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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객(亡命客) 41
<목수(木手)는 나무를 가지고 집을 짓고 가수(歌手)는 그 좋은 청으로 노래를 하며 문사(文士)는 이치로써 글을 짓는다.
제각기 그 특성과 재주가 다르나 품고있는 열정이야 어찌 다르랴, 다만 그 분야만이 다를뿐 사람의 지극한 정성이야
무엇이 다르리요...! 찬바람에 창문이 울린다 ~ 물러가는 겨울이 남겨둔 한가닥 바람이던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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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를 진동(振動)시킨 위주(魏犨)의 용맹(勇猛)
한편, 공자 중이(重耳)는 송(宋)나라를 떠나 정(鄭)나라 근방에 당도했다. 이 소식이 정문공(鄭文公)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정나라 임금 정문공(鄭文公) 역시 조나라 임금 조공공(曹共公)처럼 잔챙이였던지 중이를 없신여기며 받아 들이지
않으려 하자 상경(上卿) 숙첨(叔瞻)이 누차 중이(重耳)의 상서로운 골상과 그가 떠나자 진(晉)나라는 늘 어지러운 나라꼴
을 면치 못하며 나라의 동량(棟梁)들이 모두 그를 추종하여 무려 십수년간을 망명길에 함께함은 이로써 하늘이 그를 기르
고 있슴이 증명됨이니 주군께서는 그를 영접해 후대하라 했다. 그러자 정문공(鄭文公)이 말하길
" 중이(重耳)는 이제 늙었다. 앞으로 무슨 능력이 있으리요." 그러자 숙첨이 다시 아뢴다.
" 주공께서 그를 후대하기 싫거든 죽여버립시오. 공연히 오늘 그와 원수를 삼으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정문공(鄭文公)이 껄껄 웃으며 다시 말하길
" 지금껏 경은 그를 후대하라 해 놓고 어째서 갑자기 그를 죽이라 하오? 나는 그를 후대 할만큼 은혜를 입은바 없고 또한
그를 죽여야 할만큼 원한을 품은 일도 없소. 그냥 돌려보내도록 하오."
정(鄭)나라는 중이(重耳) 일행이 당도할 무렵 성문을 닫아버렸다. 중이 일행은 입성을 거절하는 뜻임을 알고 말없이 수레
를 돌려 정나라를 그냥 지나갔다. 참으로 야속한 처사였다.
수일 뒤 공자 중이(重耳) 일행은 초(楚)나라에 당도했다. 초(楚)나라는 타국의 임금을 대하는 예로써 중이에게 삼배(三杯)
씩 세 번 잔을 올리는 구헌(九獻)의 술잔을 중이(重耳)에게 올렸다.
중이(重耳)는 겸양했으나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곁에 시립(侍立)한 조쇠(趙衰)가 중이에게 속삭인다.
" 공자께서 타국을 떠도신지 10수년, 조그만 나라들도 공자를 업신여기고 모욕했지만 이런 대국(大國)이야 어찌 예의를
모르겠습니까. 초왕(楚王)이 공자를 한 나라의 임금을 대하는 예의로써 대접하는 것도 다 천명(天命)일 것이니 주군께
선 사양 마시고 저들이 대접하는 대로 받으십시오."
마침내 중이(重耳)는 일국의 임금이 받는 대접을 받았다. 잔치자리 내내 초성왕(楚成王)의 태도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중이(重耳)도 언사를 매우 겸손하게 했다.
이렇게 초성왕과 중이는 서로 친숙해졌다. 마침내 중이 일행은 초나라에 머물기로 했다.
어느 날이었다. 초성왕(楚成王)은 공자 중이(重耳)와 함께 운몽(雲夢) 땅 못(澤)가에서 사냥을 했다.
이날 초성왕의 무예(武藝)솜씨는 대단했다.
그는 잇달아 두 대의 화살을 날려 사슴 한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맞혔다. 초나라의 모든 장수들이 땅에 엎드려 칭하했다.
바로 이때였다.
난데없이 곰 한 마리가 나타나 수레를 치받을 듯이 달려든다. 공자 중이(重耳)는 날쌔게 수레를 몰아 곰을 피했다.
그러자 초성왕(楚成王)은 공자 중이(重耳)에게 소릴 지른다. " 공자는 어이하여 그 곰을 쏘지 않소?"
공자 중이(重耳)는 전통(箭筒)에서 화살 한 대를 뽑아 곰을 노리면서 가만히 속으로 축원했다.
" 이 몸이 앞으로 진(晉)나라에 들어가 임금이 될 수 있다면 이 화살이 저 곰의 오른편 발바닥을 맞히게 하십시오."
과연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정통으로 곰의 오른쪽 발바닥을 뚫었다. 군사들이 그 곰을 초성왕 앞으로 끌어왔다. 초성왕이
" 공자(公子)의 활 솜씨는 참으로 신궁(神弓)이올시다." 하고 경탄했다.
잠시뒤, 저편 몰이터 쪽에서 와 하고 함성이 일어나더니 말을 탄 장수가 급히 말을 달려와 초성왕(楚成王)에게 고한다.
" 산골짜기에 괴상한 짐승이 나타났사온대 생김새는 곰 같으나 곰은 아니고, 그 코는 코끼리 같고 머리는 마치 사자같으
며 발은 범 같고, 그 털은 승냥이 같으며, 그 갈기는 멧돼지 같고 꼬리는 소 같고 그 몸은 말보다 컸습니다. 온 몸엔 검고
흰 반점이 서로 엇갈려 있는데 칼도 창도 화살도 들어가질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레에 붙어있는 쇠를 마치 지푸라기
씹듯하며 어찌나 사나운지 사람 힘으론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애워 싸고 고함만 지를 뿐이옵니다."
이 말을 듣고 초성왕(楚成王)이 공자 중이(重耳)를 돌아보며 묻는다.
" 공자는 중국 본토에서 생장 하셨으므로 널리 들어 아는것이 많을터이니 혹 그 짐승이 무엇인지 아시겠소?"
공자 중이(重耳)가 조쇠(趙衰)를 돌아보며 알겠느냐고 묻는다. 조쇠(趙衰)가 앞으로 나아가 아뢴다.
" 신(臣)은 그것이 무슨 짐승인지 아옵니다. 그것은 맥(貘:표범종류)이라는 짐승입니다. 맥(貘)은 천지간의 금기(金氣:쇠
의 기운)를 받고 생겨난 짐승이기 때문에 머리는 작고 발은 짧으며 구리와 쇠를 잘 먹습니다. 맥(貘)이 똥과 오줌을 누면
그것이 오금(五金:金,銀,銅,鐵,朱錫)으로 변합니다. 그 어떤 쇠도 그 짐승이 먹으면 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맥(貘)의
뼈엔 골수가 없으므로 그걸로 기물의 손잡이를 만들어 쓰기도 하며 그 가죽으로 요를 만들면 질병이 범접하지 못하고
습기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한다. <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하지만 그, 고대에... 무서운 짐승이 나타난건 사실이다.>
초성왕(楚成王)이 묻는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짐승을 잡을수 있겠소?"
" 가죽과 살이 다 쇠로 굳어져 있어 보통 짐승을 잡듯이 잡을순 없습니다. 다만 콧구멍 속에 허한 곳이 있어 강철로 된 무
기를 찔러넣으면 잡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손쉬운 방법은 불로 구우면 즉시 죽습니다. 곧 금성(金性)은 불을 두려
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때,조쇠(趙衰)의 설명을 듣고 있던 위주(魏犨)가 목청을 돋우어 씩씩하게 나선다. 그 목소리가 천둥 같았다.
" 신(臣)이 무기를 쓰지 않고 그 짐승을 사로잡아 어전에 바치겠습니다." 하더니 수레에서 뛰어내려 나는 듯이 달려갔다.
초성왕(楚成王)이 중이(重耳)에게 " 자 우리도 함께 가서 구경합시다." 그들은 수레를 나란히 달려 몰이터로 갔다.
한편, 위주(魏犨)는 나는 듯이 몰이터로 뛰어들더니 맥(貘)을 보자 정면으로 달려들어 주먹으로 연거푸 쳤다. 그러나 맥
(貘)은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소가 우는 것과 흡사했다. 한 번
소리를 지르고서 그제야 맥(貘)은 앞발을 들고 꼿꼿이 일어나 위주(魏犨) 앞으로 다가와 혓바닥을 한 번 휘둘렀다.
순간 위주(魏犨)가 허리에 차고 있던 유금정대(鎏金鋥帶)가 맥(貘)의 혓바닥에 말려들어 입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위주(魏犨)가 대로(大怒)한다. " 이 흉악한 짐승이 어찌 이렇듯 무례하뇨 !"
그는 몸을 비호처럼 날려 땅바닥으로 부터 5척가량 공중에 솟았다가 내려오면서 주먹으로 맥(貘)의 정수리를 힘껏 쳤다.
꼿꼿이 섰던 맥(貘)은 한대 얻어맞고 유유히 나무 밑으로 가서 의젓이 쭈구리고 앉았다.
위주(魏犨)가 더욱 분이 솟아 달려들면서 몸을 속구쳐 맥(貘)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는 온 힘을 다 하여 맥의 목을 끌어안
고 졸랐다.
위주(魏犨)의 힘은 과연 무시무시 했다.
짐승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면서 날뛰었다. 위주(魏犨)는 짐승이 몸을 뒤척거릴 때마다 아래위로 흔들리면서도 손을 놓지
않고 더욱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미친 듯이 이리 닫고 저리 뛰면서 맥(貘)은 차차 비틀거리다가 쓰
러졌다. 짐승 등에 타고 있던 위주(魏犨)는 몸을 뒤로 젖히며 맥의 목을 더욱 세차게 졸랐다. 맥은 이제 숨통이 막혔다.
얼마뒤 위주(魏犨)가 손을 놓았을 때엔 맥(貘)은 꼼짝 안하고 쓰러진 그대로였다. 위주(魏犨)는 짐승 등에서 뛰어내려 짐
승의 네다리를 쇠사슬로 공꽁묶고는 맥의 코를 움켜쥐고 마치 개 끌듯이 끌어다 중이(重耳)와 초성왕(楚成王) 앞에 가져
다 놓았다. 위주(魏犨)는 참으로 무서운 장수였다.
조쇠(趙衰)가 군사들에게 명한다. " 속히 불을 지펴라."
꾼사들은 꺾어온 싸릿가지에 불을 붙여 맥(貘)의 코에 들이대자 불기운이 속으로 들어가 짐승은 해삼처럼 물렁물렁해졌
다. 위주(魏犨)가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뽑아 짐승을 치자 칼끝에서 빛이 번쩍 일어날 뿐 털끝 하나 상하지않았다.
조쇠가 " 칼로 쳐도 소용없소. 가죽을 벗기려면 주위에 불을 놓고 이 짐승을 구워야만 하오."
군사들은 조쇠(趙衰)의 명대로 맥(貘)의 주변에다 불을 놓았다. 그러자 짐승은 쇠처럼 단단하던 가죽과 살이 점점 부드러
워졌다. 그제야 군사들은 그 짐승의 가죽을 쉽사리 벗겨낼 수 있었다.
초성왕(楚成王)이 공자 중이(重耳)에게 말한다.
" 공자를 모시는 호걸들이 다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있구려. 과인의 나라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으면 좋겠소."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초나라 장수 성득신(成得臣)이 마땅찮은 기색을 지으며 초성왕에게 아뢴다.
" 왕께서는 진(晉)나라 신하의 무예를 과도히 칭찬하십니다. 원컨대 신이 그들과 한 번 겨루어보고 싶습니다."
초성왕(楚成王)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 진(晉)나라 공자와 신하는 우리 나라에 오신 손님이다. 네 마땅히 공경하는 예법을 배워라."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망명객(亡命客) 42
중이(重耳), 초성왕(楚成王)에게 철석같은 약속을 하다.
< 이 맹서는 훗날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전쟁때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에 의해 반듯이 지켜지게 된다.>
이날, 사냥을 마치고 모두가 모여앉아 술을 마시며 매우 즐겼다. 초성왕(楚成王)이 공자 중이(重耳)에게 술을 권하며 왈
" 공자가 진(晉)나라에 돌아가서 군위에 오르면 그때엔 무엇으로써 과인에게 보답하시겠소?"
" 여자와 구슬과 비단은 넉넉히 가지고 계실 것이며 새털과, 뿔과,가죽은 원래 초나라 소산이니 무엇을 원하시니까 ? "
초성왕(楚成王)이 웃으며 말한다.
" 그건 그렇다 하고 그래도 반드시 과인에게 보답하고 싶은 것이 없지 않을 테니 한번 말해보시요."
중이(重耳)가 정색을 하며
" 만일 군왕의 도움을 받아 이 몸이 진(晉)나라 군위에 오른다면 원컨대 초(楚)나라와 우호를 두터이 하고 백성들이 태평
을 누리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만일 평원(平原:벌판)이나 광택(廣澤:강)에서 병거를
거느리고 대왕의 군사와 서로 대하게된다면 우리는 삼사(三舍:90리)를 물러서겠습니다. 했다.
즉, 만일 훗날에 우리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우게 된다면 그땐 30리씩 세번, 90리를 진나라가 물러서는걸로 오늘의 은혜를
갚겠다는 중이(重耳)의 약속이었다.( 군대 행군제도에 30리에 한번씩 쉬게 되어있다. 이를 일사(一舍)라 한다)
초성왕(楚成王)은 중이(重耳)와 함께 거나하게 취해서 그날의 사냥을 무사히 마쳤다.
초(楚)나라 장수 성득신(成得臣)이 분노하여 초성왕(楚成王)에게 간한다.
" 왕께서는 진(晉)나라 공자를 너무 후대하십니다. 오늘 사냥터에서 그는 감히 은혜를 잊고 전쟁을 운운했습니다. 이렇듯
무례한 자가 훗날 군위에 오르면 반드시 오늘의 은혜를 저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일찌감치 그를 죽여버립시오."
" 진(晉)나라 공자는 그 천성이 어진 사람이며 그를 시종하는 사람들도 다 뛰어난 인물들이다. 이는 곧 하늘이 그를 돕고
있다는 증험인데 어찌 우리 초(楚)가 하늘의 뜻을 어길 수 있겠느냐?"
" 왕께서 꼭 중이(重耳)를 죽일 수 없으시다면 호언(狐偃), 조쇠(趙衰)등 그의 신하 몇이라도 우리 나라에 감금해두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
초성왕(楚成王)이 엄숙한 언굴로 성득신(成得臣)을 굽어보며 이른다.
" 아니된다, 그 신하들을 잡아둔들 내가 그들을 부릴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냐? 공연히 원망만 살 따름이다. 중이(重耳)에
게 덕을 베풀고 원망 대신 어진 것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 계책이다. 경(卿)은 자중하라. "
이리하여 초성왕(楚成王)은 더욱 중이(重耳)를 후하게 대접했다.
기원전 637년은 주양왕(周襄王)15년이요, 진혜공(晉惠公)14년이다. 이해에 진혜공(晉惠公)은 병으로 자리에 눕게되었다
그런 병신같은 자가 나라를 그 지경으로 결딴내 놓고 몸이 아파 오랫동안 조회(朝會:조정회의)에 나가질 못했다.
세자 어(御)는 인질로 진(秦)나라에 가 있었는데 세자 어(御)의 외가인 양(梁)나라 임금이 무도해서 날마다 전각만 짓고
연못만 팠다. 백성을 사랑할 줄은 모르고 잡아다 부역만 시키니 백성들은 그 임금을 저주했으며 견디다 못해 간혹 이웃인
진(秦)나라로 달아나는자도 많았다.
진목공(秦穆公)은 양(梁)나라 민심이 변한 걸 알고 백리해(百里奚)로 하여금 양(梁)나라를 쳐 단숨에 무찔러버렸다.
양나라 임금은 전란중에 맞아 죽었다.
양나라가 망하고 그 임금이 전란에 죽었다는 소식에 진(秦)나라에 볼모로 와 있는 진(晉)나라 세자 어(御)가 탄식한다.
" 진(秦)나라가 나의 외가인 양(梁)나라를 쳐서 멸망시킨 것은 결국 우리 진(晉)나라를 업신여김이로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진(秦)나라를 원망하고 있는데 아버지 진혜공(晉惠公)이 병환으로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또 탄식했다.
" 잡혀와 볼모로 있으니 밖으로 나를 동정해 주는 사람없고, 안으론 심복 하나 없으니 만일, 부왕이 세상을 떠나면 본국의
모든 대부들은 다른 공자를 군위에 올려세울지 모른다. 그리되면 나는 여기서 늙어죽는 수 밖엔 없다. 그럴바엔 이참에
이 곳을 달아나 본국에 가서 병든 아버지를 치료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만 못하리라."
그날 밤에 진(晉)나라 세자 어(御)는 아내 회영(懷瀛)에게 진(晉)나라의 사정을 말하고 한시바삐 돌아가야만 군위에 오를
수 있으니 함께 가자며 설득했으나 회영(懷瀛)은 그 부당함을 말한다.
