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 의도된 공동체 안에
최태선(2023.04.23 12:54)/가톨릭 일꾼
하느님이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셨다.
그리고 이름을 붙이셨다.
“하느님이 창공을 하늘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 역시 말에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를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런데 아담에게 그 다음 일을 맡기셨다.
“주 하느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아담이 이르는 것, 다시 말해 그가 지은 이름이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들의 정체성이 되고 역할이 되었다. 이처럼 인간의 말이 하느님의 창조의 일부분을 맡았을 뿐 아니라 창조에 기여했다. 여기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다른 피조물과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말의 능력을 가진 자로서 합당하게 살지 못했다. 말의 능력을 가진 인간은 그러나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창조의 관리자로서)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먼저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은 하느님의 존재 방식처럼 공동체로 존재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한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아담의 뼈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들도 하느님처럼 공동체로 존재할 수 있도록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아담이 하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나는 "Alter Ego"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이 단어의 의미는 ‘또 다른 나’ 혹은 ‘절친한 친구’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 관계에서 텔레파시가 통한다. 그러니까 "Alter Ego"는 ‘telepathy’가 통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tele"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pathy"는 마음으로서 공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Alter Ego"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것이 하느님의 존재방식을 따라 지어진 인간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 이후 인간들의 이런 관계가 박살이 났고, 마침내 그 관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은 하나뿐이었던 언어가 하느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말의 분열은 단순히 여러 언어가 나타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 "Alter Ego"가 될 수 있었던 인간들이 더 이상 그런 관계가 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은 단순히 오늘날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특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거역한 인간들이 가지게 된 숙명이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의 존재 방식대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존재방식과 관계의 회복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나 예수님은 말을 회복시키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위의 말씀을 잘 음미해보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주님, 주님'이라는 말을 아무리 많이 사용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아래 말씀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지매와 형제가 된다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만난다는 것은 관계의 회복이며 말의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말로 분열된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해주셨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의 뜻은 당연히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할 때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더해진다. 그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인간의 존재 방식의 회복이다. 인간이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형상을 좇아 하느님의 형상의 존재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 모습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순교 앞에서 그들이 보여주었던 기쁨으로 로마라는 제국을 전복시켰습니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그 차이에 대한 그리스 신약성서의 답은 ‘코이노니아’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는 종종 ‘나눔’으로 번역하지만 이 단어는 더 구체적으로 ‘의도적인 공동체’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의도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내서>에서 인용)
그렇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오직 의도적인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깨어진 모든 관계의 회복이 가능한 것은 의도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동시에 그곳에서의 교제와 나눔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자 하나님의 정의의 구현이다.
나는 열린 종교야말로 참된 종교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실, 오직 의도적인 공동체 안에서만 진리가 가능하다는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신 것처럼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