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우((劉邦)와 유방(劉邦)의 시대적 배경
항우(劉邦)와 유방(劉邦)은 정치적 이념도 달랐다.
항우는 고작 진시황의 제도를 모두 무너 뜨리기는 했는데 정작 대안이 없었으며, 광활한 중국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역부족인 인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무 무직하고 권모 술수가 없어 또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무 순진하지요.)
그러나 유방(劉邦)은 교묘히 사람들을 이용하여 정치를 잘 해냅니다.
말년에 흉노족과 부인[呂后] 때문에 고생하지만 유방 이후의 임금이 그나마 훌륭히 왕조를 지탱해서 전한(前漢). 후한(後漢) 약400년 동안 번성 합니다.
중국인을 가리키는 한족(漢族)
문자(文字)를 가리키는 한자(漢字)
한문화에 쓰여진 한이라는 글자는 모두 한(韓)나라의 한(韓)입니다.
진(晉)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라면 한나라는 통일된 한문화를 유지 발전 계승시킨 최초의 왕조로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왕조 입니다.
항우와 유방에 대한 관심있는 소설을 읽어려면 최근 일본 작가 "시바료타로"가 쓴 <항우와 유방>이란 소설 입니다.
항우와 유방의 시대적 배경은 BC 220년경(기원전) 진(晉)나라. 한(漢)나라. 제(齊)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의 7개 나라가 싸우던 전국시대를 진시황이 통일하게 되죠. 진시황은 당시 중국인들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법치주의를 표방합니다.
당시 전국시대의 나라라는 것은...국가라기 보다는 부족 국가였죠.
각 고을을 관리가 아닌 촌장이 다스리는 그런거였다. 한 고을이 마치 커다란 대 다족처럼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통일한 후 중국 전대륙의 구석 구석 까지 관리를 파견한다.
본격적인 국가가 성립된 것이다. 그럼으로 진시황 이전 까지는 법이라는것 보다는 관습으로 살아가던 시대였고 이에 진시황이 법이라는 제도를 만들고 아주 가혹한 정치를 하게 된다. 진시황은 나쁜면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중국에서 최초로 법치국가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인물로 평가 된다.
진시황이 곧 법이 된것이다. 때문에 진시황이 죽자 그 국가도 흔들리게 되었고 진시황의 뒤를 이은 2세 황제 호해(胡亥)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둘러싸여 진시황의 나쁜점 만을 이어 받고 더욱 악독한 정치를 하게 된다. 따라서 수많은 백성들이 굶다못해 고향을 버리고 유민이 된다.
中國 최초의 통일국가 진(晉)에 반기를 드는 것은 그러한 유민들이였다.
진승(陳勝,?~BC 208)과 오광(吳廣,?~BC 208)의 유민들을 기점으로 항량(項梁,?~BC 208). 항우(劉邦,BC 256~BC 195)가 우두머리인 초나라 유민 그리고 유방 패거리가 있었다. 진나라는 못난 2세 황제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악인중 한사람으로 평가 받는 고조로 인해서 멸망하게 된다.
이때 항우와 유방의 싸움이 시작된다. 항우는 자기 친촉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범증(范增, BC 278 ~ BC 204 / 향년 74세) 까지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방은 그 반대였다.오히려 자기 가족들을 등한시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때문에 능력있는 사람이 많이 모요 들었다. 한신. 장량. 소하. 진평 등등....
그리고 항우는 적들이게 지나치게 가혹했다.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을 한꺼번에 땅에 매장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다.
이 또한 유방은 항우와 정 반대이다. 이러한 두사람의 확연한 차이점 때문에 초반에 항우가 그렇게도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천하는 유방이 찾이하게 된다.
※장량(張良),
기원전 250년 ∼ 기원전 186년, 유방의 장자방으로 중국 고대의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책사(모사)로 본명이 장량이다.
한(韓)의 귀족 출신으로, 유방의 참모로 활약하며 그의 천하통일에 크게 공헌했다. 이 공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유방(劉邦)이나 소하, 한신[한왕]이 아님) 같은 다른 인물들이 별볼일 없는 평민 출신인 것에 비해, 장량은 한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들과는 출신 성분 자체가 많이 달랐다.
그것도 그냥 귀족 가문도 아니라, 한나라 최고 명문 귀족이었다. 장량의 조부 장개지(張開地)는 신불해(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아 한나라의 짦은 전성기를 만들었던 한소후(韓昭侯)를 비롯하여 선혜왕(宣惠王), 양왕(襄王) 등 세 명의 왕 밑에서 상국(相國)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張平)은 희왕(釐王), 환혜왕 두 명의 왕 아래서 상국을 지냈다. 사기색은에서는 장량이 한나라의 공족으로 희성이나 진나라에 쫓겨 성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한신이 강소성 회음 출신이고 소하 역시 강소성 패현 출신인 데 비하여, 장량은 출신이 사기에 명확하게 언급이 되진 않는다.
추측해보자면 장량의 조상들은 바로 아버지 시기까지 한나라의 상국을 지내던 인물인만큼 전국시대 한나라의 수도였던 신정(新鄭)에 살았을 테고, 장량도 여기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BC 230년, 압도적인 기세를 타고 있던 진나라의 군사력에, 장량의 조국은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장량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고관대작이었으니 장량도 시간이 지났으면 그렇게 되었겠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장량은 벼슬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 당시 장량의 집에서 일하는 가노(家奴)만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