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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경교회사(1896~2010)
교회사 발간에 즈음하여
담임목사 장 철 희
1900년 가을 전위렴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몇몇의 신자들이 모여 대야면 중만자 초가삼간에 둥지를 틀고 태동한 지경교회는 110년의 역사를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껴안은 채 빛과 소금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은 우리교회는 1910년 한일 합병으로 인한 망국의 한을 품고 구국기도회와 철야기도회로 밤을 지새웠으며 서슬 퍼런 흑암의 일제치하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1919년 3월 1일 기미 대한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애국기도회를 가졌으며 그 결과 많은 핍박과 강흥선 성도 이순길 성도가 투옥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후 광복과 6․25동란, 민주화 운동 등 숱한 고난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라온 우리교회였으니 뒤돌아보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경교회를 통해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자라게 하시어 전북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목회자와 각계각층의 수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이셨습니다.
이제 선교 200주년을 바라보면서 우리교회는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전파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복음 전파를 위한 전도특공대활동, 단계별교육, 새생명축제, 알파, 지역섬기기 일환으로 행해지는 큰들 축제, 노인대학, 장애우 섬기기 등은 지역사회에서 좋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인도에 테리토리교회와 짚시 지경교회, 필리핀에 교회를 세웠으며 국내외 많은 선교사와 교회를 후원하는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며 또 달리라 하시기에 소망을 품고 순종하며 달려갑니다.
교회가 점점 젊어져야 합니다.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오지 않는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교회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준비할 때입니다. 장학금을 마련하여 배움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지원하고 신앙이 돈독한 인재를 키우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흥 발전하는 지경교회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지역민을 품을 수 있는 교육관 건립과 1212세계비전 즉 1200사역자 세우기, 12선교사 파송하기, 12교회 개척하기, 1인 12제자 삼기를 목표로 제자 되고 제자 삼는 사역에 온 성도는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사를 발간하면서 노령에도 불구하고 자료수집부터 집필까지 수고해 주신 이길구 장로님께 감사를 드리며 지경교회사가 나오기까지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당회원과 교우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경교회 110년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2010년 10월 서재에서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146 : 1)
지경교회 창립 11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지경교회 110년사를 발간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1896년 임피군 남산면 만자산리에 복음의 씨가 떨어져 예배 처소가 되어 1900년에 중만자에 예배당이 서게 되어서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민족의 수난기(1900년대)에 지경교회가 복음을 수용하여 호남선교의 거점으로 우뚝 서서 군산 개복동교회, 익산 고현리교회, 이리 후리교회(이리제일교회), 충남 서천에 교회를 세우고 이곡교회(옥성교회)를 개척하는 등 야베스의 기도(대상 4:10)와 같이 지경을 넓히는 전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위해 기도했고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민족정기를 고취하였으며 6․25전쟁의 시련 가운데에 신앙을 지켰고 제37회 총회 이후 신앙 노선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주님의 은총 속에서 화평한 믿음을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80년대에는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게 하시어 유신독재와 타협하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우리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날로 부흥하여 늘어나는 성도로 예배당이 비좁아 큰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역사 앞에 과거를 앎으로써 오늘의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교회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보존하고 기리며 본받아서 새 역사를 창조해야겠습니다.
지경교회 110년사는 본문과 부록으로 편집하는데 사진자료와 인물사를 중심으로 부록을 편집하였습니다.
이 책이 완성되기까지 수고하신 이길구 장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쁘신 가운데 기꺼이 원고 집필을 승낙해주시고 10여 년간을 자료 수집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면서 지경교회 산 증인으로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를 집필하시면서 과로로 몸이 쇠약한 가운데 탈고하시어 지경교회 110년사를 발간할 수 있도록 협조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지경교회 전임 역사편찬위원장이신 고 김영엽 장로님이 투병 중에서도 역사편찬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시면서 교회사 발간을 걱정하셨던 결과 110년사를 발간함에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박상만 장로님께서 타자해 주시고 김성원 권사님께서 사진을 수집 편집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원고 검토와 교정 등 여러 모로 협력해주신 역사편찬위원과 지경교회 당회원 여러분과 이 책의 출판에 아름다운 책으로 꾸며주신 우일프로세스 이병일 사장과 직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0년 9월
지경교회 역사편찬위원장 이 인 래 장로
회 고 록 (주후 1950~1970)
지나간 삶을 되돌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모교회 지경교회에서 지난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심히 가슴 설레며 벅찬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백달메 만자 부락에 복음의 씨앗을 심으시고 장족의 부흥을 주신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회고해 보면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도 기쁘고 즐거워서 이길구 장로님을 중심으로 밤마다 조개탄을 스토브에 넣고 신문지로 부채질을 하며 불을 지피고 가리방을 긁어 등사판에 밀었고 손에 검은 잉크가 묻으면 휴지로 닦아가며 주일학교 어린이 찬송가를 밤늦게까지 만들었던 그때의 그 모습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쳐갑니다.
누가 모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모였었지요.(장동선 선생, 조수산 선생, 신영근 선생, 임복안 등)
어느 때는 신영근 선생(지금은 장로님) 댁에서 모여 밤새도록 준비했었습니다. 여름방학 때는 하계 성경학교를 개강하여 일주일씩 가르쳤고 분반공부, 동요시간, 동화시간에 흥미가 진진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즐겁게 모여들었습니다.
특별한 것은 타 교회들이 하지 않는 겨울방학 때고 겨울 어린이 학교를 개강했습니다. 그때 모여든 학생들의 수는 거의 600명 정도였으니까요. 자리가 좁아서 각반 공부 때는 밖으로 나아가 교회 길 건너 건물을 빌려서 각반공부를 했던 일이 자랑스런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여름철 하계학교 설교시간에 꽉 들어찬 어린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지요. 가대상까지 들어가는데 아이들을 제치고 들어갔습니다. 하강대상 뒤쪽에도 아이들로 가득 찼지요. 설교하는 저에게 서용문 장로님이 투박한 큰 부채를 들고 부채3질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부채질을 신나게 하실 때 설교는 더 신이 났고 은혜로웠습니다. 그때 교사는 거의 30명이 넘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교사도 여러 분 계셨습니다.(조수산, 최귀복, 김이분, 임복안)
앞날을 바라보며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시켜야 한다고 이길구 장로님이 사범반을 특설하셨습니다. 사범반에서는 교육학, 교수법, 아동심리를 강의했습니다.(타 교회는 생각도 못한 때였습니다.)
교사들이 휴대용 확성기를 짊어지고 북치며 복교리 장좌리로 나가 밤에 전도했던 일, 내상리로 나가 전도했던 일은 열심의 절정이기도 했습니다. 자가용도 없이 먼 길을 걸어가서 전도했던 일들이 그렇게도 보람이 됩니다.
김영엽 어린이는 저를 교회 선생님, 학교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당시 초등3학년 재학 중 담임교사였음) 그 후 김영엽 어린이는 장로님이 되었고 40여년 찬양대를 지휘한 충성자였는데 그의 소천에 허전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김영엽 어린이와 한 반에서 공부했던 최영귀 어린이는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정년하였으며 요코하마교회의 장로님으로 충성하고 있고 그의 초청을 받아 저의 부부가 9박 1O일로 일본을 관광하기도 하였으니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습니다.
세월은 유수같이 빠르고 우리 세대는 늙어가고 다음 세대가 계속 주일학교 중고등부를 헌신적으로 지도하므로 모교회인 지경교회는 힘차게 자라가고 있습니다.
그 후 장경동 어린이가 크리스마스 때, 떡 얻어먹으러 나오게 하시고,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성장하여 금세기 40대부터(지금은 50대이지만) 영적 기수로서 세계만방과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치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면 주님의 섭리가 감사요 기쁨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당시 이길구 장로님의 헌신적이고 의욕적이고 주님을 향해 가득했던 충성심이 우리들을 이끌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충성한 자들에게는 참다운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신 훌륭하신 역대 담임목사님들의 기도와 충성된 목회에서 지경교회는 눈부시게 부흥해 왔으며 모교회인 지경교회는 이제 120년사에서 150년사, 200년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후배들도 더욱 교회를 섬겨 큰 축복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회고록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10. 9. 14
지경교회 출신
기독교한국침례회 군산성복교회 담임목사 임 복 안
전 도 하 자
(사도행전 1:8)
1951. 9. 23. 주일설교 / 이 진 휘 목사(당시 27세)
오늘날의 신자는 벙어리 신자같이 보입니다. 먹기만 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터인데 그러고 있는 것 같아서 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7억의 기독교 신자가 있다고 하는데 모두다 전도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복음은 12제자로부터 120문도로, 500여 무리로,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3천의 무리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1. 전도의 의의를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첫째로, 전도는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되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았다. 신앙의 눈으로 틀림없이 보았다” 하는 것을 증명하여주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합니다.
둘째로, 전도는 간증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았는데 예수님은 참 구주이시다. 믿어보니 참 좋더라” 하고 간증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셋째로, 전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전도는 파수꾼처럼, 목자처럼, 마리아처럼 그리고 신문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악으로 인하여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오셨다”는 복음의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잠언 15:30에서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잠언 25:25에서는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넷째로, 전도는 받은 은혜 감사하여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치료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기뻐서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해주셨다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왜 받은바 은혜가 있음에도 감사를 안 하십니까?
그것은 죽은 바다인 사해(死海)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요단강은 흐르는 강이지만 사해는 막혀 있는 죽은 바다 아닙니까?
다섯째로, 전도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자랑, 부인자랑, 자녀자랑, 자부자랑하면서 그리고 어떤 일에 자신의 공치사를 빠뜨리지 않으면서 예수님 자랑 즉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도는 예수님 자랑을 하는 것으로 틈만 나면, 기회만 되면, 예수님 자랑이 되는 전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2. 전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전도는 감옥에 갇혀있는 자를 놓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사면장(赦免狀)을 가지고 오는 배달부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 사면장을 전하여주지 않으면 해당 죄인은 죽게 될 것입니다. 사면장을 받는 사람이 그 사면장을 신임하든지 안하던지 간에 우리는 사면장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사람(죄인)에게 전해야 합니다. 만일 전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키 어려운 화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6에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사면장을 들고 가는 배달부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둘째로, 전도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도는 길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로 말입니다. 지금 믿지 아니하는 자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방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불교를 믿어보고 천주교를 믿어보고 천도교를 믿어보고 유교를 믿어보며 이 것 저 것 다 해보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엉뚱한 길로 가다가 넘어져 빠져 죽으면 그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전도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과 미신과 근심과 걱정의 짐에서 헤매고 있는데 전도를 통하여 그들의 그 짐을 벗겨주어야 합니다. 일례로 불신자들은 제사(祭祀)와 같은 무거운 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짐을 벗겨주어야 합니다.
넷째로, 전도는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즉 전도는 죽을 사람을 살려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2:1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다섯째로, 전도는 깜깜한 밤에 불을 켜주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에게 그리고 빌립이 구스 내시에게 말씀을 전한 것은 깜깜한 밤에 불을 켜주는 것과 같은 생명의 빛을 밝혀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오지(奧地)인 아프리카와 남양군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도, 그리고 우리의 주위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도 바로 깜깜함을 물리치는 광명의 빛을 주는 것입니다. 꺼지지 않을 생명의 빛을 비춰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3. 전도의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로, 전도는 말로 해야 합니다.
로마서 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셨지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시인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됩니다. 최권능 목사님이나 무디 목사님 같은 이들도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말로 전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둘째로, 전도는 기도로 해야 합니다.
전도는 우선 말로 그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여야 하지만 기도를 안 하면 안 됩니다.
중세철학의 거두였던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목숨을 다하는 기도 때문에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전향하는 회심(回心)을 하였습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영국에서는 8세 소녀가 42명의 사람들을 기도로 전도하였다하고, 인도에서는 52인이 작정기도를 하여 전도에 힘썼다고도 하며 미국에서는 의사인 남편의 전도를 위하여 3년 동안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일주일 금식기도를 통하여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셋째로, 전도의 방법 가운데는 봉사적인 전도 방법도 있습니다.
영혼을 하나 살리려면 시간도 내고 희생하면서 대상자를 찾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맛을 보라하면서 무엇인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농사일도 거들어주기도 하고, 빨래도 해주고, 장에 갈 때 같이 가기도 해야 합니다. 실제로 평양의 신학생은 노인네의 짐을 대신 져주고서, 또 숙제를 대신 해주고서, 앉은뱅이를 등에 업어다 주고서 전도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넷째로, 전도는 또 생활로 본을 보여줌으로써 해야 합니다.
전도 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인격적인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해야 합니다. 생활을 통해서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믿는 집에서 고성이 나고 싸움하는 소리 그치질 않고 부인 욕하고 거짓말하고 욕심 부리고 혈기 부리는 등 옛날에 하던 습관대로 한다면 주님 말씀대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니 결국은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특히 행위로 전도해야 합니다. 예배당에서는 천사인데 집에 가면 마귀가 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손주들이 예배당에서 보는 할아버지와 집에서 보는 할아버지가 같아야 합니다.
다섯째로, 우리의 형편과 처지대로 있는 것 가지고 전도해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는 있는 것 가지고 엘리야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해본 결과 기름과 떡이 안 떨어졌습니다(왕상 17:8~24 참조). 또한 어떤 과부는 엘리사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있는 것 가지고 있는 대로 함으로 부채보상 받았습니다(왕하 4:1~7 참조).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5餠2魚) 가지고 있는 대로 주님께 바치니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마태 16:9; 누가 9:10~17 참조).
전도할 수 없다고 핑계하면 안 됩니다. 있는 것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우리 지경교회는 전도하는 교회가 됩시다.
교회는 마치 기계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왕에 우리 지경교회는 복음의 자녀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돌아가는 기계가 되어야만 합니다. 기계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 기계는 소용이 없어 복음의 자녀를 생산 할 수 없고, 끝내는 고장이 나 복음의 문이 닫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계는 잘 돌아가야 하고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기름을 늘 바르도록 해야 합니다. 기름이 없거나 부족하면 기계가 잘 돌아갈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엿장사가 됩시다.
우리가 엿장사가 되었다면 목이 쉬도록 골목까지 들어가서 외칩시다. 우리 주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지경을 넓히는 우리 지경교회가 됩시다!!!
학병 입영 축하 예배
때 : 1944년 1월 25일 후 6시
곳 : 지경교회당
학도병 입영자 :김 순 남 씨(장남) 김 중 현(동경제대 상학과)
김 석 두 씨(2남) 김 순 만(수원 고등 농림)
강 태 만 씨(장남) 강 중 철(명지대학 법학부)
당사자들은 이미 입대한 후여서, 사또 뜨자 나팔 부는 격이었고, 일본 당국의 강요에 의해서 축하예배라는 이름은 억지로 붙인 것이고, 이 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이 침략자의 용병으로 강제로 끌려가는 것은 참기도 어려운 슬픔 일이었다.
최문환 목사 위임식
때 : 1943년 5월 23일 후 3:00 ~
곳 : 본 교회당
주례 : 군산노회 시찰장 이 창 규 목사
- (국민의례)
- 묵도송
- 기도 : 김 호 연 목사
- 성경봉독
- 특송 : 지경교회 성가대원 중
- 설교 : 최 상 섭 목사
- 찬양 : 본 교회 성가대
- 서약 - 선언 : (시찰장) 이 창 규 목사
- 권고
(1) 교회에 대하여 : 이 수 현 목사(개복동)
(2) 목사에 대하여 : 고 성 모 목사(이리 고현)
- 축문 피력 : 양 해 근 장로
- 답사 : 최 문 환 목사
- 송영 : 본 교회 성가대
- 축도 : 이 창 규 목사
※ 본 행사는 지경교회 최초의 행사임. 이전에 고성모 목사가 시무목사(담임)가 된 일은 있으나, 김제 대창교회와 공동 시무하였고, 또 본 교회 장로 출신이라 생략하고 간단히 기도회로 마친 것 같음.
※ 최문환 목사는 본 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공부를 하였고 강도사 고사를 치룬 후 목사가 된 첫 취임식이었음. 1945년에 동련교회로 옳겼으며, 전주중안→ 동련으로 이동하였고, 마침내 기장 제52회 총회장도 역임한 분임.
연합 산상 예배
때 : 1943년 5월 30일 오전 11시~
곳 : 옥구군 개정면 통사리 뒷산
참가 : 지경, 발산 양 교회 어른 210명, 동 어린이 200명
주최 : 지경, 발산 양 교회 합동 주최
1부 예배 사회 : 최 문 환 목사
묵도, 찬송 281장, 기도 : 신 덕 칠 장로(발산)
성경봉독(최 문 환 목사), 성가(지경 성가대)
설교 : “하나님의 사랑” - 고 성 모 목사, 기도
특송 : 발산 주교 학생, 찬송30장, 축도(고 성 모 목사)
폐회, 점심 식사
2부 어린이 예배 및 행사
찬송, 기도, 성경봉독, 별창(발산 유년주교)
아동 설교 : 최 문 환 목사, 기도
※ 양 교회 유년주교 특별 순서
(합창, 율동, 유희, 독창 등)
- 특별 동화 : 석정인 선생(함흥 영생교회 선생, 석정순 집사 여동생)4
※ 매년 5월 꽃주일(어린이 주일) 또는 가을 소풍이 군내 주일학교 연합회 또는 제직회 주최로 있었으나, 최근에는 당국의 압력으로 중단되었으나, 금년에는 새 목사님 취임 축하예배 겸하여 개최된 유일한 행사였으며 매우 성대하고 뜻 깊은 모임이었음. - 일제 말기의 마지막 행사였음.
당일 화창한 늦은 봄, 통사리 뒷산에 두 교회 250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뜻 깊은 야외예배와 즐거운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두 교회가 분리되어 서로 만나는 기회가 거의 없어져, 길게는 4년여 만에 상봉하는 이들도 많았다. 참 반갑고 뜻 깊은 모임이었다.
발산교회 분립 예배
때 : 1938년 8월 28일 11시(주일 낮예배)
곳 : 지경교회당
※ 발산교회 분립으로 나가는 교인 수 : 신덕칠 장로, 최규일(안수집사)와 42인
사회 : 이 덕 순 전도사
개회
묵도 (송영) : 성가대
찬송 : 제 5장(할렐루야 찬송)
기도 : 최 재 선 집사
성경 봉독 : 사회자
찬양 : 지경교회 성가대
설교 : 부 위 렴 선교사
기도 : 부 위 렴 선교사
인사 : 발산 대표 신 덕 칠 장로
기념품 증정 : (교회당 용 계종) 강 순 실 집사
찬송 : 288장(이전보다 더 사랑함)
축도 : 부 위 렴 선교사
(광고) : 양 해 근 장로
오찬 (국수와 떡)
다같이 오찬을 마친 후, 본동 교인들은 두 줄로 서고, 발산 교인들은 그 줄 안으로 한 줄로 걸어 나갈 때 본동 교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송하고 행사를 마침.
발산 식구 40여 명의 분립은 발산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신앙이나 지도력 그리고 뭉치고 단결하는 응집력이 본동 교회 인사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오히려 넘치는 활력으로 보면 나가는 숫자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본동 교회에는 당분간 그 빈 자리 뿐만 아니라 지도력이나 선교의 추진력에 있어서도 큰
부위렴 목사 송별 예배
때 : 1941년 4월 6일 오전 11시 ~
곳 : 지경교회 예배당
주최 : 지경교회, 발산교회 공동 주최
◇ 1부 예배
사회 : 최 문 환 목사
개회사 : 최 문 환 목사
송영 : 지경, 발산 연합성가대
기도 : 신 덕 칠 장로
찬송 : 제 6장(도우심을 구함)
성경 봉독 : 양 해 근 장로
찬양 : 연합성가대
설교 : 고 성 모 목사
광고 : 강 순 실 안수집사
※ 부위렴 목사 부부는 상단 준비된 자리에 앉음.
◇ 2부 송별예배
개회사 : 최 문 환 목사
기념품 및 꽃다발 증정 : 불 목사 내외분에게
기도 : 양 해 근 장로
축창 : 성가대원 중에서
송별사 : 라 반 선 안수집사
답사 : (사랑하는 여러분과 작별하면서!) 부 위 렴 선교사
송별 기도 : 고 성 모 목사
축도 : 부 위 렴 선교사
찬송(다같이) : 236장(우리 다시 만나볼 동안)
예배 마친 후 국수와 떡으로 간소한 점심 잔치를 끝으로 부위렴 목사 내외의 선교 사역은 끝을 맺었다.
최찬경, 양해근 장로 임직 10주년 기념식
때 : 1945년 2월 25일(주일) 오전 11시
예배순
1. 묵도 2. 찬송 1장 3. 기도 : 신덕칠 장로 4. 시편 23편
5. 취지 설명 (주관자) 최문환 목사 6. 특별순서 : 유년 수련회생
7. 찬송 228장 8. 성경 : 고후4:7~18 - 김 목사(서수)
9. 광고 : 이 원 석 집사 10. 약력 : 나 반 석 집사
11. 특순 : 유년 수련생 12. 설교 : 김 호 연 목사(서수교회)
13. 기도 : 설교자
1. 독창 : 발산교회 여 청년
2. 축사 : 신 덕 칠 장로
3. 예물 증정 : 교회 대표 - 강순실 집사, 여전도회, 발산교회 채규일 집사
4. 답사 : 최찬경, 양해근 장로
5. 찬송 : 1장
6. 축도 : 최 문 환 목사
7. 사진 촬영
8. 폐회
전환기의 교회 직원들 (1945~1960)
1945~최문환 목사,장로 : 최찬경, 양해근
(안수집사) 강순실, 라반석, 최재선
집사 : 이원석, 문동실, 이병화, 김은동
여집사 : 석정순, 장은숙, 박성여, 서현순, 최정애
전도사 : 임춘자
1946~이성춘 목사,최찬경, 양해근
강순실, 최재선, (라반석→ 개복동)
이원석, 문동실, 최순열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박성녀, 서현순, 최정애
최대원, 김창호 (집사)
최경순, 주은덕 (집사)
(여전도인) 권순정
1950 이성춘 목사,장로 : 김창호(5.11) 안수 임직(순국)
안수집사 : 최대원(5.11) 안수 임직
집사 : 유희열, 이관섭
(여전도인) 권순정
1951~이진휘 목사,최찬경, 양해근, (최대원), (이원석)
(안수집사) : 최재선, 강순실, 문동실
집사 : 이관섭, 유희열, 최순열, 양재순, 이선도, 김광련
여집사 : 서현순, 장은숙, 주은덕, 최경순, 고영순,
김복례, 장한나, 강경옥, 최정애, 석정순
※ 주일학교장 : 이원석, 학생회장 : 이길구
성가대장 : 강순실, ◎ 최찬경 장로(52. 4. 12 소천)
1952 이진휘 목사,(집사) 이봉일, 최양원(4.18 피선)
(여집사) 임옥화, 박복례
1953 이진휘 목사,※ 여전도회장 : 장은숙, 서기 : 김춘자, 회계 : 서현순
주일학교장 : 최대원, 서기 : 김종하, 회계 : 양재순
청년회장 : 이봉일, 서기 : 서용문, 회계 : 이관섭
학생회장 : 이길구, 서기 : 신영근, 회계 : 양기현
교회 회계 : 유희열, 서기 : 최순열
(여집사) 조성녀, 김양희, 함순자, 채경이, 김예영
1954 이진휘 목사,※ 여전도회장 : 장은숙, 서기 : 김춘자
주일학교장 : 문동실, 서기 : 신영근, 회계 : 양재순
청년회장 : 최순열, 서기 : 서용문
학생회장 : 김용환, 성가대장 : 이봉일
교회 회계 : 이봉일
1955 이진휘 목사, (집사) 정광삼, 원영옥, 전이순, 김판례
※ 여전도회장 : 장은숙, 주일학교장 : 문동실
청년회장 : 이길구, 학생회장 : 양기영
성가대장 : 이길구, 교회 회계 : 유희열
1956 이진휘 목사,(집사) 이길구
※ 여전도회장 : 장은숙
주일학교장 : 이길구, (부) 문동실, 서기 : 임복안
부서기 : 이호일, 회계 : 이준섭, 양재순
성가대장 : 이봉일
청년회장 : 이봉일, 학생회장 : 신영근
교회(제직회) 서기 : 이준섭, 최순열
교회(제직회) 회계 : 유희열
1957 양동조 목사,장로 : 양해근, 이원석, (최대원 → 경창교회)
안수집사 : 최재선, 문동실, 강순실
서리집사 : (전년과 동)
임복안, 유판동, 김우봉, 강복례, 문옥주
김판녀, 장만례, 박윤자, 김경숙
※ 여전도회장 : 장은숙, 주일학교장 : 강순실
청년회장 : 이길구, 학생회장 ; 신영근
◎ 제직회 서기 : 서용문, (부) 이준섭, 회계 : 유희열
성가대장 : 신영근
1958 양동조 목사, 양해근, 이원석, (유희열, 강순실) : 1957.11.17 임직
(집사) 최양선, 최지헌, 김종하 - 임명
(최덕례, 채보세 - 임명)
※ 여전도회장 : 장은숙, 주일학교장 : 최양선
청년회장 : 문동실, 학생회장 : 양대용
◎ 제직회 서기 : 서용문, (부) 이준섭, 회계 : 유희열
성가대장 : 최양선
1959 양동조 목사, 집사(신규) 문산곤, 한귀남, 방시남, 김판순
1960 김재석 목사,(전도사) 장정기
(기타 - 전과 동일함)
김태성 전도사
- 賀川豊彦(KagawaToyohiko) 교수를 만나 기독교 인도주의(人道主義)와 열렬한 선교정신을 배우다. -
김태성(泰星)은 만자산 김해김씨의 수장격인 김득수(得水)씨의 장남이며, 김근철(장로, 목사)의 백부이다.
6세 때, 모친인 하동 정부인(선교부 전도인)이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작고하여 계모인 서씨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총명하고 활달하여 때로는 계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군산영명학교를 중퇴하고 당시 유행하던 중학강의록으로 독학하여, 일본 고우베(神戶) 신학교 예과(豫科)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우베 신학교에서는 일본의 기독교사회주의의 대가(大家)인 카가와 도요히교 교수를 만나 그이 훈도를 받게된다.
카가와 교수는 아라까와 빈민굴 전도를 1907년부터 시작하였는데 태성은 그를 따라 그 빈민굴 선교에 참여하면서 지도목사의 눈에 들게 된다.
그는 유아이가이(友愛會)라는 관서(關西)지방 노동연맹의 말단 간부가 되어 미쓰비시(三菱) 조선소 노동쟁의에도 참여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해독에 묻혀진 빈곤이라는 사회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으로 해결하려는 일에 적극 참여하여 카가와 교수와는 사제간 이상의 동지적 결속이 이루어진다.
노동쟁의의 해결, 협동조합, 요양소, 노동자 정당의 설립, 구체적인 노동자⁃농민 운동, 사회사업 등에 교수를 도우면서 적극 참여하여 좋은 교육을 받아 신학교를 마치게 된다.
그는 그 동안 고생하면서 체득한 학문지식과 사회활동 경험을 고향에 가서 봉사하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일 때도 있었지만 그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일본의 정세가 급변했다. 전쟁은 확대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니 군부와 극우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노동조합은 자진 해산의 형식으로 해체되었다. 복지정책이니 노사협상이니 하는그 동안의 꿈은 무산되고 군국주의의 암흑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결심했다. 빨리 귀국해서 고향 사람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알려주고 무서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지도하리라는 것이었다.
가가와 선생은 그의 뜻은 알겠으나, 조선의 사정으로 보아 그의 신변이 위험하니 귀국하는 것을 말렸으나, 그는 잠깐만이라도 다녀오겠다고 하며 귀국하였다.
부산을 경유해서 고향에 와보니, 이곳은 닥쳐올 위기에 아직은 평온한 편이었다.
그는 교회와 마을에서 친지들에게 닥쳐올 위기, 즉 전생의 확대로, 이곳에도 곧 징집, 지원병 등으로 강제 입대시키고 징용으로 끌려가게 될 것, 그리고 양곡 공출, 물자 통제 등 무서운 시기가 금방 닥쳐 올테니 좀 안전하게 피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리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재차 일본으로 떠났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떠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경찰과 헌병대가 그의 본가를 수색하고 체포하려고 비상선을 치곤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한 사람들은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의 동생인 태현, 조카인 근철 등은 만주로 피하여 무순탄광의 잡역부로 들어가 강제 징용으로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면하고, 종전되자 바로 귀가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을 알게 되고 슬기롭게 처신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김태성은 그의 꿈은 광복 후의 다음 기회로 미루고 교회 제직들에게 짧은 인사만으로 일본을 향해 떠났다. 그의 활동 무대는 다음 광복 후로 미루어진다.
이성춘 목사 임직식
이성춘 목사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1905년생이다.
1920년 신창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소학교를 거쳐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1935, 나주 도곡리 개척 전도 → 삼도리, 내산리, 송산리 그리고 전북 고창읍 교회에 부임함.
1935년 평양신학교 1년 수료 후 남평읍, 화순, 능주읍, 순천 낙안읍, 보성읍 교회에서 목회자의 길을 수업하였다.
1943년, 조선신학교에 편입 후 해방된 1945년 12월에는 제5회 졸업생이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가하자마자 지경교회 양해근 장로의 간곡한 청빙청원을 받아들여 같은 해 12월 21일에 지경교회에 부임하였다.
군산노회 제6회 노회 제1차 임시노회(1946.1.23, 전11:00, 이리교회당)에서 지경교회의 이성춘 목사 청빙서류를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이성춘 씨 임직 허락 → 강도사 시취, 목사 안수, 위임식 일체를 이창규, 이수현, 귄우진, 이재봉, 장하원, 최문환에게 일임함.
이성춘 목사의 강도사 시취 및 안수, 임직 절차 등은 전원 일치로 통과되어 아래와 같이 지경교회 위임식이 열렸다.
이성춘 씨 강도사 인허식
사회 : 이창규 목사
장소 : 지경교회당
일시 : 1946년 2월 4일 후8시
1. 기도 : 장하원 목사
2. 찬송 : 32장
3. 성경 : 요10:29~
4. 설교 : 이성춘 전도사 “요한의 기독관”
5. 기도 : 신덕칠 장로
6. 찬송 : 162장
7. 기도 : 이수현 목사
8. 문답 : 이창규 목사
9. 선언 : 이창규 목사
목사 임직식
사회 : 이창규 목사
1. 찬송 : 228장
2. 기도 : 이재봉 목사
3. 성경 : 요한12:20~26
4. 설교 : “희생의 종교” 권우진 목사
5. 문답 : 이창규 목사
6. 안수기도 : 이수현 목사
7. 선언 : 이창규 목사
이성춘 목사 지경교회 위임식
사회 : 이창규 목사
1. 찬양 : 지경교회 찬양대
2. 기도 : 최문환 목사
3. 문답 : 사회자
4. 선언 : 사회자
5. 권면 : 목사에게 - 이수현 목사
교회에게 - 김호연 목사
6. 기도 : 장하원 목사
7. 선물 증정 : 지경교회, 발산교회
8. 찬송 : 3장
9. 축도 : 이창규 목사
※ 군산노회 제6회 제2차 임시회의
장소 : 지경교회당
일시 : 1946. 4. 11. 전11시
이성춘 씨 목사임직에 대한 별위원 보고 다음과 같이 채용(採用)하다.
지경교회에서 목사로 청빙한 이성춘 씨는 전남노회에서 신학후보생 이명서가 왔으므로 신학준시부에 맡겨 시취한 결과 합격되었음으로 다음과 같이 집행하였나이다.
◎ 군산노회 부인 전도회 보고
1. 지회 수 : 40
2. 회원 수 : 2,270명
3. 총회의원 : 69명
4. 재정 수입 : 6,537,500원
5. 전도인 1명을 파송하여 각 5회를 순회전도하기로 하오며
6. 특별연보금 6,000원을 大韓 임시정부에 상납키로 하오며
7. 각 지회에서는 시찰위원을 선정하여 지회를 시찰하기로 하였나이다. 이상
1946년 5월 12일
보고인 이순길(군산노회 부인전도연합회장)
◎ 지경교회 당회장 이성춘 목사 - 고 이우석 목사(순교자) 유가족 구제 청원의 건→ 사은부로 보냄 → 일금 6천원 노회 하명대로 進呈함.
