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오류에 직면할 때 이것만은 잊지 마라
Ⅰ. 서론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법과 구원 그리고 교훈들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입으로 들려오는 그 말씀들은 우리의 삶뿐 아니라, 인간세 상을 변화시키고 남을 만한 큰 비밀들과 놀라운 지식들이 담겨 있어 그 또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차원을 넘어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비교 분석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많은 의문들이 발생하기 도 한다. 그 중에 문자적인 부분들을 다룰 때 ‘오류’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스 데반의 설교에서 나오는 내용들과 창세기와의 다른점들, 그리고 히브리서에 나오는 ‘첫 장막’이라는 단어에 대 한 오류, 또 같은 사건을 다루는 복음서들간의 차이점들등이 있다. 이런 오류들을 접하면 처음에는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성경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탄생물로 생 각되고, 그들의 파렴치한 범죄행위를 목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심지어는 우리가 생명을 걸고 믿고 있는 예 수 그리스도가 비방자들의 말대로 인간의 창작물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믿음의 선배들의 가르침으로 극복해내기도 하지만 그 충격을 한번 경험하고 나면, 성경에 대한 신뢰가 반감되어, 더이상 성경말씀이 그 전보다 ‘송이꿀’처럼 달지 않게 된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경우 인생이 우울해 지거나, 세상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도 또한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동일한 감정적인 경험을 하였고, 어릴 적 부터의 믿음에 금이 가기 도 하였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생의 여러 경험으로 말미암아 밀려오는 의심들 중, 많은 것들이 무지에 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고 난 지금, 그러한 의문점들은 충분히 해결될 수 있으며, 그 해결과 설명을 위해 선진 들의 견해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제 곧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할 복음전도자의 사명 을 띠고, 사역의 현장으로 나아가야할 사명자로써,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결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 이다.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하는 선진들의 가르침 중 단연코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칼빈”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현재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한 칼빈은 이러한 오류들을 어떻게 설명 하였으며, 그가 생각하는 성경 기록의 영감성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칼빈의 견해에 대한 여러 반론들과 옹호하는 입장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과정에서 도출되는 결론을 통해 우리가 성경의 문자적인 오류들을 접할 때 어떠한 자세로 이해해야 하는지 그 교훈을 배우고자 한다. Ⅱ. 본론
1. 칼빈의 영감론
1)칼빈의 영감론 칼빈의 성경영감에 관한 견해는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어거스틴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들은 둘 다 ‘부 분적 영감’의 개념을 부정하였으며, 성경저자들의 성령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인간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동 일하게 성경을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은 인간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명백하게 주 장하였다. 칼빈은 성경 저자들은 성령의 진정한 필기자이며, 성령께서 주신 말씀을 “반드시 기록된 증거”로 남게 하였 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순히 성령의 기구 혹은 기관이며 따라서 그들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며, 그들 의 문체는 성령의 문체라고 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성경을 인용할 때 하나님의 순결한 말씀으로 인용하였다. 이처럼 성경은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을 공손하며 온순히 받아들어야 한 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성경이 ‘성령의 학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칼빈이 말하는 이러한 영감의 양식은 ‘구술(dictation)’로 본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주어졌다 는 표현은 영감의 양식이 구술이라고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영감의 결과가 마치 구술에 의한 것처럼 인간적인 모든 요소와는 관계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성경은 “문자 적”혹은 “비유적” 구술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에, 그 결과는 원본에서 오류가 없는 문서라 할 수 있다. 2)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듯한 칼빈의 주석들 먼저 사도행전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는 야곱이 75명을 데리고 애굽으로 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모 세는 다만 70명 만을 언급했다. 