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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1 :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5만 십자군 셀주크터키 니케아를 함락하다!
1096년에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Deus lo vult” 라며 일어난 십자군 전쟁은 얼핏 열정적
이면서도 숭고하며 로맨틱하게도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은 처참한 전쟁이니... 이른바
“문명의 충돌 clash of civilizations" 이라고도 생각되는데..... 새뮤얼 헌팅턴은 1996년
에 저술한 책의 제4부 에서..... 문명간의 갈등과 전쟁을 ”문명의 충돌“ 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622년에 박해를 피해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 이후 다시 메카를
점령하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는데 632년에 죽은후 이슬람 아랍인들은 칼리파 아부 바크르와
'신의 검' 할리드 장군의 지휘 하에 동로마제국에 침공을 시작해 636년에 벌어진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의 시리아 군대는 괴멸되었으니..... 헤라클리우스 황제도 시리아를 포기 합니다.
638년 2월 칼리파 우마르는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말에서 내려서는 걸어서 성묘 교회에 도착해 미사가
열리던 예배당에 들어가지 않고 밖의 계단에 걸터앉아 기도를 드렸으니, 후세들이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할 근거가 될까 염려한 것이라는데 그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평화로운 점령이었는데... 그는 5백년
전에 트라야누스황제가 내렸던 디아스포라 정책을 폐기해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과 거주를 허락합니다.
동로마제국이 시리아를 잃은지 4백여년이 지난 1071년 8월 16일 소아시아 동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초원에서 이란을 거쳐 서진한 셀주크 투르크족의 알프 아르슬란은 2만 5천을 이끌고 동로마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 4세의 5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아나톨리아는 멀리 몽골 고원에서 당나라에 패해
서진한 서돌궐의 후예로, 혼혈이 이루어지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투르크족이 차지하게 됩니다.
비잔틴군은 셀주크 투르크군의 유인으로 매복에 걸리니 노르만 용병에 이어 투르크 용병들이 봉급
을 받지 못했다며 먼저 달아나고 비잔틴 지휘관인 안드로니쿠스 두카스 마저 배신해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자 비잔틴 황제가 이끄는 본대는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포위되어 황제는 포로로
잡히니....... 오래전 7세기에 예루살렘을 빼앗겼던 비잔틴 제국은 로마 교황청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노르만족은 영국을 정복했고 이탈리아 남부를 손에 넣은 노르만족이
1072년 이슬람 무어인들이 다스리던 시칠리아를 정복했으며 1085년 스페인 기독교도 왕국은
이슬람의 수도 톨레도를 탈환했는데...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
에서 공의회를 열어 십자군을 제창하니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Deus lo vult" 함성이 터집니다.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알렉시우스 황제는 서유럽 병사를 빌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욕심으로
동서교회 분열로 인해 견원지간이던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교회는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로 동서분열이 된데다가 고위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와 투쟁중이던 교황은 교회세력을 키울 기회로 보고 승낙한 것이니 프랑스의 제후들이 응합니다.
전전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충돌해
파문에 처하니 불리한 상황인 황제는 1077년 1월 28일 교황이 머문 카노사성에 이르러 맨발로
눈이쌓인 바닥에 3일동안 서 있었는데....... 파문이 해제된 후 독일로 돌아가 새로 추대된 황제
루돌프와의 내전에서 승리한후에 1084년 로마를 점령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 시킵니다.
폐위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나폴리왕국의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1084년 5월 나폴리 군대
는 로마로 진입해 저항세력과 시가전을 벌인 끝에 교황 구출에 성공하지만 방화와 약탈이 자행되며
피해가 극심해지자 교황과 제휴한 노르만족의 만행에 대해 로마 시민들이 분노하니 교황은 도주해
쓸쓸히 죽었고....... 다다음 교황에 오른 우르바누스 2세는 교황청의 세력을 확대할 기회로 본 것입니다.
우르바누스 교황은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지배한 노르만족의 후원을 받았지만 로마로 들어갈
수도 없었으니 로마시내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교황의 거처인 라테라노궁전에는 접근조차
할수 없었는데, 거기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세운 대립 교황인 클레멘스
교황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라.......... 십자군을 통해 "교황 자리를 통일" 하고자 한 것입니다.
1차 십자군은 기병 8천명에 보병 4만 2천등 5만명에 달했는데..... 모든 죄를 사해준다는 십자군
에는 여러 왕들이 전쟁등으로 참가하지 못하니, 교황 대리 아마데우스 주교 외에
주요 제후들 중에 첫번째는 프랑스 남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로 우르바누스 교황과
가까웠다는데, 십자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지 일부를 팔아 2만이 넘는 병력을 인솔합니다.
