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8 08:00 김삼웅
노무현은 약속대로 2000년 4월 13일 실시한 제16대 총선에 서울을 떠나 부산 북구 강서을에서 출마하였다.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는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개혁진보 성향의 인사들을 영입하면서 당명을 새천년민주당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은 부산에서는 여전히 외면당하는 ‘의붓자식’의 신세였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제시하고 국민화합의 필요성을 역설해도 마이동풍, 쇠귀에 경읽기였다.
새천년민주당은 ‘전라도 당’으로 매도되고, 노무현은 ‘김대중 사람’으로 폄훼되었다. 이번에는 한나라당의 허태열 후보에게 큰 표차이로 떨어졌다. 여섯 번 나가서 네 번 떨어졌다. 6전 4패 2승의 과락이었다.
노무현은 “친정을 걱정하는 딸의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부산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였다. 선거 전에 실시된 10차례가 넘는 여론조사에서 당선 안정권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2000년 16대 총선 당시 노무현이 종로에서 출마했더라면 손쉽게 당선되었을 수도 있다. 여론조사 결과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도 막판에 ‘지역주의’라는 ‘위험인자’에 발목이 잡혀 낙선을 하는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위험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 위험을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 그게 얼마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위험인자인지 그걸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맞부딪친다. 그래서 노무현은 배짱이 있는 사람이다. 실상 정계에 입문한 지 15년 째지만 보궐선거 당선을 포함해 노무현의 국회의원 경력은 5년 8개월 정도다. 그만큼 많이 떨어졌다. 낙선의 쓰라림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안다. (주석 18)
노무현은 낙선이 확실시 된 개표 결과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 아픔 잊는 데는 시간이 약이겠지요. 또 털고 일어나야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주석 19)라는 글을 띄웠다. 그리고 날이 밝자 낙선 인사를 다니며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노무현은 부산을 그래도 사랑합니다.”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이것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 참 농부는 자기 밭에 잡초가 무성하고 알곡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여 밭을 탓하지 않는다. 노무현은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껴안은 따뜻한 심성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판사직, 조세전문 변호사, 3당합당 거부에 이어 종로선거구 버리기는 네 번째의 ‘버리기’ 순위가 되었다. 그에게 ‘버리기’는 고난의 길이 되었다.
정치현실에서 노무현은 늘 쫓기는 입장이었다. 그의 결정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항상 들었지만 92년 총선에서도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96년과 2000년 총선에서도 계속 떨어졌다. 정치 전략적으로 모두 이길 수 있는, 이겨 볼 수도 있는 싸움이었지만 매번 지역주의의 미친 바람은 노무현의 낙선을 요구했다. 이 대목에서 노무현의 과감하고 두둑한 배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주석 20)
앞장에서도 인용했지만 세상사는 승자만이 성공한다면 재미가 없다. 또 역사의 진행이 이를 허용하지도 않는다. 승자가 성공자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일시적 승자가 영원한 성공자가 아닌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무제는 사마천의 불알을 깠지만 사마천의 <사기>에서 필주(筆誅)를 받아 만고의 폭군이 되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으나 예수는 성인이 되고 네로는 신도들로부터 영원한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사례를 일일이 기록하기란 어렵고, 우리 현대사에서도 수없이 보아왔다.
맹자는 하늘이 인물을 키우면서 우선 늑골을 괴롭힌다고 했다. 노무현에게 닥친 늑골의 괴롭힘은 가혹했다. ‘두둑한 배짱’이 없었다면 오래 전에 이미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리 승패는 병가상사라고 해도 6전 4패의 전과에서 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했다. 김구 선생은 민족의 해방과 통합을 위해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까지 뜻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 현대사의 존경받는 위인은 왜 패배자뿐인가? 우리 역사는 정의가 패배한 패배해 온 역사란 말인가? 정의가 패배한 역사를 반복하면서, 아이들에게 옳은 길을 가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나는 남북전쟁 종식을 눈앞에 두고 했던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 연설문을 읽으면서 ‘정의를 내세워 승리한 사람’을 발견했다.
링컨은 선거에서 숱하게 떨어졌다. 대통령 재임중에는 누구보다도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노예제 폐지론자와 노예소유자들이 모두 그를 공격했다. 인기도 없었다. 그러나 링컨은 내전에서 패한 남부를 적으로 몰아세우지 않았다. 남과 북을 선과 악으로 가르지도 않았다. 승리니 패배니 하는 말도 쓰지 않았다. 정의와 평화, 연방의 통합을 위해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자고, 모든 이를 사랑하자고 호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노예제 폐지와 연방의 통합, 둘 모두를 이루었다. 링컨의 연설문을 읽으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위안을 얻었다. (주석 21)
노무현이 재기의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한 링컨의 "제2차 취임 연설"의 말미는 다음과 같다.
아무에게도 악의를 갖지 말고, 누구에게나 자비로 대하고, 신께서 우리에게 옮음을 보도록 하시듯이, 정의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작업을 끝마치도록 합시다. 국민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전투를 치러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미망인과 고아들을 돌보며 우리들 사이에서, 그리고 모든 국민들과 더불어 공정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성취하고 간직하기 위한 모든 일을 말입니다. (주석 22)
그런데 이적이 일어났다. 이적이라기보다는 이변이라 해야 할 것이다. 16대 총선에서 부산에서 ‘장렬’하게 떨어진 노무현을 지켜 본 민중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시대의 소리 또는 시대의 양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살얼음 동토(冬土)에서 새싹이 틔었다.
그는 한국정치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다. 그만큼 낙선을 거듭하고도 유명세와 지지도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치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지는 싸움에 나가서 진 때문이 아니라 이길 수도 있었고 이길 자격이 충분한데도 그 몹쓸 ‘위험인자’를 피하지 않고 맞서다가 패배한 배짱있는 사내에게 낙선은 오히려 훈장이었던 셈이다. (주석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