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은 불교에서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의 중턱인 사왕천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그러므로 사천왕이 사는 사천왕사는 수미산의 기슭이며 사천왕사가 있는 낭산은 수미산인 것이다.
신라인들이 호국의 의지로 사천왕사를 세우면서 신라에는 사천왕신앙이 들어왔으며 이후에 사천왕 조각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사천왕사에서 소조 사천왕상을 제작한 조각가는 바로 양지(良志)라는 스님이었다.
양지스님의 소조 사천왕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에서 상반신이 깨어진 채로 남아있다. 이 소조 사천왕상은 삼국통일 후 사천왕사 목탑의 기단부를 장식했던 것인데 그 힘차고 정교한 솜씨는 통일신라가 힘찬 새 출발을 시작하면서 만든 회심의 명작이다. 양지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중 양지는 조상과 고향이 자세치 않으나 다만 선덕여왕 시대에 그 행적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가 지팡이 머리에 베 자루 한 개를 달아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간다. 지팡이가 흔들려 소리가 나면 그 집에서 이것을 알고 재 올릴 비용을 집어넣는다. 자루가 다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 이 때문에 그가 사는 절 이름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으니 그의 신통하고 이상한 행적이 모두 이와 같다.
그는 여러 가지 재주에 두루 능통하여 비할 바 없이 신묘하며 글씨도 잘 썼다. 영묘사(靈妙寺)의 장륙삼존, 천왕상 및 전각탑의 기와와 천왕사탑 아랫도리의 8부 신장, 법림사(法林寺)의 주존 삼불, 좌우의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빚어 만든 것이다.
영묘, 법림 두 절의 이름 현판도 그가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한 개를 만들고 이와 함께 부처 3,000개를 만들어 그 탑에 모시어 절 가운데 두고 예를 드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빚어 만들 때에 스스로 선정(禪定)에 들어가 잡념 없는 상태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성중 남녀들이 다투어가면서 진흙을 날랐다.
<삼국유사 양지석장(良志錫杖條)조>
그는 소조(塑彫)의 명수였다. 작은 금동제이지만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는 감은사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기외함의 사천왕상도 그가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사천왕사, 영묘사, 안압지에서 나온 힘차고 화려한 기와(瓦塼)들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진흙의 요술쟁이였던 것이다. 강우방은 우리의 위대한 조각가 양지의 이름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개탄하고 있다.
「여러분은 작품도 거의 남이 있지 않은 김생(金生)이나 솔거(率居)는 알면서, 훌륭한 작품을 남긴 이 위대한 예술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그 천재가 어디서 왔으며 언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사나이입니다.
어느 교과서에도 그의 이름이 없으니 여러분은 알 턱이 없지요. 아들이나 친구에게 물어도 귀에 설어 오히려 물끄러미 쳐다봅니다.우리는 이제 위대한 양지라는 예술가를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이름처럼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 양지(良志)를 왜 모르십니까.」
사천왕사에 살았던 또 한분의 스님은 월명(月明)스님이었다. 월명스님은 경덕왕의 명을 받들어 도솔가(도率歌)를 지었으며, 또한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하여 제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갑자기 광풍이 불어 종이돈이 날려 올라가 서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 향가가 바로 '제망매가'이다.
월명은 언제나 사천왕사에 살면서 젓대를 잘 불었다. 한번은 달밤에 젓대를 불면서 대문 앞 행길로 지나가니 달이 이 때문에 운행을 멈추었다. 이로 인하여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하였으며, 스님도 이 때문에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