두번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로마 에서 추방하는 등 하인리히 4세 황제에 충성한 하로렌 ( 벨기에
동부 ) 공작 "고드프루아 부용" 이니 영지는 북로렌의 영주 형에게 맡기고 3남 외스티슈, 4남 보두앵과
함께 출진하니 1만 2천으로 훗날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통치자가 되며 동생 보두앵은 영지가 없으니
십자군을 기회로 생각해 아내와 자식까지 데리고 떠나 결국 에데사 백작을 거쳐 예루살렘 왕위에 오릅니다.
세번째는 "풀리아 공작 보에몽(보에몬드)" 이니 5명의 기사와 150명의 병력만으로 1047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해 시칠리아 욍국을 건국한 노르망디의 노르만족 로베르의 장남인데 비잔틴제국을 정복
하려는 전쟁중에 아버지가 죽으면서 왕위를 이복동생 로게르에게 물려주자..... 풀리아의 소영지만
상속한지라 십자군에 나서니 1만 3천인데 보에몽의 조카 탄크레디는 아주 교활하며 유능한 장수 입니다.
네번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예루살렘을 순행한 적이 있었는데
1093년 백작의 지위에 오른후 30대로 정예병인 기병 5백으로 십자군에 참가했는데 용감하게
싸웁니다. 다섯번째는 정복왕 윌리엄의 장남으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이니..... 영국 왕위가
동생인 윌리엄 2세에게 주어지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는 방향을 십자군으로 돌린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불륜을 저지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왕비와 이혼했다가 파문당한 프랑스왕 필립 1세 대신에
동생 위그 드 베르망두아가 참가했습니다. 일곱번째는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사위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는 명성을 높이라는 드센 아내 아델라의 등쌀에 견디지 못해 1천으로 내키지 않는
원정을 떠납니다. 여덟번째 윌리엄은 안티오크 공방전 때 보에몽의 군대에 합류해 명성을 떨칩니다.
자신의 영지 일부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한 제후들의 십자군에 앞서 은자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은
1096년 4월 쾰른에서 5만명에 달했는데 돈이 없으니 헝가리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비잔틴의 "기독교 국가 도시들을 약탈하고 도둑질" 로 간신히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아시아로
넘어 갔으나 여기서도 약탈에 열중하던 중에 니케아 근교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 전멸 당합니다.
예루살렘을 사악한 이슬람교도 손에서 탈환하자는 성전인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민중십자군
이 소아시아에 들어와서도 약탈을 계속한 것은..... 미리 "식량이나 군자금" 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그들이 매우 가난한지라 돈도 없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신심이 깊으면 "하느님이 다 마련해 주신다" ....... 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내가 아는 신앙심이 지극히 깊은 성도 한분은 딸이 고신대학에 합격했는데 등록 마감 하루
전 까지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않다가..... 합격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갑자기 찾은
친척집에서도 돈을 빌리지 못하니 부리나케 목사님을 찾아갔는데.... 이는 “의심치
말라!”, "너희 주 하나님이 다 마련해 주신다" 는 굳건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 입니다?
유럽 침략군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안심한 셀주크 투르크의 룸셀주크국 술탄은 다음 해에
동쪽에 위치한 동족인 셀주크 투르크 다니멘슈드를 공격해서 전쟁중이었습니다. 하지만
1097년 5월에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제후십자군(1차 십자군)" 고드프루아등
은 콘스탄티노플 에서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를 침략해 "수도 니케아(이즈닉) 를 포위" 합니다.
소아시아 서부 니케아 Nicaea 는 지금은 오스만 투르크를 거쳐 터키공화국 영토로 이름은 이즈닉 Iznik
로 바뀌었는데.... 도시에는 유서 깊은 "아야 소피아 성당" Ayasofya Kilisesi 이 있으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1차 니케아 공의회와 3차 공의회" 가 니케아(이즈닉) 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열렸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이 달려왔을 때 수도 니케아(이즈닉)는 이미 포위된 상태였는데 서쪽
호수를 제외하고.... 북쪽에는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가 동쪽에는 풀리아 백작 보에몽과
조카 탄크레드, 남쪽은 툴루즈 백작 레몽과 아데마르 주교의 부대가 배치되었는데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마련한 식량과 물자의 수송은 보에몽이 책임졌다고 합니다.
예전에 비잔틴 제국이 건설한 니케아성은 길이 5km 성벽과 250개 망루에 서쪽에 있는 아스카니오스
호수는 천연 해자였으니..... 십자군과 비잔틴군은 맹공을 퍼부었지만 함락하지 못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민족 침입을 막으려 건설한 동로마의 성벽이 건축한 주인 비잔틴 황제의 접근을 막습니다?
