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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 이성윤(李誠胤)
1570년(선조 3) - 1620년(광해군 12)
조선시대 호종공신 2등에 책록된 공신으로,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실(君實), 호는 매창(梅窓)·호기(互棄). 성종의 4대손이며,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황양정(荒壤正) 이수린(李壽麟)이고, 아버지는 도정(都正) 이간(李侃)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로 김인사(金獜士)의 딸이다.
15세 때 금산수(錦山守)에 예수(例授)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이 되어 세자 광해군을 따라 피란하여 신주(神主)를 봉안하였다. 선조가 죽자 혼전(魂殿)을 지켜 그 공으로 도정으로 승진하였고, 또 광해군의 분조에 호종한 공으로 호종공신 2등에 올랐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희생되고 이어 폐모론이 거세게 일자 분함을 참지 못하고, 종반(宗班) 18인을 거느리고 소두(疏頭)로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 등의 간배(奸輩)들을 물리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남해에 안치(安置)되고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였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고, 금산군으로 추봉하였다. 시문에 재주가 있고,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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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유고 제5권 하 / 비명(碑銘)
금산군의 묘갈명 병서(錦山君墓碣銘 幷序)
병오년(1666, 현종 7)에 광양(光陽)에 유배되었을 때 지었다.
공의 휘(諱)는 성윤(誠胤)이요, 자(字)는 군실(君實)이니, 익양군(翼陽君)의 증손(曾孫)이다.
익양의 휘는 회(懷)로,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成宗)의 아홉째 아들이다. 익양의 아들은 황양정(荒壤正) 휘 수린(壽麟)이고, 황양의 아들은 청원도정(靑原都正) 휘 간(侃)이다. 청원은 광주 김씨(光州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녀는 군수(郡守) 인사(麟士)의 딸로, 2남을 낳았다.
장남은 효윤(孝胤)으로 광산수(光山守)이다. 공은 그의 아우이니, 융경(隆慶) 4년 경오년(1570, 선조3) 1월 22일에 태어났다. 종실(宗室)은 관례(冠禮)를 행한 뒤에 모두 직질(職秩)을 수여한다. 그래서 15세에 처음으로 금산수(錦山守)에 제수(除授)되었다.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 25년 임진년(1592)은 바로 만력(萬曆) 20년으로, 공의 나이 23세 되던 해였다. 그해 여름 4월에 왜구(倭寇)가 경사(京師)에 육박하자 주상(主上)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니 온 나라가 도망가서 숨기에 바빴다.
이때 청원(靑原)이 조금 풍질(風疾)이 있었는데,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종사(宗社)에 난(難)이 있어서 주군(主君)이 파천하였으니, 내가 종신(宗臣)의 신분으로서 뒤처지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병이 있어서 힘을 낼 수가 없으니, 너희들이 따라가도록 하라.”하니, 두 공이 명을 받고 물러 나와 상의하기를, “어버이가 편찮으시니 형제가 모두 길을 떠날 수는 없다.”하였다.
이에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부형(父兄)에게 하직하고 필마(匹馬)로 혼자 길을 떠나 어가(御駕)를 따라서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렀다. 그때 예관(禮官)이 독자적으로 상에게 아뢰어,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목청전(穆淸殿)의 전정(殿庭)에 매안(埋安)하였는데, 종신(從臣)들 중에서 아무도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것이 5월 임술일의 일이었다.
그다음 날 공이 길에서 이 소식을 듣고는 타고 가던 말을 멈추고 통곡하다가,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호종(扈從)하는 여러 종신(宗臣)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말하기를, “나라와 종사(宗社)는 존망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종사의 신주를 묻어 놓고 홀로 나라만 옮겨 갈 수 있겠는가.
나는 장차 어가를 막고서 강력히 요청할 것이요,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나 종사의 신주가 묻힌 곳을 지키면서 죽어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제공(諸公) 중에 나와 함께할 자가 있는가?”하니, 한두 사람 이외에는 모두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대사(大事)는 소자(小子)가 감히 상관할 바가 아니다.”하였고, 서릉수(西陵守) 이섬(李銛)은 공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어린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감히 당돌하게 까부는가.”하였다.
이에 공이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기를, “일의 잘잘못을 논하는데 노소(老少)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공이 비록 나이가 많다고 해도 국체(國體)를 알지 못하는데, 그만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업신여긴단 말인가. 그리고 공은 나에게는 서류(庶流)에 해당하는데, 어떻게 감히 공개적으로 나를 모욕한단 말인가.”하니, 이섬이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패악(悖惡)한 말을 지껄이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어 공을 치려고 하는 등 대열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때 마침 대신(大臣)의 막차(幕次)가 가까이 있었던 관계로 서로 다투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상신(相臣) 최흥원(崔興源)이 눈짓으로 영산령(寧山令) 이예윤(李禮胤)을 불러 사과하며 말하기를, “금산(錦山)의 말이 옳다. 일이 창졸간에 일어나서 내가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의 신분으로 있으면서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상이 예관(禮官)의 요청을 재가(裁可)하였으니, 이는 대개 당시의 상황이 매우 급해서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응당 진달할 것이니, 공자(公子)는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라.”하였다.
영산이 그 말을 전하니, 공이 기뻐하며 마침내 그만두었다. 이날 평산(平山)에 이르러서, 상이 윤자신(尹自新)을 종묘서 제조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윤자신이 예조 참의(禮曹參議) 이정립(李廷立)과 황해 도사(黃海都事) 윤명선(尹明善)과 함께 개성(開城)으로 급히 되돌아가서 묘사(廟社)의 신주(神主) 및 금은(金銀)과 옥철(玉鐵) 등 제실(諸室)의 보배를 받들고 나와 행재(行在)를 따라서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6월 임인일에 대가(大駕)가 영변(寧邊)에 이르러서 세자(世子)와 분조(分朝)하였다. 이때 광해(光海)가 세자로서 묘사를 받들고 산골로 향했는데, 조정에서는 공이 묘사(廟社)에 충성을 다 바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에 제수하여 묘사를 따르게 하였다. 종반(宗班)이 선전관에 임명된 것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은수(恩數)였다.
