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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6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마가복음 10: 41-45
예수제자로 살기
요사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당연히 <쿡방>입니다. 전에는 <먹방>이 유행해서 맛있는 음식을 전국팔도를 찾아다니면서 맛있게 먹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한 단계 진화해서, 이제는 직접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대세입니다. 거기에 인터넷이 활용되면서 방송국과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문자메세지를 주고받는 현장성이 극대화 되어서, 지금 나가는 <쿡방>이 시청자에게 얼마나 어필하는지도 즉시 평가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먹는 방송, 여행 방송, 요리 방송이 진화해서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가장 흥미 있어 하는 주제는 바로 먹는 것과 여행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철학이나 종교를 논하는 방송을 붙여 놓으면 시청률이 백전백패로 떨어질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쿡방>중에 유명인의 자기집 냉장고를 통째로 옮겨와서, 저장된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내는 요리사 경쟁프로가 있습니다. 거기서 유명해진 요리사가 이연복 셰프라는 분입니다. 나이는 저와 비슷합니다. 그는 중국음식 요리사인데,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무엇이든지 달인이 되려면 오랜 세월 고통을 참아내며 수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 자기의 중국식당에는 벌써 일 년 치 예약이 끝났을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후계자를 선발하는 기준이 참 남다릅니다. 그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이제는 후계자의 증표로 자기가 쓰는 주방용 식도와 똑같은 식도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줍니다. 지금까지 요리사는 단 두 명만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요리 실력은 당연한 것입니다. 거기에 겸손과 배려가 후계자의 덕목입니다.
그가 여기저기 방송출연을 많이 하면서 배운 것이 있는데, 예능방송 사회자로 이름을 날리는 유재석 씨와 신동엽 씨의 공통적인 특징은 <배려>였다고 합니다. 그 방송을 가장 후배에게까지 세심한 배려를 한다고 합니다. 이연복 셰프의 말은 바로 그런 <배려>에서 지도력이 나온다고 합니다. 참 의미 있는 말로 제 귀에는 들렸습니다. 사람이 높아지면,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갈수록, 저 아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힘든 세상을 사는데, 먹고 살기도 경쟁인 세상에, 겸손과 배려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생각하는 분들은 오늘 마가복음 10장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그들은
마가복음 10장 42절에 보면 <고관>이 등장합니다.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고 주님이 말합니다. 세도부리는 고관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누구인가하면 예수님의 12제자들입니다.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특별청탁을 넣었습니다. “우리 요구를 다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두 명의 제자에게, 주님은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들 입에서 나온 말은 “선생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우리 중 하나는 선생님 오른 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다른 제자들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 심한 말다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 다툼이 일어나기 전에 대답을 하셨는데, 그 대답을 누가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대답을 기억하십니까?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너희는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내가 마시는 잔과 세례를 너희가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않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일이다.”(38-40절)
저는 이 대답 속에 <예수제자로 살기>의 진수가 다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진수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주님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고 산다는 것. 둘째, 주님을 따르면 돌아올 것은 고통과 고난뿐이라는 것. 셋째, 무진 고생을 같이 했다고 그에 합당한 보상이 반드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할 말씀은 다했습니다. 그런데 명언입니다. “너희는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라는 말씀처럼, 지금 제자들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 속에 담긴 세 가지의 <제자원칙>의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까지 합세해서 다툼이 벌어지세 된 것입니다.
꽤 오래전부터 전국의 교회에 유행한 것이 있는데 바로 <제자훈련>입니다. 제자훈련을 강조한 분 중에는 故옥한흠 목사님이 있습니다. 책도 여러 권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제대로 하는 곳에서는 매일 훈련받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고, 예수의 제자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르치고 훈련을 받도록 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한 번 뒤집어서 이해해 볼까요? 그런 제자훈련이 없으면 어디서도 참된 제자답게 사는 방법을 배울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자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안 배우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낫지만, 제자가 되는 것은 배움을 넘어서서 체화되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예수의 12제자가 그것을 반증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도 제자들은 마음을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고 분개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두 번째 훈계해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입니다.
주님은
고관대작들이 백성을 함부로 대하고 세도를 부리는 일이 벌어진 것은 2000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는 그래도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몇몇 철학자들이나 인간평등의 문제를 고민했지,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라는 신분관계가 분명했던 시대입니다. 고관대작이 자기의 특권을 가지고 세도를 부린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이 전혀 없는 시대에 등장한 주님은 전혀 다른 생각을 전파했습니다. 주인과 종의 위치를 바꾸는 발상을 전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역발상>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역설>입니다.
