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스트] 39 - 환절기 2
S#1. 지원의 집 앞 (38회 뒷부분)
지원 걷다가 보면. 집 입구에 웬 신사복의 남자가 동네 여자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있고.
그 여자는 지원이를 가르켜 보이고 있다.
그 남자가 여자에게 인사를 해보이고 지원에게로 온다.
남자 : 구지원씨세요?
지원 : 그런데요.
남자 : 아이구 겨우 찾았군요. 아버님은 집에 계신가요. 지금 모셔가도 되겠습니까?
지원 : 모셔가다니요.
남자 : 우리 도련님이 말 안했나요? 아버님 입원실 잡아놨는데요. 박사님도 기다리고 계시구요.
모친 : (놀라서 지원에게) 이게 무슨 소리야.
지원 : (역시 놀라서 보다가) 도련님이라니 누구 말씀이세요.
남자 :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정진수 도련님이요. 아가씨가 구지원씨 맞죠?
지원 아연해서 남자를 보는.
S#2. 지원의 집 거실
지원의 부친이 혼자 밥상을 놓고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현관 쪽을 본다. 지원과 모친이 들어서고 있다.
모친이 부친을 보자마자 달려와 소주병을 뺏으며.
모친 : 아이구 지금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대낮부터 또 왜 이래요.
지원 : (우뚝 서서 보고만 있다)
부친 : 그냥 놔두지 못해.
모친 : 자식들은 아버지 병원에 모신다고 야단들인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구요. 지석아. 넌 아버지 술 드시는데 보고만 있었어?
지석 : (한쪽에서 가방 챙기고 있다가 으쓱. 어쩔 수 없다는 듯)
부친 : 쓸데없이 수선 좀 피지 말어. 딱 한잔 마셨어. 반주로 한잔.
모친 : 어이구 어이구.. (소주병을 들고 주방쪽으로)
지원 : (보고 있다가) 엄마. 아버지 짐 챙기세요. 정밀 검사 받으려면 며칠은 입원해야 될 거에요.
모친 : (돌아서 지원과 부친의 눈치를 보는)
부친 : (버럭 화를 내어)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에선 가장을 뭘로 아는거야? 병원 안간다고 했지? 내가 그랬어. 안그랬어.
지원 : 입원실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부친 : 니가 무슨 돈으로. 건방진 소리 계속할거냐?
지원 : 제 돈 아니에요. 아버지가 원하던 사위감이 돈 냈어요.
부친 : ...뭐야?
지석 : (멈춰서 보는)
지원 : 아버지가 말씀하셨잖아요. 사위감 하나 델구 오라구요. 그 사위감이 병원에 입원실 잡아놨대요. 그러니까 일어나세요.
부친 : (말이 막혀 보다가) 게 앉아봐.
지원 : (앞에 와 앉는)
부친 : 방금 뭐라고 했냐.
모친 : (얼른 옆으로 오며) 밖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요 여보. 그.. 그 사윗감이 사람을 보내왔드라구요.
병원에 입원실이며 박사님이 기다린대요.
지석 : 야아.. 하하. 그럼 진수형이 보내온거야? 그 형 디게 부잣집 아들인가보네.
모친 : 그런 모양이야. 밖에 온 차도 보니까 아주 큰 차드라고.
부친 : (지석을 보는) 그 놈을 만나봤대는거냐?
지석 : 예. 누나 학교 갔다가 봤는데요. 누나하고 아주 판박이같은 사람이드라구요.
둘이 앉혀놓으면 에어컨이 필요없게 생겼는데요. 그 형이 뭐랬냐하면..
부친 : (잘라서 지원에게)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해봐.
지원 :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방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든다)
S#3. 캠퍼스 낮
그 위로 들리는.
박교수 : (E) 내일만 빠지면 돼?
S#4. 박교수 연구실
박교수 앞에 진수, 남희가 한쪽에서 자료들을 챙기며 보고 있고.
진수 : 예. 내일 토요일 미팅만 빼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박교수 : 무슨 일인데?
진수 : 그게 좀...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박교수 : 그러니까 묻잖아. 어떤 개인적인일? 아이 말해봐. 궁금하잖아. 진수군은 개인적인일로 미팅에 빠질 친구가 아니니까. 응?
남희 : 혹시 그거 지원이하고 관계되는 일이니?
진수 : (그냥 미소만)
박교수 : (남희에게) 지원양이 뭐. 지원양도 빠지고 진수도 빠져야 되는 일이 도대체 뭔데?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남희 : 지원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봐요. (진수에게) 그렇지?
진수 : 지원이누나 아버님이 편찮으신가봐요. 그래서..
박교수 : 저런저런.. 지원양이 맘고생이 많겠구만. 그런데. 그래서 진수군이 거길 가봐야되나? 왜? 어째서 그렇게 되지?
진수 : (좀 당황했다가) 저희 집에서 아는 박사님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가서 인사도 드리고.. 어..
그래야 될 거 같아서요.
박교수 : 아.. 아하.. 아.. (혼자 뭔가 열심히 생각중이다)
남희 : (진수에게) 교수님이 허락하신거니까 얼른 가봐. 더 곤란한 질문 하시기 전에.
진수 : (교수에게 꾸벅 절하고) 고맙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박교수, 진수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심각해져서 남희에게.
박교수 : 남희양.
남희 : 저는 자세한 사정 잘 몰라요. 물어보셔도 대답할 게 없는데요.
박교수 : 그게 아니고.. 그거 주례말이야.
남희 : 주례요?
박교수 : 결혼식 때 앞에 나가서 좋은 말 해주는 사람 있잖아. 그 주례가 될려면 나이 제한이 있나?
내 나이에도 주례 설 수 있겠지? 안될까?
S#5. 지원의 집 거실
지석과 모친이 보고 있는 가운데 마주 앉아있는 부친과 지원.
부친 : 그래서 니들끼리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이라도 했다는게야? 부모한테는 한마디없이?
지원 : 결혼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결혼같은 건 누구하고도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부친 : 그런데.
지원 : 그런데 저 혼자 힘으로는 아버질 병원으로 모실 수도 없잖아요. 누군가 아버질 병원으로 모셔줄 수 있다면,
결혼같은 거 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부친 : (말없이 지원을 본다)
지석 : (둘의 눈치를 보다가) 뭐야. 듣다보니까 둘 다 결혼을 너무 우습게 알고 있는 거 아냐? 진수 형은 전우가 필요하단 소리나
하고. 누난 또 뭔 소리야. 아버지 병원땜에 결혼을 해? 나아참. 이공계에선 그렇게 결혼들을 하나.
부친 : 넌 좀 조용히 해.
지석 : 예.
부친 : 지원아.
지원 : 네.
부친 : 그 남자앨 좋아하냐?
지원 : 그 앤.. (똑바로 부친을 보더니) 사회에서 버림받았다고 알콜 중독이 되거나 그럴 남자는 아니에요.
부친, 지원을 노려본다. 모친, 안절부절해서 지원에게 손을 뻗었다가 말고. 그렇게 침묵이 흐르다가.
부친 : 내가 장래 사윗감인지 뭔지 그놈의 돈으로 병원에 입원을 할거라고 생각한게냐?
지원 : 싫음 마세요. 그렇다면 저 역시 결혼이고 뭐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고 모든게 간단해지네요.
어차피 결혼해서 엄마처럼 살고 싶은 생각 없었어요. ...엄마 미안해요.
모친 : (한숨만 쉬고)
부친 : ...(말없이 지원을 보다가) 다시 한번 묻자. 그 놈 괜찮은 놈인 거야? 니가 좋아하냐고.
지원 : ...좋아해요.
부친 : 임자.
모친 : 네? 네.
부친 : 밖에서 차가 기다린다며. 뭐하고 있어. 짐 싸야지.
부친 벌떡 일어나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모친, 불안해서 쫓아 들어간다.
부모가 들어가고 나자, 지원 꼿꼿하게 앉아있던 자세가 풀어지며 고개를 숙인다.
지석 : 누나. (비로소 진지해졌다)
지원 : ...
지석 : 어디까지 진심이야?