운산(雲山)에 들어갔다가 희천(煕川)을 거쳐 옛 영원(寧遠)에 이르렀을 때, 윤자신이 또 묘사를 임시로 승사(僧舍)에 묻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불가하다고 강력히 다투었고, 최흥원이 공의 말이 옳다고 극력 보증하자 그제야 그 일을 그만두었다.
이해 10월에 공이 분조에 있다가 청원(靑原)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향하여 부친을 뵙겠다고 청하니, 세자가 안타깝게 여겨 병졸 2인으로 하여금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이때 적병(賊兵)이 가는 곳마다 그득해서 도로가 막히고 끊어졌으므로 매번 밤에 길을 떠나 몰래 적의 소굴을 뚫고 지나가곤 하였는데, 한번은 적을 만나 공의 종이 죽음을 당하고 병졸 2인도 흩어져 없어진 상황에서, 공이 말을 버리고 달아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밤중에 물속에서 빠져나왔다.
옷이 온통 얼어붙은 상태로 엉금엉금 기어서 바위 사이에 기대고 있으려니 조금 있다가 말이 혼자 주인을 찾아왔고, 동이 틀 녘에 병졸 두 사람도 공이 필시 죽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추적해 오다가 공을 만나서 회합(會合)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 길을 떠나 금성(金城) 산골에 이르러서야 집에서 쉴 곳을 얻었다.
이때 청원(靑原)은 죽은 지 이미 시일이 지나서 산간(山間)에 가매장을 한 상태였고, 가인(家人)은 왜구에 쫓긴 나머지 길을 떠나고 종 한 명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임시 묘소에 배곡(拜哭)하고는 다시 길을 떠나 모부인(母夫人)과 형을 찾았는데, 한참 뒤에야 서로 만났다. 그리고 적이 물러간 뒤에 상구(喪柩)를 모시고 다시 돌아왔다.
만력(萬曆) 33년(1605, 선조 38)에 조정에서 호종(扈從)한 공을 녹훈(錄勳)할 적에 그 명호(名號)를 호성 공신(扈聖功臣)이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호종했던 사람들 모두가 녹훈되었다. 그러나 유독 공만은 묘사를 받들고 분조를 따라갔기 때문에 녹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소경(昭敬 선조(宣祖)이 승하하자, 공이 영모전(永慕殿)에 뽑혀 들어가서 3년의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차서를 뛰어넘어 도정(都正)을 제수받고 명선(明善)의 자계(資階)에 올랐다. 광해(光海) 4년(1612)에 또 분조의 종신(從臣)을 녹훈하여 위성(衛聖)이라고 하였는데, 공이 그 2등(等)에 참여하여 금산군(錦山君)에 봉해지고 승헌(承憲)의 자계에 올랐으며, 얼마 뒤에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를 겸하였다.
광해가 즉위한 뒤로 정사가 혼란해져서 날마다 모후(母后)를 폐하려고 하는 한편, 자기의 아우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후부(后父)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였으며 모후(母后)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였다. 폐신(嬖臣) 이이첨(李爾瞻)이 좌우에서 악행을 부추기며 밤낮으로 서궁을 해치려고 모의하는가 하면, 또 백관(百官)을 강제로 동원하여 궐정(闕庭)에서 서궁의 명위(名位)를 없애고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합동으로 청하면서 이것을 정청(庭請)이라고 일컬었는데, 다른 의논을 내는 자는 화복(禍福)으로 겁을 주었기 때문에, 조정의 백관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었으나 공은 홀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간사하고 교묘하게 아첨을 떨어 광해주(光海主)의 총애를 얻고 나서는 그 기세가 날로 치성하였다. 그리고 오래도록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직책을 맡고 아울러 문형(文衡)을 주관하여, 과거(科擧)와 좋은 관작(官爵)을 가지고 널리 패거리를 모으니, 흉악한 무리가 그 문에 모여들어 새알을 날개로 덮어 비호하듯 하면서 조정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차 대옥(大獄)을 일으켜 현량(賢良)한 인사들을 처형하거나 귀양 보내는 등 거의 모두 제거하여, 위복(威福)의 권한이 이이첨에게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숨을 죽였다. 공이 모후가 명위를 잃은 것에 분개하고, 이이첨이 나라를 망하게 할까 두려워하여, 종실(宗室)인 귀천군(龜川君) 이수(李睟) 등 18인을 이끌고 상소하기를, “이이첨이 간회(奸回)하고 사독(邪毒)하여 그 패거리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태아(太阿)를 거꾸로 쥐는 형국이 되어서 나라의 운명이 장차 기울어지려 하니, 왕망(王莽)의 화(禍)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자, 광해주가 노하여 비답(批答)하기를, “누구의 사주를 받고서 나와 안위(安危)를 함께하는 중신(重臣)을 무함하는가.”하니, 삼사(三司)가 메아리처럼 발동하여 공과 이수를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고 나머지는 모두 삭직(削職)하도록 청하였다.
광해주가 상소는 전적으로 공에게서 나온 것으로, 그 글이며 글씨가 모두 공의 손으로 이루어졌고 이수는 거기에 끼어 소두(疏頭)가 된 것뿐이라고 하여, 이수는 중도(中道)에 부처(付處)하고 유독 공만을 남해현(南海縣)에 안치하고 위리(圍籬)를 가하게 하였다.
