에 있는 나에게 파도가 막 달려드는데 달려들어 봤자 내 코앞에서 식식거리면서 있다가 다시 쑥~, 하고 물러가요. 좀 있으니까 또 큰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내면서 달려듭니다. 또 물러가요.
그러니까 바다가 아무리 힘이 세지만 뭍에, 땅이라는데 묶여 있어서 어느 정도는 공격을 해도 어느 정도 하고는 물러가는 겁니다. 그래서 의심하시고, 나는 주님 안 믿어, 결심해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그러한 불안과 불만이 주님에 의해서 싹싹 파도 밀려가듯이 밀려가는 그 재미난 것, 지루할 여가가 없어요. 그게 반복되는 거예요. 이 땅에 있을 때는 반복돼요. 그게 계속해서 반복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성도한테는.
그래서 우리가 ‘아, 이게 구원받는 게 이게 운발이구나.’ 노력한다고 천당가는 게 아니고 이게 완전히 제비뽑기도 아니고 그야말로 간택되었다, 성경에서는 선택되었다 하지요, 선택되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좋아하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생존하려고 노력하는 이 나의 모습을 애써 감추지 마세요. 그걸 오히려 노골화시키기 바랍니다.
그렇게 노골화된다 할지라도 또다시 그것이 싹 씻겨져서 너는 내 사람이라는 주님의 자기 작품이라는 사실이 본의 아니게 거기서 밀려올 때 그 차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 일이 뭐냐 하면, 용서라는 일이에요.
용서가 되려면요, 내 쪽에서 뭘 감추지 말고 주님에 대드는 그 악마적인 품성을 유감없이 노골적으로 까발릴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가 용서 값을 하려면, 용서가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 것을 알려면 내가 보기에도 이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순간들이 있어 줘야 돼요. 밀물 썰물이 왔다 갔다 하는 이것을 가지고 네 자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인 우리와 하나님이 합작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하게 되면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주님의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보다 더 우세하거든요. 아까 자리, 위치라 했는데 그 위치가 뭐냐? 세상은 말씀대로 만들어졌다 그 말입니다. 이 말씀대로 만들어진 것과 내 뜻대로,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져야 된다는 이 고집, 이 고집과 주님의 열심 사이에서 둘이 아울러서 같이 만나줘야 이게 신앙생활이 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에서 형제끼리의 생활, 형제 생활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래서 형제 생활이 되려면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하면, 형제를 만나야 되겠지요. 그래서 만나는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일하라, 라고 하는 거예요. 일은 뭐냐? 만남입니다. 일은 만남이에요. 어중이떠중이 온통 천태만상 모든 인간 다 만납니다. 만나야 돼요.
만나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일해야 될 이유가 12절에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궁핍함이 없게 하라. “일을 해라. 일을 하게 되면 궁핍함이 없게 해줄게.”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도바울을 앞장세워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밀물 썰물,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따로 원하는 내 인생 만들고 싶어, 라고 할 때 주의 뜻은 뭐냐? “일해라. 어중이떠중이 맘에 들지 않아도 다 만나라.” 만나는데 만나는 목적이 뭐냐 하면, Show me the money, 나에게 돈을 보여줘, 나를 궁핍하게 만들지 말고 돈을 줘, 돈을 벌기 위해서는 만나야 되는 거예요.
돈 벌기 위해서 만나면서 인간은 자기 본색 다 튀어나옵니다. 신앙이고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그게 돈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는 건데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나 신자 아닌 것 같다.’ 신자 아닌 그 노력을 해보겠다, 노력하지 마세요. 그냥 집에서 놀지 말고 일하시면 세상에 나가시면 신자가 아니어도 이렇게 지독스럽게 신자 아닐 수 있는가를 완전히 세상에 나가서 다 까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신앙이랍시고 자기변명에 나서네요. 구차한 변명들을 해가면서.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자기기만이라는 겁니다. 자기기만. 쉽게 말해서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불신자가 되었으면 모를뻔한 인간, 나의 더러운 것을 성도 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그걸 체험 실습을 시키는 대상이 바로 성도에요. 성도이기 때문에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것은 다 경험하게 하시는 겁니다. 추잡하고 더러운데 그 추잡하고 더러운 경험을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기만이에요.