지원 : 너 아직 바둑 둘줄 모르지.
지석 : 여기서 바둑 얘기가 왜 나와.
지원 : 나. 아버지한테 바둑 배웠지만 언제부턴가 아버지한테 늘 이겨. 알고 있지?
지석 : 그래서.
지원 : 내가 아버지보다 수읽기를 잘하거든.
지석 : 누나. 내 눈 좀 봐봐. 우리 서로 눈을 보면서 얘기해보자구.
지원 : 싫어. (일어서는) 지금은, 싫어.
지석이 보는데, 지원은 걸쳐놓았던 자신의 웃옷을 들어 입고 있다.
S#6. 캠퍼스 밤
S#7. 이교수 랩 / 밤
민재가 마지막 엔터를 쳐넣고는 으으... 기지개를 켠다.
그러다가 돌아보면. 명환이 저 구석에서 전화를 하고 있다. 현재 방에는 민재와 명환만 있는 상태.
명환 :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는지) 핼로우.. 여보세요. 아 정미씹니까. 저 명환인데요. 수경이 있어요? 아직 안들어 왔어요?
거기 몇시죠? ..저.. 제 메모는 전해주신건가요?... 아뇨. 전화가 안와서요. 저 계속 연구실에 있으니까요.
아무때나 전화를 해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예.. 예.. 부탁합니다.
명환이 전화를 하는데, 민재 조용히 살금살금 문쪽으로 나간다.
S#8. 복도 / 밤
민재 혼자 털레털레 걸어온다. 목 운동도 해보고, 걷다가 제자리 뛰기도 해보고, 그렇게 걸어오다가 문득 보는 곳.
앞에 경진이 걸어오다가 민재를 발견하더니 우뚝 선다. 저번의 대화 다음이라서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
경진 멀뚱하게 민재를 보다가.
경진 : 나 지금 동아리방에 가는 길이야. 왜냐. 거기 정태가 혼자 있거든.
민재 : ...그래?
경진 : 그렇다구.
억지로인 듯 활짝 웃어보이더니 민재를 지나쳐서 계속 간다.
민재를 지나친 경진은 금방 굳은 얼굴이 된다.
경진이 가고 난 뒤, 민재,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가 머리를 벅벅 긁다가 경진이 간 쪽을 돌아본다.
S#9. 동아리방
문이 열리며 경진이 들어선다.
정태가 침대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경진을 힐끗 돌아보더니 다시 책을 본다.
경진, 테이블 앞에 주저앉아서 망설이다가...
경진 : 일단 사과하겠어.
정태 : (책만 보는)
경진 : 너의 비밀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떠든 거 미안해.
정태 : (책을 보며) 인간은 절대 악하지 않다. 그저 자신의 말과 행위의 결과를 생각해보지 않고, 말하고 행하기 때문에
악하게도 되고 죄를 범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몽유병자지 악한은 아닌 것이다.
경진 : (보다가) 프란츠 카프카.
정태 : 딩동. (읽던 책을 들어보인다. 카프카의 책이다)
경진 : 좀 전에 남희 선배 만났어. 그래서, 지원이가 어디를 왜, 갔는지 알았어. 그리고 진수가..
정태 : (자르며) 보다시피 책을 읽는 중이야. 남이 독서를 할 때는 방해하지 맙시다.
문이 열리더니 민재가 들어선다.
일단 안의 분위기를 보다가 경진과 정태가 쳐다보자 얼른 컴퓨터 앞에 자리잡으며.
민재 : 자료 찾을 게 있어서..
경진 : (민재를 보다가 다시 정태를 보더니) 나타나엘이여 나는 그대에게 열정을 가르쳐주마.
정태 : (할수없어 피식 웃고) 앙드레 지드.
경진 : 내가 생전에 만족시키지 못한 모든 욕망과 모든 정열이 내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나를 괴롭히게 될까봐 두렵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이 땅위에 완전히 털어놓고 나서 완전한 절망 속에서 죽기를 나는 희망한다. 앙드레 지드. 딩동.
민재 : (뭔 얘기들인가 해서 돌아보는)
정태 : 우리는 모두가 죽지 않으면 안되고, 그러니까 모든 게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따위가 진리라면
그것은 인생 전체를 모독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경진 : 그런 사람들이 걷는 길은 편안하고 우리들의 길은 험난한 것이다. 그러니 자 용기를 내도록 해라. 역시 헤르만 헤세.
정태 : (할수없다는 듯 일어나 경진을 향해 앉더니) 사랑이라는 것은 간청해서도 안되고, 요구를 해서도 안된다.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갖는 힘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경진 : 생 떽쥐베리?
정태 : 땡. 헤르만 헤세.
경진 : 좋아. 내가 졌어. 일학년때 읽었던 것들이라 가물가물하네.
정태 : 그 때 너하구 참 별 책을 다 읽었다. 넌 톨스토이가 싫다고 했었지?
경진 : 그만해. 안 그래도 나 오해받고 있어.
정태 : 무슨 오해.
경진 : 민재가 나보고 정태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그러든걸.
정태 : (민재를 보면)
민재 : (으이그 싶어서 찌푸려 보는)
경진 : 그래서 나보고 지원이와 너 사이를 질투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드라고.
민재 : 어이. 아니면 아니라고 날 보고 말해. 꼭 그런 식으로 정태 앞에서 말해야 되겠냐?
경진 : (여전히 민재는 보지 않고 정태에게) 민재 걔 바보 아니냐. 내가 널 질투하는 거면 이렇게 너와 지원이를 위해서
애를 쓰겠냐고. 지금도 봐. 너무나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려고 왔잖아. 지원이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했다...
정태 : 뭐? 언제?
경진 : 그런데 진수가 그 병원에 찾아간다고 했다. 정태 너는 뭐하고 있냐. 이 얘길 해주러 온거거든. 내가 지금.
정태 : ...진수가?
경진 : 그렇지. 그 뿐이 아니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진수가 그 병원을 소개한 거 같드라. 입원비를 내준 것은 아닐까..
민재 : 얼마나 안좋으신데?
경진 : (여전히 민재는 보지 않은 채) 이상하네. 이민재는 뭐든지 알고 있잖아. 왜 나한테 물어보는걸까.
민재 어이없고. 정태, 말없이 보던 책을 덮는다.
S#10. 병원 외경 / 밤
S#11. 병실 / 밤
침대에 고집스레 앉아있는 부친에게 간호사가 다시 당부하고 있다.
간호사 : 아침에 검사 받으실 때까지 아무것도 드시면 안되는 거 아시죠.
부친 : 귀가 있으니 들었고, 그러니 그렇게 몇번씩 말할 필요없어요.
간호사 : (웃으며) 그럼 편히 주무세요.
간호사 나가는데 모친이 몇번이나 절을 하며 문까지 열어준다.
모친 : 고마워요. 수고하셨어요.
지석 : (소파에 앉아있다가 간호사가 나가자) 아유 엄마. 그렇게 굽신거리지 않아도 되요. 이런 병실에 입원하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에요. 보세요. (거만하게 턱을 까딱해보인다) 오 수고했어.
지원 : (테이블에 노트북을 펴며) 지석인 어머니 모시고 먼저 들어가.
모친 : 아니야. 너야말로 가서 쉬어야지.
지원 : 밤에 작업할 거 있어요. 제가 있을테니까 들어가요.
부친 : (불쑥) 그 놈은 언제 오는게야.
지원 : (돌아보면)
부친 : 나를 여기까지 끌어다놨으면 얼굴은 디밀어야 되는 거 아니냐. 어디 있어. 왜 안와.
지석 : (지원의 눈치를 보며) 내일 늦게나 오겠죠뭐. 수업 있을텐데..
지원 :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엄마 앞에까지 바래다 드릴게.
먼저 나간다.
S#12. 병원 로비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온 지원, 멈춰서더니 심호흡을 몇번 한다. 참았던 숨을 쉬는 기분이다.
그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나온 지석이 잠시 지원을 보다가.
지석 : 누나, 좀 더 기쁜 얼굴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지원 : (멈칫해서 돌아보면)
지석 : (웃지 않는 얼굴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이렇게까지 해줬으면 좀 더 행복한 척 해야지.