공의 유배지가 이미 절도인 데다가 이이첨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상황에서, 이이첨이 현령(縣令)을 대하는 것이 거의 모두 천한 노예처럼 오만하게 부려먹었고, 현령이 이이첨을 대하는 것이 거의 모두 효성스러운 자식처럼 미리 알아서 뜻을 받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이 잘못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공이 유배지에 있었던 4년 동안 끝내 뜻밖의 환란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이겨서 선인(善人)을 보우(保佑)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공이 나라를 위해 걱정하고 분개하다가 병을 얻어 죽고 말았으니, 이것이 실로 만력(萬曆) 48년 경신년(1620, 광해군12) 12월 15일의 일로, 공의 나이 51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광해주(光海主)가 그 관작을 복구하도록 명하고, 연도(沿道)의 관아에서 상구(喪柩)를 호송하여 공신의 예에 따라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 3월 모(某) 갑자(甲子)에 경기(京畿) 교하현(交河縣) 장명산(長命山) 아래 경좌(庚坐) 갑향(甲向)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해의 3월에 헌문대왕(憲文大王 인조(仁祖))이 반정하고는, 예조 좌랑(禮曹佐郞) 신민일(申敏一)을 파견하여 제사를 올리게 하고, 승헌(承憲)의 직질을 주었으며, 그의 아들 이정방(李庭芳)에게 관직을 주어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으로 삼았다.
반정하던 날에 혼조(昏朝 광해조) 때의 여러 녹훈들을 모조리 혁파하였는데, 공도 위성(衛聖)의 녹권(錄券) 안에 들어 있었으므로 함께 무효 처리되었다. 이에 영의정(領議政)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과거 도성을 떠날 적에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보호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종위(從衛)한 사람들은, 그 공이 실로 묘사에 있고 혼조(昏朝)와는 관계가 없으니 모두 혁파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니, 상이 그 사람이 누구냐고 하문하였다.
이공이 공과 영산군(寧山君), 낭성군(琅城君),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 강선(姜璿),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 조공근(趙公瑾) 등 5인이라고 대답하니, 상이 그들의 훈작(勳爵)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유사(有司)가 그 명호(名號)를 어려워하니,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붙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연신(筵臣) 민성휘(閔聖徽)가 “금철(金鐵)의 녹권(錄券)이 일단 감정(戡定)을 거쳤는데, 다시 추후에 덧붙여서 뒷날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을 하여, 호성 공신에 붙이는 일은 행해지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 정사(靖社)의 녹훈(錄勳)을 행할 때에 다시 그들을 정사(靖社)에 붙이려고 하자, 어떤 이는 “공이 사직에 관계되는 것은 같으나 일은 서로 맞지 않으니 함께하면 안 된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별도로 공신의 명호를 세워서 이 다섯 사람만 녹훈하는 것이 온당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던 데다 그들을 위해 힘써 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폐지된 채 회복되지 않았다. 이에 상이 그들을 애석하게 여겨, 노비와 전결을 모두 환수하지 말고 영원히 주게 하는 한편 관직과 자계(資階)를 예전처럼 되돌려 주게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이 군(君)으로 책훈(策勳)되면서 자계가 승헌(承憲)으로 올랐으니 바로 정2계(階)였는데, 책훈이 혁파(革罷)되어 환수되면서 그냥 승헌을 다시 받는 형식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환수한 것을 정식으로 돌려받게 되면서 승헌이 실제로 본래의 자계가 되었는데, 여기에 또 잇따라 항소(抗疏)하여 절조를 세운 공이 인정되어 임금의 특교로 차서를 뛰어넘어 가덕(嘉德)을 받고서 종1계가 되었다.
공은 천자(天資)가 밝고 순수하였으며 내행(內行)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부모를 섬김에 그 효도를 제대로 극진히 하였고,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형님을 부친이 계신 것처럼 섬겼다. 국가의 제도에 의하면, 종실(宗室)은 4대(代)까지 과제(科第)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실의 자제로 태어나면, 오직 구마(狗馬)와 금기(琴棊) 등 잡기(雜技)만 일삼을 뿐이요, 붓을 잡고 문사(文辭)를 짓는 자는 있지 않았다. 그런데 공은 천성적으로 학문을 좋아하여 각종 서적을 두루 읽었으며, 책을 파는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고라도 그 책을 사곤 하였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병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지 않는 한 하루도 책을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시문(詩文)은 청절(淸切)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고, 그의 필법(筆法)은 종왕(鍾王)을 모의(摸擬)하였다. 공은 귀인(貴人)의 습관을 벗어 버리고 담박하기가 고상한 선비와 같았으며, 집에서 거처할 적에도 항상 공경하는 태도를 지니고 잉첩(媵妾)을 두지 않았으며, 술도 마시지 않고 애완물(愛玩物)도 좋아하지 않고 연락(宴樂)도 즐기지 않았다.
그리고 한 시대에 문학을 하며 이름이 맑은 인사들과 모두 벗으로 어울려 노닐었으며, 문밖에는 귀인의 수레가 즐비하였다. 평소에 활쏘기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따금 활을 쏘아 새를 잡기도 하였다. 언젠가 사람들이 활 쏘는 모임에 가서 상대하는 자들을 모조리 굴복시켰는데, 평소 활쏘기를 업으로 하면서 잘 쏜다고 이름이 난 자들도 모두 공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은 광해(光海)의 동모형(同母兄)으로 광혹(狂惑)하여 패악한 짓을 멋대로 하였는데, 기예(技藝)를 지닌 사람이 있으면 그의 문에 끌어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공이 활을 잘 쏜다는 말을 듣고 누차 사람을 보내 한번 보기를 청했으나, 공이 병을 핑계로 거부하고 끝내 나아가 사례하지 않았으며, 이와 함께 활과 화살을 부러뜨리고는 종신토록 다시는 활을 쏘지 않았다.