군산노회(분립노회) - 기장 총회 출범에 한 걸음 앞서
때 : 1952. 5. 22(금) 11:00 ~
곳 : 지경교회당
개회 예배
사회 : 이성춘 목사
설교 : “강하고 담대하라” - 장하원 목사(직전 노회장)
기도 : 정진철 목사(함열)
임원 선정
회장 : 이상귀 목사(이리제일)
부회장 : 장하원 목사(신황동)
서기 : 이성춘 목사(해성)
부서기 : 이진휘 목사(지경)
회계 : 양해근 장로(지경)
부회계 : 홍삼봉 장로(해성)
총회 총대 : 이상귀, 장하원, 이성춘(목사)
양해근, 박석동, 홍삼봉(장로)
※ 당일 성가대 준비 및 총대 중식은 지경교회가 담당함.
김해 김씨(만자산) 계보
1. 김득화
1) 창만 ──── 근홍(권사) ─ 선겸(목사)
(조성녀)집사 (최순례)집사
2) 석만근영(집사) ── 김윤순(권사, 대복교회)
(천정애)집사
이봉춘(집사) 이선주(집사)
3) 기만 ──── 영호
(강계순)집사 (한순정)집사
근정(입교) 조금순(입교)
2. 김득수
(하동 정씨)
1) 태성
2) 태문 — 근철(장로, 목사) ⁃ 유후순(사모) — 성겸(목사)
3) 태현 ⁃ (이삼복)집사
4) 영숙(집사)
5) 복녀(집사) — (최중락)
6) 양순(권사) — 작문(입교) — 경문(장로)
(장당성)입교
3. 김명수—삼만 — 근양(집사)—선자(권사)—생질사위 김대우(장로)
(이 )집사 (문 )권사 (심양선)권사
4. 김진화—장만(입교) — 영엽(장로) — 영진(입교) 영수(집사)—영미(권사)
(홍연화)집사 (고순금)권사 (나춘례)집사
5. 김성화
1) 현태(집사) — 2) 성태(집사)
(유명순)집사 (최영복)집사
6. 김석두
1) 영만(입교) 2) 순만(영세) 3) 귀만—최복녀(집사)—순옥(권사)
4) 덕만(권사) — 부인(권사)
채명희(권사)
최명(34) 연세대 교육학과 졸
재일본) 한국교육재단 사무장
영귀(63) 요꼬하마(한인)교회 장로
양영복(집사)
최강민(30) 京세라 연구원, 선임기술자
최현민(28) 쓰구바의대 (외과)의사
요꼬하마 사립대(의학박사)
(부인) 내과의사
영식(59) 군인(원사 제대)
2남 1여
영호(永鎬) 부산 영산대 교수(교무처장)
여의도중 - 검정고시 - 일본 동경대 유학(정치학 박사)
강순실 장로 강영숙( 향) - 유은덕 집사(전도인-전도사)
(임정례 권사)
옥주(권사)
(이경철) 이혜란(목사, 인천 유일교회)
은회(권사)
(김명준, 군산 소망교회)
선자(집사, 부산)
선애(권사, 포천)
선희(집사)
순봉(장로)
순석(장로) -고창 성남교회, 대신교회 개척(신축),
1987(66세 作故, 김제 군청 양정계장,
김제중앙 장로 안수(‘53.10),
1960년대 교회당 신축(98평) 시 건축위원장,
1985년- 선교 백주년, 장로 30년 근속 표창(합동총회),
전주YMCA 7대 이사장, 신우회 회장, 전주기드온협회장,
전북지구 CCC 이사, 무주 부군수,
고창 농지개량조합 4년 후 퇴직.
장남 강명세 - 동양증권 서소문 지점장
딸 - 서울 충신교회
사위 최재현(부산 외대 교수)
1. 역사의 먼동
1) 세기의 말엽, 만자산 그리고 마을 사람들
2) 교회 출범에 얽힌 이야기들
(1) 바람 따라, 민들레 꽃씨처럼
(2) 군산 사도행전 제1장-어디 한 번 가보세
(3) 작은 만남, 큰 열매
(4) 처음 찾은 서양 의원에서
3) 교회의 초석은 놓이다
(1) 힘겨운 큰 결단
(2) 군산으로 가는 길
① 선발대는 떠나다
② 병원에서 되어진 일
③ 전야의 축제처럼
(3) 처음 드린 예배
2. 새 아침은 열리다
1) 처음 예배에 참여하고
2) 갈고 닦고 다져서-교회의 새 일꾼은 길러지다
3) 신앙 교육의 도장(道場)-토요교실
4) 만자산 예배처의 태동(胎動)
(1) 학습장이 된 사랑채
(2) 학습문답 통과
(3) 범덕굴의 결단 표명
6) 만자산 기도처의 출범
(1) 여러 가지 뜻밖의 암초들이
(2) 기도처의 시작
(3) 열띤 전도와 교육 훈련
3. 선교사들의 입국 경위
1) 19세기 후반기의 국내 사정
2) 국제정세-외세는 밀려오고, 국권은 잃어가고
3)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과정
(1) 매클레이 선교사의 입국과 고종황제의 윤허
(2)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등의 선발
(3) 알렌의 성공—한국 선교의 문은 열리다
① 갑신정변
② 선교의 위기와 기회
4. 선교지 분할 조정과 선교 전략
1) 선교지 분할 조정-예양협정(禮讓協定)
2) 선교 정책-네비어스 방식
5. 남장로회 선교사들-군산에 오기까지
1) 미국의 장로교회들
2) 남장로 선교회에서 뽑힌 선교사들
3) 하나의 한국장로교회를 위하여-장로교 선교사 공의회
4) 선교사 공의회와 관련된 장로회 사기(史記) 자료 몇 가지
5) 남장로회 선교부의 호남선교 전개(展開)
1) 군산선교부의 시동(始動)
(1) 전위렴 선교사(군산—선교부 교회 “당회장” 역할
(2) 류대모 선교사(의사)
(3) 데이비스 선교사(Miss L. F. Davis)
2) 선교부의 전도 전략(戰略)
(1) 전도 방식 도형
(2) 학습, 세례문답의 중시(重視)
3) 선교부와 만자산 기도처
(1) 만자산 팀의 기독교 복음 수용
(2) 은혜받은 사람들의 변화
(3) 선교부의 시선과 대응지원
(4) 장인택 조사의 역할
7. 만자산 기도처에서 만자산 교회로!
1) 약동하는 만자산 기도처
(1) 전도의 진행상황
(2) 발산․통사 지역의 전도
(3) 가르치는 공동체(언문 가르치기)
2) 기도처 시대의 마무리
(1) 최흥서 사랑채가 기도의 다락방으로……!
(2) 만자산 교회의 등장
3) 만자산 교회의 출범-축하 예배
(1) 축하예배 준비
(2) 축하예배와 잔치
1. 역사의 먼동
1) 세기의 말엽, 만자산 그리고 마을 사람들
뒷산에서 바라본 동남편 평야 멀리 익산-전주
서쪽 멀리 군산
오동메(똥메)로부터 동편 새장터에 이르기까지 온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뒷산의 모습이 말과 같다하여 이를 ‘백마산’이라 하였고, 이 산 아래 살면 아이를 많이 가진다 하여 ‘만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정확하게는 임피군 남삼면 만자산리(臨陂郡 南三面 萬子山里)였고, 김해 김씨,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전주 최씨 등이 오래 전부터 살아왔고, 그 후에 다른 성씨들이 차차 이주해 왔다.
동쪽 멀리 노령의 산줄기로부터 비롯된 만경강은 이 나라 제일 가는 옥야천리를 누비며 서해로 흘러가는데, 당시에는 강가에 우거진 갈대숲이 드넓은 벌판을 온통 덮어버려 황량하기만 하였다. 마을 앞뜰까지도 갈대들이 우거졌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사이사이를 힘겹게 일구어 전답으로 가꾸며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런데 장마철이 되어 큰 물이 나게 되면 강 유역은 탁류가 넘치는 큰 바다가 되어 정성들인 전답은 하루아침에 온데 간데 없어지고 이 한(恨)어린 재앙의 땅에는 마을 사람들의 고통의 세월만이 되풀이되었다.
이 어둠의 땅에 한줄기 밝은 빛이 비추게 되었다. 1896년 봄, 한 복음의 씨가 내려, 이것이 예배처소로 자랐고 1900년에는 마침내 중만자에 예배당이 서게 되었다. 그 이름이 바로 조선예수교 장로회 만자산 예배당이다.
교회가 들어서자 마을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교회에 대한 생각이 엇갈렸다. 어리둥절하거나 비판적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한 변화의 물결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잡기에 충분하였다.
교회의 소학교에 나가 난생 처음으로 공부를 하게 된 어린이 수가 늘어갔다. 야학반에서 언문(한글)을 익혀 문맹을 면하게 된 여인들, 성경 찬송책을 자기 눈으로 보고 읽게 된 어른들의 수효가 늘어갔다. 교회를 통하여 신앙이 들게 되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도 점차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오랜 세월 찌든 무속신앙에 변화가 일어, 집 안에 차려놓은 제청 위패가 사라져가고, 뒷산 서낭당도 변화의 바람과 함께 없어져버렸다. 암울하기만 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활짝 열려, 희망찬 빛이 찾아든 것이다. 당시의 변화된 모습이 그리스도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¹⁾
“전라도 임피 만자산, 전주 송지동 이곳 두 곳은 뿔목사(Bull 선교사)와 류의사(Drew 선교사) 두 분이 주장하는데 이 두 곳 교우와 형제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받고 열심히 전도하는데 각처 섬과 포구와 면면촌촌에 다니면서 전도하야 그 근처 백리 내외 간에 주의 밝은 도를 못들은 사람이 드물고 금년 봄 사오삭 동안에만 책 판 것이 15,000량이며, 교우들이 농사를 부지런히 하며 겨를 있을 적마다 주의 일을 부지런히 하고 무삼일을 당하던지 유무상통하니 매우 감사한 일이요, 이렇게 부지런히 씨를 뿌렸으니 많이 거둘 줄 알겠더라.”
2) 교회 출범에 얽힌 이야기들²⁾
(1) 바람 따라, 민들레 꽃씨처럼³⁾
1896년 4월 초 어느 날 일이었다. ‘최흥서’의 사랑채에는 뜻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그가 바로 군창골(군산) 서양사람 이야기를 이 고장에 맨 처음 전해준 ‘조선달’이라는 사람이다. 그의 전한 소식이 이 고장 선교의 도화선이 될 줄은 그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몰랐다.
그는 원래 전남 신안 사람으로 서편 길목집에 객주(客主)로 드나들며, 군산, 부안, 정읍, 고창 일대를 내왕하는 보부상인데, 성은 조(趙)씨요, 이름은 정확히 아는 이가 없어 보통 ‘조선달이’ 또는 ‘선달님’으로 통했다. 그의 성품은 활발했고 언변이 좋을 뿐만 아니라 성실하여 마을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길가에서 만난 ‘최관보’는 조선달의 말이 하도 진기하고 재미있어 그를 끌고 들어온 것이다. 방안에는 강채오, 정치선, 이양화, 그리고 주인인 최흥서가 앉아 있었는데 거기서 시작된 그의 말에 방안 사람들이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군산 선창가에서 두 서양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열심히 소리치고 있기에 가까이 가 보았더니 콧수염이 진한 서양사람(전킨 선교사)이 놀랍게도 우리말로 연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조선말을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유창하지는 않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선달의 마음에 와 닿는 데가 있어 감명 깊었던 모양이었다. 조선달은 하나님, 예수, 죄, 천당, 지옥 등 그가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서툴게나마 늘어놓기도 하였다. 선교사는 연설 끝에 마음의 병과 함께 육신의 병도 치료해줄 테니 치료받고 싶은 사람들은 자기들 집에 따라 오라고 하기에 조선달 뿐만 아니라 십여 명이 그들 뒤를 따라가 보니, 수덕산(금동) 기슭의 그들 집은 보통 집보다는 조금 큰 조선 초가집인데 이미 5∼6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양식 병원이나 치료하는 모습을 처음 보고 놀란 조선달은 그 광경을 호들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의 결론은 서양사람 이야기도 들어보고 아픈 데 치료도 받아볼 겸 해서 다 같이 한 번 가보자는 것이었다. 방안은 한때 조용했다가 갑자기 구론 아닌 구론이 벌어졌다. 마침내 조선달의 말대로 모레 이른 아침에 다 같이 모여서 그를 따라가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2) 군산 사도행전 제 1장—어디 한 번 가보세⁴⁾
전날 약속한대로 최흥서의 사랑채에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일찍 아침을 먹고 모여들었다. ‘정치선’만이 집안 사정으로 동행하지 못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여 조선달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역사적인 행보의 일행은 강채오, 이양화, 최관보, 그리고 최흥서이다.
가운데뜸 산허리를 넘어 통사리, 발산, 운회, 아동을 거쳐 군산 선창가에 이르는 길은 직선으로는 30 리 남짓 되는 거리지만, 산등성이와 언덕을 넘내리고, 거친 골짜기와 마을 사이에 길을 찾아가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행이 찾아간 경로는 여러모로 살펴본 결과 대략 다음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자산→ 통사리(퉁수굴-웃멀-장산)→ 발산리(대방굴-안터-대방제-만금쟁이)→ 운회리(분테동-검죽굴-송호마을-서낭당 고개)→ 아동리(동정마을-충량-여수마- 아차울-범덕굴)→ 조촌…궁말→경포강→선창→선교사집(수덕산 자락)
발걸음도 가볍게 출발한 일행은 우스갯 소리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으로 즐거운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걸어온 길이 멀어질수록 말소리는 점점 적어졌고, 아차울, 범덕굴 근처를 지날 때부터는 발걸음도 느려지고, 좀 쉬고 가자는 소리도 나왔다. 군산 행로의 마지막 난관인 경포강을 건너기는 마침 간조 때라 강바닥이 드러나 도선 대신 바지를 걷어 올리고 맨발로 건널 수 있었다. 다행이 강은 잘 건넜으나 먼 길 걸음에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걷어올린 다리 모양새도 험하였다. 서래 장터에 이르러 일행은 조선달의 뒤를 따라 그가 단골로 드나드는 주막으로 들어갔다.
우물에서 퍼주는 물로 얼굴과 팔, 다리도 깨끗이 씻고 몸매도 말끔히 가다듬었다. 아침 일찍 나오느라 조반도 제대로 못했기에 시간은 좀 일렀지만 점심을 먼저 들기로 하였다. 모두들 탕반을 함께 주문했는데, 1인당 5전짜리였다. 시장하던 참이라 맛있게들 들었다. 아직 딴 손님도 없고 하여, 일행은 식사 후에 그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가 일어나서 목적지로 떠났다. 수덕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선교사의 집에 이르렀다. 다른 집에 비해 좀 큰 편이나 여느 집과 다름없는 초가집으로 생각보다 초라하게 보였다. 일행은 집 앞에서 좀 머뭇거리다가 힘을 내어 뜰 안으로 들어갔다.
최초의 선교사였던 전킨(전위렴, William McCeery Junkin) 선교사의 집으로 주일에는 약 4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송영도, 김봉래 씨가 호남 최초로 세례를 받은 군산교회(현 개복교회)이다
뜰 안에 인기척이 있자 한 사람이 안에서 나와 부드러운 낯빛으로 일행을 맞아주었다. 그가 바로 전킨 선교사의 어학선생이자 선교부 살림꾼인 장인택 조사였다. 장인택 조사(助事)는 외모도 잘 생겼을 뿐 만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이 고장 선교에 큰 공헌을 할 만한 모든 실력을 갖춘 출중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활약상이나 최흥서와 얽힌 사돈 간의 일화 등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그의 매끄러운 경기도 말소리부터가 일행을 매료시켰다. 지금 선교사와 함께 여러 사람들이 공부 중인데, 들어가서 말씀도 듣고 얼마 안 있으면 마치는 시간이 될 테니 그때에 서로 인사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일행은 그를 따라 방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한쪽에 조용히 자리잡았다. 조선달은 안내의 역할을 다하고, 자기 볼일을 보러 나갔다.
일행의 가슴은 설레었다. 방 안에는 10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선교사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무엇을 적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고, 선교사는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듣던 말대로 선교사의 말은 잘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이야기의 중심인 즉 우상숭배와 제사문제인데, 듣는 이 모두가 진지했다. 수긍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숭조제향(崇祖祭享)을 소중히 여기는 일행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유․불․선․도에도 약간 조예가 있는 최흥서의 경우는 금방 반론이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때 꾹 참느라 혼이 났다고 훗날 토로하였다고 한다. 다음에 알게 된 일인데 그날의 공부는 학습․세례 문답의 준비반 모임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수업이 끝나자 장인택 조사가 전위렴 선교사에게 일행이 온 내력을 이야기하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다가와서 인사를 청하였다. 일행 네 사람은 장인택 조사와 함께 선교사의 사랑채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후 처음으로 서양차를 대접받았다. 무슨 차인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주는 대로 공손히 받아들고 장조사가 하는 대로 따라서 마셨다. 쓰고도 달콤한 맛이었다니까 아마도 커피가 아니었나 한다. 선교사의 정중한 접대에 일행은 처음에는 다소 주눅 든 듯했으나 그의 능숙한 화술에 분위기는 곧바로 부드러워졌다.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일행의 화제는 아까 공부시간의 제사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먼저 선교사가 말문을 열었다. 만자산은 어떤 곳이며 그 곳의 생활 형편들은 어떤지 등 일상의 일들이 화제가 되었다. 최관보가 입을 열었다. 조상을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하였다. 물론 대답은 우상숭배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최흥서가 거들었다.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하는 것은 그 음식을 조상이 먹는 것도 아니고 절을 한다고 절을 받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것이 자손들의 정성인데, 조상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의 표시가 우상 숭배라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위렴(전킨) 선교사는 자기 말에 대한 반론을 들으면서도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차차 해결될 것이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행의 진지한 대화에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이들이 훗날 좋은 교인이 되리라는 예감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전위렴 선교사는 일행에게 전도지와 쪽복음 등을 나누어주었다.
이 작은 만남이 훗날 만자산 교회라는 큰 열매를 맺어, 전위렴은 그 교회 당회장으로, 그리고 최흥서는 당회 서기와 그의 선교 동반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이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최초의 선교사였던 드루(유대모, Drew. A. Damer. M. D) 의료선교사의 집으로, 의료선교를 펴던 곳
선교사와 교체라도 하듯이 들어온 장인택 조사는 일행을 자기 방으로 안내하며 자기 소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평택 태생으로, 평택․안성지방에서는 이름난 부호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한문을 수학한 후, 과거에 뜻이 있어 상경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우연히 서양 선교사를 만나 대화하는 중, 만남이 거듭되면서 마음이 끌려 그들의 어학선생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비록 과거급제의 뜻은 버렸지만 선교사를 돕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할뿐더러 큰 보람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장조사의 이야기는 선교사들이 하는 일, 일상생활 그리고 전도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예수교의 특이한 점 등으로 이어졌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서울에서 견문한 여러 가지 화제는 일행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 조선이 이대로 있다가는 망하게 된다. 백성들이 깨우쳐서 개화된 서양 문물을 어서 배워야 되고 온 나라가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을 마치고 그는 일행을 선교사의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두루(Drew, 유대모)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은 바로 네채 건너편 강가 가까이에 있었다. 각각 50불씩 주고 산 집이라는데, 병원으로 잘 꾸며놔서 그런지 안에 들어가 보니 먼저 집보다 더 크고 깨끗하게 보였다. 대합실에서는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위렴 선교사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 곳에서도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여인의 몸이 몹시 부어있었다. 그녀는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고생하였는데, 이곳에서 치료받고 많이 좋아졌다고 자랑하며 고마워했다. 그 말에 최흥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의 부인이 몇 년 전에 산후 조리 잘못으로 병에 시달리다가 작고해버린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녀의 말을 들은 최흥서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몇년전에만 이 선교사를 만났더라도 그 사람은 죽지 않았을 텐데! 회한스런 심정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안내하는 대로 따라서 진료실에 들어가 보니 이상한 약냄새가 진동하였고, 벽면의 약장에는 무슨 약병이 그리도 많은지 빽빽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서양의사는 귀에다 이상한 것을 걸고 앉아 있는 노인을 진찰하는 것 같았고, 한쪽에서는 어린아이의 곪아 터진 다리를 깨끗이 닦아주고 정성들여 약을 바르는 서양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서양 병원의 모습에 압도된 일행은 한참 이것저것 구경한 뒤에 선교사들에게 인사를 한 후에 밖으로 나왔다. 장 조사는 일행에게 다음 일요일에 꼭 와주기를 부탁하면서 토요일에 와서 자기 숙소에서 함께 지내면 좋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3) 교회의 초석은 놓이다
(1) 힘겨운 큰 결단
만자산 일행이 맨 처음 군산선교부를 다녀온 이후로 최흥서의 사랑채에서는 예수교에 대한 크고 작은 말씨름들이 끊이지 않았다. 모이는 이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늘어놓는데 좀처럼 말들의 가닥이 잡히지를 않았다. 그들의 호기심이 커져만 갔고, 결국 교회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으로 기울어져 갔다.
1896년경, 군산 선창가 전경
다음날 저녁, 최흥서의 집에는 늘 모이는 단골들이 다 모였다. 최관보(崔官甫), 정치선(鄭致先), 강채오(姜彩五), 정백현(鄭伯鉉), 이양화(李良化), 그리고 최흥서(崔興瑞)이다.
긴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에 그들은 오래도록 기억될 주요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모레, 점심 후에 모여 함께 떠나기로 하였다. 그날은 군산에서 자고 다음날,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날 저녁 그리고 다음 아침까지 두 끼의 먹거리에 대하여도 의논을 하였다. 쌀을 거두어 떡도 조금 하고 밥과 마른 건건이(반찬)도 마련하여 동고리에 담아 가기로 하였다, 음식 준비는 이양화 댁에서 맡고, 쌀 걷는 일은 최관보, 정치선이 맡았다.
1894년도 군산의 어촌생활
1894년도 군산 부두 선창가 짐꾼들
유대모 의료선교선이 닿았던 곳
(수덕산 부근)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준비는 바쁘게 진행되었다. 명절 잔치나 만난 듯, 푸짐하게 음식 장만도 끝냈고, 이젠 내일 함께 모여 떠나는 일만 남았는데, 일행의 계획에 갑자기 변동이 생겼다.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던 이양화 댁(삭녕 최부인)에게 번개처럼 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의 네 살 배기 딸을 데리고 자기도 일행과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바로 남편인 이양화였을 것이다. 장정들도 가기 힘든 30리 길을 어린애를 데리고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모두가 턱없는 모험이라며 말리는데 최부인은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고집으로 계획은 변경되었다.
(2) 군산으로 가는 길
① 선발대는 떠나다
토요일 아침, 최부인은 일꾼 박서방의 지게에 아이를 앉히고 따르게 하고, 자기와 남편 이양화 그리고 최관보는 음식 동구리를 하나씩 들고 앞서 떠났고, 다른 사람들은 예정대로 오후에 음식 동구리를 들고 군산으로 떠났다.
정오 좀 지나서 선발대는 군산에 닿아, 장인택 조사 집에 짐을 풀었다. 장 조사는 물론이고 그의 부인 최씨(최현택)도 반가이 맞아주었고, 어찌나 친절하게 대해주는지, 친척 집에라도 온 듯, 삭녕 최씨의 마음도 편안하였다. 함께 점심을 든 후, 장 조사의 안내로 일행은 병원으로 갔다.
② 병원에서 되어 진 일⁷⁾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5~6명 있었는데, 전위렴 선교사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 선교사는 구면이 된 이양화, 최관보를 보고 반가와 하며, 누가 아프냐고 물었었다. 삭녕 최부인이 인사를 한 다음, 딸의 상처를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네 살된 딸(순길)이 돌 지나면서 눈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별 약을 다 써 봤지만 낫지 않고 악화되어 이제는 한 쪽 눈에서 고름이 흐르게 되고, 머리가 아프다고 우는 일이 자주 있다는 것이었다.
최부인의 말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던 전위렴 선교사는 다함께 기도하자며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조용히 기도드렸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은 좋은 의사선생을 시켜서, 애기의 병을 꼭 치료해주실 테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차례가 되어, 류의사 앞에 나간 최부인은 떨리는 마음을 달리며 아이를 안고 의사 앞에 앉았다. 몇 마디 묻고 난 후 류의사는 한참 동안 아이를 진찰하더니 간호 일을 돕고 있는 그의 부인을 불러, 무슨 말인가를 하였다. 류의사 내외는 최부인만 아이를 데리고 수술실로 들어오게 하였다.
치료 시간이 꽤 길어졌다. 오른쪽 눈 언저리의 심하게 곪은 곳은 수술도 하였고, 정성껏 치료를 마쳤다. 아이는 겁이 나서 처음엔 크게 울었으나 나중엔 잘 참아냈고, 어머니는 조금 전 선교사와 드린 기도를 떠올리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끝났다.
③ 전야의 축제처럼
해질 무렵, 오후에 떠난 네 사람도 도착하였다. 먼 여행이라도 온 듯 모두가 들떴다. 장조사 부인 최씨와 삭령 최부인은 저녁 준비에 바빴다. 먹을 것을 마련해 왔는데도 장씨 부인은 새 밥과 다른 몇 가지를 더 만들었다. 두 선교사 내외도 초청하여 때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그것은 전위렴 선교사의 기도로 시작된 만자산 교우들을 위한 뜻 깊은 환영잔치가 된 것이다.
장인택 조사는 밤 늦게까지 일행에게 예배의식 범절과 신앙생활에 대한 갖가지 참고 될 이야기를 해주며 내일 드릴 예배 준비를 하였다. 시험을 칠 수험생들처럼 일행은 장조사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아침이 되어 류의사가 찾아왔다. 어제 치료받은 아이(순길)를 보러 온 것이다. 상처는 많이 좋아졌고, 깨끗해졌다. 어제 밤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잘 잤다고 한다. 아이는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싱글거리기까지 했다. 류의사는 함께 기도드리자고 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아이를 빨리 고쳐주시고 튼튼하게 자라서 훌륭한 하나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
특별히 삭령 최부인은 너무나도 감사하여 기도하는 동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날의 감사와 감격이 그녀의 생애에 큰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이다.
(3) 처음 드린 예배-주여, 저희가 여기 왔습니다.
1896년 6월 14일, 이날은 6월 둘째 주일로, 미국장로교회가 지키는 꽃주일-어린이주일이었다. 이날은 또한 만자산 일행 7명(일꾼, 박서방은 어제 돌아갔음)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처음 참여한 뜻 깊은 예배날이다. 훗날 지경교회 50년사에서는 그들을 만자산 교회 창립 7현(賢)이라 하였다. 여기에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적어본다.
최흥서, 최관보, 강채오, 이양화, 정치선, 정백현, 삭녕 최부인. |
만자산 일행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전위렴 선교사가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박수로 환영하였고, 이들을 위하여 특별한 기도도 하였다. 이제 낯선 손님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가 된 것이다.
전 선교사의 설교는 “주님이 사랑하신 어린아이들” (눅18장 16~17)로서, 꽃주일, 가정 등 일행에게는 처음 듣는 소중한 이야기들이었으며, 평생 처음으로 드린 예배를 통하여 그들은 큰 기쁨과 감동을 받았다.
군산선교부 초기의 예배 모습은 전위렴 선교사의 글을 통하여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간략하게 요약하여 본다.⁸⁾
1. 예배실 구조 큰 방은 가운데를 장지문으로 이등분하여, 한쪽은 남자석, 다른 한쪽은 여자석으로 하여 전면 제단을 향하여 양쪽이 서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온돌방 바닥엔 멍석 5매가 깔려 있고, 신을 벗되 갓은 쓴 채로 들어가 제단을 향하여 앉는다.(남녀 출입구는 따로 따로)
2. 주일학교(장년부) 아침 9시 (시작종 침), 반장 김씨(최초의 세례 교인 김봉래 인 듯)인도로 찬송 64장 “예수의 놉흔 일흠이 내 귀에 … (Jesus, Thy Name I Heard)”를 함께 부르며 시작한다. 반장이 출석 부른 후, 결석자는 근처 사는 사람이 다음에 심방토록 한다. (등록된 회원 40여명 중 20여명은 지난 1년 동안 잘 출석하였음.) 교재(공과)는 정기적으로 크리스찬 옵서버(Christian Observer)지에서 뽑아 번역한 것을 등사하여 나누어 준다. ※ 당일 공과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였다. 주일학교 시간은 약 1시간으로 마치고 10분간 휴식․정돈 후 주일 예배로 들어간다.
3. 주일예배 성경은 4복음과 사도행전을 합본한 쪽복음서를 사용한다. ※ 당일 설교 제목은 “주께 드림”이었고 설교자는 “왜 바쳐야 하는가?”, “어떻게 바쳐야 하는가?”를 쉽게 풀이하며, 성경에서 대답을 찾도록 유도하였다. 설교 후에 처음으로 헌금하였고, 드려진 헌금은 전도 비용과 구제에 쓴다고 하였음. ※지명된 사람들이 헌금을 정리하였고, 의외로 많은 헌금이 나왔다고 함. |
주(註) 및 참조
군산지방 최초로 군산교회가 세워졌던 1895년경의 수덕산(현금동) 전경
1)그리스도신문 : 1897년 4월, 미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에 의해 발간된 장로교회 주간(週刊) 신문이다. 순 한글, 국배판 8면으로 당시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은 것으로, 논설, 성경강해, 기도회, 기사, 교회통신, 기타 새로운 학문과 상식에 관한 것 등이 실려 있다. 본문은 1901년 8월 8일자 교회통신란의 기사로, 당시 만자산 교회의 초대교회적인 활기찬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2) 교회 출범에 얽힌 이야기들
“지경교회 50년 략사” 등에서 알려진 많은 일화 가운데 관련자들을 통하여 확인된 것을 정리한 것이다.
3) 바람 따라, 민들레 꽃씨처럼!
조선달이 전해준 이야기가 만자산 교회 창립의 원초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일행을 군산선교부까지 안내한 이외에는 그가 선교부나 만자산 일행과 연대한 아무런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의도된 전도를 한 것이 아니라 소식을 전해준 단순한 풍편의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선교사 전위렴, 류대모 등에 대하여는 별항을 참조할 것.
4) 군산 사도행전 제 1장
1909년 신작로(新作路-전군도로)가 개통되어 일본의 한국 침략의 동맥이 되기까지 이 고장에는 군산까지 가는 일정한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길 아닌 길을 더듬으며 군창, 궁말까지 3년여 동안 오고 간 선현들의 정성과 뜨거운 믿음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지난 해(1999년)에는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역사적인 그 길을 찾아 교인들의 도보행진을 하며 조상들의 덕을 추앙하는 체험도 하였다.
5) 작은 만남, 큰 열매
장인택 조사는 우리 교회, 고 장한나 집사, 장은숙 권사의 부친이다. 장집사가 최흥서의 큰 며느리이니, 장인택-최흥서는 사돈 관계가 된다. 그들의 신앙활동을 통하여 맺어진 혈연관계를 감안할 때 군산 선교부의 발전이나 만자산 교회의 빠른 성장이 그들의 관계와 무관치 않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6) 처음 찾은 서양의원에서
한의원 밖에 모르던 일행에게는 서양 의원 방문이 딴 세계를 가보는 것 같은 놀라운 경험이 되었다.
7) 병원에서 되어진 일
한 소녀의 눈병 치료가 그 어미(삭령 최부인-아명 큰 애기)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고 그 모녀가 훗날에 교회의 중요한 역군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8) 처음 드린 예배
전위렴 선교사가 본국 남장로회 본부가 발행하는 월간지에 기고한 “군산의 안식일”의 요약이다.
“The Sabbath in Kunsan”, The Missionary, Vol.ⅩⅩⅩⅣ. February, 1901, NO2, P.131, (Nashvile, Tenn)
2. 새 아침은 열리다
1) 처음 예배에 참여하고
만자산 일행의 신앙입문 과정은 순조롭게 전개되었다. 군산의 주일예배에 처음으로 참여한 이후로, 사람들은 딴 사람처럼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군산까지의 멀고 힘든 나들이 길도 왕래를 거듭할수록 예사로운 일상처럼 느껴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가며 나눈 대화와 때때로 있는 구론 등은 그들의 정감을 더욱 두텁게 하여 주었고 신앙 향상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겠노라는 굳센 의지와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이 날이 갈수로 굳어져 갔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그럴싸한 사유들이 몇 가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첫째로, 예배를 통한 신비스런 은혜의 체험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일찍이 어느 종교의식이나 제사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격과 기쁨의 체험이다.