지원 : 엄마는.
지석 : 누나 친구가 있긴 있어?
지원 : ..
지석 : 누나 보기엔 내가 너무 어린애같아서 아무 말도 같이 못한다고 쳐. 이럴 때 속얘기 나누는 친구가 하나라도 있어?
지원 :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엄마나 모시고 와.
지석 : (주머니를 뒤적거려 전화카드를 꺼내며) 나도 아르바이트 시작했어. 내가 번 돈으로 산건데.. (카드를 건네주며) 친구한테
전화나 해. 전화해서 정말 속에 있는 얘기를 좀 하라구. 설마 그럴만한 친구가 하나도 없는 건 아니겠지?
지원 : ...
지석 : 엄만 뭐하시는거야.
다시 어슬렁거리며 돌아간다. 지원 손에 쥐어진 카드를 내려다본다.
S#13. 민재/ 정태의 방
허공에서 부딪히는 맥주 두캔.
민재와 정태가 캔을 마주치고는 각자 마시기 시작한다. 한모금에 한캔을 다 비우는 자세.
민재가 먼저 컥컥거리며 포기하는데, 정태는 마지막까지 다 마시고는 캔을 찌그려뜨려 보인다.
민재 : 장하다.
정태 : 고맙다. (새로운 캔을 따는)
민재 : 맥주를 사오긴 했다만, 내일부터 시뮬레이션 들어가는 거 알지?
정태 : 알지.
민재 : 아침 아홉시에 이교수님과 미팅있는 것도 알지?
정태 : (대답 대신 마시는)
민재 : 열한시엔 수업이 있고.
정태 : 소주는 안 사왔냐?
민재 : 시뮬레이션은 나 혼자 개길 수 있고. 수업은 대출 불러줄 수 있어. 아침에 미팅만 하고 갔다 와.
정태 : (보다가 피식 웃는)
민재 : 어느 병원인지 알아놨어. 몇호실인지는 가서 물어보면 되고.
정태 : 넌 내가 지원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냐?
민재 : 아니냐?
정태 : 난 잘 모르겠다.
민재 : 얼씨구.
정태 : 정말이야. 이런 게 누굴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민재 : 좋아하는 게 아니면 싫어했냐? 싫어서 그렇게 밤마다 한숨 쉬고 지 정신 빼놓고 다니면서 경진이한테 다 들키고 그랬어?
정태 : 지원이, 걔한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야.
민재 : 신경이 쓰인다.. 거 또 색다른 학설이군.
정태 : 근데, 그 신경쓰이는 게 그렇게 순수하지가 못해.
민재 : 순수하지가 못하다.. 뭐가?
정태 : 알잖아 임마.
민재 : 몰라.
정태 : (한숨쉬고 보다가) 술이나 마셔. (자기가 마신다)
민재 : (웃음을 참고 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는 플라토닉한 러브가 하고 싶은데,
그녀만 생각하면 먼저 손이 잡고 싶고 뽀뽀가 하고 싶고 그리고..
정태, 민재의 얼굴에 쿠션을 던져버리고
민재 쿠션을 받아 뒤로 넘어졌다가 일어나 앉아 쿠션을 잘 놓고 기대더니.
민재 : 너 진짜구나.
정태 : 입 다물어.
민재 : 그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미안해질 정도로.. 그 정도로 진짜야 너.
정태 : (술 마시려다가 보는)
민재 : 내가 아까 내일 시뮬레이션은 나 혼자 해도 된다고 말했냐. 대리출석도 불러주겠다고 했지?
정태 : (웃어버리는)
민재 : (정태가 들고 있는 술을 뺏고 다른 술도 거두며) 고만 마시고 일찍 자. 많이 자고 맑은 정신으로 갔다 오라고.
정태, 묵묵히 민재가 하는 양을 보고 있다.
S#14. 병원 로비 / 밤
공중전화가 있는 일각.
비어있는 전화대 앞에 다가서는 지원. 손에 들린 전화카드를 내려다보다가 용기를 낸 듯 수화기를 든다.
카드를 넣고. 그리고 버튼을 몇 개 누르려다가 멈춘다. 잠시 그대로.
결국 수화기를 다시 걸고. 빠져나오는 카드를 뽑아들고. 그리고 옆에 기대선다. 멍하니 그대로..
S#15. 캠퍼스 전경 / 아침
어떤 학생인가가 아침 수업에 늦었는지 열심히 뛰어가고 있다.
S#16. 구내 식당
아침이라서 별로 많지 않은 학생들..
자현과 병석이 줄에 서서 다반에 음식들을 담아오며 계산을 치루며..
자현 :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 있잖아. 공대 여학생들은 다 남자같거나 못생겼다.
병석 : 너를 보면 맞는 말 같은데.
자현 : 뭐야.
병석 : 저기 자리 비었다. (먼저 가는)
자현 : (따라 붙으며) 어제 내가 간만에 채팅에 들어갔거덩.
병석 : 시간이 남아도냐. 무슨 채팅이야.
자현 : 어떤 남자가 들어왔지. 수인사를 시작한거야. 안녕. 댁은 남잡니까? 난 여잡니다. 학생입니까? 저돈데요.
대충 자리들을 찾아 앉고..
자현 : (계속) 그 남자 질문. 무슨 과 다니세요? 나. 기계과인데요. 그 남자. 기계과요? 공대에 있는 기계과요?
나. 공대에 있는 거 맞는데요. ...다음 순간. 아무개님 퇴장하셨습니다.
병석 : 그런 편견은 나도 당해. 우리 아버지, 나 집에 갈때마다 고장난 라디오에 브이티알 들고 와서 고치라고 하시는거야.
너 공대생 아니냐. 공대생이 이런 것도 못 고쳐?
자현 : 영문과 학생이 다 영어 잘 하는거 봤냐?
병석 : 모르지. 난 영문과 학생은 만나본 적이 없다. 미팅을 해도 영문과 학생은 안 나오던데.
둘이 떠들며 먹고 있는데.
그 앞에 턱 놓아지는 식판. 대욱이 그들 앞에 자리잡고 앉는다.
자현 : 여어 오랜만이다.
대욱 : 두분 즐거운 아침이십니다. 멀리서 봐도 아주 즐거워 보이는데요. 보는 사람 배가 아파서 식욕이 떨어질 지경입니다.
병석 : (웃으며 먹기만)
자현 : 이 자식이 요즘 나만 보면 시비 걸자고 덤비네.
대욱 : 하이구. 언제는 남자는 절루 가라. 꼴두 보기 싫다드니 그래 며칠만에 남자랑 따악 붙어다니면서 헤헤거리냐.
이래서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거야.
자현 : 그래 임마. 여자의 마음은 갈대다. 거기 대면 남자의 마음은 쭉정이지. 바람만 불면 홀랑홀랑 날라다녀요.
대욱 : 근거 없는 말은 하지 말자고.
자현 : 신문 정치면을 좀 봐라. 거기 쭉정이처럼 날라 다니는 남자가 얼마나 많냐. 근데 너 돈 많다. 고기 반찬도 집어오고.
(하면서 대욱의 고기 반찬을 집어먹는)
대욱 : 병석선배.
병석 : 왜.
대욱 : 자동차는 잘 만들어져 갑니까?
병석 : 와서 구경해. 아예 붙어서 같이 하든가. 안그래도 디자인 면에서 문제가 많어. 우리.
자현 : (아예 대욱의 고기반찬을 집어다 자기 밥그릇에 쌓고 있는데)
대욱 : 우씨.. (반찬그릇을 감추며) 여자가 염치가 좀 있어봐라.
자현 : 먹는 거 갖고 치사하게 구는 남자는 괜찮고?
대욱 : 여자남자 노래부를 시간에 여자친구나 좀 챙기고 살라고.
자현 : 내 여자친구 누구?
대욱 : 지원 선배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대.
자현 : 지원이 아버님이? 왜?
대욱 : 몰라. 진수도 거기 병원에 갔어.
자현 : 엥? 진수가 거긴 왜 가.
