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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耳谿集) 제25권 / 비(碑) - 홍양호(洪良浩) 著
오천 이 상국 종성 용만 기혜비 병서(梧川李相國 宗城 龍灣紀惠碑 幷序)
용만(龍灣: 평안북도 義州의 옛 지명 )은 두 나라 사이의 통로인데, 창을 메고 딱따기를 치는 자가 아침저녁으로 변란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고 역역(力役)을 견감하여 안무(按撫)해 주었다.
그러나 전지(田地)는 좁고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여 고을의 수입이 사신을 접대하고 군교(軍校)를 기르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는 정책을 시행하니, 장사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 싸게 빌리고 비싸게 굴려 처음에는 모두 편리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 채전(債錢)은 더욱 불어나고 백성은 늘지 않아 부채가 쌓여 70만 민전(緡錢)에 이르자, 가호(家戶)마다 부과하고 인구(人口)마다 나누어 징수하니 사람들은 흩어지고 장부만 남게 되었다. 이에 친족과 이웃에게서 징수하는 일이 생기니 변경 백성들이 마침내 크게 피폐해졌다.
영묘(英廟) 을축년(1745, 영조21)에 오천 이 상국이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소속 고을을 순행할 때 곧장 용만으로 들어가 장부를 관장하는 자를 불러 채권(債券)을 전부 거두어 오게 하였다. 공이 일찍이 어사가 되어 변경을 순시할 때 위명(威名)이 온 도내를 두렵게 하였으니, 휘하의 모든 지역이 다 떨면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이때에 권공(權公) 일형(一衡)이 부윤(府尹)으로 있으면서 급히 들어가 묻기를 “지금 채권을 찾으시는 것은 장차 상환을 독촉하려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공이 답하기를 “그렇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권공이 말하기를 “정말로 이와 같이 하신다면 죽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조금 너그럽게 처리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오.”라고 하고는 즉시 불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권공이 크게 놀라 급히 저지하니, 공이 웃으면서 응대하지 않고서 모두 태우라고 재촉하였다. 권공이 말하기를 “변경이 장차 피폐할 것입니다.
공께서는 어떻게 뒷일을 잘 수습하시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소. 무릇 피혁(皮革)은 우리나라에는 남아돌고 중국에서는 필요로 하는 물품이오. 만약 용만 사람들로 하여금 피혁을 가지고 책문(柵門)에 들어가 연경(燕京)의 재화(財貨)와 바꾸어 오게 한다면 백성들은 그 이익을 누리고 관(官)에서는 세금을 거두게 될 것이니 대출 이자와 비교해 볼 때, 이른바 ‘하루하루를 헤아려 보면 부족하지만 한 해 동안을 헤아려 보면 넉넉하다.’라는 것이오.
더군다나 우리가 연경에서 매입해 오는 것은 은(銀)뿐인데, 은은 보장(寶藏)이라 땅에서 산출됨에 한계가 있고 피혁은 천산(天產)이라 산에서 취함에 다함이 없으니, 이것으로 저것을 대신한다면 또 어찌 나라의 재정이 넉넉해지지 않겠소.
그러나 사신이 서쪽으로 갈 때 화물에 정해진 포대가 있고 말에 일정한 수가 있는데 만상(灣商)은 여기에 끼이지 못하오. 사신이 돌아올 때가 되면 무리 지어 맞이하는 용만의 말이 항상 수백 필이니, 이 말에 피혁을 싣고 가서 재화와 바꾸어 돌아오면 그 이익이 오로지 용만에 귀속되어 만상은 흥성하고 관아의 곳간은 채워질 것이오.
자잘한 이자나 도모하고 백성들이나 축내는 일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하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권공이 놀라면서 깨우치고서 말하기를 “훌륭하십니다! 어리석은 제가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관시(關市)는 중요한 문제라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서는 시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서둘러 이곳에 온 까닭은 수의 어사(繡衣御史)가 내 뒤에 오는 편에 장차 이 내용을 전달하여 상주(上奏)하려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어사 임공(任公) 박(璞)이 과연 용만에 들어오자 이공이 모두 말하고서 먼저 돌아가 상주하게 하고 이어서 또 조목별로 역말로 아뢰니 성상께서 그 의론을 훌륭하게 여겨 인가하였다.
