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식(曺植)
[생년] 1501년(연산 7) 7월 10일(음력 6월 26일) / 現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졸년] 1572년(선조 5) 2월 21일(음력 2월 8일) / 現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영남학파의 거두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대부분을 거절하였으며 아울러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조식(曺植)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李滉)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 · 북도 사림(士林)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등 수백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北人)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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