둘째로, 선교사들과 장인택 조사 내외의 따뜻한 배려와 적절한 지도가 큰 몫을 했을 것 같다.
셋째로, 그들 자신이 모두 웬만한 국한문은 독파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문맹률이 높던 그 당시로는 퍽 보기 드문 일로, 특히 최흥서, 정백현 등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이미 독파 할 정도의 수준이었고, 홍일점인 최부인(아명 : 큰 애기)도 일행에 뒤지지 않았다.
그녀는 최희진의 외동딸로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그 부친이 모셔온 마을 훈장한테 국한문을 1년여 동안 수학하여 일찍이 그 재주가 마을 안에 널리 알려졌다 한다.
그런 뛰어난 실력들이 있었기에 선교부에서 받은 전도지나 각종 교재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선교사들의 기대치 이상으로 지적(知的)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 같다.
2) 갈고 닦고 다지러서-교회의 새 일꾼은 길러지다
만자산 교인들이 세 번째로 예배드리기 위해 토요일(6월 17일) 저녁 무렵에 선교부에 도착하였다. 장인택 조사가 반가이 맞으며 방으로 안내하였다. 잠시 인사를 나눈 후, 일행에게 알릴 일이 있다면서 장 조사가 말을 꺼냈다.
만자산 일행을 위하여 선교부가 특별히 마련한 일이니 잘 듣고 차질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인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1. 다음주(7월 첫 주)부터는 토요일마다 저녁 7시부터 약 1시간 동안 신앙 입문 교육이 있고, 실력에 따라 학습문답도 시행하기로 하였다는 것.
2. 참석자를 위해 취사도구와 간단한 침구 등을 선교부가 마련해 주기로 함.
3. 가급적 매주 1회씩 전도여행에 떠날 계획인데, 이에 동행하여 적극 협력해 주기 바란다는 것.
돌발적인 이야기에 일행은 어리둥절하였으나, 장 조사의 보충설명에 납득하고 반겼다. 군산 선교부가 선교정책의 기본틀을 넘어설 만큼 파격적인 지원의 결정을 한 것은 만자산 일행뿐만 아니라 선교부를 위해서도 유익하고 뜻 깊은 일이었다.
정기적으로 주일학교와 주일 예배에 참여하는 일에 더하여 토요일 저녁의 집중적인 교육과 전도여행 체험 등은 만자산 일행의 신앙과 지도력 향상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만자산 교회의 창립과 성장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곳 교회의 창립과 발전이 군산 선교부의 동부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고, 만자산 교우들의 선교여행 동반이 그들의 선교활동 확대에 큰 힘이 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3) 신앙 교육의 도장(道場)-토요교실
만자산 교우들을 위한 토요일의 특별 교실은 교회생활에 빨리 익숙해지고, 교회의 쓸모 있는 일꾼이 되고 싶은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갑자기 공부에 힘을 쏟게 되니 일상생활에도 적지 않은 부작용이 뒤따랐다. 집안의 농사일이나 잡다한 일에 얽혀 넘기 힘든 고비도 많았지만, 다들 슬기롭게 극복하고, 열심히 힘써,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실력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최선을 다하여, 교육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첫 주에는 예수교 일반에 대하여, 그리고 둘째 주에는 예배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예배 때의 기도하는 법에 대한 설명과 실제로 기도를 해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여러 가지 기도의 숙제도 내주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인쇄물을 나누어주고 다음 주까지 외워오도록 하였다. 서당에서 소리 내어 외우듯, 모두들 열심히 암송하는 연습을 거듭하였다. 그 때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이러한 것이었다.
주기도문
하날에 계신 우리 아버지신 쟈여 일흠이 거룩하심이 나타나 옵시며 나라히 림하시며 뜻이 하날에셔처럼 따에서도 일우어지이다. 오날 우리의게 일용할 량식을 주압시고 우리가 우리게 득죄한 쟈랄 샤하야 주난 것 갓치 우리 죄랄 샤하야 주압시며 우리가 시험에 들지 말게 하압시고 다만 우리랄 흉악에서 구하압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쥬께 영원이 잇사압나이다. 아멘. |
사도신경
나-텬디랄 만다신 전능하신 참신 셩부랄 밋으며 뎌-성령으로 잉태하샤 동졍녀 마라아께 나심을 밋으며 본디오 빌라도 손에 고난을 밧으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뭇치심을 밋으며 디옥에 나리샤 사흔날에 죽은쟈 가운데서 다시 살으심을 밋으며 뎌리로서 산 이와 죽은 이랄 심판하려 오실 줄을 밋나이다. 나- 성령를 밋으며 거룩하고 공빈된 회와 모든 셩인이 서로 통공함을 밋으며 죄의 샤함을 밋으며 육신이 다시 살믈 밋으며 영원히 살믈 밋나이다. 아멘. |
일행이 공부하는 중에 가장 힘든 것은 찬송가 공부였다. 주일 아침마다 주일학교(장년부) 시간에 부르는 61장(내 주의 귀한 이름을 내가 들은 후)을 배우는데 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도 일행 중 최관보가 음악에 특별한 소질이 있어서 그런지 맨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도 따라 부르게 하여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뒤늦게 일행에 합류하게 된 김옥여도 노래를 불러, 이 두 사람이 훗날 만자산 교회의 찬송가 선생이 되었다.
4) 만자산 예배처의 태동(胎動)
(1) 학습장이 된 사랑채
최흥서의 사랑방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그동안 모여서 가볍게 환담이나 하고 세상살이를 이야기하던 이전의 모임터가 아니라, 시험을 앞둔 학생들의 공부방처럼 사람들은 군산에서 배우고 체험한 것들을 외워보고,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는 등 진지한 학습의 장(場)으로 바뀐 것이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도 잘 암송할 수 있게 되었고, 짤막한 3~4주간의 노력으로 모두가 그리도 빨리 기초적인 신앙생활에 적응하게 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2) 학습문답 통과
특별히 최흥서, 정백현에 대하여는 선교사들도 앞으로의 만자산 교회 지도자로 점찍어 놓은 듯 학습문답 준비 등 각별히 신경을 써 7월 18일에는 임시로 문답을 시행하고 19일(주일) 예배 때에는 전위렴 선교사가 두 사람의 학습교인 선포를 하기도 하였다.
(3) 범덕굴의 결단 표명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범덕굴 정자나무 아래서 일행은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다. 바람이 어찌도 시원하게 부는지 땀에 흠뻑 젖은 옷도 금새 마를 것만 같았다.
그때에 최흥서는 모두 가까이 불러들이고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①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기로 한 이상, 잘 믿고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자.
② 시간을 정해 놓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공부도 하자.
③ 열심히 전도하고 우리가 배운 것을 가르쳐주자.
④ 이런 일들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서로 합심하고 서로 도와 친척처럼 잘 지내도록 하자.
모두들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 저마다의 의견이 백출하였다. 최흥서의 말은 잠깐 쉬는 참에 돌출한 발언이 아니라 오래 생각도 해보고, 뜻을 같이 하는 정벽현과 상의도 해본 후의 그의 결단이요, 선교을 위한 의지(意志)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5) 만자산 기도처의 요람(搖籃)
다음날 저녁에 최흥서의 사랑채에는 모두들 모여 어제의 의론이 재개되었다. 그 결론은 이러하였다.
(1) 이곳(사랑채)을 정규 모임의 장소로 하고 월, 금요일 저녁에 모이기로 한다.
(2) 정규 모임은 간단한 기도회로 시작하는데, 최흥서와 정백현이 인도한다.
(3) 각자 이웃에 전도하여 함께 오도록 힘쓰며, 특별히 친척들의 전도에 주력하기로 한다.
(4) 두 칸의 방의 벽을 터서 긴 방으로 만들어 방을 넓게 쓰기로 한다.
(이 공사는 최흥서의 책임으로 하며, 형편 되는 대로 서로 돕기로 함,)
6) 만자산 기도처의 출범
군산 선교부를 내왕하던 만자산 일행의 꿈은 대단하였다. 예수를 받아드린 기쁨 가운데서 자신들의 신앙을 키우는 일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그 기쁨을 전하는 전도하는 일에도 열의가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생활이 안정된 편이었고, 거기에다 성실하며 평소에 이웃간에도 신망이 두터웠다. 그들 자신부터가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믿으려고 다짐한 터이니 전도에 열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전도에 최선을 다하여 그들 스스로의 예배처를 하루 속히 이룩하여 많은 이웃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1) 여기저기 뜻밖의 암초들이
모두들 자신들의 복음을 통하여 얻게 된 그 기쁜 소식을 이웃들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 보람찬 발걸음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순조롭지 못하였다.
최흥서는 맨 먼저 친근한 친척인 최찬경, 찬일을 찾았다. 다른 부탁이라면 두 말 없이 들어줄 그런 사이였지만 좋은 대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얼마 전에 전도해 낸 김옥여(金玉汝)의 경우와는 영 딴판이었다.
이양화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보석리까지 10리 길을 찾아가 큰집 형제들과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설득하였으나 누구 하나 동조하는 이가 없었다. 묵묵부답이거나 오히려 못 마땅해 하는 기색조차 보였다.
매사에 적극적인 그의 부인, 삭녕 최씨는 외가에 사촌들을 찾아 갔다. 외사촌 동생인 김득수(金得水) 내외-김근철 장로 조․부모와 김득화(金得化) 내외-김근홍 권사 조․부모에게 열심히 전도했지만, 신통한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최관보는 양부(養父)에게 전도하기는커녕 호된 꾸지람만을 듣게 되었다. 그런 쓸 데 없는 짓을 하고 다닐테면 쫓아내겠다는 으름장 소리까지 들은 것이다.
정백현의 경우는 약간 희망적이었다. 아들(공숙)의 친구 되는 임영호가 좀더 생각해 보고 나가게 되면 온 식구가 함께 나가겠노라는 절반 승낙까지 얻게 된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의 성과도 마찬가지로 신통한 게 없었다.
(2) 기도처의 시작
전도의 성과가 계획대로 되지는 못했지만 일행이 완전히 낙담하고 만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 하다 보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리라는 확신이 그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신(丙申)년 6월 28일, 그러니까 양력으로는 1896년 8월 7일 예정대로 정식기도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8월 초 한 여름이었지만 저녁 무렵엔 바람도 약간 불어, 그런대로 더위는 견딜만한 하였다. 최흥서의 사랑채는 계획대로 잘 개수(改修) 되어 20명 정도의 예배 장소로는 알맞은 좋은 장소가 되었다.
정한 대로 오후 7시가 좀 지나 최흥서는 정좌하여 예배 시작을 알리는 정백현으로 기도하게 하였다. 최흥서의 치부책에는 그 날이 기도의 모습이 이렇게 적혀 있다.
“정기 기도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예배를 인도하는데 심히도 긴장하였다. 참여자는 모두 10인(이양화, 정백현, 최관보-부부와 강채오, 정치선, 김옥여)이었다. 정백현 예배 기도 후 성경 마태복음 5장 14-15절 봉독하고, ‘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고 모두가 정기예배의 발전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앞으로 열심히 학습하고 전도에 더욱 힘쓰기로 합의하였다.”
모인 사람 모두 10명밖에 안 되는 모임이었는데도 자기들만의 처음 정식예배여서 그런지 최흥서, 정백현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긴장하여 참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 작은 예배가 앞으로 전개될 지경교회의 기나긴 역사의 한 디딤돌이 된다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에 스며들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기도회를 엄숙하게 마친 후, 이양화 댁, 정백현 댁 등이 마련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어 뜻 깊은 축하잔치가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다. 긴 담론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① 전도는 일가친척 뿐만아니라 누구에게나 기회 닿는 데로 끊임없이 하며, 후퇴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한다.
② 남에게 전도하기 전에 먼저 내 믿음이 더 두터워지게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학습한다.
③ 언문을 열심히 가르쳐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지도하기로 한다.
④ 앞으로의 기도회 운영이나 전도하는 일에는 선교부의 지도와 협력을 얻는다.
(3) 열띤 전도와 교육 훈련
기도회가 열리고, 새로운 결심을 한 이후에 사람들은 크게 달라졌다.
① 선교부 토요 학습에서
기도회 예배의 시작과 결의 내용을 듣고 전위렴 선교사를 비롯하여 선교부 사람들은 그 빠른 발전에 놀라움과 함께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신앙교육 뿐만 아니라 전도에 필요한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기로 약속도 하였다. 특히 장인택 조사는 누구보다도 반가워하며, 기도회 운영에도 적극 도와주기로 하였다.
3. 선교사들의 입국 경위
개신교(改新敎)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은 19세기 말엽의 일이다. 그동안 꼭꼭 묶였던 쇄국의 빗장을 풀고 그들의 입국을 허용하게 된 우리나라의 사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 19세기 후반기의 국내 사정
(1) 전국 도처로 확산되는 자연재해-혹심한 가뭄과 풍수해, 무서운 흉년과 역병의 창궐 등, 백성들은 의지할 곳 없어 주검 일로의 나날을 보내며, 연명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유랑민의 수효는 늘어만 갔다.
백성들을 돌봐야할 지방 관아에는 탐관오리들이 들끓었다. 사욕에 눈이 먼 양반․지주들의 가혹한 횡포와 착취는 선량한 백성들의 분노와 원한 만을 부추겼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집단반란-민란, 혁명의 사태는 이어져 갔다. 1862년, 1889년, 1894년 그리고 고부의 농민항쟁(혁명?)으로, 전국에 걸친 무정부 상태의 민란, 소요는 그칠 줄을 몰랐다.
(2) 조정에서는 권세를 휘어쥔 권문세가들이 끊임없는 내분과 당쟁으로 세월을 허송하며 나라를 마침내 망국의 늪에 빠지게 한 꼴이 되었다.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갑오경장(1889), 동학혁명(1894), 민비 시해사건(1895), 아관파천(1896) 등, 수많은 변란과 흉모가 꼬리를 물어, 이 나라는 국정능력을 잃고 표류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2) 국제 정세-외세는 밀려오고 국권은 잃어가고
(1) 명치유신으로 근대화의 궤도에 오른 일본은 부국강병(富國强兵)책으로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들은 청일, 러일전쟁의 승전으로 그 위세는 더욱 당당하게 대륙침공의 야망을 들어내 갔다.
그들은 간단없이 한반도의 병합(倂合)을 꿈꿔왔다. 마침내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1876)으로 조선의 쇄국 빗장을 풀게 하고 다양한 명분으로 전국의 항만 기타 각종의 이권을 수중에 넣어갔다.
(2)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은 태평양 건너의 신흥대국(新興大國) 미국과 함께 수교통상을 내세워 이 나라의 주권을 압박해왔다.
프랑스 함대의 포격으로 시작된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샤만호의 격침에 대한 보상의 요구로 비롯된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등으로 문호 개방의 속도는 빨라졌다.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맺으려면 필수적으로 외교관, 상사 대표 등이 입국하게 되고, 그 뒤에 선교사들이 동행하여 입국하게 된다. 이로써 선교사들의 오랜 숙원인 조선 입국이 이뤄지고 그들의 활동은 시작되었다.
3)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과정
(1) 매클레이 선교사의 입국과 고종황제의 윤허
매클레이는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이다. 한미수교가 이뤄진 후, 본부 지시에 따라 한국 선교에 관한 검토를 하려고 입국하게 된다. 주한 미국 공사 푸트의 지원과 일본에서 알게 된 김옥균(金玉均)의 협력으로 일은 잘 풀렸다. 고종황제의 윤허는 내려졌다.
“우리들의 호소에 대한 국왕의 호의적인 반응이 매우 신속하고 훌륭했으므로 나는 그 허락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새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왕의 윤허 내용에 대하여 윤치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상께서 미국 상선의 내해(內海) 항해와 미국인들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일, 전신(電信) 설치의 일을 허락하셨다.”
위에서 본 대로 매클레이 선교사가 감격한 고종의 윤허에는 개화파의 영수격인 김옥균의 적극적인 협력의 공이 컸다.
언더우드 목사
“매클레이 박사는 복음화라는 원대한 목표를 숨기지 않고 교육, 의료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확신했다. 학교는 환영받을 것이고 병원은 필요했다. 이러한 선교의 방편들은 현명하게 소개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선교도 시도되지 않은 동방의 이 미답의 현장에서 그러한 성공을 자신 있게 기대할 수 있다.”
매클레이 박사의 방문으로 교육과 의료선교의 길이 열리게 되자 미국 북장로회, 미국 북감리회는 바빠졌다.
감리교에서는 아펜젤러(Horace G Appenzeller)를 교육사업 선교사로, 스클랜튼(W. B. Scranton)을 의료선교사로 선정했다.
미국 북장로회에서는 의료선교사로 의술이 뛰어난 젊은 헌신자 헤론(John W. Heron)을, 그리고 복음선교사로 언더우드(Hrace G. Underwood)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한국 땅에 맨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알렌은 의학공부를 마친 후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 지원하여 먼저 중국으로 1883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상해, 남경 등지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1년 가까이 보내다가 본부의 승인을 맡고 1884년 9월 14일에 상해를 떠나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22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3) 알렌의 성공—한국 선교의 문은 열리다.
① 갑신정변(甲申政變)
개신교 선교사들이 어렵게 입국허가를 얻어 만반의 준비를 마쳤는데 정부 안에서는 뜻하지 않은 쿠테타가 일어났다. 그것이 고종 21년(1884)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그 사건은 한국 근대사의 이해뿐만 아니라 입국하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나 교회사의 전개 과정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므로 간략하게나마 그 경위를 설명해 두기로 한다.
궁중의 정치세력은 수구파(守舊派)와 개화파(開化派)로 양분되었는데 개화파들은 일본공사의 재정지원과 일본군을 등에 업고 거사에 착수했다. 초반에는 그들의 계획대로 대세를 장악하고 성공하는 듯하였다.
“청국군이 난동을 일으켜 대신들을 살해하고...”으로 고종에게는 허위보고를 하고 일본군을 불러들여 창덕궁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고 정부요인들을 불러들이며 반대파(수구파)들을 살해하였다.
※ 암살된 요인들 :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민영옥, 민태호, 조영하, ◎ 민영익(閔泳翊) 중상 위독
개혁파들은 거사의 성공을 확신하고 정부 각료들을 임명하여 새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으나 그것은 훗날에 “3일 천하”로 유명한 비극으로 끝난다.
원세계가 이끄는 중국군 2,000여명이 궁중으로 돌입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창덕궁, 창경궁을 장악하며 수구파들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개화파들의 궐기는 어이없는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뤄야 했다. 많은 인재들이 보복 처형을 당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겨우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서재필이 미국 망명으로 겨우 연명되었다.
② 선교의 위기와 기회
미북장로회, 북감리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1885년 2월경에는 일본에 도착하였는데 지난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여파로 국내사정은 평온치 않아 잠시 한국 입국을 미루기로 하고 일본주재 선교사들과 교류하였고 일본에 유학 중인 학생이나 망명 중인 인사들에게 우리말과 문화 등을 배우고 시기를 기다렸다.
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회 아펜젤러 부부가 3월 3일 나가사키항을 떠나 4월 2일에 부산을 거쳐 4월 5일에는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미 북장로회와 감리회는 본격적인 한국선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제물포에 도착 즉시에 본국에 다음과 같이 그 소감을 보고하였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그날은 마침 부활주일이었기에 그런 기원적인 보고를 한 것이다.
그런데 갑신정변 이후의 국내사정은 그 여파로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호의적이지 못하다며 주한 미 대리공사 폴크(Foulk)의 권유에 따라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언더우드는 입경을 감행하여 서울의 알렌의 제중원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서 예기치 않은 분위기 호전의 기회가 왔다. 앞서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고 위독하게 된 민영익 대감의 치료를 알렌(Horace N. Allen)이 맡게 된 것이다. 알렌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몇 차례의 대수술로 위기를 넘기며 마침내 치료의 개가를 올렸다.
고종과 민비 그리고 정부측 인사들의 격찬과 신임을 얻게 되었고 그 포상으로 홍영식(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처형됨)의 저택을 하사 받았다. 알렌은 1885년 4월, 하사 받은 저택을 개조하여 제중원(濟衆院)이라는 병원을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 근대식 병원이 되었다. 이 병원은 의료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사들도 이 병원을 통해 훨씬 쉽게 선교활동을 착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교사 자격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말을 익히기 시작했고 스크랜튼(감리교) 그리고 뒤늦게 들어온 헤론(Heron), 여자 의사 엘러즈(A. Ellers)도 이곳에서 활동의 근거를 얻게 되었다.
(4) 연달아 들어온 각 교파 선교사들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각기 다른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식되는 모양으로 들어왔다.
① 영국 성공회 : 코르프(C.J. Corfe 高요한) 신부 - 초대 한국주교, 트롤로프(M.N. Trollope, 趙馬可), 스몰(R.Small), 위너(L.D. Warner, 왕란도), 포우날(J.H. Pownall), 데이비스(M.W. davies)
②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Australia) : 데이비스(S.H Davies) 목사 남매, 매케이(J.H Mackoy), 멘지스(B. Menzies), 포오셋(Fawcett), 페리(J. Perry)
③ 미국 남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 : 테이트(L.B. Tate), 존슨(C. Johnson), 레이놀즈(W.D. Reynolds), 전킨(W.N. Junkin), 테이트(M. Tate), 데이비스(L. Davis), 레이번(M. Leyburn), 볼링(P. Bolling)
④ 미국 남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 리드(C.F. Reid)
⑤ 카나다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 : 게일(J.s. Gale), 펜윅(M.C. Fenwick), 에비슨(O.R. Avison), 맥켄지(W.J. McKenzie), 그리어슨(Grierson, 具禮孫), 랙레(D.M. McRae, 馬具禮), 푸트(W.R. Foote, 富斗一)
⑥ 구세군(The Salvation Army) : 호가도(R. Hogard)
⑦ 동양 선교회(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성결교회 : 카우만(C.E. Cowman), 킬보른(A. Kilbourne, 吉寶菕), 김상준(金相濬), 정빈(鄭彬)
⑧ 안식교회(The Seventh Adventist) : 구니야(國谷喜之介), 임기반(林基盤), 스미드(W.S. Smith)
⑨ 동방교회-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 암브로시우스구도코(A. Gudko), 니콜라이 알렉세예프(Nicolai Alexeyef), 크라신(Krasin) - 1900년 1월초, 러시아 공사관 안에 교당을 설치하고 공식 예배를 드린 것이 한국정교회의 기원이 되었으나 1904년 러일전생의 패전 후 일본에 의해 축출되어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
⑩ 미국 침례교회(The Baptist Church in U.S.A) : 폴링(E.C. Pauling), 가드라인(A. Gadeline)
④의 서두에서 지적한 대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러시는 각기 다른 문화적, 역사적, 교의적 배경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이루어져 앞으로 전개될 “하나의 한국교회”, “하나의 장로교회”를 위한 선교에는 태생적인 장애요인으로 될 소지가 있을 것으로 염려되었고 오늘의 수 많은 교파 분열이 이를 입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19세기 말엽부터 이루어진 선교사들의 입국, 특히 미국교회 주도의 해외선교 열정이 고조된 데는 근 1세기 전에 일어난 제 2차 대각성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의 연장선(延長線) 상의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대각성운동은 세계적인 대부흥사 무디(D.L Moody)의 부흥운동과 연계하여 종교적 열정을 고조하여 여러 교단에서 선교회를 창설케 하고 기독교대학과 신학교를 설립하며 해외 선교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열기에 들뜬 것을 보면서, 미국의 해외선교 열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4. 선교지 분할 조정과 선교 전략
앞서 논급한 대로 어렵게도 이 나라의 문호는 개방되었다. 의료와 교육의 선교에 대한 황제의 윤허가 내려졌다. 알렌 선교사의 성실하고 탁월한 시술은 선교사들에 대한 조야의 시선을 유연하게 만들었다. 이에 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줄지어 입국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1) 선교지 분할 조정-예양협정(禮讓協定)
선교활동의 성황 속에서 선교회 간의 불필요한 마찰이나 갈등의 소지도 생기게 되어 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게 되었다. 가장 빈번한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는 사업은 피차 자제하고 돈, 시간, 노력(勞力)의 낭비를 줄이기 위하여 각 교파 선교회간의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각 선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미국 북장로회와 감리회가 앞장서고 이어서 타 선교회들도 이에 따랐다.
◇ 미국 북장로회 - 감리회 협정(1982)
“인구 5,000명 이상의 대도시, 개항장(開港場)은 공동 점유하고 이하 도시, 지방, 이미 설립된 교회의 기득권은 인정한다. 미개척지는 새로 오는 선교회에 맡긴다.”
◇ 미 남장로회 - 북장로회(1893)
◇ 미 북장로회 - 카나다 장로회(1898)
◇ 미 북감리회 - 남감리회(1907)
◇ 미 북장로회 - 남감리회(1905)
◇ 미 북장로회 - 북감리회(1909)
이상의 각기 협상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교지 분할이 이루어졌다. (관할 구역) ※ 이를 예양협정이라 하였음.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 경기, 경북, 평안남북, 형해, 충북(연풍, 청주)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 전남북, 제주, 충남(대전, 부여, 목천, 금강 유역)
∙미국 감리회 선교부 : 경기, 충북, 강원, 황해, 평남북 일부
∙호주 선교부 : 부산, 경남
∙카나다 장로회 선교부 : 함경남북 지역
2) 선교 정책-네비어스 방식
네비어스(John L. Nevius)는 1829년 미국 뉴저지 출생, 프린스톤 신학교 졸업 후 1853년 미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중국에 파송되어 양자강과 산동성(山東省)을 중심으로 4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한 선교정책의 대가(大家)이다.
널리 알려진 그의 선교정책의 삼자원리(三自原理, Three Self Principle)란 자립(自立, Self-Supporting), 자전(自傳, Self-Propagating), 자치(自治, Self- Governing)로 이를 보완하여 체계화한 것이 네비어스 선교정책이라 할 수 있다.
네비어스 이론에 매료된 북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를 중국으로부터 초청하여 10일간에 걸친 강연과 토론 등으로 선교사들을 훈련시켜 한국에서의 선교원리로 삼게 하였다.
네비어스는 선교지에서의 선교 착수, 새 신자 관리. 신앙공동체 관리, 교인 훈련과 교육, 사경회, 신조와 교리, 교회 규칙, 교회 조직, 타교파와의 관계, 학교와 의료사업 등을 아주 세밀하게 다루었다.
이 방침을 장로회 선교 공의회에서 10개조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정리하여 1893년 1월에 발표하였다.
(1) 전도의 대상을 상류층보다 근로 계층에 두는 것이 좋다.
(2) 모성(母性)이 후대의 양육에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므로 부녀자나 청소년 교육을 특수목적으로 한다.
(3) 군 소재지 등에 초등학교를 설치하면 기독교 교육의 성과가 클 것이므로 선교부 소관 학교에 다닌 남학생들을 선교사로 양성하여 각 지방에 파송한다.
(4) 교육 받은 교역자를 배출하는 희망도 우리 교육기관에서 실현될 것이니 이 점에 항상 유의(留意)하여야 한다.
(5) 최선을 다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정확한 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발간하는 것 이 긴요한 일이다.
(6) 모든 문서사업에는 한자(漢字)의 구속을 벗어나고 순 한글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7) 진취적인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인 중에 의존생활자의 수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자립하는 교회와 헌금하는 교인수를 증가시킨다.
(8) 한국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은 한국인 자신들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이 대중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적은 수의 전도사를 훈련시킨다.
(9) 선교사 의사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려면 환자를 개별적으로 병실이나 환자의 자택에 오래 두고 시료하면서 깊은 감격을 하도록 기회를 가지게 할 것이다. 외래환자 진료소 사업은 비교적 성과가 적다.
(10) 지방에서 와 장기간 입원했다가 퇴원한 환자들을 그들의 주소로 심방하여 사후관리를 계속하여 돌보아야 한다. 그들이 병원에서 받은 온정적 대우는 전도사가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네비어스 이론은 선교공의회나 언더우드의 4개항 정리 등의 채택 이외에도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가 8개항을 별도로 선정하여 신조로 채택한 바도 있다.
네비어스 정책의 정당한 이해 없이 한국 교회사 또는 개 교회사의 이해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네비어스 정책” 연구의 제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곽안련 박사(Charles Allen Clark, Ph.D.D.D)의 “한국교회와 네비어스 선교정책”(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에서의 결론 요약을 적어 둔다.
네비어스 정책 요약
1.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며 전도함.
2.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됨.
3. 자전(自傳) :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4. 자치(自治) : 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된다.
5. 자립(自立) :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조차도 부분적인 보조금을 받도록 한다. 이것은 설립된 당시에만 필요하다. 개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6. 모든 신자는 그룹 영수와 순회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연구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7. 성경적인 형벌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실시한다.
8.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역이라도 분리한다.
9. 법정 소송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10.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할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5. 남장로회 선교사들-군산에 오기까지
1) 미국의 장로교회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신천지 “미국”에 상륙한 유럽 각지로부터 밀려온 이민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신조와 자유로운 이념에 따라 교회를 세우고 새로운 교파와 교회들이 형성되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미국장로교회(Prebyterian Church in the U.S.A)이고 그 외에도 연고지 교회 또는 집단의 이합집산으로 많은 장로교파가 형성되었다.
미국 역사상의 대 사건인 남북전쟁을 계기도 남부지역 장로교회가 미국장로교회와 분열하여 미국남장로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로 독립한 것은 미국교회의 이합집산의 현상 속에서는 그런대로 명분 있는 분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따라 미국남북장로회를 비롯하여 연합장로교 회동은 현재로는 미국장로교회(Prebyterian Church in the U. S. A)로 통합되어 있다.
※ 지경교회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미국장로교회는 북장로회를 뜻하며 남장로회는 북장로회와 합동하기 전에도 한국에서는 우호적으로 제휴하였다.
2) 남장로 선교회에서 뽑힌 선교사들
아펜젤러․언더우드의 상륙 : 김학수 화백의 그림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는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은 당초에는 염두에도 없었다. 전국 교회들이 “제2의 각성운동” 등으로 해외선교에도 열을 올리고 있을 때 그들은 중국, 이태리, 브라질, 멕시코, 일본, 그리스 등을 선교의 대상 지역으로 교려하고 있을 정도였다.
북장로회 언더우드(1세) 목사는 이미 서울에서 알렌 선교사와 함께 눈부신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그 상황을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에서 보고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거기에 남장로회 출신의 테이트(L. B. Tate 최의덕)가 참석하여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한국 선교의 뜻을 세웠다.
같은 해(1891) 한 달 뒤에 언더우드와 당시 미국에 유학중인 윤치호(尹致昊)는 내쉬빌에서 미국 신학교연맹 연차대회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의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은 많은 신학생들에게 크나큰 감명을 주었고 여기에 테이트 이외의 존슨(C. Johnson),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 1787~1951),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 1865~1908) 등이 한국선교의 결심을 하였다.
“여러분, 한국은 이제 서양인을 배척하고 문을 잠가버린 은둔의 나라가 아닙니다. 임금께서는 Allen 의사의 의료 활동을 치하하여 병원을 하사 하시어 치료받으려는 사람으로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의 윤허장을 주었으며 복음을 고대하는 민중들은 우리를 뜨겁게 환영하며 따라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름진 옥토에 씨를 뿌릴 일꾼들을 주님께서는 부르시고 계십니다. ”--- (언더우드 연설의 한 토막)
남장로회 외지선교부 위원회에서는 너절한 이유를 들면서 아직 미지의 땅,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형편이 아니라면서 그들의 신청을 기각하였다.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은 선교부 홍보지인 “The Missionary”에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실었고 기도회를 여는 등 선교사 파송 운동을 추진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 2,000불, 북장로회 3,000불, 언더우드 선교사의 순회강연료 1,000불 등이 선교비용으로 기증되는 등 남장로회의 선교사 파송의 분위기가 점차로 익어갔다.
마침내 남장로회 선교부는 7인의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앞서 신청한 레이놀즈, 전킨, 테이트 3인과 다음 4인이다.