이에 책시(柵市)가 흥하니 산우(山虞)와 수인(獸人)이 물품을 가득 싣고서 사방에서 이르러 용만과 요동(遼東)을 오가며 교역한 지 며칠 만에 열 배 내지 다섯 배의 이익을 얻으니, 하나같이 공이 계획한 대로였다. 그리하여 변경 주변 백 리에 울부짖던 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떠돌던 이들은 안집(安集)하여 흔연히 다시 살아난 것과 같았다.
얼마 뒤 권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방백(方伯)이 한 방면을 통어(統御)하면서 오직 용만이 유독 그 은덕을 톡톡히 받았는데 하물며 내가 용만 한 고을을 전임하여 다스림에 있어서랴.”라고 하고는 마침내 많은 재화를 내어 양하(楊下) 포구에 방죽을 만들어서 물을 막아 벼를 심었는데, 한 해에 수천 곡(斛)의 곡식을 수확하여 한 주(州)의 조세를 감당할 만하였다.
용만 사람들이 이로부터 세금을 내지 않는 전답의 양식을 먹게 되었다. 이듬해에 정공(鄭公) 하언(夏彥)이 이어서 부윤(府尹)이 되어 장차 양하의 곡식을 거두려 하면서 말하기를 “농사는 흉년과 풍년이 있고 세금은 늘거나 줆이 없으니 이것만 믿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창고를 세워 따로 저축하면서 자신의 남는 녹봉을 더하여 ‘찰미(察眉)’라고 이름 짓고서 싼값에 내어 팔고 비싼 값에 사들이며 백성들의 조세를 충당하고 군비에 보태며 여분을 보존하여 매매하여 홍수와 가뭄으로 궁핍할 때를 대비하였다. 정공이 아니었다면 권공의 은택이 마를 때가 있었을 것이다.
용만 사람들이 이미 세 공의 은혜를 입고서 그 공덕을 비석에 새길 것을 도모하였는데 마침 조정의 금령(禁令)이 있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계미년(1763, 영조39)에 내가 용만의 부윤이 되어 앞사람의 공적을 아름답게 드러내려 하였는데 앉은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파직되어 떠난 탓에 뜻을 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지금 부윤인 윤 시랑(尹侍郞) 사국(師國)이 용만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비석을 금지한 것은 명성을 탐하는 관리와 권세에 아첨하는 백성을 미워해서이다. 큰 우환을 제거하고 큰 이익을 일으킨 자의 경우 옛날에는 사전(祀典)에 실어두었으니, 어찌 그 공적을 덮어둔 채 현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여러 고을에서 방백을 칭송하는 것은 금령에 있지 않으니 이공의 비석을 세우고자 하는 청을 들어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사(進士) 홍치일(洪致一)과 향인(鄕人) 최지눌(崔之訥)과 안성철(安聖喆) 등이 사람들을 창도(唱導)하여 압록강 북쪽에서 큰 돌을 캐고서 내가 남의 훌륭한 점을 말하기 좋아하고 용만의 일에 익숙하다고 하여 천 리 먼 길을 사람을 급히 보내와 글을 요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기를 “이공의 행적은 실로 출중하여 그 사업은 뛰어나고 그 혜택은 장구하니 이는 후세에 전할 만하다.”라고 여겼다. 저 두 대부(大夫)의 공적의 경우 조정의 금령이 있으나 사라지게 할 수 없기에 마침내 연이어서 기술하니, 이는 용만 사람들의 뜻일 뿐만 아니라 장차 후세의 방백과 수령 될 자들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공의 휘(諱)는 종성(宗城)이니 월성(月城 경주) 사람이다.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어서 노래한다.