1097년 5월 14일부터 5만명 십자군은 공성전에 돌입하니 동쪽 다니슈멘드와 전쟁을 하다가
휴전하고 급히 돌아온 술탄은 21일 남쪽 레몽 4세의 십자군을 공격했으나.... 응원군을
끌고 나온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의 부대와 합심한 중무장한 십자군 군대에 격퇴
되니....... 술탄은 훗날을 생각해서 "셀주크 기마대를 보존" 하기 위해 군대를 퇴각 시킵니다.
사기가 오른 십자군은 투르크군의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 공성기로 성벽으로 발사했으니...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심리전 이었는데 한쪽이 호수로 연결된 도시를 해군의 도움 없이 완전히 포위
하기는 어려웠으니 니케아성 셀주크 투르크군은 호수를 통해 식량을 공급받으며 한달을 버팁니다.
비잔틴 황제는 6월 17일 호수에 배를 보내 보급선들을 차단하고 부하 타키티오스는
2,000명의 지상군을 이끌고 십자군에 합류하는데, 알렉시우스 1세 황제는 도시
니케아를 십자군이 점령하도록 놔두지 않았으니...... 도시를 점령하는 날에는
원래 동로마제국 소유였던 니케아성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니케아 시민들은 한세대 전만해도 비잔틴 황제의 백성들이었고 대다수가 기독교라는 사실은 약탈에
눈이 먼 십자군에게는 사소한 문제일 것이라, 동맹과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셀주크의 술탄 클르츠
르슬란 과 알렉시우스 1세 황제간에.... 아주 은밀한 물밑 협상을 통해 서로 최선의 결과를 얻어냅니다.
젊은 술탄은 냉철한 판단을 보여주었으니 니케아가 룸셀주크국의 수도이긴 하지만 기마 민족인 투르크족의
권력은 도시가 아니라 "투르크 기마 전사" 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했으니 6월 19일 제후 십자군들이
전리품을 약탈할 기대에 들떠 니케아 성벽에 도달 했을 때에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비잔틴 제국의 깃발이라???
비잔틴 황제는 도시를 손상없이 획득한데 만족했으며 셀주크 술탄의 왕비와 갓 태어난 자식들은 콘스탄
티노플로 이송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니케아 함락후 황제로 부터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사들은 분개했으니.... 계획대로 "도시를 약탈했다면 더많은 전리품" 을 얻을수 있었을 것이라?
당시는 도시를 함락하고 난후 약탈은 승자의 권리 처럼 생각되었으니 무슬림 군대도 비슷하게 생각
했지만 탐욕스러운 십자군은 한층 더했는데....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술탄의 왕비를 극진히
대접했으니 오빠가 에게해의 스미르나(이즈미르)에 해상세력을 구축한 셀주크 투르크 족장 이었지요?
차카는 비잔틴제국을 정복할 야심을 가진 인물로 어린 클르츠 아르슬란과 동맹해 비잔틴제국
에 대항했으니 미노의 살모사 사이토 도산 처럼 딸을 클르츠 아르슬란에 결혼시켜 장인이
되었지만 사위의 땅을 노리니 술탄 아르슬란은 오다 노부나가 처럼 선수를 쳐서 적인
비잔틴의 도움으로 장인 차카를 제거한 후에도 딸은 왕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족장인 차카가 죽은후에 스미르나는 그 아들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왕비는 오빠에게 보내지니 술탄
아르슬란의 군대가 패배했고 비잔티움의 군대가 스미르나를 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전하자 오빠는 비잔틴 황제의 충고를 받아들여 싸워보지도 않고 자신의 왕국을 포기하고 도망칩니다.
니케아 공성전이 끝난 1097년 6월 26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터키 내륙
으로 진격하는데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는 구릉지라 투르크군이 매복하기 좋지만,
성지까지 가려면 어쩔수 없이 소아시아를 통과해야 하는지라 십자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데 돈이 있으면 구입했고..... 없으면 별수없는지라 현지에서 약탈합니다.
십자군은 규모가 컸기 때문에 식량을 콘스탄티노플에서 보급해오니 거리가 멀어지자 문제가 커지는데
보에몽과 탕크레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비잔티움 장군 타키티오스
의 군대는 전위대에 속해서 먼저 떠나고, 후일 예루살렘왕이 되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 과 보두앵,
총대장격인 레몽 4세, 블루아백작 스테판 그리고 위그 백작의 군대는 후위대로 그 뒤를 따랐습니다.
남이탈리아 풀리아의 노르만족 보에몽이 이끄는 전위대가 니케아에서 가까운 도릴라이온 근처를 지날때
투르크 정찰병을 보고는 곧 대규모 부대가 나타날 것임을 예측했는데, 클르츠 아르슬란은 적이
생각하는 것 보다도 대규모의 반격 작전을 계획했으니 도릴라이온을 반격의 장소로 택했던 것입니다.