칼빈은 이에 대해 “그러므로 스데반의 말들이 모세 요경의 것과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서 헬라어 번역판 창세기에 있는 잘못된 숫자를 복사자들이 사도행전의 이 본문에 기입해 넣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관해서 어떤 사람이 보다 더 완강하게 논쟁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도록 내버려 두자. 우리는 다만 바울이 족보에 너 무 착념하거나 호기심을 갖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까닭없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1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16절에 대해서는 “그리고 한편으로 스데반은 야곱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이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샀 던 무덤에 장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라고 한 데는 분명히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 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장사지내기 위해 헷 족속 에브론의 굴(창 23:9)을 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다른 장소에 묻혔다. 즉, 그의 아버지 야곱이 양 일백 마리를 주고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샀던 밭에 장사되었다. 그 러므로 이 부분은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히브리서 11:21에서 야곱이 그의 침상 머리에서 경배했다는 말(창47:31)과 그의 지팡이의 머리에 의지 하여 경배했다는 말(히11:21)에 차이가 있는데, 본질적으로 심각한 차이는 아니지만, 이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 는 문제성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기로는 사도들이 이 점에 관해서 꼼꼼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 우유만을 먹어야 하는 배 우지 못한 자들처럼 글자에만 얽매이지 않앗다. 그러나 독자들이 성경의 순수한 원본을 접합 수만 있다면 여기 에는 아무런 위험성도 없다.” 여기서 칼빈은 히브리서 11:21이 본문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끼어들었을지도 모르는 오류를 주의하여 생각지 않고, 오히려 사도들이 이런 사소한 것의 정확성에는 관심이 없다는 취지로 영감받은 저자들의 습관만을 우의 하였다. 이것이 만일 칼빈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역사적 사실의 오류는 영감받은 제자들이 기록한 정경에 있을 수 있게 된다.” 1 사도행전 주석, 행 7:14 이러한 주석의 표현들은 칼빈이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위협적인 것인데 이를 해석하고 평가 하려면 칼빈의 가르침을 보다 광범하게 섭렵해야 한다.
3)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는 성경의 특성 칼빈의 대작인 <기독교 강요>에는 성경의 특성에 대한 많은 언질들이 있는데, 주의깊에 참작하지 않으면 증거를 놓치기 쉽다. 그 언질들 중 성경에 과한 그의 중심적 사상을 잘 나타내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신탁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약되어 인정을 받을 때에는 어떤 사람도 인간으로써의 상식과 육 감을 결여하고 있지 않는 한 말씀하신 자를 불신할 만큼 뻔뻔스러울 수는 없다. 그러나 말씀이 매일매일 하늘 로부터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를 영구히 기억되게 하기 위하여 그가 기뻐하신 수단으로 성경책만 을 존귀케 하셨기 때문에 성경이 갖는 권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말씀을 주시는 것처럼 성 경이 하늘로부터 발설된 것임을 확신하는 데서만 그 권위가 생길 수 있다.”(1권 7장 1항)
4) 영감에대한 칼빈의 개념 칼빈의 영감과 그 효과에 대한 개념에 관해서는 디모데후서 3:16과 베드로후서 1:20 이상으로 그의 사상을 정확하게 나타내주는 것은 없다. 디모데후서 3:16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울은 첫째로 성경의 권위 때문에, 그리고 둘째로 성경이 가지는 효용성 때문에 성경을 높이 평가하고 있 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지지하기 위해서 성경이 신적으로 영감된 것임을 선언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영감된 것 이라고 하게 되면 누구나 논쟁의 여지없이 경외심을 가지고 성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종교와다른 종교들을 구별해 주는 원리는 바로 이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선지자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도구로써 하늘로부터 명령되어지 것들을 말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 든지 성경에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은 것을 기정된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율법과 선지서들은 인간의 뜻을 따라 전달된 교리가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구술된 교리이다. 모세와 선지자 들은 그들에게서 우리가 받은 성경말씀을 임의로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적 감동을 받아 말했기 때문에 말 씀해 주시는 이는 사실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입 자체라고 확신있고도 대담하게 증거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 님께 대한 것과 동일한 경외심을 가지고 경외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유래되고 안간적인 어떤것도 혼잡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1:20에 관한 주석에서 칼빈은 거듭 우리를 이렇게 깨우쳐 주고 있다. “예언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이요,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해야 한다. 