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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산: 경주 금오산, 고위산
2.위치: 경북 경주시
3.거리및이동시간:276km(3시간30분)
4.코스: a코스:삼릉-마애관음보살상-석불좌상-선각육존불-부부바위-신각여래좌상-선각마애불--상선암
-영봉마애불-마애석가여래좌상-상사바위-남산(금오산)-대연화좌대-이영재-봉화대-백운
재-고위봉-관음사-천우사-용장1리(5시간)
b코스:삼릉-마애관음보살상-석불좌상-선각육존불-부부바위-신각여래좌상-선각마애불--상선암
-영봉마애불-마애석가여래좌상-상사바위-남산(금오산)-삼층석탑-마애여래좌상-설장교-
약사여래좌상-용장1리(3시간30분)
5.출발및 도착시간:도시철도공사(6:40)-염주체육관(7:00)-용봉동(7:20)-문예회관후문(7:30)-경주도착
(예상) (11:00)-산행완료(16:30)-뒤풀이끝(17:10)-광주도착(20:40~21:00)
주차장에서 삼릉으로 향하는 길은 멋진 소나무 군락으로 시작됐다. 소나무향을 맡고서 가는 산행들머리에서 300미터 정도 올라가니 큰 능이 3개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삼릉. 소나무에서 나오는 키톤치드의 향은 정말 좋았다.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 삼릉은 박씨의 능으로 앞에서부터 제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이라고 하며 삼릉계곡이라는 것도 삼릉이 있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여름이면 한기가 느껴질 만큼 시원한 바람이 불어 냉골이라고 하나 지금은 물조차 없는 계곡이 황량하기만 했다.
경주 남산을 흔히들 노천박물관이라고 한다. 그 만큼 남산에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신라 천년의 역사는 남산에서 시작되어 남산에서 막을 내렸다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첫 궁궐은 나정 남쪽 언덕위에 지금의 창림사터)으로부터 나라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포석정(창림사터에서 1km거리)이 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55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궁녀, 신하들과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견훤에게 붙들려 자결했다는 장소이기도 하니 슬픔도 함께하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그 후 8년을 존속했다가 망했고 경애왕릉은 남산 삼릉골 초입에 있다고 한다. 신라의 흥망성쇠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영산(靈山)인 셈이다. 그래서 경주 남산일대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문화유적의 보고로 보존되고 있다.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石塔)과 석불(石佛)로서 특히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고 한다.
상선암 이정표를 쫓아 삼릉에서 300~400m정도 오르니 길옆 바위 위에 불두 없는 석조여래좌상이 보였다. 결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당당한 기백이 느껴지기는 하나 목이 없어 왠지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마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 석불 좌상은 계곡에 거꾸로 방치된 것을 동국대 학생들이 발견해서 모신 것으로 통일 신라의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불상의 머리 부분과 양 손, 무릎까지 손상되어 참으로 아깝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목 부분에 삼도가 완연하고 대의는 통견대의를 하셨으며 속 옷자락의 매듭은 아주 정교하여 여지껏 석불에 이렇게 정교한 매듭은 처음 본 듯 하다고 한다. 왼쪽으로 40여m 올라가니 마애관음보살상이 우릴 반기고 남산에서 파견된 문화해설사가 이 석불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해설은 무료이니 신청만 하면 된다고 하니 세상이 참 좋긴 좋아졌는가 보다.
기둥처럼 솟은 큰 바위에 관음보살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높이가 1.5m 정도이고 머리에는 화관을 썼으며 특이한 것은 입술부분이 붉은색을 띠고 있는데 일부러 채색한 것이 아니라 바위의 붉은색을 그대로 살려서 입술부분을 조각한 것이라고 하니 그 시대의 예술의 경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애관음보살상을 지나 한참을 오르니 삼릉계곡 선각 마애육존상이 나타났다.
신라시대 회화작품이 매우 드문 상황에서 제법 넓은 평지에 앞뒤로 있는 바위 면에 여섯 불상을 세긴 삼릉계곡 마애선각 육존상은 당시의 회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며 바위 표면에 먼저 그림을 그리고 세심한 정성을 들여 새겼다. 천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이 선명하게 살아있다.
