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미인을 표현 하는 대표적인 어휘는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이다. 이 단어는 각각 중국 고대의 4대 미녀에게 연결이 되는데, 여기에는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게제되어 있다.
서시(西施): 물고기가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다(沈魚).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다(落雁). 초선(貂?):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다(閉月). 양옥환( ?玉?):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리다(羞花).
중국 고대의 10대 미인을 정리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중국의 미인사(美人史)는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인잔혹사(女人?酷史)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의 4대 미인 중 단 한 사람도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일생을 마감한 경우가 없으며, 이는 10대 미인으로 확대해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인들이 칭하는 4대 미인 또는 10대 미인이란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이었던 봉건시대에 남성의 욕망(그것이 공적이었던 사적이었던)에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봉사했던 여인들에 대한 얘기이다. - B -
*중국 고대의 10대 미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나, 하기하는 10대 미인에 대한 지지도가 비교적 높다고 생각됨 *사진 및 데이터는 浙江在? (http://www.zjol.com.cn)에서 퍼온 것이며, '해설'은 중국 원문 번역이며 '보충'은 내 개인적으로 보충한 내용이다. *여기에 실리는 사진은 실제 인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
1.서시
[해설] 서시(西施)는 현재의 절강성 제기(??; 중국어 발음은 주지)의 포양강(浦?江)동면의 금계산 아래의 정가(?家)에서 출생했으며, 외조모의 성은 시(施)이다. 서시는 강의 서면에 있는 저라촌(??村)의 외조모 집에 살았으며, 어릴 적에 줄곳 강에가서 비단을 빨곤(浣?)했다. 아직도 저라산 아래 강변의 바위에는 왕희지가 쓴 ‘浣?’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보충]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책사 범려의 전략에 따라 오왕에게 보낸 미녀. 부차는 서시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함으로써 결국 구천에게 멸망당하게 됨. 와심상담(?薪??)의 고사의 출처. 중국 고대 역사에서 애용되었던 미인계 중 하나.
[보충] 진원원은 '강남팔염(江南八?)' 중 하나로 불리운 명말의 유명한 기생으로, 명 숭정황제에게 바쳐지기 위해 간택되어 북경으로 왔으나 숭정황제가 관심을 갖지 않아 간택사였던 전(田)이라는 외척의 개인적인 종복이 된다. 명의 장수로 훗날 청에 투항했던 오삼계와 조우하여, 오삼계의 첩이 된다. 일설에 의하면 오삼계가 청에 투항한 것은 진원원 때문이었다. 오삼계의 청에 대한 반란인 '삼번의 난' 중 오삼계가 사망하자, 진원원은 중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6.화예부인
[해설] 화예부인(花?夫人)은 청성(?城: 현재 사천의 관현서 四川灌?西) 사람으로,서국장(徐?璋)의 딸이다. 미모가 마치 꽃술과 같아 ‘화예부인’으로 불리웠다. 시서에 정통했고, 미모와 재기를 겸비하여 촉왕 창(昶)의 혜비(慧妃)로 책봉되었다. 송태조가 화예부인이 시에 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시를 전달하니 화예부인은《口答宋太祖》(송태조에게 답하다)라는 시를 쓰다. 君王城上?降旗 ?无一?是男?
[보충] 화예부인은 5대10국 중의 한 나라인 촉왕 창(昶)의 妃였으나, 촉은 송 태조 조광윤에게 멸망 당하고, 촉왕 창과 화예부인은 송으로 가게 된다. 나중에 촉왕 창이 죽자 조광윤은 화예부인을 妃로 삼았는데, 화예부인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복수를 도모하였다. 암살에 실패하자 조광윤 면전에서 그를 질책하고서 자살했다고 한다.
7.소황후
[해설] 역사 상 일세를 풍미하며, 군왕을 미혹하고 나라를 멸망에 빠뜨린 미인들이 많았으나, 소황후(?皇后)처럼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군왕의 총애를 받았던 경우는 많지 않다. 소황후는 남조 양(梁)의 명제의 딸로 천보(天保) 20년에 양의 수도인 강릉(江陵)에서 태어났다. 천생적으로 빼어난 용모를 가지고 태었나고 교태를 부려 많은 사람을 미혹했다(?媚迷人). 소황후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말로서는 절대 묘사가 불가능하다.