① 메리 테이트(M.Tate 최마태-테이트의 여동생, 1864~1940)
② 데이비스(L. Davis, 1862~1903)
③ 리번(M. Leyburn-전킨의 부인)
④ 볼링(P. Bolling-레이놀즈의 부인)
이들 7인 선교사는 전킨 선교사의 병환 등 이런 저런 사연으로 즉시 한국행을 하지 못하고 1892년 11월 3일, 전킨을 비롯한 2진까지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북장로회측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이미 언급한 대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도적인 지원에 따른 재정적인 보완 뿐만 아니라 숙소문제, 기후, 풍습, 등의 적응문제, 언어 습득 문제 등을 자상하게 인도하여 남장로회 7인 선교사를 잘 도왔다.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독일 대사관 서대문 저택을 1,500달라에 구입하여 그들이 사용토록 했으며 그 후에 뜰 안에 집 한 채를 더 지어 테이트 남매가 사용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장로회 선교들의 현지 훈련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하나의 한국장로교회를 위하여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
이 나라에 입국한 각 국 개신교 선교회가 불필요한 경쟁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예양협정(경계협정),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채택 등을 협의한 것에 대하여는 이미 언급하였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미국 남북장로회, 카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 선교회는 통합된 하나의 상설 기구를 설치하였다. 그것이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 정식 명칭으로는 “장로제정치 체제를 유지하는 선교 공의회” (The Council of Mission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이다. 이 기구가 바로 하나의 “한국장로교회”를 세우는 초석이 되는 것이다.
“주후 1893년(계사) 시시(是時)에 각처에 신도가 유다(多)하나 치리회가 현무(現無)함으로 선교사 등이 한 공의회를 조직하야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완전히 설립될 시기까지 전국 교회에 전권(專權) 처리하난 상회(上會)가 되었으니 제 1회 회장은 이눌서 이더라.”
각도(各道)에 당회원이 있는 위원을 택립하여 시무케 하다가 공회위원(公會委員)이라는 하회(下會)를 설립하여 각처 교회 일을 관리케 하였다. 공회위원은 교회 관할권은 없고 매사를 처리하여 치리상의 권한은 각기 선교회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남장로회 이눌서 선교사가 회장이 된 제 1회 공의회(1893)는 조선교회 선교에 가장 적절한 선교방식을 모색하고 그에 걸맞은 선교구역의 조정을 통하여 마침내 하나 된 조선 장로교회를 이룩하게 하는 역사적인 과업을 감당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추려보면 선교정책의 핵심요소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하층 근로 계층을 선교의 중점 대상으로
(2) 부녀자, 유소년의 중점 전도
(3) 지역 따라 2년제 정도의 초등학교 운영
(4) 현지인(한국인) 전도자의 양성
4) 선교사 공의회와 관련된
장로회 사기(史記) 자료 몇 가지 (본 지방과 관련된 것)
∙1894년(갑오) 공의회 회장 배위량 선교사
“시년 봄에 호남지방에 동학당이 난을 일으켜 척양(斥洋)을 창(唱)하고 그 세(勢) 창궐하야 도로가 불통하난지라 전주에 거주하던 미남(美南) 선교사 이눌서, 최의덕, 전위렴 등은 피난하여 경성에 우거(寓居)타가 반년 후에 복귀하야 전주와 군산을 전도의 중심지로 작정하고 사업을 확정하더라.”(p. 27)
∙1896(병신) 공의회장 이길함 선교사
“전주군 서문외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是)에 선교사 최의덕이 당지에 내왕하야 전도한지 수년에 신자 30여인을 자택에 회집 예배할 새, 김창국, 김내윤과 부인 3명이 최선으로 세례를 받고 그후 선교사 전위렴이 시무시에 와제(瓦製) 30간 예배당을 신축하니라.”(p. 36)
∙1897년(정유) 시년 공의회 회장 최의덕 선교사
“김제군 송지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전위렴이 당지에 내도하야 전함으로 송원선, 강문성 등이 처음 믿고 신자가 점차 증가한지라 이에 예배당을 신축하니 교회가 완성하니라.”(p. 40)
∙1900년(경자) 시년 공의회 회장 오기원 의사
“옥구군 지경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是)에 전위렴이 당지인 최흥서(崔興瑞)가 협력 전도하여 신자가 초진(梢進)함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그 후에 최흥서를 장로로 장립하야 당회를 조직하였고 김옥여, 고성모가 장로로 시무하니라.”(p72)
∙옥구군 구암리 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전위렴, 의사 유대모, 전도인 장인택이 당지에 내왕하야 열심 전도함으로 신자가 점기(漸起)하야 예배당을 신축하고 그 후에 오인묵을 장로로 장립하야 당회를 조직하였고, 목사 김필수, 선교사 부위렴, 장로 양응칠 ----- 시무하니라.”(p. 72)
5) 남장로회 선교부의 호남선교 전개(展開)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위원회에서 7인의 선교사로 선발되어 한국에 도착한 이눌서(레이놀즈) 선교사는 동료인 전위렴(전키), 최의덕(테이트) 선교사와 함께 남장로회 선교부의 중심 역할을 하던 중 장로회 미션공의회 제1회 의장이 되었다.
(1) 전주(全州)를 호남선교의 거점으로!
이눌서(레이놀즈) 선교사는 남장로회 선교구역으로 확정된 호남지역의 중심 선교 거점(선교 Station)으로 내정(內定)하였다. 그리고 그의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어 적합한 처소를 물색하여 주거지를 구매하도록 시켰다.(1893. 3)
(2) 전위렴(전킨), 최의덕(테이트)를 전주로 보내다.(1893. 9)
비서 정해원으로 부터 전주 성문밖 은송리에 주택을 구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위렴, 최의덕 두 선교사를 보내어 가능하면 그곳에 상주(常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하다.
(3) 바로 이어 최의덕 선교사 남매(최의덕, 최마태)를 전주선교부에 상주하도록 하다.
(4) 전라도(호남지역) 답사 여행에 이눌서(Reynolds)와 유대모(Drew) 선교사가 출발하다.
이눌서 선교사는 전주에 선교부 거점을 확보한 후에 호남권 전역(全域)의 선교 전략을 세우기 위해 제물포를 떠나 군산에 상륙한 후에 군산 관아에 들려 전도, 인사를 한 후, 임피, 김제, 전주,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을 답사하였다. 긴 육로 여행을 하는 동안 동행한 두루(유대모) 선교사는 발에 물집이 터져 큰 고생을 치뤘다.
원래의 계획으로는 전주와 광주 그리고 나주에 선교 거점을 세우려 했는데 유대모(두루) 의사의 선편을 이용한 선교의 강력한 주장으로 뜻밖에도 군산이 지정되고 나주 대신 목포가 지정되었다. 유대모 선교사의 발병이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해 내려왔다.(전라도 여행 일기: 레이놀즈 목사와 두루 선교의사, 1894.3.27~5.13) -"Diary of Rev. Reynolds, W.D & Drew, A.Dame M.D"-
(5) 드디어 군창포에-전위렴, 유대모 선교사와 장인택 조사(助事) 군산으로! (군산 선교부 시대의 역사는 시작되다!)
두 선교사와 장인택씨는 1895년 3월 기범선(機帆船)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군산으로 향하였다. 서해안은 때마침 짙은 안개와 역풍으로 항로가 여의치 않아 예정보다 늦게 11일 만에 군산항에 도착하였다.
당시 그들의 눈에 비친 군산항의 인상은 이러했다.
“군산상은 100여 호의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가스런 어촌으로 사람들은 무지몽매하여 미신들을 섬기기 좋아한다. 부둣가의 여인들은 무당 둘레에 앉아 점치기와 고성을 지르며 시비 가리기에 바쁘고 남자들은 둘레방석에 앉아 노름질에 여념이 없다. …”
그러한 어두운 사회에 복음의 씨가 떨어져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비췄으니! 전 선교사의 말씀 듣고 유 선교사의 치료 받고, 병도 나은 사람들이 남들이 볼세라 달걀꾸러미, 닭, 갖잡은 생선 등을 선교사 집에나 병원 뜰에 놓고 돌아서서 고마워하는 사람들, 병도, 마음도, 고쳐지는 아름다운 기적들이 군산 선창가에서는 일기 시작했다.
전킨 선교사와 드루 의사는 1895년 3월에 장인택 조사와 함께 상륙하여 약 1개월간 서로 협력하며 전도와 치료를 하다가 다시 상경한 후 1년이 지난 1896년 4월에 가족들을 동반하고 군산에 돌아와 정착하게 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선교활동과 의료사업이 시작되었다.
6. 군산선교부와 만자기도처
-그 절묘한 상호관계
1) 군산선교부의 시동(始動)
군산선교부는 군산 부둣가 가까운 수덕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 지난 번(1895) 자비(自費) 50불로 구입한 보통 초가집 2동이 그 본거지이다.
전위렴 선교사가 차지한 윗집 객실은 개조하여 예배와 공부하는 공간으로 하고, 모퉁이 한 칸은 객실과 사무실로 사용하며 류대모 의사의 한 채는 약국, 치료실과 대기실로 쓰도록 손보았다.
선교사들의 업무분담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전위렴 선교사(군산 선교부 교회 “당회장” 역할)
∙예배(설교, 기타 주관), 교육(문답 공부, 성경 공과)
∙심방(근린(近隣)), 노방 전도
∙전도 여행 및 강연
∙신설 교회 신앙 지도, 관리
∙선교부 운영 전반 책임
(2) 류대모 선교사(의사)
∙진료, 의약 관리, 부인 Mrs. A.D Drew)은 간호사 역할을 함.
∙의료 심방, 때로는 전위렴 선교사와 동행.
(3) 데이비스 선교사(Miss L.F. Davis)
전위렴 부인과 협력하며 부녀자 전도와 어린이 교육 등 자유롭게 활동함. 특히 만자산의 최매리, 정부인, 유은덕씨 등과의 교류와 친교가 깊었음.
2) 선교부의 선교 전략(戰略)
위에서 군산 선교부의 업무 분담을 설명했듯이 상주하는 부부 등 불과 5인의 힘으로 넓은 지역에 직접 전도하는 일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네비어스 선교정책으로 자립·자력·자진(自立·自力·自進)을 전제로 한 전도 방식에 잘 적응하는 전도를 전개했다고 불 수 있을 것 같다.
(1) 전도 방식 도형
호기심
노방 전도 관 심 선교부 대화 거점 확보
⇒ ⇒ 방문 교류 ⇒
병원 전도 호 감 병 원 참여 인물 양성
동 조
전위렴, 류대모 선교사 잠재적 교인 문답, 세례
※ 위 그림은 군산선교부와 만자산 기도처와의 교류관계를 추적하여
도형화한 것임.
(2) 학습, 세례문답의 중시(重視)
학습, 세례문답은 극히 신중하게 다뤄, 세례교인을 만든다는 것은 선교사역의 목표인지도 모른다. 특히 성실하고 원칙주의적인 전위렴 선교사에 있어서는 전도, 교육, 훈련을 통한 세례교인 탄생을 의미하는 세례문답을 가장 신중하고 엄숙한 행사로 보았다.
여기에 참고로 그가 제시한 세례문답 문제집을 적어본다.
1. 예수는 누구인가? |
11. 모든 이교적 예배 풍습을 버렸는가? |
2.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
12. 당신은 모든 숭배물들을 파괴하여 없애버렸는가? |
3. 예수는 당신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
13. 부인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
4. 예수는 어떤 방식으로 사람이 되었는가? |
14. 조석으로 가정예배를 드리는가? |
5. 예수는 하나님인가? |
15. 당신은 성령을 받았는가? |
6. 예수는 왜 사람이 되었는가? |
16. 당신은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본 일이 있는가? |
7. 십계명을 외울 수 있는가? |
17. 술을 팔거나 마시는 일이 있는가? |
8. 이 계명을 지키고 있는가? |
18. 주의 성찬이 무엇인가? |
9. 당신은 우상숭배를 버렸는가? |
19. 세례가 무엇인가? |
10. 조상숭배를 버렸는가? |
20. 사도행전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
※ 이 문답집은 전위렴 선교사가 남장로회 선교부 기관지 “The Missionary” 1902. 4월호에 실린 것을 번역한 것임.
※ 학습문답-자신이 섬기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교회를 3개월 이상 참석한 사람은 누구나 시험을 통하여 학습반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교회의 영수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원자의 성품을 선교사들에게 말해줌으로 선교사들을 도와준다.
신청인의 교회 출석표는 심사 시에 중요하게 참작되며 적어도 3개월 동안의 규칙적인 예배 참석이 없는 사람은 시험에 응시할 수가 없다.
나이, 가족, 직업 등의 예비적인 질문이 있은 후에 그 사람의 구세주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알아낼 수 있는 질문들이 제출되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당신은 왜 기독교인이 되려고 합니까? 2. 용서받아야 할 당신의 죄는 무엇입니까? 3. 당신은 용서를 받았습니까? 4. 용서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5. 누를 통해서 용서를 받았습니까? 6. 예수는 누구입니까? 7. 그분은 어디에서 태어났습니까? 이하 생략 |
※ 니스벧 여사(Mrs.A.M. Nisbet), Day in and Day out in Korea 에서 인용함.
∙ 선교활동이 궤도에 올라, 학습, 세례문답의 지원자가 늘어나 전위렴 선교사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선교부는 마침내 유능한 조사들에게 학습문답권을 주고 사후관리만을 철저히 하는 식으로 제도를 바꾸고 세례문답만을 철저하게 함으로 세례문답 지원자의 2수, 3수자도 나오게 되었다.
1899년 말에 전위렴 선교사는 1년간 휴가로 본국에 가고 부위렴 선교사(Rev. Bull, William Ford)가 들어왔고, 1901년에 류대모 선교사(의사)도 병고로 귀국하였는데 그 후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1899-1905년경, 군산 선교부의 중요한 인사 이동이 이어지면서 그 활동에 차질이 있었지만 그 후에 정상화 될뿐더러 그 활기는 회복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겠음.
≪후기≫ 초창기 군산선교부(거점) 설치 초기의 중요한 인물인 레이놀드(Reynolds), 전위렴(Junkin), 류대모(Drew), 그리고 데이비스(Miss Davis)에 대하여 인적 사항을 적어두기로 한다.
(1) 레이놀드 (別添)
(2) 전위렴 ( 〃 )
(3) 류대모 ( 〃 )
(4) 데이비스 ( 〃 )
<別 添>
같은 주, 햄펀시드니 대학 최우등 졸업, 특히 어학의 수재로 라틴어, 희랍어, 불어, 독일어에 능통, 존스·홉킨스 대학 의학부 라틴어 교수 재직, 부친의 사업 실패로 시골 소학교 교장 근무와 YMCA 활동에서 얻은 신앙으로 유니온 신학교 진학, 유니온 재학 시절에 중국선교에 관심 있었으나, 미국 신학생 연합 외국선교회에 참가하여 언더우드 목사의 한국선교에 관한 보고강연을 듣고 한국선교에 관심이 바뀌었다.
레이놀즈는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으나 해외선교위원회에서 거부되자 친구인 전킨과 함께 목적 달성을 위해 기숙사에서 매일 3시에 합심기도를 가져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 7인 선교사로 출발되었다.
그는 같은 7인 선교사 멤버인 볼링(Pasty Bolling)양과 결혼하였고 1892년 11월 3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① 마펫 선교사(S.A. Moffett)와 함께 호남선교를 위해 공주지방을 함께 시찰.(1892년 말)
② 두루 선교사(A.D. Drew, 유대모)와 함께 군산, 전주 등 5개 도시를 방문하면서 호남선교의 적지 선정을 위한 검토를 하였다.(1894.3.27~ )
③ 남장로회 선교회 조직, 회장이 됨.(1893)
④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 초대회장.(1893)
⑤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노회(최종회, 1911) 회장 피선
⑥ 평양장로회신학교 어학 교수, 신학지남(神學指南-학술 기관지) 편집인
⑦ 성서번역위원회 (남장로 선교부 대표) 번역위원(1895~ )
저서: 조선어의 성서고유명사집(1914), 신학공과(1915), 성경사전(편)
역서: 성령론, 신도론(神道論, 1931), 인죄론(人罪論, 1931)
논문: 신학지남 게제 수십편
레이놀즈 선교사는 미국남장로 선교사로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하나로 그는 지도력과 학식을 겸비한 목사, 신학교수, 저술가였다. 그는 평양신학교가 폐쇄된 후 귀국하여 다시 한국에 온 일이 없다.
(2) 전위렴 목사
부친: 판사,
가족관계: 12남매 중 둘째임.
학력: 워싱톤 대학 졸업, 리치몬드 연합신학원 졸업.
특기: 웅변의 천재성, 전도에 열정이 많았음, 성질이 순후하고 전도사업에 충성하였다.
남장로회 선교부 선발대 7인중 1인으로 1892년 11월 4일 재물포항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대문의 남장로회에서 기거하면서 1년여 동안 어학과 한국 문화 등을 공부하였다.(이때에 장인택씨를 어학선생·조사(助事)로 맞이함)
∙1893년 9월에 최의덕 목사와 함께 전주지방에 순행하다가 여러 차례 위급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① 장마진 강물을 건너다 실족하여 죽은 뻔한 것을 한국인 목격자가 급히 구해낸 일이 있다.
② 주막에서 자다가 숯불 중독으로 죽게 된 것을 리눌서 목사가 구조하였다.
③ 괴질에 유행할 때에 환자를 돌보다가 자기 생명을 잃을 뻔 하였다.(감염됨)
④ 군산지방에서 교회를 순행하다가 길을 잃고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온 후 6개월 동안 ≪이질≫로 죽을 뻔 하였다.
∙1895년 3월, 전위렴 목사는 유대모 의사, 장인택 조사와 함께 군산에 와서 3개월 가까이 전도하며 군산선교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 주력(注力))하였다.
∙1896년 2월에 전목사 가족이, 4월에는 유대모 의사의 가족이 군산에 이사하여 왔다. 유대모 의사의 사랑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전목사는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1896년에 군산 자기 집에 예배처소를 정하고 배를 타고 해변과 섬으로 다니며 전도하였다.
∙1899년, 자기 집(궁멀) 건축에 과로로 몸이 약해지자 선교부 결의로 본국에 (희년) 휴양(1년) 갔다. 그는 귀국하여 각지를 여행하며 조선선교 형편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병원 건축 기금과 학교 설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돌아왔다.(1900년 말) 그는 이전보다도 더 분주하게 병원, 학교의 건설 등에 몰두아여 이전에 앓던 (이질)의 재발로 위태롭게 되었다.
∙1904년, 선교부는 그를 전주 서문밖교회를 맡기고, 20리 밖에는 순행하지 못하도록 활동 제한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강한 사명감은 제약하지 못했다. 그는 새로 맡게 된 서문밖교회를 열심히 봉직하며 교세는 전보다 배나 성장하였고 호남 굴지의 대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인근에 6처 교회를 새로 개척 설립하였다.
∙1907년 성탄절에 그가 폐렴에 걸린 것이 검진돼, 3명의 의사가 붙어 진료에 전력을 다하였지만 회생하지 못하고 1908년 1월 2일에 운명하였다. 그의 떨리는 마지막 음성은 이러하였다.
“내가 지금 떠나게 됨으로 어찌 기쁜 지 모르겠다.”
리눌서 목사가 내려와서 전위렴 목사의 시신을 궁말 선교부의 묘지, 그의 두 아들들이 잠들어 있는 매장지에 안장하였다. 3)
위의 “선교자 기념문”에서 보듯이 그의 목숨을 건 뜨거운 전도열과 무한한 책임감, 인정 어린 언동과 높은 품위는 가히 선교자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접한 일이 있는 신도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슬픔과 함께 천국의 복락을 빌었다.
(3) 유대모 의사(Drew, A. Damer M.D)
류대모 선교사는 큐렌시 출생. 펜실베니아 대학교 약대를 마치고 버지니아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마침 로스양(Miss L.E. Laws)를 만나 결혼하고 신혼여행도 반납한 채 한국 군산으로 왔다.(1893)
서울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 역사 등을 습득하고 이미 앞장에서 서술한 대로 리눌서 선교사와 호남지방 탐방여행(1894. 3)을 하였으며 육로의 무리한 여행이 심한 발병을 낳게 했고 그게 원인이 되어 유의사는 해로선교(海路宣敎)를 강조하여 군산선교부 설치의 공로자가 되었다.
군산선교부에서는 부부동반으로 병원진료에 전념했으며 때로는 전위렴 선교사와 함께 자그마한 목선으로 금강, 만경강 그리고 고군산 지역의 전도도 하였다.
그의 성실하고 친절한 그리고 뛰어난 인술(仁術)은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감사로 이어져 선교에 큰 힘이 되었다. 그가 군산에 오기 전 청일전쟁에 휩쓸려 콜레라가 만연되었을 때 그는 서대문에 진료소를 차리고 많은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고종황제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군산선교부에서 눈부신 의료선교로 선교에 크게 기여했지만 무리한 활동을 하여 건강을 해쳐 가족과 함께 일시 귀국(1901)하여 병세는 호전되었으나 영 돌아오지 않았고 1924년 작고하였다.
(4) 데이비스 양(Miss Davis, Linnie Fulkerson)
집에 남은 홀어머니는 딸이 떠난 지 9일 후에 작고하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데이비스 양은 슬픔 가운데서도 어머니 뜻에 따라 선교의 길에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고 감사하였다.
서울에서는 미국 영사 안련(H.N. Allen) 집에서 잠시 기거하다가 서대문(남장로회 선교부)으로 옮긴 후 집 근처의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실적은 1년 동안 복음을 들은 자 1885명, 심방 가정 수 80여 호 그리고 남촌으로 이사하여 2,3년간 전도하며 저녁에는 아이들을 모아다가 공부를 시켰다.
1896년에 군산으로 옮긴 후 서울에서와 같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으로 많은 노고를 하였다.
특히 우리 만자산의 최매리, 하동 정부인, 유은덕 등과는 좋은 관련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고 하며 만자산 기도처의 부녀자와 어린이 전도와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8년에는 하위렴 선교사와 결혼하여 전주로 이사하였다. 전주에서도 여전히 활동하다가 병원에 장티브스 환자의 문병을 갔다가 그 병이 옮아 작고하였다. (1903년 6월 20일)
그녀는 군산선교부의 부녀자와 아동 교육의 기초를 닦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3) 선교부와 만자산 기도처
선교부와 만자산 팀과의 관계는 속된 표현으로 “찰떡궁합” 같은 이상적인 것이었고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이룩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 만자산 팀의 기독교 복음 수용(受容)
처음으로 상면하는 서양 사람에 대한 호기심, 신선한 분위기, 익숙치 못한 모임의 흐름에 일행은 자연스럽게 동화(同和) 되어갔다. 그러나 분위기에 휩쓸려가는 그러한 변화보다는 그들에게는 예배와 성경공부 그에 따르는 대화 등을 통하여 더 크고 깊은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것에 대하여는 앞으로 출범할 만자산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 형성과도 관계가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들은 기도처로 전환하기 전에도 사랑채에 모이면 잡다한 대화 중에서 인간성, 양심, 종교 등 사회 상황과 관련된 여러 가지에 대하여 시간을 많이 보냈고 특히 각종 종교에 대한 비판도 상당히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특히 대표적인 재래종교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면 대략 이러한 것이었다.
① 그 시기의 불교는 조정의 억불정책(抑佛政策) 등으로 힘을 잃고 고려시대의 화려했던 위세는 땅에 떨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이 의존하던 중생(衆生)과는 거리가 먼 은둔의 종교로 쇠락했다.
② 유교는 공맹(孔孟)의 철리(哲理)에서 벗어나 왕조의 어용(御用) 종교로 타락하여 허례허식에 빠지거나 사색당쟁(四色黨爭)에 매몰되어 윤리 도덕의 주종인 유교의 위상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③ 인내천(人乃天)의 기치를 들고 서민층을 파고든 천도교는 한때의 단기적인 성과로 민중의 호응을 얻는 듯 했으나 지속적인 성장과 확고한 지반구축을 하지 못하였다.
④ 재래종교들이 쇠퇴하고 변절되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때, 잡다한 신흥종교와 무속신앙의 풍조들이 창궐하게 되었다. 정치 사회적인 어두운 미래 못지않게 정신적인 지주(支柱)를 잃고 목자 잃은 양떼처럼 유리방황하는 상태는 확산되어갔다.
이런 일들이 아주 먼 나라 일처럼 생각되다가도 그게 바로 내 나라, 내 자신의 비참한 현실임을 느겼을 때 만자산 일행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망연자실하는 상태로 되곤 하였다. 암야에 광야를 지나가는 나그네들처럼 암울한 심정인 그들에게 한 줄의 광명한 빛이 나타났다. 바람에 날아든 민들레꽃씨처럼 한 알의 복음의 씨는 떨어진 것이다.
군산 선창가의 선교사 소문을 듣고 적지 않는 호기심 속에서 그저 한 번 가보자 하는 이야기로 가닥이 잡히려 할 때 정백현이 입을 열었다. 평소에 말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니 더욱 조용해진 듯했다.
“자 여러분, 내 말 좀 들어보소. 우리가 늘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현실은 점점 암흑해지고 우리들 생각보다도 훨씬 위급한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소. 나라 꼴이 어떠한가? 종교들은 참 안타깝습니다. 이런 때 한가하게 구경이나 가볼까?
안 될 말입니다. 우리가 가볼테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正體)가 무엇인가? 미국인들이 무엇 때문에 수만리 건너와서 고생하고 있는 것인가? 잘 살펴서 우리들의 심정에 정확한 답이 나온 뒤에 가는 것이 어떨까?”
그 말에 모두들 수긍하여 약간 시일을 늦추어서 생각도 더 해보고 의논도 더 한 후에 선교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때에 이미 심중에는 특별한 흠집이 들어나지 않는 한, 선교사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주장에 따르기로 하는 결심이 굳어진 상태였다.
선교부에 들어선 후, 첫 대화에서나 성경공부의 청강에서 그리고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모습에서도 그들의 행동 범절은 겸허하고 단정하며 담뿍 은혜에 도취된 것 같았다. 가슴이 뭉클하고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느낌도 받았다고 한다.
만자산 일행은 예배에 참여하는 도수(度數)가 늘어날수록 더욱 깊은 감흥에 젖어 마침내 결단을 하고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큰 기쁨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결단들을 하게 된 것이다.
(2) 은혜 받은 사람들의 변화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표정이 밝아지고 자기는 예수교인이라는 의식이 생기고 굳어졌다. 전도와 봉사 그리고 서로가 협동하여 하는 일마다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언제까지 사랑채 신세만 질게 아니라 힘을 합하여 예배당도 마련하자는 생각이 거세졌다. 성령의 은사를 받고 넘치는 기쁨을 자제하며 열심히 활동하는 “예수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역연하게 된 것이다.
(3) 선교부의 시선(視線)과 대응 지원
만자산 팀들의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제일 기뻐하는 이는 선교부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이 기대하던 수준을 훨씬 넘는 반응과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돕고 발전 성장하는 속도를 더욱 높이기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① 교육의 차별화
선교부를 찾는 일반 회중(會衆)과는 달리 만자산 팀에게는 특성을 살려 개별적인 집중교육을 실시하였다.
특정한 시간을 개별적으로 마련하여 설교, 성경공부, 부녀자 및 어린이 다루기, 기획관리 등 2·3인씩 소수 그룹으로 집중관리를 하며 앞으로 이룩될 만자산 교회의 운영 관리, 전도 교육 등 특별교육을 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다. 만자산 교회의 출범과 성장에 큰 보탬이 된 것이다.
② 도(度)가 넘을 만큼 물질적인 지원을 하였다
네비어스 정책에 따라 금기시(禁忌視)하는 물질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쪽복음, 전도책자, 기타 교육자료도 무상으로 많이 주었다. 그중에는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것들도 많이 있었다. 구약사기, 동화집, 기타 가르치기 좋은 교재들이 그중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만자산 교회당을 지을 때는 선교부 건축 때 남겨놓은 묵은 자재들을 몽땅 보내주기도 하였다. 만자산 팀은 기쁜 마음으로 지원을 받았지만 그것이 모두가 공짜는 아니었다.
신속하게 성장한 만자산 교우들의 감사와 보응도 적지 않아 공짜 선물이 된 것만이 아니었다. 전도여행에 동행하였고 그들을 돕는 일을 기쁨으로 맡아 힘이 되어 주었다. 무거운 짐덩이들을 궁멀에서 미리 가지고 와 보관했다가 넘겨주기도 하였다.
마침내 만자산 기도처는 궁말 선교부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고 만자산 기도처 팀은 선교부와의 주고받고 하는 동반자 팀으로 손색 없는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4) 장인택 조사의 역할 (만자산팀의 큰 힘이 된 사람)
만자산 팀이 군산 선교부를 첫 방문했을 때부터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선교사들보다도 더 “장인택 조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교부와 만자산 팀간의 교량 역할를 하면서ㅡ처음 믿게 된 신앙의 성숙, 보람 있는 교회 봉사 그리고 앞으로의 교회 설립과 전도 교육 등 자신의 견문과 해박한 지식으로 우리 팀을 이끄는데 아낌 없는 협력과 지원을 해주었다.
우리 일행과 얽힌 에피소도는 별도로 다루게 되어있으므로 다만 “선교부 총무 겸 어학 선생” 격인 장인택 조사의 공인(公人)으로서의 행적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인택은 평택 태생으로 평택, 안성 등지에서 거대한 농토를 가진 대지주(大地主)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당초부터 부유한 세도(勢道)에는 별 흥미조차 없고 다만 한학(漢學)에 몰두하여 장원 급제를 꿈꿔왔다.
첫 고시에 낙방한 후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서대문 안의 정동(貞洞) 언덕을 배회하다가 우연히 서양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어렵게 손짓 발짓으로 통정이 되고 거듭 만날 수록 상호간의 의사가 잘 소통되어 서로가 말을 배우고 가르치는 어학 선생의 길로 들게 된 것이다.
원래가 총명하다 보니 몇 달 안에 영어 실력이 대단하게 늘어 그는 선교사들의 특별한 어학 선생, 특별한 친구가 된 것이다. 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이눌서, 전위렴 선교사가 그를 반겼고 특히 전위렴 선교사와는 결국 “필생의 동지” 서로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된 것이다.
우리 만자산 팀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대략 이러하다.
③ 그는 선교부와 우리팀 간의 교량 역할을 통하여 우리는 크게 도움을 받고 또한 선교부의 전도의 선봉대가 되어 그 공을 갚는 좋은 순환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④ 장 조사는 만자산 팀의 훈련에 전력(全力)을 기울였다. 그들을 선교부 요원(유급 조사, 전도사, 전도인 등)이 되게 하는 데도 힘썼다.
※ 예, 조사 - 최흥서, 김옥여, 임영호, 고성모,
매서인 - 최매리,
전도사 - 최매리
전도인 - 유은덕, 하동 정씨
⑤ 그는 만자산 팀의 교육에 필요한 교재 뿐만 아니라 참고서적(천로역정, 사민필지 등)도 선물하거나 대여해 주기도 하였다.
⑥ 장인택은 중앙이나 평양 등의 선교부의 거물급 조사 못지 않은 실력가이기도 하였다. 선교사들과 당초에 사귀면서 영어에도 능숙하게 되었으며 선교사 공의회 제1회(1893)에는 호남 지역의 유일한 선교부 조사로 참석할 정도의 인물이다.
⑦ 장 조사와 관련된 인맥 구도는 이러하다.
장인택, 최흥서의 장녀, 장남(한나, 주현)이 혼인하게 되다.
최흥서 - 주현(周鉉) ┓ ┏ 영태(永泰 : 의학박사, 세브란스 교수
┣┤
장인택 - 한나(漢羅) ┛┞ 용주, 용희(장로-미국, CA교회)
┃
오인묵 -긍선(의학박사) - 삼순(三順)
※ 오인묵은 궁말교회 (초대) 장로요, 그 아들 긍선은 구암병원장, 한국 최초의 의학박사(미국 루이빌 대학), 세브란스 대학장이었다.
위와 같은 인맥구도에 더하여 만자산 고성모(聖模-집사-장로-조사-목사)와 양응칠(梁應七-조사, 궁말 장로)가 남매간이 되었다니 만자산-선교부-궁말의 이신통체(異身同體)와 같은 희귀하게 얽힌 인척관계는 인위적인 계산된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이는 분명히 이러한 관계를 통하여 이룩된 신앙공동체가 앞으로 전개될 호남 서북지역의 선교의 주역이 되게 할 하나님의 은총과 뜻이 나타난 것이라 생각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7. 만자산 기도처에서
만자산 교회로!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의 기도-대상4:10)
1) 약동하는 만자산 기도처
야베스의 간구를 들어주신 하나님은 만자산 기도처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 일꾼들의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셨다.
