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씨랜드 참사>
1. 2021.12.9.(목)에 방송된 꼬꼬무 <씨랜드 참사>는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1990년대는 유독 대형 참사, 특히 부실 공사, 행정적인 부정, 관계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이 결합되어 끔찍한 대형 참사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버렸고,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었다. 상대적으로 1998년 일어난 씨랜드 참사는 사람들에게 쉽게 잊혀진 사건이었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난 유치원 아이들을 포함해 불과(?) 23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2. <꼬꼬무>의 장점은 사건의 내용을 디테일하게 그리고 희생자의 관점을 통하여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사건의 객관적 실체를 건조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고통받았고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런 방식의 구성이 때론 지나치게 감정적인 면을 부각시킨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모든 사건에는 희생자가 존재하며, 희생자의 아픔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방송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라는 점에서 결코 과하다고 할 수 없다.
3. 씨랜드 사건의 전개는 희생당한 한 유치원 어린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수련대회를 앞둔 아이의 설렘과 기대가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전달되면서, 당시 아이들의 기쁨이 고통과 비극으로 급변했던 비극적인 시간에 대한 격앙된 분노를 공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씨랜드’ 참사는 당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온갖 부정이 종합된 사건이었다. 화재 발생 당시 회식을 이유로 자리를 비웠던 교사들,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부실하게 지어진 콘테이너 건물과 엉망인 소방 및 전기 시설, 법규를 어긴 공사를 눈감아 준 행정 관리들, 사건이 발생한 후에도 화재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은폐하려 했던 국과수,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했던 관계자들을 송방망이 처벌로 풀어준 사법부 등 방송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부실한 일처리는 어쩌면 당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일상적인 관행이었는지 모른다.
4. 1990년대 대형 참사 후 언론과 사람들의 요란 속에서 변화의 필요성과 실제적인 강화를 추구했지만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2014년 ‘세월호 사건’의 비극으로 다시금 확인해야만 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부실과 무책임한 현실 속에서 끝나지 않는 희생자들의 명단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그때서야 사건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고도 방지할 수 있는 준비가 가능했지만 실패하였다. 근본적 원인은 ‘기본적 원칙’에 대한 무감각이었다. 규정에 어긋난 건축시설과 행정 처리, 규정에 어긋난 업무 규칙, 규정에 어긋난 수많은 행동이 사건의 원인이었다. 모든 사건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작동하는 공간과 시간의 부산물이었다.
5. ‘기본적인 원칙’이 운용되는 국가, 예측가능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작동되는 사회, 2017년 ‘촛불운동’은 이러한 나라를 위한 시민들의 공유된 소망이 결집되어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2021년 대선을 앞 둔 우리 사회는 원칙은 소멸되고, 상식은 무력해졌으며, 뻔뻔함과 독함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 버렸다. 여야를 대표하는 두 명의 후보자들은 상식과 원칙의 파괴자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수많은 범죄적 의심을 받고 있음에도 상대를 파괴하기 위한 저격수의 임명을 띠고 등장한 이들은 정치판을 끊임없는 갈등의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편파적 정의’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나의 정의와 너의 정의는 결코 같지 않으며, 나의 정의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지극히 왜곡된 하나의 시각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힘이다. 시야가 좁을수록 강도는 강해진다. 강도는 수많은 극단적인 추종자들의 지지를 끌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파괴해야 한다는 격렬한 전투장을 조장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끔찍한 전쟁터로 만드는 극단주의자들의 투쟁이다.
6. 이들은 쉽게 말을 바꾸고, 쉽게 선택을 변화시키며, 선거에 이기기 위한 절대적인 목적을 위하여 가식적인 가면을 바꾸어 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변화가 진정성있는 인식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것이다. 그들의 과거가, 그들의 성품이, 그들의 미래를 말해준다. 현재의 선거 운동은 다만 하나의 목적을 위한 ‘연출된 무대’일 뿐이다. 누구라도 당선된 후에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공격적이고 포용이 사라진 정치를 시작할 것이다. 상식과 원칙은 권력의 속성 속에서 사라지고 파당적 이익이 난무할 것이다. ‘상식과 원칙’이 사라지고 선동과 이익이 난무하는 사회는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극적인 세계이다. <씨랜드 참사> 사건을 보면서, ‘기본적인 원칙’이 사라져 가는 우리 사회의 선동적 분위기가 가져올 위험을 걱정한다. 오로지 자기 이익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감각마저 무뎌져가는 <백신접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 또한 현재의 정치판과 똑같이 닮아있다. ‘좋은 정치는 좋은 시민이 만든다’라는 원칙의 재확인이다. 현재의 선동적이고 파괴적인 정치는 그것을 요구하는 자들의 결과일 뿐이다.
첫댓글 -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에 적극 대처하지 못했던 시간들.... 희생자들의 슬픈 연가가 들려나오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참사는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잊혀지고... 자본과 권력은 힘을 더해가고... 힘든 현실에서 희생양을 찾아 핑계거리를 제공하고... 히틀러를 만들어준 자발적인 국민들이 다시 이 땅에서 태어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