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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7.22. 원명정사 법문.
39. 장폐 마왕
장폐 마왕이 여러 권속을 거느리고서 천년동안 금강제 보살을 쫒았으나 일어나는 곳을 찾아도 볼수 없었는데 문득 어느날 보게 되어 이에 묻기를 "보살은 마땅히 어디에 의지해서 머물렀기에 제가 천년을 보살이 일어난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습니까?" 하니 보살이 이르기를 "나는 머무름이 있는데 의지해서 머무르지도 않고 머무름이 없는데 의지해서 머물지도 않으며 이와 같이 머물렀습니다."하였다.
강설: 이 책을 낸 스님이 이에 말하기를
금강제 보살은 有住, 無住에 상관없이 머물렀다.
<영가증도가>에 나오는'取不得, 捨不得, 취해도 얻지 못하고 버려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음자리는 取捨 두가지로도 다 얻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비유했는데, 말은 그럴싸하나 잘못아는 말이니 머묾의 뜻은 "응무소주"의 뜻이지, 결코 취하고 버림으로써도 얻지 못한다는 비약된 논리로 끌어 붙여서는 봄날에 연못속 조약돌을 집게 되는 꼴이 되는 것이니, 뜻한 바의 대의를 바로 살펴야 하는 것이다.
머문자리를 일러라. "콜록 콜록"
40. 마조도일
마조께서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음에 답하시기를
"곧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하니 또 묻기를
"어떤 것이 도입니까?”하자
“無心이 바로 도이니라”하니 또 묻기를
“부처와 도의 거리가 서로 얼마입니까?"답해 이르시기를
“도는 손을 편 것과 같고 부처는 주먹을 쥔 것과 같다."하였다.
강설: 마조선사는 六조→ 남악회양 선사의 법을 이어 백장회해 등에게 법을 전하신 분이시다.
어떤 것이 부처인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
어떤 것이 도인가? “무심도 곧 도가 아니니라"
부처와 도의 거리가 얼마인가? “물과 파도와 같도다”
마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아니하니 만약 ‘도를 닦아 이룬다.'고 말한다면 닦아 이룸에 도리어 무너져 곧 성문과 같고
만약‘닦지 아니한다.'고 말한다면 곧 범부와 같다'하니
묻기를 “어떤 견해를 지어야 곧 도를 통달해 얻습니까?"하자
조사께서 이르시기를“자성에 본래 구족해 있으니 다만 선과 악에서 막히지 아니하면 도리어 도를 닦은 것이니라"하셨다.
강설: 이것을 강해한 스님이 이것을 들어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깨달으면 바로 도를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도를 닦아 이루었다면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다. 몇백년 후에는 무너진다. 허공은 집을 만드는 것에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허공을 道라면 닦는 것은 집을 짓는 것이다. 도를 닦아 이루면 다시 무너져서 성문과 같다는 것이다. 소승성문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소승이라고 한다’ 했으나 바로 살피지 못한 소견인 것이다.
“깨달으면 닦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말은 할 필요도 없는 말이다. 당연히 깨달음이 구경각인데 깨달은 경계에 딲을 필요가 있으리오. 도는“本自圓成"이라 닦아 얻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닦아 이룬다면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닦는다는 말에 떨어지면 성문의 사성제에 도리어 물러남이 된(무너짐)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선악에 막히지(머묾: 집착) 않으면 곧 도를 닦은 것이다’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닦는다"하면 닦아 얻을것이 있음이 없음을 일러준 뜻을 모르는 소견이요, 닦음은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닦을것이 없다"하면 말에 떨어져 어리석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앞의 말은 평등문이요 뒤의 말은 차별경계임을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견해를 지어야 곧 도에 통달하겠는가? “어긋났도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사람들이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고 공을 관하고 정에 든다면 곧 조작(지어 만듦)에 속하고 다시 만약에 밖을 향하여 달려 구하면 더욱 벌어지고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만 삼계(욕,색,무색)의 헤아리는 마음을 다함(여읜것)이니라. 한생각 망상이 곧 이 삼계생사의 근본이 되니 다만 한생각 망상만 없으면 곧 생사의 근본도 없느니라"
강설: “善惡, 空이라는 것을 관하고 정에 든다는 것은 분별심을 일으켜 도리어 도를 등지는 것이니 본래 일상(不二), 일행삼매가 둘아닌 진공, 眞定인 것이니 취사선택이 곧 지어 만든것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래 진공묘유한 자성을 떠나 밖(相인 말이나 형상인 차별경계)으로 쫓아 구하면 도와는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이니 욕계, 색계, 무색계의 차별경계를 여의면(헤아린다는 것은 계교하는 분별심) 곧 구경의 도인 것이라, 한생각 망령된 생각(분별의 상견)을 일으키면 집착심으로 윤회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이 망상이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그 청정한 본성(깨달아 듦)에 생사가 있음이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六조께서 “앉아서 공을 관하고 정을 얻는다하는 것이 곧 선이 아니요 병이라"하신 말씀의 도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도는 닦는 것이 아니고 다만 더러움에 물들이지 말 것이니라. 어째서 더러움에 물든다 하는가?