바른 지식은 선지자들을 하나 님처럼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들이 성령으로 감동되었다고 했지 그들의 주체성마저 상실해버렸다고는 하 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다만 성령을 그들의 지도자로 삼아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은 그 자신의 지성소에서처럼 그들의 입도 주관하셨다.” 2. 브리그스와 두머르그의 주장 성경이 신앙과 생활, 구원의 교리와 천국에 관해서는 무오하나 역사와 과학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이 론을 지지하는 글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칼빈의 가르침도 이러한 이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들 중 대표적으로 브리그스(Charles Augustus Briggs)박사와 두머르그(Emile Doumergue)가 있다. 먼저 브리그스는 말하기를 “칼빈이나 루터,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개혁자들이 성경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오류는 사소한 문제에서만 발견되며 신앙이나 생활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 오류들은 여러분의 종 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여로분의 신앙, 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의 생활이나 행위와는 무관하다. 성경은 구원 은총의 목적과 관련된 범주 안에서 생활을 위한 유일하고 무오한 볍칙으로써 순수하고 거룩하고 오류가 없다. 성경은 지상에 신국을 건설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선포된 신적인 문제들에 관한 한 모두 완전하다. 그러 기에 신국은 지구적이요, 조용하고 평화스러우나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가지고 모든 인간사의 전 영역에 걸쳐 서 침투하여 결국은 세상과 인간을 변화시킨다.” 브리그스 박사는 이러한 특징이 칼빈의 가르침과 사상에도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쟁의 요지는 이렇다. “칼빈의 경우 성경의 무오성은 오류와 양립한다.”(the infallibility predicated of scripture is, for Calvin, consistent with the errors) 이 오류들을 칼빈이 인정하고 있다고 브리그스가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브리그스 뿐만 아니라 두머르그(Emile Doumergue)박사도 주장하였다. 그는 영감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기계적 구술설(mechanical dictation)을 가르쳤다고 주장한 시벅(R.Seeberg)의 오류를 지적 한 공을 세운 바 있다. 그런데 이 두머르그 역시 여자(如字)적 축자 영감론(Literal, verbal inspiration)을 가 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칼빈이 성경의 단어들을 중요시하지 않고 “교리, 즉 영적 교리인 본질적 내용”2 만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대로 과연 칼빈이 단어를 중요시 하지 않고, 영적교리만 중요 하게 여긴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3. 반론 1) 성경 = 천국(영적)교리 먼저 칼빈은 그가 말하고 있는 교리를 성경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다. “율법과 예언들은 사람의 뜻을 따라 전언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구술된 교리이다.”3라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기정된 원리로 인정해야만 성 경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듯 성경을 경외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천국교리의 저장소 그 자체이므로 성경과 천국교리는 구분이 있을 수 없다.
2) 신적충동으로부터의 저작 칼빈이 성령의 영감이 단어들의 세부적인 것과 임의로 말해진 말들에까지 적용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찌 그는 이렇게 확실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의 손에서부터 우리가 받아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을 자의로 말하지 않았고”, “성경은 전혀 인간적인 것과 혼잡되어 있지 않으며, 그 저자들은 주님의 입 자신이 말씀하셨다고 두려움 없이 간증할 수 있었고”, “그의 지성소에서처럼 그들의 입도 주장했다.”라고 말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성경의 저자들이 신적충동이 아니고는 자의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에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4. 축자영감론에 대한 두머르그의 주장 두머르그는 칼빈이 축자영감론을 가르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두머르그는 동일한 제목 하에서 “단어 들이 첨가되었거나, 삭제되었다”고 말하면서 실증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칼빈의 엡 2:5, 히 9:1, 딤전 1:3, 약 4:7의 주석 등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2 E. Doumergue; Jean Calvin; Les hommes et les choses de son temps, Tom. Ⅳ, Lausanne, 1910, p.78 3 칼빈주석, 딤후 3:16 먼저 에베소 2:5에서 칼빈은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는 구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어떤 다른 사람이 혹시 이것을 삼입했는지 그 여부를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하등의 어색 한 점이 없으므로 나는 그것이 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부담없이 받아들인다.”4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 구절이 옮겨 베껴지는 과정에서 혹시 첨가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만 칼빈이 생각하고 있을 뿐, 그는 이 말들을 바울의 것으로 판단하고 있고, 그 가정하에서 그 말들의 뜻을 주석 해 나갔다. 