" 당신은 한 나라의 세자로 이곳에 볼모로 와 있으면서 갖은 곤욕을 당하느니 본국으로 돌아가고싶다는 것도 무리는 아닙
니다. 그러나 첩의 아버지는 또한 이 진(秦)나라의 군주인지라 이 몸으로 하여금 그대를 모시게 한 뜻은 그대를 진(秦)나
라에 잡아두실 생각에서였습니다. 이제 첩이 그대를 따라 달아난다면 이는 이 나라 임금인 아버지를 배반한 것이 되니
어찌 그 죄가 가볍겠습니까. 그러니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첩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 한다.
마침내 세자 어(御)는 변장하고 무사히 진(秦)나라 성을 벗어나 그리운 고국산천을 향해 달아났다.
진(晉)나라 세자 어(御)가 아무 말도 없이 본국으로 달아났다는 보고를 받고 진목공(秦穆公)은 크게 노했다.
" 그놈은 배은망덕한 도적이다. 하늘이 결코 그놈을 돕지 않으리라." 저주하며 모든 대부들에게 묻는다.
" 이오(夷吾) 부자(父子)가 다 과인에게 하해 같은 신세를 졌건만 아비와 자식이 다 같이 과인을 배반했다. 내 어떻든 배은
망덕한 그놈들을 그냥 두지 않으리라. 허허 ! 애당초 과인이 중이(重耳)를 진(晉)나라 임금으로 세우지 못한게 한이로다.
경들은 지금 중이(重耳)가 어디 있는지 그의 종적을 알아보거라."
이윽고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초(楚)나라에 가 있다는 사실과 간지도 불과 몇 달 안된다는 사실까지도 보고 받은
진목공(秦穆公)은 공손지(公孫枝)를 불러 분부한다.
" 경은 초(楚)나라에 가서 초성왕(楚成王)에게 중이(重耳)를 모시러 왔다고 정중히 청하여라. 과인은 장차 그를 진(晉)나
라 임금으로 세울 작정이다." 그리하여 공손지는 그 길로 초나라에 가서 초성왕에게 온 뜻을 밝혔다.
한편 공자 중이(重耳)는 자기를 데려가려고 진(秦)나라에서 사람이 왔다는 보고를 받고 초성왕(楚成王)의 속맘을 떠봤다.
" 이 망명객은 모든 걸 군왕께 맡겼습니다. 어쩐지 진(秦)나라엔 가기 싫습니다."
그러자 초성왕(楚成王)이 말하길
" 우리 초(楚)나라에서 진(晉)나라까지는 거리가 너무도 머오. 공자가 만일 진(晉)나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앞으로 여러
나라를 지나가야 하오. 그러나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서로 경계를 접한 나라이니 아침에 떠나면 저녁에 도착할 수
있소. 더구나 진목공(秦穆公)은 어진 사람이며 지금 진(晉)나라 이오(夷吾)와 사이가 서로 좋지 못한 터이니 이먀말로
이번 기회는 하늘이 공자를 도우심인가 하오 공자는 두말 말고 진(秦)나라로 가시오." 한다.
떠나는 날 중이(重耳)는 초성왕(楚成王)을 찾아가 절했다. 초성왕(楚成王)은 떠나가는 중이(重耳)에게많은 황금과 비단
과 수레와 말을 주어 그들의 행색을 군색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뒤 중이 일행은 진(秦)나라에 당도했다.
물론 진(秦)나라에 당도하기까지 여러나라를 경과 했으나 그 모든 나라가 다 진(秦)나라 아니면 초(楚)나라 소속이었고
더구나 공손지(公孫枝)와 동행한 때문에 도중에서 중이(重耳)일행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정중했고 편안히 대해 주었다.
망명객(亡命客) 43
중이(重耳), 나라를 되찾는 마지막 행보 진목공(秦穆公)의 사위가 되다.
진목공(秦穆公)은 공자 중이(重耳)가 온다는 보고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교외에까지 나가 공자 중이(重耳)를 영접하고 큰
공관을 내주었다. 그 이후로 진(秦)나라가 공자 중이(重耳)를 대하는 예의는 지극히 성대했다.
또, 진목공(秦穆公)의 부인 목희(穆姬)도 친정 동생인 중이(重耳)를 극진히 대접했다. 목희(穆姬)는 말없이 도망쳐 돌아간
세자 어(御)를 더욱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목희(穆姬)는 진혜공의 세자 어(御)가 버리고 간 자기 딸 회영(懷瀛)과
중이(重耳)를 혼인시키자고 진목공(秦穆公)에게 말했다. 진목공은 부인으로 하여금 회영(懷瀛)의 뜻을 알아보게 하였다.
어머니 목희(穆姬)의 권유를 듣고 회영(懷瀛)이 대답한다.
" 첩은 이미 진세자(晉世子) 어(御)에게 몸을 맡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또 어찌 다른 사람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목희(穆姬)가 딸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타이른다.
" 어(御)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중이(重耳)는 어진 사람이니 하늘의 도움을 받아 반드시 진(晉)나라 임금이 될 것
이며 그때엔 너를 정실부인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진(秦)과 너의 진(晉)나라가 대대로 인척지간이 되지 않느냐."
회영(懷瀛)이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 진실로 그러하시다면 어찌 첩이 이 한 몸을 아껴 두 나라 우호를 방해할 수야 있겠습니까."
마침내 공손지(公孫枝)가 중이(重耳)에게 가서 혼사를 말했다. 중이(重耳)와 달아난 어(御)는 큰아버지와 조카 사이다.
그러니 중이(重耳)에겐 회영(懷瀛)이 질부(姪婦)가 되지않는가. 중이(重耳)는 암만 생각해도 조카며느리를 아내로 맞이
할 순 없어 이러한 자기의 고충을 말하고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나 공손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며 거듭 권하고 갔다.
< 회영은 젊고도 이뻣다고 한다. ...^^ 아효 그냥 ~>
조쇠(趙衰)가 중이(重耳)에게 아뢴다.
" 듣건대 회영(懷瀛)은 아름답고 재능이 대단하다 하옵디다. 진목공과 그 부인께서 특히 사랑하시는 딸입니다. 진(秦)나
라 여자를 아내로 마지하지 않고서 어떻게 진(秦)나라의 환심을 사려고 하십니까. 진(秦)나라의 힘을 빌리려면 회영
(懷瀛)에게 장가를 드셔서 진목공(秦穆公)의 사위가 되셔야만 하옵니다. 더이상 사양하지 맙시오."
" 동성(同姓)간에 혼인 하는 것도 피하거늘 하물며 조카며느리를 어떻게 데리고 살 수 있소."
호언(狐偃)이 나서며 말한다.
" 공자는 이제 본국에 돌아가셔서 이오(夷吾)를 섬길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그를 대신해 군위에 오르실 생각이십니까? "
" 이오(夷吾)가 죽으면 진(晉)나라는 그의 아들 어(御)의 소유가 됩니다. 공자가 어(御)를 모실 생각이라면 회영(懷瀛)은
바로 공자의 국모(國母)뻘이 되며 공자가 그를 대신해서 군위에 오를 생각이라면 회영(懷瀛)은 바로 원수놈의 아내가
되는 것인데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하고 호언(狐偃)이 딱 잘라 말했다. 중이(重耳)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곁에 있던 조쇠(趙衰)가 웃으며 말한다.
" 앞으로 그 나라를 빼앗아야 하는데 그 아내쯤이 무슨 대단할 것있습니까. 큰일을 하려는 사람이 조그만 절개에 얽매여
꼼짝못하다간 다음날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중이는 드뎌 결심을 하게된다.>
중이(重耳)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공손지(公孫枝)를 불러 혼인하기로 승낙했다. 공손지는 즉각 이를 진목공께 고했다.
공자 중이(重耳)는 길일(吉日)을 택하고 폐백(幣帛)을 펴고 공관에서 진(秦)나라 공주 회영(懷瀛)과 성대한 혼인을 했다.
참고로 폐백(幣帛)이란 반드시 혼사에 오가는 예물만이 아니라 웃사람이나 젊잖은 사람에게 올리는 예물도 해당한다.
회영(懷瀛)의 얼굴과 자태는 제(齊)나라에 두고온 제강(齊姜)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 남자는 이게 문제여 ㅋㅋ>
또한, 진목공(秦穆公)은 종녀(宗女:왕실의 딸)중에서 미인 네명을 뽑아 공자 중이에게 잉첩(媵妾)으로 내 주었다.
말이 잉첩이지 ㅎㅎㅎ 그녀들도 신랑꺼라네 ....^^ 중이는 좋것네 ~ ♨ //♬
애초에 주저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공자 중이(重耳)는 기쁨을 감추지못했다. 오랜만에 가정재미를 보자 그는 그간 겪은 갖
가지 고생마저 잊은 듯 했다. 사관(史官)이 시로써 이 혼사를 다음과 같이 논했다.
一女如何有二夫 (일녀여하유이부) 한 여자가 어찌 두 남자를 섬길 수 있으리
況於叔姪分相懸 (황어숙질분상현) 더구나 숙질 사이란걸 생각해 보라
只因要結秦歡好 (지인요결진환호) 다만 진나라 환심을 사려고
不恤人言禮義愆 (부휼인언예의건)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구나.
< 여기서 작가는 중이를 편들고 있지만 역사가들은 인륜을 내세워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니 이는 곧 춘추의 필법이다.>
진목공(秦穆公)은 원래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의 기품을 사랑했지만 다시 장인 사위가 되고부턴 더욱그를 사랑했다.
진(秦)나라에선 중이(重耳)를 위해 사흘마다 잔치를 베풀고 닷새마다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진수성찬으로 대접했다.
진(秦)나라 임금이 이런터에 세자 앵(罃)도 자형(姉兄)이 된 중이(重耳)를 끔찍이 위했다. 그는 대때로 공관에 들려 중이
에게 안부를 드렸다. 동시에 조쇠(趙衰), 호언(狐偃)등도 진(秦)나라의 유명한 신하들인 백리해(百里奚), 건숙(蹇叔), 공
손지(公孫枝)들과 사귀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 함께 공자 중이가 진(晉)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늦어질까 염려했다.
그 이유중 하나는 공자 중이(重耳)가 새장가를 들고 아주 그 맛에 세상일 잊고 푹 빠질까 하는 염려였고 또 하나는 진(晉)
나라에 아직 트집을 잡을 만한 사건이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솔히 거사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렇게 먹어 치웠다간 백성들의 신망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하늘이 무심하리요! 하늘이 공자 중이(重耳)를 무심히 세상에 내놓았을리 없음이라! 그가 장차 진(晉)나라
임금이 되어 천하패권을 잡고 패후(覇侯)의 운기까지 타고난 영웅이라면 어찌 그런 때가 오지 않으리요 !
망명객(亡命客) 44
서서히 돌아드는 대기운(大氣運)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본국으로 돌아간 세자 어(御)는 병상에 누워있는 부친을 위로했다. 아들을 본 진혜공(晉惠公)이
크게 기뻐하며 " 내 병든지 오래라, 만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어 늘 근심해 오다 네가 돌아오니 이제 마음이 놓이는구나."
이해 추구월 진혜공(晉惠公)의 병세는 위독했다. 진혜공은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 두 신하를 불렀다.
" 세자를 잘 부탁한다. 다른 공자들은 족히 염려할 것 없다만 무서운건 중이(重耳)다. 중이만은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하니 이 점을 명심하라."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 두 신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진혜공의 유명(遺命)을 받았다. 이날 진혜공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세자 어(御)가 주상(主喪)이 되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회공(晉懷公)이다.
군위에 오른 진회공(晉懷公)은 국외에 있는 중이(重耳)가 가장 무서웠다. 어느날 진회공은 조회때 한가지 명령을 내린다.
" 진(晉)나라 신하로서 중이(重耳)를 따라 망명나간 자들의 부모친척들에게 알려 앞으로 3개월 내로 명명간 자들을 불러
들이도록 하라. 기한내에 돌아온 자의 부모친척들은 지금의 벼슬자리에 있을수 있으며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기한내에 돌아오지 않는 자들의 부모친척은 삭탈관직은 물론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했다.
이때, 국구(國舅) 호돌(狐突)은 백발이 성성하나 기품은 대단했다. 그의 두 아들 호모(狐毛)와 호언(狐偃)은 다 중이(重耳
)를 따라서 갖은 풍상을 다 겪고 지금 진(秦)나라에 와 있었다. 극예(郤芮)는 두 번이나 호돌(狐突)에게 써 보내 호모와
호언 두 형제를 불러들이라는 권유였다.
호돌(狐突)은 그 권유를 받고 강력히 거절하자 극예(郤芮)가 궁에 들어 진회공(晉懷公) 어(御)에게 아뢴다.
" 호모(狐毛),호언(狐偃) 두 형제는 워낙 인물됨이 출중하여 출장입상(出將入相)할 인물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중이(重耳)
를 따라다니고 있으니 이는 범에게 날개를 붙여준 격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의 아비 호돌(狐突)은 두 아들을 소환하여고
하지 않으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주공께서 직접 호돌(狐突)에게 명하심이 가할 듯합니다.
<국구(國舅) 호돌(狐突)의 참혹한 죽음>
진회공(晉懷公)은 즉시 사람을 보내 호돌(狐突)을 불렀다. 임금의 부름을 받고 호돌은 집안 사람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궁
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진회공(晉懷公) 앞에 나아가 아뢴다.
" 노신(老臣), 병으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갑자기 노신을 부르셨습니까?"
" 경의 아들 호모,호언 두 형제가 국외에 있다는 말을 들었소. 국구는 간혹 그들과 왕래가 없는가?"
" 일체 서신 왕래가 없습니다."
" 국외에 있는자로 기한 내에 귀국하지 않으면 그 부모친척에게까지 죄가 미친다는 과인의 명을 국구는 듣지 못했는가?"
" 신이 두 자식을 공자 중이(重耳)에게 맡긴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충신은 임금을 모시되 죽을지언정 어찌 두 마음을 갖겠
습니까. 신의 두 자식이 중이에게 충성을 하는것은 지금 궁중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주공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만일 두 자식이 도망해 온다면 신은 그 불충함을 물어 꾸짖고 가묘(家廟)에 끌고가 죽일 것입니다.
그러하오매 더욱 그들을 부를수 없습니다."
그러자 진회공(晉懷公)이 대로하여 호돌(狐突)의 목에 칼을 들이대라 외친다.
두 역사(力士)가 칼을 뽑아 호돌(狐突)의 목에 갖다대자 진회공(晉懷公)이 호돌(狐突)을 굽어보며 외친다.
" 네 두 자식을 소환하여라 ! 그러면 너를 살려주리라 ! "
극예(郤芮)는 필묵(筆墨)을 갖다놓고 들이대며 어서 두 아들에게 속히 돌아오라는 편지를 쓰도록 호돌의 손을 잡고 강권
하니 호돌이 손을 뿌리치며 말하기를 " 내 손을 잡지 마라. 내 스스로 쓰리라." 호돌(狐突)이 붓을 들어 여덟자를 썼다.
子無二父 臣無二君
자무이부요 신무이군이라!
자식에게 두 아비가 없고 신하에겐 두 임금이 없노라 !
그러자 진회공(晉懷公)이 분기충천하여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며 외쳐댄다. 그러자 호돌이 유유히 머리를 들어
"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고, 신하 된 자가 임금에게 불충함을 노신(老臣)은 무서워합니다. 이러한 죽음이야 훌륭한 자식
이나 훌륭한 신하에겐 늘 있는 법이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고 의연히 목을 내밀었다.
진회공(晉懷公)이 추상같이 호령하여 왈 " 놈을 시정(市井:저자거리)에 끌고나가 참하여라! "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국구(國舅) 호돌(狐突)은 그 길로 장바닥에 끌려나가 참형을 당했다. 태복(太卜) 곽언(郭偃)이 장바닥에 뒹굴고 있는 백발
이 성성한 노대신(老大臣) 호돌(狐突)의 목을 보고 탄식한다.
" 임금이 겨우 군위에 오르자마자 필부에게 덕을 끼치지는 못하고 노대신을 저렇듯 죽였으니 그의 앞날이 멀지않으리라!"
그날로 태복(太卜) 곽언(郭偃)은 병들었다 핑계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호돌(狐突)의 심복 부하는 즉시 진(秦)나라로 달아나 이 슬픈 사실을 호모,호언 형제에게 고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호모(狐毛) 호언(狐偃) 형제는 공자 중이(重耳)를 모시고 진(秦)나라에 있으면서도 늘 늙은 아버지를 잊지못했다. 부친이
어(御)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이었다. 그들 형제는 가슴을 치며 방
성통곡했다. 조쇠(趙衰). 구계(臼季) 등이 다 몰려가서 그들을 위로하며 조쇠(趙衰)가 이르기를
" 세상을 떠난 어른은 다시 살아오실순 없소이다.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겠소. 우리 함께 공자께 가서 앞일을 상의합시다."
그제야 두 형제는 눈물을 거두고 조쇠등과 함께 중이(重耳)에게 갔다.