다만 生死의 마음(생각)이 있어 만들어서 쏠리는것(취향)이 모두 이 더러움에 물듦인 것이다. 만약에 그 도를 곧바로 알고자 할진댄 평상심이 이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옳고 그른 것이 없으며 취하고 버릴것이 없으며 끊어져 없음(단견)과 항상함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기를 ‘범부의 행도 성현의 행도 아닌 바로 보살의 행이라'하셨느니라.
강설: 이 스님이“도는 닦아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했으나 잘못알고 한 말이니“도는 닦을 것이 없어 본래 청정한 그 가운데의 실상진리가 갖추어 있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닦아 얻을것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며 이 맑아 깨끗한 본성을 물들이지 않는 것이 본래 그대로의 도인 것이다.
그것이 평상심시도 이며 범부와 성인을 가리고 생사에 집착함으로써 스스로 만든 분별심으로 애착과 증오를 일으켜 청정본심을 흐리게 하는 이것이 오염이 되는 것이다. 닦음은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닦아 성취 할 바가 업은 것은 아니나 증득하고 보니 물들여 더럽힐 것은 없다” 하는 것이다.
또 항간에 平常心是道를“모든것이 도가 아님이 없다하며 말에만 국집해서 막행막식을 하며 도라하나 옳고 그른것도 분명히 잘 살펴 알아 無主(집착으로 머묾없는 無爲)의 행이 보살행이요, 이것이 평상의 치우침 없는 청정한 평등 동체자비의 행을 이르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머묾없이 그 마음을 내는 것이다.
장수(長水)스님이 낭야(瑯琊)선사에게 “청정본연하다면 어째서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마음자리는 청정본연해서 텅텅비고 지극히 깨끗한데 어째서 이런 오염의 세계, 삼계가 벌어지고 산하대지가 왜 생겼냐?는 것이다.
낭야선사가 이르기를 “청정본연한데 어째서 산하대지가 생겼느냐?"고 반문하셨다. 그 말에 장수선사가 깨달았다.
“청정본연한데 어째서 산하대지가 생겼느냐?"하는데 무엇을 인하여 장수스님이 깨달음을 얻었을까?
“청정본연이 無常하였음이라"
이 책을 낸 스님이 강해하기를 “마조스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해답을 生死心으로 조작하고 취향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생사심이 바로 생멸심이다.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며 또 생겼다가 없어지는 그런 마음이 있어서 조작하고 趣向해서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善은 취하고 惡을 버리는 것이 다 趣向이다"했으나 이 말은 그럴싸하나“청정본성인데 어째서 산하대지가 나왔나?"하는 그 도리와는 맞는 말이 아니니, 산하대지의 나툼은 진공묘유의 나툼의 작용인 것이지 오염으로 취향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이 도리를 알면 낭야선사의 반문의 답이나 장수선사의 이때의 깨달음을 알것이나 말의 잔치는 깨달음에 이익이 없을뿐 아니라 도리어 등지게 될 뿐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유위도 다하지(함이 있음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무위(함이 없음: 定)에도 머물지 말 것이니라. 유위는 바로 무위의 작용이요 무위(體:定)는 바로 유위(작용)의 의지(근원)함이니 의지에도 머물지(定에 국집) 말 것이니라.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허공은 의지할 바가 없다'고 하셨느니라.(허공은 빈 것일 뿐이니 무위의 체는 진공묘유<반야>한 없이 있음이 있는 것이다) 심생멸(작용할줄아는 마음)의 의미와 심진여(진여의 마음:본성체)의 의미는 심진여라고 하는 것은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어떤 물상을 비추는 것과 같으니 거울은 마음에 비유한 것이요, 물상은 법(만상:만유)에 비유함이라. 만약에 마음이 법을 취하여 곧 밖의 인연을 섭(끄달리고 집착)하면 곧 생멸의 뜻이요 법(모든것:外緣)을 취하지 아니하면 곧 이 진여의 뜻이다.'하셨다.
강설: 이것이 성성적적의 소소영령함이요, 평상심시도와 중도의 마음이며, 보살심인 것이다
이 스님의 강해에“적적에만 치중하면 무기에 떨어지기 쉽고 성성에 치중하면 선악에 떨어지기 쉽다"했으나 옳지못한 소견이니, 적적(고요하고 고요함)은 적적으로 옳고 성성(또렸하고 또렸함)은 성성으로 옳은 것이다.
