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자식들이 연세가 드신 부모님을 위한 잔치, 회갑이나 칠순,
그리고 팔순잔치는 그 옛날, 사람의 수명이 짧았던 시절부터
장수를 축하하고 또한 무병과 천수를 누리라는 의미의 잔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주렁주렁한 손주들은
다복하다는 뜻으로 자손이 번창함을 주변에 자랑하는 것이 되기도 했습니다.
잔치 날에는 멀리 사는 친척이나 근처 마을 사람들도 음식을 나누며 축하해 주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캐나다에서도 회갑은 없지만
소위 칠순이나 팔순 잔치는 우리와 다를 바 없고 파티가 열리고는 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지난 오월이었습니다.
제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 한 사람의 아버지 팔순 잔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역 신문(벼룩시장 같은 무가지 신문)에
언제 어디서 파티를 한다는 광고도 실렸구요.
그 노부부는 제 가게에도 자주 들리고 일주일에 한 두번은
저의 식당에서 식사도 해서 서로 잘고 지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신문에 광고를 낼 정도니 자식 잘 두었다는 생각과
거창한 파티라는 기대도 했습니다.
그래서 명색이 사장인데 당연히 가서 축하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한국 같으면 봉투를 준비하면 되겠지만 돈으로 주는 것은
그렇고 해서 무엇을 준비할까 고민도 했습니다.
다른 종업원들에게 무슨 선물이 좋겠냐고 물었더니
노인들 파티에는 그냥 가도 된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빈손으로 가’ 하고 꽃바구니를 준비했습니다.
마침 잔칫날은 토요일이라 마누라와 딸래미도 데리고
50Km 떨어진 시골 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파티장에 들어선 순간 제는 무척 당황해 했습니다.
분위기 때문이었지요.
파티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한 노인이 사회를 보며
파티를 주도하고 있었지만 하객은 전부 노인들.
물론 자식들 부부는 있었지만 손주들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았고
음식은 케익과 커피뿐, 술도 자식들만 조금 마신 것 같았지만
하객을 위해 준비한 것은 없었습니다.
최소한 부페로 생각한 제가 무안했지요.
축하 선물도 거의 없어 제가 가지고간 꽃바구니가 분위기를 살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변을 살펴보니 제가 앉아있을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에게 인사만하고 바로 나왔지요.
조금은 허탈했습니다. 그렇다고 배불리 때려 먹으려고 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잔치에 고작 케익과 커피가 뭐야.
또 한번은 다른 종업원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장례를 치루어야 한다며 3일 정도 못 나올거라고 했습니다.
속으로 그 시간이면 충분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잘 다녀 오라고만 했지요.
별도의 조의금도 없이..
그런데 다음날 가게에 나가니 장례식에 간다는 사람이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까 잠깐 다녀왔다면서 멀리서 사는
다른 자식들이 아직 오지도 않았고 나중에 장래식에만
참석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경로효친이나 삼강오륜을 따질 것은 아니지만
속으로 ‘ 에이 후레자식들’ 소리가 절로…ㅋㅋㅋㅋ.
이런 가족 관계가 저의 한국과 다른점에 어리둥절 하면서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부부나 자식하고의 관계
한가지는 소위 자기가 난 자식이 아닌 남편이나 아내의 자식
소위 전실 자식과 같이 잘 사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저의 종업원 이야기지만 지금 남편은 세번째고
아이는 셋 그러나 아이들의 아버지는 전부 다릅니다.
물론 이혼을 하더라도 대부분 엄마가 아이를 키우고 양육비는
실제 아버지가 부담한다고 하지만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이가 들면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그 놈의 정 때문에’ 그리고 ‘남편이나 마누라 보다는
자식하나 보고 산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부부라는 것을 가지고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참고 산다는 제 말에 ,
바보짓’이라고 하더군요.
싫으면 갈라서는 거지 싫어도 같이 사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하면서요.
그리고 아이가 있건 없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업원이 모두 여자들이기도 하지만 그들 부부의 애정표현도 매우 적극적입니다.
매일 얼굴보고 사는 처지일텐데 남편이 가게로 찾아오면 포옹도 하고
입도 맞추고 거기다가 담배도 사서 주머니에 넣어주고...
그럴때면 저는 얼굴을 돌립니다. 얼굴이 달아올라서요.
그렇지만 헤어지는 것도 보면 얼음장같이 차겁고 냉정하더라구요.
또 비록 이혼은 했지만 아이들 양육문제로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고 아이들도 같이 살지 않는 아빠나 엄마가 보고 싶으면
며칠 있다가 오기도 하고요.
가게 손님 중에서도 자신과 피부 색갈이 전혀 다른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입양을 해서 키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신이 소위 혼혈아인 것 즉 인디언과 피가 섞였다거나 하는 것을
남에게 말하는 것을 전혀 꺼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미군과 기지촌 여자들과의 혼혈아 문제나
월남 전쟁 때 버려진 한국인과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우리도 한번씩 주고 받은 셈인가요?
사람이 최소한 자신이 선택 것이 아닌 필연적이거나
불가항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로 인해서 피해를 보거나
멸시를 당해서는 안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연, 혈연 등
인간 스스로 만든 굴레,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당대 뿐 아니라
후대에도 대물림 되는 연좌제 같은 또 다른 굴레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합니다.
그러는 나는 제 아이들이 나중에 한국계가 아닌 현지인이나
아니면 다른 종족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글쎄요. 아직은 자신이 없습니다.
여기에 사는 훈련이 덜 되어서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