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3년 동안 공생애를 사셨는데, 그 공생애 기간 동안 주로 활동했던 장소는 크게 두 곳이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거의 3년 내내 활동하셨던 갈릴리라는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으로는 매우 짧은 기간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인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3년 동안 활동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시기도 했고, 귀신을 쫓아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3년 동안의 활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같이 자고 같이 밥 먹고 - 그렇게 함께 생활하던 12명의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고무적인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신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군중들은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때로는 몇 백 명, 때로는 몇 천 명씩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3년 동안 갈릴리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날이 갈수록 예수님의 인기는 더 높아져만 갔고,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최고의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더러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일행을 초청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가면 환영을 받을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 예루살렘에 가보았지만, 정말 거기에는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는 적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적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제자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 예수님께서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하시는지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막10:32)
그런데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면 선생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자꾸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가서 나의 적대자들에게 잡혀서 죽도록 매 맞고 고생고생 하다가 죽어야 한단다. 나는 죽으러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니 너희는 아무 걱정하지 마라.’(20:17-19)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3년 동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선생님만 바라보고 떠돌이 생활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선생님이 죽으셔야 한다? 그리고 죽으시기는 죽으신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다?’ 그런 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을 이끄시고는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함께 동고동락한 제자들의 눈에조차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51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행하여 올라가시는데 굳게 결심하고 올라가셨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랐다는 말씀입니다. 굳은 각오로 결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예수님의 표정에는 비정함이 엿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마만큼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비장하고 무거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가야만 하는 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기에 우리 주님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드디어 베다니란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에서 둘을 먼저 보내시면서 “저 앞에 있는 마을에 가면 어린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나귀를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왜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우리 선생님이 꼭 필요해서 쓰시려고 한다.‘고 말해라 그러면 끌고 가게 해 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그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새끼의 잔등에 올라 타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나귀 새끼가 아직 한번도 안장을 져 본적이 없는 어린 나귀였기에 그 잔등에 안장대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올려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나귀 새끼의 잔들에 올라타시고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던 그날은 유월절 축제 분위기로 온 예루살렘 거리가 들떠 있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유월절 축제를 벌이는 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은 이 희한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나귀나 말을 타고 그 나라의 수도에 들어온다는 것은 세 가지 경우에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전쟁에 나갔던 왕이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입니다. 개선장군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말을 타고 들어오면 성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나라를 구한 그 장군이나 왕에게 환호성을 보내면서 맞아들였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왕의 대관식 때입니다. 새로운 왕이 이제 왕좌에 등극하게 될 때 성문 밖에서부터 말이나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오면 백성들은 새로운 왕을 축복하고 맞아들이면서 환호성을 질러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경우는 나라가 전쟁에서 패하여 적대국 왕이나 장군이 그 나를 점령하기 위해서 말을 타고 들어오는 경우입니다. 물론 그 때에는 백성들이 환호성을 질러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개선장군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왕의 대관식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헤롯 왕궁에서는 왕이 버젓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또 점령자로 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위해서 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예수라는 사람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그것도 어떤 왕이나 장군처럼 커다란 나귀나 말이 아니라, 아주 조그마한 나귀 새끼를 타고 유월절 축제에 때를 맞춰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니,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군중들은 초라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예수님의 일행을 맞이하고 싶어졌습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예수님이 오시는 길거리에서, 마치 새로운 왕이 입성하는 것처럼, 개선장군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들어올 때처럼, 자기들의 옷을 길에 펴면서 나뭇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하는 표현으로 한다면 ‘만세’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왕이나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지, 그리고 군중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그렇게 열렬히 환호하며 맞아들였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압니다.