다만 고요하되 소소영령함(惺惺)이 곧 자성청정인 것이다.
‘적적이 무기로 떨어지기 쉽고 성성이 선악에 떨어지기 쉽다’는 말은 어림없는 소리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 “부처가 없는 곳에도 머물지 말고 부처가 있는 곳에도 빨리 그 자리를 떠나서 멀리 간다"는 말이 있다.
또 어떤 조사는“動着하면 卽與三十棒하리라, 조금만 움직여도 곧 몽둥이로 30번을 때려 주겠다"고 하셨다. 꼼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말과 비슷한 것이다.그래서 부처님이 있는 곳에도 자리잡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에도 자리잡지 말라는 것이다“ 했으나 이 또한 바른 지견이 아닌 것이다. 앞의 도리를 모르고 뒤의 말을 주워 붙인 허물을 범한 것이다.
“부처가 없는 곳(空:無)에도 머물지 말고 부처가 있는 곳(有:相)은 빨리 지나가라는 도리를 일러보라.
이 산승은“부처 없음에 머물곳이 없고 부처있음에 국집하지도 않겠다"할 것이며,
“조금만 움직여도 곧 30방을 때리리라"한 도리를 이르라면
“안산에 법당이 무너지도다"하리라.
또“마음이 진여이면서도 어느때는 생멸심을 낸다. 또 불생불멸은 심진여로서 본래 청정하고 순수한 자리이고 생멸은 심생멸로서 오염된 것이다했으나 이 또한 그릇된 소견이다.
진여가 어느때는 생멸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진여는 묘용의 작용을 항상함으로 六조께서“덧없음이라"하셨으며 생멸심이라 해서 오염이 아닌 것이니, 청정한 작용을 이름하여 대원경지라 하는것이며 이것을 일러 부처의 씀이라 하는 것이다.
19. 백장 회해 선사
백장 회해선사가 상당하여 이르시기를
“영광독로 형탈근진 체로진상 불구문자
심성무념 본자원성 단리망념 즉여여불
신령스러운 광명이 홀로 빛나서 6根과 6塵을 멀리 벗어나
체가 참으로 항상 드러나 문자에 구애됨이 없으니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졌으니
다만 허망한 인연을 떠나면 곧 여여한 부처이니라"하셨다.
강설: 백장선사는 六조→ 청원행사의 법을 이어 황벽→임제에게 법을 전한 분이다.
“본성은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있어 그 바탕은 참으로 항상하여 생멸이 없어 불구 부정한 그대로 항상 청정한 것이니 다만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빈것과 같고 그 같은것과 같은(여여) 부처라"하는 것이다.
이 스님이 강해하기를 “공연히 문자를 꼬집어서 말씀하신 것은 문자에 너무 집착하는 문자담판한(文字擔板漢)을 꼬집는 말이다. <전등록>에 문자 담판한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擔板漢이란 것은 외곬수를 말한다. 문자의 노예가 되고 문자에 집착된 사람들을 목에 판자를 짊어져서 꼼짝 못하듯이 아무 융통성이 없는 놈이라고 해서 文字擔板漢이라고 한다"했는데, 말인즉 맞는 듯하나 담판한이라는 것은 판대기를 어깨에 짊어진 것처럼 한쪽면은 보지 못하는 변견에 치우친 소견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사람의 성품을 세가지(三性)로 가려서
圓成實性 ―眞如 - 원만히 이루어져 있는 실다운
본성의 근원(佛) 성품
依他起性― 第八識―함장된 因地가 되는 식으로
연을 만나 조건만 갖춰 일으키면(攀緣) 果가 생하는 것이며 없어지지 않으므로 무몰식(無沒識)이라함.
徧計所執性 ― 第七識, 第六識, 前五識
― 나를 집착하여(7식), 외계를 받아들여 분별하는
식으로 나누어 살핌, 이것은 論으로 이 또한 엄격히 가리면 교문이요 분별인 것이다.
백장께서 어떤 스님이“어떤 것이 바른 대승의 도에 들어가는 것이며 문득 깨달아 드는 요긴한 법입니까?하고 물음에 인하여 조사께서 이르기를“네가 먼저 모든 반연을 다하고 만사를 쉬어서 선과 선아님과 세간과 출세간과 일체 모든 법을 아울러 다 놓아버려서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서 반연하지 않고 외우지 않아 몸과 마음을 놓아버려서 온전히 속박이나 장애없이 저절로 있어, 마음이 목석과 같이 입으로는 분별하는 바가 없고 마음으로는 행하는 바가 없어서 마음바탕이 허공과 같으면 지혜의 밝음(日)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구름이 풀려 태양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하셨다.