호모(狐毛)가 중이(重耳)에게 아뢴다.
" 이오(夷吾)는 죽고 어(御)가 즉위하여 진(晉)나라 망명자들을 모조리 소환령을 내려놓고 기한내에 불러들이지 못하면
그 부모친척 모두에게 죄를 묻겠다 하는 명령에 신의 늙은 아비가 거절하시다가 참형을 당하셨다 하옵니다."
호모 형제는 가슴이 터질듯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또다시 슬프게 통곡했다. 중이(重耳)가 결연히 말한다.
" 그대들은 과도히 상심하지 마오. 내 본국에 돌아가는 날이면 반드시 그대들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소."
공자 중이(重耳)는 즉시 수레를 타고 궁으로 들어가 진목공(秦穆公)에게 진(晉)나라의 어지러운 내정(內政)을 호소했다.
진목공(秦穆公)이 대답한다.
" 이는 하늘이 진(晉)나라를 공자에게 주심이요. 이제 때는 점점 다가오는구려. 과인이 공자를 위해 앞날의 일을 맡겠소."
곁에 있던 조쇠(趙衰)가 진목공(秦穆公)께 아뢴다.
" 군후께서 우리 공자를 도우실 생각이시면 속히 일을 도모하소서. 어(御)가 개원(改元)하고 태묘(太廟)에 고하면 임금과
신하의 구별이 정해집니다. 그리되면 더욱 일이 어지러워질 것 같습니다."
" 과인(寡人)은 결코 그 말을 잊지 않겠소." 하고 진목공(秦穆公)은 굳은 결의를 표명했다.
망명객(亡命客) 45
중이(重耳)출군(出軍)의 깃발을 들다.
<영웅득시(英雄得時)요 맹호입산(猛虎入山)이요 청룡득운(靑龍得雲)이란 말이 모두 운대와 맞는 상승의 의미를 뜻한다.
영웅이 때를 만난다... 맹호가 산에 들어선다 .....청룡이 구름을 얻는다....는 말은 모두가 승승장구의 운세를 일컫는다.>
공자 중이(重耳)는 진목공(秦穆公)과 혜어져 궁을 나와 사저로 돌아갔다. 의관을 벗고 앉으려는데 수하가 들어와 아뢴다.
" 지금 문밖에 진(晉)나라에서 왔다는 어떤 사람이 공자께 비밀히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즉시 들라 하여라.!
어떤 사람이 안내를 맏고 들어와 공자 중이에게 절하고 나자 공자 중이(重耳)가 묻는다.
" 그대의 성명은 누구이며 또 할 말이란 무엇인가?"
" 신(臣)은 진(晉)나라 대부 난지(欒枝)의 아들 난돈(欒盾)입니다. 지금 군위에 오른 어(御)는 시기심이 많고 사람 죽이는
걸로 위엄을 세우려 하여 백성들은 원성이 자자하며 신하들은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여 신의 아비가 신을 공자께
보냈습니다. 지금 어(御)에게 심복이라야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 두 놈뿐입니다. 지난날의 신하 극보양(郤步揚)
한간(韓簡) 등 노대신들도 어(御)에게 푸대접받고 있는 실정이며 그 나머지 대신들에 대해선 아무 염려 없사옵니다.
지금 신의 아비 난지(欒枝)는 비밀히 무사들을 모아두고 그저 공자께서 본국으로 돌아오시기만 하면 내응하려고 만반
의 준비를 갖추고 있사옵니다."
이 말을 듣자 공자 중이(重耳)가 크게 기뻐하며
" 내년 봄엔 내 결단코 강을 건너가 고국산천에 발을 들여놓을 작정이다. 잠시 그때까지 기다리라."
하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난돈(欒盾)은 여러가지 입장상 타국에 지체할 몸이 못된다 하면서 그날로 돌아갔다.
중이(重耳)는 하늘을 향해 축원하고 시초(蓍草)를 뽑아 점을 쳤다. 나온 점괘는 태괘(泰卦) 육효(六爻) 안정(安靜)이었다.
중이는 자기가 뽑은 점괘를 의심하고 호언(狐偃)을 불러 물었다. < 여기서 점이란 周易에 입각한 심오한 철학이다.>
" 이 괘의 길흉을 풀어보오." 호언(狐偃)이 괘를 보더니 일어나 중이(重耳)에게 너부시 절하고 아뢴다.
" 이는 하늘과 땅이 서로 합치니 작은 것은 가고 큰 것이 온다는 뜻입니다. 공자께서 이번에 한 번 가시면 나라를 얻을 뿐
만 아니라 천하 모든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실 괘이옵니다."
중이(重耳)는 본국으로부터 난돈(欒盾)이 왔다간 사실을 이야기 했다. 이 말을 듣고 호언(狐偃)이 급히 권한다.
" 주공께선 내일 다시 진후(秦侯)를 찾아뵙고 군사를 빌려달라 청하십시오 일이란 늦어지면 탈이 나옵니다."
이튿날 공자 중이(重耳)는 다시 궁으로 들어가 진목공(秦穆公)을 뵈었다. 진목공이 중이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말한다.
" 과인은 공자가 한시 바삐 귀국하고 싶어하는 심정을 잘 아오. 그러나 이런 일이란 신하들에게만 맡길 수 없는 일인지라
과인은 마땅히 공자를 황하(黃河)까지 전송할 생각이요."
중이(重耳)는 진목공(秦穆公)에게 배사(拜謝)하고 궁에서 물러나왔다.
비표(丕豹)는 진목공(秦穆公)이 공자 중이를 진(晉)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말에 자기가 선봉이 되어 돕겠노라 자청했다.
진목공(秦穆公)이 비표(丕豹)의 청을 흔쾌히 허락하며 매사에 신중을 기하라. 이른다.
태사(太師)가 출발할 날짜를 간택하니 겨울 12월 초사흘이 길일이라 그 날을 출군(出軍) 날짜로 정했다.
진목공(秦穆公)은 구룡산(九龍山)에다 크게 잔치를 베풀고 공자 중이(重耳)의 출발을 미리 축복해주었다. 잔치 자리에서
진목공은 중이에게 하얀 구슬(白璧) 열 쌍과 말 400필과 심지어 수레에 칠 장막과 자리와 모든 기물(器物)까지 내주었다.
그러니 양식과 마초(馬草) 따위야 더 말할 것도 없이 풍족했다.
또, 조쇠(趙衰) 등 중이의 신하 아홉명 대부(大夫)들에게도 각기 하얀 구슬 한쌍과 말 네 필씩을 하사했다. 이렇듯 최고
의 예우와 융숭한 대접과 물건을 받은 중이(重耳) 일행은 두 번 절하고 사저로 돌아갔다.
마침내 태사가 택일한 12월 3일이 되었다. 진목공(秦穆公)은 친히 모신(謨臣) 백리해(白里奚)와 요여(繇余)와 대장군
(大將軍) 공자 칩(칩)과 공손지(公孫枝)와 비표(丕豹) 등을 거느리고 병거 400승을 일으켜 호위를 받으며 공자 중이
(重耳)와 함께 옹주성(雍州城)을 떠나 당당한 위세를 드날리며 호호탕탕히 동쪽을 바라보고 진군해 나아갔다.
(칩:執자 아래糸)
진(秦)나라 세자 앵(罃)은 그간 중이(重耳)와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래서 세자 앵(罃)은 좀체로 돌아서질 못하고 드디어
위양(渭陽) 땅까지 중이(重耳)를 다라갔다. 위양(渭陽) 땅에서 그들은 서로 눈물을 흘리며 작별했다. 후인이 시를 지으니
猛將精兵似虎狼 (맹장정병사호랑) 용맹한 장수와 군사가 다 범 같은데
共扶公子立邊疆 (공부공자입변강) 그들은 함께 공자를 부축하고 국경선에 이르렀도다.
懷公空自誅狐乭 (회공공자주호돌) 진회공은 공연히 호돌을 죽였지만
隻手安能掩太陽 (척수안능엄태양) 한쪽 손으로 어찌 태양을 가릴 수 있으리요.
때는 바로 주양왕(周襄王) 16년이었으니 진회공(晉懷公) 원년(元年) 춘정월(春正月)의 일이라!
기원전 635년, 지금으로 부터 되짚어 2,648년전에 저 서중국 시안쪽에서 대륙의 중원으로 들이치는 거대한 바람이었다.
江村評論
이제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는 처갓집인 진(秦)나라 임금 진목공(秦穆公)의 강력한 후원을 바탕으로 군대와 물자의
지원을 받으며 고국으로 되돌아 간다. 어찌 감개무량 않으리요. 이제야 장장 19년간의 모진 망명생활도 막을 내린다.
여기서 원년(元年)이라 함은 첫해를 말함이요 춘정월(春正月)은 음력 1월을 말함이니 곧 이맘때이다.
그러고 보니 만고충신 개자추(介子推)가 불타죽을 날도 얼마남지않았다. 저 유명한 한식(寒食) 말이다. 슬프지 아니한가?
망명객(亡命客) 46
장래를 보장 받으려는 공신들의 모습에 개자추, 개탄을 금치 못하다.
진목공(秦穆公)과 진(晉)나라공자 중이(重耳)는 황하 언덕에 도착했다. 유유히 흐르는 황하 백사장엔 이미 진(晉)나라로
건너갈 군선(軍船)들이 일렬로 대기하고 있었다. 진목공(秦穆公)은 다시 잔치를 베풀어 그 자리에서 황하를 굽어보면서
중이(重耳)와 대작하는 가운데 은근히 부탁한다.
" 공자는 고국에 돌아갈지라도 우리 부부를 잊지 마오."
공자가 대답했다.
오매(寤寐:잠이드나 깨나)에도 잊지 못하던 고국에 이제야 돌아가게 된 것도 다 군후의 은덕이온대 어찌 잊사오리까."
드디어 진(秦)나라 장수 공자 칩과 비표(丕豹)가 군사 반을 나누어 거느리고 공자 중이(重耳)를 호위하고 황하를 건넜다.
진목공(秦穆公)은 돌아가지 않고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하서(河西) 땅에 주둔하면서 공자 중이(重耳)가 무사히 고국에
돌아가 군위(君位)에 오르기를 축원(祝願)했다. 그는 일이 여의치 않을시 즉각 군사를 진(晉)나라로 들이칠 작정이었다.
과연 좋은 소식이 올 것인가 ?
< 훗날을 보장 받으려는 공신들의 야심에 실망하는 개자추>
호숙(壺叔)은 공자 중이(重耳)가 고국에서 망명할 때부터 공자의 행리(行李)를 맡아보던 사람이다. 망명의 길에 오른 이
래 조(曹)나라와 위(衛)나라로 두루 돌아다닐때 배고프고 굶주린 것이 몇번이던가. 그땐 모두가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 한술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던 신세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에야 고국산천을 바라보고 가게되었다.
호숙(壺叔)은 모든 행장을 수습했다. 하다못해 전날 고생하던 때 쓰던 구멍난 옹기솥에 깨진 질그릇에 구멍난 돗자리와
찢어진 수레의 휘장까지 버리지 않고 일일이 배로 옮겨 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먹다 남은 술찌꺼기까지 단지에 가득 넣어 마치 보물단지 처럼 배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이를 보고 중이(重耳)가 한바탕 웃으면서 호숙(壺叔)에게 말한다.
" 내 이제 고국에 돌아가면 임금이 되어 진수성찬만 해도 다 먹질 못할 터인데 저런 구질구질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가지
고 가서 무엇에 쓰겠느냐. 호숙아 그것들을 백사장에 내다버려라."
호숙(壺叔)은 울상이 되어 내버릴 생각은 아니 하고 공자를 바라만 본다.
공자 중이(重耳)가 군사들을 돌아보며 분부한다. " 저 너절한 물건들을 다 내다 버려라."
진(秦)나라 군사들은 공자 중이(重耳)의 분부를 받고 호숙(壺叔)이 갖다놓은 물건을 다시 황하 언덕에 내려놓았다.
이를 보고 호언(狐偃)이 혼잣말로 탄식한다.
" 공자가 아직 부귀를 누리기도 전에 빈천했던 지난날을 잊었구나. 다음날엔 새것을 사랑하고 옛것을 버릴 것이다. 그땐
지금껏 함께 고생해온 우리를 저 옹기솥이나 질그릇처럼 대하겠지... 하지만 19년 동안이나 고생한 지난 일을 헛되이 버
릴 수는 없다. 이제 황하를 건너기 전에 공자와 모든 인연을 끊으리라. 그렇게라도 해야 다음날에 서로 잊지않고 생각날
때가 있겠지. "
호언(狐偃)은 공자 중이(重耳)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진목공(秦穆公)으로 부터 받은 흰 구슬 한 쌍을 공손히 바쳤다.
" 공자께서는 이제 이 황하만 건너시면 진(晉)나라 경계에 들어서시며 국내에선 만백성과 문부백관이 기다리는 가운데 밖
으론 진(秦)나라 장수와 군대가 공자를 도우니 새삼스럽게 진(晉)나라를 얻지못할 염려는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매 이제
신은 더이상 공자를 모신대야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존재오니 바라건대 신은 이곳 진(秦)나라에 머물러 국외의 신하가
되고져 합니다. 신이 가지고 있는 이 구슬 한 쌍을 바치고 공자와 작별하는 뜻을 표합니다." 한다.
공자 중이(重耳)가 크게 놀라 외친다.
" 나와 그대는 고생 끝에 이제야 함께 부귀를 누리게 됐는데 이게 무슨 말이오?"
호언(狐偃)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 신은 지금까지 공자께 세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신은 더 이상 공자를 보실 수 없습니다. "
" 세가지 죄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 신이 듣건대 성스러운 신하는 그 임금을 높이며 어진 신하는 능히 그 임금을 편안케 한다 하옵니다. 하오나 지난날 불초
신은 공자로 하여금 오록(五鹿)에서 극심한 허기를 격게하여 농부들로 부터 갖은 곤란을 격게 하였으니 그 죄 하나이며
또한, 조(曹), 위(衛) 두나라 임금으로부터 갖은 천대를 받게 하였으니 그 죄 둘이며, 술에 취한 공자를 몰래 수레에 싣고
제(齊)나라를 빠져나와 공자를 진노케 하였으니 그 죄 셋입니다.
오늘에까지야 공자께서 천하열국을 망명중이셨기에 신이 감히 곁을 떠날 수 없어 모셨습니다만 이제 고국으로 돌아 가
시게 되었습니다. 신(臣)은 그간 장구한 세월 분주했던 관계로 여러번 놀란 넋이 이젠 거의 꺼질것만 같고 심신(心身)이
모두 소모되어 마치 저 구멍난 솥과 같사온바 부서진 그릇을 다시 상위에 올릴수 없사오며 찢어진 돗자리를 다시 펼수
없듯이 신이 있대서 득될 것도 없고 신이 떠난대서 손될것도 없사와 그러하오매 신은 공자 곁을 떠나고져 하옵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 중이(重耳)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그대가 나를 이렇게 심히 꾸짖는 것이 마땅하고 또 마땅하다. 이는 나의 잘못이었소. 호숙아 ! 저 백사장에 내버린 그 폐
물들을 다시 배 안으로 들여놓아라!"
공자의 분부를 받고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백사장에 내다버린 그 폐물들을 다시 배 안으로 옮겨놨다.
공자 중이(重耳)는 넘실대며 흘러가는 황하를 굽어보며
" 내 고국에 돌아가서 그대의 그런 고생을 잊는다든지 그대가 나와 함께 한마음으로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느 쪽이
든 그 자손들이여 불행하라 ! 그 자손들이여 불행하라 !." 맹세 하고는 또 구슬을 들어
" 황하(黃河)의 신이여 ! 나의 맹세를 증명하라 ! " 하고 흐르는 강물에 던졌다.
이때, 개자추(介子推)가 그 배 안에 있었다. 개자추는 공자와 호언이 서로 맹세하는 걸 보고 웃으면서 혼자 웃는다.
" 공자가 이제 고국에 돌아가게 된 것은 누구의 공인가? 다만, 하늘의 뜻이거늘 호언은 자기의 공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렇듯 부귀를 탐하고 도모하는 자들과 함께 벼슬을 산다는 것은 나의 수치로다. "
이때부터 개자추(介子推)는 은퇴할 생각을 굳혔다.
江村評論
⑴ 호숙(壺叔)에 대하여
호숙(壺叔)은 행리(行李)를 맡은 사람이니 오늘날로 치면 아마도 비서실장 같은 역할이겠다. 갖가지 물품까지도 조달
하고 챙겨야 하는 어려움도 컸을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의 주군이 임금이 되어가는 마당에 왜 그 허접한 것들을 고이
고이 챙겼을까 ? 거기엔 물자를 아끼는 마음때문에, 그런 평상시의 생활이 몸에배서 그랬을까 ?
아니다. 강촌(江村)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것도 다 자신의 처지와 그 물건들을 같은 선상에서 본 것이었다.