가뭄으로 인해 계곡의 물은 말랐지만 냇가에 보이는 연약한 나무들의 물오른 연둣빛에서 봄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었다. 노란 생강나무와 진달래꽃, 개울가의 버드나무에서 느껴지는 봄은 우리들의 마음에도 벌써 왔기에 산행의 즐거움이 한층 더해지는가 보다.
조금 더 올라가니 개울 맞은편에 석불좌상이 보여 우리 일행이 쉬는 틈을 타 개울 건너 보수 중인 보물 제 666호인 삼릉계곡석불좌상을 촬영하려고 가 보았다.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주위에 설치해놓은 장막 속에 석불좌상이 있어 볼 수는 있었으나 새로 제작된 것 같아 천년의 세월과는 너무 멀어 아쉬운 감이 많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무데크로 된 길고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데 정체현상이 나 느리기만 한 산행이 계속되었다. 시원해 보이는 대나무 사이를 지나니 상선암이 우릴 반겼다. 일행들이 뒤에 있어 잠시 기다리면서 물 한 잔 하는 작은 여유로움을 느껴본다.
경주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암자인 상선암은 본래 신라의 절터로 알려진 곳이다. 현재 있는 건물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등산로에 위치한 지리적 잇점으로 인해 찾는 이가 많은 곳이다. 상선암 자체는 볼 것이 별로 없이 작은 법당 하나와 요사채가 있을 뿐이나 등산하는 이들에게는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이만 한 곳이 없을 듯하다. 상선암에서 거친 숨을 고르고 산행로로 접어들 즈음에 보살님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맛난 떡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모르지만 이런 배풂의 미덕이 쉽지는 않을 텐데도 금오봉으로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고 있으니 자비의 실천이 아닌가 싶었다. 암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3분 정도 올라가니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상선암 마애여래좌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높이 5.2m에 이르는 큰부처님이 배리평야를 굽어보며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석가여래좌상은 거칠게 바위 면을 파내어 감실을 만들고 얼굴 부분은 돋음 새김을 하여 얼굴 아래는 선각으로 신체와 연화대좌를 조각해 놓았다.
석가여래좌상 앞에는 전망대가 될 정도로 조망이 좋았고, 금오봉에서 내려오는 맞은 편 능선과 냉골 계곡이 여기서는 한눈에 보였다.
천년세월 온갖 풍상을 지켜온 석불. 간절한 기원이 이루어낸 부처님이지만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한낱 멋진 사진촬영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천여년 간 이 부처님 아래서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했을 참배객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봄바람이 되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천년의 기억을 멀리하고 조금 더 올라가니 새로운 갈림길이다.
←삼불사2160m,→금오봉810m 라는 이정표에서 금오봉으로 오르는 산등선은 모두가 전망대일 만큼 조망이 매우 좋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한적하고 느슨하게 나무계단을 통해 삼거리에서 50m를 오르니 금오산 정상이 우릴 반긴다.(11:37)
‘金鰲山‘이라고 힘있게 씌어진 정상석에서 한 참을 여유를 부리다가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서니 임도가 나타났다. 그 임도를 따라 하산하는 편안함이 바로 경주시민들이 자주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쉼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경주 남산에서 제일 기가 세다고 하는 팔각정 터를 찾았으나 그 터에 이미 한 무리의 일행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린 그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싸우는 소리가 나 돌아보니 옆 팀 일행인 듯한 부부가 내려오면서 싸우는 소리였다. 일행에게 가까이 와서는 부부싸움의 도를 넘어 민망함은 우리가 더했다. 가까울수록 조금 더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 한 잔까지 더해진 여유로운 점심을 먹고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하산 길에 ‘할아버지와 피리’의 못 다 이룬 사랑이 바위가 되었다는 상사바위를 지나 금오정을 들렀다. 임도를 만난 뒤 금오정 표지를 보고 조금 더 가면 널찍한 바위에 정자 하나가 반기니 바로 금오정(金鰲亭)이다. 금오정에 오르니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식사도 하고 담소도 나누고 있었다. 잠시 쉬면서 금오정 현판에 걸린 금오(金鰲)라는 한자가 무슨 뜻일까 추측만 하고 말았는데 집에 와 찾아보니 자라 오(鰲) 또는 바다거북을 의미 했다. 그러고 보니 금오정 주변의 바위와 돌들이 거북등 껍질처럼 균열이 많이 가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며 이름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탁 트여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금오정에서 바라본 상사바위와 삼국통일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통일전과 배리평야를 보면서 여유롭고 따사로운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산행을 마무리했다.