대욱 : 하여간.. 정신연령은 열두살이래니까. 아니 여덟살.
자현 : 이 자식이 진짜 밥먹다 일어서게 만드네. 너 나갈래. 여기서 할래.
S#17. 동아리방
경진, 만수, 지민, 마이클 등이 둘러앉아 토스트 등의 아침을 먹으며.
(경진은 자기 접시는 없이 이 사람 저사람 것을 집어 먹으며)
경진 : 지구가 태양을 돌고 달이 지구를 돌고.. 회전을 하잖아. 원심력과 인력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것처럼 보이지만!
언제가는 이 회전력이 약해지면서 점점 태양에 가까워지는거야.
지민 : 어머 어머. 그래서?
경진 : 오, 나의 태양. 하면서 쪽! 키스와 동시에 콰광. 대 폭발.
만수 : (심각해서) 그게 언제쯤인데?
경진 : 정확한건 아무도 모르지.
만수 : 야야 그래도 대충, 대충이라도 계산해놓은건 있을거 아냐.
경진 : 대충.. 수천억년쯤 뒤?
만수 : 뭐야! 괜히 긴장했잖아.
경진 : 아직 안심하긴 일러요. 태양도 인간처럼 늙게 돼있거든. 별이 늙으면 부피가 불어나. 현재 지름의 수백배쯤?
그러다가 뻥! 폭발을 하는거지.
지민 : 그럼 지구는 어떻게 되는데.
경진 : 그전에 다른 별로 피해야지. 태양계가 아닌 저 멀리 어딘가로.
만수 : 그때는 언제쯤인데?
경진 : 한 150억년쯤 뒤?
만수 : 우, 씨... 그걸 왜 지금 얘기하고 난리야.
경진 : 그래서 마이클.
마이클 : (진영을 돌아보고 있다가) 왜.
경진 : 너 컴퓨터에 도사라며. 컴퓨터 그래픽도 자신있지?
마이클 : 나 천재. 뭐든지 말만 해.
경진 : 너 혹시 우리별에 대한 CG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없냐?
마이클 : 우리별? 지구?
경진 : 아니지이. 우리가 만든 인공위성 말야.
하는데 들어선 정태.
정태 : 민경진.
경진 : 오오 김정태.
정태 : 너 홍보 비디오 안 만들고 여기서 뭐해.
경진 : 지금 새 홍보요원을 모집하고 있는 중인데. 왜.
정태 : 가자. 카메라 테스트 끝내놨어.
경진 : 잉? 니가 한다구? 다시?
정태 : 시간없다며. 일어나.
경진 : (일어서긴 했지만) 근데 가만 있어봐. 너 지금쯤 서울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지민 : 서울? 서울은 왜?
만수 : 니들 나도 알아듣게 얘기해봐. 뭐야뭐. 난 모르는 거 있으면 대폭발을 일으키는 거 알지.
마이클 : 만수형은 모르는 게 더 많잖아.
만수 : 임마. 공부 말고. 인생에 대해서.
지민 : 인생이 뭔지는 알아요? 오빠 인생 보면 그런 거 같지도 않은데?
만수 : 이것들이.. (그러다 정태쪽 보고) 야야 거기 잠깐 서봐.
경진과 정태는 이미 나가고 있다. 만수 쫓아나가려는데.
마이클 : 진수형도 서울 갔는데. 지원이 누나한테 갔어. 나하고 남희누나하고 둘만 있어. 너무 심심해.
만수 : 무엇이? (반짝거리며 돌아보는)
S#18. 전자과 실험실
민재가 모니터 앞에 앉아서 시뮬레이션 작동 중이다. 모니터에서 흘러가는 그림.
민재, 집중을 해서 조심스레 마우스를 움직이는데.
부리나케 들어온 만수가 민재를 발견하고 오며.
만수 : 야야. 이민재. 정태의 삼각관계는 어떻게 되가는거야.
민재 : (하던 것 놓치고 짜증나서 돌아보며) 무슨 삼각관계. 지금 기하문제 풀어?
만수 : 그렇지. 이건 일종의 기하문제지. 그러니까 차근차근 풀어보자구. 지원이와 진수. 그리고 김정태. 맞지?
민재 : (무시하고 다시 모니터를 보는)
만수 : (바싹 붙어앉으며) 근데 진수는 지원이와 서울에 있고. 정태는 그애들 대신 카메라나 돌리고 있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냐.
민재 : 정태가 뭘하고 있다고?
만수 : 아까 경진이를 찾아왔어. 홍보 비디오 찍는대, 그러니까 정태가 항복을 한거야? 미리 수건 던진거야?
야 그럼 너무 시시하잖아. 이거 응원단이 필요한 거 아냐?
민재 : (생각해보고 있는데)
만수 : 난 뭐 누구 편도 아니지만. 단지 내가 모르는 새에 시합이 끝나는 건 용납할 수가 없다 이거지. 그럴 수는 없지.
그래서 이건 연장전을 해야 돼. 안그러냐?
민재 : (어이없어 보며) 도대체 내 주위엔 왜 이렇게 비정상이 많은거지?
S#19. 센터 지상국
3호를 관제하기 위한 5명 정도의 인원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
맞은 편 위성영상 수신처리 지상국에는 1명의 운용요원이 있다. 그들의 모습이 주욱 보이는 위로.
연구원 : (E) 오늘 첫 교신은 12시 42분 23초부터 12시 56분 38초까지 어제 저녁에 프로그래밍 해 놓은 카메라의
운용 시나리오에 따르면 12:49:30부터 총 60초 동안 경상남북도 지역을 촬영하게 되어있어.
정태가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모습을 찍고 있고, 옆에서 경진이 재빨리 연구원의 설명을 메모하고 있고,
연구원이 설명해주고 있는 상황.
연구원 : (E) 매일 첫 교신이 있기 30분전에 지상국의 운용인원들 사이에 오늘의 운용계획에 대한 점검과 단계별 명령에 대한
확인작업이 있거든. 내일 좀 더 일찍 오면 그 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거야.
이하 연구원들 사이에 작업 모습들이 몽따쥬 기분으로 숨가쁘게 진행되는 모습 잠시..
운용책임 : AOS-30초전. 준비사항 확인 안테나 정상, 수신장치 정상, 주파수 정상....
소리 : (수신기에서 잡음같은 소리가 들리면)
연구원 : 왔다. 운용책임 S-band Level 확인. 수신국운용자 S-band Signal Level 증가하고 있습니다. Lock 됐습니다.
운용책임 : 자세제어 전환, Sun Tilt 0, 25, 0으로 전환.
자세제어담당 : Sun tilt 각 0, 25, 0으로 전환.
운용책임 : WOD Close & Setting.
관제국 운용자 : WOD Close & Setting.
운용책임자 : 전력 상황, 탑재체 상황, 자세제어 상태 확인.
전력담당 : 전력상태 양호, Battery 27.5/25.5 Volt, 온도 24/21도.
운용책임 : 이미지 촬영 1분전, X-band On 30초 전.
탑재체담당 : X-band On.
수신국운용자 : X-band 수신확인.
등등의 대화가 오고가는 와중에 정태는 카메라로 찍어대고, 경진 숨죽여 보고 있고. 시간경과.
운용책임 : 이미지 전송 확인.
수신국운용자 : 영상 수신되고 있습니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그림들..
경진 : 와우. 여기 우리 한국이잖아. 그림 좋네요. 여기가 어디쯤이에요?
연구원 : 구룡포, 울산, ... 여기는 부산쯤 되나.
경진 : 날씨 좋나봐요. 잘 보이네. (찍고 있는 정태에게) 저 영상 찍고 있지? 잘 보이지?
정태, 카메라로 찍다가 문득 눈을 렌즈에서 떼어서 모니터를 본다.
거기 나타나고 있는 모습들.. 어쩐지 감탄스러운 기분으로 보고 있다.
S#20. 센터 실험실
거기 인공위성들의 모형이 전시되 있는 모습을 이쪽저쪽에서 찍고 있는 정태.
연구원이 설명을 해주고 있고. 경진이 옆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다.