⑵ 호언(狐偃)에 대하여
호언(狐偃)의 부친 호돌(狐突)은 진(晉)나라의 국구(國舅)로 나라에 끼친 공로와 명망이 높았으며 진혜공 어(御)에게
끝까지 항거하다 죽은 영웅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형 호모(狐毛)와 함께 중이(重耳)를 모신 특출한 문신들이다.
하지만, 그가 왜 유독 중이의 눈에 들었으며 줄곳 좋은 계략은 조쇠 아니면 그에게서 나왔던가 ?
그것은 그의 재주도 좋았지만 국내에 남아있는 호돌(狐突)의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중이는 내내 그에게
계책을 물은적이 많았던거다. 결코 개자추(介子推)등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재주가 뒤어났던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 남았다.
왜 호언(狐偃)은 깨지고 찢어진 허접쓰레기들을 버리면 안되는양 중이(重耳)에게 들이댔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 넘처나는 비단에 금은보화에 여자에 무엇하나 부러울게 없는 왕에게 있어 하나도 쓸모없는 물건들이다.
그러니 고생할때 요긴하게 쓰던 물건을 새것이 생기니 버릴건 뻔한 일... 하면 신하들 역시도 젊고 똑똑한 신진세력들
을 기용하여 왕년의 고생하던 시절의 자신들, 이미 늙어버린 자신들도 그 처럼 버려지고 갈아치우는건 아닐까 그런 염
려와 또 아울러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나 할까 옛날부터 왕이 새롭게 등극하면 그 공신들이 저마다 세력을 키워 나
라를 망치는 예가 허다했는데 그런 문젯점을 미리 견제하려고 일부 공신들의 벼슬이나 권력을 반대편의 세력들에게
나누어 견제시키는 정책을 많이 써왔는데 아마도 호언은 이런 모든 염려를 한꺼번에 단판지으려 했던것이 분명하다.
결론은 고생도 많이 했으니 당신이 임금이 돼도 날 끝까지 버리지 말고 높이 써 달라는 주문이었다.
대통령 선거에 옛날부터 당선자를 보필하며 대선도 승리로 이끈 사람이라 하여 다 출세시킨다면 그 나라는 과연 어찌
되겠는가 ? 그와 같은 논점에서 본다면 호언이 비록 재주있는 선비였으나 그다지 군자답지 못하다는 나의 결론이다.
⑶ 개자추(介子推)에 대하여
이 분에 대한 설명은 이 글이 전개되면 곧 알게 되듯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선비중의 선비다. 물론 벼슬을 마다
하고 은거를 해야만 참된 선비냐고 반문하겠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한가지 분명한 변치않는 정신이 있었다.
임금을 보필하되 충(忠)으로써 목숨을 걸며 어버이를 봉양하되 효(孝)로써 행한다.
그러나 신하는 어떤 경우라도 주군(主君)의 주위를 맴돌며 벼슬과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는 옳곧은 정신이 그에게는
있었기에 임금이 불러 벼슬을 주면 혼신을 다하여 국사에 매진할 것이고 자신이 아니라도 더 좋은 재목을 얻어 기용하
면 임금과 나라의 복이라 여겼던 선비였다. 그러한 그가 어찌 저들, 호숙이나 호언따위와 같다 하겠는가 ?
자신의 살을 베어 중이를 먹여 허기를 면하게 해 주었던 인물 .... 그가 이제 동지(冬至)로 부터 105일째 되는날 그날
만고의 충신 개자추(介子推)는 불타 죽게될 것이다. 바로, 4월 5일 한식(寒食)날이 그렇게 출현하게 된 배경이다.
한식날은 개자추의 죽음으로 부터 생겨난 절기이며 2,700 여년동안 전해오는 충신을 기리는 제삿날이기도 하다.
망명객(亡命客) 47
이윽고 중이(重耳) 일행을 태운 배들은 황하를 건넜다. 무려 19년만에 고국 땅에 발을 딛은 공자 중이(重耳)는 동쪽 길로
들어서서 영호(令狐) 땅에 당도했다. 영호 유수(留守) 등혼(鄧惛)은 공자 중이(重耳) 일행이 진(秦)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걸 보고 깜짝놀라 성문을 닫아걸고 항거하자 진군(秦軍)은 물샘틈 없이 영호성을 포위했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공격했다. 비표(丕豹)가 가장 먼저 성벽에 뛰어올라 용맹을 떨쳤고 얼마후 성은 함락되었다.
그리고는 사로잡힌 유수 등혼(鄧惛)을 목베고 그 나머지는 항복을 받았다.
그러자 그 인근의 고을 상천(桑泉), 백쇠(白衰) 두 고을이 공자 중이 일행을 보기가 무섭게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해왔다.
세작(細作)이 재빨리 강주(絳州)로 달려가 이 사실을 진회공(晉懷公)에게 고하니 크게 놀란 진회공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여이생(呂飴甥)은 대장이 되고 극예(郤芮)를 부장으로 삼아 여류(廬柳) 땅에다 군사를 둔치고 진군(秦軍)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진(秦)나라 군사들은 참으로 무서운 강병(强兵)들이었다. 진(晉)나라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벌벌 떨기시작했다.
한편, 공자 칩은 진목공(秦穆公)의 명의로 서찰을 써서 여이생과 극예의 군중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 글에 하였으되.
" 과인은 지금껏 진(晉)나라에 극진한 덕을 베풀었다. 헌데 그 은혜를 입은 아비도, 그 자식도 우리 진(秦)나라를 원수로
여겨왔도다. 과인은 그 아비만은 참았지만 이제 그 자식까지 참을순 없노라. 이제 공자 중이(重耳)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의 어진 덕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바라 하늘과 사람이 서로 중이를 돕고 백성들의 인심이 또한 그에게 모였도다.
이에 과인이 친히 대군을 호령하여 하상(河上)에 둔치고 칩에게 명하여 중이(重耳)를 모셔다 진(晉)나라의 사직(社稷)을
맡게 하기까지 돕도록 명하였노라. 그대들 대부(大夫)는 듣거라. 그대들이 과연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분별 할줄
안다면 즉시 창을 버리고 나와 공자 중이를 영접하여라. 그대들이 전화위복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뿐인가 하노라. "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서신을 다 읽고나서 넋나간 사람처럼 말이 없다. 싸울 것인가. 그러나 진군(秦軍)은 너무
나 강하다. 지난날 용문산(龍門山) 싸움에서 겪지 않았던가. 이건 도저히 안되는 싸움이다 ... 그러면 항복 해야 하는가 ...
그러면 중이(重耳)가 과연 자기들을 좋게 보아줄 것인가 ? 아닐것이다. 아마도 이극(里克)과 비정보(丕鄭父)의 원수부터
갚아주려 할 것이고 ... 그럼 우리는 어찌 되는가 ?"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이렇게 한참동안 결정을 못짓고 주저만 하다가 서로 상의하고 공자 칩에게 답장을 썼다.
" 우리는 누구보다도 공자 중이(重耳)께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맘 속으론 공자를 임금으로 모시고싶은 것이 저희
들의 소원인바 모쪼록 망명했던 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궁중에 설수 있도록 서로 해치지 않겠다는걸 대부께서 책임
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분부하신 대로 좆겠습니다. " 했다.
공자 칩은 답장을 읽고나서 그들이 신변을 염려하고 있슴을 알고는 즉시 홀로 수레를 몰아 여이생과 극예를 만나 그들의
요청을 듣고 극력 애쓰겠노라 약조하는 한편, 그들의 군대를 여류(廬柳)에서 순성(郇城) 땅으로 후퇴시키도록 했다.
공자 칩은 돌아가 중이(重耳)의 허락을 받고 이번엔 호언(狐偃)과 함께 순성으로 가 여이생과 극예를 만나 맹세했다.
맹세를 마친 그들은 다 함께 백쇠(白衰) 땅으로 가 공자 중이(重耳)를 영접했다.
이리하여 공자 중이(重耳)는 출영(出迎:마중)을 받으면서 곧장 순성(郇城)으로 나아갔다.
한편, 진회공(晉懷公)은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로부터 승전(勝戰)의 소식만 있기를 고대하던중 조바심에 발제
(勃鞮)에게 명하기를 속히 여이생과 극예에게 달려가 싸움을 독촉하도록 일렀다. 그러나 발제(勃鞮)는 가는 도중에서
이미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가 군사를 순성으로 후퇴 시켰고 호언과 공자 칩과 강화를 맺고 진회공(晉懷公)에게
반역하는 동시 공자 중이(重耳)를 영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진회공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진회공(晉懷公)이 대경실색하여 분부한다.
" 속히 극보양(郤步襄), 한간(韓簡), 난지(欒枝)),사회(士會) 등 일반조신들에게 속히 입궐하라 일러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자 중이(重耳)가 입성 하기만을 기다리는 인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난날 진회공이 여이생과
극예만 신임하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인데 이제와서 진회공에게 충성 할리 없었다. 그들은 한명도 아니갔다.
대신들을 데리러 갔던 사람들이 모두 헛탕만 치고 돌아오자 진회공(晉懷公)이 길이 탄식하며
" 내 지난날 고국으로 몰래 도망왔기 때문에 진(秦)나라의 미움을 받아 오늘날 이렇게 되었구나."
시인(侍人) 발제(勃鞮)가 이미 사세가 이리되었으니 어서 몸을 피하자 하여 진회공은 고량(高梁) 땅으로 몸을 피하였다.
한편, 공자 중이(重耳)는 드디어 진(晉)나라 군중(軍中)으로 들어가 좌정하자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가 나아가 무
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그러자 공자 중이는 사죄하는 그들을 좋은 말로 위로하니 타국을 떠돌던 조쇠등
여러 신하들도 조금도 앞날을 염려말고 함께 한마음으로 새임금을 모시자 하며 위로하니 여이생과 극예가 기뻐했다.
다시, 공자는 곡옥(曲沃)으로 가 무공(武公)의 사당에 절하고 고국에 돌아왔슴을 고했다. 이때 진(晉)나라 도읍 강성(絳
城)에서 극진(郤진)을 선두로 사회(士會),주지교(舟枝僑).,양설직(羊舌職) 순림보(筍林父), 선멸(先蔑),기정(箕鄭), 선도
(先都),등 30여명의 옛 신하들이 공자 중이를 영접하려고 곡옥(曲沃) 땅으로 달려왔다.
그후 극보양(郤步陽), 양유미(梁由靡), 한간(韓簡), 가복도(家僕徒) 등은 강성(絳城)교외에 나와서 공자 중이를 영접해 궁
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그 날로 공자 중이(重耳)가 진(晉)나라 군위에 등극하니 그가 바로 저 유명한 진문공(晉文公)이다.
돌이켜 보건대 공자 중이(重耳)는 43세 때 망명길에 올라 책나라로 가서 12년을 머물고, 55세 때 제(齊)나라에 가서 6년
을, 다시 61세에 초(楚)나라에 망명했으며 그해에 다시 진(秦)나라에 가서 진목공(秦穆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가 고국 진(晉)나라에 돌아와 임금자리에 올랐을 때가 62세였으니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었다.
군위에 오른 진문공(晉文公)은 사람을 보내 고량땅에 숨어있는 진회공(晉懷公)을 죽였다.
진회공은 주양왕 15년 9월에 군위에 올라 이듬해 2월에 죽기까지 겨우 6개월도 못되는 동안 임금 노릇을 했다.
어찌 사람의 일이란게 이토록 허무하단 말인가. 고작 그 세월을 위해 그랬더란 말인가 ...
시인(侍人) 발제(勃鞮)는 몰래 진회공(晉懷公)의 시신을 수습해서 햇볕 잘 드는 산기슭에 묻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망명객(亡命客) 48
발제(勃鞮)의 고변(告變)과 진문공의 피신
한편 진문공(晉文公)은 잔치를 베풀고 진(秦)나라 장수 공자 칩과 진(秦)나라 군사들을 크게 대접했다.
이때, 비표(丕豹)가 땅에 엎드려 진문공(晉文公)에게 절하고 흐느껴 울면서 청한다.
" 청컨대 억울하게 죽은 신의 아비 비정보(丕鄭父)의 무덤을 다른 좋은 곳으로 천장(遷葬)하게 해줍시요."
진문공(晉文公)이 추연한 안색으로 비표의 소원을 허락하며 청하기를
" 그대의 고국은 우리 진(晉)나라이니 앞으로 과인을 돕고 이 나라에서 벼슬 살기를 바라노라."
< 비표의 아비 비정보는 앞서 여이생과 극예에게 죽음을 당했고 비표는 그후 진(秦)나라로 건너가 진나라 대부가 됐다.>
비표(丕豹)가 사양한다.
" 신은 이미 진(秦)나라 궁정(宮廷)에 몸을 맡겼나이다. 감히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나이까."
비표(丕豹)는 부친의 묘소를 옮기고 공자 칩을 따라 하서(河西)로 돌아가 진목공(秦穆公)을 뵙고 그간의 일을 보고했다.
진목공(秦穆公)은 공자 중이(重耳)가 무사히 진(晉)나라 군위에 올랐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안심하고 회군(回軍)했다.
사관(史官)의 시에 전하기를
轔轔車騎過河東 (린린거기과하동) 요란한 수레와 말발굽 소리 하동 땅을 지나니
龍虎乘時氣象雄 (용호승시기상웅) 영웅이 때를 얻어 그 기상 웅장하도다
假使雍州無義旅 (하사옹주무의려) 의를 위해 진(秦)나라 군사가 출병하지 않았으면
縱然多助怎成功 (종연다조즘성공) 많은 도움을 받았을지라도 어찌 성공하였으리요.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진(秦)나라 위세에 눌려 비록 공자 중이(重耳)를 영접했지만 마음은 늘 불안했다. 더구나
타국에서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돌아온 망명파들을 대할 때마다 기를 펴지 못하였는데 더하여 진문공(晉文公)은 즉위한 이
후 그들의 벼슬을 올리지도 깎지도 않았다. 여이생과 극예는 아무리 살펴봐도 진문공의 속을 측량할 길이없어 불안했다.
그래서 두놈은 작당하여 그들의 문하에 드나드는 무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진문공(晉文公)을 죽이고 다른 공자
(公子)를 군위에 세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는 발제(勃鞮)를 끌어들이기로 약속하고 그를 찾도록 했다.
어느날 밤 발제(勃鞮)가 그들을 찾아왔다. 여이생(呂飴甥)은 반가이 그를 맞이하고 장차 궁에 불을 지르고 중이를 죽일
계책을 말해주자 발제(勃鞮)는 흔연히 그들의 동지가 되어 그날밤 세사람은 입술에 피를 바르고 굳은 맹세를 나눴다.
마침내 그들은 2월 그믐날 한밤중에 일제히 거사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발제(勃鞮)는 역모에 가담하겠다고 승낙은 했지만 속 생각은 딴판이었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린다.
" 애초에 내가 진헌공의 명을 받고 포성(蒲城)에 가서 담을 넘는 중이를 죽인다는것이 잘못해서 소매만 끊어왔고, 그 담엔
진혜공의 명으로 자객이 되어 중이를 죽이려 책나라에 갔다가 실패하고 왔으니 나와 중이는 전생부터 이 무슨 인연일
꼬. 그러나 그건 다 그때의 임금을 위해서 명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이제 진회공도 죽었고 나라도 안정되었는데 내가 또
다시 대역무도한 일에 끼다니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구나. 내가 두 번씩이나 그를 죽이려 할 때마다 실패한걸 보면 하늘
이 그를 돕고 있슴이 분명하다. 또 그를 따르며 만고풍상을 겪은 신하들 모두가 출중하기 이를데 없다. 내가 만일 중이
를 죽인다 해도 그들이 과연 나를 내버려둘까? 아니다... 이래서는 안된다.
그렇다. 내 이제 중이에게 가서 모든걸 고해바치고 그 공로로 부귀를 누리는게 상책일 것이다."
발제(勃鞮)는 그렇다고 궁으로 곧장 갔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중죄인이다. 그는 어두운 밤중에 호언(狐偃)을 찾아갔다.
호언(狐偃)이 깜짝놀라며
" 네가 웬일이냐 ? 너는 주상께 죄를 많이 지은자로 멀리 달아나 숨을 생각을 않고 어찌 나를 찾아 왔더란 말이냐?"
발제(勃鞮)가 공손히 대답한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새 임금금을 뵙기 위해서오니 국구(國舅)께서 궁으로 저를 데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 네가 제정신이냐? 그건 마치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이다. 너는 주공을 뵙는순간 죽는 목숨인걸 모르느냐?"
" 저는 지극히 중대한 비밀을 아뢰려 합니다. 곧 나라의 흥망이 달린 사안이오니 반드시 주공을 뵈어야만 말하겠습니다."
이에 호언(狐偃)은 발제(勃鞮)를 데려다 궁 밖에 머물게 하고 먼저 진문공(晉文公:중이)에게 들어가 온 뜻을 밝혔다.