광해의 비(妃)의 오빠인 유희분(柳希奮)이라는 자는 또한 공의 부인(夫人)의 종형(從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이 모두 척리(戚里)의 인연으로 귀현(貴顯)의 자리에 올라 호화롭게 사치하며 서로 으스대었다. 유희분은 또 권세를 탐하고 재화(財貨)에 눈이 멀어 그 문간이 저잣거리와 같았으므로, 시인(詩人) 권필(權韠)이 시를 지어 조롱하였는데, 유희분이 그를 참소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공이 여러 유씨(柳氏)들의 소행을 추하게 여겨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번도 그의 문에 이르지 않다가, 급기야 권필을 죽임에 미쳐서는 마침내 알고 지내는 일도 완전히 끊어 버렸다. 공이 충분강개(忠憤慷慨)한 것은 천성적으로 품부받은 것이지만, 이는 또한 전훈(典訓)을 익히고 의리를 강구하여, 사람의 신자(臣子) 된 도리를 분명히 인식한 위에, 고금의 일을 두루 통하고 치란존망(治亂存亡)의 기미를 알고 있어서, 일을 만나면 감발(感發)하고, 의롭게 행해야 할 일을 보면 반드시 행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함정에 빠져 수화(水火)를 밟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고, 털끝만큼이라도 한 몸의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았으니, 학문을 좋아한 공(功)을 속일 수가 없다고 하겠다. 공은 유배지에서 〈남천가(南遷歌)〉를 지어 스스로 슬퍼하기도 하였으며, 평소에 매화를 사랑해서 매창(梅窓)이라고 자호(自號)하기도 하였다.
공의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덕신(德新)의 딸이요, 판서(判書) 잠(潛)의 손녀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였으며 부덕(婦德)을 고루 갖추었다. 일단 공에게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부자(夫子)의 뜻에 순종하였으며, 그곳의 형제 친족과 비속(卑屬)에 대해서도 모두 적절히 대하는 등 가도(家道)가 안정되었으므로 가정 안에서 트집 잡는 말이 없었다.
부인의 성품은 온유(溫愉)하고 인혜(仁惠)하였으며, 관유(寬裕)하고 침밀(沈密)하였다. 그리고 희로(喜怒)의 기색을 안색에 드러내지 않고, 일을 명민(明敏)하게 대처하여 군자를 보좌하기에 충분하였다. 공보다 36년 뒤인 병신년(1656, 효종 7) 8월 29일에 85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는데, 일월(日月)이 따라 주지 않은 관계로 선영(先塋) 안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그 이듬해 2월 정유일에 마침내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바로 정방(庭芳)이다. 공의 음덕(蔭德)으로 누차 벼슬하여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에 이르렀다. 사의(司議)는 감찰(監察) 송정조(宋廷祚)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다. 아들 민정(敏政)은 생원(生員) 출신으로 지금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있고, 민사(敏思)는 진사(進士)이고, 다음은 민상(敏相)이다.
장녀는 판관(判官) 정시걸(丁時傑)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자진(金自珍)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헌(柳軒)에게 출가하였다. 민정은 5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태귀(泰龜), 징귀(徵龜), 삼귀(三龜)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민사는 3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정빈(鄭璸)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민상은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민사와 민상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정시걸은 3남을 두었으니, 정창도(鄭昌燾)는 정언(正言)이고 다음은 정휘도(鄭徽燾)와 정문도(鄭文燾)이다. 김자진은 3남 1녀를 두었고, 유헌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내외(內外)의 제손(諸孫)이 모두 30여 인이다. 아, 용방(龍逄)은 하(夏)나라 때에 직간을 하다가 죽었고, 비간(比干)은 은(殷)나라 때에 직간을 하다가 죽었다.
비간은 용방의 일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어째서 용방의 발자취를 다시 밟았던 것인가. 경방(京房)은 원제(元帝) 때에 숨기지 않고 할 말을 다하다가 죽었다. 매복(梅福)과 주운(朱雲)은 경방의 일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어째서 경방의 발자취를 다시 밟았던 것인가. 매복과 주운이 다행히 죽음을 면하긴 하였으나, 필시 죽게 될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경방과 똑같았다. 충신(忠臣)이 나라 있는 것만 알고 자기 몸 있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이 바로 이와 같았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은감(殷鑑)이 멀지 않으니, 하후(夏后)의 세대에 있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라고 하였고, 또 이르 를 “지금 은(殷)나라가 천명(天命)을 떨어뜨렸으니, 내가 이것을 크게 거울로 삼지 않으면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은나라가 하나라를 보고 주나라가 은나라를 보는 것이 마치 어제의 일과 같은데도, 은나라 사람은 하나라를 거울로 삼지 않고, 주나라 사람은 은나라를 거울로 삼지 않아서, 한갓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슬픈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자줏빛이 붉은빛을 어지럽히고 아첨하는 말이 나라를 뒤엎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인데, 하늘이 자줏빛을 내고 아첨하는 말을 내는 것은 또 어째서인가. 하늘이 같은 시대에 자줏빛과 붉은빛을 내고, 충신의 직간과 아첨하는 말을 같은 시대에 내어, 사정(邪正)이 한데 뒤섞여 사람들이 분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길이 천추만세(千秋萬世)토록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팔을 걷어 올리고 장탄식을 하게 하는 것은 도대체 또 어째서인가.
공이 유배되어 죽은 일에 대해서 내가 깊이 느끼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직접 하늘에 하소연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길이 없다. 내가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던 임인년(1662, 현종3) 연간에 공의 손자인 이민정(李敏政)이 공의 가승(家乘)을 보내 나에게 공의 비명(碑銘)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나이 76세로 절막(絶漠)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된 지 이미 3년이 되어 정신과 육신이 모두 탈진된 때라서, 문장으로 환히 드러내어 밝힐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손으로 붓과 종이를 잡을 수도 없었으므로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을사년(1665, 현종6) 여름에 내가 은혜를 받고 광양(光陽)에 이배(移配)되었을 적에, 이민정이 태인(泰仁)의 수재(守宰)로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 요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마지못해서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의 선인(先人)의 폐려(弊廬)가 경성(京城)의 연화방(蓮華坊)에 있었는데, 공이 마침 이웃에 거하였으므로, 내가 비록 출입하는 일이 드물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약관 때부터 공을 많이 뵈었다. 게다가 공의 후사인 사의공(司議公 이정방(李庭芳)과 나이가 비슷해서 마치 형제처럼 정답게 지내었다.