첫 번째로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 가신 것은 만왕의 왕으로 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말이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많은 왕들과 장군들을 보아왔습니다. 옛날에 다윗 왕도 수많은 외적을 물리치고 승리의 깃발을 앞세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에 예루살렘에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짓밟기 위해서 들어오는 이방군주들의 입성 때에는 예루살렘에 처절함과 피비린내 나는 참혹함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거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입성하느냐에 따라서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난 뒤에 평양에 소련군이 들어오자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평양과 북한의 운명은 그야말로 처절하기 그지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점령하고 파리에 들어올 때 ‘파리의 개선문’을 세웠지만, 나폴레옹 군대가 입성하는 곳마다에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들어가신 것은 소련군이나 나폴레옹의 입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배하고, 짓밟고, 고통을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시기 위해서 사랑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모습은, 이 세상의 군왕들이나 개선장군들처럼 우렁찬 군대의 행진이 아니라,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왕 인류의 왕 메시야가 입성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해 주고 있었습니다. “시온의 딸들아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르라. 보라 너희 왕이 임하시리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도다. 그 왕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되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리로다” 우리 주님은 커다란 군마를 타시지 않았습니다. 나귀를 타시되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하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요란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흔드는 종려가지의 환호성 속에 입성하셨습니다. 요란한 군악대의 나팔소리보다는 어린아이들의 찬양소리와 환호를 받으시며 입성하셨습니다. 그 만왕의 왕은 찬란한 왕관 대신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이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네 앞에 있는데 너는 그 길에서 돌아서 버렸구나”(눅19:42)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참된 평화의 왕이 들어가셨는데도 왕으로 영접하지 못한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꿈에라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북한의 김정일 군대가 들어오면 이 땅은 생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임하시면 거기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입성하는 곳에, 그리고 그분을 왕으로 모셔 들이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에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우리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기 위해서는 우리 가정에도 나귀 타고 겸손하게 임하시는 주님을 영접해 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영접해 들이심으로 여러분의 생애와 가정에 평화가 넘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우리 주님은 심판하실 심판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제 뭔가 사건이 벌어지겠구나. 때가 왔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 땅에 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치혁명이 일어나고 새 세상이 올 것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그러실 때 나름대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혁명을 통해서 정권이 교체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도 다 한 자리씩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제일 먼저 찾아가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장 먼저 로마 총독부를 찾아가실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을 몰아내고 해방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 땅에 정치적인 자유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로마 총독부나 헤롯 왕궁이 아니라 성전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보시니까, 성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엉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년이면 누구나 성전 운영비를 위해서 매년 반 세겔씩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이 성전세는 대개 유월절 한 달 전에 전국적으로 설치된 세무서에서 거둬들였는데, 그 때 내지 못한 사람들은 유월절 때 성전에서 직접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세는 특별히 제작된 은돈으로 바꿔서 납부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보니까 은돈으로 바꾸어 내야 한다는 것을 이용해서 소위 ‘돈 바꾸는 자들’이 엄청난 환전료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희생 제사에 쓰일 짐승은 아무 것이나 그냥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측에서 합격도장을 받은 것만을 흠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검인 도장이 찍힌 짐승은 일반 짐승보다 무려 10배 이상 비싼 가격에 성전에서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당 이익은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람과 매매하는 사람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순수한 마음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들만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제사를 이용해서 엄청난 부정과 사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보시고는 분노하셔서 채찍을 드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다 내어 쫓으신 후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주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전 안에까지 파고 들어온 죄악으로 인해서 얼마 있지 않으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채찍을 피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셨을 때, 온 예루살렘은 거대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들었습니다. 성전 마당에까지 입추의 여지없이 붐볐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수없이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어 축제를 이루고 있었으니, 그 광경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것에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 가셨던 예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이 땅에 오신다면 예수님은 제일 먼저 어디를 가실 것 같습니까?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을 방문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으면 병 고치고 사업이 잘 되고 만사형통하게 된다고 가르치면서 거짓 복음으로 수 천 수 만 명을 모으는 큰 교회에 찾아가시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그런 교회에 가신다면 과연 기뻐하실까’ 우리가 이 시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크든 작든 간에 겸손하게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그 곳에 가실 것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렇게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오셔서 평강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기보다는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부정과 불의를 일삼는 곳에는 심판주로 임하셔서 가차 없이 채찍질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을 쫓아내시는 심판주가 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신 주님이 우리에게 심판주가 아니라 사랑과 긍휼을 안고 다가오시는 평강의 주님으로 영접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 주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 중 가장 크게 지키는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해방을 얻던 감격적인 날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해방절-광복절과 같은 날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 임한 재앙을 피하여 해방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발라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기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유월절에 ‘유월절 희생제물’로 죽은 양이 무려 15만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많이 죽어간 그 어린양과 같이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가신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예수님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다”(사53:7)고 예언해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보시고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외쳤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셨다”고 선포했고,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 주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9:12)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들어가신 것은,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혁명군의 입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입성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는데 -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 빽으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이것은 세상 권력을 놓고 자리 다툼을 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신 질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실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내 십자가를 진 것처럼,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가느냐?” 오늘 이렇게 우리 주님이 물어 오시는데,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2,000년 전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 그 초라한 행진이 비록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 골고다의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으시고, 죽어 가는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다시 우리 주님을 평강의 왕으로, 죄악을 제거하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심판주로, 그리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삶에 영접하셔서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 주님과 함께 가장 행복하고 축복을 누리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