용만 변경 멀고 아득하니 / 灣塞遙遙
나라의 서쪽 국경이라 / 國之西門
백성들 재화에 곤궁하여 / 民困于貨
물에 빠진 듯 불에 타는 듯하였도다 / 如墊如焚
공이 그 장부 불태워 / 公火其籍
재물로 사람과 바꾸니 / 以財易人
우리 백성 재앙의 구덩이에서 건져 내고 / 脫我禍穽
우리 백성 이익의 근원 넓혀 주었도다 / 弘我利源
옛날에는 구렁텅이에 떨어져 있었는데 / 昔阽溝壑
지금은 전원에서 편하게 지내니 / 今安田園
들에는 뽕과 삼이 있고 / 野有桑麻
울짱에는 닭과 돼지가 있도다 / 柵有鷄豚
이에 배부르고 이에 노래하며 / 載飽載歌
자식을 먹이고 손자와 장난치니 / 哺子弄孫
어찌 공의 덕이라 하랴 / 豈曰公德
성스러운 임금의 어진 덕이로다 / 聖后之仁
생각건대 권공과 정공은 / 惟權與鄭
계책과 은덕이 있었으니 / 有猷有恩
경작함에 세금이 없고 / 耕兮無稅
굶주림에 창고 있도다 / 饑則有囷
공적은 돌에 기록하고 / 功載于石
은택은 백성들에게 흐르니 / 澤流于民
돌은 닳을 때가 있겠으나 / 石有時磷
백성들은 길이 보전되겠네 / 民則長存
신해년(1791, 정조 15) 정월 16일 성상께서 현륭원(顯隆園)에 행행(行幸)하셨을 때 신(臣) 양호(良浩)가 이조 판서로 어가(御駕)를 수행하였다. 17일 밤에 명하여 신 양호를 행전(行殿)으로 부르셨는데 성상께서는 바야흐로 육신사(六臣祠)에 내릴 제문을 친히 짓고 계시다가 초본(草本)을 내어 보여 주시면서 신에게 명하여 살펴보게 하셨다.
제문 중에 황명(皇明)의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의 일을 인용한 부분이 있었는데 신이 말하기를 “제태와 황자징이 비록 정난(靖難)할 때에 죽었으나 실로 나라를 그르치고 난리를 격발한 죄가 있으니, 일컫기에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어찌 육신(六臣)과 나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성상께서 “경의 말이 옳다.”라고 하시고는 몇 글자를 수정하고서 이어 하교하시기를 “일찍이 경이 지은 고상(故相) 이종성의 용만비(龍灣碑)를 보니 매우 아름다웠소. 당세의 홍장(鴻匠)이라 이를 만하오.”라고 하셨다. <끝>
[註解]
[주01] 오천 …… 기혜비 : 이 작품은 이계가,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이종성이 의주(義州)의 재정 손실을 타개하고 의주와 책문(柵門) 사이
의 무역을 성립시킨 공적을 기록한 비문이다. 용만은 의주의 다른 이름이다.
이종성(1692~1759)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시호는 효강(孝剛), 개시(改諡)는 문충(文忠)이
다. 부수찬, 이조 판서, 평안도 관찰사,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영남 어사(嶺南御史), 북도 안집 어사(北道按集御史), 관서
어사(關西御史) 등 여러 차례 어사로 지방에 파견된 경력이 있다. 저서에 《오천집》이 있다.
[주02] 이에 …… 여겼다 : 의주는 고을 크기에 비해 사행 접대와 교역 담당 등 과중한 업무를 지고 있었고 이에 따른 재정 부담도 극심하였
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정책과 지원책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중앙정부와 평안 감영에서 의주부로 지원한 본전
(本錢)을 책문(柵門)에서의 무역 허가를 받은 무역별장(貿易別將)과 상인과 의주 백성에게 대출해 주었고, 대출 받은 이들은 무역
을 통해 남긴 이익을 얼마간의 이자를 더하여 갚아 의주부의 재정으로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본문에서 ‘장사를 업으로 하는 이들’은 기실 의주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는 의주 백성들 대부분이 청(淸)나
라와 조선 사이의 중개무역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의주부의 독특한 재정 상황과 그 운용에 관해서는 “박범,
〈17~18세기 의주부의 경제상황과 재정운영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제58집, 조선시대사학회, 2011.” 참조.
