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이 결정되었다. 똑같은 투쟁 똑같은 푸념이 12년동안 반복되고 있다. 내 그래서 최저임금이 지나온 역사와 투쟁의 문제를 개괄적으로 한번 정리해 보았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기대하며....
1. 최저임금이 지나온 길.
최저임금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1988년으로 매우 일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저임금을 전 세계에서 최초로 도입한 국가가 뉴질랜드였는데 1894년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무려 100년 가까이 늦게 도입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나라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최저임금을 도입하였는데 우리나라도 1953년 근로기준법을 제정할 당시 사회부 장관으로 하여금 최저임금을 정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집어넣기는 하였다. 그러나 실시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조항은 폐기되었다가 근로기준법과는 별도의 법으로 최저임금법이 1986. 12. 31. 공포되어 1987년 최저임금심의 위원회의 협의 거쳐 1988년에 처음으로 최저임금이 고시되었다.
당시 고시된 최저임금은 10인 이상 제조업 사업장에만 적용되었는데 1그룹 (식료품 등 경공업 제조업)은 시급 462원 (월급 11만원), 2그룹 (기계 등 중공업 제조업)은 시급 487원 (월급116천원)으로 고시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 정도의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였던 10인 이상 제조업 사업장의 노동자수는 4.2%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전 산업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된 1990년에는 시간급 690원이었고 (월급 156천원) 최저임금 대상 10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는 4.3%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최저임금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 산업 1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 처음으로 적용되었던 2001년의 최저임금은 2,100원 (월급 474천원)이었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최저임금 적용을 받는 노동자 수가 2.8%으로 대폭 떨어진 것이다. 이유는 불문가지다.
최저임금 고시액이 터무니없이 낮았던 것이다. 이후 10년이 흐른 2010년에 고시된 최저임금은 시급 4,110원 (40시간 기준 월급 859천원, 44시간 기준 월급 929천원)으로 전체 노동자의 15.9%가 여기에 해당하였다. 10년 동안 최저임금이 오르기도 하였지만 상당히 많은 노동자가 최저임금 수준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최저임금 고시가 결정적인 임금 수준으로 되는 노동자는 250만명에 달하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이 올라갈수록 최저임금에 포섭되는 노동자 수는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나, 여기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아니다.
청소부, 영세기업, 사내하청, 아르바이트, 계산원 등등 비정규직 또는 불완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다. 2011년 4,320원, 2012년 4,580원, 2013년 4,860원(40시간 기준 1,015천원, 44시간 1,098천원)으로 정해졌고, 최저임금 적용대상 범위는 그 다지 큰 변화를 가져 오지 않고 있다.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3년 이하 징역이나 2천 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도록 정해져 있다. 그런데 난 최저임금 위반으로 인해 벌금형 이상으로 처벌받았다는 사용자가 있다는 소리를 아직까지 듣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최저임금과는 다른 것이지만 최저임금과 연동될 수밖에 없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2000년부터 시행됨)상의 2012년“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 535,354원, 2인가구 942,197원, 3인 가구 1,218,873원, 4인 1,495,550원, 5인 가구 1,772,227원 이다. 일례로 2명의 미성년자 자녀를 둔 부부가 최저임금을 받는 사업장에 다녀 부부합계 200만원 정도를 받는다면 기초생활 수급자도 아니거니와 차상위 계층도(최저생계비 기준 120%이하) 아니게 되어 기초생활보장법상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비교를 위해 통계청 조사를 인용하면 1인 노동자의 2010년 실태생계비는 평균 136만원이었다. 3인 가구 최저생계비로 고시된 122만원을 뛰어 넘고 있다.
2. 최저임금 투쟁이 지나온 길.
최저임금위원회는 처음부터 노사정 동수로 구성되었다. 1987년부터 1999년까지 노동자측의 위원은 모두 한국노총에서 담당하였다. 그리고 2000년부터 민주노총이 노동자 측 위원의 일정한 몫을 가지고 참여를 하게 된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2012년 현재 12년의 투쟁의 역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그 이전에 참여를 하지 못한 이유는 정부가 민주노총을 불법적인 단체라 하여 배척한 것도 있거니와 1998년 민주노총 합법화 이후 노사정 협상 테이블에 참여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내부의 격론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최저임금 투쟁은 처음부터 정형화되어 있었다. 최저임금법의 일정에 완전히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노동부 장관은 매년 3. 30까지 최저임금 심의 안을 최저임금위원회에 제출하고 90일 이내에 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하였기에 4월부터 6월말까지가 심의기간이었다. 민주노총은 투쟁일정을 6월에 모두 집중시켰던 것이다. 심의가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이 나면 그것으로 투쟁은 끝이었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의 조직 상황으로서는 최저임금 투쟁이 조합원들의 관심 밖 사항일 수밖에 없었다. 각 사업장의 임단투가 중요하지 최저임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지고지순한(!) “연대”의 정신으로 최저임금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6월에 한두 번의 단위사업장 간부들을 서울로 집결시켜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집회를 하는 것으로 투쟁을 마무리는 것이 정형화되었다. 민주노총의 최저임금 투쟁은 여성연맹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나이 드신 여성 청소 노동자들이 주력부대였다. 이들은 아주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이고 전형적인 최저임금 적용 사업장이다. 이들처럼 최저임금이 “임금”이 되는 노동자들의 조직률은 거의 무시해도 좋은 만큼 조직되어 있지 않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인,
그것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조직 중심의 나라에서 최저임금 투쟁 운운하는 것이 언감생심일 수 있다. 이 정도로 투쟁을 해온 것만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최저임금위원회에 들어가 호통치고 퇴장하고 공익위원들을 설득하고 하는 것이 무용담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가상한 노력으로 250만명에 이르는 최저임금 적용 노동자들의 임금을 결정하는 것이 뿌듯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저임금은 개별기업의 임금협상이 아니다. 최저임금은 사회 임금으로 전 사회에 통용되는 최저 수준의 임금으로서 그것은 오로지 자본과 노동간의 힘의 관계에서 정해 질 뿐이다. 최저임금이 무슨 과학적 근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노사정이 각자 몇 퍼센트의 인상률을 제시하고 그 범위에서 타협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투쟁은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협상의 중요성만이 더욱 부각될 뿐이다. 힘이 없기 때문에 협상하여야 한다는 아주 희한한 논리를 자랑스럽게 들이대는 사람들에게는 애초부터 조직력이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혁명의 혼이 거세된 자들은 세치의 혀를 놀러 자본과 협상하여 투쟁할 때보다 더 많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대세이다. 최저임금 투쟁의 지나온 역사는 이러한 흐름을 그대로 보여 준다. 조직을 세우려는 험난한 투쟁을 버리고 세치 혀를 놀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은 주는 대로 받아 먹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 사회의 사민주의 국가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피나는 노동자의 투쟁으로 자본을 뒤엎을 수 있는 혁명전야가 오자 자본이 마지못해 타협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노동의 조직력이 없는 한 자본은 노동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노동의 조직력이 없는 한 실질임금, 생활임금, 문화임금 운운해 봐야 공염불일 뿐이다. 모든 길은 조직화와 투쟁에 있을 뿐이다. 투쟁에 지친 분들이 투쟁현장을 떠나주어야 한다. 그것이 투쟁을 돕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