그들은 기도처에서 예배드리고 선교부에서 교육 훈련을 받으면서 새로이 결단하고 전도의 길에 나섰다. 전도란 단순히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는 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면서 출발했다. 그러기에 상대방이 받아들이건 거부하건 관계 없이 열심히 겸손하게 정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일이라는 것을 거듭 거듭 다짐하면서 시작했다.
(1) 전도의 진행 상황
전도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고 사실 부닥치는 난관도 있었다. 그런 때마다 더욱 힘을 내어 단독으로 또는 여럿이 협동하여 난관을 돌파해나갔다.
그 성과는 때로는 놀랄 정도로 빨리 나타났고 어떤 때는 쌓이고 쌓여서 느리게 나타날 때도 있으며 때로는 헛수고 한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바로 눈 앞의 현상에 흔들리지 않고 일행은 열심히 전했다.
그 성과는 여기저기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김옥여, 임영호씨가 반가이 호응하여 앞으로 열심히 배우고 함께 일하겠노라고 의사 표시를 하였다.
이 두 분은 최흥서, 정백현의 전도와 간곡한 권유로 오랜 기간 심사숙고 끝에 결심하게 된 것이며 만자산 기도처의 중요한 일꾼으로 등장하게 된다.
꾸준한 전도의 성과는 속속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새로 작정한 분들을 적어본다.
1. 김득수(得水), 하동 정부인 부부(이양화, 최매리 부부 전도)
2. 최찬경(贊京), 찬일(贊一) 형제(최흥서 전도담당)
3. 강덕향(德향), 유은덕 부부(강채오 전도담당)
4. 최응숙(應淑)(이양화, 최매리 전도담당)
5. 오원집(吳元執)-이양화, 최매리 담당(이양화 형수의 조카)
위의 다섯 분들의 인적관계를 간략하게 적어본다.
① 김득수 내외는 최매리(이양화 부인)의 외사촌 동생 내외이다. 김근철 목사(장로)의 조부모이며 김태성씨의 부모이기도 하다.
② 최찬경은 최양선 장로의 부친, 최병주 집사의 조부, 후에 장로가 됨.
③ 강덕향, 유은덕 부부는 강순실, 순봉, 순석 삼형제 장로의 부모임.
④ 최응숙은 최진옥 장로의 부친, 인영, 인배 장로의 조부임.
⑤ 오원집은 임피 공창리 출신으로 익산 고현교회, 후리교회, 이리제일교회의 설립자가 된다.
(2) 발산, 통사 지역의 전도
① 신태호 (신덕칠 장로의 부친, 채두묵-고사교회 영수 - 장인)
② 채두묵 (채규일 장로 부친, 채원석, 한석 장로 조부)
③ 고화성 (고성모 목사의 부친)
④ 양맹엽 (양해근 장로 부친)
⑤ 임채문 (최대원 장로 장인)
⑥ 고채모 (고주일의 부친)
⑦ 신백선 부모
⑧ 고한섭(고규환 목사 백부)
위에 적은 본동의 8인과 통사·발산 8인 등 10여명의 결신과 이외에도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호의를 가지면서 주저하는 이는 많이 있지만 위의 분들은 본인들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씨는 싹트고 열매 맺어 만자산 교회가 “전도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는데 큰 초석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다. 구체적인 사례는 차차 적시(摘示)하기로 한다.
전도 받아 결신한 사람이 전도한 사람과 어울려서 새로이 전도자로 등장하여 눈부시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바로 만자산 교회가 “전도하는 교회”로 탄생하는 “징조”이다.
(3) 가르치는 공동체—(언문 가르치기)
(한글) 가르치기는 만자산 기도처의 3대 기본사업인 예배, 전도, 글 가르치기의 하나로 그리 힘드는 일이 아닌 것으로 알았다. 당초의 계획은 이러하였다.
담당자 : 최매리(이양화 부인)
가르치는 시간 : 매주 3일(월, 수, 금), 1일 1시간~1시간 30분간
대상자 : 광고한 후 모이는 대로(남녀, 연령 관계없이)
장소 : 기도처에서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 약간 명 이외는 참가자 수가 부진하여 전면적으로 계획을 재검토하여 새 출발하게 되었다. 새 계획은 예상대로 잘 적중하여 (한글) 가르치기는 점차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주관 : 만자산 기도처
책임 : 최매리
구역 담당 : 매밖-하동 부인, 가운데뜸-최매리, 동편-유은덕(강덕향 부인),
통사, 발산-고화성, 신마리아, 남자 장년-김옥여, 임영호
교수 방법
① 호별 방문(개인교수)
② 2·3인 소수 집단교육(자기 집에서)
③ 적응율이 좋은 사람을 선택하여 주 1회(주일) 기도처 모임.
④ 친·인척, 이웃을 중점적으로 관리함.
⑤ 담당자들은 선교부에 파송하여 특별지도와 지원을 받게 함.(최흥서, 정백현의 인도)
※ 만자산 기도처의 운영, 관리 등은 특정한 규칙이나 규정 등이 없이 기도회나 다른 행사를 마친 후 서로 협의하여 결정하며 최흥서, 정백현의 의견은 서로 존중한다.
신앙적으로나 높은 인격, 지도력 등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
(언문) 가르치기 문제의 재검토 과정이 그 좋은 예(例)의 하나이었다. 담당 책임자인 최매리의 보고에 따라 최흥서, 정백현과의 3자 회합에서 그 여의치 않은 사정을 검토한 다음에 개선 방안을 내놓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만자산 기도처의 가장 기초적인 교육과 전도가 한 데 얽혀 어울리는 신앙공동체의 발전의 큰 저력이 되고 앞날의 만자산-지경교회의 소중한 전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기도처 시대의 마무리
(1) 최흥서 사랑채가 기도의 “다락방”-(신앙공동체의 요람)으로!
한적한 향촌의 친교와 대화의 쉼터였던 사랑채가 일변하였다. 만자산 일행이 신중한 결단(決斷)을 하고 선교부 예배에 참여하여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평생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기를 결심한 것이다. 그 결심은 누구의 권유나 요청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그 체험을 두고두고 소중히 간직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선교의 역군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2) 만자산 교회의 등장
① 기도처 사람들에게 선교부는 신앙생활의 좋은 길잡이이며 교육의 인도자였다. 성경 찬송 이외에도 그때 필요한 참고 도서들을 구해주고 때로는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해주는 등 좋은 인도자 노릇을 다하였다.
② 만자산 기도처의 성장은 선교부가 기대하던 수준 이상으로 빠르게 전개되었다. 자체 내부에서도 언제까지 사랑채 신세만 질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나올 때, 선교부에서는 그들대로 만자산 교회의 승격을 생각하게 되었다.
③ 만자산 기도처의 성장에 따른 교회 창립 의견과 선교부의 견해가 일치하여 만자산 교회 설립의 결정은 손쉽게 이뤄졌다.
그런데 이외의 일이 생겼다. 그 당시의 한국장로교회는 아직 상회(上會)인 노회(老會), 총회(總會)가 없어 개척 설립자인 선교부가 관리하는 선교부 소속 교회인데, 군산선교부의 책임자인 전위렴 선교사가 안식년이 되어 휴양 겸하여 본국으로 1년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1899년 말경에 가족 동반으로 떠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본의 강요로 군산항이 개항되어 선교부도 군산항 부두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러 곳을 물색한 끝에 궁말 산줄기에 자리 잡고 새로운 시대, 궁말 시대가 시작되었다.
전위렴 선교사의 출국과 전후하여 불 선교사(부위렴, Bull)가 도착하여 만자산 교회의 제반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④ 예배당 가옥 준비와 교회 승격 축하 예배
장차 훌륭한 교회당을 마련하기로 하고 우선, 간소한 곳, 잠시 사용할 만한 곳을 알아보기로 했는데 마침 중만자의 최찬일 댁 근처에 이사할 집이 생겼다기에 최관보가 알아본 바, 초가 3간에 금 20원에 매수할 수 있어 그렇게 하기고 결정하였다. 다소 손질하여 2~30명이 예배 보기에 알맞은 예배당이 마련된 것이다.
3) 만자산 교회의 출범-축하 예배
(1) 축하 예배 준비
10월 9일 11시에 새 예배당 앞 마당에 채일을 치고 멍석을 빌려다 깔고 간단히 예배 드린 후 점심을 함께 나누기로 하였다.
음식은 역시 최매리, 하동댁 정씨, 유은덕을 중심으로 각각 분담하여 만들어 오기로 하고 예배는 불 선교사와 상의하여 드리기로 하였고, 각자가 서로 협력하여 치루기로 하였다.
(2) 축하 예배와 잔치
1900년 10월 9일 (음력 윤8월 16일(화) 오전 11시
사회 : 장인택 조사
설교 : 불 선교사
제목 : 반석 위에 세윤 교회(마태16:13~20)
찬송 : 190장(예수 사랑하심은)
기도 : 최흥서
광고 인사 : 정백현
참석 인원 : 어른 35명, 어린이 40명.
축도 : 불 선교사
※ 예배 전에 불 선교사의 트럼펫 연주가 있었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을 맛있게 들었다.
1. 민족의 수난과 교회 형성기(1900~1930)
1) 민족 수난의 배경-총독정치의 실체
2) 전도하는 공동체-구역 내 전도
3) 호남 선교의 거점으로 우뚝 선 만자산교회
(1) 최흥서, 개복동교회 창립의 기초를 다지다(1905)
(2) 오원집 청년, 익산의 한복판에 고현교회 개척하다.(1906)
(3) 김옥여씨, 불모의 땅 충남 서천에 교회 세우다
(4) 정백현, 고부, 흥덕, 부안, 무장 지역 전도지원
(5) 정공선, 김제 옥산, 신풍 등지의 의료선교로 큰 부흥 이끌어……
(6) 임영호(집사—장로), 이곡(옥성)교회를 개척 설립하다
(7) 고성모(집사, 장로, 목사)—남원권 면면촌촌에 복음의 나팔을!
(8) 벽지 교회의 첨병-영수님들
① 채두묵(고사리교회 영수) ② 정공숙(산곡교회 영수)
(9) 최매리(군산선교부 전도인, 매서인) 순회 전도하다.(1900~03)
4) 봉사하는 교회 - 그 구조(構造) 가꾸기
(1) 지경(만자산)장로교회의 계보(系譜) 찾기
①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에서 합동공의회로
∙ 제1회 (합동)공의회, ∙ 제2회 (합동)공의회,
∙ 제3회 (합동)공의회, ∙ 제4회 (합동)공의회,
∙ 제5회 (합동)공의회, ∙ 제6회 (합동)공의회,
② 조선예수교장로회 독(獨)노회 시대
∙ 제1회 노회(조직노회) ∙ 제2회 노회 ∙ 제3회 노회
③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창립되다
∙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제1회)
∙ 전라노회 창립(제1회)
∙ 전라노회(제2회)
∙ 전라대리회 초록(제2회)
∙ 전라대리회 초록(제2회 제4차 회의)
∙ 전라노회 제7회(정기노회)
※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회 총회-전라노회 분립 신청 기록
∙ 만자산교회 관할 체계도
(2) 봉사하는 공동체 - 활동하는 교회 직원들(1)
① 만자산교회를 이끌었던 선교사와 교회 직원들
② 교회 내 날일 봉사하기
∙ 예배당 이전, 증축(1904.2)
∙ 교회 묘지 가꾸기(1905)
∙ 부속 행낭채 개수-소학교 개설(1908)
∙ 친목 상조계 조직(1910)
③ 예전의 변화 - (술 없는 장례식에로!)
∙ 최관보 씨 장례식
∙ 정부인(김득수 씨 부인) 장례식
∙ 상령 최씨(최매리 - 이용재 씨 모친) 장례식
④ 만자산 회당 - 야학당의 건조(1923)
(3) 봉사하는 공동체 -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① 일제의 침략 - 초지수탈 계획의 강행
② 나라를 위한 기도 - 몸을 던지는 귀한 믿음
가. 을사보호조약(1905) 과 애국기도회
나. 경술국치(1910)와 구국기도회(1910)
가. 이순길, 강홍선 선생 주도의 삼일구국기도회
(4) 가르치고 인재를 기르는 교회
① 기초교육을 다지는 공동체(1897~)
∙ 언문 가르치기
∙ 3인방의 신행과 언문 가르치기
∙ 주일학교(장년부)
② 배영소학교 설립(1908~)
③ 지경교회 야학당 설립(1921)
④ 선교부 사경회, 성경학교 교육 참여
※ 선교부 보고, 성경부인 (칭찬) 기록
1. 민족의 수난과 교회
형성기(1900~1930)
1) 민족 수난의 배경—총독정치의 실체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교회의 탄생이라는 큰 축복과 국권의 상실에 따른 망국의 한(恨)을 동시에 안게 되는 힘겨운 시대를 맞는다.
운양호(雲揚號) 내침 사건을 계기로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통하여 일제는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1876)로, 한국의 문호를 열게 하였다.
그들의 침략의 야욕은 더욱 증대하여 갔다.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5)의 승전으로 더욱 콧대가 높아진 일제는 한국 정부를 더욱 압박하여 을사(乙巳)보호조약(1905)을 체결하여 한국의 주권(主權)을 거의 박탈하는 상태까지 갔다.
그들은 한국을 통치하고 약탈할 기구로 통감부(統監府)를 세우고, 이사청(理事廳) 관제를 공포하였다. 바로 이어 한일신조약(丁未7조약, 1907) 그리고 한일합방(1910)으로 우리는 국권을 잃고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 잃은 일제 식민지 백성이 된 것이다.
일제의 총독부 치하의 무서운 학정과 경제적 착취와 박탈은 극에 달하여 많은 한국민은 생지옥의 고난 세월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학정과 착취의 참상은 다음 장에서 계속 다루기로 한다.
2) 전도하는 공동체-구역 내 전도
만자산 교회는 기도처 시대와 하등 다름없이 만자산 본동과 통사, 발산 지역의 구역 내 전도를 잘 하고 있으며 힘닿는 대로 그 범위를 구역 밖으로 넓혀가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최매리, 하동댁(정씨) 그리고 유은덕 3인방의 한글 공부 겸한 축호 심방 전도는 그 효과가 뚜렷하였다. 통사동 지역에서도 고화성의 사랑방 전도와 신마리아의 축호 방문 전도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선교사들(부위렴, 하위렴)의 5일장 전도, 김제, 임피 등지의 전도 여행에 동행 지원하는 일은 김옥여, 임영호, 오원집 등이 빠짐없이 책임 이행을 하여 지역 선교의 능률을 올렸다.
3) 호남 선교의 거점으로 우뚝 선 만자산 교회!
(1) 최흥서, 개복동 교회 창립의 기초를 다지다(1905년)
만자산 교회가 출범한 이후, 이전보다도 갑절이나 바빠진 최흥서에게 군산선교부(궁말)는 뗄 수 없는 어려운 부탁을 해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선교부 조사(助事)가 되어 군산 시내 전도를 맡아 달라.”는 것이다. (내용을 간소화 하기 위해 그 역할을 기록한 조선 예수교장로회 사기를 인용하기로 한다.)
“군산부 개복동 교회가 성립하다. 이전에 선교사 전위렴과 의사 유대모가 이곳에 주택을 정하고 복음으로 선전하며 의약으로 시제(施濟)하야 신자를 얻으므로 전위렴 사택(私宅)에서 집회하난 중...... 선교사 거점 위치를 옥구 구암으로 이전케 되므로 약간의 신도는 구암으로 왕래하며 예배하고 혹은 타처로 이거(移去)하니라. 그 후에 선교사 어아력(魚亞力)이 최흥서로 군산에 전도케 함으로 신자를 얻어 구복동(九福洞)에 임시 예배 처소를 설립하고 회집하는 중 최흥서는 전도매서(傳道賣書)가 되어 전무(全務)하였고 그 후에 개복동 남편 산기슭에 12간 예배당을 신축하고 수십 명 신자가 예배함으로 교회가 완성되어 .... ”
조선(朝鮮)예수교장로회사기(長老會史記) p. 138
※ 위 책은 1928. 9. 10. 장로회 총회(長老會 總會)가 발행(發行)한 것으로 각 노회 선교회(老會 宣敎會) 별로 선교사 1인, 목사 1인이 편찬위원이 되었는데 군산은 하위렴 선교사와 개복동교회 출신 홍종필 목사(후에 총회장 역임)가 위원이었으니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 인정됨.
궁말 선교사들이 최흥서에게 간청한 것은 이미 없어진 군산 선교부 교회(전위렴 사저에 모였던)의 복원이 아니라 개항으로 날로 달라지는 신흥 도시 군산항에 선교 거점을 확보하는데는 최흥서 이상 가는 능력 있는 적임자는 없기에 그의 분주한 형편을 잘 알면서도 매달리는 것이고 최흥서는 그 동안의 고마운 은혜에 보답하는 제백사하고 간청을 받아들여 임무를 다한 것이다.
결국, 최흥서는 구복동 임시 예배처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배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여 마침내 12칸의 개복동 예배당을 창설하게 한 것이다.
마침내 신흥도시 군산 한 복판에 최흥서는 선교 거점을 구축한 후 본인은 구복동의 전도매서인(傳道賣書人) 역할을 당분간 계속하였다.
2) 오원집 청년, 익산의 한 복판에 고현 교회 개척하다.(1906)
이미 앞장에서 서술한 대로 오원집은 임피 술산 공창리 사람으로 친척인 왕산리 “오할매”댁에 왔다가 전도 받고 만자산까지 열심히 다녔고 만자산 기도처 멤버로는 제일 젊은 청년이었다.
성품이 온순하고 책임성이 강한 사람으로 고현리 처녀와 결혼하고 그곳으로 이사한 후에도 만자산 기도처에 출석하며 신앙을 키웠다. 특히 하위렴 선교사의 장기(長技)인 노방 전도에는 원근을 가리지 않고 동행하여 전도지를 나눠주고 쪽복음을 파는 등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한 청년으로 하위렴 선교사의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고현리에 가정을 꾸미고 자녀들을 여럿 두면서 고현리 친구들과 만자산까지 오느니 그곳에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열심히 전도한 결과 1906년에는 고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고현교회는 일취월장 은혜 가운데 크게 성장하여 송학리, 북일, 기타 많은 교회들을 분립 개척하는 등을 거듭하면서 이리 지방의 어머니 교회로서의 소임을 다하였으며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리 신광교회도 고현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로 호남지역 굴지의 교회의 하나이다.
오원집 한 사람이 뿌린 씨가 열매를 맺는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몇 가지 맺음말을 적어둔다.
오원집은 개인적으로 다복한 사람이 못된 것 같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나 장남(남윤, 후에 제일교회 장로가 됨) 이외의 모든 자녀들을 일찍 잃고 1915년에는 부인마저 잃는 비극을 겪었다. 마치 욥이 겪은 시련을 그대로 겪으면서 그의 뜨거운 신앙으로 시련을 이겨가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갔다. 재혼한 부인과 합심하여 마을 뒷산인 배산에서 밤 이슬을 맞으며 열심히 기도한 결과 이리 한 복판의 후리교회를 개척(고현교회 일부 분립 겸함)하는 열매를 맺게 되며 이는 훗날 이리 제일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1951년에는 제일교회가 심각한 내분에 신구교파 싸움으로 확산될 때 오원집은 당회장인 이상귀 목사를 도와 교회 화평에 앞장서 오늘의 기장교단 제일교회를 지키는 기둥 노릇를 하였다. 오원집은 만자산에서 하위렴 선교사에게 학습문답을 받고 고현에서도 하위렴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서리집사로 임명도 받았다.
(3) 김옥여(金玉汝)씨, 불모의 땅, 충남 서천에 교회를 세우다.
김옥여씨(후에 조사, 장로)는 멀리 완도 태생으로 삶의 터전을 찾아 이 고장에 온 분이다. 만자산에 온 후에 최흥서, 정백현 등의 권유에 따라 사랑채의 단골이 되었다. 마침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로는 열심히 궁말 선교부에서 말씀도 듣고 성경을 정독하여 그의 신앙은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그는 근검 성실하고 총명한 사람이어서 만자산 기도처에서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 눈에도 들어서 특별히 부위렴 선교사의 순회 전도에도 자주 동행하였다. 그가 두 번째로 서천 읍내 어느 산골짜기를 심방했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머리에 오는 게 있어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그는 “그곳의 심방 손 노릇만 할 게 아니라 바로 그곳 사람들의 동료가 되어 함게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 그리스도의 종이 되리라! 결심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백정이거나 백정 같은 막된 사람들인데 돈들은 잘 벌었다. 그들은 예의 범절도 없고 인사 체면도 없이 돈만 벌면 되는 막된 생활을 하는 이들이었다.
김옥여씨는 그들이 아무리 돈을 벌고 물질을 거머쥐어도 인간 대접을 못 받고 멸시 천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구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의심도 받고 배척도 받았다. 온갖 힘을 기울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대화가 통하게 되었다.
김옥여의 온갖 노력으로 마침내 교회는 이루어져 40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철저한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 교회의 현장의 모습도 보일겸, 안고 있는 문제도 상의하기 위해 궁말 선교부에서 서천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예고 없이 찾아온 부위렴 선교사 일행은 현장을 보고 잘 교육된 신도들을 살펴보면서 감탄하였고 김옥여의 노고에 많은 치하도 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터졌다. 비인에 새로운 장터가 생기면서 그 곳, 성포대로 20여 명이 몰려가고 또 새 성전으로 쓰려고 구입한 사당채를 수리하고 이사 준비를 하려는데 근처 거주자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 이후의 경위도 복잡하고 장황한 설명이 필요함으로 생략하고 김옥여의 뿌린 복음의 씨는 또 다른 일꾼들에 의해 가꾸어져 서천의 교회는 성장하게 된 것으로 끝맺고자 한다.
김옥여는 선교부 조사로, 지경교회 조사로 시무한 후 장로로 임직되었다. (1917)
(4) 정백현 : 고부, 흥덕, 부안, 무장 지역 전도 지원
청소년 시절을 보낸 정읍, 고창 지역의 지리에 밝은 정백현은 교회 주일학교(장년부), 기타 영수 격으로 일상적인 봉사에 시간이 메어 있는데 선교부 신임 전도사를 인도하여 위의 고부, 흥덕, 부안, 무장 근교의 5개 처 전도를 도와 약 일백 2~30명을 확보하고 매월 1회씩 순회전도 하도록 지원하였다.
※ 부위렴, 1904 개인보고에서
(5) 정공선 : 김제 옥산, 신풍 등지 의료선교로
큰 부흥 이끌어.....
정공선(장로-옥산)은 정백현의 2남으로 영명학교를 졸업한 후 구암병원 패터슨(Patterson) 의사의 조수로 일하면서 패터슨과 같이 김제 근처의 의료선교를 하였으며 열심히 독학하여 총독부 주관 의사고시에 합격하였다. 의사가 된 후에도 패터슨에 밀착하여 의료기술을 배우며 앞날을 대비하였다.
그는 독립하여 늘 의료전도에 동행했던 만경에 병원을 차렸다가 다시 김제읍내 옥산교회 옆에 벽성의원을 설립하고 교회 봉사와 병원 진료에 힘썼다.
입지조건이 열악하여 운영이 힘들었던 옥산교회는 벽산의원의 명성에 따라 옥산교회는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의료전도의 성과로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왔다.
1922년 초에 24 평의 예배당을 신축하는데 교회와 정공선이 각각 건축비의 절반씩을 부담하였고 그 해에 교회 설립자인 김여일과 함께 정공선은 장로가 되었다.
정공선은 뜻이 있어 장차 도시화될 신풍리에 병원을 옮겨 신풍의원을 개원하고 근처에 교인이 증가하자 요촌리 소재 자신의 소유지에 38평의 새 성전을 지어 김제읍교회로 하였다. 교회를 이전할 때 의견이 엇갈려 김 장로 등 일부는 옥산교회에 잔류하고 실질적으로는 분립된 상태로, 결국 노회의 결의에 따라 김제중앙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병원 원장이라기보다는 김제 제일교회 의료 선교사 격인 정장로의 봉사와 사랑의 소문은 널리 인접 군까지 알려져 병원이 유명해지는 이상으로 김제 중앙교회는 김제의 중앙이 아니라 전북의 중앙교회라 할 만치 크게 부흥하였다. 그는 전북노회 회계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선교와 봉사에 관련된 일화가 많은데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6) 임영호(집사—장로), 이곡(옥성)교회를 개척 설립하다.
임영호 장로는 개척 전도에 고군분투하여 산월리-교회-궁말 선교부-옥구면 일대를 3년여 동안 오가며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는 타고난 능력과 친화력으로 옥구지방 서쪽의 일본인 집단 농촌의 장벽을 뚫고 옥성교회(이곡교회)를 설립하여 옥구 서남부 지역 선교의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곡교회의 설립은 지역 선교 거점 확보 이외에도 박기화 청년을 발굴하여 옥구지방 연합운동(소아회 연합운동, 면려회 청년운동)의 활동가로 등장하게 한 것이다.
이곡교회가 분립 또는 개척한 교회로는 신관(분), 옥구(선제), 월연, 상평, 등등이 있다.
(7) 고성모 (집사, 장로, 목사)—
남원권 면면촌촌에 복음의 나팔을!
고성모는 지경교회의 자랑스런 전도자로 전국에 알려진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에 관한 기사가 많음으로 본항에서는 전도하는 교회, 전도하는 일꾼으로서의 그의 발자취를 적어 둔다.
그는 27세(1924)부터 3년 동안 윈 선교사의 조사로 남원 지방에서 일할 때 남원 군내의 교회마다 안 들린 곳이 없고, 각 면 마을마다 빠진 데 없이 전도지를 나눠주고 그가 마지막 송별예배를 드린 남원읍교회에서는 석별의 눈물 바다가 되어 신도들이 10 여리나 전송하며 따라왔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와서 불 목사의 조사로 15년간 그와 함께 군산 선교부 관내를 전도여행한 상황은 별도로 쓰기로 한다.
그 후에 그는 목사로서의 정도를 걸으며 모 교회인 지경으로 부터 대창, 고현, 완산, 정읍, 전주 동부로 목회자로서의 여정(旅程)을 거쳤다. (예장 합동측 증경 총회장)
(8) 벽지 교회의 첨병(尖兵)—영수님들
① 채두묵(채원석, 한석 장로 조부)-그는 지경교회 이명(移名) 제1호로 부인 신마리아와 규권, 규찬을 데리고 김제 고사리로 이사해 그 교회의 영수(領袖)로 어려운 시기의 고사리교회 수문장 노릇을 잘 감당하였다. 김제 진봉의 고사리는 만경강 하구에 있는 조그마한 어항이다.
시골 어항이다 보니 폭력이 난무하고 대낮에도 분위기가 어수선한 곳이니 그 한복판에 있는 교회도 편안할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뛰어든 채두묵은 가슴이 끓었다. 하나님, 이 교회를 지켜주소서! 그는 통사리 시절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믿음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의 눈물의 기도와 불 붙는 신앙은 교인들의 스승이요 교회의 파수꾼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영수가 되었다.
고사교회와 우리 지경교회는 기묘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고사교회의 대지(垈地)는 고 최순열 장로의 부친 최석보씨가 헌납한 뜻 깊은 곳이며 최순열 장로의 유소년 시절은 그 곳에서 보냈다.
② 정공숙(안수집사) - 산곡교회 영수가 되다
지경교회 이명 제2호는 정백현 영수의 아들 정공숙 가족이 성산면 창오리로 이사하는데 따른 것이다. 창오리는 산곡교회의 바로 이웃 마을이지만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전공숙 일가 대가족이 산곡교회의 구원 부대처럼 교회의 일꾼들이 되어 어려운 교회 사정을 개선하였다. 그는 교회 영수로 헌신하였다.
(9) 최매리(군산 선교부, 전도인, 매서인) 만자, 남전, 송지동, 동련 등의 순회전도하다(1900~1903)
4) 봉사하는 교회-그 구조(構造) 가꾸기
우리가 경술국치(1910)로 나라를 잃은 후,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대대적인 지방 행정 기구를 개편하였다.
부령 제 111호에 의하여 이 고장의 임피군은 없어지고 우리 주소는 임피군 남3면 만자산리→옥구군 대야면 지경리로 변경되었다.(1913.12.29. 부령 제 111호)
이에 따라 만자산 사랑채→만자산 기도처→만자산 교회는 자연스럽게 지경교회로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핵(核)이었던 만자산은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갔고 우리가 간구하던 “지경을 넓히소서!” 대로 지경교회 시대가 온 것이다.
지경교회가 그 이름이 바뀌고 전도하고 교육하고 봉사하는 기능을 갖추었지만 기구를 갖추는 데는 또 시간이 걸린다. 우리 교회는 이 나라에 들어 온 많은 선교사회 중,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도움으로 성장해 왔다. 이미 장로교회의 구조에 대하여는 약간 논급한 일이 있으므로 간단히 살피고 넘어가려 한다.
장로교회는 교인이 선출한 장로와 일정한 자격이 있는 목사를 청빙하여 그들이 다스린다.
교회를 대표하는 일정한 수의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노회가 지역 내의 교회-지교회(支敎會)를 다스린다. 교회 설립, 허가, 교역자 이동, 장로 선출 허가 등이 그 직무이다.
각 노회(老會)가 선출하여 파송한 대표(목사와 장로 동수)의 모임이 총회다. 총회(總會)는 전국 교회의 최고 기관으로 교단의 헌법, 교리, 교단의 중요한 선교 정책 등을 결의 시행한다. 장로교회는 민주적인 운영과 관리로 지교회 - 노회 - 총회의 상하 종속과 지배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의존과 보완 관계를 유지하는 교회로 감독 교회, 회중 교회나 교황 체제와 다르다.
(1) 지경(만자산) 장로교회의 계보(系譜) 찾기
이미 앞장에서 서술한 대로 이 나라에 입국한 4개의 장로회 선교회(미국 남,북장로회, 호주, 카나다)는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1893~1900)를 조직하였다. 그 목적은 같은 장로회끼리 불필요한 경쟁이나 마찰을 피하려는 것과 이 땅에 각기 다른 장로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장로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①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에서 합동 공의회로
선교사 공의회가 잘 운영되고 한국 교회의 설립 준비가 예상대로 진척되자 공의회의 운영을 확대 강화하여 한국인 대표(장로, 조사 등)도 참석하여 함께 의논하는 합동 공의회로 조직키로 하였다. 합동 공의회는 영어를 사용하며 한국교회의 정치, 권징, 교리, 신앙고백 등을 준비하는 선교사 공의회와 한국인 지도자를 기르는(한국어 사용) 공의회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 제 1회 (합동) 공의회 (1901. 9. 20. 09:00)
곳 : 경성 정동 예배당
회장 : 소안론 선교사
서기 : 서경조
참석자 : 조선인 장로 3인, 조사 6인, 선교사 25인
(군산-부위렴, 최흥서 2인)
○ 제 2회 공의회 (1902. 9. 13)
곳 : 서울 제중원
회장 : 이눌서 선교사
서기 : 서경조 장로
참석 : 장로 5인, 조사 11인, 집사 2인, 선교사 21인
※ 전라도 공의회 위원
전주; 최의덕, 하위렴(선교사), 최중진(교인)
군산; 전위렴, 부위렴(선교사), 최흥서(조사)
목포; 이(조사), 김윤수(교인)
○ 제 3회 공의회 (1903. 9. 20)
곳 : 평양 장대현 교회
회장 : 구례센 선교사
서기 : 양전백 장로
참석자 : 목사 28(선교사), 장로 4, 조사 12, 집사 2
※ 군산; 전위렴, 부위렴, 양응칠(조사)
○ 제 4회 공의회 (1904. 9. 13)
곳 : 경성 동현 예배당
회장 : 왕길지 선교사
서기 : 주공삼 장로
참석 회원 : 선교사 45, 장로 총대 25
※ 전라 소회 : 선교사 8, 장로 2(윤식명, 이윤국)
○ 제 5회 공의회 (1905. 9. 11)
곳 : 경성 승등 예배당
회장 : 마포삼열 선교사
서기 : 주공삼 장로
참석 회원 : 선교사 50, 총대 33
※ 전라도 소회 참석자
선교사 : 배유지, 부위렴, 하위렴, 전위렴, 마로덕 오목사, 변목사, 최의덕
총대 : 최대진, 김치만, 김윤수, 임성옥, 유내춘
○ 제 6회 공의회 (1906. 9. 12 후2:00)
곳 : 경성 연동 중학교
회장 : 배유지(전라소회)
서기 : 주공삼(평안소회)
참석 회원: 선교사 33, 총대 50
※ 전라소회 참석자
선교사 : 배유지, 부위렴, 어도반, 전위렴, 오목사, 변목사,최의덕, 노의사
총대 : 최흥서, 최중진, 변창연, 박화승, 김필수
② 조선예수교장로회 독(獨)노회 시대
나라의 꼴은 비참하게 무너져 가는데 교회의 성장 속도는 선교사 뿐만 아니라 선교사를 파송한 본국 교회에서도 놀랄 정도로 빨랐다.