[금오신화]
경주 남산은 남북으로 8km, 동서로 4km 크기의 계곡 40개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천년 신라의 영욕을 간직한 산, 신라인들이 꿈꾼 미륵 세상이 구현된 산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가 김시습이 은거했던 산으로도 유명하다.
김시습은 용장골에서 가지를 친 은적골에 은거했는데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전국을 떠돌다가 나이 서른 살에 이곳에 은거 했다고 한다. 그는 6년 동안 이곳 경주남산 용장사에 매월당이라는 초당을 짓고 소설 "금호신화"를 집필했다고 한다.
김시습은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남녀 간의 애정을 주로 다룬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써 세상에 내놓지 않고 석실에 감춘 뒤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아는 자가 있으리라"고 했고 현재 금오신화의 일부인 단편소설5편이 전해진다.
[경주 남산과 망산]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 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 한 男神이였고, 또 한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女神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하고 외쳤고, 이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노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상사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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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국사곡 어귀에 외로운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할아버지는 혼자 살았다.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참기 어려워 가끔 식구들 무덤으로 찾아가서 울었다. 그래도 허전하긴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보면 손자를 보는 듯 귀여워하였다. 동리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랐다. 그 중에서도 이웃집에 사는 피리라는 소녀를 퍽 귀여워하였고, 피리도 할아버지를 극진히 따랐다. 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 피리도 자라서 어느덧 꽃다운 처녀가 되었다.
피리는 철이 들면서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맛있는 음식 등을 할아버지께 갖다 드리며 기쁘게 해 드렸다.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 피리였다. 어느 해 봄 피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늘 시중을 들어 주던 피리가 없으니 못 견디게 쓸쓸하였다. 다시는 못 올 줄 알면서도 피리를 기다렸다. 어느 날도 방안에 앉아 피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살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그리던 피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 '피리!' 하고 외치며 일어섰으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피리의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뜨면 천장에 있고, 이불을 쓰면 이불 속에 있고, 눈을 감아도 눈 속에 나타나서 피리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었다. '피리!'하고 할아버지는 크게 외쳐 보고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저 자식처럼 귀여워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처녀 피리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안되지? 안돼'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이제 며칠 안가서 낙엽처럼 질 몸이 꽃 봉우리같이 피어나는 피리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이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짐해 봐도 헛일이었다. 피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뱀처럼 기어 나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리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과 피리를 아내로 삼겠다는 욕심이 머리 속에서 쉴 새 없이 싸우고 있건만 끝내 무서운 욕망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다 차지하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국사곡 산정에 올라가서 피리가 이사 간 마을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무에 목을 메어 죽어 버렸다. 할아버지의 혼은 그곳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후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몸을 칭칭 감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몸부림을 치며 깨어나면 그것은 꿈이었으나 너무나 소름끼치는 무서운 꿈이었다. 그 무서운 꿈은 한번만 꾸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으면 또 다시 되풀이되고 하니 피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볼품없이 되어 가는데 동리 사람들 사이에는 수군수군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생각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던 생각이 상사뱀이 되어 피리를 찾아오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여 괴로움에 지쳐 있던 피리가 어느날 몽롱하게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아 죽어 버렸는데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아 피리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오.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더니 이제 죽었으니 죽을 길도 없구료."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힘없이 국사곡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꿈을 꾸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피리는 조용히 일어나서 할아버지가 힘없이 가던 길을 따라 국사곡으로 들어가서 정상에 서 있는 그 바위에 올라섰다. "할아버지, 인간세상에서는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나이를 아니 먹는 바위가 되어 원한 맺힌 소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한다. 지금 큰 바위부분에 붉게 보이는 반점이 있으니 그것을 피리의 핏자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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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 1등으로 신청 합니다!! 유딩크&쥴리 {우리집 왕비}...둘 신청 합니다!!
3등 신청합니다.(염). 글고 오시지 대장님:아침 출발시간과, AB코스 시간도 적어주심 고맙겠습니다.
바빠서 빨리 못하고 있습니다 될수있는데로 빨리 올려드리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