룸셀주크국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셀주크 동족이자 적수인 다니멘슈드 를 반격작전에 끌여들였으니
다니멘슈드 역시 기독교 군대가 룸 셀주크국을 점령한 후에는 자신도 공격할 것으로 생각
했는데 카파도키아의 하산등 다른 동맹국들도 끌여들여서는 병력은 30,000 정도의 대군을 모읍니다.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왕비를 버리고 후퇴해 터키 중부 콘야를 새 수도로 정하고 니케아
(이즈닉)에서 가까운 도릴라이온에 집결한 3만 투르크 연합군은 1097년 7월 1일 새벽에
풀리아 백작 보에몽이 이끄는 1만명 십자군을 공격하니 위기에 봉착하지만 보에몽은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과 그전 아풀리아 계승전쟁을 통한 전투 능력과 위기관리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보에몽은 말에 탄채 산발적인 반격을 하는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해 전열을 유지하고 공격을 막으
라고 지시하니 보병과 비전투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갑옷으로 중무장된 기사들이 앞
에서 방패와 검으로 버티고 있으면 가벼운 갑옷을 입은 투르크 경기병들은 뚫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셀주크 투르크군 은 우세한 병력으로 십자군을 포위하고는 기마 궁병들은 활을 쏘면서 공격했는데....
정오쯤 고드프루아가 달려오고 뒤이어 후위 부대의 원군이 속속 도착해 레몽 4세의 기사들이
포위된 부대를 공격하는데 정신이 팔린 투르크 부대를 측면에서 기습하자 전세는 역전 됩니다.
십자군 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하니 좌측에는 보에몽과 탕크레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스테판 백작의 군대가 중앙에는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레몽 4세 우측에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위그
백작의 부대가 위치해 투르크군을 밀어내기 시작하는데, 아데마르 주교가 이끄는 부대가 투르크군
진지 뒤에서 불쑥 나타나니 당황한 투르크 연합군은 기마민족의 기동성을 이용해서 신속히 퇴각합니다!
투르크 군대는 황급히 도망가는 바람에 많은 전리품 이 십자군에게 남겨졌으니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십자군 은 “신께서 너희를 부자로 만드실 것이다!” 라고 외칩니다!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은 신앙심 외에 물욕도 대단했던 것이라?
클르츠 아르슬란은 초토화 작전으로 우물 하나 곡식 한톨 남기지 않았으니 십자군은 병사와 말들이 기아
와 갈증으로 고통받고 사망했으며 고통스런 행군은 6주간이나 이어진후 콘야에 도달해 식수와 식량을
보충하고 동남쪽 아르메니아인 영토를 통해 안티오키아를 거쳐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으로 진군합니다.
하지만 볼로뉴 막내인 보두앵은 장남에게 모든 영지가 상속되는 관습으로 인해 자기 영지가 없어 형에게
더부살이하던 처지라 자신의 영지를 개척 하려는 흑심을 품고 가족까지 데리고 십자군에 가담했으니
십자군이 실리시안 관문을 통과하자 2500명의 별동대를 이끌고 본대를 이탈해 토로스 산맥을 넘습니다.
노르만 타란토 공작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도 영지가 없는지라 역시 300명의 병력을 이끌로 토로스 산맥
을 넘어서 타르수스 Tarsus 에 도착했으나.... 병력이 적어 성공하지 못하던차에, 보두앵이 더 많은 군대를
가지고 도착하면서 두 장수는 함께 도시를 함락했지만 도시를 점령한 후 보두앵은 탕크레드를 쫓아 냅니다.
보두앵은 도시를 차지하려는 욕심에 이후 도착한 다른 십자군을 성안으로 들이는 것을 거부 했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전멸되자 악화된 여론에 어쩔수 없이 도시를 포기하고 출발했다가.... 탕크레드가
점령한 작은 성에서 결국 두 군대는 충돌해 전투를 치르고는 다른 지휘관들의 만류로 간신히 멈춥니다.
1098년초 안티오크 전투에서 보두앵은 포위전에 참가하지 않고 동쪽을 방어하며 처자식이
죽어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기회를 잡으니 아르메니아 군주 토로스 (Thoros)로 부터
원군 요청을 받고는 2월 6일 수천 병력을 이끌고 에데사에 도착해 양아들이 된후 불과
한달 후인 3월 7일 양부 토로스를 죽이고는...... 에데사 백국을 세워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십자군은 어렵게 터키를 종단해서는 다시 산맥을 힘겹게 넘어 안타키아에 도착하는데
안타키아(안티오키아) 는 BC 2,000년경 까지는 시리아 알레포의 야무하트왕국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BC 17세기에는 앙카라 동쪽 핫투샤에서 일어난 히타이트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제국이 붕괴된 후에 BC 841년 까지 몇개 공국이 분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