제 5회 공의회에서는 조선 교회의 목사, 장로와 선교사로 구성된 조선 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고 조선 교회 총회가 구성될 때까지 5년간 잠정적으로 총회 성격의 치리 기구로 하기로 결의하였다.
○ 제 1회 노회 (조직 노회)
때 : 1907. 9. 17
곳 : 평양 장대현 교회당
참석 총대 : 장로 40인(최흥서 포함), 목사(선교사) 38인
임원 선정
의장 : 마포삼열
부회장 : 방기창
서기 : 한석진
부서기 : 송인서
회계 : 이길함(선교사)
주요 결의사항
ㄱ. 목사 장립(7인)
서경조, 함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ㄴ. 신경, 정치 채택은 1년간 유보키로 함.
ㄷ. 전도위원을 외지 전도국으로 하고 국원 12인으로 하기로 함.
ㄹ. 이기풍 목사를 외지 선교사로, 제주 제주에 파송키로 함.
ㅁ. 각 소회를 대리 위원회로 변경하고 구역은 평북, 평남, 함경, 경기, 충청,
전라, 경상으로 분할함.
ㅂ. 미국 남․북노회, 카나다, 호주 장로회에 본 노회 조직 보고함.
ㅅ. 피택 장로와 목사 후보생의 문답, 시취와 목사를 위임하는 일은 각 대리 위원회에 일임함.
ㅇ. 노회비를 징수하기로 함.
ㅈ. 이기풍 목사는 전라 대리 위원으로 하며, 그 선교 비용은 전국 노회가 연보 담당키로 함.
○ 제 2회 노회
때 : 1908. 9. 6. 후2:00~
곳 : 경성 연동 교회당
참석회원 : 목사 7인, 장로 52인(최흥서 포함), 선교사 38인.
임원 선임
노회장 : 기일 선교사
부회장 : 이눌서 선교사
서기 : 한석진 목사
부서기 : 김필수 목사
회계 : 이길함 선교사
결의 사항
ㄱ. 신경과 헌법(정치)이 완전 통과함
ㄴ. 만국 공의회 총대 3인 선정
ㄷ. 감사절은 양력 11월 끝 목요일로 정함
ㄹ. 4개 선교부가 그 신학생 수에 따라 신학교 비용을 분담키로
○ 제 3회 노회
때 : 1909. 9. 3 전9:00
곳 : 평양 신학교
참석 인원 : 목사 15, 장로 70, 선교사 33, 합 118인
임원 선임
회장 : 원두우 선교사
부회장 : 이기풍 목사
서기 : 한석진 목사
부서기 : 김필수 장로
회계 : 이길함 선교사
부회계 : 김성탁 장로
주요 결의사항
ㄱ. 목사 안수 8인 : 김찬성, 김필수, 이원민, 윤식명, 장관선, 정기정, 최중진, 최관홀
ㄴ. 최관홀 목사를 거류민을 위해 해삼위에 파송키로 함.
ㄷ. 한석진 목사를 일본 유학생 선교를 위해 3개월간 파송키로 함.
ㄹ. 예수교 회보(기관지)를 발행키로 함.(사장 한석진)
ㅁ. 노회 규칙을 제정 채용함.
ㅂ. 신학교 교육원회 대신 신학교 이사회를 조직함.
○ 제 4회 노회
대 :1910. 9. 18. 후2:00~
곳 : 선천, 염수동 예배당
참석 회원 : 목사 25인, 장로 74인, 선교사 30인, 합 129인
임원 선정
회장 : 기일 선교사
부회장 : 길선주 목사
서기 : 한석진 목사
부서 : 김필수 목사
회계 : 사락수(미국인)
부회계 : 김성탁 장로
주요 결의사항
ㄱ. 신경, 정치, 규칙을 노회록에 부록으로 간행키로 함.
ㄴ. 교회 신보사를 경성으로 이설키로 함.
ㄷ. 유학생과 신도의 형편을 시찰하는 위원을 동경에 파송키로 함.
ㄹ. 100만 명 전도를 시작하고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에 파송키로 함.
ㅁ. 노회 회집일은 매년 9월 제1주일로 정함.
ㅂ. 신학교에 별과(신학)를 두기로 함
ㅅ. 목사 안수 : 김익두 목사 외 17명
○ 제 5회 노회
때 : 1911. 9. 17. 전9:00~
곳 : 대구 남문내 예배당
참석 회원 : 목사 29인, 장로 112인, 선교사 46인 계 187인
임원 선정
회장 : 이눌서 선교사
부회장 : 양전백 목사
서기 : 한석진 목사
부서기 : 김필수 목사
회계 : 시락수 선교사
부회계 : 김석창 목사
결의사항
ㄱ.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조직에 관한 결의
ⅰ) 총회는 내년(1912)에 조직한다.
ⅱ) 총회에는 다음과 같이 8개 노회를 둔다.-북평안, 남평안, 황해,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ⅲ) 노회 조직은 명년 3월 1일 이내로 할 것.
ⅳ) 명년 총회는 9월 첫주일 개회키로 하고, 총회 조직 회장과 서기는 본노회 회장과 서기가 맡기로 함.
ⅴ) 총회 조직까지는 대리회가 종전대로 사무처리 할 것.
ⅵ) 총회 총대는 제1회 총회 시는 각 노회 목사 전원과 총회 전에 개회하는 노회에 참석한 각 지회 총대 장로 전원으로 한다.
③ 예수교 장로회 조선총회 창립
원더우 선교사의 주도(主導)로 이 나라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려는 계획으로 시작된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1893)는 이미 서술한대로 조선예수교 장로회 합동공의회(1900~ )시대를 거쳐, 마침내 예수교 장로회 조선총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발전하는 속도가 어찌도 빠른지 현지의 선교사는 물론이고 그들을 보낸 본국 교회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제 1회)
곳 :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 (여자성경학원)
사회 : 이눌서 목사
성찬예식 :
분병 ; 마포삼열 목사
배잔 ; 원두우 목사
[정회]
○ 재개회(속회)
때 : 1912. 9. 2. 전9:00~
곳 : 평양 서문밖(신학교)
개회 ; 이눌서(성경; 마가6 :
8 봉독, 기도)
회원 점명 ; 7개 노회 목사 96인(선교사 44포함), 장로 125인, 합 221인 참석
임원 선정
회장 원두우 목사 부회장 길선주 목사
서기 한석진 목사 부서기 김필수 목사
회계 방위량 목사 부회계 김석창 목사
※ 주요 결의사항
① 만국 장로회 교령회, 미국 남장로회로부터의 축전 피력과 답사 발송키로 하고, 각국 교회를 위한 기도(기도; 길선주 목사) 드리다.
② 국장(國葬) 요배식 참여키로 위원은 회장 자벽키로 하여, 원두우, 김규식, 배위량 등 노회별로 목사, 장로 각 1인씩 선정하다.
○ 전라노회 창립(1911. 10.1 5. 후2:00~ 곳 ; 서문밖 예배당)
참석 총대
목사 : 배유지, 이눌서, 류서백, 부위렴, 강운림, 최의덕, 마로덕, 고나복, 타맛,
하리순, 이기풍, 김필수, 윤식명
장로 : 최흥서, 양성률, 서영선, 신경운, 이승두, 최국현, 조덕삼, 이원필, 유기택,
최학삼, 이자익, 위이렴, 오인묵 합27인
임원 선정
회장 김필수 부회장 배우지
서기 이승두 부서기 최구현
회계 최의덕
공천위원 : 이눌서, 양성률, 이원필, 마로덕, 최흥서
※ 정사위원 : 배유지, 이기풍, 최흥서
헌의, 재정, 규칙, 학무, 정치, 검사위원 : (略)
▪규칙위원(하리순) 보고 :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경과 규칙, 세칙을 따를 것.
▪학무위원 보고(김필수 회장)
ⅰ) 소학교 과정(심상 5년, 고등 2년)을 (심상 3년, 고등 2년) 5년제로 하기로 (채택)
ⅱ) 각 당회에 (권장) 남녀 소학교를 흥왕케 하며, 교사는 월급보다는 월사금제로 하며, 형편에 따라 반일 수업, 또는 야간 수업을 할 수 있음.
▪노회 소집
매년 2회(1차 : 음력 1월 15일, 2차 : 양력 8월 둘째 주일 후 3일로 함)
○ 전라노회(제 2회)
때 : 1912. 8. 25. 전11:00~ 곳 : 임피 궁말 예배당
임원 선임
회장 마로덕 목사 부회장 이기풍 목사
합동 공의회(1900~1906)가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로, 앞으로 창립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과도(過渡)기구로 조직 확대 되었다. 이에 따라 공회의 산하 기구였던 각 소회는 (7개 지방) 대리회로 개편되었다.
전라 대리회-전북 대리회에 관한 정리된 기록은 유감스럽게도 없고, 그 일부분만이 어떤 전문가(호남교회 춘추사)의 소장(所藏)이 있어, 우리 교회 관련 부분만을 적어둔다.
○ 전북 대리회(제 2회 초록) (1908. 9. 25. 곳 : 최의덕 선교사 댁)
사회 : 최의덕 선교사 기도 : 김필수 목사
임원 선정
회장 : 이눌서 선교사, 서기 : 김필수 목사
※ 임시 서리 회장 : 최흥서 장로
참석 회원 : 어아력, 부위렴, 최의덕, 최흥서, 최치국, 김필수, 최중진.
이눌서 회장의 불참으로 임시 서리 회장으로 선출된 최흥서 장로 사회로 회무를 처리하다.
○ 전북대리회 제 2회(제 4차 회)
때 : 1909. 9. 4. 후4:00~. 곳 : 경의선 기차 내에서
임원 선정;
회장 ; 부위렴 서기 ; 최흥서
참석 회원 : 부위렴, 류서백, 이눌서, 최중진, 윤식명, 김필수, 최흥서, 이자익,
황운섭, 최치국.
결의사항
장로 피택 허락 : 궁말 1인, 만자산 1인.
신학 자원자 문답 : 신백선(만자산) 1년 조사로 공부할 것(불합격)
서기 이승두 부서기 김규배
회계 김필수 부회계 최국현
참석 회원 :
(목사) 부위렴, 김필수, 박요섭, 도대선, 최의덕, 이눌서, 마로덕, 고라복, 남대리, 류시백, 윤식명 이기풍 (13인)
(장로) 오인묵, 최흥서, 김규배, 최치국, 최학삼, 이성춘, 이승두, 최국현, 신경운, 서영선, 조덕삼, 김응규, 류대춘, 김성옥, 정영선, 심석식, 리영원, 김계홍, 김윤수 (32인)
공천위원 보고
정사위원 : 이기풍, 최흥서, 마로덕, 김필수, 규서백
헌의, 신학준시, 재정, 규칙, 학무위원 (략)
주요 결의사항
ㄱ. 당회보고 : 궁말(오인묵), 만자산(최흥서), 서문외(이승두), --- 기타 (략)
ㄴ. 정사위원 보고 : (략)
ㄷ. 신학생 문답 : 황재삼, 최응숙, 김응규, --- 합격
ㄹ. 직원 선택
ⅵ) 만경 송지동, 정읍 장로 1인, 만자산 집사 2인 허락.
ㅁ. 학습 문답 권(조사에게) 허락
조사 : 김인전, 황재삼, 김옥여, 최흥서 (부위렴 청원)
※ 전라노회 제 7회(정기노회)
때 : 1917. 8. 24. 후8시~ 장소 : 광주군 회천면 양림리 오목사 기념관
개회 : 노회장 김인전 목사 사회
찬송 : 50장, 성경봉독 : 엡 4 : 1~16, 기도 : 하위렴 목사
참석 회원 : 목사 24인, 장로 39인, 합 63인
임원 선거
회장 이원필 부회장 류리백
서기 홍종필 부서기 김창국
회계 남궁혁 부회계 김면수
주요 결의사항
ㄹ. 각 지방 시찰 보고
① 옥구 지경교회에서 영명 학교 교사 류내춘씨를 전도 목사로 청원하겠다는 것은 그 학교 교장과 교섭 후 처리케 하였음.
---------------------
⑤ 옥구 지경교회는 기도와 연보와 성경 공부 하는 것이 여전히 퇴보치 아니 하였으나 교우 중에 아름다운 교회로 간 사람이 있다 하오며, 장래 위임목사도 청원할 예정이라 함.-- (략)
---(전략)
신학 지망생 고윤팔(성모) (1년간 보류)
ㅅ. 남북 노회 분립 청원(결정)
※ 제 6회 총회(때: 1917. 9. 1. 후8:00, 곳: 인사동 승동예배당)
출석 총대 : 선교사 42인, 목사 76인, 장로 76인, 합 194인
임원 선정
회장 한석진 목사 부회장 홍순한 목사
서기 장덕로 목사 부서기 김성택 목사
회계 곽안련 목사 부회계 김석창 목사
정치부 보고 : (전라노회 분립 신청 건)
1. 명칭과 지계 : 전라북도 각 교회는 전북 노회 전라남도는 전남 노회라 하고 충청남도 각 교회는 전북노회에 속하고 제주교회는 전남노회에 속한다.
2. 조직 회장 : 전북은 이원필씨로, 전남은 류서백씨로 정할 일.
3. 위치 급 일자 : 각기 회집할 곳과 때는 그 회장의 지정대로 시행할 것
4. 노회 재산은 반분하고, 문부는 전북노회가 집지할 일.
※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 6회 총회—전라노회 분립 신청 기록.
◈ 만자산(지경)교회 관할 체계도
장로교 선교사공의회 (1893~1900) |
⇒ |
장로교 합동공의회 (1901~1906) |
⇒ |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獨)노회 (1907~1911) |
⇒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總)회 (1912~ ) |
↓ |
↓ |
↓ |
↓ | |||
평양공의회위원 (황해,평남북도 목사 관할) |
(전북)대리회 |
(전라)노회 (1~7회) (1911~1917) | ||||
↓ |
⇒ |
(전라)소회 |
⇒ |
(제1회 제4회) |
⇒ |
↓ |
경성공의회위원 (각도 목사 관할) |
(1907~1011) |
(전북)노회 (1917~ ) | ||||
↓ |
↓ |
↓ |
↓ | |||
(만자산)기도처 |
(만자산)교회 |
(만자산)교회 |
(지경) 교회 |
(2) 봉사하는 공동체-활동하는 교회 직원들(1)
① 만자산 교회를 이끌었던 선교사와 교회 직원들
조선 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조선인 목사(7인)이 배출되기 까지는 해당 지역의 선교사들이 그 교회의 당회장을 맡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당 회 장 |
교회 직원들 |
전위렴 선교사(1897~1904 1899년 안식년 휴가로 귀국한 1년은 때마침 입국한 부위렴 목사가 대행하였고 전목사는 1904년에 전주로 옮겨 서문밖교회를 맡았다. |
․최흥서 조사(집사) ․최매리 전도-매서인 ․정부인(김득수 부인) 성서 부인 |
당 회 장 |
교회 직원들 |
하위렴 선교사(1904~1907) |
․최흥서 장로 취임 |
부위렴 선교사(1907~1909) 불목사는 안식년 귀국으로 교체됨 |
․최흥서 장로 ․김옥여 조사 |
김필수 목사(1909~1911) |
․최흥서 장로 ․김옥여 조사(1912까지) |
부위렴 선교사(1912~1915) 1912년 가을에 다시 입국하여 당회장 직을 맡음 |
․최흥서 장로, 최응숙(1913) ․집사 최찬경, 고윤팔 |
매요한 선교사(1916~1917) |
․최흥서 장로, 최응숙 장로 ․안수집사 최찬경, 고윤팔 ․서리집사 임영호(1917) |
․부위렴 선교사(1918~1923) |
․장로 최흥서, 김옥여, 고성모 ․안수집사 최찬경 ․집사 : 임영호 |
도대선 선교사(1924) |
|
하위렴 선교사(1925) |
② 교회 내 일상 봉사하기
○ 예배당 이전 증축(1914. 2)
교회가 부흥하여 예배당이 비좁게 되어 헌 예배당을 매각하고(금 20원), 동만자에 초가 8간을 금 160원에 매수하여 예배당을 아담하게 꾸몄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마침 농사도 흉년 들어 어찌 될까 걱정들도 많았는데, 서로들 내 집 일처럼 봉사할 사람들 모여들었다. 이를 지켜본 선교사들도 시초엔 다소 걱정들 했는데 현장을 보고는 대만족하였다.
건축을 위하여 이웃 교회들이(남전, 송지동, 궁말, 개복동 교회) 건축 헌금을 거두어 지원해 왔고 선교부의 남은 건축 자재도 보내와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 교회 묘지 가꾸기(1905)
새 성전을 짓고 힘이 남아도는 듯 교회 묘지를 마련하기로 하여 백마산 산자락의 송태환 산 1필 금 6원, 강채오 산 1필 금 8원, 최찬경 산 1필 금 4원에 매입하여 교회 장지를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남전교회도 가세하여 함께 사용하기로 하였다.
교회 장지를 마련함으로 장례식에 따르는 미신적인 행사를 바로 잡아 기독교적인 행사로 이끌어 신앙생활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총독부의 장묘지법의 시행으로 크게 제약을 받았다.
○ 본당 부속 행낭채를 개수—소학교 개설(1908)
행낭채를 잘 손질하고 책상과 의자 등 20인분 정도 마련하여 교육 및 회의실로 사용하였다.
○ 친목 상조계를 조직 운영하며 서로의 신앙을 돈독케 하고, 상호 교류를 두텁게 하였다.(1910)
회원 : 정백현, 최흥서, 이양화, 강덕향, 김득수, 임영호, 김옥여, 최찬경, 강치선, 고화성, 양맹엽, 최응숙. (12인)
③ 예전(禮典)의 변화
장례식 풍조가 점차로 기독교식으로 변해갔다.
교회 설립 공로자의 한 분인 최관보 씨(최지헌 권사 조부)가 작고하여(1903) 그 장례식의 모습이 전위렴 선교사가 기고한 선교본부 기관지 The Missionary (1903)에 실려 있다.
이웃 교인들까지, 많은 조객들이 참여하여 엄숙한 예배까지는 잘 진행되었으나, 운구 이후는 옛 방식대로 혼란에 빠졌다. 상여꾼들의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라 옛 방식을 ‘따른 것이기 때문에 주례 목사인 전위렴 선교사도 이해를 하고 그대로 넘겼다.
두 번째 장례식인 정 부인(김득수 씨 부인) 장례식 때는 당회장인 하위렴 선교사를 비롯하여 선교부 직원들을 포함하여 이웃교회의 많은 조객들이 모여들어 엄숙한 교회 예식으로 처음부터 종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운구꾼들의 술, 담배도 금지되고 찬송가 일변도로 진행하는데 교인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세 번째 장례식인 1910년 상령최씨(최매리 - 이용재 씨 모친)의 장례식은 완전히 기독교식으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때마침 친목상조계도 조직된 터라 운구꾼도 모두가 교인이거나 교인이 보낸 사람들이었고 당회장 김필수 목사의 능숙한 예식 진행으로 은혜롭게 마쳤다. 무엇보다도 술, 담배 없는 장례식은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로 앞으로 교회의 중요한 예식의 표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④ 만자산 회당—야학당의 건조(1923)
지역사회 주민들과의 대화와 친교의 기회를 만들고 선교의 장(場)을 넓히기 위해 만자산 회당을 건조하도록 적극 지원하기로 하였다.
건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지 약 50평
•건물, 목조 양철지붕 20여 평(교실 형태)
•건축비는 교회와 마을이 2등분하여 공동 부담
•회관 용도 : 마을의 회합, 친교 모임, 교육(서당, 한글방), 교회의 보조활동 등
• 관리 책임 : 만자리 구장(최응숙)
※ 회당 모퉁이에는 최흥서 장로의 공적비와 최응숙 구장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음.(만자산 동민 일동 명목으로)
(3) 봉사하는 교회—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1) 일제의 침략-초지(草地)—수탈 계획의 강행
우리 지역(군산)의 비극적인 한일 관계사(韓日關係史)는 기독교 선교사(宣敎史)와 기이하게도 그 시기(時期)가 겹친다.
1899년 군산 항이 개항될 때, 이 곳에 들어와 있는 일본인들은 겨우 77명이었는데 1905년에는 불과 6년 사이에 2,956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재류(在留) 일본인 거류민단(居留民團)을 통해 조선인 수족들을 거느리고 인근 10리 거리 이내에 거미줄처럼 분산하여 먹이사슬인 조선인 소 농민들을 유혹하며 농토 매수에 전력했다.
그 유혹의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보기로 한다.
“일본 사람에 땅을 팔면 땅 값은 현찰로 제대로 받고 농사는 그대로 자기가 지어서 농지세 약간만 내고 다 자기가 차지하니 꿩 먹고 알 먹고다. 혹시 일본인이 그냥 자기 나라에 가버리면 ‘더군다나’고....
여기에 현혹되어 순진한 농민들은 흔들리고 그들의 간교한 수작은 효력을 발휘하였다.
때마침 전주-군산 국도가 경인가도(京仁街道) 다음으로 건설되고, 호남선 철도가 강경에서 이리에 온 후 군산으로, 군산선이 개통되니, 군산은 실속 없는 호항으로 온통 들떴다. 새로 단장된 신작로(新作路)에는 차량들이 오가고, 철로에는 검은 연기 내뿜는 기차가 힘차게 내달리고, .... 순진한 우리 백성들은 좋은 세상 오는 줄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이 생기고....
세상의 움직임을 일찍이 파악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가슴은 매어지는 듯,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더욱 애처럽고 간절하여졌다. 1908년에는 일본 정상배(政商輩)들이 일본 중앙 은행과 결탁하여 동양척식(拓植)회사, 후지(不二)흥업회사 등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황무지 개척사업 등, 대대적으로 국유지 강탈, 특혜 불하 등을 강행하였다.
그 파장(波長)으로, 우리 대야면 관내에만도 팔목(八木), 대원(大園), 웅본(態本), 대창(大倉), 도곡(島谷), 정상(井上), 갑비(甲斐) 농장 등이 생기고 이름 그대로 넓은 들의 대부분이 이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외의 사건들도 돌발했다. 선금(先金)은 받아 써버리고 소유권은 안 넘긴다는 분쟁이 마을 안에서 일어났는데 최흥서 장로가 이를 중재하여 일본인 패들을 돌려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수일 후에 최장로에게 검찰의 “공무집행방해”의 혐의로 출두하라는 호출장이 나온 것이다. 최장로는 믿는 곳 한 곳이 있었다. 바로 일본인도 함부로 못하는 미국 선교사의 협력을 얻으면 되리라 하고 하위렴 선교사에게 사유를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검찰에 나가 체면을 구기고 2일간 구류 후 훈계 방면된 것이다.
선교사의 말인즉, 자기들은 선교만 하지 그런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도 훗날 자기의 선교부 보고에서 밝혀진 이야기다. 그러나 최흥서는 아무 탈 없이 이탈하지 않고 잘 믿었다고 칭찬한 것이다.
지경교회 지도부는 최장로를 중심으로 더 열심히 더 친밀하게 마을 사람들 실정을 살피면서 심방, 전도, 대화를 강화하였다.
긴 숙의 끝에, 교회는 마을 마을을 심방하면서 다음 사항들을 강조하여 신·불신 간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 이럴 때일수록;-
① 내 가족을 사랑하자—근검·절약으로 자녀 교육에 힘쓰자.
② 내 이웃을 사랑하자—상호 부조로 서로를 아끼자!
③ 내 겨레를 사랑하자—협동 단결하여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자.
위와 같은 구호로 마을과 교회는 한 공동체를 이루고 모내기, 추수기의 공동작업, 품앗이, 날 연보등, 시대적 역경을 뚫는 좋은 방법을 찾았다.
(2) 나라를 위한 기도—몸을 던지는 귀한 믿음
① 을사보호조약(1905)의 궂은 소식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해졌다. 일제의 강요로 조정은 뒤로 밀리고 통감부가 생겨서 나라는 이제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 때에 누구의 강조도 아니라, 자연스럽게, 평소보다도 열심히 기도하자는 뜻으로, 매주일 새벽과 저녁 예배를 애국 기도회로 하기로 결정하고, 이 기도회는 오래 오래 일상화 되었다.
② 경술 국치—구국 기도회(1910)
나라 잃은 서러움은 눈물의 기도 없이 견딜 수 없고 교회는 마음과 정성을 모아 구국 기도회를 철야로 열었을 뿐만 아니라, 예배 설교, 주일 학교(장년), 소아회, 기타 모든 집회의 구심점이 애국·애족 정신 함양에 집중되었다.
(3)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김준실 선생
기미 3·1운동 만세 사건, 이는 분명히 온 나라를 진동시킨 역사적인 대 사건으로, 이 나라를 잃은 온 백성들의 절규였다.
이 고장 군산에서는 영명학교 교사, 직원, 학생이 주도한 귀한, 자랑스런 운동이었는데, 익산 지방에 배치된 관헌들까지 지원 출동하여 겨우 진화한 사건이었는데 우리 교회는 이중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민족의 정기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졌다.
기전 여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축소되자 그는 충남 천안의 광산촌 양대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기전고녀 직접 제자인 임영신 여사도 따라와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서울에서 함태영 선생의 방문을 받고 임영신은 전주로 내려가 전주지역 궐기의 중심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었고 이순길은 학교 일을 정리하고 귀향하면서, 마침 황등에 들려, 황등교회에서 2월 26일 삼일 예배 시에 설교와 독립선언에 대한 시국 강연을 겸한 시간을 갖고 다음날 지경에 돌아왔다.
마침 강홍선과 만나 의논 끝에 다음 날 금요일(3·1운동 전야)에 교인들을 모아놓고 두 사람은 독립선언의 정신을 열변을 토하여 보고했고, 간절한 기도로 모임을 마쳤다. 이 일이 일경에 알려져, 피신 중에 체포되어 두 사람과 함께 협력한 임영호 장로까지 1주일씩 구금되었다가 귀가조치 되었다.
3·1운동의 본거지 군산 영명학교 데모에는 김옥여 장로의 아들 김준실이 참여하여, 만세 행진하다 체포되어, 대구 고등법원에서 6개월 실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궁말 예수병원 직원으로 장차 의사가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근무하던 중, 동료 교사들의 연락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에 관하여는 대구 고등법원의 판결문을 요약 게재하여 그 당시 사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하겠다.
대구 복심법원 판결문
<판결> 피고.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명 구암리 병원 사무원 김준실(21세)
상기자에 대한 보안법 및 출판물법 위반 사건에 대해 1919년 3월 31일-군산지청에서 피고로 부터 공소 신립이 있고, -검사로 부터 부태 공소 신청이 있었으므로 당원은 조선 총독부 검사 무라까미(村上淸) 관여로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主文)> 피고 김준실(金俊實)에게 징역 6월을 언도한다.
<이유> 피고 김준실은 국기를 흔들어 독립 만세를 외치고 ..... 안녕 질서를 방해하였다.
1919년 4월 30일 대구 복심법원 형사 제1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竹美義磨
비고 : 동년 6월 12일 상고 기각하다. 1919년 형공제 238회, 제 272호. |
※ 군산(영명학교) 3·1운동 관련 공판의 판결문은 관련자 전원 36명 연명으로 되었으므로 본교회 김준실(金俊實) 이외의 판결사항(判決事項)은 생략(省略)하였음.
(4) 가르치고 인재를 기르는 교회
① 기초교육을 다지는 공동체(1897~ )
○ 이미 논급한 대로 지경교회의 원초적인 교육은 만자산 기도처 시절의 언문 가르치기(호별 심방)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학습 진도에 따른 선별 집단 교육으로 진전되었다.
그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궁말 선교부의 신앙 교육까지 받게 하여 새로운 교사로 성장시켰다. 그들이 훗날 소아회의 보조 교사, 교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별히 상녕 최씨로 통용되었던 최매리씨, 하동 정씨로 불린 김득수 부인, 강덕형 부인 유은덕씨가 지도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 위의 3인방은 서로 호흡이 잘 맞아, 특히 부녀자들의 언문(한글) 교육 못지않게 초보적인 신앙 교육에도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새벽 또는 아침 기도 하는 것과 부엌일을 시작하면서 식구들 일일이 떠올리면서 성미를 마련하여 이를 한데 모아 교회에 바치는 일 등을 습관화 하게 하였다.
○ 주일학교(장년부)—만자산 교회 출범과 때를 같이 하여 선교부의 교육도 받고 많은 보조 교재도 입수한 정백현 영수가 전담하였으며 매 주일 예배 전 3~40분씩 통반(通班) 공부를 하는데 정백현 영수의 구수한 강좌는 많은 사람들의 성경 학습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임영호, 김옥여 장로가 교대로 맡기도 하였다.
(2) 배영(培英)소학교 설립(1908)
배영소학교는 2~3년제로 입학자격 제한 없이 입학 허가하였다. 이 학교는 한일 합병으로 국가가 소멸하기 전에 대한정부 학부대신(學部大臣) 허가로 개교하였다.
교장으로는 고성모 목사(당시는 서리집사)가 맡았다. 이 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는 이요한, 최성현, 김준실, 양해성, 고란섭, 신영기, 이창순, 김창만 등이었다.
○ 배영 소학교의 상급 학교는 구암의 안락(安樂)소학교와 영명 중학교(永明中·高)인데 그 당시 본 교회의 중학생은 정공선, 이용재, 최주현, 임현재, 강홍선 그리고 이순길(멜본딘여중) 등이었다.
위 학생의 대부분이 교회 직원들의 자제였던 것은 교육열이 높았던 것인지 특별한 축복이었던지 분별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그들의 진로(進路)를 참고로 살펴보면 그 당시 우리 나라 수준으로 보면 서울 강남 출신 정도가 되는 것 같다.
※
정공선(鄭公善) : 정백현 영수 2남, 영명학교 마친 후 독학으로 의사 시험
합격
최주현(崔周鉉) : 최흥서 장로 장남, 세브란스 졸업→의사
이용재(李龍載) : 이양화·최매리 부부의 장남, 군산 예수병원 3년 수료→의사
임현재(任賢宰) : 임영호 장로 장남, 세브란스 졸→의사
강홍선(姜弘善) : 강복형씨 4남, 배재 고보 졸업→독학, 약제사
이순길(李順吉) : 이양화·최매리 부부의 장녀, 정신고녀(고등부),
기전여고 교사
위의 다음 계층으로는
고성모(高聖模) : 고화성 장남-영명 중학교→평양 신학교-목사
최성현(崔成鉉) : 최흥서 장로 2남, 영명 학교→연희 전문학교 문과
이우석(李禹錫) : 이봉일 장로 부친, 영명 학교→숭실 전문→평양 신학교 졸 (목사)
이요순(李要順) : 이용재의 제, 경신 고보, 고창 고보→세브란스 전문-의사
임정재(任正宰) : 임영호 장로 2남, 배재고→세브란스전문-의사
최영태(崔永泰) : 최주현 장남, 배재고→세브란스 전문-의사, 의학박사, 세브란스 의대 교수
최대진(崔大振) : 최찬경 장로 조카, 영명중, 군산 예수병원 2년, (한지) 의사
김준실(金俊實) : 김옥여 장로 장남, 영명중→군산 예수병원 3년(3·1 운동 참여, 6개월 실형), 의사 시험 합격-의사
(3) 지경교회 야학당 설립
조선 총독부 발 보통 학교 령에 의하여 대야 공립 보통학교가 생기고 교회의 배영소학교가 폐교된 후 교회에서는 야학당을 설립하였다. 학생의 연령 제한을 없애고 학력 수준은 중학 정도로 하였다. 담당 교사로는 강홍선(姜弘善), 문경현(文景鉉), 서선동(徐善同) 등이 맡았다.