" 그런 놈에게 무슨 나라를 구할만한 말을 듣겠소. 공연히 그런 핑계를 대고 나를 만나려는 수작일게요. 경이 처리하구려"
" 성인(聖人)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의 말도 가려 쓴다고 합니다. 주공께선 새로 군위에 오르신지 얼마 안되었으니 지난
날의 조그만 분노를 버리시고 널리 의견을 받아 들이셔야 합니다. 그러니 직접 만나소서."
진문공(晉文公:중이)은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 근시하는 환관을 불러 분부하기를 발제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거라."
" 네가 나를 죽이려다 소매만 끊은 옷이 여기있다. 그후 또 너는 과인을 죽이려고 책나라까지 왔었지. 내 지난 일들을 생
각만 해도 너를 용서할 수가 없거늘 오히려 찾아오다니. 어서 먼곳으로 달아나지 않으면 중형을 면치 못하리라." 했다.
발제(勃鞮)가 이 소리를 전해듣고 소리높여 웃으며 말한다.
" 주공은 19년간이나 타국을 방황했으면서도 아직도 세상물정을 모르시니까. 선군(先君) 헌공(獻公)은 주공의 아버지시
며 혜공(惠公)은 주공의 동생이십니다. 그래, 아버지가 그 아들을 원수로 삼고, 동생이 그 형을 원수로 여긴 것은 꾸짖지
않으시고 이 보잘것 없는 발제만 책망하십니까. 소신 발제는 그 당시 헌공, 혜공만을 임금으로 알았지 어찌 또 다른 임
금이 있을줄 생각인들 했겠사옵니까. 신하는 그저 임금이 명하면 죽음으로 따르는것이 춘추의 이치 아니옵니까?
저 제(齊)나라 관중(管仲)이 제환공(齊桓公)을 죽이려 했건만 오히려 제환공은 관중을 높이 써 천하맹주가 되었슴을 주
공께선 진정 모르시니이까? 다만, 臣이 떠나고 나면 머잖아 주공에게 불행이 닥처오리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했다.
보다못한 호언(狐偃)이 발제(勃鞮)가 필시 중대한 극비사항을 알고 있는듯하니 그를 불러들여 만나보도록 진언하니 진문공(晉文公)이 발제를 불러들이라 명했다. 진문공 앞에 들어온 발제는 재배후 등극을 축하만 할뿐 한마디 사죄도 없다.
괘씸한 생각이 든 진문공(晉文公:중이)이 자신이 군위에 오른지도 오래되었고, 이제사 찾아온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발제(勃鞮)가 눈썹 하나 까딱 하지않고 대답한다.
" 주공께서는 비록 즉위하셨다지만 축하할 것이 못되옵니다. 신(臣)의 말을 들으셔야만 군위가 반석에 놓이십니다. 그러
므로 늦었지만 이제서야 축하해도 늦지 않았사옵니다." 한다.
진문공(晉文公)은 그 말을 괴상히 생각하고 좌의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물러가게 했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말해 보거라.
그러자 발제(勃鞮)는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가 역적모의를 꾸미고 있슴을 아뢰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 그 일당이 성내에 가득하게 퍼져 있습니다. 지금 그 두놈은 자기 고을에서 군사를 모으는중이오니 주공께서는 이 틈에
성을 빠져나가 진(秦)나라의 군사를 빌려오십시오 그래야만 저들을 평정할 수 있사옵니다. 신은 이곳에 남아 있다가 두
역적놈을 죽이는데 내응하겠사옵니다.
호언(狐偃)이 말한다.
" 사세가 급하옵니다. 신이 주공을 모시고 떠날것이오니 서두르소서. 국내의 일은 발제가 잘 처리할 것입니다. "
진문공(晉文公)이 정중히 부탁한다.
" 모든 일을 조심해서 하여라. 다음날 내 마땅히 중상(重賞)으로써 너에게 보답할 것이다."
발제(勃鞮)는 머리를 조아리고 궁에서 물러나갔다.
진문공(晉文公)과 호언(狐偃)은 서로 상의한후 호언은 수레를 궁성 뒷문에다 등대시키고 수행할 사람들을 뽑았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진문공(晉文公)이 비밀히 지시를 내리고 내용이 누설되지 않도록 거듭 강조해 당부했다.
그날 밤도 진문공(晉文公)은 평소나 다름없이 취침했다.한밤중 진문공은 일어나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어린내시에게
등불을 들려 측간(厠間)을 가는 체하다가 궁성 뒷문으로 나가 호언이 준비해둔 수레를 타고 무사히 성을 빠져나갔다.
이튿날 아침 궁중에는 주공이 병으로 누워 계신다는 말이 퍼졌고 여러 신하들이 병문안을 갔으나 아무도 만나주지 않겠
다는 주공의 명이 있다는 말만 거듭하는 내시들...조회(朝會)에 나온 문무백관들이 거듭 문안을 청하지만 수문관(守門官)
은 면조패(免朝牌)를 가리키며 주공께선 한질(寒疾)이 나셔서 거둥이 불편하시다면서 3월 초하룻날 대신들을 접견 하시겠다 하십니다. 할뿐 막아서고 말이없다. 하여 문부백관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체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들 갔다.
망명객(亡命客) 49
한편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진문공(晉文公)이 병으로 누워 있다는 것과 3월 초하루 조회에 나타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하늘이 자신들을 도와 중이(重耳)를 죽일 기회를 주고 있다며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이즈음, 진문공(晉文公)은 호언(狐偃)과 함께 미복으로 변장하고 진(晉)나라 경계를 벗어나 진(秦)나라로 들어갔다.
진문공(晉文公)은 곧 사람을 시켜 먼저 진목공(秦穆公)에게 밀서를 보냈다. 내용은 왕성 땅에서 서로 만나자는 것이었다.
밀서를 받아든 진목공(秦穆公)은 진문공(晉文公)이 미복으로 빠져나올 정도로 진(晉)나라에 변고가 있슴을 직감했다.
진목공(秦穆公)은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어가(御駕)를 왕성으로 향해 진문공(晉文公)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진목공(秦穆公)이 웃으며 위로하기를
" 천명(天命)은 이미 정해진바라. 여이생(呂飴甥) 극예(郤芮)의 무리가 한대야 무얼 하겠소. 내 생각엔 진(晉)나라 신하들
이 반드시 역도들을 무찌를 것이니 과도히 근심마오."
진(秦)나라 대장(大將) 공손지(公孫枝)는 항하 입구에 군사를 둔(屯)치고 각방으로 진(晉)나라 강성(絳城) 소식을 수소문
하며 언제든 진문공(晉文公)을 도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리하여 진문공은 당분간 왕성 땅에 머물렀다.
이즈음 발제(勃鞮)는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에게 혹 의심 받지나 않을까 해서 두려웠다.그래서 아예 발제(勃鞮)는
극예(郤芮)의 집에 기식(寄食)하면서 그들과 앞일을 상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발제의 배반을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드디어 2월 그믐날 발제(勃鞮)가 극예(郤芮)에게 말한다.
" 중이(重耳)가 조회에 나온다는 날이 바로 내일이요. 그러니 지금쯤이면 그의 병도 상당히 나았을 것이니 궁중에서 불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는 궁밖으로 나갈 것이 분명한즉, 여대부(呂大夫)는 앞문을 지키고 극대부(郤大夫)는 궁 뒷문을 지
키시면 나는 심복들을 거느리고 조문(朝門)을 점거하고 불을 끄러 오는 사람들을 막겠소이다. 이리하면 제아무리 중이
(重耳)가 날개가 돋쳤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요."
극예(郤芮)는 연방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여이생(呂飴甥)에게 가서 이 계책을 알렸다.
그날밤, 두 역적의 심복들은 각기 무기와 불씨를 가지고 미리 매복했다가 약속한 삼경무렵에 궁 사방에다 불을 질렀다.
난데없는 불길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자다가 깬 궁중 사람들이 갈팡질팡하며 밖으로 뒤쳐나가니 온통 시뻘건 불길사이로
흉기를 든 괴상한 놈들이 닥치는대로 뛰어다니며 " 중이는 달아나지 마라." 하며 외쳐대고 있었다.
궁중 사람들은 맹렬한 화마에 데이고 흉악한 난적들에게 팔다리를 끊기는 중상에 이곳저곳이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여이생(呂飴甥)은 칼을 뽑아들고 바로 침궁(寢宮)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진문공(晉文公)은 보이지 않는다.
이때 궁 후문으로 들어온 극예(郤芮)가 역시 침궁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는 여이생이 먼저 와 있는 걸 보고 묻는다.
" 놈을 없애 버렸소?"
여이생은 대답 대신 머리를 저으며 부정의 뜻을 표했다. 그들은 불길 속을 미친 개처럼 쏘다니며 낱낱이 뒤졌다. "
이때, 바깥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나며 동시에 발제(勃鞮)가 황망히 뛰어들어오면서 보고한다.
" 지금 호모(狐毛) 조쇠(趙衰) 난지(欒枝) 위주(魏犨)가 각기 부하를 거느리고 불을 끄러 몰려오고 있소이다. 이러다간 우
리까지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판이요. 이 혼란한 틈을 타 일단 성밖으로 몸을 피했다가 날이 샌 연후에 진후(晉侯)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보고 다시 앞일을 상의합시다. "
그러나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중이(重耳)를 죽이지 못한 터라 이미 안정을 잃고 초조했다. 사지가 굳어지는 듯
한 한기를 느끼며 입이 마르고 현기증이 났다. 그들은 일당을 불러모아 조문(朝門) 밖으로 달아났다.
사관(史官)이 그 때의 일을 시로 남겼다.
毒火無情殺械城 (독화무정살계성) 독한 불은 무정해서 궁성을 태웠으나
誰知車駕在王城 (수지거가재왕성) 뉘라서 알리요 임금이 이미 진나라에 가 있슴을
晉侯若泥留袂恨 (진후약니유몌한) 진후(晉侯)가 발제에게 원한을 버리지 않았던들
安得潛行會舅甥 (안득잠행회구생) 어찌 몰래 진나라에 가서 장인과 만났으리요.
호모(狐毛) 조쇠(趙衰) 난지(欒枝) 위주(魏犨) 등 대부들은 궁중에 불이 일어난 걸 보고 받자마자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불을 끄기에 여념이 없었고 날이 밝은 연후에야 불길이 잡혔다.
그제야 그들은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가 반역(反逆)한 것을 알았고 진문공(晉文公)이 없어졌슴을 알고 놀랐다.
이때, 불속에서 겨우 살아난 지밀(至密)내시가 대부들 앞에 가서 고한다.
" 수일 전에 주공께서 미복으로 변장하시고 궁을 나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자 조쇠(趙衰)가 말하기를 " 이 일을 호언(狐偃) 대부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오." 호모(狐毛)가 대답하기를
내 아우 언(偃)은 수일 전에 궁으로 들어간 이후 돌아오질 않았소. 아마도 주공을 모시고 어디로든 간 모양이요. 하여 주
공께선 두 역적놈이 역모를 꾸미고 있슴을 알고 계셨던 것같소.우리는 도성을 지키며 궁을 수리하고 주공을 기다립시다."
위주(魏犨)가 분을 삭이지 못해 말한다.
" 역적놈들이 궁에 불을 지르고 주공을 시해하려 했으니 그냥 둘수없소. 내게 군사를 내 주시요 그놈들을 죽여버리겠소."
조쇠(趙衰)가 위주(魏犨)를 타이른다.
" 군사(軍事)는 국가의 대권(大權)올시다. 주공께서 계시지 않는데 누가 맘대로 군사를 일으킬수 있겠소이까. 두 역적이
비록 달아나긴 했으나 머지않아 그 목이 떨어질 것이라 믿는바이요."
한편,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교외에 둔치고 각방으로 수소문해 보니 진문공이 죽지 않았으며 모든 대부들이 성
문을 굳게 닫고 지킨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웠고 어디로든 달아날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갈팡질팡 하는 그들에게 발제(勃鞮)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우리 진(晉)나라 군위는 모두 진(秦)나라가 정해 왔으니 진후(秦侯)를 찾아갑시다. 더구나 두분 대부는 진후와 잘 아는
터이니 궁에 불이나서 중이(重耳)가 타 죽었다고 말하고 공자 옹(雍)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세운다면 설령 중이가 죽지
않았다 해도 그가 다시 군위에 설 수는 없을것이오."
여이생(呂飴甥)이 대답한다.
" 지난날 진목공(秦穆公)과 우리는 왕성(王城)에서 맹약한 일도 있으니 오늘날 우리 형편으론 그리로 가는게 마땅하겠으
나 진목공(秦穆公)이 과연 우리를 용납할지 그것이 미심적소 그려." 발제(勃鞮)가 다시 그들을 유인한다.
" 그렇다면 내가 먼저 진(秦)에 가서 저편 의사를 떠보리다. 그들이 용납하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때 다시 정합시다."
발제(勃鞮)는 가벼운 걸음으로 진(秦)나라를 향해 갔다. 그는 곧바로 하서(河西)에 둔치고 있는 진(秦)나라 장수 공손지
(公孫枝)를 만나 그간의 경과와 앞으로의 계책을 의론했다. 공손지(公孫枝)가 거듭 머리를 끄덕이면서
" 역적놈들이 자진해서 이곳으로 오겠다면 잘 유인해서 잡아죽입시다. 어떻든 국법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소."
하고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 에게 보내는 서찰을 한 통식 써서 발제(勃鞮)에게 주었다. 그 서찰에 하였으되.
" 중이가 귀국으로 돌아갈때 임금자리에 앉게 되면 진(晉)나라 땅을 베어주겠다고 약조 했었소. 그래서 우리 주공께서는
소장으로 하여금 하서에 머물면서 새로이 설정될 경계를 밝히게 한 것은 중이가 지난날 진혜공 처럼 또 약속을 어길까
염려하신 때문이었소, 이제 귀국의 새 임금이 불속에서 나오지 못했고 또 두 대부께서 다음 임금으로 공자옹(雍)에게 뜻
을 가지고 있다하니 이는 우리 진후(秦侯)께서도 바라는바라, 두 대부는 속히 오셔서 앞일을 의논하시기 바라오." 했다.
발제(勃鞮)는 공손지(公孫枝)의 서찰을 받아 그 길로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를 만나 전하니 그 내용을 읽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마침내 발제(勃鞮)를 따라 진군(秦軍)이 주둔해 있는 하서(河西)로 갔다. 공손지(公孫枝)는 그들
을 친근하게 영접해 들이고 사흘동안을 잔치를 벌여 융숭한 대접을 했다.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눈꼽만치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요. 진목공(秦穆公)이 공손지
의 보고를 받고 다시 왕성에 와 있을줄이야.
망명객(亡命客) 50
기강지복(紀綱之僕) 그 아름다운 시원(始原)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 발제(勃鞮)가 공손지(公孫枝)에게 " 원컨대 귀국 군후(君侯)를 만나고싶소." 한다.
우리 주공께선 지금 왕성 땅에 와 계시요. 우리 함께 가십시다. 그러나 진(晉)나라에서 거느리고 온 군사들은 이곳에 그냥
머물러 있게 하시오. 두 대부가 다녀올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가 함께 황하를 건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한다.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멋도 모르고 그리 하겠노라 동의하고 공손지를 따라 하서(河西)를 떠나 함께 왕성에 당도
했다. 그리고 발제(勃鞮)는 공손지(公孫枝)와 함께 먼저 말을 달려 성안으로 들어가 진목공(秦穆公)을 뵈었다.
이에 비표(丕豹)가 진목공(秦穆公)의 분부를 받아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를 영접하러 나갔다. 그동안에 진목공
(秦穆公)은 병풍 뒤에다 진문공(晉文公)을 숨겼다. 이윽고 비표의 안내를 받은 두놈이 들어와 진목공께 절하고 아뢴다.
" 공자 옹(雍)을 진(晉)나라 군위에 모시고자 왔습니다."
진목공(秦穆公)이 대답한다. " 공자 옹은 이미 이곳에 와 있네."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가 일제히 다시 아뢴다. " 그럼 즉시 저희들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진목공(秦穆公)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 그야 어려울 것 없지. 자. 새 임금은 어서 이리로 나오시오."
하고 병풍 뒤 쪽을 향해 불렀다. 동시에 병풍 너머에서 한 귀인(貴人)이 일어섰다. 그 귀인이 병풍을 젖히고 걸어나온다.
그 순간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는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그 귀인은 바로 진문공(晉文公)이었기 때문이다.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 두 역적놈이 앞으로 푹 고꾸라지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외친다. " 살려 줍시요."
진목공(秦穆公)이 진문공(晉文公)을 맞이하여 나란히 함께 앉았다. 진문공(晉文公)이 큰 소리로 꾸짖는다.
" 이 간악한 역적놈아 ! 과인이 너희를 저버린 일이 없거늘 너희는 이찌하여 반역했느냐. 발제(勃鞮)가 미리 알려주어 궁
을 몰래 빠져나왔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이미 나는 재가 되었을 것이다."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가 발제(勃鞮)를 노려보며 발악을 한다.
" 이놈 ! 입술에 함께 피를 바르고 죽으면 함께 죽자고 맹세하지 않았더냐 ! "
진문공(晉文公)이 웃으면서 추상같이 말한다.