[주03] 채전(債錢)은 …… 않아 : 조정의 식리(殖利) 사업은 시간이 지나 청(淸)나라의 경제 상황과 은(銀) 가격의 변동, 그리고 과도한 대
출 등으로 인해 점점 부채가 쌓여가게 되었다. 또한 의주는 경작지가 절대 부족한 반면 의주에 부여된 임무는 과중하여 호구 수의 증
가에 어려움을 겪었다. “박범, 〈17~18세기 의주부의 경제상황과 재정운영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제58집, 조선시대사학회,
2011.” 참조.
[주04] 권공(權公) 일형(一衡) : 권일형(1700~1760)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신경(信卿)이다. 승문원 정자, 김천도 찰방(金泉道
察訪), 의주 부윤,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주05] 하루하루를 …… 넉넉하다 :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노자(老子)의 제자 경상초가 노자에게서 도를 터득하고, 북쪽의
외루(畏壘)라는 산에 들어가 살면서 첩이나 하인 중에 지혜로운 자는 멀리하고 어리석은 자들만 데리고 살았는데, 그곳에 산 지 3년
만에 그곳에 큰 풍년이 들자 외루 사람들이 경상초에 대하여 “경상초가 처음 왔을 때에 우리가 놀랍도록 기이하다 여겼더니만 지금
하루하루를 헤아려 보면 부족하고 한 해 동안을 헤아려 보면 넉넉하니, 아마도 성인인가 보다.[庚桑子之始來, 吾灑然異之, 今吾日
計之而不足, 歲計之而有餘, 庶幾其聖人乎.]”라고 하였다.
[주06] 보장(寶藏) : 땅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지하 광물을 가리킨다. 《중용장구》 제26장 “이제 저 산은 한 자잘한 돌이 많이 쌓여서 이루
어진 것인데, 그 광대함에 미쳐서는 초목이 거기서 생겨나고 금수가 그곳에서 살며 보물이 그곳에서 나온다.[今夫山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의 주에서 “권은 구이다.[卷, 區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주07] 천산(天產) : 동물을 가리킨다. 《예기(禮記)》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에 “천산으로 음덕을 만들되 알맞은 예로써 제재한다.
[以天產作陰德, 以中禮防之.]”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석에 “천산은 동물이니 여섯 종류의 희생 따위를 말한다.[天產者,
動物, 謂六牲之屬.]”라고 하였다.
[주08] 화물에 …… 있는데 : 화물에 정해진 포대가 있다는 것은 중국 북경으로 사신 가는 사행원의 사무역인 팔포(八包)를 가리킨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5 연행팔포(燕行八包)〉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사행원들이 사행 중의 여비와 무역 자
금으로 은화를 가지고 갔는데, 1628년(인조6)에 은화 대신 인삼 10근을 1포(包)로 계산하여 80근을 휴대하게 하고 이것을 팔포라
고하였다.
그 후 1662년(현종3)에 다시 인삼이 귀해지자 은화로 팔포를 채우게 하면서 인삼 1근을 25냥으로 환산하여 당상관은 은화 3,000
냥, 당하관은 2,000냥이 팔포가 되었다. 은화가 더 귀해진 영조(英祖) 연간에 와서는 피잡물(皮雜物) 등까지 팔포의 물종에 포함
시켰다.
또한 사행에 데리고 가는 마필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는데 매번 사행마다 일정한 것은 아니었고 그때그때의 소용에 따라 210~220
필 내외가 되었다. 자세한 절목은 《만기요람》 〈재용편5 연사(燕使) 부연마(赴燕馬)〉에 상세하다.