야학당 수료생으로 대표적인 학생은 송경윤(宋京允), 최성경(崔聖卿), 유판동(劉判東), 강순실(姜順實), 신일선(申一仙), 채규일(蔡奎一), 신덕칠(申德七). 김우봉(金禹奉), 이원석(李源錫) 등이다. 이들은 전도와 계몽을 위하여 시국 강연, 소인극(아마츄어 촌극) 등으로 지역을 순회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성탄절 행사 등에는 주연급으로 등장했다.
영명 학교 출신들이 대부분 졸업 후 외지로 진출하여 모 교회를 떠나서 활동한 반면, 야학당 출신들의 대다수는 타 지역 진출을 하지 않고 본 교회 근처에서 잔류하며 직접 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공립 학교나 영명 학교에 갈 기회를 못 얻었을 뿐 교회 안에서의 교육, 성경 학교, 사경회의 교육을 통해 훗날 좋은 장로, 권사 등이 되었다.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신덕칠 → 집사, 안수집사, 장로. (주일학교 반사)
∙채규일 → 집사, 안수집사, 장로(발산교회), 성가대
∙유판동 → 집사, 안수집사.
∙김우봉 → 집사, 안수집사.
∙강순실 → 집사, 안수집사, 장로. (주일학교, 성가대)
∙신일선 → 집사. (평교인으로 평생 봉사)
∙최성경, 송경윤 → 신병으로 활동 못함.
∙최양선, 최양옥 → 집사, 장로
∙이원석 → 집사, 안수집사, 장로(청년회장)
(4) 선교부 사경회, 성경학교 교육 참여
∙선교부 남 사경회, 여 사경회
선교부가 실시하는 사경회는 대략 12~1월 사이나 3월경 약 2주일 동안 실시한다. 여기에는 세례를 받기 전에 참여하는 이들이 많다. 사경회 기간의 숙식비는 자비부담이다.
군산 선교부의 성경 학교나 사경회 강사는 선교부의 선교사와 타지역(전주, 목포, 광주) 등지의 선교사 그리고 유능한 조사들이 협력하여 담당한다.
만자산 기도처 이래로 최흥서, 정백현으로 부터 지경교회 직원이 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선교부 사경회나 성경 학교를 한 두 번씩 다 다녔다.
선교부 사경회나 성경학교는 교회 직원 양성에 절대로 필요한 교육 기관이었다. 선교부는 이 교육기관을 통해서 인재를 선별하여 조사나 전도인으로 맡기고 또 고등 성경 학교를 통해 신학교에 추천도 한 것이다.
∙하동 정부인(김득수 부인)은 심방으로, (한글) 교육으로 그리고 성경 공부 기초반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서두에서 서술했거니와 그녀에 대한 중요한 자랑스럽고 안타까운 사정이 선교부 문서에서 발견되었기로 여기에 번역하여 게재하기로 한다.
“우리는 충실한 조사들의 봉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김옥여, 양응칠, 이성춘, 김윤천 그리고 성경부인 정씨가 그들이다. 정 부인은 천국으로 부르심을 받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빠져있었다. ‘너와 네 자녀들에게...’ 라는 성경의 약속은 그녀가 남기고 간 2(두) 주일 된 신생아를 돌봐 줄 유모가 나타남으로 성취되었다. 그녀는 매우 충성스런 훌륭한 일꾼이었고 순회 전도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 부인의 자리를 채울만한 준비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 선교부 보고 1907. p. 22~23
※ 정부인에 관해서 여러 자료를 살펴보던 중, 그 집안 족보에서 힌트를 얻어, 선교부 보고에서 위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종학(鍾學) 자(字)득수(得水) 고종(高宗) 기사(己巳) 8月 8日 生 배(配) 하동(河東) 정씨(鄭氏) 경진(庚辰) 4月 22日 생, 을사(乙巳) 9月 6日 졸(卒). 부(父) 한묵(漢黙) |
Ⅱ. 특 집
1. 교회사 특집
◈ 전위렴 선교사 개인 보고서 (1903)
◈ 부위렴 선교사 개인 보고서 (1903)
◈ 해리슨 선교사 개인 보고서(Personal Peport of Harrison) (1905)
◈ Korea Mission Field (1906 가을)
◈ Station Report of Kunsan (1907)
◈ THE MISSIONARY (선교회 기관지) (1903년 10월호)
◈ 한국 교회의 역사
2. 교회 창립 50주년을 앞둔 좌담회—‘교회 초창기의 이모저모를 말한다’
3. 역대 당회장 및 직분자
1. 교회사 특집
만자산 교회사 탐구에 적절한 사료(史料)로, 선교부 기관지, 선교 보고서 등에서 발췌하여 우리 청년들에게 읽고 번역케 한 것의 일부이다. 이를 읽는 이들에게 큰 감명을 줄 것으로 알고 특집으로 게재한다. (집필자 백)
◈ 전위렴 선교사 개인 보고서(1903, P.15)
우리 선교부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자산교회는 아주 순조로운 형편이다. 최씨(역자 주; 최흥서)는 아무런 직책도 없지만, 한 유능한 집사와 한 좋은 장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정도로 그가 맡은 일에 충실하다. 그는 문답 준비 등을 가르치며, 대부분의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이 교회는 도합 228냥의 헌금을 거두었으며 100냥의 빚(예배당 가옥 구매 부채)을 갚아버렸다. 열두 사람이 입교하려고 했으나 그들 중 4명이 허락되었다. 나머지 8명은 올 가을에 문답 받게 될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한 배교자(背敎者)가 회개하고 이 교회의 일원이 된 일이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나 당회에 나왔지만, 그가 죽기 몇 주 전에야 받아들여졌다. 그때가 바로 그가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생략) (번역 - 김상헌, 한동대 언론정보학과) |
(원문) Personal Report R.1903. P.15
The Manchsan church, which is the nearest to the home station, is in good condition. Mr. Choi is faithful in his offices, without title but amounting to a good deacon and elder combined. 'He teaches the catechumens and conducts most of the services. This church has paid off a debt of a hundred yang, and has contributed altogether 228 yang to church purposes. Twelve people have sought admission to the church, of whom four have been admitted. Eight are studying in the class with some others who will be examined this fall. One backslider reclaimed, one member the joined the church above. He had been before the session a number of times but was received only a few weeks before his death. Few expected that it was his last chance to confess Christ. |
◈ 부위렴 선교사 개인 보고서
나는 마로덕(McCuchen) 형제와 우리 전도인(한국인)과 함께 강을 건너, 사역이 막 시작된 충청도 서천으로 여행을 하였다. 우리는 예고도 없이 집회에 참석하여 약 40명의 회중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일은 그곳에 살려고 간 만자산 교회의 한 교인의 노고(勞苦)의 결과로 이룩된 것이다. 그가 그곳에 왔을 때는 그 주변에는 한 사람의 교인도 없었다. 우리가 거기서 시험해 본 사람들이 훌륭하게 응답하는 것을 보면, 그는 적어도 가르치는 일에 충실했던 것 같다. 이 형제는 그 자신이 하나의 훌륭한 학생으로서 충실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충청도)로 이사할 때 그는 내게 와서 자기는 그곳으로 이사할 것이며, 강을 건너 20리나 내륙으로 들어가게 되면 교회의 모든 유익(有益)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
그가 궁말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 신문이나 월보(月報 : 월간 구약 교재)를 꼭 받을 수 없을 것이므로, 그것을 주문해 달라고 내게 부탁하였다. (번역 - 김상헌, 한동대 언론정보학과) |
(원문) Personal Report of W.F. Bull(Station R. 1903. P.10)
I have made one trip in company with Brother MeCutchen and our Korean evangelist across the river into Chung Chung Do to Se Chun Magistracy where a work is opening up. We went in unexpectedly on the congregation and found about forty assembled for service. This work is the result of the labors of one of the members from Man Cha San church who moved over there to live. When he went there was not a single Christian any where near him . He has at least been faithful in teaching, as those whom we have examined from there have stood remarkably good examinations. This brother referred to is himself a good student and is teaching faithfully. When he first moved to that province he came to me and said that he was going there and that he would be removed largely from all church advantages being across the river and twenty li inland. It would be difficult for him to attend services regularly at Kung Mal so even though the times were hard he must have the Christian News and the Wul Po(monthly lessons in the O.T.) and asked me to order them for him. (번역 - 김상헌, 한동대 언론 정보학과) |
◈ Personal Report of Harrison. 1905 (p.9)
약간의 훈련만으로도 몇 사람은 세례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만자산 교회는 지난 가을, 단 한 사람도 문답 준비를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다소 실망스런 일이었다. 주일 학교(장년)가 부흥되어진 이후로 교인들은 더욱 공부하고 다 활기차게 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라면 억세게 반대해 오던 커다란 두 집안의 가장들이 교회의 정규적인 참석자가 되었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다음번 문답에서는 아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허락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가 설립된 이래로 열아홉 가정이 이 교회로부터 이사하여 현재는 다른 처소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된 최씨(흥서)는 모든 면에서 장로의 직분에 적합한 사람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가 지정된 이수 과정을 마친 뒤 그를 선출한 그 직분에 장립(將立)하기를 고대한다. (번역) 김백합화, Dugnischool, Dentistry |
(원문) Personal Report of Harrison. 1905 (p.9)
It was somewhat of a disappointment at Manjasan last fall to find none ready for baptism, the several with a little instruction might have been baptized. After that the Sunday school was revived, the Christians began to study more and to be more active. The heads of two large families who used to be bitterly opposed to Christianity have become regular attendants, besides a number of others. Quite a number will probably be received at the next examination. It is said that nineteen families have moved from this church since its establishment and are now connected with other groups. Mr. Choi, the elder-elect there, seems in every way worthy of the office. When he has completed the course of study laid down we hope to clothe him with the office to which he has been elected. |
◈ Korea Mission Field. 1906. 가을 한 한국인 장로 최씨(흥서)
최씨가 군산 교회에 약 10년 전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도움을 받고 싶은 재판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선교부로부터 그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음을 그는 곧 깨닫고도 집회에 참여하는 일을 계속하며 부수적(비본질적)인 사건의 판단이 바뀌어 복음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었다. 그의 큰 노력으로 그의 많은 이웃들이 교인이 되었으며 그의 마을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는 적시(適時)에 그들의 초대 장로로 뽑혔다. 최씨는 독립된 중산층 농민이며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조용하고 사양기 있는 사람이지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의 영향력을 행사할 줄 아는 힘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교회 내의 성경반 지도나 딴 교회의 문답의 시험 감독이나 교회의 전도 여행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했을 때에도 그는 어떠한 보상을 기대하거나 받는 일이 없었다. 교회의 이해 관계는 그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그의 교회의 진전에는 기뻐하고 실책에는 눈물 짖는다. 장로회 공의회에서 규정한 소요리 문답과 교회 정치에 관한 시험에서 그는 가장 만족스러운 지식의 완전성을 보여주었다. 믿음, 지혜, 열정에서 내가 다른 어느 곳에서 알고 있는 누구보다도 그의 영역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장로로서 내 가까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가 우리에게 실망스럽게 한 일이 없으며 오히려 늘 기쁘게 해준 그에 대한 모든 회상을 감사할 따름이다. 최근의 그의 취임은 특별한 기쁨이었다. 그것은 그가 군산 선교부 관내에서 첫 번째 장로일 뿐만 아니라 그 직책이 완료되기까지 부동(不動)의 대들보를 세웠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번역) 김백합화, Dugnischool, Dentistry |
(원문) THE Korea Mission Field. 1906.
Mr. Choi, a Korean Elder. BY REV. W. B. HARRISON
When Mr. Choi began to attend the church in Kunsan about ten years ago, he had on hand a law suit in which he hoped to get help. Though he soon found that such help was not to be had from the missionary, he continued to attend the meetings, became interested in the Gospel, and judging from subsequent events, was converted. Through his efforts largely a mumber of his neighbors became Chirstians, and a church was established in his village. In course of time he was elected their first elder. Mr. Choi is an independent farmer of the middle class and is respected by all who know him. He is quiet and retiring, but a man of force and courage, who knows how to make his influence felt when the occasion arises. In the oversight of the home group, in assisting in Bible classes and examinations in other groups, and in evangelistic trips he gives much time and labor to the church, for which he neither expects nor receives any remuneration. The interests of the church are dear to him. He rejoices in its progress and weeps over its failures. In the examination recently upon the Shorter Catechism and Church Government, as prescribed by the Presbyterian Council, he showed a thoroughness of knowledge that was most gratifying. In faith, wisdom, and zeal he comes as near being an ideal elder in his sphere as any I have known any where. Truly we give thanks upon every remembrance of him, for he has never given us occasion to regret, but rather always to be glad. |
His ordination recentlly was a peculiar pleasure, not only because he was the first elder in the Kunsan field, but because we felt sure that we were setting up a pillar that shall not be moved till its work is done. |
◈ Station Report of Kunsan. 1907 (p19)
가을에 이곳에 서점(書店)이 개설되었다. 이것은 지역사업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화를 위한 모든 분야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만자산 교회의 최장로가 그 책임을 맡았다. 이 서점은 2년 전에 하위렴씨(Harrison)가 구입한 것이다. 서울의 성서 공회와 기독교서회는 25% 할인 판매를 허락하였다. 그 이익금은 조사(助事)의 봉급과 몇 개월간의 비용을 지출하는데 충분하였다. 이 집단은 최장로의 감독과 교육 아래 성장하였다. 1월에 문답이 있었는데 18명의 학습이 허락되었다. 아침 예배 출석율은 퍽 좋다. 군산 선교부의 도움으로 이 교회는 부지를 구입하여 16×24피트의 건물을 지었다. 모든 비용이 전부 지불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빚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번역 - 김모세, 위스콘신대(메디슨) |
(원문) Station Report of Kunsan. 1907 (p.19)
A book room was opened here in the fall, which is not only a help to the local work but is an evangelizing agency for th whole field. Elder Choi of the Manchasan church has had charge of it. The book house was bought two years ago by Mr. Harrison, but the station has recently purchased it from him for the |
mission at a cost of Yen 162.00. The bible Society and Tract Society in Seoul allow a discout of 25% on sales and this profit has been sufficient to pay the helper's salary and current expenses for several months. This group has grown under the supervision and instruction of Mr. Choi. Examinations were held in January and 18 were received as catechumens. There are several who are baptized members, having been baptized by the Methodists. The attendance at the morning service is good, and while some have dropped off others have taken their places. This church with the help of our station has purchased a site and put up a building 16×24 feet, and while all of it is not yet paid they are making great efforts to rid themselves of the debt. |
◈ THE MISSIONARY (선교회 기관지) 1903년 10월호
최 관 보 JunKin 목사
어제 오후, 세상을 떠난 한 형제를 애도하는 마지막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의 형제들이 교회 다섯 곳에서 많이들 와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실로 형제의 이름이 천국 저 높은 곳에 기록되었음을 믿습니다. 지난 10월에 그 형제와 아내가 박해받았던 이야기를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제 형제는 아내 곁에 나란히 안치되었습니다. 이제 저 천국 보좌에서 나란히 앉아있겠지요. 의식은 슬픔 속에서 치러졌지만 깨끗이 차려 입은 밝은 얼굴의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교인들의 표정 속에서 복음의 변화를 분명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고인의 동생에게 “마음의 표시”라며 돈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런 일로 힘들어 하는 형제를 돕는 한국의 의미 있는 풍습이지요. |
여기 옛 것과 새 것이 한데 만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상여를 운반하던 토역꾼들이 귀중한 사람의 시신을 무덤으로 곧장 운반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며 상여를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이교도의 낡은 풍습을 좇으려 하더군요. 결국 저희가 질책하여 만류하였습니다만. 조금 있으려니 또 최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한 노인이 “흙(땅)”이 좋지 못하니 형제의 시신을 그 아내가 묻힌 곳으로부터 언덕 넘어 떨어진 곳에 묻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엔 새끼줄이 문제였습니다. 태워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또 어디서 태워야 하나? 그 노인이 그렇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결국 그 노인을 불러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의 무덤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훗날 형제는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고 다른 무덤이 결코 필요 없을 것입니다.” 노인도 제 말에, 그럴 것이라며 수긍하였습니다.
마치 집에서 치르는 장례식처럼, 형제의 장례식은 수많은 이교도 노인들에게 진실을 선포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교도 노인들은 누군가 죽었을 때 외에도 결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이들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의 말씀처럼, '영광의 승리‘가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성령은 필요할 때마다 언제 어디서나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최 형제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형제는 지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형제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말입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이제 곧 떠납니다. 나는 전혀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나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모두 천국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천국이 되겠지요. 꼭 다시 만납시다. 안녕히.” 형제는 내가 아는 가장 유쾌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일부 믿음이 약한 자들이 교회 헌금을 오용하려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형제와 친교를 나누었던 7년간, 단 한 번도 나는 그가 참을성 없이 구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몸이 아픈 날도 있었지만, 언제나 쾌활하고, 소망이 넘치는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던 형제였습니다. 진정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떠난 것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요나단이여, 당신은 늘 내게 좋은 벗이었습니다.” (참고, 삼하1장 26절) 한국, 군산에서 (번역- 김모세, 위스콘신대(메디슨) |
(원문) THE MISSIONARY Choi Quan Bo REV. W. M. JUNKIN
Yesterday afternoon the Korean brethren from our five churches came in large numbers to perform the last sad rites to the body of the brother whose name is written above-and on high, too, we verily believe. In the October number of The Missionary some little account is given of the persecution of this young brother and his wife. Yesterday he was placed beside her, and doubtless sat beside her in one of the heavenly mansions. While a sad duty was being performed it was a goodly sight to see so many clearly dressed, bright faced men on whose countenance the gospel change was cleanly written. Many brought money which they gave to the younger brother of the deceased as a "love sign" they said. Not a bad custom thus to help the poor brethren in time of unusual expense. Here the old and the new met. The coolies who carried the bier had to be reprimanded again and again because they wished to follow the heathen custom of running all over the fields with the body in pretense that sorrow forbids carrying such a good man straight to the grave. Then one old heathen who has but resently began attending services insisted that the "huk" (earth) was not the right kind and wanted to bury the husband away over the hill from his wife. Then, the straw rope gave him trouble. It must be burned but where? This gave him much concern. I called him at last and told him "As to Christian grave good and bad thing one besides is not"-one day he'll come out of it and never have need of another. He replied that he'd nothing more to say if that was so. |
Like funerals at home, it gave an opportunity to speak the truth to many an old heathen who never darkens the church door except when someone dies. I longed to see what impression that glorious peon of victory (Cor. 15) made upon them. Fortunately the Holy Spirit works when and where it pleases. The day before brother Choi died he spent telling his friends good-by. It was one message to all: "Brother, I am about to go, I have no anxiety at all. I've nothing in this world to keep me, all my hopes are in the next. When we meet again it will be in the kingdom of heaven. Be sure to meet me. Good-by." He was one of the most pleasant men I have never known. In the seven years of our friendship I have never seen him even approach impatience but once, and that was because some weak members wished to misuse the church collections. Often sick but always cheerful, hopeful, happy. Truly we can say of him, "I am distressed for thee, my brother Jonathan very pleasant hast thou been unto me." Kunsan Horea |
◈ 한국 교회의 역사 W. M. Junkin 목사
군산은 우리 전주 선교부에서 35마일 떨어져 있는 항구이다. 전주천이 두 지역 사이로 흐르고 이 강은 전군간의 거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전주 쪽으로 길게 뻗은 희고 붉은 언덕을 제외하고는, 이 지역은 벼농사를 하는 광활한 벌판으로 아마도 한국에서 제일 비옥한 벼농사 지역일 것이다. 1896년 우리 군산 선교부가 설치되었을 때, 많은 농부들을 이 벌판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 동쪽에 교회 하나, 우리 쪽 강에 두 곳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두 군데 있다. 그 중 한 교회는 건물은 없었지만 그 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수의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본부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는 30리 떨어져 있는 만자산 교회이다. 이 글은 만자 |
산 교회의 역사에 관한 몇 가지 기록으로 관심을 가지고 봐주기 바란다.
이 지역에서 온 처음 만난 사람 중 한 명은 술 장사꾼이었다. 많은 분들이 이 사람이 어떻게 술 장사를 치우고 매 주일 30리 길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 군산 교회까지 왔는지 잘 알 것이다. 최근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아들은 책벌을 받아야 했다. 한국 풍습상 이는 온 집안의 망신이었다. 그 아버지는 예배 중에 매우 안절부절하며 일어나, 아들의 범죄로 아버지 또한 이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건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안심했다. 그의 아들이 부끄러워 안으로 숨으려고만 할 때,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되돌려 놓을 때까지 쉬지 않았다.
지난 주, 막 캐어 낸 두 말이 안 되는 감자 수확을 위해 이 가족이 다시 모인 것을 보고 참 안쓰러웠다. 한국인들은 벼가 추수되는 10월까지 가까스로 보리만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우리 감자를 캐고 있을 때, 어제도 조 씨는 식구들을 위해 감자를 캐러 언덕을 넘어 와야만 했다. 한국 남녀들이 와서 작은 새알만한 감자를 땅에서 캐내었는데, 참 안쓰러워 보였다.
처음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도 최 씨는 가장 부유할 뿐 아니라, 가장 존경할 만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다. 처음부터 그는 지도자로 여겨졌고, 그의 집은 최근까지도 정기적인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는 예배를 이끌었고, 아이들과 궁금해 하는 자들을 가르쳤으며, 그 겸손한 종은 적지 않은 좋은 많은 음식들을 많은 교인들과 낯선 이들에게 대접했다.
최근에 최 씨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대부분의 사건은 우리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일어났다. 아침과 저녁 가정 예배를 통해 사람들은 신앙심을 갖게 된다. 이웃의 한 어린 소녀도 관심을 갖더니 결국 우리에게는 하늘의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
그 아이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였고, 말씀을 들어 충만한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가 그 사실을 이야기 하였다. 그녀의 첫 마디는 “아빠, 엄마! 우리 집은 벌 받아요! 우리 모두 하늘의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어요.” 아이의 부모는 화를 내었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프기 시작했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며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기도해 주길 요청했다. 마지막에 아이가 곧 죽을 것 같아 부모는 최흥서씨와 최관보씨를 불렀고, 이들은 하나님께 아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이는 부모의 마음이 이제는 바뀔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부모의 마음은 완강했다. 결국 얼마 후 아이는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부모님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족이 벌 받았다고 다시 주장했다.
아이는 자신이 죽을 것이고 부모님들이 많이 고생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형제들은 기도했지만 결국 그 아이는 죽고 말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쓰러졌고, 곧 온 가족은 이집 저집 다니며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만자산 기슭 사람들은 이제는 마음의 변화를 고백하는 그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여윈 청년 최관보는 유복한 삼촌에게 양자로 입양되었었다. 4년전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양부는 그를 구타하고 그를 집 밖으로 내 쫓았다. 그 후에 그의 아내는 자기도 신자가 되었으니 역시 남편을 따라갔어야 했는데 하고 고백했다. 그녀 역시 두들겨 맞아 척추에 곤봉으로 맞은 타격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그들은 잠자고 음식을 할 수 있는 방 하나가 딸린 작은 오두막을 구했다. 이것은 낡은 집의 내부 모습이다. 최흥서는 그들이 이 집을 구할 때까지 그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이런 박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최근까지 나에게 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어린 아내는 몇 달간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녀가 가진 질병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으며 구타가 질병을 악화시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여러 차례 나는 그녀를 방문했다. 나는 그녀에게 위로를 하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편안케 해주려 노력했다. 지난 주 우리는 그녀를 땅에 묻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내가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 처분만 기다려요.”, “아버지의 뜻을 기다립니다.” 라고 했으며, 또 “내가 당신께 빨리 갈 수만 있다면.” 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녀가 죽기 바로 직전 그녀를 때리고 그들을 쫓아냈던 남자가 그들을 보러 왔다. 그는 그녀의 죽음이 그의 탓으로 돌려질까 두려워했다. 그녀는 그에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나는 당신을 이미 용서했다고 말했고, 그녀의 남편은 그 늙은이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했다. 이 마을에는 죽은 이를 큰 길로 운반하면 안 된다는 관습이 있어서, 우리는 이를 불필요하게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많은 위로로 찬송을 부르며 시신을 논길을 통해 운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젊은 여인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하얀 김을 내뿜고 있었고,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 그는 장례지로 가는 것이 아닌 그 늙은이에게 복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에게 딸의 요청을 알려주었고, 그 늙은이를 괴롭히지 말기를 부탁했다.
봄에 만자산은 흉년인데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교회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다른 두 교회에서 헌금 기부로 그들을 도와 주었고, 우리 역시 그들에게 낡은 건축 자재를 주어, 그들은 건축 현장으로 이를 옮겼다. 그들은 최근에 큰 기쁨 속에 헌당 예배를 드렸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제일 멋진 교회였고, 그들에 의해 온전히 계획되고 감독되었으며 건설된 교회였다.
최씨 부인의 장례식 날 우리가 교회에 앉아 있을 때, 두 어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지도자와 다른 형제가 그들을 안으로 불러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것은 내가 그들 중 한 명에게서 들은 말이다. “당신의 생명은 위험한 바다 위에 있습니다. 누가 그 바다를 만들었습니까? 누가 그 바람을 통제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첫 번째 사도들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수 천리를 온 그리스도의 사도가 당신에게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권유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
그것은 돈이 아닙니다. 바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마음 깊은 곳의 평화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입니다.” 그들은 외딴 섬에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책 한 권을 샀고, “삶의 길”이라는 소책자를 받았다.
나는 이 교회에 새로 온 사람들이 진심으로 환영 받고 설교를 들은 채 떠나는 것을 보아왔다. 지난 주일에는 몇 달간 오지 않았던 예전 신도 한 명이 돌아왔다. 그는 신도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을 보내주셔서 나는 이를 믿고 주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라고 선언했다.
다른 주일에는 마을의 한 남자가 교회 밖에 보였다. 그가 보이자마자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 그를 환영했는데 이에 부담을 느낀 그는 전도지를 두고 그냥 갔다. 한 형제가 이를 알아채고 말했다. “저 사람 좀 봐! 영생에 대한 전도지를 주니까 떨어뜨리고 도망가잖아!” 한국, 군산에서 번역, 김모세(위스콘신대, 메디슨)
(원문) KOREAN CHURCH History REV. W. M. JUNKIN
Kunsan thirty-five miles distant is the port of our Chun Ju station. The Chun Ju River separates them. The river is near the half-way stage. With the exception of a long stretch of white and red hills on the Chun Ju side the country is a vast rice plain probably the finest in Korea. When our Kunsan station was established in 1896 we reached a number of farmers in this plain. We now have one church building on the east side and two on our side of the river. |
The nearest church to the parent station is Manchasan church history that your esteemed attention is invited below. Of all the men first reached Mr. Choi Hung Se (Chur Hung Sur) is the most prosperous as well as most respectable and responsible. From the first he was recognized as the leader and his house until recently has been used regularly for services. He has conducted the services, taught the children and the inquirers, entertained many brethren and strangers, and not a few really good Korean meals has your humble servant partaken of beneath his hospitable roof. Recently Mr. Choi told me the following story most of the incidents having taken place during our absence in America. At their morning and evening family worship, some constitutes part of the devotion. A little girl from a neighboring home was attracted, and at last grasped the fact that we have a Heavenly Father. She came regularly, and her heart being full, she ran home to pour it out. Her first words were: "Father, mother! our house is damned! We must all worship the Heavenly Father, or there's no hope for us." Her parents were angry and would not listen. The child became ill and constantly called for the Christians to pray for her, declaring that even yet she would live if they would allow the prayer to be made. Thinking at last that the child was about to die they called in Choi Hung Se and Choi Quan Bo, and these brethren besought God on her behalf. Quick recovery was the result. The child expected the parents to be converted thereby, but they hardened their hearts. Some time afterward the child became sick again, and insisted again that the family was "damned" because they refused to worship God. She declared that she would die, and that they would see much "kosang." The brethren prayed but the child died. The father suddenly succumbed to a strange disease, and soon the whole family were on the road egging from house to house. In the Manchsan group may be seen this |
family who now profess a change of heart. During the spring in spite lf famine the Manchasan brethren insisted on having a church. They were assisted by collections from our other two churches and we gave them some old building material, which they carried out to the site. They recently held their dedication service amid great rejoicing. It is the neatist church we have, and was planned, superintended, and constructed entirely by themselves. As we sat wait in the church, the day of Mrs. Choi's funeral, two fishermen were seen passing. The leader and another brother called them in and preached the gospel to them. This is a sentence I caught from one of them: "Your lives are in the dangerous sea. Who made that sea? Who made: who controls the winds? Jesus. the Son of God. His first disciples were fishermen-here sits one of his followers who has come thousands of miles to ask you to be disciples of Jesus. What will you gain by it? Not money but freedom from fear, peace in your heart, and eternal life in heaven," They lived away on a lone sea island. Each bought a book and a "Way-of-life" tract was given them. I have yet to see a new-comer leave this church without being cordially welcomed and preached to. Last Sabbath a former attendant returned after an absence of many moons. "God has given a son to us in our old age, so I come believing and to thank Him." was announced in the presence of the congregation. One another Sunday a man from the village was seen outside the church. He was at once surrounded, but the universal joy at his presence was too much for him. So he fled, leaving his tracts behind him. One brother remarked. "Well, isn't that a 'key maknan il'! (lit 'ear stopping business') give a man a tract on eternal life, he drops it and runs away!" Kunsan, Korea (번역: 김모세, 위스콘신대(메디슨) |
2. 교회 창립 50주년을 앞둔 좌담회
‘교회 초창기의 이모저모를 말한다.’
때 : 4281년(1948년) 10월 19일(화)
곳 : 서울시 중구, 대한 호텔 귀빈실
참석자 : (사회) 이성춘 목사(지경 교회 담임 목사)
이요한 국회의원, 이순길 선생, 최성현 씨, 양해근 장로, 장은숙 집사,
최영순 집사
(기록) 문석완 학생(중앙대 법과)
<발췌 요약> 이길구
⦁사회자(이성춘 목사) 기도 후 취지 설명 및 이요한 국회의원 인사 있음.
⦁양해근 : 초창기 이야기하면, 무엇보다도 최흥서 장로님을 비롯한 창립7현(創立七賢)이라고 하는 어른들 이야기가 먼저 나와야할 텐데, 여기 최성현 씨가 먼저 아버님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최성현 : 다들 우리 아버님을 추켜 세우시는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선친이 교회 장로 일에만 메이지 않고 사업이나 다른 일을 좀 하셨더라면, 큰 일을 전선(全鮮)에 울리는 인물이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을 내다보는 일이라든지, 교육열, 농민들을 각성시키시는 일들 등, 훌륭하신 점도 많지만, 우리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쌀쌀하신 분이었습니다. (하략)
⦁최영순 :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었는데요. 할아버지 아니면 저는 일본 음악전문학교에 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시집도 못 갈 뻔했어요. 그때는 중매 반 연애 반이었는데, 어찌 반대가 심했는지 할아버지의 절대 지원으로 겨우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하략)
⦁이순길 : 최 장로님은 언제 그렇게 다 배우셨는지 회의 사회도 일등으로 잘하시고, 선교사들도 최 장로님이라면 무조건 신임하는 최고의 인물로 알았습니다. 일본인들이 논을 빼앗다시피 사들일 때, 이를 반대하고 농민들을 설득하다가 업무 방해로 몰려 붙잡혀 가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최 장로님 덕으로 논을 안 팔고 지켜서 좀 잘 살게 된 사람도 많지요.
⦁장은숙 : 최 장로님은 우리 아버님(장인택 조사)과는 친 형제처럼 지내셔서 구암리 우리 집에는 늘 오셨고, 마침 사돈으로 우리 언니(장한나 집사)가 장로님 큰 며느리가 되었으니까요. 우리 아버님과 최 장로님은 성격도 비슷하셔서 엄격하시고,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시는 분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선교사들도 이분들 말이라면 무조건 신임했대요. 오긍선 박사도 나중에 최 장로님과 사돈이 되셨는데 아마 이 세 분들이 구암리 선교부를 떠받고, 선교에 큰 성과를 올리게 한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회자 : 최 장로님의 명성과 수많은 업적은 우리 교회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호남지방 안에 널리 알려진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그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끝이 없으니 이제 그만 하고 다른 분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정백현 씨에 대해서 누가 말씀 좀 해보시지요.
⦁이순길 : 그분은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분으로, 한학에도 통달하시고, 거동이 신중한 분이시어, 도학자 같은 인상을 주는데, 최 장로님과 손발이 잘 맞는 분이셨습니다. 훗날 크게 활약한 임영호 장로를 인도하여, 잘 지도한 것도 그분의 큰 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아들(공숙, 공선)을 잘 이끌고 다녔고, 교회에서 성경도 조용 조용히 잘 가르쳐 주시고 했습니다. 주일학교(장년)를 운영하는데 힘 많이 쓰셨습니다.