그러므로 이는 분명 성경 원본상의 문제일 뿐 문제삼을 만한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9:1에서 칼빈은 말하기를 “어떤 사본들에는 ‘첫 장막’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 ‘장 막’이라는 말에 오류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무학작의 소행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는 무지하여서 ‘첫’이라는 형용사가 받고 있는 명사를 바로 찾지 못했다. 그래서 언약에 관하여 말하여진 것을 착각하여 무식 하게도 ‘장막’이라는 단어를 첨가해 놓았다.”5 여기서 칼빈은 원 저자의 과오가 아니라 무식한 독자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칼빈이 원 저자 의 정확성에 대해 열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두머르그의 주장대로 칼빈이 단어들에는 관심이 없고, 영적교리들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면 칼빈은 무식한 독자의 소행을 깊이 생각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고, 그 가 오류라고 간주한 것을 곧바로 성경 원 저자의 소행으로 돌려 버렸을 것이다. 이 외에도 두머르그가 이의를 제기한 칼빈의 주석들은 문제삼을 만한 것이 될 수가 없다. 두머르그가 자기의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또 다른 표제는 바로 복음서 저자들 간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그는 마 8:27과 9:28에 관한 칼빈의 주석을 인용하고 있다. 사실 복음서 저자들이 같은 사건을 설명함에 있어 서 서술상의 차이점이 있음을 칼빈 자신도 인식했음을 우리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축자영감 의 흠집을 나타내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성경의 유오성을 인정하는 말인가? 예를 들어 복음서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는 에피소드를 다룬 장면이 있는데, 복음서 간에 차이점 이 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사소한 것들이고, 중요한 것은 ‘회당장이 그의 딸을 고칠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그의 집에 들어오시도록 간청하고 있는 것’이 세 복음서 안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 복음서 기자들에게 그들이 꼭 기록해야 할 것만을 구술하셨다. 구술하실 때 각 각 자기 자신의 복음서가 독특한 부분을 갖게 하시되 전체가 한 체계로 모아질 수 있도록 하셨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의무는 상호관계성을 찾아 하나로 결합시키는 데 있다. 우리는 네 복음서가 모두 똑같이 한 입에서 나 온 것임을 믿고, 그 네 복음서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복음서 간의 상호관계성에 주의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두머르그는 “시간상의 순서에 오류가 있다.”는 이의를 제기하면서, 칼빈의 주석 눅 4:5와 마 27:51등 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사건들을 서술할 때 연대상의 순서를 꼭 지킨 것은 아니다. 그 점 을 칼빈도 알고 있었다. 그 점은 문학형식의 문제이지, 축자 영감의 문제는 될 수 없다. 끝으로 두머르그는 칼빈이 단어들 보다 “영적교리”만을 중시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칼빈이 구 약의 인용구들을 취급하는 방법을 문제삼고 있다. 물론 칼빈은 누구나 다 이해해야 하는 대로 신약저자들이 구약을 언급함에 있어서 구약의 구절들을 여자적으로 항상 인용하지 않았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의 4 칼빈주석, 엡 2:5 5 칼빈주석, 히 9:1
구절들이 인용에서 발생되는 난해를 칼빈은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서 10:6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독자를 적잖게 혼란케 하는 구절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그 구절이 바울에 의해 서 부당하게 왜곡되어진 것 처럼 보이고 또 그 말들 자체가 아주 다른 뜻으로 변해져버린 듯한 까닭이다.” 그리고 로마서 11:8에 관해서 이사야서를 인용한 말들이 “다소 바뀌어져”있고, 바울이 “그 선지서에서 우 리가 발견하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악의 영을 부음받아 그들이 보고 듣는데 계속 둔하여졌다는 이 뜻만을 취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에베소서 4:8에 관해서는 “그의 논증의 목적하는 바를 위해서 바울은 이 인용구의 참된 의미에서 훨신 벗어났다.”고 말한다. 또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구절에 관해 “사실은 이 구절이 오히려 난제 이다. 왜냐하면, 시편에는 ‘당신은 사람들 대신 선물을 받았나이다’로 되어 있는데 바울 사도는 이 말을 바꾸 어 ‘선물을 주셨다’라고 했으니, 이는 정반대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각 경우마다 사도를 정당화시켜 주고 있고, 부당하게 왜곡시킨 듯한 것도 각각의 경우에 있 어서 그 구절의 계획된 용법과 완전히 합치하며, 사도가 저술할 때 받은 바 영감과 완전 일치하는 것임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난제들에 대해서도 칼빈은 “이 난제의 매듭은 이렇게 하면 풀어질 수 있다.”라고 말하며 해결책으로 믿는 대안을 제시한다. 