그래서 지금 이 글로 말하더라도, 공의 세계(世系)는 물론 공의 가승을 따랐지만, 공의 행적은 대개 일찍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하지만 감히 공이 나의 존장(尊丈)이고 공의 아들이 나의 친한 벗이라고 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할 목적으로 한 글자라도 더 미화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 지난 병진년(1616, 광해군8) 세모(歲暮)에 내가 소(疏)를 올려 이이첨을 배척하자, 정원(政院)과 삼사(三司)와 관학(館學)이 떼거리로 일어나서 나를 공격한 나머지 경원(慶源)에 유배하는 것으로 결판이 났다.
그런데 공이 진소(陳疏)하여 대평(臺評)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내가 바로 찾아가서 위문하기를, “지난번에 제가 소(疏)를 올린 뒤에 공께서 내가 위기에 처했다고 놀라면서 매우 탄식을 하고 경계하셨는데, 공께서 어찌하여 또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까.”하니, 공이 답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저 열여덟 분의 종반(宗班)이 하신 것이오.”하였다.
공이 남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돌리고 감히 자신이 충직(忠直)하다는 명성을 차지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공이 또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기상이 종용(從容)하여, 내일 새벽에 멀리 귀양 갈 사람 같지 않은 것은 어떻게 된 것이오.”하면서 담소하고 얼마 있다가 헤어졌다.
이날이 바로 사별하는 날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묘갈(墓碣)을 짓노라니 유달리 목이 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의 조상님은 대궐의 임금님 / 公源璿極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했나니 / 賦性直諒
선을 행함은 옛날의 동평이요 / 爲善古之東平
악을 미워함은 오늘날의 유향이라 / 疾惡今之劉向
임진년에 호종(扈從)할 적에는 / 壬辰之扈
사기가 엄하고 의기가 장했으며 / 辭嚴義壯
정사년에 소를 올릴 적에는 / 丁巳之疏
기상이 정대하고 의리가 창달했었지 / 氣正理暢
육신은 남해 속에 돌아가셨어도 / 身沒南海之中
말씀은 창룡 위에 빛나시는 분 / 言炳蒼龍之上
유성의 도리가 / 維城之道
공의 말씀을 힘입어 밝아졌고 / 賴公言而明
유성의 공효(功效)가 / 維城之效
공의 육신을 따라서 없어졌나니 / 隨公身而喪
당시에 그저 우물쭈물할 뿐이었던 / 媕娿當日
육경이며 재상들은 누구누구였더라 / 幾箇卿相
<끝>
[註解]
[주01] 영모전(永慕殿) : 경운궁(慶運宮) 안에 있던 선조(宣祖)의 혼전(魂殿)을 말한다.
[주02] 태아(太阿)를 …… 되어서 : 임금이 대권(大權)을 신하에게 뺏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태아는 고대 명검의 이름이다. 《한서(漢
書)》 권67 〈매복전(梅福傳)〉에, 진(秦)나라가 “태아를 거꾸로 쥐고서, 초나라에 칼자루를 넘겨주었다.〔倒持太阿 授楚其柄〕”라
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03] 왕망(王莽) :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황후 왕정군(王政君)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아들로, 처음에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재형
(宰衡)이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하였으나, 마침내는 평제(平帝)를 시해하고 유자(孺子) 영(嬰)을 세워 섭정을 하면서 가황제(假皇
帝)라고 칭하다가, 뒤이어 찬탈을 하고는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는데, 재위(在位) 15년 만에 광무제(光武帝)의 정벌을 받고 죽음
을 당하였다.
[주04] 하늘의 …… 이겨서 : 《사기(史記)》 권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의 뜻
이 정해지면 역시 사람을 능히 이기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라는 말이 나오는데, 소식(蘇軾)이 이를 인용하여 “인
중자승천 천정역승인(人衆者勝天 天定亦勝人)”이라는 시구로 표현하면서 더욱 유명한 격언이 되었다. 《蘇東坡詩集 卷45 用前
韻 再和孫志擧》
[주05] 금철(金鐵)의 녹권(錄券) : 공신의 녹권인 철권(鐵券)을 말한다. 철권은 옛날에 임금이 공신에게 내려 면죄 등의 특권을 누리게 한
증명서를 말하는데, 철제(鐵製)의 계권(契券)에 단사(丹砂)로 썼으므로 단사 철권(丹砂鐵券)이라고 부른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개국 공신들을 책봉하면서 “황하가 변하여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바뀌어 숫돌처럼 될 때까지, 그
대들의 나라가 영원히 존속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할 것을 맹세한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家永寧 爰及苗裔]”라고 말한 철
권의 고사가 유명하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주06] 정사(靖社) :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공신에게 내린 훈호(勳號)이다.
[주07] 종왕(鍾王) : 위(魏)나라 종요(鍾繇)와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주08] 권필(權韠)이 …… 하였다 : 임숙영(任叔英)이 책문(策文)에서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과(削科)된 사실을 권필이 알고는, 분함을 참지 못한 나머지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하고 비방하였는데, 결국에는 이 문
제로 연좌되어 해남(海南)으로 귀양 가던 도중에,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하며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의 나이로
죽었다.