" 발제(勃鞮)가 만일 피를 바르고 함께 맹세하지 않았다면 어찌 너희들의 흉계를 알아낼수 있었겠느냐. 저 두놈을 잡아
내다 목을 끊어라 ! 발제(勃鞮)는 저 두놈을 참(斬)하는 것을 감시하여라 !"
무사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를 개 끌듯 끌어내갔다. 잠시 후 부사들은 선지피가 뚝뚝 흐르
는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 두놈의 대가리를 계단아래에 바쳤다.
참으로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었다.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로 인하여 지난날 여희(驪姬)의 간계로 태자 신생
(申生)을 죽게 하였고 그 이후 진(晉)나라는 진혜공(晉惠公) 진회공(晉懷公)을 거쳐오는동안 갖가지 나라의 좋지못한 일을 꾸민 간신역도(奸臣逆徒)들의 죽음이었으니 이 어찌 당연한 일이라 하지 않으리오.
발제(勃鞮)는 진문공(晉文公)의 분부를 받고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의 목아질 들고 하서 땅으로 가서 이번에 따라
온 그들 일당에게 내 보이고 좋은 말로 훈계했다.
한편, 진문공(晉文公)은 역적을 잡아죽인 것을 본국에 통지했다. 곧 진(秦)나라 장수가 이 소식을 진(晉)나라에 전했던 것이다. 진(晉)나라 모든 대부들이 이 기쁜 소식에 희색이 만면하여 말한다.
" 과연 호모(狐毛)의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았구나."
조쇠(趙衰)등 신하들은 황망히 법가(法駕)를 준비하고 하동(河東)으로 가서 진문공(晉文公)을 영접했다.
이처럼 진문공(晉文公)은 왕성(王城) 땅에서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를 처단하고 진목공(秦穆公)에게 감사했다.
" 친영(親迎)하는 예의를 갖추고 이번에 회영(懷瀛:진목공의 딸)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진목공(秦穆公)은 사위가 딸을 데려가겠다는 청을 듣고 기쁘긴 했지만 겸사한다.
" 내 여식이 이미 자어(子御:죽은 진혜공)에게 몸을 맡긴 일이 있었던만큼 귀국 종묘에 혹 욕이나 되지 않을까 염려되오.
데리고 가서 빈(嬪)이나 장(嬙:궁녀,빈의 다음 위계)으로 두어주면 고맙겠소." 하자 진문공이 말한다.
" 우리 진(晉)과 진(秦)은 대대로 인척간이니 종사(宗祀)에 폐가 될 리없습니다. 장인은 염려 마십시오. 더구나 이번에 중
이(重耳)는 나라를 떠나올 때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대혼(大婚)을 명목으로 내세워 귀국하면 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진목공(秦穆公)이 매우 기뻐하며 진문공(晉文公)을 데리고 옹도(雍都)로 돌아갔다.
진(秦)나라 궁에선 값진 물품을 수레에 싣고 회영(懷瀛)이 타고갈 아름다운 수레를 새로 꾸몄다. 회영은 꽃같이 아름다운
몸종 다섯을 데리고 떠났고 진목공(秦穆公)도 딸을 전송 하려고 황하까지 따라갔다.
그리고 진(秦)나라 군사중 가장 늠늠하고 씩씩한 젊은이를 골라뽑아 그들에게 갑주를 입혀 창과 칼과 깃발을 들게 했다.
그 진(秦)나라 정병(精兵) 3,000 이 호화찬란한 행렬을 지어 진문공과 회영의 수레를 호위하니 그 장엄하고 아름
다움이란 말로 다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 때의 군사들을 기강지복(紀綱之僕)이라고 했다.
오늘날 『 기강(紀綱)을 잡는다.』 『기강(紀綱)을 바로 세운다.』하는 말은 이때 생겨난 말이라 한다.
그러므로 기강지복이란 곧 진(秦)나라 정병 삼천이 호위함을 말함이요 질서정연하고 철통같은 위계와 경호태세를 말한다.
망명객(亡命客) 51
사면(赦免)으로 안정되는 진(晉)나라
진문공(晉文公)은 회영(懷瀛)과 함께 황하를 건넜다. 진(晉)나라 언덕엔 이미 조쇠(趙衰)등이 법가(法駕)를 준비하고 있
다가 진문공 부부를 영접해 모셔 태웠다. 진문공이 탄 수레 앞뒤로 문무백관이 따르고 군사들이 엄호했다.
정기(旌旗)는 펄럭이며 해를 가리고 취타(吹打)소리는 하늘에까지 사무쳤다. 지난날 진문공이 밤중에 궁을 빠져 달아날
때는 마치 땅속으로 기어드는 거북처럼 오무렸었다. 헌데, 이번에 돌아가는 영화로운 기상은 마치 산 위에 나타난 봉황이
쌍쌍이 머물며 쌍쌍이 나는 듯했다. 도읍 강성(絳城)에 이르기까지 연도의 백성들이 환호했슴은 또한 기하(幾何)이던가 ?
귀국하자 진문공(晉文公)은즉시 회영(懷瀛)을 부인(왕비)으로 봉했다.
그 옛날 진헌공(晉獻公)이 여식 백희(伯姬)를 진(秦)나라로 출가시켰을때 곽언(郭偃)에게 점을 치게 한일이 있었다.
그때 점괘에 이런 말이 있었다.
世作甥舅 (세작생구) 대대로 혼인할 사이며
三定我君 (삼정아군) 세 번이나 우리 임금을 정해주리라.
그때 출가한 백희(伯姬)가 지금 진목공(秦穆公)의 부인 목희(穆姬)이며 이젠 진목공의 딸 회영(懷瀛)이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의 부인이 된 것이다. 이 어찌 대대로 혼인한 사이가 아니겠는가."
쉽게 풀이하면 진문공은 누님의 딸인 생질을 아내로 맞은것이고 회영은 외삼촌을 남편으로 맞은 정략결혼이었다.
또한, 지난날 진목공(秦穆公)이 진혜공 이오(夷吾)를 군위에 앉혔고 두번째는 중이(重耳)를 귀국시켜 군위에 앉혔으며
이번엔 진문공이 피난왔다가 진목공의 힘을 빌려 다시 여이생과 극예를 토벌하고 거듭 국토를 안정시켰으니 진(晉)나라
임금을 세번 정해준 것이 아니랴. 후인(後人)이 시로써 이 일을 읊었다.
萬物榮枯皆有定 (만물영고개유정) 모든 흥망성쇠가 다 정해져 있거늘
浮生碌碌空奔忙 (부생녹녹공분망) 인생은 쓸데없이 분주하도다.
笑彼愚人不安命 (소피우인불안명) 우습구나. 저 어리석은 사람은 분수를 보르고
强覓冬雷和夏霜 (강멱동뢰화하상) 굳이 겨울날에 번개와 여름에 서리를 구하는도다.
진문공(晉文公)은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를 죽이긴 했으나 아직도 아직도 분이 안풀려 그 일당 모두를 찾아내 죽이
려 했다. 그러나 조쇠(趙衰)가 말리며 어진 정치를 펴라하여 대사령(大赦令)을 폈으나 그들의 일당은 너무나 많았고 아직
도 진문공을 무서워하며 나오지 않았다.
이럴때 그 옛날 망명시절 책나라에서 행리(行李)를 맡아보던 두수(頭須)가 찾아왔다. 두수는 그 당시 그 소중한 재물들을
빼돌려 달아났던 자인데 지금에사 진문공(晉文公)을 찾아온 것이었다. 진문공이 화가 잔뜩나서 하는 말이
" 그놈 때문에 한푼 노자없이 조나라 위나라에서 걸식을 했다. 참으로 뻔뻔한 놈이로다. 당장 죽기전에 달아나라 일러라."
문지기로 부터 진문공의 전갈을 들은 두수가 혼잣말로 지껄인다.
" 그래, 주공께선 나보다 더한 발제도 용납하사 극악무도한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의 난을 벗어나셨는데 어찌 두수
만을 용납 못하시는가. 나는 진(晉)나라를 안정시킬 계책이 있소. 주공이 날 피하신다면 나야 달아나는 도리밖엔 없소."
두수의 이 말을 전해들은 진문공(晉文公)은 앗차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는 두수(頭須)를 데려오라 명했다.
이윽고 두수(頭須)는 들어와 진문공(晉文公)께 절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는 두수가 말한다.
주공께선 여이생과 극예의 잔당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 .... 참으로 많다더구나 .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누구보다 무겁다는 걸 잘 알기에 비록 대사령(大赦令)이 내렸지만 믿지 못하고 도처에 웅거하며 도
사려 있습니다. 주공께선 마땅히 저들을 안심시킬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셔야 나라가 안정되옵니다. 한다.
어찌해야 하는가?
" 신이 지난날 주공의 재물을 가지고 달아난 일로 주공께서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사옵니다. 진(晉)나라 사람이면 이 일
을 모르는 이가 없을정도입니다. 그러니 주공께서 출입하실때 신(臣)으로 하여금 수레를 몰게 하소서. 그러면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질것이고 주공께서는 지난날의 잘못을 저렇게 용서하시고 감정을 품지 않는구나 하며 따를것입니다. "
진문공(晉文公), 그 즉석에서 " 과연 네 말이 옳구나. 내 곧 순성(巡城)할 터이니 채비 하거라." 한다.
이날 진문공(晉文公)이 수레를 타고 성을 한바퀴 돌았다.그 어가(御駕)를 모는이는 바로 두수(頭須)였으니 그 광경을 지
켜보던 여이생과 극예의 일당들이 모두 속으로 감탄하며 서로 귓속말로 속삭인다.
" 저게 지난날에 주공의 재물을 훔쳐 달아났던 두수라네. 주공은 저런놈도 용서하고 다시 불러 쓰는구나." 했다.
그후부터 여러가지 흉흉했던 유언비어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진문공은 다시 두수(頭須)에게 고장(庫藏:창고)를 맡겼다.
이렇듯 진문공(晉文公)은 모든 사람을 용서했고 나라는 나날이 안정되었다.
망명객(亡命客) 52
옛 여인들과 자식을 되찾는 군신(君臣)
진문공(晉文公)은 지난날 공자시절에 이미 두번의 장가를 들어 아내를 둔 사람이다.
첫번째 아내는 서영(徐瀛)으로 일찍 죽었고 둘째번 아내는 핍길(偪姞)이라 하는 여자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환(驩)이요, 딸의 이름을 백희(伯姬)라 했다. 그 핍길(偪姞)도 중이가 망명중일때 포성(蒲城)에서 죽었다.
진문공(晉文公)이 그 당시 포성을 버리고 떠날때 아들도 딸도 모두 버리고 급급히 달아났었다. 그때 두수(頭須)가 어린
남매를 거두어 수씨(遂氏)성의 백성에게 맡기고 곡식과 음식을 넉넉히 대주었다.
어느날 두수(頭須)는 그 사실을 진문공(晉文公)께 고하며 지금 그 남매가 장성했슴을 아뢰었다. 진문공이 깜짝놀란다.
" 과인은 그 어린것들이 그후 난리에 죽은줄로만 알았다. 살아 있었다고 ? 그대는 어째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느냐 ?"
" 신이 듣건대 어미만큼 자식을 위하는 사람이 없고 자식도 제 어미를 따른다 하옵니다. 그런데 주공께선 두루 열국을 방
랑 하시면서 이르는 곳마다 여자를 들이셔서 이미 많은 자손을 두셨사옵니다. 비록 포성에 공자가 살아 있지만 주공의
뜻이 어떠신지를 몰라 감히 아뢰지 못했나이다." 하자. 진문공(晉文公) 명한다.
" 네가 만일 이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면 과인은 몹쓸 아비란 말을 면치 못할 뻔했구나. 속히 그 남매를 데려 오너라."
이에 두수(頭須)는 포성(蒲城)으로 가 수씨 집을 찾아 많은 황금을 주어 보답하고 남매를 데리고 돌아왔다.
진문공(晉文公)은 회영(懷瀛)에게 두 남매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드디어 공자 환(驩)을 세자로 삼았으며 딸 백희(伯姬)를
조쇠(趙衰)에게 하가(下嫁)시켰다. 이리하여 진문공의 딸 백희(伯姬)는 조희(趙姬)가 되었으니 일등공신이요 조정의 대신(大臣)인 조쇠(趙衰)와 진문공(晉文公)은 군신간이면서도 장인사위 사이가 되었다.
그뒤 책나라에서도 진문공이 군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전날 같이 살다가 두고 간 계외(季隗)를 진(晉)나라로 보냈다.
그날 밤 진문공(晉文公)이 계외(季隗)에게 묻는다. " 많이 변했구려, 올해 나이가 몇이나 됐소?"
" 상감께서 그때 책나라를 떠나신 지가 벌써 8년이 지났사옵니다. 이제 신첩의 나이 서른두 살이 됐사옵니다."
진문공(晉文公)은 감개무량했다. 25년만 기다리다 내가 못오면 딴 데로 개가하라 했는데 아직 25년이 지나지 않은게 천
만 다행이라며 부부의 재회를 자축했다.
또한 제(齊)나라 제효공(齊孝公) 역시 지난날 진문공(晉文公)이 데리고 살다간 제강(齊姜)을 진(晉)나라로 보내왔다.
진문공(晉文公)은 제강(齊姜)을 모시고 온 제나라 사신을 잘 대접하고 제효공에게 감사의 서찰을 써서 보냈다.
그날밤 제강(齊姜)이 진문공(晉文公)에게 말한다.
" 지난날 첩인들 부부간의 즐거움을 싫어했을 리 있었겠습니까. 그때 술을 권하고 주무시는 상감을 떠나보낸 것은 바로
오늘같은 날이 있기를 원한 때문이었습니다."
진문공(晉文公)은 제(齊)나라와 책나라에서 온 두 아내가 전부터 현숙했다는 것을 회영(懷瀛)에게 설명했다.
이 말을 듣고 회영(懷瀛)은 계외와 제강이 지난날 내조한 공이 컸슴을 칭찬했다. 그리고 회영은 부인의 지위를 양보하겠
다고 말했다. < 이 얼마나 가상하고 또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 중전의 자리를 양보 하다니...>
이리하여 제강(齊姜)이 부인이 되고 계외(季隗)가 그 다음이 되고 회영(懷瀛)이 그 셋째가 되었다.
진문공(晉文公)의 딸 조희(趙姬)는 책나라에서 계외(季隗)가 왔다는 말을 듣고 남편인 조쇠(趙衰)에게 전날 책나라에서
데리고 살다가 두고 온 숙외(叔隗:계외의 동생)와 그 아들을 왜 불러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조쇠가 완곡히 거절한다.
" 주공께서 당신을 내게 출가시켰는데 감히 그 옛날 함께 살던 여자를 어찌 데려올 수 있겠소. 아니되오. "
" 그건 참으로 박덕한 말씀이오. 첩은 그런 박덕한 말씀을 듣고싶지 않습니다. 첩이 비록 귀한 몸이라지만 숙외는 첩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며 더구나 아들까지 둔 분입니다. 어찌 새사람을 아끼는 뜻에서 옛사람을 버릴 수 있습니까."
조쇠(趙衰)가 요지부동 답을 않하자 조희(趙姬)는 그 길로 궁으로 들어가 아버지 진문공(晉文公)에게 아뢴다.
" 첩의 남편이 숙외(叔隗)를 불러오지 않고 첩에게 어질지 못하다는 누명을 쒸우고 있사옵니다. 바라건대 아버지께서 이
일을 잘 처리해 주십시요." 한다. 진문공은 즉시 사자를 책나라로 보내 숙외 모자를 데려오게 조치했다.
이에 조희(趙姬)는 부인의 지위를 숙외(叔隗)에게 사양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조쇠(趙衰)는 찬성하지 않았다.
조희(趙姬)는 끝끝내 숙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점, 또 숙외가 나은 아들 돈(盾)이 장성하여 재주도 비범하다는 점
을 들어 그를 적자(嫡子)로 세워야 집안이 번성하고 편안하다는 점을 고집했다. 아니면 궁으로 돌아가겠다며 우긴다.
그제서야 조쇠(趙衰)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진문공에게 그 사정을 아뢰었다.
진문공(晉文公) 이르기를
" 내 딸이 그처럼 사양한다니 이는 옛 태임(太任)처럼 어질기 때문이다. 곧 숙외(叔隗)모자를 궁으로 들게 하오."
이리하여 숙외모자가 궁으로 들어가자 진문공이 숙외를 조쇠의 정실부인으로 삼고 그 아들 조돈을 적자로 세우려 하자
숙외 또한 극구 사양하며 부당하다 아뢰자 진문공이 친히 이 일은 바로 공주의 뜻이라며 간곡히 권하여 감히 어길 수 없
어 숙외모자는 사은재배(謝恩再拜)하고 물러나갔다.