강설: 모든 반연을 쉰다는 것은 6진경계에 집착하거나 끄달리지 않음이요 착하고 악한 것 세속것과 이것을 여읜 진리라는 생각등 일체를 놓아 마음가운데 일체 분별 계교하지 않게되면 목석같이 되어(목석이라해서 무기물처럼 아무런 식이 없는 것이 아닌 밝게 깨어있는 상태) 일체의 망념을 여의어 비어 밝은 곧 청정본성에 듦이며 이것이 밝게 드러남을 깨달아 보게 되면 이것이 이 긴요한 진리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백장선사가 대중에게 보여 이르시기를 “배우는 것은 때묻은 옷을 씻는 것과 같으니라. 옷은 본래 있었고 옷의 때는 외부에서 온 것이다. 일체 유와 무와 소리와 형색을 말하거나 듣는 것이 때와 같으니 모두 마음에 찌꺼기(湊泊)로 가지지 말 것이니라"하셨다.
강설: 옷은 시작없는 본래부터 있었던 본체를 비유하시고 때라는 것은 6진 경계이므로 마음밖의 것이니, 일체 색,성,향등이 모두 맑아 깨끗한 본성에 술찌꺼기 같이 참이 아니므로 국집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백장선사께서 이르시기를“사람으로부터 부처에 이르는 것은 바로 성인이 되려는 뜻(생각)에 집착함이요 사람으로부터 지옥에 이르는 것은 바로 범부의 뜻에 집착함에서이다.
단지 지금같이 다만 범부나 성인의 경계에 대해서 애착이 있어 오염되면 이것을 유정으로 불성이 아니라고 이름하며 단지 지금같은 다만 범부와 성인의 두 경계와 일체 유무의 모든 것(법)에 모두 취하고 버리는(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취사가 없다는 마음을 알음아리로 풀어 아는 것까지도 없으면 이것을 무정(알음아리의 식이 없음)으로 불성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그 정식에 매이지 않아서 무정이라고 이름하나 목석이나 허공이나 누런 꽃과 푸른 대나무의 무정물인 것과는 같지 않는 것이다.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가지고서 만약에 있다(有)고 말한다면 經가운데 수기를 받아 성불을 ‘얻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단지 지금같이 나타남을 비춰봄에(鑑覺) 다만 유정으로서 변해지는 것을 받지 않음을 마치 푸른 대나무와 같다(항상함)고 비유한 것이며 알지 아니한 때가 없고 근기에 응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항상 덧없는 작용)을 누런 꽃과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또 이르시기를 “만약에 부처님의 경계인 때(階梯)를 밟게 되면 무정이 불성이 있는 것이 되고, 부처님의 계제를 밟지 못하면 심정이 있음으로 불성이 없는 것이니라."
강설: 이름한다는 것은 말한다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붙이는 가설이라는 뜻이다. 유정으로서 불성이 아니라 말한 것은 중생심으로 취사염애로 끄달려 집착하고 계교 사량하기 때문에 유정이나 청정본성인 불성이 아니다고 말한 것이고, 무정으로서 불성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일체 取捨心이 없고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 없는(무정)것을 말한 것이다.
즉 알음알이가 없는 것을 無情이라고 말했으며 분별심을 내지 않으므로 불성이 있다 한 것이니 그래서 無情有佛性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석이나 허공, 또는 누른 국화꽃, 푸른 대나무처럼 無情物의 아예 정식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분별하는 알음알이로 스스로 속박하는 것이 없을뿐 무정물과 같은 무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이 스님이 강해하기를“깨달은 사람은 불성이 있다고 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불성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조주스님께서도 개가 불성이 없다고 해버렸다. 부처님께서는 너무나 좋게 중생을 다 포괄해서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다"했는데,
이 불성은 범성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 깨닫고 않고에 관계치 않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본연의 불성과 범부의 분별심을 가린 것일 뿐이며 조주스님의 무자 화두를 이렇게 안다면 조주스님의‘無’라 하신 도리에 근방에도 미치지 못한 소견인 것이다.
백장선사께서“세가지 나쁜 욕심은 첫째는 사부대중이 둘러싸서 모시기를 얻고자 함이요, 둘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문도가 될 것을 얻고자 함이요, 셋째는 모든 사람이‘내가 바로 성인과 아라한임'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니라.하셨다.
강설: 이러한 3가지의 나쁜 욕심은 곧 아상이 있음으로써 인 것이다. 나를 높이고 나를 위해주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곧 도인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