[주09] 알고 …… 버렸다 : 송(宋)나라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鶴林玉露)》 권14에 “당자서(唐子西)가 뒤에 당화(黨禍)에 걸려 나
부(羅浮)로 귀양 가서 시를 짓기를 ‘문 앞의 백로들에게 말해 주노니, 지금부터는 서로 알고 지내는 일도 끊으시기를. 제공이 구당
을 제거할 뜻을 지녔으니, 순번 매겨 잡아가는 일 그대도 당할지 모르니까.[說與門前白鷺群 也須從此斷知聞 諸公有意除鉤黨 甲
乙推求恐到君]’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10] 용방(龍逄) : 관용방(關龍逄)으로, 직간을 하다가 걸왕(桀王)에게 살해된 하(夏)나라의 현인이다.
[주11] 비간(比干) : 은(殷)나라 왕실의 종친으로, 포학하고 음란한 주왕(紂王)에게 간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주12] 경방(京房) : 금문역학(今文易學)의 대가(大家)로, 경씨학(京氏學)의 창시자이다. 한 원제(漢元帝)의 조정에서 낭중(郎中)으로
근무하다가, 석현(石顯)의 질시를 받아 위군 태수(魏郡太守)로 쫓겨 간 뒤에, 다시 석현의 무고(誣告)로 인해 기시(棄市)되었다.
그가 원제와 대화한 내용은 고산이 1616년(광해군8)에 올린 〈병진년에 올리는 소〔丙辰疏〕〉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孤山遺稿
卷2》
[주13] 매복(梅福) : 자(字)는 자진(子眞)으로, 한(漢)나라 때 남창현 위(南昌縣尉)를 지냈으며, 성품이 정직하여 과감하게 발언하다가,
왕망(王莽)이 전횡(專橫)을 하자 처자를 버리고 은거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매선(梅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14] 주운(朱雲) : 한(漢)나라의 직신(直臣)이다. 성제(成帝) 때에 황제 앞에서 “상방참마검을 빌려 주시면 아첨하는 신하 한 사람의 목
을 베어 다른 사람을 경계시키겠다.〔願賜尙方斬馬劍 斷侫臣一人 以勵其與〕”라고 하면서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를 지목하
였는데,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어사에게 끌려갈 적에 “관용방(關龍逄)과 비간(比干)의 뒤를 따라 지하에서 노닐 수 있으면 족하다.
[得下從龍逄比干 遊於地下 足矣]”라고 외치며 전각의 난간을 끝까지 붙잡고 버티는 바람에 난간이 모두 부서졌다. 뒤에 성제가
그의 충심을 깨닫고는 부서진 난간을 그대로 보존하여 직신의 정표(旌表)로 삼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7 朱雲傳》
[주15] 서경(書經)에 …… 하였고 : 은감(殷鑑) 운운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거울로 삼아야 할 일은 바로 전대(前代)의 하(夏)나라 걸
왕(桀王)이 무도한 정치를 하다가 망한 데에 있다는 뜻으로, 후세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할 과거의 선례(先例)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탕(蕩)〉의 맨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마무리한 말이다. 《서경》의 말이라고 한 것은 고산의 착오이다.
[주16] 지금 …… 되겠느냐 : 《서경》 〈주고(酒誥)〉에 “사람은 물에 자신을 비춰 보지 말고 민심(民心)에 비춰 봐야 한다는 옛사람의 말이
있다. 지금 은(殷)나라가 천명(天命)을 떨어뜨렸으니, 내가 이것을 크게 거울로 삼아서 이때의 민심을 어루만지지 않아서야 되겠느
냐.〔古人有言 曰人無於水監 當於民監 今惟殷墜厥命 我其可不大監 撫于時〕”라는 말이 나온다.
[주17] 자줏빛이 …… 것 : 《논어》 〈양화(陽貨)〉에 “간색인 자색이 정색인 주색의 자리를 뺏는 것을 미워하며, 정(鄭)나라의 음란한 음악
이 바른 아악을 문란하게 하는 것을 미워하며, 아첨하는 말이 나라를 뒤엎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
利口之覆邦家者]”라고 말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18] 동평(東平) :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여덟째 아들인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을 가리킨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서를 좋아하
고 매우 지혜로웠다고 하는데, 어느 날 광무제가 집에 있을 때 어떤 일이 가장 즐겁냐고 묻자,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爲善最樂]”라고 대답한 고사가 유명하다. 《後漢書 卷42 東平憲王蒼列傳》
[주19] 악을 …… 유향(劉向)이라 : 금산군 이성윤(李誠胤)이 이이첨(李爾瞻) 등 외척(外戚)의 발호를 막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유향은 한 원제(漢元帝) 즉위 초에 외척인 허씨(許氏)와 사씨(史氏)가 방종하고 환관(宦官)인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이 권세를
농락하자, 소망지(蕭望之) 등과 합세하여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누설되는 바람에 하옥되었고, 얼마 뒤에 풀려나자 또 상서(上書)를
하여 그들의 원한을 산 나머지 10여 년 동안이나 폐고(廢錮)되었으며,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또 누차 글을 올려 통절하게 정사를
비판하며 외척인 왕씨(王氏)를 견제하려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주20] 창룡(蒼龍) : 28수(宿) 중 동방(東方) 7수(宿)의 총칭(總稱)이다.