연구원 : 인공위성은 크게 두 부분이에요. 버스 시스템과 탑재물. 버스는 위성을 움직이고 제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인데
전력, 자세제어, 컴퓨터, 원격검침, 송수신을 하는 부분들이죠. 탑재물에는 사진을 찍거나 우주 환경을 조사하거나
우리말 방송을 하는 부분들이 들어가는 거고.
정태 : (이제 카메라를 연구원쪽으로 대고 촬영과 함께 질문) 선배님은 우리별의 제작 초창기부터 연구해오신 분이라면서요.
그동안 가장 속상했던 점을 여쭤봐도 될까요.
연구원 : (웃더니) 우리별 1호를 만들고 나서지요.
정태 : (카메라를 내리며) 왜요. 그때 다들 놀라고 칭찬하고 그랬잖아요.
연구원 : 우리별 1호는 영국에서 만들었거든요. 근데 남들이 그러더라고. 그거 영국꺼를 베낀 거 아니냐. 진짜 니들이 만든 거 맞냐
쇼하는 거 아니냐.
경진 : 그래서요. 뭐라고 그래줬어요?
연구원 : 암말 안했어요. 다음에 2호를 만들어서 보여주겠다고 각오만 했지.
경진 : 야아 근데 이제 3호까지 만들었다 이거죠. 근데 그때 다섯명이 영국으로 유학가서 배울 때 고생 많이 했다면서요.
연구원 : 그렇죠. 이런 기술은 잘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잖아요. 정말 치사하고 더러운 일 많았습니다.
경진 : 그때가 몇살이었는데요. 나라돈 받아서 인공위성 만드는 일 배우러 갈 때 그 나이.
연구원 : 학부 졸업하고 바로.
경진 : 에? 그럼 우리 나이잖아.
연구원 : 그래요. 정말 어린애들이었죠. 첨엔 겁이 나드라고. 우리나라가 그렇게 부자도 아닌데,
우리 다섯명한테 이렇게 돈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뭘 배워올 수 있을까. 가서 말도 잘 안통하지.
거기 애들은 우릴 꼭 후진국에서 온 떨거지쯤으로 생각하지.
정태 : (슬그머니 카메라를 다시 들어 연구원을 비추고 있다)
이하는 렌즈 안에 비친 연구원의 바스트 샷으로.
연구원 : 밤에 모두 집에 가고 나면 연구실엔 우리 한국애들만 남았어요. 밤마다 한국 노래 크게 틀어놓고, 서로 잠들면 깨워주고,
우리끼리 쓰레기통 뒤져가며 걔들이 버린 메모장 주워서 연구하고. 그때 우리 구호가 뭔지 알아요?
우린 전투중이다. 나가자. 싸우자. 그래서 배우자.
연구원 하하 웃는 얼굴이 카메라 안에서 클로즈업된다.
S#21. 센터 로비
경진과 카메라를 든 정태가 얘기를 나누며 나오고 있다.
유리문이 열리고 경진이 먼저 나오다가 보면. 저만치 앞에서 민재가 앉아있다가 그들을 본다.
경진 : 아이구.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앞에 있네.
민재 :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정태에게로 오며) 너 여기서 뭐하냐.
정태 : (카메라를 들어보인다) 일하잖아. 아르바이트.
민재 : 나한테 랩일을 다 미뤄놓고 뭘하고 있다고?
정태 :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민재 : 하나만 묻자. 너, 포기한거냐?
경진 : (양쪽을 번갈아 보고 있는)
민재 : 그래?
정태 : (딴데를 보고 있다가 경진에게) 나 동아리방에 가 있을게. 기획안 초고 잡아놀테니까 이따 보자.
정태 먼저 휘적휘적 간다. 민재, 그런 정태를 보고 있다가 경진에게.
민재 : 어뜩하냐. 너 재미있는 일이 끝나버려서.
경진 : 내가 재미있는 일이 뭔데.
민재 : 만수형도 아주 아쉬워하드라. 삼각관계 멜러드라마가 끝날 거 같다고.
경진 : (무뚝뚝한 얼굴로 민재 보더니) 메두사가 왜 무서운지 아니? 메두사를 보는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해버렸거든. 근데 말이지.
메두사는 자기를 보는 사람들마다 돌로 변해버리는 거 보고 기분이 어땠을까?
민재 : ...메두사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경진 : 생각해봐. 메두사는 아주 외롭고 슬프고 괴로웠을거야. 친구는 그만두고 서로 얼굴 보며 얘기할 상대도 하나 없었을테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은 자길 괴물이라고 죽이려고만 들지. ...불쌍하지 않니?
민재 : (보기만..)
S#22. 병실 내부 / 저녁 무렵
부친이 침대에 앉아 병원 식사를 하고 있다.
지원이 그 옆에서 물잔에 물을 따라 놓아준다.
부친 : (밥먹다 말고) 너는 안 먹냐.
지원 : 이따 밑에 내려가서 사먹으면 되요.
부친 : 지금 내려가.
지원 : 아버지 드시는 거 보구요.
부친 : (영 기분이 안 좋다) 내가 환자냐. 옆에서 떠먹여 줄거야?
지원, 말없이 보다가 돌아선다.
지원 : 다녀올게요.
지원이 나가고 문이 닫기자마자 부친, 숫갈을 탕 놓는다. 모든게 맘에 안든다.
S#23. 병원 복도
지원, 걸어온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문이 열리고,
그리고 과일바구니를 든 진수가 내리다가 지원과 마주친다.
S#24. 병원 일각
옆에 놓여있는 과일 바구니. 좀 떨어져 앉은 진수와 지원.
말없이 그렇게들 있다가 진수가 문득 혼자 웃더니.
진수 : 사실은 좀 놀랐어요. 한바탕 언쟁할 각오로 왔거든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화부터 낼 줄 알았어요.
아니면.. 병원비를 계산해서 차용증을 내밀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왔어요.
지원 : 이런 병실은 너무 비싸서 갚을 능력이 없어.
진수 : 아버님이 예정대로 입원하셨다는 얘기 듣고.. 기뻤어요.
지원 : 내 동생한테 나하고 결혼할 생각이라고 그랬니?
진수 : ..그랬어요. 사실이니까.
지원 : 그럴까?
진수 : (놀라서 돌아보는)
지원 :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할래?
진수 : ...
지원 : 나 산학 신청해서 계약 끝났어. 결혼해도 대학원 갈거고 학위를 따게 되면 그 회사 다녀야 돼. 그래도 되겠지?
진수 : (보다가) 누난 결혼이 뭐라고 생각해요?
지원 : (자기 앞만 보는 상태) 또 하나의 계약관계 같은 거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다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거.
그래서 계속 그 문제로 시달릴거면 일찍 해치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진수 : (씁쓸하게 웃는다) 해치운다구요.
지원 : 그렇게 되면 다신 이 문제로 시간낭비하는 일이 없을거 아냐.
진수 : (자기 앞을 본다)
지원 : 나는 이래. 결혼에 대한 환상같은 거 없어. 이런 나라도 괜찮겠어?
진수 : 내가 좋다고 그러면 어쩔려구 그래요.
지원 : (보는)
진수 : (여전히 미소로) 이건 누나가 날 떨궈내는 새로운 작전이에요?
지원 : 작전 같은 건 없어.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야.
진수 : (벌떡 일어나더니 두어걸음 걸어가다가 돌아와 다시 지원 앞에 서더니) 구지원.
지원 : (보면)
진수 : 남하고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결혼에 대한 환상같은게 있어. 이를테면, 결혼을 하면 내편이 생기는거라고 생각해.
내가 아무리 못나도, 그래도 내 편이 되줄 수 있는 사람. 나한텐 아직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넌 자기 편이 아무도 필요없니?
지원 : ...
진수 : (허리 굽혀 옆에 있던 과일 바구니를 집어들며) 들어가죠.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는 드리고 가야되잖아요. 선배 아버님인데.
진수, 먼저 걸어가버린다. 지원 그저 보고만 있다. 무표정하게.
S#25. 이교수 랩 / 밤
민재,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다가 여의치 않은지 마우스를 거칠게 밀어놓고 벌떡 일어나더니 서성거린다.