이때, 숙외(叔隗)가 낳은 조쇠(趙衰)의 아들 조돈(趙盾)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나면서 부터 기상이 씩씩하고 행동이
예절에 맞았으며 시서(詩書)에 능통하고 활을 잘 쐈다. 조쇠(趙衰)는 큰 아들 돈(盾)을 매우 사랑했다.
그후 조희(趙姬)도 아들 셋을 낳았다. 그러나 조희의 아들들은 다 돈(盾)만큼 영걸차지 못했다. 물론 훗날의 이야기다.
< 江村論評>
그 옛날 나라에 공이 큰 대신(大臣)에게는 엄청난 영지(領地)나 식읍(食邑)이 주어졌으며 가병(家兵)도 거느렸을뿐만 아
니라 수많은 가솔,문객이 딸려져있었다. 그 벼슬과 지위는 세습되었으며 그 상속은 적자(嫡子)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정실부인의 소생이라야 그의 소생이 가문을 이어받는 엄청난 이해가 달려있는데 그 자리를 선뜻 양보한다는 건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결단이다. 한 남자의 여인 자리를 다투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관(史官)이 시로써 조희(趙姬)의 어진 덕을 읊어 남겼다.
陰性好閉 (음성호폐) 여자는 독차지 하려는 버릇이 있어
不嫉則妬 (부질칙투) 시기하지 않으면 질투하는도다.
感夫遑驕 (감부황교) 남편의 사랑을 얻으면 교만하고
簒嫡敢怒 (찬적감노) 제 아들이 적자가 못되면 분을 삭이지 못하는도다
驪進申絀 (여진신출) 옛날에 여희는 신생을 내쫒았고
服懽曰怖 (복환왈포) 갖은 영화를 누리면서도 무섭다 하였도다.
理顯勢窮 (이현세궁) 바른 것이 나타나고 형세가 궁해지면
誤人自誤 (오인자오) 결국 남의 신세도 망치고 제 신세도 망치는도다.
貴而自賤 (귀이자천) 그런데도 귀한 몸으로 정실부인 자리 사양하고
高而自卑 (고이자비) 높은 지위건만 스스로를 낮추었네
同括下盾 (동괄하돈) 자기아들 동과 괄을 모두 돈의 밑에 있게하고
隗壓於姬 (외압어희) 숙외보다 낮은 지위를 차지했도다.
謙謙令德 (겸겸영덕) 어질고 겸사하는 아름다운 덕성이여
君子所師 (군자소사) 군자의 거울 삼을 바로다.
文公之女 (문공지녀) 아. 진문공의 딸이여 !
成季之妻 (성계지처) 바로 조쇠의 아내인저 !
성계지처(成季之妻)란,조쇠(趙衰)의 자(字)가 성자(成子), 계(季)는 또한 계외(季隗)를 가리킨다. 이상모두 이와 여사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웃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있다. 진문공의 여인들이 스스로 겸양하고 본부인의 자리를 옳
바르게 정하게 되니<제강(齊姜) - 계외(季隗) - 회영(懷瀛)> 또한 그의 최고의 신하라 할수 있는 조쇠(趙衰)의 아내 역시
<숙외(叔隗 - 백희(伯姬) > 같은 이치로써 정해지지 않았는가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흐뭇한 대목이 아닐수 없다.
망명객(亡命客) 53
논공행상(論功行賞)
진문공(晉文公)은 나라를 다시 찾게 된 데 대하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려고 모든 신하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공로를 3등급까지 나누었다. 그 규정에 의하면 함께 망명하여 열국(列國)을 방랑했던 신하들이 1등공신
이었고 그 다음은 국내에 있으면서 중이(重耳)를 귀국할 수 있도록 힘써준 신하들이 2등공신이며, 그 다음이 그가 귀국했
을때 즉시 항복하고 영접한 신하들이 3등 공신이었다.
이러한 중에도 그 공로의 경중을 따져 다시 상을 상하(上下)로 나누니 망명파 1등공신들 중에서도 조쇠(趙衰) 호언(狐偃)
을 1등급으로 치고 그 나머지 호모(狐毛) .위주(魏犨).서신(胥臣).호사고(狐射姑).선진(先軫).전힐(顚頡)등을 차급으로했다.
여기서 독자들은 누가 빠졌는가를 알 것이다. 바로 자신의 다릿살을 베어 국을끓여 바쳤던 개자추(介子推)가 없다.
그리고 국내에서 도운 2등공신들 중에서 난지欒枝) .극진(郤溱)등을 일급으로 치고 그 나머지 주지교(舟枝僑).손백규
(孫伯糾).기만(祁滿)등을 차급으로 간주했고, 귀국했을 때 영접하고 항복한 3등공신에는 극보양(郤步陽).한간(韓簡)을 1
급으로 치고 그 나머지 양유미(梁由靡).가복도(家僕徒).극걸(郤乞).선멸(先蔑).도격(屠擊)등을 차급으로 간주했다.
이리하여 나라에서 땅을 받지 못한 자에겐 땅을 하사하고 이미 땅을 받은 적이 있는 자에겐 더 많은 땅을 봉했다.
그리고 진문공(晉文公)이 따로 하얀 구슬 다섯 쌍을 호언(狐偃)에게 하사하면서 말한다.
" 지난날 황하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올 때 그대의 구슬을 물에 던졌기로 이걸로써 대신 보답하노라."
진문공(晉文公)은 호돌(狐突)이 원통히 죽은 걸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진양(晉陽) 땅 마안산(馬鞍山)에다 호돌(狐突)의
사당을 세웠다. 후세 사람들은 그 마안산을 호돌산(狐突山)이라 고쳐 불렀다.
그리고 진문공(晉文公)은 성에다 조서(詔書)를 내걸게 했다.
《 만일 공로 있는 자로써 이번에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든 자진하여 신고하라.》
성(城)에 내다붙인 조서(詔書)를 보고 호숙(壺叔)이 진문공(晉文公)에게 가서 호소한다.
" 신은 주공께서 포성에서 떠나실 때부터 따라다니며 모셨습니다. 사방으로 열국을 따라다니느라 발가락은 찢어지고 발
굼치는 닳아 터졌습니다. 주공께서 침식하실 땐 곁에서 모셨고 방랑하실 땐 수레와 말을 몰아 잠시도 곁을 떠난 일이 없
었나이다. 이제 주공께서 함께 망명했던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시면서 신만은 제쳐놓으시니 혹 신에게 무슨 죄라도 있사
옵니까." 했다.
그러자 진문공(晉文公)이 호숙(壺叔)을 가까이 불러 말한다. 과인이 너를 위해 그 이유를 말해 주마
" 인(仁)과 의(義)로써 나를 지도하여 잘못을 깨닫게 해준 사람에겐 상을 내렸고, 묘한 계책으로 나를 도와 모든 제후(諸
侯)로부터 욕보게 하지 아니한 사람에겐 그 다음 상을 내렸고, 적의 시석(矢石)과 칼날을 무릅쓰고 자기 몸으로써 나를
보호해준 사람에겐 그 다음 상을 내렸다. 그러므로 자세히 듣거라. 가장 으뜸가는 상은 그 덕(德)에 대해서 준 것이고, 그
다음은 그 재주에 대해서 준 것이고, 그 다음은 그, 공로에 대해서 주었노라. 나를 위해서 사방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닌 수
고로움은, 그것은 필부(匹夫)의 힘이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보다 그 다음가는 공로이다. 잘 알겠느냐?
이번 1등,2등,3등 공신의 행상이 끝나면 그 다음 상이 너에게 갈 것이다.
호숙(壺叔)은 부끄러움과 복종하는 마음으로 물러나갔다.
마침내 진문공(晉文公)은 하천배(下賤輩)인 여대(與대)와 복례(僕隷)까지도 두루 황금과 비단을 내어 후한 상을 내렸다.
이리하여 상을 받은자로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만 위주(魏犨)와 전힐(顚頡) 두사람이 스스로 용기와 재주를 자부
하는터라 늘 힘도 없이 입으로만 공을 세운 조쇠(趙衰)와 호언(狐偃) 두 문신(文臣)이 자기들보다 높은 상을 받는 걸 보고
속으로 불평했다. 그러나 진문공은 그 공로를 위주로 삼았지 사람을 차별하진 않았다.
이때 논공행상에서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개자추(介子推)였다.
개자추(介子推)는 진문공(晉文公)과 더불어 모든 나라를 돌아다니며 망명한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날 모두가 고국을 향하여 황하를 건널 때 개자추는 호언(狐偃)이 홀로 공을 세운체 하며 공자 중이(重耳)를 간하는
말을 듣고서 웃었던 사람이다. 그는 그러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궁정(宮廷)에 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개자추(介子推)는 귀국한 뒤 반열(班列)에 끼여 서서 진문공(晉文公)에게 조하(朝賀)를 드린 뒤로 병들었다 핑
계 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맑고 가난한 것을 즐겁게 지켰다.
그는 손수 신을 짜서 단 한 분인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생계를 꾸렸다.
진문공(晉文公)은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여 대회를 열고 논공행상을 하던 날 개자추(介子推)가 참석하지 않았건만 총망
중에 그를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진문공(晉文公)은 우연히 그를 잊어버린 채 물어보지도 않고 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때, 개자추(介子推)의 집 바로 이웃에 해장(解張)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자추(介子推)가 아무 상도 못 타는
걸 보고 분개했다. 그러다가 성벽에 내 걸려 있는 조서(詔書)를 보게 되었다. 흐흠...옳거니 !
해장(解張)은 그 즉시 개자추(介子推) 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지만 개자추는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이때, 늙은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아들 개자추(介子推)에게 말한다.
" 한번 가 보거라 너는 19년동안이나 주공을 모시고 방랑하지 않았느냐? 더구나 너는 지난날 넓적다리 살까지 도려내어
임금께 잡숫게 하지 않았느냐 ? 너의 공도 적지않은데 왜 가서 말하지 않으려고만 하느냐? 그래도 다소나마 곡식을 받
게 되면 우리 모자 조석 끼니에 도움이 될 터인데 ... 그래도 짚신을 삼아 파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 했다.
개자추(介子推)가 어머니께 대답한다.
" 돌아가신 전 임금 진헌공(晉獻公)은 아들 아홉 분을 두셨습니다. 그 아홉 사람중 우리 주공께서 가장 어지셨습니다.
진혜공(晉惠公)과 진회공(晉懷公)은 덕이없어 하늘이 그 자리를 뺏어 우리 주공께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신하들
은 하늘의 뜻을 모르고 각기 자기의 공인 줄만 알고 서로 벼슬을 다투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다투는 걸 부끄럽
게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일생동안 짚신을 삼을지언정 하늘의 공을 자기의 공인 것처럼 탐하기는 싫습니다." 했다.
늙은 어머니가 말한다.
" 네 뜻은 잘 알겠다. 비록 국록(國祿)을 바랄 건 없다만 그래도 한 번 주공께 말해 그 옛일을 잊지나 않게 하려무나 "
" 제가 이젠 임금께 요구할 것이 없는데 무슨 일로 궁에 가겠습니까 어머니."
" 너는 참으로 청렴결백한 선비다. 네가 그러는 바에야 난들 어찌 청렴결백한 선비의 어미가 못 되란 법이 있느냐. 우리
모자는 마땅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이 혼잡한 시정(市井)에서 더러워짐이 없게 함이 옳을 것이다."
개자추(介子推)는 매우 기뻤다.
" 어머니! 저는 원래 면산(綿山)을 좋아합니다. 산은 높고 골은 깊어 참으로 좋은 곳입니다. 이제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으
로 가서 살겠습니다. "
개자추(介子推)는 그날로 어머니를 등에 업고 면산(綿山)으로 들어갔다. 면산(綿山)에 당도한 개자추(介子推)는 깊은 산
골에다 초려(草廬:띠집,오두막)을 지었다. 그는 풀로 옷을 해입고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서 일생을 마칠 작정이었다.
< 왜 이렇게 이 대목이 슬프단 말인가 ... >
망명객(亡命客) 54
슬프다 ! 개자추(介子推)의 죽음이여 !
(이날이 한식(寒食)의 유래가 되다)
한편, 이웃 사람들 중엔 개자추(介子推)와 그의 어머니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해장(解張)만이
그들 모자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돌이킬수 없는 화근이 되었으니 .....
해장(解張)은 한 장의 글을 지어 한밤중에 조문(朝門) 위에다 걸었다.
이튿날 아침 진문공(晉文公)은 조회에 나갔다. 입궁하던 신하들이 조문(朝門)위에 걸린 글을 떼어 진문공에게 바쳤다.
그 시(詩)에 하였으되.
有龍矯矯 (유용교교) 용맹한 용이 있었는데
悲失其所 (비실기소) 그 있던 곳을 쫒겨나 슬퍼했도다.
數蛇從之 (수사종지) 그래서 여러마리 뱀이 그를 따라
周流天下 (주유천하) 두루 천하를 돌아다녔도다.
龍飢乏食 (용기핍식) 그 용이 먹을 것이없어 굶주릴제
一蛇割股 (일사할고) 한 뱀이 제 살을 베어 먹였도다.
龍返於淵 (용반어연) 그 뒤 용은 못으로 돌아가
安其壤土 (안기양토) 그의 국토를 안정시켰도다.
數蛇入穴 (수사입혈) 몇 마리의 뱀도 구멍으로 들어가
皆有寧宇 (개유영우) 다 거처할 집을 가졌도다.
一蛇無穴 (일사무혈) 그런데 한 뱀만이 들어갈 구멍이 없어
號於中野 (호어중야) 저 황량한 벌판에서 울부짖는도다.
진문공(晉文公)은 다 읽고나서 크게 놀란다.
" 이건 개자추(介子推)가 과인을 원망하는 글이다. 지난날 과인이 위(衛)나라를 지날 때 몹시 시장했었다. 개자추는 자기
넓적다리 살점을 베어 과인에게 먹였다. 이번에 과인이 공신들에게 크게 상을 내렸는데 개자추(介子推)만 홀로 빠졌으
니 과인의 잘못을 어이할꼬..!"
진문공(晉文公)은 즉시 사람을 개자추(介子推)에게 보냈다 그러나 개자추는 종적을 감춘 후였고 빈집뿐이었다.
진문공(晉文公)은 개자추(介子推)의 이웃 사람들을 불러 묻는다.
" 개자추(介子推)는 어디로 갔느냐 ? 간 곳을 아는 사람에겐 즉시 벼슬을 주리라."
해장(解張)이 앞으로 나아가 절하고 아뢴다.
" 그 글은 개자추(介子推)가 지은 것이 아니옵고 소인이 지었나이다. 개자추는 상을 구하는 것이 부끄럽다 하고 그 어머니
를 등에 업고 면산(綿山) 깊숙히 들어가 숨었나이다. 소인이 그의 공로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런 글을
지어 조문(朝門)에 붙인것이옵니다."
" 만일 네가 그런 글이라도 지어 걸지 않았다면 과인은 개자추(介子推)의 공로를 깜박 잊을 뻔 했구나."
진문공(晉文公)은 즉시 해장(解張)에게 하대부(下大夫)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는 그 날로 해장의 안내를 받아 친히 면산
에 이르러 보니 산봉우리는 첩첩하고 초목은 우거졌는데 흐르는 물은 잔잔하여 유정하고 구름은 조각조각 흘러가는 숲속엔 산새들만 재재거린다.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불러보아도 산울림만 대답할 뿐 개자추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이때, 신하들이 진문공 앞에 농부 몇사람을 데리고 왔다. 진문공이 친히 농부들에게 묻는다.
" 수일 전에 늙은 어머니와 함께 이 산속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느냐?"
" 예. 며칠 전에 보았사옵니다. 어떤 사람이 늙은 노파를 업고 이 산 아래서 쉬며 물을 마시고 다시 노파를 업고 산으로 올
라갔사옵니다. 하오나 며칠전 일이라서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나이다."
진문공(晉文公)은 산 아래에다 수레를 멈추게 한 뒤 온 산을 이 잡듯 수색하게 하였다. 군사들이 온 산을 뒤지고 몇날을
찾아 다녔지만 개자추(介子推)의 종적은 털끝 만큼도 찾을 길이 없었다.
진문공(晉文公)이 노기를 띠고 해장(解張)에게 말한다.
" 개자추(介子推)는 어찌하여 이렇듯 과인을 원망하는가! 내 듣건대 개자추(介子推)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라 하니, 만
일 산에 불을 놓아 숲을 태우면 그는 필시 그 어머니를 업고 숨어 있는 곳에서 나올 것이다."
위주(魏犨)가 진문공(晉文公) 앞으로 나아가 투덜거린다.
" 함께 망명하던 많은 사람이 다 공로가 있는데 어찌 개자추(介子推)만 이렇듯 끔찍이 생각하십니까? 개자추는 숨어서 임
금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모든 수레와 어가(御駕)를 이곳에 머물며 쓸데없이 시일만 허비하고 있습니
다. 그가 불을 피해 산 속에서 나오기만 하면 신은 개자추(介子推)에게 톡톡히 창피를 주겠습니다. "
이윽고 군사들은 면산(綿山) 전후좌우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맹렬히 타오르고 바람은 미친듯이 강하게 불었다.