[주21] 유성(維城) : 나라를 지키는 성곽이라는 뜻으로, 종실(宗室)의 역할을 비유하는 말이다. 《시경》 〈판(板)〉의 “종자는 나라의 성곽
이니, 성이 무너지게 하지 말아서, 임금 홀로 벌벌 떨게 하지 말지어다.〔宗子維城 無俾城壞 無獨斯畏〕”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22] 당시에 …… 누구누구였더라 : 한유(韓愈)의 시에 “조정의 높은 관원들은 일을 귀찮게 여기나니, 누가 감격이나 하랴 그저 우물쭈
물할 뿐.〔中朝大官老於事 詎肯感激徒媕娿〕”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5 石鼓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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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錦山君墓碣銘幷序 / 丙午謫光陽時
公諱誠胤。字君實。翼陽君之曾孫。翼陽諱懷。康靖大王第九子也。翼陽之子荒壤正諱壽麟。荒壤之子曰靑原都正諱侃。靑原娶光州金氏郡守麟士之女生二男。長曰孝胤。爲光山守。公其季也。以隆慶四年庚午正月二十二日生。宗室旣冠皆有命秩。故十五。初授錦山守。昭敬大王二十五年壬辰。卽萬曆二十年。公年二十三。夏四月。倭寇薄京師。主上西遷。擧國奔竄。靑原少有風疾。謂二子曰。宗社有難。主君播遷。我宗臣不可後。不幸有疾。不可以力。汝其行矣。二公受命退相議曰。親有癠。兄弟不可俱行。於是公涕泣辭父兄。匹馬獨行。從駕至開城府。于時禮官有獨啓上。埋安廟社主穆淸殿殿庭。而從臣莫有知者。是五月壬戌也。翌日。公在路聞知。駐馬痛哭。至晝停所。公語在從諸宗臣。且曰。國之於宗社。存亡與俱。豈可埋宗社主而獨以國遷乎。我且遮駕固請。請不得則退守宗社瘞所。死不違之。諸公有與我俱者乎。一二人外咸有慍意曰。朝廷大事。非小子所敢知。西陵守銛叱公曰。稚幼何所知識。而敢肆搪突。公厲聲曰。論事得失。有係於老少乎。公雖老。懵於國體。而乃輕年少。且公於我爲庶流。何敢衆中辱我。銛慙忿出悖語。發所佩劍向公將擊者。班中亂。適會大臣幕次近。聞知爭競之言。相臣崔興源目招寧山令禮胤謝曰。錦山之言是也。事出倉卒。吾以宗廟提調亦莫及知。而上之可其請。蓋緣一時蒼黃。吾當陳達。公子且安。寧山以語。公喜遂止。是日至平山。上命以尹自新爲宗廟提調。與禮曹參議李廷立,黃海都事尹明善馳還開城。出奉廟社主曁金銀玉鐵諸室寶。追行在及平壤。六月壬寅。駕至寧邊。與世子分朝。時光海爲世子。奉廟社向山峽。朝廷以公能盡忠於廟社。特除宣傳官從廟社。宗班之拜宣傳。無前異數也。入雲山歷煕川至古寧遠。尹自新又欲權埋廟社主於僧舍。公復固爭不可。崔興源力保公言乃止。是歲十月。公在分朝。聞靑原疾劇。乞歸視父。世子愍之。使卒二人送之。時賊兵隨處充滿。道路梗絶。每宵行潛穿賊藪。嘗遇賊。公之奴被死。二卒分散。公棄馬步走投水。夜分抽身。衣盡凍。匍匐往依巖間。頃間馬自尋主至。向曉。兩卒意公必死。跡之得公會合。復行至金城峽裏。乃得家所止。靑原卒已踰時。殯掩山間。家人逼於寇已行矣。留一奴守之。公拜哭權塋訖。復去求母夫人及兄。久乃得會。賊退。乃以喪返。萬曆三十三年。朝廷錄扈從之功。號扈聖功臣。一時從行之人咸被錄焉。獨公以奉廟社從分朝。不在錄中。居四歲。昭敬陞遐。公選入永慕殿。守制卒三年。超授都正。陞階明善。光海四年。又錄分朝從臣曰衛聖。公參其二等。封爲錦山君。階躋承憲。俄兼司饔提調。光海立後政事昏亂。日欲廢母后。殺其弟永昌大君。戮后父金悌男。幽廢母后西宮。嬖臣李爾瞻左右逢惡。日夜謀所以傾西宮者。且又牽摟百官。在庭合請去其名位爲庶人。謂之庭請。怵異議者以禍福。朝紳畏威。無敢後者。公獨不造焉。爾瞻旣奸邪巧佞。得主寵。其勢日張。久判禮曹。兼典文衡。以科擧好爵聚廣其黨。兇孼集門。爲其所卵翼。布滿朝廷。屢起大獄。賢良之士誅死竄逐殆盡。威福由己。人皆屛跡脅息。公憤母后之失位。懼爾瞻之傾國。率宗室龜川君睟等十八人上疏。以爲爾瞻奸回邪毒。黨與已成。太阿倒持。邦命將傾。恐有王莽之禍。疏入。主怒批曰。聽誰指嗾。誣陷我共安危重臣。三司響發。請安置公及睟絶島。餘皆削職。主以疏專由公。其辭與寫皆公手。睟以齒序爲疏頭。付處睟中道。獨公安置南海縣加圍籬。公謫旣絶島。而爾瞻勢焰燻天。爾瞻之於縣令。率皆頤指氣使如庸奴。縣令之於爾瞻。率皆先意承顏如孝子。人皆爲公懼。然而公在謫四年。竟無意外之患。豈非天定勝人而保佑善人者也。然公爲國憂憤成疾而卒。實萬曆四十八年庚申十二月十五日。享年五十一。訃聞。主乃命復其官爵。沿道官護送喪柩。功臣禮葬。明年三月某甲子。