옆에서 작업을 하던 중희가 돌아본다.
중희 : 잘 안돼?
민재 : 예? 아.. 좀.. (그러다가 갑자기 수화기를 집어든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다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는다)
중희 : (뻔히 보고 있다가) 왜? 안 받어?
민재 : 예.
좀 더 서성거리다가 불쑥 문쪽으로...
중희 : 어디 가?
민재 : 금방 올게요.
민재 나가고 방에는 중희 혼자 남았다. 빈 방을 돌아보다가.
중희 : 뭐야. 왜 나 혼자 있는거야. 이게 뭐야.
S#26. 병실 내부 / 밤
진수 꾸벅 절을 한다.
진수 : 정진수라고 합니다. 몸은 괜찮으세요?
부친 : (침대에 앉은 채 말없이 보고만 있는)
지원 : (뒤따라 들어왔다가 진수가 들고 있는 과일 바구니를 받아든다. 한쪽에 내려놓는데)
부친 : 이 녀석이냐.
지원 : (돌아보는)
부친 : 이 녀석이 니가 결혼하겠다는 놈이야?
지원 : ...
진수 : (순하게 지원에게) 누나 그런 식으로 말씀드렸어요?
부친 : (진수를 노려보는) 뭬야? 누나?
진수 : 제가 후배됩니다. 평소에 선배님껜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부친 : (지원에게)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야.
지원 : (대답없고)
진수 : 지원선배와 결혼하겠다는 건 저의 희망사항이구요. 선배는 한번도 저에게 좋은 말 해준 적이 없습니다.
아버님께는 아마 입원 문제로 안심시켜드리느라고 그렇게 말씀 드린 모양인데요. (지원에게) 그렇죠?
부친 : (노했다. 지원에게) 넌 입이 없냐. 어째 말이 없어.
지원 : (부친을 보더니) 아버지. 저 방금 이 친구한테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가 거절당했어요. 자꾸 묻지 말아주세요.
부친, 기가 막혀 둘을 번갈아 본다. 진수, 묵묵히 시선을 떨구고 있다.
S#27. 석학의 집 / 밤
사복차림의 백곰과 명환이 마주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둘 다 말이 없고, 우울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미순이 저만치서 둘을 보다가 혀를 끌끌 차고, 진영이 가져나오는 팝콘 그릇을 받아들어 오더니 놓아준다.
미순 : 두 분, 영업시간 다 끝나가는데 도 닦으십니까? 고만 내일을 위해서 일어나시는 게 어떨까.
백곰 : 미순씨도 좀 앉으세요. 앉아서 음악을 들으면서 눈 앞을 지나가는 세월도 좀 느껴보고 그러시라고.
미순 : 내가 미쳤어요? 시계를 부셔서라도 멈추고 싶은데. 지나가는 세월을 느끼고 앉았게.
백곰 : 어허 그 조용히 좀 하고 앉아봐요. 음악이 안들리잖아요.
미순 : 얼레. (하면서도 옆에 앉는)
백곰 : 명환씨라고 했지요.
명환 : 그렇습니다.
백곰 : 때로는 여자보다 음악이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에요.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음악에 취해봐요.
명환 : 고맙습니다. (몹시 우울해있는 중이다)
미순 : 뭔 일인데 여자가 나오고 음악이 나온대? 뭔 문제야?
백곰 : 그으참. 제발 오분만 조용히 해보세요. 숨만 쉬어보시라고. 입은 좀 닫고.
미순 : (엄메..해서 입 다물고 보는)
백곰, 음악에 맞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미순, 명환을 보면, 명환은 맥주잔을 주욱 비우고 있다.
옆에 엉거주춤 다가온 진영이 목소리를 낮춰서.
진영 : 우리 문 안닫아요?
미순 : (자기도 소리를 낮춰서)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S#28. 이교수 랩/ 밤
이교수 들어서다가 보면. 중희가 혼자 앉아서 채팅을 하고 있다가 후다닥 일어선다.
이교수가 중희의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중희 얼른 끄느라고 난리를 치고.
이교수 : (모니터의 글을 읽는) 저는 좀 마른 편입니다. 밤샘작업을 많이 하거든요?
중희 : 아 저.. 아니 그냥... (겨우 껐다)
이교수 : 채팅중이었니?
중희 : 아주 잠깐 머리를 식히느라구요.
이교수 : 채팅중이었는데 인사도 없이 끄면 돼?
중희 : 글세 말입니다.
이교수 : 근데 어째 너 혼자 있어. 다들 어디가고.
중희 : 명환선배는 잠시 바람 쐬러 가구요. 만수는 어.. 민재는.. 그러니까 다들 머리 식히고 난 다음에 맑은 정신으로
밤새 작업할겁니다.
이교수 : 시뮬레이션은 끝낸거야?
중희 : 그게.. 곧 끝날거라고 봅니다. 시작은 했으니까요.
이교수 : (중희를 살피는)
중희 : (진땀나고)
이교수 : 그래 잠시 쉬는 것도 좋지. 밤새고 작업하려면 좀 쉬어야지. 모두에게 전해. 내일 아침 일곱시에 미팅 할거야.
중희 : 아침 일곱시오? 내일은 일요일인데요.
이교수 : 다들 밤샐거니까 일찍 미팅하고나서 자러 가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럼 일곱시에 보자.
중희 : 예 알겠습니다.
이교수 뒤도 안보고 나가버리고.
중희 인사를 해서 배웅하더니 부랴부랴 다시 모뎀을 연결하느라 바쁘다.
중희 : 아아참. 마악 역사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는데.
S#29. 노천극장 / 밤
민재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찾는다. 찾는 경진은 보이지 않는다. 민재 단념하고 돌아서는데.
경진 : (E) 뭐해?
민재 놀라서 두리번거리다 보면, 어두운 무대에서 팔짝 뛰어내려오는 경진.
경진 : 밤중에 여기서 뭐하는거야?
민재 : 어 그냥.. (괜히 운동하는 시늉하다가) 그러는 넌 여기서 뭐하냐? 한밤중에 컴컴한데서.
경진 : 우리별 보고 있었어.
민재 : 우리별.. 인공위성이 보여? 눈으로 보인단 말야?
경진 : 가르쳐줄까? (다가오는데)
민재 : 아니 됐네. 난 별 가운데서 별 찾는 건 영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어.
경진 : (웃더니 뱅글 돌아 가며) 그럼 계속 운동해. 난 가서 잔다.
민재 : ..민경진.
경진 : (하품하며 돌아보는)
민재 : 사실은 너 찾으러 왔어.
경진 : 날? 왜?
민재 : 그게.. 어쩐지 맘에 걸려서 말이야.
경진 : 뭐가? 왜?
민재 : 낮에 니가 한 말. 메두사가 외롭다는 둥 어쩌구 한 말 있잖아.
경진 : (보다가 하하 웃더니) 하여간 넌 참 인생 피곤하게 살어 그치? 어떻게 그렇게 남의 마음을 일일이 다아 신경쓰면서 사니?
민재 : (무뚝뚝해서 보는데)
경진 : (갑자기 민재의 뒤 하늘을 가르키며) 앗 유에프오다.
민재 : (돌아보았다가 다시 경진을 보면)
경진 : (바로 민재를 가르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 외계인이다. 민재라는 이름의 외계인.
민재 : (한심하다)
// (시간경과)
계단 정도에 앉아있는 민재와 경진.
민재 : (풀잎을 뜯어서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어보다가) 정태는 진심인 거 같아.
경진 : 알어. (두 손으로 망원경처럼 만들어서 하늘을 보고 있다)
민재 : 그러니까.. 그애들 대상으로 재미있어하고 그러는 건.. 좀.. 실례라고 봐. 그냥 놔두는 게 어때.
경진 : 혹시 알어? 나, 말로는 재미있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애들을 아주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민재 : 걱정하고 있냐?
경진 : (손을 내리고 여전히 하늘을 보면서) 나처럼 될까봐 걱정된다고 할까.
민재 : 니가 뭐.