역설적인 어록이 성경에 참 많이 나옵니다. 예수의 사상이 바울에게도 전파되어서 바울도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다!”(고전 3: 19)라고 말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지도력은 권세를 가지고 세도를 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종처럼 남을 섬기는데서 지도력이 나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하는 것을 보라!”는 뜻으로,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려 왔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중세의 기독교 시대 1000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주님>을 따르는 왜곡된 시대였습니다. 한국에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에 기독교는 말 그대로 섬기는 종교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어떤 이유에서였든지 간에 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남기며 박해를 받았고, 개신교는 양반과 평민의 신분관계를 허문 종교가 되었습니다. 제대로 주님을 받아들인 양반은 자기 하인과 함께 예배드렸고, 심지어 자기 하인이 먼저 장로가 되는 것도 용납했다고 합니다. 물론 용납 못해서 교회를 떠난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여기서 곧바로 드러나지 않습니까? 예수의 제자는 교회에 몸담았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전한 제자의 가치관을 몸으로 체득해야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자격 조건을 갑자가 높이려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믿고 세례 받으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니,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의 손길 아래에 우리는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의 참 제자인 줄 착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세상은
요즘에는 세상의 지혜를 교회 안에서 꺼내드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과 무엇이 다르냐는 비난도 많이 받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올바른 지혜라면 배우겠지만, 세상의 지혜는 대부분 <이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삶을 보면, 주님은 그런 종류의 이익과는 담을 쌓고 사신 분입니다. 오죽 하면 제자들에게 <고통의 잔과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시겠습니까? 만일 주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교회에 나온 우리들에게 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일까요?
우리가 교회 나오면서 추구하는 <이익>이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의 도움>입니다. 약할 때, 힘들 때, 시련 당할 때, 슬플 때, 감당이 안 될 때, 그 어떤 도움의 길도 막혔을 때, 그때 우리를 버리지 않고 도와줄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 이것 한 가지가 얻을 수 있는 <이익>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답을 주십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있고, 주님이 대신 움직여서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길을 찾게 용기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전부 먼저 희생하고, 양보하고, 대신 담당하고, 먼저 섬기는 것이 바로 제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세상의 지혜로 살 면, 다음 세 가지의 삶의 방식을 따르면 됩니다.
1. 주고 받기, 2. 시비 가리기, 3. 깔고 앉거나 깔리기.
(1) 받고 주지 않으면, 관계형성이 안 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주었으면 반드시 받아내야 손익관계가 맞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2) 세상의 특징은 끝까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입니다. 서로 망가지더라도 말입니다. 옳고 그름을 한칼에 구별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분쟁은 사라질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일 뿐인데, 서로 틀렸다고 비난하면, 이제 남은 것은 죽기 살기로 싸울 일만 남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라고 말입니다.
(3) 드라마를 보면 권력지향적인 인물이 맨 먼저 하는 일이 딱 정해져있습니다. 권력자 아래로 기어 들어가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남 밑에 깔리는 시늉을 하는 것이지요. 얼마 후 자신의 세력이 확보되면, 자세를 역전 시켜서 자기를 깔고 안았던 사람에게 복수를 합니다. 기회를 얻어서 이번에는 그를 깔고 앉는 것이지요. 세상은 그렇게 깔리거나 깔고 앉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때 주님이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3-45)
그러면 우리는
(1) 이 세 가지 방식 대신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주고받기> 의 구조를 벗어나는 길은 <받을 생각 없이 주는 것>뿐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주어 보십시오. 사랑을 그렇게 주어 보십시오. 아내나 남편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한 없이 주기만 하십시오. 무언가 받으면 주어야 한다는 것은 가끔 문제가 되는 일이지만, 무언가 먼저 주면서 돌려받을 생각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는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와 동류인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베풀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주님은 말합니다.
(2) <시비 가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른 것을 다양하다고 인정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더 힘든 일은 다른 사람과 그 속에서 일치점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류의 사람과 만나면 친해집니다. 그런데 동류의 사람집단의 문제는 자기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 속에서 그 누구도 제대로 조언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획일화도 이렇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획일화의 시대 말기에 오는 것은 시비 가리기입니다. 독재가 끝나면 봇물처럼 자기주장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거기서 시비가리다가 끝내 상처만 입힌 채 헤어지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주님은 말합니다. 돌을 들어서 상대방을 칠 만큼 죄 없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3) <깔고 앉기와 깔리기> 속의 세상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섬기는 리더십입니다. 섬기는 리더십은 어찌 보면 진짜 리더가 누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구지 꼭 한 사람만 리더를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의 장로교 분열이 이렇게 심한데, 왜 도로 합치지 못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이상적인(비현실적인) 질문을 받으면 매우 난감합니다. 합치면 되지 뭐가 그리 어렵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난감해진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구운전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상적으로 보면 이론으로는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다 합치면 되지요. 하지만 현실을 다릅니다. 장로교가 다시 합치지 못하는 이유는 신학이 서로 달라서, 교리가 서로 달라서가 아닙니다. 각각의 교단에 이미 조직과 리더를 세웠습니다. 그 높은 교단장의 자리를 내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만들어진 구조를 바꿀 만한 <섬김의 능력>이 사라진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2000년 전의 12제자들은 주님의 말씀 때문에 맥이 빠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 오늘날에도 이것을 그대로 옮겨서 말하는 저 때문에 맥 빠지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리는 분명합니다. 섬기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고, 으뜸이 되는 일은 먼저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그런 주님의 모습과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좋게 느껴지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섬김의 삶을 살 준비가 된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