返葬于京畿交河縣長命山下庚坐甲向原。越三年三月。憲文大王反正。遣禮曹佐郞申敏一致祭。贈秩承憲。官其子庭芳爲敦寧府參奉。反正日。悉罷昏朝時諸錄勳。公在衛聖券中。幷以見罷。領議政李公元翼於筵中啓。曩在去豳。保護廟社主。終始從衛人等。其功實在廟社。非干昏朝。不宜幷罷。上問其人爲誰。李公以公及寧山君,琅城君,宗廟直長姜璿,社稷參奉趙公瑾等五人對。上命復其勳。有司難其名。命附扈聖功臣。筵臣閔聖徽謂金鐵之券一經戡定。不宜復有追續以啓後路。不果附。久之値靖社錄勳時欲以附靖社。或以爲功于社稷則同。而事不相協。不可倂也。或以爲別立號。獨錄此五人爲便。然朝議不一。又無人爲之力者。竟罷不復。上惜之。奴婢田結幷不收。仍以永畀。還其官資如故。初。公策勳爲君。資陞承憲。卽正二階。勳罷還收。仍復贈承憲。至是還其所收則承憲實爲本資。而繼以抗疏致節。特敎超贈嘉德。爲從一階。公天資明粹。內行純備。事父母能盡其孝。親沒。事其兄如父在。國制宗室限四代不許赴科第通仕路。故宗室子弟生則惟狗馬琴棊雜藝是事。未有操筆爲文辭者。公性好學。讀遍群書。見鬻書者。脫衣市之。自幼至老。疾未至病。未嘗一日不觀書。其詩文淸切可傳。其筆法摸擬鍾,王。脫略貴習。淡若儒素。居處恭。無妾媵。不飮酒。不蓄玩物。不樂宴樂。一時文學淸名之士皆其朋游。門外多高軒。雅不喜射。猶時發得禽。嘗赴人會射。盡屈衆耦。雖素以業名能者。皆以不及。臨海君珒。光海母兄。狂惑縱悖。人有技藝者。無不拘致其門。聞公善射。亟使人請見。公辭以疾。終不造謝。仍絶弓矢。終身不復射。光海妃兄柳希奮者。亦公夫人之從兄。兄弟皆因戚里致貴顯。豪侈相尙。希奮又貪權黷貨。其門如市。詩人權韠作詩嘲之。希奮譖而殺之。公醜諸柳所爲。竟歲不一至其門。及殺韠。遂絶知聞。公忠憤慷慨。得於天性。亦有服典訓講義理。明爲人臣子之道。傍通古今。識治亂存亡之幾。遇事感發。見義必爲。雖觸機穽蹈水火不悔。不爲纖毫一身利害計。好學之功不可誣也。公之在謫。作南遷歌以自傷。素愛梅。自號梅窓。公夫人文化柳氏。敦寧府都正德新之女。判書潛之孫。幼有異質。婦德甚備。旣適于公。事舅姑以誠。事夫子以順。其處兄弟親族卑屬。咸得其宜。家道寧靜。庭無間言。其爲性溫愉仁惠。寬裕沈密。不以喜慍見乎色。而臨事明敏。有足輔佐君子。後公三十六年丙申八月二十九日終。壽八十五。以日月不從。卜權厝先塋內。明年二月丁酉。遂祔葬于公墓。有男一人。卽庭芳。以公蔭累官至掌隷院司議。司議娶監察宋廷祚女。生三男三女。男曰敏政。生員。時爲泰仁縣監。曰敏思。進士。曰敏相。女長適判官丁時傑。次適金自珍。次適柳軒。敏政生五男一女。男曰泰龜,徵龜,三龜。餘幼。敏思三女。長適鄭璸。餘幼。敏相一女幼。思與相早世。丁時傑有三男。曰昌燾。正言。曰徽燾,文燾。金自珍有三男一女。柳軒有一男一女。皆幼。內外諸孫三十餘人。嗚呼。龍逄以諫死於夏。比干以諫死於殷。比干非不知龍逄之事。而何以復蹈龍逄之跡。京房以盡言不諱死於元帝時。梅福,朱雲非不知京房之事。而何以復蹈京房之跡。梅福,朱雲幸免於死。而其自取必死之道則同於京房。忠臣之知有國而不知有身。有如是哉。書曰。殷鑑不遠。在夏后之世。又曰。今惟殷墜厥命。我其可不大監。殷之於夏。周之於殷。若隔晨。而殷人之不監於夏。周人之不監於殷。而徒使後人哀之者何也。紫之亂朱。利口之覆邦家。必然之理也。而天之所以生紫生利口者又何也。天之所以生朱紫於一時。生忠讜利口於一時。使邪正混而人莫能辨。長使千秋萬世忠臣義士扼腕而永歎者抑又何也。余於我公之竄死。所深感者非一端。直欲龥天而無從也。余謫三水。時壬寅年間。公之孫敏政送公之家乘。要余撰其碑銘。而其時余年七十六。絶漠拘囹已三歲。精魄衰脫。非徒文不足以著明。手不能操鉛槧。辭謝不敢當矣。乙巳夏。余蒙恩移配光陽時。敏政作宰泰仁。伻來求之非一。余不獲己承受。然余先人弊廬在於京城蓮華坊。公適宅於比隣。余雖簡出入。自弱冠拜公熟矣。且與公之胤司議公年相近。情親有如伯仲。今之此文。公之世系固因公之家乘。而公之行蹟。蓋多耳目曾所及者也。然不敢以公爲我之尊丈。公之子爲我之親朋。有所阿其所好而一字溢美也。嗚呼。往在丙辰歲暮。余疏斥爾瞻。政院三司館學群起攻余。決配慶源。而聞公陳疏被臺評。余卽往唁曰。頃者某之投疏後。公驚我蹈危機。深加嗟咄而戒之。公何復爲此事。公答曰。非我也。夫十八宗班也。其歸美於人。而不敢自占忠讜之名。不可不紀也。公又謂我曰。君氣象從容。何不如明曉遠謫之人。談笑少選而罷。誰知此日便是死別。今爲墓碣。分外哽塞。銘曰。
公源璿極。賦性直諒。爲善古之東平。疾惡今之劉向。壬辰之扈。辭嚴義壯。丁巳之疏。氣正理暢。身沒南海之中。言炳蒼龍之上。維城之道賴公言而明。維城之效隨公身而喪。媕娿當日。幾箇卿相。<끝>
ⓒ한국문집총간 | 1992
▲금산군 매창 이성윤선생 초상화(錦山君 梅窓 李誠胤先生 肖像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