[보충] 중국 인터넷 검색해보니, 소황후의 편력(?)은 다음과 같다. 13세에 진왕비(晋王妃), 수양제 황후(隋?帝的皇后), 우문화급의 숙비(宇文化及的淑妃), 、두건덕의 애첩(?建德的?妾)、2대에 걸친 돌궐 번왕의 왕비(?代突厥番王的王妃),마지막으로 당태종 이세민의 소용(唐太宗李世民后?中的昭容: 소용은 황제의 비빈 중 비교적 낮은 품계 중 하나). 이것은 한 여인의 애정편력사가 아니라 5호16국 시대에서 수에서 당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비운의 개인사'로 독해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8.탁문군
[해설] 탁문군(卓文君)은 서한의 재녀로서 거상 탁문손(卓王?)의 딸이다. 미모가 수려하고 총명하였으며, 가야금을 정통했고 시문에 능하여 가깝고 먼 곳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본가에 머물었다. 하루는 저명한 문장가인 사마상여(司?相如)가 현령 왕길(王吉)의 초청으로 탁왕손의 집의 손님으로 초대되어 가야금을 탔다. 평소 탁문군은 사마상여의 文名과 음악을 사모하여,사마상여가 가야금을 타는 소리를 주렴 뒤에 숨어 들었다. 사마상여는 주렴 뒤에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깨닫고 그녀가 탁문군이라 여겼다. 그래서<?求凰:봉이 황을 청하다 >이란 곡을 타며 탁문군에 대한 자신의 애모의 정을 표했다.
[보충] 탁문군과 사마상여는 한무제 시대의 실존인물로서, 중국의 연애고사로서는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이다. 탁문군과 사마상여의 고사를 변주한 이야기와 지방극은 셀 수 없이 다양하다고 한다. 사마상여는 탁문군과 조우하자마자 야반도주를 감행하였고, 나중에는 아버지인 탁문손의 돈을 갈취(?)하는 고사 역시 상당히 유명하다. 사마상여는 후에 한동안 한무제의 중용을 받게 된다.
9.조비연
[해설] 조비연(??燕)의 본명은 의생(宜生)으로 한나라의 유명한 춤꾼이다. 춤추는 자태가 나긋나긋하여(舞姿?盈) 마치 제비가 날고 봉황이 춤추는 것과 같아, 옛사람들은 그녀를 비연(?燕: 날으는 제비)라 일컬었다.그녀의 재능은 천부적인 것이어서 가야금을 배우자마자 훌륭하게 연주했고, 춤추는 것으로는 천하에 그녀를 따를 자가 없었다.
[보충] 한 성제(?成帝)는 유희를 좋아하여 줄곳 출궁하였는데, 하루는 양아공주(?阿公主)의 집에서 조비연을 본 후 바로 입궁 시켜 총애하였다. 후에 성제는 허황후(?皇后)를 폐하고 조비연을 황후로 세웠으며, 조비연의 동생인 조합덕(?合德) 역시 소의(昭?)로 봉하여,두 자매를 특히 총애하였다. 한 성제 사망 할 때 조비연 자매는 아이가 없었으나, 성제를 계승한 애제는 조비연을 태후로 봉하였다. 몇 년 후 애제가 붕어하고 평제가 즉위한 뒤, 조합덕이 한 후궁의 황자(皇子)를 죽게한 사건이 발생하여, 조합덕은 죽임을 당해 성제묘에 합장 되었고, 조비연은 황후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10. 향비
[해설] 향비(香妃)의 고사는 역사 상 가장 많은 사람을 매혹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전설에 따르면, (향비는 몸에서 향기가 나서) 얼굴을 맞대기도 전에 이미 향기가 풍겨났다. 그 향기는 꽃 향기도 아니고 여인네들의 분내도 아닌, 특별한 향기여서 사람들의 심장과 비장에까지 스며들었다(沁人心脾). 향비는 신쟝 회족 추장인 곽집점(?集占)의 왕비였으며, 곽집점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청나라 조정에 진압되어 주살되었다. 장군 조혜(兆惠)가 향비를 생포하여 건륭황제에게 바쳤으나 향비는 ‘나라가 무너지고 집이 망하였으니 오직 죽기만을 원할 뿐(?破家亡情愿一死)’이라는 뜻을 가슴에 품었다. 결국 태후에게 사사(?死)되어 운구는 고향에 안장되었다. 신쟝 객신(喀什)에 향비의 묘가 있다.
[보충] 향비의 공식적인 묘가 신쟝에 있다고는 하나 실제로 그것이 향비의 묘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최근에는 다른 곳에서 향비의 묘가 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그것 역시 확증이 없는 듯 하다. |
출처: Days On the Road 원문보기 글쓴이: B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