경진 : 나 말이지. 사실은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민재 : ...니가? 누군데.
경진 : 누군지는 말 못하지.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민재 : (놀랐다는 듯 웃고) 그런데.
경진 : 그쪽에서는 절대로 몰라. 왜? 내가 절대로 눈치채게 안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민재 : 어떻게 됐는데.
경진 : 아주 비참해졌어. 그 이후로 다른 사람은 좋아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구. 그때 말이라도 해봤으면..
그래서 실연이라도 당했으면 깨끗하게 단념을 했을텐데 말야.
민재 : ...넌 연애같은 거 고생스러워서 싫다며. 관심없다고 했잖아.
경진 : 그렇지. 바로 그런 철학이 생겨나드라.. 이말이지.
민재 : 많이 좋아했냐?
경진 : 거럼. 좋아한단 말도 못할 정도로 좋아했지.
민재 : ...말이라도 해보지 왜. 나 너 좋아한다. 그러구.
경진 : (잠시 민재를 보다가 헤헤 웃더니) 내가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지.
민재 : 니가 사람 아니면 뭔데.
경진 : 너 아직 몰랐어? 사실은 나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왔거든. 언젠간 고향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함부로 사람을 사귈 수가 없다구.
민재, 웃고 만다. 하늘을 본다. 경진도 같이 하늘을 본다.
그러다가 갑자기 민재가 어어.. 해서 반쯤 몸을 일으킨다.
경진 : 뭐? 왜?
민재 : 저거 저거. 저기 별 네 개. 하나둘셋넷. 저거 사각형으로 보이는 게 페가수스지? 맞지? 야아. 진짜 정사각형인데?
민재, 흥분해서 보고 있는데. 경진, 그러는 민재를 슬쩍 보고 있다.
S#30. 병원 외경 / 밤
S#31. 병실
방안에는 불이 꺼져 있고. 침대에는 부친이, 보호자 침대(소파)에는 지석이 잠이 들어있다.
지원, 어둠 속에서 조용조용 노트북 가방을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부친 : (E) 잘못 살고 있어.
지원 : (돌아보면)
부친 : 술이나 퍼마시는 내나 너나 마찬가지야. 다를 거 없어.
지원 : 안 주무세요?
부친 : 니 엄마처럼 살고 싶진 않다고. 니 엄마처럼 고생하고 살긴 싫단 얘기냐? (여전히 천장만 보며 하는 말)
지원 : 엄마처럼 한 남자한테 다 걸고 살긴 싫단 얘기였어요. 평생 남편밖에 모르고 살다가, 남편이 무너지니까 같이 무너져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도 모르잖아요.
부친 : 난 아직 안 무너졌다.
지원 : 그럼 술 그만 드세요.
부친 : ... (잠시 말이 없다가) 내가 술을 끊으면 넌, 다시 예전의 딸로 돌아갈거냐?
지원 : (멈칫하는 기분이다가) 제가 뭐 어때서요.
부친 : ... 너 웃는 거 본지가 너무 오래됐어. 생각도 안 나.
지원 : (대꾸 못하고 보는)
부친 : 난 공학박사 딸은 바라지도 않어. 예전의 내 딸만 찾으면 족해.
S#32. 병원 내 휴게실
늦은 밤이라서 아무도 없는 휴게 공간. 지원이 혼자 대기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에 펴놓고 있다.
그저 모니터만 우울하게 내려다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든다. 시선이 가는 곳에 공중전화가 있다.
지원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지석이 주었던 전화카드를 꺼내 본다.
S#33. 동아리방 / 밤
모니터에 보여지는 우리별의 발사장면. 카운트다운이 들리며 이윽고 굉음과 함께 날아오르는 로켓.
그 모니터를 보고있던 정태.
소리 : (전화벨소리)
정태 : (화면을 보는 자세로 의자를 끌어 수화기를 든다) 미스텁니다. (자세가 달라지며) 나야. 정태. 경진인 여기 없는데.
방에서 안 받어? 어 잠깐만..
정태, 리모콘을 찾아 모니터를 끄며.
정태 : 아버님 얘기 들었어. 병원에 입원하셨다며. 좀 어떠셔. ...그냥 정밀검사를 받으시는 건가? 결과는 언제 나오는데?
S#34. 병원
지원 : 결과는 내일 늦게 나온대. 그래서 학교엔 모레나 갈 수 있을 거 같아. 경진이 만나면 전해줄래?
그 홍보일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게 나을거 같은데.
S#35. 동아리방
정태 : 그건 걱정하지 마. 나하고 경진이가 대충 시작해놨으니까 나중에 와서 편집하면 될거야. (상대가 말이 없는지 기다리다가)
여보세요. 어이 듣고 있어?
S#36. 병원
지원 : (고개 먼저 끄덕이고) 듣고 있어. ... (말이 없다가) 지금 얘기 좀 해도 되니? 나 얘기 할 사람이 좀 필요한데 괜찮겠어?
S#37. 동아리방
정태 : (말이 막혔다가) 그럼. (편히 앉는다) 나 편하게 앉았어. 길게 들어줄 수 있어. 얼마든지.
S#38. 병원
지원 : 사실은.. 나 오늘 아주 부끄러운 짓을 했어. 누구한테 정말 미안한 말을 했어. 내 마음 편할려고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했어.
생각할수록 ...부끄러워. (눈물이 나는데, 목소리는 그대로) 이 얘길 누구한테든 하고 싶었어. 왜냐면..
그 사람한테는 너무 미안해서 말도 못하겠거든. ...이럴 때 사람들은 술을 마시나봐. (애써 웃는.. 고개를 벽에 기대고)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 ...누구한테든.
S#39. 동아리방
정태 : (말이 계속되길 기다리다가) 너 혹시 이 말 나한테 한 것도 부끄럽게 생각할거냐? 그럴 거 없어. 왜냐면.. (단어 고르기를
망설이다가) 친구는 이럴 때 쓰라고 옆에다 키우는거니까. 그리고 난 벌써 니가 한 말, 잊었으니까. 그럼 됐지?
S#40. 병원
지원, 좀 웃고, 몰래 눈물 닦고.
지원 : 그럼 됐어. 그렇게 해줘.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그리구 홍보 일 해주는 것두.
S#41. 동아리방
정태 : 고맙다는 말 듣긴 간지러운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거 밖엔 없으니까. ...그래. 들어가서 좀 쉬어.
아버님 일은 너무 걱정 말고. ..어 끊어.
좀 더 기다리다가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렇게 내려진 수화기를 보면서 잠시..
S#42. 병원
지원이 벽에 기대 서있다. 조금은 따뜻해진 기분으로.
S#43. 도서관 전경 / 밤
어두운 밤, 불켜진 도서관 창문으로 책을 들고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고.
S#44. 전자과 건물 앞 / 밤
이른 새벽의 느낌.
중희가 명환을 부축해서 걸어들어가고 있다. 명환은 아직 술이 덜 깨서 어리버리한 상태다.
중희가 카드키로 문을 여는 동안 명환이 거의 주저앉으려는 것을 중희가 재빨리 부축을 한다.
S#45. 이교수 랩 / 아침
랩 식구들이 둘러앉아 미팅 중이다. 각자 자료들을 들고 넘겨가며 이교수의 말을 듣고 있다.
이교수가 얘기를 하다가 보면. 만수는 뒤쪽에 앉아 거의 졸고 있다.
이교수 중희에게 만수를 깨우라고 신호를 준다. 중희 만수를 흔들고, 만수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데,
만수 바로 옆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던 명환이 그대로 의자 밑으로 굴러떨어진다.
S#46. 엔진 랩 앞
이제 밝은 아침.
엔진 랩에서 작업하는 아이들... 그 옆의 천막.
천막 안에서 병석과 자현, 다른 친구들이 팔짱을 끼고 보는 곳.
대욱이 커다란 설계도를 들고 가르켜 보이며 대단히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중간에 가운데 놓여진 차체를 텅텅 치기도 하며.
S#47. 인공위성 센터 앞
카메라를 든 정태가 와서 카드키를 넣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돌아보면 진수의 차가 와서 서고, 진수가 내린다.