자기기만이라는 말은 뭐냐? 내가 나를 속이는 겁니다. 남들이 나를 속일 때 그걸 속인다는 것을 왜 아느냐 하면, 평소에 본인이 본인을 얼마나 많이 속여왔기 때문에 저것은 나를 속이는 짓이라 하는 것을 본인이 간파가 되는 겁니다.
어렵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내가 뭐가 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되고 싶다 하는 것을 가지고 뭐냐? 나는 사물이 되고 싶은 거예요. 특정 사물. 마네킹도 사물이지요. 사람에게 있어서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는, 내가 기대하는 모든 목표는요 전부 다 하나의 물체가 돼요. 하나의 사물이 된다고요.
나한테 그건 하나의 마네킹 같은 거예요. 어릴 때 같으면 인형 같은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그것은.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떤 고정된 멋있는 인형으로 내가 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그 사물, 사물이 되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그것은, 나는 물체가 아니거든요. 물체가 아닐 때, 내가 되고 싶은 이상체를 사물로 봤을 때 내가 노력하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초월이라고 해요. 초월.
초월이라 하는 것은 현재의 난관과 고난과 결핍요소를 뛰어넘는 것을 초월이라 해요. ‘아, 내가 그 정도까지 하게 되었어?’ 이게 초월이에요. 내 목표에 도달되는 것은 되고 나면 나한테 하나의 목표점이니까 사물이 되지만 거기 가기까지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가 초월적인 영웅적인 노력을 발휘할 정도로 나는 초월자 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든 것이 이게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기의 속임수에 불과한 거예요. 왜 인간은 자기가 이상적인 대상이 되고 싶으냐? 그 이상적인 대상이 되고 싶은 이유가 거기에 도달하게 되면 내가 더할 나위 없는 나에게 자유가 확보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유를 목표로 삼는 겁니다.
교회에서 전도사, 그다음에 부교역자, 부교역자에서 당회장 목사가 되고 싶은 이유가 뭐냐 하면, 당회장 되게 되면 자기가 얻고 싶은 자유를 다 확보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자유, 뭐든지 자기 말발로 다 움직이는 그 자유 있지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움직이는 자유.
그런데 그 당회장은 그 전에는 하나의 물체가 돼요. 하나의 사물이 됩니다. 그거 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마네킹이라는 인형을 가지면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오해하는 겁니다. 막상 당회장 되고 난 뒤에 책임이 주어진다는 생각은 안 하고요. 뭐 어쨌든 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이처럼 계속 어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초월에 나서는 존재, 이것이 자기기만이에요.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아, 참,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보자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거울에 비춰보면 나는 몸이잖아요. 여기에 나라는 것이 없어요. 나가 없으면 초월이라는 것도 없다 그 말이지요. 자기가 지어낸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지어낸다는 말은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인데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려면 과거를 기억해야 될 것 아닙니까? 기억이라는게 뭐냐? 기억이 뭐예요?
기억이 만들어서 내가 되는데 내가 만들어지는 그 기억은 뭐냐? 기억은 전하 펄스의 서열이에요. 두뇌에 시냅스가 있는데 두뇌 세포의 시냅스가 ‘–35μV’(마이크로볼트)에서 ‘+35μV’까지의 전기에너지에요. 이걸 서열화 시킨 것이 기억이고 그 기억이 모여진 것이 ‘나’라는 것입니다. ‘나’, 나라는 기억이에요. 거짓말 같지요. 의사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기억 안 돌아올 때는 돌아오라고 전기다리미 같은 것으로 막 충격 주잖아요. 초월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의 과거 기억이 만들어낸 조작된 환상이지요. 그리고 또 인간은 육체로 된 인간이기 때문에 뭐가 되고 싶어서 되고 싶다, 되고 싶다, 하는데 되고 싶어도 뭘 놓치느냐 하면, 자기 몸이 쇠퇴한다는 것을 자꾸 감안을 안해 요. 놀러 가고 싶어도 힘들어서 운전 못 하면 놀러도 못 가잖아요.