[주09] 사신이 …… 필이니 : 사신이 연행에서 돌아올 때 이들이 가져온 복물(卜物)을 수송하기 위해 의주에서 책문으로 말을 보낸 것을 가
리킨다. 이를 연복(延卜)이라 하였다.
[주10] 산우(山虞)와 수인(獸人) : 《주례(周禮)》에 있는 고대 관직 명칭으로, 산우는 산림(山林)을 관장하였고 수인은 수렵(狩獵)과 잡은
짐승을 바치는 일을 관장하였다. 여기서는 앞서 이종성이 말한 바와 같이 피혁(皮革) 등의 물화를 가지고 교역에 참가한 관원을 가
리킨 것이다.
[주11] 양하(楊下) : 의주목(義州牧) 서남쪽 60리 지점에 있던 양하진(楊下鎭)을 가리킨다.
[주12] 정공(鄭公) 하언(夏彥) : 정하언(1702~1769)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미중(美仲), 호는 지당(止堂)ㆍ옥호자(玉壺子)이다.
정언, 장령, 의주 부윤, 좌부승지, 병조 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지당집》이 있다.
[주13] 찰미(察眉) : 눈썹을 살핀다는 것은 상대방의 실정을 잘 헤아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백성의 실정을 잘 헤아려 다스린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춘추 시대에 진(晉)나라가 도적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극옹(郄雍)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도적의
얼굴을 보고 그 눈썹 사이를 살펴서 마음까지 알아차렸다고 한다.[晉國苦盜. 有郄雍者, 能視盜之貌, 察其眉睫之間而得基情.]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14] 싼 …… 사들이며 : 찰미고(察眉庫)를 상평창(常平倉)으로 활용하였다는 말이다. 이는 풍년이 들어 곡가(穀價)가 떨어지면 시세보
다 비싼 값에 사들이고 반대로 흉년이 들어 곡가가 오르면 시세보다 싼 값에 내어 팔아 곡가의 균형을 도모하는 것이다.
[주15] 재물로 사람과 바꾸니 : 재물을 버리고 사람을 구했다는 말이다.
[주16] 성상께서는 …… 계시다가 : 육신사는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은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
(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의 사당으로 전국에 여러 곳이 있으나 여기서는 노량진(鷺梁津)에
있는 사당인 민절사(愍節祠)를 가리킨다. 이때 지은 정조의 제문은 《홍재전서(弘齋全書)》 권22에 실려 있다.
[주17]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 : 제태와 황자징 모두 명나라 혜제(惠帝)의 총애를 받아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제왕(諸王)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건문(建文) 원년(1399) 주(周)ㆍ대(代)ㆍ상(湘)ㆍ제(齊)ㆍ민(岷) 등 5왕을 차례로 죄목을 만들어 폐하였다.
