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지박물관[檜巖寺址 博物館]
경기도 양주시 율정동에 있는 박물관.
건립 경위
양주시에서 회암사지를 경기 북부 최고의 관광지와 역사 교육의 장으로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종합 정비 계획을 수립하여 연차적으로 회암사지 발굴 조사, 유적 및 단지 정비 등 회암사지 종합 정비 계획[총 사업비 580억 원] 중 하나로 2012년 10월 19일 회암사지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총 사업비는 127억 원이 투입되었다. 회암사지 종합 정비 계획 사업은 박물관 건립 이후에도 11차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시행하고 공원화 사업 및 유적 정비 사업을 벌였다.
변천
2012년 3월 박물관을 등록, 2012년 4월 국립 중앙 박물관 국가 귀속 유물 대여, 2012년 5월 전시장을 준공하였다. 2012년 7월 임시 개관을 거쳐 2012년 10월 19일 개관하였다.
구성
회암사지 박물관은 대지 면적 32만 3117㎡, 연면적 3,561㎡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이다. 1층은 상설 전시실, 영상실, 방문자 센터, 2층은 상설 전시실, 문화 체험실, 기획 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었다.
활동 사항
2014년 6월 23일 특별 전시 ‘마루 장식 기와, 건물의 위용과 품격을 담다’를 개최하였고, 2014년 9월 2일 작은 전시 ‘회암사지, 그 시간의 흐름’을 개최하였다. 2015년 5월 19일 특별 전시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즐거움과 품격으로 산수를 보다’, 2015년 9월 23일 특별 전시 ‘깨달음의 소리, 범자(梵字)―회암사지 범자문 막새기와를 이야기하다’, 2016년 4월 19일 작은 전시 ‘춘풍 문양, 봄바람 타고 온 옛 회암사의 문양 이야기’를 개최하였다. 2016년 3월 18일 대만 국립 역사박물관과 양해 각서[MOU] 체결하였다.
현황
회암사지 박물관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왕실 사찰 역할을 담당한 회암사의 역사와 위상을 재조명하고, 유물 수집·보관·연구·전시·교육 기능을 통해 역사·문화 중심 기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6년 현재 상설 전시실 1에서 전시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외 9종류의 문헌에 나타나는 회암사 관련 문헌 기록을 종합하고 해석하여 회암사의 역사를 규명, 회암사에 머물면서 한국 불교사의 중요한 업적을 남긴 승려인 지공·나옹·무학의 생애 조명,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중요 유물과 영상을 통해서 왕실 사찰 회암사의 위상 조명, 회암사를 찾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행차 장면 모형과 회암사에서 발굴된 조선 왕실 문화를 대변하는 주요 유물 전시, 회암사의 규모와 가치를 보여 주는 회암사 대가람 복원 모형 및 영상 등이다.
상설 전시실 2에서 전시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내 최고의 온돌 시설 회암사지 서승당의 고증을 통한 모형 복원 및 연출, 회암사지 출토 기와를 무늬별로 분류하여 성격과 상징적 의미 전시, 회암사지 출토 도자류를 사용처와 쓰임새에 따라 분류하여 성격과 특징 도출, 회암사지 출토 불상 및 불구류를 비롯하여 국내외에 소장된 회암사 불화 등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 왕실 발원의 불교 미술 특징 규명 등이다. 관람 가능 시간은 11월 1일~2월 28일 9시~17시, 3월 1일~10월 31일 9시~18시이다. 관람 요금은 초등학생 1,000원, 청소년 및 군인 1,500원, 어른 2,000원, 유아 및 노인은 무료이다.
참고문헌
회암사지 박물관(http://museum.yangju.go.kr)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양주회암사지선각왕사비 [楊州檜巖寺址禪覺王師碑]
서울특별시 종로구 회암사터에 있는 고려후기에 건립된 승려 나옹의 탑비. 보물.
개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06m, 너비 1.6m. 1377년(우왕 3) 고려 말 승려인 나옹(懶翁) 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비의 형식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의 것으로 개석이 없다. 그런데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면서 비신이 파손되어 보존 처리가 이루어졌고,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비신을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 있으며, 원형을 본 따서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내용
이수(螭首)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비신 상부에 쌍룡을 깊게 조각하고 그 중앙에 제액을 만들어 ‘禪覺王師之碑(선각왕사지비)’ 6자를 새겼다. 자경은 2∼2.4㎝, 전액의 자경은 11.2㎝이다. 비문은 이색(李穡)이 짓고, 권중화(權仲和)가 예서로 쓰고 전액도 하였다. 비문에 따르면 왕사의 휘는 혜근(惠勤), 호는 나옹, 초명은 원혜(元惠)이고, 영해부(寧海府) 사람이며, 선각은 시호이다. 1320년(충숙왕 7)에 태어나 1344년에 회암사에 입문하였다. 1348년에는 원나라에 가서 지공(指空)에게 법의·불자(拂子: 번뇌를 물리치는 표지물)·범서를 받았다. 또 원나라의 순제(順帝)가 대사를 연도(燕都)의 광제사(廣濟寺)에 주거하게 하고, 금란가사와 폐백을 하사하였다. 나옹이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자 왕이 그에게 가사와 불자를 하사하고 신광사(神光寺)에 주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구월산·금강산 등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회암사에 들어와 절을 크게 중수하고 1377년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을 행하였다. 후미에는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명문을 새겼다. ㅡ이 비의 글씨는 예서인데, 예서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 말에 이 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도 예서가 쓰이지 않을 때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서 나옹비는, “팔분서(八分書: 예서 이분쯤과 전서 팔분쯤을 섞어 만든 한자의 글씨체)인데 태정(太整)하나 신채(神彩: 훌륭한 풍채)가 없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결구도 엄정하고 필력도 주경하며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중국의 「희평석경(熹平石經)」을 방불케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문화재대관』6(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한국금석총목』(장충식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84)
『朝鮮金石總覽』上(京城: 朝鮮總督府, 19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5-1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