자기 몸이 그만큼 쇠퇴한 거예요. 그저 옛날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만 꺼내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쇠퇴는 뭐냐? 그 힘줄의 근육의 인장력(tension, 引張力)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근육의 힘이 떨어지면요, 직장에서 일 못 해요. 직장에서 일 못 하면 눈치 보여서 나가야 되고요. 나가면 돈 못 벌고 돈 못 벌면 궁핍한 거예요. 가난해지는 겁니다.
가난해지게 되면, 돈이 없으면요, 내가 원하는 마네킹 인형이 될 수가 없어요. 자기기만이라는 것은 자꾸 뭔가 현실을 속이는 거예요. 끊임없이 속이는 겁니다. 내가 나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이 문제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어요. 이야기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모든 것이 사적으로부터 출발했어요. 공적이 아니고 사적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역대하 18장 20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선지자 4백 명 나오거든요. 4백 명 나오는데 거기 미가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미가야 선지자한테 왕이 물어요.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여호사밧 유다 왕이 미가야선지자에게 물었어요.
그 전에 다른 선지자들이 ‘말 좋게 해라. 좋게 해. 지금 초월하려고 하잖아.’ 초월해서 내가승리한 왕이라는 그 사물체, 그걸 즉자존재라 하거든요, 그 사물체, 완전히 물체덩어리, 그게 나야, 나는 모든 정상을 다 가졌어, 그래야 모든 자유를 다 확보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확보, 신이 되는 게 목표에요.
신이 되려면 힘을 최대한도로 끌어당겨서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인간은 더 이상 희망 사항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선지자에게 물었다 그 말이지요. 선지자에게 왜 묻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모든 것을 미리 알려줘요. 우리가 성경을 봐야 될 이유가, 내가 모르는 모든 일을 미리 알려주기 때문에 성경을 봐야 됩니다.
그 예언에 뭐라고 하느냐 물으니까 그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예언을 하면서 ‘어떻게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이런 것이 어려워요. 성경에 보면, 나에게 이렇게 물었으니까 “예, 점괘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것은 점쟁이고요, 선지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에 나에게 묻는 그것이 천상회의에서 악마가 사탄이 인간을 거짓말에 떼쓰리로 다 장악되기 위해서 거짓말한 그것이 당신의 물음으로 나에게 도착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역대하 18장 20-22절에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성공하겠습니까 실패하겠습니까, 부채 도사 하듯이 그렇게 하는 그 물음 자체가 하나님 앞에 있는 사탄이 인간으로 하여금 공적인 일을 못 하고 사적인 일에 스스로 매여 살도록, 그렇게 꽁꽁 묶도록 거짓말하는 영을 보냈기 때문에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소원대로 당신은 승리할 겁니다, 하니 그 표정을 본 여호사밧이 화가 나서 “네가 언제까지 바른말 할래?” 이렇게 된 거예요.
언제까지 바른말 할래. 언제 내가 원하는 답변을 줄 것인가. 옆에 있는 가짜 선지자는 막 귀싸대기 때립니다. 미가야의 뺨을 쳐버렸어요. 이 미가야가 맞는 신체적인 학대, 이것이 그대로 다 집합된 것이 뭐냐?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그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를 믿는다 하거든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우리가 얼마나 기만적 존재인가를, 나를 속이지 않으면 하루도 못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는 것이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나온 영이 성령이에요.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발 끝까지 거짓말쟁이가 되어라, 그리고 그것과 용서하심과 비교해보라, 네가 무슨 죄에 대해서 용서받았는지를.
오늘 본문을 대충 봐버리면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 12절에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이렇게 죽 나오는데 이걸 그냥 봐버리면 선한 자는 일하는 자, 일 안 하는 자는 악한 자가 되어버려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일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선한 자가 되어버리고 선한 자는 죽어서 어디 가지요? 지옥 갈 수 없지요. 선한 자는 천국 가야 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 사람은 일 안 하니까 지옥 가고 나는 일하니까 나는 천당 간다’라고 비교할 거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은 뭘 고려 못 하느냐 하면, 형제라는 것이 뭔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형제에 대해서, 주보 뒤에 요약되어 있는데, 거기에 간단하게 되어 있어요.
형제가 뭐냐? 형제란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면 그게 형제 사이예요. 요한복음 15장 12-14절에 나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형제란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요, 이런 말을 한, 이 진리를 말한 나에게 너희들이 실제로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안됨을 확인하고 나한테 달려들어라, 하는 뜻이에요. 나에게 달려들어라.