이에 연왕(燕王)이 제태와 황자징을 간신으로 지목하고 정난(靖難)한다는 명분 아래 군사를 일으켜 경사(京師)를 함락시키고 즉위
하니, 곧 성조(成祖 영락제)이다. 제태와 황자징은 방효유(方孝孺)와 함께 붙잡혔으나 끝내 굴하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明史
卷141》
[주18] 홍장(鴻匠) : 도덕과 문장이 출중한 사람을 가리킨다. <끝>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승현 (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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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梧川李相國 宗城 龍灣紀惠碑 幷序
龍灣。兩國之門戶也。荷戈擊柝者。晨夕於待變。故薄其徭賦。蠲其力役。以綏懷之。然壤地褊而冠蓋交。邑入不足以待賓旅養軍校。於是有息債之政。業商者貸輕而賭厚。始皆便之。久則錢益滋而民不加。積至七十萬緡。家授而口分。人散而籍存。於是有族隣之徵。邊民遂大病。英廟乙丑。梧川李相國按西節。行部徑入灣。召掌簿者。悉收債券來。公曾以御史巡邊。威聲讋一路。令下闔境皆戰沸。時權公一衡爲府尹。亟入問曰。今索債券將急之耶。答曰。然。權公曰。信如是。死者多矣。願少寬焉。公曰。是不難。卽令取火來。權公大驚遽止之。公笑而不應。促燒之盡。權公曰。邊門將悴矣。公何以善其後耶。曰。吾有一策耳。夫皮革者。我國之所贏。而中國之所須也。若使灣人挾入柵。以易燕貨。民獲其利。官征其稅。較諸債息。所謂日計不足。而歲計有餘者也。况我之貨於燕者。惟銀而已。銀者。寶藏也。出於地而有限。皮革天產也。取於山而無窮。以此代彼。又豈不裕國計耶。然行人之西也。貨有定包。馬有恒數。灣商不得與焉。及其還也。灣馬羣迎者常數百。用此載皮而往。易貨而歸。其利專屬於灣。灣商之盛。府藏之充也。其視䂓瑣息而剝齊民。何如哉。權公矍然悟曰。善哉。非愚所及也。然關市之重。非聞於朝不可。公曰。吾所以疾來者。以繡衣之踵我後。將以附奏也。厥明御史任公璞果入灣。李公語之悉。先使歸奏。繼又條列驛聞。上善其議可之。於是柵市興焉。山虞獸人。稇載四至。灣往遼來。交手數日。而博什伍之利。一如公所畫。環塞百里。哭者歌。流者集。欣欣如再生矣。旣而權公嘆曰。方伯統一路。而惟灣偏受其賜。况我專一邑乎。遂出重貨。堰楊下之浦。捍水種稻。歲可得粟數千斛。以當一州之租。灣人從此。食無稅之田矣。翼歲。鄭公夏彥嗣爲尹。將收楊下之粟。乃曰。年穀有荒穰。公稅無贏縮。是可專恃耶。遂立庫而異貯。益之以廩餘。名曰察眉。賤出而貴入。充民租補軍須。存其羡而糶糴之。以備水旱之詘。微鄭公則權公之澤。有時竭矣。灣人旣戴三公之惠。謀勒諸石。會有朝禁未果。歲癸未。余守灣。偉前人之績。而席未溫罷去。恨未張之。今府尹尹侍郞師國。告灣人曰。碑之有禁。蓋惡夫沽譽之吏諛勢之民也。至若除大患興大利者。於古載之祀典。寧可掩翳不揚耶。况列郡之頌方伯。不在禁也。其願李公碑者聽。於是進士洪致一,鄕人崔之訥,安聖喆等。倡于衆。伐大石鴨水之陽。以余樂道人善而習于灣事。走人千里來乞辭。余嘗謂李公所作爲。實出等夷。其事奇其施遠。是可傳也。若夫二大夫功在固圉。有不可泯。遂牽連而書之。不惟灣人之志也。將以勸後之爲方伯牧守者。李公諱宗城。月城人。官至上相。系之以歌曰。灣塞遙遙。國之西門。民困于貨。如墊如焚。公火其籍。以財易人。脫我禍穽。弘我利源。昔阽溝壑。今安田園。野有桑麻。柵有鷄豚。載飽載歌。哺子弄孫。豈曰公德。聖后之仁。惟權與鄭。有猷有恩。耕兮無稅。饑則有囷。功載于石。澤流于民。石有時磷。民則長存。辛亥正月十六日顯隆園行幸時。臣良浩以吏判隨駕。十七日夜。命召臣良浩于行殿。上方親製六臣祠祭文。出示草本。命臣諦看。祭文中有引用皇明齊黃事。臣曰。齊黃雖死於靖難之時。實有誤國激亂之罪。其人不足稱也。何可比倫於六臣乎。上曰。卿言是矣。點改數字。仍敎曰。曾見卿作故相李宗城龍灣碑。甚佳。可謂今之鴻匠矣。<끝>
梧川先生集附錄卷之五 / 墓碑銘
耳溪集卷二十五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