즉, 칼빈은 바울이 구약 성구를 “본래의 의미에서 상당히 빗나갔음”을 인정하면서도 즉 시 사도를 변호하여 “성경을 부적당하게 사용했다”는 비난을 면케하고, “시편을 자세히 읽어보면 어떤 독자든 지 그가 높이 들리워 올라갔다는 말은 엄격하게 하나님께만 홀로 적용됨을 확신할 수 있다”6는 식으로 반박한 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1) 칼빈은 구약 성구의 인용시 성구들의 근원적인 의미가 중요치 않다고 암시한 일은 전혀 없다. 2) 칼빈이 말하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구약 성구들의 정확한 용어나 참뜻이 중요치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울이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적합한 특별한 진리나 적용과 관계되는 관계되는 성구를 추 출한 것으로 만족했다는 것이다. 칼빈에게는 인용된 구약 본문이나, 바울의 인용한 글 모두 영적진리로써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두머르그의 주장과 같이 칼빈이 단어들보다는 영적진리만 중시했다는 것은 엉뚱 한 것이다. 3) 필사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그 원저자의 기록물인 원본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확실히 해두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본에 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칼빈은 원본이 어떠한가 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본문 비평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원문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칼빈은 원본의 진정성(眞正性)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그의 열심은 성 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하는 그의 사상과 분리될 수 없고, 성경은 그 안에 전혀 인간적인 요소가 없으 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직접듣는 것과 같다는 것이 칼빈의 최종적 결론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있다. 4) 결론적으로 칼빈은 성경의 단어들의 오류를 원저자의 실수나 잘못이 아닌, 복사자들의 잘못으로 보고 있다. (마태복음27:9 스가랴 -> 예레미야, 사도행전 7:14-16 70 -> 75 등) 6 칼빈주석, 엡 4:8
Ⅲ.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의 오류를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1. 칼빈도 숫자나 자근 사건과 같은 세부적인 것까지 성경의 저자들이 꼼꼼하지 않았던 것을 인식했다. 이 말 은 저자들로 하여금 기록케 한 성령이 이런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꼼꼼하지는 않았음을 뜻한다. 그 러므로 ‘지나친 정확성’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아선 안 된다. 이러한 척도는 인위적인 표준에 불과하 다. 그러한 척도로는 성경이 오류 투성이 책임을 입증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칼빈에게는 그러한 표준이 없 다. 2. 성경은 일종의 문학 작품이다. 예를 들어, 솔로몬 성전이 7년 반 만에 완성되었는데, 이를 7년 만에 완성 했다고 하는 것은 오류라 해야 하는가? 또 어떤 왕이 22년을 다스렸다고 했을 때, 꼭 22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꽉 채워 통치했을 때만 22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렇게 너무도 지나치게 정확성을 따지자면 끝도 없 다. 성경은 현학적 정확성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3. 칼빈과 같은 다작(多作)의 저술가는 종종 그의 중심 사상이나 교훈의 지배적인 진의(眞意)와는 약간 상 이한 견해나 입장을 말할 수도 있다. 사도행전 7:14과 히브리서 11:21에 관한 그의 주석을 본문의 문제의 해 결책을 유일한 열쇠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상이한 견해가 있을찌라도, 우리는 칼빈이 성경에 대한 확고부동한 입장을 밝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분으로 전체를 왜곡시키는 오류 를 저지를 필요는 없다. 4.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오류들을 접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복사과정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현대의 성경에는 ‘이독’(異讀)들이나 사본들 간의 차이에 대해 표기하고 있는 것 이다. 5. 그리고 현대적인 논리의 사고방식과 현학적인 정확성의 잣대를 가지고 성경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성경 은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지, 과학책이나 현대적 논문이 아니다. 만약 바울 서신이 현대적 사고방식에 입각한 논문이었다면 그가 참고하고 인용한 모든 도서에 대한 각주와 저작을 정확히 표기했을 것이다. 그러므 로 고대의 문학책을 현대의 기준에서 비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성경을 대하면 성경에 나오는 사소한 차이들과 오류는 쉽게 극복되며, 더이상 충격같은 것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 자체도 살아있 고 운동력이 있으며,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책이다. 또 악을 제어할 수 있게 하고 이 어지럽고 패역 한 세대에 진정한 인간성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견해와 같이 성경말씀을 하 나님 경외하듯 경외해야 하며, 말씀과 날마다 동행하고 묵상하여야 한다. 그럴때 우리의 세상은 사람 살만한 세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
참고도서: 1) <칼빈의 성경관과 주권사상>/존 머레이/ 기독교문서선교회 /1976 2) <칼빈의 신학사상>/신복윤/청광문화사/1993 3) <칼빈의 기독교강요 분석 1권>/장수민/칼빈아카데미/2006 4) <기독교 강요> /존 칼빈/ 세종문화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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