요한일서 3장 15절은 그에 못지않게 주님께 달려들 말씀이 또 나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사람 죽이지도 않았어요. 칼 들지도 않았어요. 그냥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죄에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네가 뭐 천국을 가? 네가 천국 백성이라? 네가 형제를 미워했는데 천국 간다고? 누가 그런 거짓말을 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기 때문에 살인한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그 말이에요. 이 정도 하면 달려 들만하잖아요. 주님한테! 하도 우리가 성경을 안 보고 목사 설교만 들어대니 대충 해도 그냥 천당 가는 줄 알았는데 성경 보면 그게 아닙니다. 형제를 죽이거나 때리고, 가 아니에요. 미워하기만 해도 그 사람 속에는 영생이 없고,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고, 그런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없는 형제, 없는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자기 목숨부터 내놨기 때문에 그래요. 목숨 내놓은 그 주님과 동일하게 목숨 내놓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영생이고 천국이고 게임 오버, 끝났어요. 계약 끝났습니다. 계약 성립 안 됩니다. 이거 어쩔 거예요? 이 사태를, 이 사태를 어쩔 거냐,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 말씀 하는 것은요, 우리로 하여금 항상 바닥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겁니다. 바닥부터. 성도라고 행세하지 말고 ‘나 같은 것은 성도 아닙니다. 성경적 근거에서 보면 나는 절대로 성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부터 생각하고 성경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볼 때 나는 성도 될 수 없어, 나는 신자가 아니야, 그 확인 차원에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도라 하는 게 하나의 사물체가 안돼요. 성도라는 것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것이 초월이 아니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초월과 하나의 사물은요 이것은 기만이에요. 자기기만,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노력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도원 수녀들이나 수도사나 그 사람들이 하라고 하세요.
왜 사람들은 성도가 될 수 없느냐 하면, 막상 누굴 만나서 돈벌이에 나서게 되면 그딴 신앙생활, 하나님, 예수, 그거 돈벌이에 전혀 도움 되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생겨 먹은 것이 그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이 출생 자체가, 원래 생겨 먹은 것이 우리는 이 돈이라는, 생존이라는 것에서 못 벗어나는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아주 날 것으로 생생하게 받아들이자 그 말입니다. 그것도 못해요? 그것 다 지금 하고 있으면서 못한다는 눈총을 주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 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지옥 잘 가고 계시다 그 말입니다.
자, 이제 사람의 일을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의 일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자신의 포부와 희망을 포기 못 하는 게 사람의 일이다. 그리고 형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 살기 위해서 형제도 잡아먹는 거예요. 그 형제도 잡아먹히는 대상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가? 예수님도 포함되어 있어요. 날 위해서 잡아먹을 것을 잡아먹는 거예요. 심지어 달도 월식하고요, 해도 일식을 해요. 삼켜지는 거예요. 걸렸다 하면 다 삼켜버리는 거예요.
자, 제가 이렇게 인간의 일이라는 것을 설명했으면 그러면 주의 일은 뭐냐? 시편 127편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주의 일은 인간의 일을 뜯어내는 일이 주의 일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할 도리 다합니다. 하세요. 하시고 주께서 그걸 뜯어내서 그 안에 날 것을 그대로 노출 시킵니다. 아, 속이 다 시원해요. 다 뜯어낼 때.
왜냐하면 뜯어 낼 때 내가 죽어 마땅함이 그대로 노출되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성도입니다. 성도란 하늘로 노출된 사람이 성도에요. 하늘로 노출된 사람. 연세 많아서 모자 쓰잖아요. 모자를 쓰면 머리가 이렇게 폐쇄되지요. 그런데 모자를 벗어버리면 머리가 하늘을 향하여 개방되지요. 개방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늘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모자를 깊게 눌러 써요. 쓰는데 주님께서 나 자신의 고상함과 건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눌러 쓴 그 모자를 벗겨버립니다. 벗겨버리면 죽은 해골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처음부터 이것은 죽음으로 간다는 그러한 성질머리, 그것을 그대로 노출 시켜 버려요. 성령의 바람이 솨~악, 불지요. 성도 같으면 속이 다 시원한 거예요.