무시무시한 시뻘건 불길은 온 산을 집어삼킬듯 사흘 낮밤을 옥석을 분간 않고 타고 나서야 꺼졌다.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나 개자추(介子推)는 나오지 않았다. 새까맣게 변해버린 면산(綿山)을 군사들이 다시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 껴안고 버드나무 아래서 타죽은 해골을 발견했다. 군사들은 그 해골만을 수습하여 산
에서 내려왔다. 그 해골을 보고 진문공(晉文公)은 하염없이 울었다.
진문공(晉文公)은 면산(綿山) 아래에다 개자추(介子推)와 그 어머니의 뼈를 묻게했다. 그리고 개자추의 사당(祠堂)을 지
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리하여 면산(綿山) 주위에 있는 밭은 모두 다 개자추의 사당을 위한 사전(祀田)으로 삼았다. 그곳 농부들은 진문공(晉文公)의 명을 받아 해마다 정성을 다해 개자추(介子推)의 사당에 제사를 드렸다.
진문공(晉文公)은 그 면산(綿山)이란 산 이름을 개산(介山)이라 고쳤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꾸짖기 위한 것이었다.
후세 왕조들이 그 지방을 고을(縣)으로 승격시키고 이름 또한 개휴(介休)라고 고쳐 불렀으니 곧 개자추(介子推)의 영혼이
이곳에서 쉬고 있다는 뜻이다.
그때 산에다 불을 지른 것이 바로 3월 초닷새날이며 절기로는 청명(淸明)이었다. 그래서 진(晉)나라 사람들은 개자추
(介子推)를 사모하는 뜻에서 또 그가 불에 타죽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해마다 3월이면 일체 불을 피우지 않고 한 달 동
안 찬 음식(寒食)을 먹었다. 그뒤 점점 줄어들어서 한 달 동안 찬 음식을 먹던 것이 사흘로 단축됐다.
지금도 태원(太原). 상당(上黨).서하(西河).안문(雁門) 등 각지에서는 매년 동지 후 105일째 그 날이 되면 미리 마른 음식
을 준비했다가 냉수로 먹는다. 이 풍속을 금화(禁火) 또는 금연(禁煙)이라고 한다. 그래서 청면(淸明) 하루 전날이 바로
한식날(寒食節)인 것이다. <청명 한식이 같이 드는 경우도 있슴>
한식(寒食)날엔 집집마다 문에다 버들을 꼿는다. 그것은 버드나무 밑에서 타죽은 개자추(介子推)의 영혼을 초혼(招魂)한
다는 의미이다. 또 들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지전(紙錢)을 태우기도 한다. 이것 또한 개자추를 기리는 뜻이었다.
호증선생(胡曾先生)이 일을 읊어 수천년을 전해온다.
羈絏從遊十九年 (기설종유십구년) 초라한 행색에 열국을 방랑한지 19년
天涯奔走備顚連 (천애분주비전연) 하늘 끝까지 돌아다니며 임금을 모셨도다.
食君刳股心何赤 (식군고고심하적) 살을 베어 임금을 먹였으니 그 마음 참으로 지극하며
辭祿焚軀志甚堅 (사록분구지심견) 벼슬 사양하고 불속에 타죽으니 그 뜻 심히 견고했도다.
綿上煙高標氣節 (면상연고표기절) 면산 높이 오르는 저 연기, 그의 기상과 절개를 보이는 듯
介山祠壯表忠賢 (개산사장표충현) 개산의 장엄한 사당은 그의 충과 인을 나타냈도다.
只今禁火悲寒食 (지금금화비한식) 오늘날도 불을 금하고 찬 음식 먹으며 슬퍼하나니
勝却年年掛紙錢 (승각연연괘지전) 해마다 지전을 태워 복을 비는 것보다 훌륭한 일이로다.
이렇듯 개자추(介子推)의 죽음은 저 유명한 한식(寒食)절의 기원이 되었으니 참으로 고전(古傳)이란 뜻 깊지 아니한가.
다시 한 번 상기 하자면 면산(綿山)에 불을 놓던 날이 청명(淸明)날이요 그 하루 전날이 한식(寒食)날이다.
그러니 청명일이 죽은 날이니 제사는 당연 그 전날밤 자정(밤 12시)부터 아닌가. 그래서 대략 그 날 낮에 산소를 찾는다.
한식(寒食) ... 동지(冬至)로 부터 105일째 되는 날 ~
한식날이 그냥 조상 산소나 찾아 성묘나 하는날로 알고 있었다면 이참에 한번 옳게 그 유래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청명,한식이 같은 날일수도 있다. 청명에 죽나, 한식에 죽나 죽긴 마찬가지라는 말도 이래서 나왔다.
이제 이 글도 단 한편을 남겨두고 있다. 물론 내일이면 오를 것이고 그걸로 종료될 것이다.
나른한 봄 아지랑이 속으로 들어가 봄꿈이라도 꾸어야겠다. 그리하면 혹시라도 살랑대는 봄바람 속에 저 역사의 향기들이 새록새록 풍겨오지는 않을까 ~
이 마음 ... 혹여라도 눅눅하고 쾌쾌한 고서(古書)의 향수를 나는 못내 그리워 하고 있슴은 아닐런지....!
망명객(亡命客) 55 -最終-
진문공(晉文公)은 신하들에게 상을 내린 후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더욱 힘썼다. 어진 사람이 있으면 천거하게 하고 능
력 있는 자에겐 일을 맡기고 형벌을 줄이고 부세(賦稅)를 낮추었으며 통상을 권하고 외빈(外賓)을 예의로써 대접하고 의
로운 사람에겐 배필(配匹)을 구해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다. 이리하여 진(晉)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천자(天子) 주양왕(周襄王)은 태재(太宰) 주공(周公) 공(孔)과 내사(內使) 숙흥(叔興)을 진(晉)나라로 보내어 진문공(晉文
公)에게 후백(侯伯)의 벼슬을 내렸다. 진문공(晉文公)은 천자가 보낸 사신들에게 더욱 지극한 예의로써 대접했다.
사명을 마치고 주(周)로 돌아간 숙흥(叔興)이 주양왕(周襄王)에게 아뢴다.
" 진후(晉侯)는 반드시 천하 제후를 통솔하는 백주(伯主)가 될 것입니다. 왕께선 마땅히 그를 잘 대우하셔야 합니다."
그 뒤부터 주양왕(周襄王)은 지금까지 제(齊)나라에 베풀었던 친선을 진(晉)나라에 베풀었다.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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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진문공(晉文公)의 빛나는 치세가 이어질 것이다. 또한 여러번의 전쟁을 빛나는 승리로 이끌었으며 천하 여러나
라 임금들을 불러모아 천토대회(踐土大會)에서 바르지 못하고 천자의 명을 따르지 않는 다른나라의 임금을 꾸짖고 벌하
였으니 이 얼마나 사람중의 사람이요 왕중의 왕이 아니랴 ! 그래서 역사는 그를 가리켜 오패(五覇)의 일인으로 꼽는다.
참고로 오패(五覇)라는 말은 춘추전국시대에 천하의 패권을 쥐었던 다섯제후를 일컫는 말로서 일개 장수는 끼지 못한다.
즉, 제(齊)나라 환공(桓公)
진(晉)나라 문공(文公)
초(楚)나라 장왕(莊王) 여기까지는 사가(史家)들 간에 이견이 없다.
오(吳)나라 합려(闔閭) ↔ 진(秦)나라 목공(穆公)
월(越)나라 구천(句踐) ↔ 송(宋)나라 양공(襄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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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왕 합려와 월왕 구천 대신 진목공과 송양공을 넣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진목공이라면 몰라도 송양공은 가당치
않다는 나의 주장이다. 진목공(秦穆公)의 그릇과 그의 탁월한 신하들과 강대한 국력을 독자들은 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필자(筆者)는 이 글을 여기서 접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주제가 망명객(亡命客)이다. 따라서 중이(重耳)가 장장 19년간의 주유천하(周遊天下)를 끝내고 진(秦)나라
의 후원 속에 고국 진(晉)나라로 귀국하여 임금이 되니 역사는 그를 진문공(晉文公)이라 하였다.
진문공(晉文公)은 초(楚)나라와 전쟁때 망명시절에 초성왕(楚成王)과의 약속대로 삼사(三舍:90리)를 후퇴하여 금석같은
약속의 지중함을 보였으며 성복(城濮)의 전투에서 초(楚)나라를크게 이겨 패자(覇者)가 되었다.
결국 진문공(晉文公)은 군위에 오른지 9년만에 71세에 죽는다. 그 짧은 기간동안 눈부신 활약과 치적을 남겼다.
참고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진(晉)나라는 기원전 1,100년경에 주무왕(周武王)의 둘째아들 당숙우(唐叔虞)가
세웠고 기원전 349년에 한(韓).위(魏).조(趙) 세 가문에 의해서 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진문공때가 가장 전성기였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하나의 도표를 놓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
진문공(晉文公)의 신하들중에 다음 세 사람의 후손들이 진나라를 나누게 된다 이를 역사는 삼진(三晉)이라 한다.
조성자(趙成子) 조쇠(趙衰) 위무자(魏武子) 위주(魏犨) 한무자(韓武子) 한만(韓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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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나라 (BC 403~228) 위(魏)나라 (BC 403~225) 한(韓)나라 ( BC 403~230)
10세손 조열후(趙列侯) 조적(趙籍) 8세손 문후(文侯) 위사(魏斯) 12세손 경후(景侯) 한건(韓虔)
위에서 보듯이 세나라 모두 개국연도가 똑같음을 알수있다. 즉, 진(晉)나라 명문거족 세 집안이 각기 나라를 나눈 것이다.
진문공을 모시던 조쇠(趙衰)의 10세손이 조(趙)나라를 열었고 위주(魏犨)의 8세손이 위(魏)나라를 개국했으며 한간
(韓簡)의 10세손이 한(韓)나라를 또한 열었다. 이중 가장 크고 강력했던 나라가 조(趙)나라였다.
또한 역사란 뒤집어 보면 재미있는 것이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를 19년간이나 따라다니며 모시던 조쇠(趙衰)나 위주
(魏犨), 그리고 국내파였던 한간(韓簡), 그들이 모두 충신이었는데 그 후손들은 이처럼 나라를 나누었으니 참으로 아이러
니 한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 옛날의 왕조국가의 흥망성쇠(興亡成衰)란 충신과 간신의 모습을 함께 가진 명문거족
(名門巨族)이 천하를 좌지우지 하였다는 이야기다. 즉, 영원한 충신의 가문도 없고 영원한 간신의 가문도 없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하자면 어찌 끝이 있으랴! 저 냇물처럼 이어져 책을 엮어도 몇권 되련만 한가지만 더하고 줄이려 한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말이 있다. 즉, 풀을 묶어 은혜에 보답한다는 말이다.
이 기가 막힌 말의 기원이 여기서 생겨난다. 즉 위무자(魏武子) 위주(魏犨)의 아들 위과(魏顆)가 어질고 무던했던 탓에
죽은 혼령이 나타나 풀을 엮어 그 은혜를 갚았다는데서 생겨난 이 고사(古事)는 참으로 시사하는바가 크기만 하다.
위주(魏犨)는 평상시 아끼고 사랑하던 젊은 애첩 조희(祖姬)를 두고 죽으면 어찌하나 ..늘 그것이 걱정이었다.
범같은 장수 위주(魏犨)도 전자에 불기둥에 쓰러져 죽다 살아난 몸에 나이들어 쇠하여 병이들어 죽음을 앞두고 큰 아들
위과(魏顆)에게 틈틈이 이렇게 당부하곤 하였다.
" 내 죽거든 네 서모(庶母)가 아직 젊고 아이를 낳았던 몸이 아니니 좋은 혼처를 잡아 개가(改嫁) 시켜라." 하였다.
그러나 임종시 위주(魏犨)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손들 앞에서 횡설수설 하는 말로 애첩 조희(祖姬)를 자신의 무덤
에 한께 묻어 순장(殉葬)하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장롓날 상주 위과(魏顆)는 서모 조희(祖姬)를 순장 시키지 않고 살려두었다.
그러자 아우 위기(魏錡)가 여염집의 장례도 아닌 국가원로요 공신인 부친의 명을 거역하는 불효가 어디 있냐며 따졌다.
그러자 위과(魏顆)는 아우 위기(魏錡)에게 젊잖게 일렀다.
" 나는 부친이 생전에 정신이 맑았을때 하신 말씀을 따랐다. 임종시의 말씀은 비록 간절한 듯 하나 진실은 아니다." 했다.
아우 위기(魏錡)는 형님의 이 정확한 판단에 감복하여 따랐고 위과(魏顆)는 좋은 혼처를 골라 조희(祖姬)를 개가시켰다.
그로부터 수년후 보씨택(輔氏澤)에서 진(晉)나라와 진(秦)나라가 맡붙는 전쟁이 일어난다.
진(晉)나라 장수 위과(魏顆)는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갔으나 진장(秦將) 두회(杜回)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게 되었다.
진(秦)나라 장수 두회(杜回)는 120근짜리 개산대부(開山大斧)를 잘 썼는데 도무지 당할 재간이 없었다.
두회(杜回), 그는 나면서부터 이가 강철 같았고 눈동자는 이상스레 빛이 났으며 주먹은 구리쇠로 만든 망치 같았고 뺨은
쇠로 만든 바리떼 같았다. 수염은 머리까지 감겨 올라간 형상에 키가 1장(1丈)이 넘었고 능히 1,000 균의 무게를 들었다.
그런자가 거대한 도끼를 풍차 돌리듯 휘저으니 진(晉)나라 군사는 하루에도 수백씩 전사했고 전선은 나날이 밀렸다.
그러던 어느날 위과(魏顆)는 군막에서 고민고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중에 청초파(靑草坡), 청초파(靑草坡)
하는 모기소리만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하도 이상해서 인근 지리에 밝은 군사를 불러다 이곳 근처에 혹 푸른 풀밭이 있
느냐 물었더니 과연 그곳으로 부터 10리허 보씨의 못에 청초파(靑草坡)라는 둑이 있다 하여 그곳으로 영채를 옮겼다.
그곳엔 온통 그령풀이 질펀하게 자생하는 풀밭이었다.
위과(魏顆)와 위기(魏錡) 형제는 두회(杜回)를 그곳으로 유인했다. 그토록 무섭게 날뛰던 두회(杜回)를 보라 !
그는 휘청대며 비틀대기 시작했다. 위과(魏顆)가 자세히 보니 하얀 옷의 노인이 두회의 앞길마다 풀을 엮어 매어 놓는게
아닌가 ? 이 광경은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고 유독 위과(魏顆)의 눈에만 보였다.
두회(杜回)는 걸음마다 엮인 풀에걸려 비틀대기 시작했다.전장에서 비틀대고 휘청댄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어찌 그
순간을 노치랴! 진(晉)나라 장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놈을 창칼로 찌르고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그날밤 모처럼의 승전에 힘입어 위과(魏顆)는 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
낮에 청초파(靑초坡)에서 두회(杜回)의 발을 묶던 노인이 위과(魏顆) 앞에 나타나 정중히 절하며 아뢴다.
" 장군 ! 낮에 이 늙은이가 두회의 발을 묶어 크나큰 은혜에 보답한 것이올시다."
위과(魏顆)는 꿈속에서 황급히 일어나 누구신지 전혀 모르는데 이런 큰 도움을 받아 어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자 그 노인이 자신은 바로 조희(趙姬)의 죽은 아비로서 장군께서 딸을 순장시키지 않고 좋은 곳으로 개가(改嫁)시켜 주
셨슴에 구천에서도 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던바 미미한 힘이나마 도왔나이다. 장군은 앞으로 더욱 힘쓰십시오. 한다.
" 장군의 7세손에 이르면 반드시 대대로 영귀하고 자손은 왕후(王侯:제후)가 될 것이오. 결코 내 말을 잊지 마십시오."
노인은 문득 사라졌다. 동시에 위과(魏顆)도 꿈에서 깨어났다.
과연 그로부터 위과(魏顆)의 7세손 위사(魏斯) 위문후(魏文侯)가 BC 403년에 나라를 개국하여 위(魏)나라의 임금이 되
니 어찌 그 노인의 말이 허언이랴. 위(魏)나라는 BC 225년에 진(秦)나라에 통일 되기까지 178년 동안 사직을 이었다.
다시한번 상기 하자면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위주의 애첩 조희를 위과(魏顆)가 아버지 장례때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시켜 준 은혜를 죽은 조희
(趙姬)의 아버지가 위과와 싸우는 진(秦)나라 장수 두회(杜回)의 발이 걸려 넘어지도록 풀을묶어 그 은혜를 갚았다는 고
사이다. 물론 청초파(靑草坡) 라고 꿈속에 외처준 것도 그 노인의 계시였으니 위과는 그곳으로 진을 옮겼던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결초보은하겠다 하면 아니될 것이다. 왜냐? 결초보은이란 죽은자가 산 사람에게 갚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