진수 차문을 닫고 오려다 보면, 정태가 열린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다.
진수, 걸음을 빨리하여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고 정태 피식 웃으며 진수의 등을 쳐서 밀고 들어 간다.
S#48. 센터 내 회의실
서교수와 경진, 정태, 진수가 둘러앉아 회의 중. 경진이 복사물(기획안)을 나누며 뭐라 떠들고 있다.
서교수가 받아서 읽어보려다가 문득 입구 쪽을 본다. 거기 지원이 들어서고 있다.
경진 반가와 튀어 나가는데 지원 서교수를 향해 깊숙히 절을 해보인다.
S#49. 센터 로비
진수가 대기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에 자료를 놓고 메모를 하고 있는데, 그 옆으로 와서 앉는 지원.
진수 : 고생 많았지요?
지원 : 몸은 편했어. 좋은 병실이어서.
진수 : 아버님... 병명 들었어요. 간경변이라고.
지원 : 암일까봐 걱정했어서 그런지 오히려 마음이 놓였어.
진수 : 그래도 간에 관계된 병은 치료가 어렵다던데요.
지원 : (고개를 숙여보이더니) 이번에 고마웠어.
진수 : 별 말씀을요.
지원 : 그리고 (들고있던 책갈피에 꼽아놓았던 봉투를 꺼내 준다) 입원비 알아내느라고 힘들었어. 이거 차용증이야.
금방은 갚을 수 없을 거 같애. 이해해줘.
진수 : (봉투를 보다가 웃고 받아든다) 알았어요. 제발 천천이 갚아줘요.
지원 : (일어선다. 머뭇거리다가) 저번에 병원에서 내가 했던 말..
진수 : (잘라서) 사과할 생각이면 하지 말아요. 누나한텐 그런 거 안어울리니까.
(메모하던 종이를 내밀어 주며) CG로 제작할 것들을 뽑아보고 있었어요. 볼래요?
지원, 잠시.. 그리고 앉는다. 건네주는 종이를 받아 보기 시작한다.
S#50. 복도
민재가 부지런히 오고 있다. 시계를 보며..
편집실 앞에서 문 안을 귀기울여 들어보고 살그머니 문을 연다.
S#51. 편집실
처장과 서교수 박교수가 편집되고 있는 모니터를 보면서..
지원이 편집기를 맡고 있고. 경진이 뒤에서 보고 있다. 민재가 조심스레 들어와 뒤에 선다.
지원 비디오를 리와인드하고 있는 중이다.
민재가 들어왔을 때는 서교수가 얘기하고 있는 중.
서교수 : 이 친구들이 아예 두 개의 버전으로 홍보비디오를 만들겠다는 군요. (경진에게) 이건 어느 쪽이지?
경진 : 지금 보실 건 일반시청자용입니다. 기술적인 면 보다는 우리별을 연구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휴먼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죠.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내용을 중점으로 했는데요. 그건 학술자료로도 쓰일 수 있게 준비중입니다.
처장 : 허어 대단하구만요. 하나 만들기도 어려운 시간일텐데.
박교수 : 이 친구들 다 제가 스카웃해온 친구들입니다. 알고 계시죠?
처장 : 그래요. 박교수는 역시 학생들하고 잘 통하시니까. 하하.
서교수 : 사실은 아직 보여드리고 싶지 않다는 걸 제가 억지를 부렸어요. 완성품이 되기 전에 보시면 실망하실까봐 걱정들이에요.
경진 : 정말입니다. 이건 아직 음악도 안 들어갔구요. CG작업도 안끝난거거든요. 그러니까 실제의 완성품은 이것보다 훠얼씬
질이 좋을 것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네.
처장 : 알았어요. 다 감안해서 볼테니까. 하여간 수고했어요.
박교수 : 가만가만, 좋은 작품은 편히 앉아서 봐야 되는데 의자가 어딨나. (수선스럽게 움직이고)
지원 : 준비 다됐는데요. 시작할까요.
박교수 : 잠깐.. (소리치며 자리를 잡고 나서야) 자 시작합시다. 요즘은 영화 시작 전에 애국가 안 들어도 되죠.
지원, 플레이를 시킨다. 우리별 3호의 발사 장면이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카운트다운을 부르는 소리와. 로켓 화면..
지원, 교수들의 뒤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있던 민재가 지원에게 낮은 소리로.
민재 : 이거 지켜보지 않아도 되지?
지원 : 왜?
민재 : 잠시만..
지원을 불러내며 먼저 살그머니 밖으로 나간다. 지원, 어리둥절해서 따라나간다.
경진 궁금해서 그쪽을 보는데..
박교수 : 저거 저 CG 우리 전산과 학생이 만든 겁니다. 멋있죠?
S#52. 실험실 밖 복도
지원이 따라나오다 보면, 민재가 손목시계를 보고 있다가.
민재 : 이따 열두시에 할 일 있니?
지원 : 12시? 아니. 왜.
민재 : 어 그럼 센터 지상국에 좀 가봐.
지원 : 거긴 왜.
민재 : 가보면 알거야. 12시. 시간 정확하게 지키고. 알았지?
지원 : 무슨 일인데.
민재 : 나도 잘 몰라. 나도 이런 심부름하는 게 좀 체면이 안서지만.. 하여간 전했다. 그럼 이따 거기 가봐.
민재 얼른 가버린다. 지원 어리둥절해서 보고.
S#53. 편집실
모니터에서는 연구원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다.
연구원 : 밤에 모두 집에 가고 나면 연구실엔 우리 한국애들만 남았어요. 밤마다 한국 노래 크게 틀어놓고, 서로 잠들면 깨워주고,
우리끼리 쓰레기통 뒤져가며 걔들이 버린 메모장 주워서 연구하고. 그때 우리 구호가 뭔지 알아요?
우린 전투중이다. 나가자. 싸우자. 그래서 배우자.
처장 등이 보면서 허허 웃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S#54. 지상국
벽에 걸린 시계가 12시에서 1-2분 정도 모자란 시간을 가르키고 있다.
연구원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지원이 들어서며.
지원 : 전산과 구지원인데요. 저 부르셨어요?
연구원 : 아 구지원씨. 안그래도 기다렸어요. 거기 좀 앉죠.
지원 : (가르켜준 의자에 앉긴 하면서) 무슨 일인지..
연구원 : 우리별 1호에 우리말 방송 기능이 있는 거 알아요?
지원 : 네. 녹음을 해서 그걸 디지털 신호로 바꿔 위성에 전송을 하는 거라고 들었는데요.
연구원 : 맞아요. 그럼 그걸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서 지상에 전달을 하게 되죠.
햄장비나 별도의 수신기만 있으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게 되요. 저 먼 우주에서 날라온 메시지를 듣게 되는 거죠.
자 이게 수신깁니다. 거기 앉아 있으면 우리별에서 보내져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에요.
지원 : 네.. (하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는데)
연구원 : 그럼 들어봐요.
하더니 나가버린다.
지원, 어어..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는다. 방 내부를 둘러보는데..시계가 12시를 맞춘다.
동시에 지직거리던 컴퓨터 화면에 신호가 잡히면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정태 : (E) 여기는 우리별입니다. 아. 아.. 그럼 지금부터 우리별에서 보내는 메시지를 들으시겠습니다.
지원 : (놀라서 듣는데)
정태 :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든 인간은 별이다. 이젠 모두들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지만,
그래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누구하나 기억해내려고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여전히 진실이었다.
지원 : (놀라 듣다가 차츰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정태 : (계속) 한때 우리는 모두가 별이었다. 저마다 꼭 자기 몫만큼의 크기와 밝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채 해저문 하늘녘
어디쯤엔가에서, 꼭 자기만의 별자리에서 자기만의 이름으로 빛나던, 우리 모두가 누구나 그렇게 영롱한 별이었다.
....이상 임철우님의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들려드렸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우리별 송신을 마칩니다. 감기 조심하십쇼.
지직거리는 잡음이 잠시 들리더니 화면의 신호도 잠잠해진다.
지원, 숙였던 고개를 천천이 드는데 눈물이 어린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