마태복음 15장 1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아내신다. 이렇게 뽑아낼 때 이거 얼마나 이게 시원한 일입니까? 잡티 뽑아 내는 것도 이게 시원한 일인데 잡티가 아니라 통째로 뽑아내 버립니다. 통째로.
통째로 뽑아내서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십자가 피 흘린 그 상자 안으로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적인 나에서 공적 자리로 이동시키는 거예요. 반복해서 이동시키는 거예요. “이 자리야 네 자리가. 이게 바로 사랑의 자리야.” 주님께서 먼저 우리가 형제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제자들은 형제 아닙니다. 주님의 친구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친구 될 수 없고 형제 될 수 없어요.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자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바쳐서 일방적인 만남, 일방적인 관계를 가졌어요. “네 안에 내 목숨 있다. 네 안에 내 피 들었다. 너와 내가 한 자리를, 용서라는 자리를 형성한다.” 이걸 일방적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다가갔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3년간 만난 예수님을 기피하고 그들은 도망쳤지요. 도피했습니다. 그게 사적공간이에요. 끊임없이 피하는 거예요. 자꾸 도망치고 피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너희들은 피하지? 나는 너희들을 쫓아갈 거야. 왜? 나의 작품이니까. 나의 제품이니까. 내 생산품이니까.”
마태복음 7장에서는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의 열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17, 18절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주님께서 스스로 자기 원칙을 정해버렸어요. 어떤 원칙이냐 하면, 예수님 나는 좋은 나무기 때문에 좋은 나무에서는 반드시 좋은 나무가 좋은 나무만 있는 게 아니고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을 통해서 내가 좋은 나무라는 사실을 환원시키겠다는 거예요. 그걸 확인시키는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나쁜 나무인데, 나쁜 물체인데 누구누구의 열매로써 우리를 만들어버려요. 누구의 열매냐? 예수님의 열매가 된다면 스스로 나는 인간도 아니야, 나는 신자도 아니야, 나는 성도도 아니야, 나는 나빠, 나는 돈만 밝혀, 나는 내 계획만 밝혀, 난 내 자유만 원한다고, 라고 해도 이미 소속이 나보다 더 우세한 것이 뭐냐? 위치고 상황이고 자리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열매 삼은 사람은 좋은 열매인 것을 통보해주는 그 소식이 말씀을 통해서 계속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나는 나 위주가 아니고 말씀 위주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악마가 파도처럼 득달같이 오고 아무리 내 불안과 근심이 오더라도 결국은 씻겨 내려가게 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그 말씀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채택됐다는 사실만 그 현장에 남지요.
그렇게 남고 그다음 날 그러니까 나는 성도다, 하고 까불다가 다시 그 까부는 그것 자체가 그게 바로 내 기만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기만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에게 미련을 가지고, 자기에게 애착을 가지기 때문에 내가 없는데, 나는 그냥 쇠퇴하는 몸, 근육, 골조로 되어 있는 몸에 불과한데 여기서 나라는 것이 생겨 가지고 내가 신처럼 되고자, 천국 가고자 어떤 초월성을 자꾸 발휘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천국 백성이 나오니까 저게 나야, 하고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적인 자기 미련이고 애착이고 자기 집착입니다. 철저한 집착이. 집착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증거가 바로 운다는 데 있어요. 사람이 운다는 것은 자기한테 그렇게 미련이 많고 자기 연민이 강하다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나는 나밖에 모르는 자기한테 반해버린,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린 그 모습입니다.
그런 존재가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하면서 돈을 밝히게 되는 겁니다. 궁핍을 면하기 위해서 하지요. 궁핍을 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궁핍을 멀리 떼어놓는 수가 제일 좋은 수겠지요. 그러면 현재 궁핍하지 않더라도 궁핍한 것을 미리 예상해서 미리 돈을 많이 축적하는 방법이 내가 나를 지키는 아주 제대로 된 코스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본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19세기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 전에는 뭐냐? 우선 기도하는 계층, 두 번째 싸우는 계층, 세 번째는 수고하는 계층, 기도하는 계층은 성직자 계층, 프랑스 같은 경우에 19세기에 3퍼센트가 국가의 90퍼센트의 재산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싸우는 계층은 뭐냐 하면, 귀족들이에요. 그것은 무사들, 귀족들, 기사계급들. 그것도 한 7퍼센트 밖에 안돼요. 나머지 90퍼센트 이상은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수고하면서도 수고하지 않는 사람들, 기도나 하고 싸움이나 하는데 다 거기에 꼼짝 못 하고 있었는가? 그 당시의 상황이 뭐냐? 모든 국가의 질서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팔자다, 라고 중세 때 소위 신학의 이데올로기로 다 접수당한 거예요. 세뇌받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못 배우고 공부 못한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팔자인데 여기에 충실하면 나중에 천당 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이 있다는 자체가 뭐가 빠졌느냐 하면, 의심하는 것을 빠트린 거예요. 내가 신자 아니라, 하는 그런 경우를 다 빠트린 거예요. 그냥 환상 속에 있는 겁니다. 나는 신자다, 교회 등록했으니 신자다, 성만찬 하면 신자다, “신부가 나보고 신자래” 그래서 신자다, 그런 판타지 속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나한테 유리한 상황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상황에 대해서 끝까지 그걸 의심해 봤어야 돼요. 그 한계를 뛰어 넘어야 돼요. 그게 성경에 나오거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셔서 신자가 되었다고 그냥 그 이야기만 하신다면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은 필요도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9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들은 꼼수를 쓰는 거예요.
‘그래. 나는 뭐 배운 것도 재주도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가서 기도원에 가서 기도나 하면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압니다’라고 한다면 성경에서는 그런 사람을 두고 자기 일을 안 하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자기 일을 해서 궁핍을 면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 어중이떠중이 만나서 누굴 만나든 만나서 돈 버는 노력을 해야 되는데, 해야 내가 신자도 아니고 완전히 개판이구나, 그걸 알아야 되는데 그걸 안 하고 일을 하기 싫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기도원에서 기도만 한다고요.
기도만 하고 약초나 캐서 장날에 내다 팔면서 사는데 장날에 약초값 떨어졌다고 화는 또 왜 그리 내는지. 초월이 초월하다가 왜 실패해 버려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것은, 네가 감추고 감추었던 그 본성이 다 나온다는 거예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할 때 그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안 들었다 치고요 그 앞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 ‘돈을 사랑해라 그게 너한테 딱 맞아.’
네가 돈 없으니 돈사랑 안 하지 돈 있어 봐요, 돈을 왜 사랑 안 할까요? 롯데타워 꼭대기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집들이 있어요. 4백 7억 8천만 원인가, 아니 2백 7억 8천만 원인가, 하여간 전망, 뷰가 좋아요. 그리고 해운대도 마찬가지고요. 해운대 고층 빌딩 아파트 복층으로 된 거기 가면 그렇게 좋습니다.
그런 집에 살면서 ‘주여, 나 이런 것 다 필요 없고요. 그냥 말씀으로 족합니다.’라는 생각이 일단 그 집에 한 번 살아봐. 살아보면 그런 생각이 나오는지요. 지금 안 살아보니 뭐 편안하게 가는데 아직 우리가 그만큼 멀었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신앙이라는 것이 아, 내가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어떻게 보아도 신자 아닌 것이 맞다는 그것을 절감할 때까지는 우리는 더 나를 초월해서 위대한 신앙인이 되려는 그러한 어리석음은 계속 되어야 되는 겁니다. 계속 더 해야 돼요.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의 일은 주님의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일이라는 것, “저리 가. 빨리 가” 일단 인간을 세상에 보내놓고 그다음에 주의 일이 뒤 따라와서 우리의 모든 것을, 미리 성경은 모든 것을 아시니까요, 우리 자신은 나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주의 일이 달려들어서 우리 인간의 일을 다 뜯어냅니다. 인간의 일, 네가 하는 일, 내가 미리 성경을 줬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에 너는 거기에 완전히 빠져 있다는 거예요. 용서받지 못할 일에 빠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가 빛이 나는 거예요. 용서받지 못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으니까. 이게 바로 주님의 피로 맺은 형제요 이게 바로 친구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프랑스 사람들이 1789년에 혁명을 일으켜서 프랑스 혁명 반란군이요, 교회 모든 부동산을 국고에 환수해 버렸어요.
국고에 환수해서 “이제는 90퍼센트 시민들아,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은 이제 재산을 가지게 되었고 배불리 먹게 되었다.” 그런데 환수한 것이 전부 다 부동산이라 현찰이 안 되네요. 그래서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아시냐(assignat)라는 채권을 발행했는데 이 채권이 정부를 믿을 수가 없으니 3퍼센트까지 폭락을 했어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부동산을 헐값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보유한 부동산을 팔기 시작하니까 농민들은 돈은 없지만 다음에 값을게요, 하고 부동산을 사니까 그 바람에 부동산이 인기가 높아져서 가격이 뛰고 처음에 샀던 비용 다 제하고도 농민들이 부자가 된 겁니다.
정말 이게 주의 일입니까? 그 재미, 부동산이나 아파트 사서 팔아먹으면 중소기업 과장이니 부장이니 월급쟁이 백날 해봐야 한방 치면 퇴직금 열 배 수익이 난다는 것을 아는 이상 과연 이것을 스스로 포기할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여러분, 그게 여러분의 본성입니다. 그 본성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했다고 주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뜯어가는 것은 우리가 피로써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우리의 진짜 그 내 모습에 대해서 용서가 덮치는 것이지 내가 알아서 천국 가는 초월자 되겠다고 중간에 기만적으로 요령 부리지 마세요. 그것은 신앙을 흉내 내는 것이지 신앙 아닙니다.
독일은 또 어떻고요? 독일은 1919년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서고 1차대전 후에 보상을 요구 받는데 제대로 보상해 줄 수도 없거든요. 국민들에게 표를 얻기 위해서 서로 국민들 잘살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48개의 정당이 난립했어요. 국회가 엉망이지요. 1차대전 때 터무니 없는 보상비를 요구받고 값을 길이 없는데 미국으로 금은 계속 나가고 있고요. 독일 사람들이 열심히 해봐야 계속 미국의 식민지처럼 되었으니까 여기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등장한 사람이 히틀러인데 1933년 히틀러가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나찌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농업보호정책을 했고 단정한 제복을 입으면서 그다음에 한 것이 일하고 싶어도 일 못 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증인 1400명 죽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 왜? 여호와의 증인은 정부 시책에 도전하는 무정부주의잖아요. 그래서 잘라냈고 고아, 장애자, 정신병자 가스실에 다 집어넣었어요. 수용소가 독일 내에 엄청나게 많았어요. 가스실이 2차대전 때 생긴 것이 아니에요. 그 전에 이미 다 있었어요.
그런 자들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궁핍한 것을 면하고 잘 산다는 것은, 이 세상적 방법은 누구 독재자가 나와서 개 패듯이 패줘야 돼요. 이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조합 작살 내놨어요. 노동조합이 어디 있어요, 노동조합이.
자본가들은 도둑놈입니다. 왜?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에 도둑놈이에요. 그러나 자본가보다 더 도둑놈이 누구냐 하면, 노동자예요. 농땡이 부리는데 천재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기보다 일 많이 하는 노동자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왜? 자기는 농땡이 부리려고 하는데 착실하게 해버리니까 자기가 한 계획이 다 깨지잖아요.
왜 노동자가 도둑이냐? 자본가는 사실은 도둑은 아니에요. 도박꾼이지요. 그런데 노동자는 도박도 안 하려고 해요. 남 도박한 것 판돈 빼먹지 도박을 안 하려고 해요. 개인 사업체도 싫어합니다. 망하기 때문에. 개인 병원도 안 차려요. 월급쟁이로 살려고 하는 겁니다. 남이 도박할 때 빼먹기나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다 도둑이고 모든 인간은 전부 다 강도입니다. 자기의 사적인 것밖에 몰라요. 그것을 짧은 인생, 90이라는 짧은 인생 살면서 그걸 여러분 혹독하게 경험하라고 주님께서 일하라고 한 거예요. 일하고 돈벌이에 나서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자 벗고 주님 앞에 노출되고요. ‘주여, 용서는 하늘에서 주는 것이지 내가 착하게 산다고 용서받는 것이 아니군요.’ 이게 바로 주님의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