⦁ 양해근 : 정백현 씨와 정치선 씨 등은 타처로 이사하셨고, 강채오 씨는 일찍 작고하셔서, 아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제 홍일점으로 전도 아주메, 전도 부인, 매서인으로도 불린 상령 최부인(최매리)에 대하여 따님인 이순길 선생이 좀 말씀해 주시지요.
⦁이순길 : 우리 어머니지만 저는 존경하고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꼭 우리 만자산 교회를 위해 태어난 분 같았습니다. 아버님(이양화 씨)과 우리 4남매를 위해 집안 일도 적지 않았는데, 그중 일부는 집안 아줌마 한 분과 분담하여 농사일까지도 깔끔하게 처리 하고, 전도, 심방, 언문 가르치기, 성경책 팔기 등 하루 한 때도 쉬는 일이 없는 것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시간을 나누어 쓰면서도 우리 형제들의 교육과 신앙 지도는 철저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별 큰 재산도 없는데 나 같은 사람이 서울 정신학교에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지만, 우리 어머니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늘 사랑과 눈물의 기도로 우리를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그리고 이 지방 교회를 위하여도 많은 땀을 흘리셨지요. 나는 어머니 못지 않게 아버님 양화 씨에 대하여도 감사합니다. 완고한 집안 형제들이나 이웃 친구들에게 전도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어머니가 전도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멀리 전도 나갈려면 건강해야 한다고 비싼 보약까지 사다 주실 정도로 정성드렸습니다. 성품이 조용하시고 온화한 분이었어요.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무서워할 정도였으니까요.
⦁양해근 : 사실 그 아주머니(최매리)는 여자라서 그렇지만, 우리 교회로는 누구 못지 않은 큰 공이 있으신 분입니다. 집안은 물론 친정(최응숙, 최관보), 외가(김태성, 김근철, 김근홍) 등, 샅샅이 전도의 문을 열게 하고,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심방과 기도의 영력으로 사람들을 끌었고, 선교사들과 멀리 전도를 떠나기도 하셨습니다. 전도하는 중, 남자들은 할 수 없지만, 아주머니는 집안 속까지 들어가서 전도지를 나눠주고 했으니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사회자 : 자 그럼 여기서, 만자산 교회가 왜 그렇게도 빨리 세워졌고, 빨리 발전할 수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양해근 : 저는 앞서 일곱 분 어른들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를 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일 큰 이유일 것입니다.
⦁이순길 : 이야기가 좀 빠졌습니다. 최관보 씨는 훗날의 최응숙 장로와는 사촌이 되고 저에게는 외당숙이 되는 분인데, 집은 가난하여 어렵게 살았지만 그분의 신앙은 돈독하였습니다. 특히 기도에 열심이어서, 그 당시 철야기도를 하는 일이 희귀할 정도의 일인데도 그분은 잘 하였대요. 그리고 음악에 소질이 있으시어, 아무리 어려운 찬송가도 빨리 배워 사람들에게 따라하도록 잘 가르쳐 주었대요. 그리고 틈만 나면 최흥서 장로님 사랑채의 단골 손님으로, 그분 심부름은 도맡아서 했대요. 그리고 정치선 씨는 특별한 재주는 없지만 신의가 두터운 분으로 늘 자기 몫은 다하여 교회를 섬기는 농사꾼이었대요. 우리 집과 최흥서 장로님 그리고 강채오 씨 댁은 서로 가까이 있어,이웃 사촌으로 지낸 것도 교회 일에는 도움이 좀 된 것 같아요. 강채오 씨 따님인 신순이는 빼어난 미인으로 훗날 찬양대와 소아회(유년부를 말함) 선생으로 날렸습니다. 초창기 일곱 어른들이 합심 협력하여 교회가 크게 발전한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서로 합심하고 서로 돕는 전통이 그때부터 생긴 것 같아요.
⦁장은숙 : 선교사들과의 관계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자산 분들의 열심과 끈질긴 노력에 선교사들도 감동하여, 특별반을 만들고 함께 전도를 하면서 교육·훈련에 남다른 열성을 들였으니까요. 한 형제, 한 식구처럼 협력 관계가 잘 된 것은 만자산 교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최영순 : 선교부와의 관계 이전에 저에게는 외조부, 장 집사님께는 부친이 되시는 장인택 조사는 제물포에서부터 선교사와 군산에 함께 오셔, 선교부 살림을 꾸려나간 총무격인 분이셨는데, 그분과 우리 조부이신 최흥서 장로와는 어느 형제간 못지 않은 절친한 친구, 동지였다고 하니(물론 훗날에 사돈 간이 되었지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겠습니까? 그 집에서 먹고 자고... 만자산 교인들이 많은 빚을 졌지요. 그리고 우리 외조모이신 최현택 씨가 인심 좋고 참 인자한 분이셨으니 참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결국 시집와서 만자산 교인이 되셨지만, 어려서 심부름도 많이 했답니다. 그런 사연도 기록으로 남길 만 합니다.
⦁양해근 : 만자산 교회는 군산 선교부 전도 활동의 중심 거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군산 구암리에서 나와 남차문, 송지동, 임피, 황동, 김제, 부안, 정읍으로 전도하려면, 우리 교회를 거쳐서 우리 교인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들의 전도지, 책(성경, 쪽복음), 침구, 침낭 등을 만자산에 갔다 맡겨두고, 여기서 필요한 것을 가지고 떠나기도 하고 여기서 숙박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만자산은 전도의 도장이 되는 것이지요.
⦁사회자 : 지금까지 만자산 교회의 뛰어난 인물들의 상호 협력, 학습과 교육의 열심, 선교부와의 협력과 지원, 지리적으로 선교의 중심 거점이 된 점, 특히 장인택 씨 부부의 협력과 친분 등을 들었습니다. 그 밖의 또 다른 말씀은 없습니까?
⦁이순길 : 통사, 발산 지역분들의 열성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방문으로 길이 트인 통사동, 바르메의 채두묵 씨(채규일 부친, 채원석 조부), 고화성 씨(고성모 목사 부친), 양맹엽 씨(양해근 장로 부친), 신태호 씨(신덕칠 장로 부친) 등과 그 가족들까지 만자산 교회로 모였으니, 대단한 일이지요. 그 분들의 자녀 중에는 여기 양 장로님을 비롯하여 훗날의 고성모, 신덕칠, 채규일, 고창섭, 신백선 등 많은 인재들이 만자산 본촌에서 못지 않게 배출 되었거든요.
⦁사회자 : 지경교회가 빨리 창립, 발전된 원인들을 많이 짚으셨는데, 시간도 많이 갔고, 말들을 하자면 끝이 없게 생겼으니, 대강 마무리 하는 단계로 들어가겠습니다. 짧게 말하여 지경교회 초창기의 자랑스런 점을 찾아보면, 어떤 것들일까요?
⦁ 양해근 : 뭐니 뭐니 해도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배우고 기도하고 전도를 한 점이 제일 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산에서 만자산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군산 구암리, 김제 송지동, 심지어 전주 사경회까지도 열심히 모여, 교회 일이라면 내 일 이상으로 열심히 하신 것이 큰 자랑입니다.
⦁이순길 : 저는 열심히 교육하고 사람을 길러낸 것도 큰 자랑입니다. 일찍이 구 한말에 학무부 허가된 소학교를 열고, 야학당을 개설하고 또 군산 구암까지 보내어 공부시키고 서울 유학을 많이 보내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대충 세어보니, 영명학교나 멜본딘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만도 세브란스와 연희전문 10명, 정신, 이화, 배화, 경신, 배재 등 9명 등, 어려움 속에서도 보내어졌거든요. 그 중에서 의사가 8명이 나오고(1925년 집계) 일본에도 전문학교에 여기 최영순 씨를 비롯하여 세 사람이나 갔고....
⦁양해근 : 저는 최흥서 장로는 말할 것도 없이 전남 북을 대표할 만한 장로님이니 별격으로 하고, 임영호, 김옥여, 오원집 등 이 지방의 중요한 교회들을 세우신 분들이 우리 선배들이시라는 점입니다. 물론 여기 계신 이순길 누님도 그분들 못지 않은 전도의 대가(大家)시구요. 임영호(장로)는 옥구의 이곡교회를 전도 설립하셨고, 공창리 오원집(장로)은 이리 고현, 이리 제일교회를, 김옥여(장로)는 충남 서천교회를 설립하는 큰 공을 세웠거든요. 그 교회들이 오늘날 하나 같이 그 지방의 중심 교회들이 되었으니, 우리의 큰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순길 누님의 이야기는 본인 앞에서 쑥스러우니 다음 기회로 미루지요.
⦁최영순 : 교회에서 끊임없이 애국 정신을 길러 나라 사랑의 마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고, 3·1운동에 가담하여, 김준실 선생은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고, 강홍선 씨 등 많은 청년들이 3·1운동에 가담했으며, 여기 이순길 선생은 임영신 같은 일꾼들을 기전 여학교에서 길러내고, 본인도 황등 지방에서 전도, 시국 강연을 하다가 체포·구류 되는 등 자랑스런 업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장은숙 : 함께 협동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힘을 모으는 좋은 전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구암에서 지경에 온 후 깜짝 놀랐습니다. 교인들이 농번기에는 함께 모여, 공동 작업을 하고 서로 돕는 일, 교회 논 농사를 내 논 농사보다 더 열심히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추수한 후에는 함께 잔치하고 감사하는 모습들은 구암리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별로 돈 많은 부자도 없는 교회에서 교회당을 짓고, 교회 논, 교회 묘지를 장만하는 것 등, 모두가 합심, 협동하는 신앙으로 연결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자 : 우리 교회 자랑을 너무 하다 보니, 혹여 교만해질까 무섭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조상들 아래 못난 자손들이 되지 않도록 어른들의 발자취를 따라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창립 50주년을 발판으로 100년, 200년의 대 지경 교회로 발전하도록 역사의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초창기 이후의 일제 암흑기 이야기는 시간이 없어 나누지 못했습니다. 다음 기회로 이 간담회가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장장 2시간 반의 귀한 시간,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사회자의 기도로 끝남)
※ 참석자 소개
⦁이성춘 목사(사회), 지경교회 목사(1945~1950)
⦁이요한(당시 평교인, 국회의원-옥구지방 각 교회의 열렬한 성원으로 당선됨)
⦁최성현(최흥서 장로 2남) 연희 전문 졸업.
⦁이순길(멜본딘, 정신고녀 졸) 전주 기전 여학교 교사, 군산노회부인전도회장, 군산노회 순회 전도사, 교회 개척 12개 처.
⦁양해근 장로(영명학교 졸) 지경교회 대표장로로 군산노회 회계 8년, 총회 재정 부장 역임.
⦁장은숙 집사(군산 선교부 장인택 조사 2녀) 지경 교회 여전도 회장 역임, 권사.
⦁최영순 집사(멜본딘, 정신고녀, 교또 여자 음악 전문 졸, 최흥서 장로 장손녀), 서울 공대 교수, 배재고 교장인 신영묵 씨 부인으로 당시 유명한 성악가였음.
⦁문석완(중앙대 법과생) 이요한 국회의원 문하생으로 국회 관사에서 숙식함. (발산교회 장로)
3. 역대 당회장 및 직분자
년 |
당회장 |
직분자 |
1926 |
부위렴 |
(장로) 최흥서, 고성모. (집사) 최찬경, 임영호 |
1927 |
〃 |
(장로) 신덕칠. (안수집사) 최찬경, 양해근, 임영호 |
1929 |
이창규 |
(장로) 최흥서, 고성모. (집사) 최찬경, 양해근 |
1930 |
부위렴 |
(장로) 최흥서, 고성모, 신덕칠. (집사) 최찬경, 양해근 |
1932 |
고성모 |
(장로) 최흥서, 신덕칠, 임영호. (집사) 최찬경, 양해근 |
1933~1934 |
부위렴 |
(장로) 최흥서, 신덕칠, 임영호. (집사) 최찬경, 양해근 |
1935~ 1936 |
〃 |
(장로) 신덕칠, 임영호, 최찬경, 양해근. (안수집사) 최재선 |
1937 |
〃 |
(장로) 신덕칠, 임영호, 최찬경, 양해근.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채규일. (서리집사) 윤응칠, 최양선.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
1938 |
〃 |
(장로) 신덕칠, 임영호, 최찬경, 양해근.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채규일. (서리집사) 윤응칠, 최양선, 최양옥, 이원석.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전도사) 이덕순 |
1938․ 8.28 |
발산 분립 |
|
1939~ 1940 |
최영택 |
(전도사) 최문환. (서리집사) 라반석, 최순열 |
1941 |
이근호 |
(장로) 양해근.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라반석. (서리집사) 최양선, 윤응칠, 최순열, 이원석,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전도사) 최문환 |
년 |
당회장 |
직분자 |
1942 |
〃 |
(장로) 양해근, 최찬경(42.4. 피선).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라반석. (서리집사) 최양선, 윤응칠, 최순열, 이원석,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전도사) 최문환 |
1943 |
최문환 |
(장로) 양해근, 최찬경.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라반석. (집사) 윤응칠, 이원석, 최순열, 문동실, 이병화, 김은동 |
1944 |
〃 |
(장로) 양해근, 최찬경.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라반석. (집사) 윤응칠, 이원석, 최순열, 문동실, 이병화, 김은동.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박성녀, 서현순 |
1945 |
〃 |
(장로) 양해근, 최찬경.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라반석. (집사) 이원석, 문동실, 이병화, 김은동.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박성녀, 서현순, 최정애. (전도인) 임춘자 |
1946 |
이성춘 |
(장로) 양해근, 최찬경.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라반석. (집사) 이원석, 문동실, 최순열.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박성녀, 서현순, 최정애. |
1947 |
〃 |
(장로) 양해근, 최찬경.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집사) 문동실, 이원석, 최순열, 최대원, 김창호.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최경순, 서현순, 주은덕, 최정애. |
1948 |
〃 |
(장로) 양해근, 최찬경.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집사) 이원석, 문동실, 최순열, 김창호, 최대원.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최경순, 주은덕, 강경옥 |
1949 |
〃 |
(장로) 양해근, 최찬경.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집사) 김창호, 이원석, 문동실, 최대원, 최순열.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주은덕, 최정애, 강경옥, 최경순, 서현순. (여전도인) 권순정 |
1950 |
〃 |
(장로) 양해근, 최찬경, 김창호(5.11. 안수).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최대원, 문동실. (집사) 최순열, 이원석, 유희열, 이관섭. (여집사)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최경순, 주은덕, 강경옥, 최정애, 서현순 |
Ⅳ. 본 편—2
2. 민족의 수난과 교회 시련기(1931~1945)
1) 민족 수난의 배경—총독통치의 실체
2) 지경교회의 위상
(1) 지경을 넓히는 교회
(2) 선교의 변두리로부터 선교 거점으로!
(3) 봉건사회의 씨족취락으로부터 지역 신앙공동체로
(4) 높은 교육열, 취학률로 많은 인재 양성
(5) 자연스런 세대교체로 새 일꾼들이 성장하다
(6) 애국—애족하는 교회 - 구국기도회, 순국—순교를
각오한 실제 활동으로 한데 뭉친 교회
3) 교회 운영체제의 전환—원로급 중심에서 제직회 체제로
(1) 어려운 시기의 어려운 일—교회당의 신—개축(改築)
(2) 제직회, 교회당 개축 결의하다
① 책임자 선정
② 공사 진행 방식
③ 나머지 공사
4) 교회 기관들의 활동 상황
(1) 여신도회의 활동
① 부인 조력회 조직—창립총회
② 부인 조력회 제5회 정기총회
① 유년부(유년주일학교) 조직
② 주일학교(장년부) 조직
③ 하기 아동 성경학교 개설
④ 어린이용 찬송가 애용 권장
⑤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 참가
⑥ 하기학교 강습회 참가
⑦ 제1회 전북노회 주일학교 대회 참가
(3) 교회 청년들의 교육과 활동
① 지경교회 기독청년 면려회 창립총회
② 제 5회 정기총회(지경교회 기독청년 면려회)
③ 면려회 강연회 및 강습회 개최
④ 전북지방 기독청년 면려회 조직 참여
⑤ 조선연합회 제 1회 총회 참여
(4) 찬양으로 봉사하는 성가대
① 지경교회 찬양대—제 1기 조직
② 지경교회 찬양대—제 2기 (재편)
③ 찬양대 조직에 얽힌 일화 한 토막
5) 민족의 수난의 실상(實相)과 전망
(1) 황민화(皇民化) 정책
① 황국신민 서사 제정(1937)
②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구성(1938. 1)
③ 창씨개명(1939. 11~1940. 2 실시)
④ 국민 총력연맹 조직(1940. 5)
(2) 군수물자 동원
① 농산물 공출제 강제 집행(1941. 8)
② 금속류(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공출, 강제 징수(1942)
(3) 군—병 모집(지원병→ 징집제)
① (총독부) 학도 정신대 조직(1931)
② 청년 특별 연성소 입소식(1942)
③ 학도병제 강행(1943. 10)
④ 조선 육군 지원병 령(令) 실사(1938)
⑤ 징병제 실시(1943.3.1)
(4) 대(對 )교회 관련 사안
① 신사참배 결의 강요(1938) - 제27회 총회 가결
② 신사참배 거부 학교- 자진 폐교
③ 조선장로교단 해산 - 일본기독교단 조선장로교단 조기(1943)
④ 신사 위패 봉안 강요 - (천조대신(天照大神) 위패) 봉안
(5) 조선장로교단을 통한 신앙 억압
① 구약성경과 신약(요한계시록)의 사용 금지
② 찬송가의 수정 삭제
o 전장 삭제
o 부분 삭제(총 9장, 12구절)
o 가사 자구 수정(총 41장 90절)
③ 교회 예배의 회수 제한
④ 교회당의 통폐합
(6) 지경교회가 겪은 실제 사례(事例)들
① 최문환 목사 위임식(일본식 국민의례 사용)
② 전북교구 군산지구회 창립총회
③ 교단 본부 영달 제1호—주일 밤예배 중지 명령 시행(1943. 8. 29)
④ 비행기 100대 헌납에 관한 헌금
⑤ 성탄절 낮예배 외의 모든 행사 중지
⑥ 해군 휼병금(恤兵金) 20원—주재소 전달
⑧ 전북교구회 목사 근로보국대에 최문환 목사 출두(1944. 3. 1~3. 5)
⑨ 비행기 헌납금 일금 70원(주재소 경유, 1944. 4. 2)
⑩ 최문환 목사, 근로보국대 출두—불이농촌
오까야마무다 주민 중 입영 응소자 가족
농번기 작업에 협력하고 귀가함
⑪ 종교간부 연성회(1944. 11. 21~5일간)—국민총력 전북연맹 주최
—금산사(최문환 목사 출두)
⑫ 조선 전시 종교보국회 발회식
⑬ 전몰장병 위령제
⑭ 궐기대회(본부 통첩)
⑮ 군사원호 강습회(최문환 목사 전주 출석)
⑯ 본 교회당—군부대가 접수 점거
(만자리 회관 빌려 교회로 임시 사용)
6) 국난 극복에 몸을 던진 열사, 지사(志士), 순교자 들
(1) 강대옥 성도
(2) 고규영 성도
(3) 이우석 목사
(4) 김태성 전도사
7) 험난한 시기의 제반 행사들
(1) 발산교회 분립예배
(2) 부위렴 목사 송별예배
(3) 최문환 목사 위임식
(4) 연합 산상예배
(5) 학병 입영 축하예배
(6) 최찬경, 양해근 장로 임직 10주년 기념식
(7) 직원 기도회
② 제2회(1943. 10. 13) 양해근 장로 댁
③ 제3회(1943. 11. 10) 발산 신덕칠 장로 댁
④ 제4회(1943. 12. 14) 강순실 집사 댁
⑤ 제5회(1944. 1. 9. 후8:00) 윤응칠 집사 댁
⑥ 제6회(1944. 2. 1) 문동실 집사 댁
⑦ 제8회(1944. 4. 7) 서현순 집사 댁
⑧ 제10회(1944. 6. 9) 김은동 집사 댁
⑨ 제11회(1944. 7. 15) 최문환 목사 댁
⑩ 제12회(1944. 8. 3) 목사관
⑪ 제13회(1944. 9. 2) 양해근 장로 댁
⑫ 제14회(1944. 10. 4) 채규일 장로 댁
(8) 교회 주택 증축(확장)
① 물품 헌납 상황
② 출역자(出役者)
(9) 일정말(日政末)의 시련기 정리
① 현상유지와 신앙의 한계
② 성가대
③ 유년주일학교
④ 여전도회, 청년회
3. 광복과 골육상쟁의 아픔
1) 교회의 정비와 새 출발
(1) 옥구지방 대사경회 개최
① 준비상황
② 지경교회 제직회
③ 대사경회 운영 실정
2) 광복기의 직원들(1945~1960)
3) 이성춘 목사 청빙
(1) 이성춘 목사 청빙의 경위
(2) 강도사 인허식
(3) 목사 임직식
(4) 이성춘 목사 지경교회 위임식
① 군산노회 제6차 임시노회 심의 상황(노회록)
② 위 노회록의 특별 읽을 거리
2. 민족의 수난과 교회의 시련기(試鍊期)
이역 만리에서 힘겹게 들어온 복음의 씨를 받아 드려 신앙의 초석을 굳히며 “만자산 교회”로 출범한지 벌써 4분의 1세기가 지났다.
교회 창립 4반세기를 지나면서 교회의 실적을 점검하며 그 동안 형성된 본 교회의 특성을 한번 살펴보는 것은 다음 단계의 발전을 위하여도 큰 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1) 민족 수난의 배경-총독 통치의 실체
민족의 수난기와 지경 교회의 형성기는 역사적으로 기묘하게도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는 점은 이미 논급한 바가 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형성 과정을 엄밀히 살피려면 그 배경이 되는 일본의 조선 총독 체제의 실태를 잘 살피는 것을 전제(前提)로 하여야 할 것 같다.
총독 체제와 그 통치의 실적을 살펴 보면 분명히 두 부분으로 분리하여 고찰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 첫 부분은 데라우찌 총독의 무단통치로부터 사이또오의 소위 문화 정치라는 이름의 유화 정치에 이르는 부분이다. 그들은 조선 반도를 자신들의 대륙 침공의 전진 기지화 하고 병참 기지화 하는 시기로 매사가 순조롭게 전개되었다.
두 번째 부분 즉, 우가끼(宇 ), 미나미(南次郞) 총독 이후 패전에 이르기 까지로, 대륙 침공에 타성이 붙어 만주 사변,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에로 힘겨운 전선을 확대하면서 패전에 이르는 전반기와는 전혀 다른 패전에 이르는 패턴의 통치이다.
명치 유신 이후 일본의 천황 체제는 일취월장하는 국력으로 청일․러일 전쟁을 승리하며 탈아입구(脫亞入歐) 하는 기세로 먼저 한 반도 제압의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강화도 조약을 시발점으로 하여 을사 보호 조약, 한일 합방으로 들어가는 (경술)합방 조약으로 한국을 완전히 제패하는 순탄한 코스를 진군하였다.
거기에는 유럽의 강호 영국을 일․영동맹으로 우호국으로 끌어들이고(홍콩 점유 등의 보장), 가쓰라․태프트 협약으로 미국의 입에 자갈을 물려 놓고, 한반도를 독식(獨食)하는데 걸림돌을 제거한 용의주도한 전략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1905년에는 외교권을 상실하고, 1907년에는 군대 해산(신협약에 따름), 마루야마(丸山) 경무 고문이 경시총감(警視總監)이 되어 경찰권을 장악하고, 1909년에 사법권 위임, 1910년에 경찰권을 위임함으로 우리 나라는 법통상(法統上)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국가의 공권력(公權力)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들은 1911년 4월 17일((토지수용령)), 6월 20일 삼림령((森林令)), 1911. 6. 30((국유 미간지 이용법)), ((조선 교육령)), 1913((조선 공증령(公證令)), 1914((각급학교 교련 과목 설치)), 1915((조선 광업령), 1916((광(鑛)업령 등록 규칙)), 1918(조선 임야 조사 착수)), ((토지 조사 작업 완료)) 한다.
이상과 같은 일제(日帝)의 조선 경략(朝鮮經略)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계승한 데라우찌(寺內正毅) 통감(제 2대)이 1910년 합방(合邦) 이후 초대 총독으로 친임(親任-천황이 직접 임명) 되어, 헌병․경찰제를 주축으로 하는 무단정책(武斷政策)으로 전 국토를 완전 석권하게 된다.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애국 지사들, 의병들이 궐기하였지만 밀려오는 침략자를 격퇴하거나 승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귀한 피를 흘리고 산화하거나, 멀리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하는 비참한 결말을 낳기만 하였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애국의 열정은 쌓이고 쌓여 마침내 1919년 3월 1일, 3․1 독립 선언을 만방에 선포하고, 전국 방방 곡곡에서 우렁찬 만세의 함성은 일제를 놀라게 하였다.
일제는 민심을 수습하고 회유하기 위하여 온건파인 사이또(齊藤實)를 제 3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소위 문화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의 틀을 짜게 됐다.
이 시기의 지경 지역의 실상을 보면, 그들이 제정 공포한 각종 법령을 무기로 하여 드넓은 대야 뜰을 개간 정비하여 그 대부분을 그들의 소유지로 사유화하였다. 운암 저주지로부터 수로를 정비하여 수리 시설을 확충하고, 옥구 서부 지역의 간사지인 불이농촌(不二農村)에는 일본 37개 현․정(縣․町)의 농촌 이민촌을 만들어 호남의 곡창지를 장악하는 실습지로 만들었다.
면 내에 산재한 농장들(웅본, 팔목, 도곡, 대창, 대원, 정상, 가이 웅본(熊本), 팔목(八木), 도곡(嶋谷,) 대창(大倉), 대원(大圓), 갑비(甲斐) 등은 한국 소작인들을 지배하는 하수인이 되고, 전주-군산을 이은 전군 도로는 경인 도로와 버금가는 일등 간선 도로로, 강경으로부터 이리 경유 군산에 이르는 군산선 철도와 함께 곡창 호남 지역의 혈맥의 역할을 하며 군산항으로 모이게 된다.
위와 같이 총독 정치의 전성기에 그들의 장악(掌握)에서 제외된 부분이 있었다. 다름 아닌 기독교 선교의 자유다. 그 이유도 몇 가지 있었겠으나, 무엇보다도 일본-미국, 일본-영국의 우호 관계가 절대적인 힘이 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한국민, 한국 교회에 주신 큰 축복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 지경교회의 위상
주여!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야베스의 소원(所願) 그대로를 가는 교회, 그 소원이 이룩되는 축복된 교회! 그 목표를 향하여 교회는 전진한다.
(1) 지경을 넓히는 교회
① 군산 시내에 흩어진 교인들을 모으고 새 사람들을 모아 구복동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을 교육할 복음서점을 운영하며 개복동 교회 출범의 기초를 세운 최흥서
② 서천의 백정들 집단촌에서 전도하며 서천 지역 개척의 길을 연 김옥여
③ 임피 공창리에서 살면서 10여리 길 지경 교인이 되어 마침내 처가 동네 고현리 교회 그리고 후리 교회(이리 제일 교회)를 개척한 오원집 청년(장로)
④ 옥구 서남부 지역의 중심지 이곡교회를 개척한 임영호
⑤ 고창, 흥덕, 부안 등지에서 전도의 길을 연 정백현
⑥ 김제 옥산, 요촌 등지에서 병원을 세우고 복음과 의료의 양 날개 선교로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의 아들(정백현의 아들) 정공선
그밖에도 ⑦ 고성모, ⑧ 이우석, ⑨ 이순길, ⑩ 강순봉, ⑪ 강순석 등 그들의 지경을 넓히는 선교의 발자국은 시간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①~④는 1901~05까지, ⑤~⑪는 개별적으로 실시됨.
(2) 선교부 변두리의 기도처로부터 지역선교의 거점으로, 나아가서 호남 지역 북 서부의 군산-서천-옥구-익산-김제-고창-부안을 연결하는 지역 선교의 중심지의 역할을 하게 됨.
(3) 봉건사회의 씨족 취락→ 지역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는 계기가 됨.
만자산의 다수 세대인 김해 김씨, 진주 강씨, 전주 이씨 등이 복음 전도의 접촉과 일상 생활에서의 문맹퇴치, 영농의 공동작업(모내기, 추수, 파종 등), 교육, 관혼상제를 통한 교류 등으로 교회에 대한 자연스러운 친밀감과 복음 수용(受容)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음.
※ 만자산 내 김해 김씨 족보 발췌분 참조
(4) 높은 교육열, 취학율로 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며 그들은 각자 처소에서 명성을 높이며 봉사하였지만 모 교회에 돌아와서 봉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거의 모두가 각처에서 지경을 넓히는 역군의 삶을 산 것이다.
그 실례를 하나 들어 보면, 1920년대까지 지경 교회 출신 의사가 8명이었는데 그 중 지경에는 최흥서 장로의 장남인 주현이 제중의원을 운영하며 봉사하였으나 건강 관계로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그의 장남인 영태 박사는 세브란스 의대 교수로, 보건 위생국장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예방의학 권위자로 활약하였다.
(5) 창립 초기의 뛰어난 인물들이 작고하거나 노쇠하여 부득이 세대 교체의 바람을 맞게 되나 다행히도 그 여파는 크지 않고 적절한 새 인물로 채워졌다.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창립 7현으로 알려진 분들 중, 정백현, 최관보, 정치선, 강채오, 최매리 등이 작고하고 그 외에도 김옥여(1923), 정부인(전도부인) 등이 애석하게도 일찍 작고했다. 최흥서 장로도 노쇠하여 임영호, 고성모, 최찬경, 신덕칠, 양해근 세대로 새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6) 국권의 상실과 민족의 수난기에 지경 교회는 눈물겨운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기복 사상에 메이는 게 아니라, 애국·애족의 투철한 정신으로 애국 기도회, 구국 철야 기도회 등 형벌을 두려워 않고 투쟁에 참여하는 일꾼들이 속출하였다.
3) 교회 운영체제의 전환
-원로급 중심에서 제직회 체제로
원로들의 활약과 진력으로 그 위상이 크게 높아진 교회가 정백현씨로 부터 김옥여 장로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분들이 작고하고, 그 동안 총지휘관 격이었던 최흥서 장로도 연로하여 2선으로 물러서니, 이젠 고성모, 임영호에, 젊은 신덕칠, 양해근에 그 아래층 세대들이 등장하여 조화를 이루며 어려운 시대이 교회를 잘 운영해 갔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함흥에서 근무하던 이용재 씨 부부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그 부인 석정순(집사)는 결혼 기념으로 가나다 선교부에 부탁하여 구입한 대형 풍금을 교회에 바치게 되어 교회에 적기에 좋은 헌물이 되었다.
석정순 씨는 예배의 반주 뿐만 아니라 여전도회 일, 성가대 반주 및 지도 등 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 석정순 씨 경력 :
함흥 출생, 함흥 영생 여자 고등학교 졸업, 영생 유치원 교사 5년
(영생 여고는 함경도 명문 학교로 기독교 학교임)
(1) 어려운 시기의 어려운 일 - 교회당 신․개축(改築)
당회나 원로급들의 결정 시스템이 제직회 형태의 결의 체제로 은혜롭게 잘 전환되면서 맨 먼저 부닥친 난제는 교회당 건축 문제였다.
최장로 댁 사랑채에서 잉태한 만자산 기도처가 성장하면서 중만자에 그 당시로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초가 3간의 한옥을 구매하여 회당으로 사용하면서, 다시 좀 여유 있는 동만자의 현 위치에 있는 넓은 터에, 좀 낡은 한옥을 구매하여 손질을 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누구나 교회 신축 문제로 정식 발의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좀 넓고 교회의 예배를 비롯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개하기에 꼭 필요한 규모의 교회당의 필요성을 공감하던 때였다.
뜻밖에도 임영호 (피택)장로가 일금 20원을 즉석 헌금하면서 부흥회를 열자는 건의를 하였다. 다수가 그 의견을 환영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부흥회 준비 절차로 들어갔다.(1932)
때 마침, 당시에 좋은 설교로 전국에서 소문이 난 배은회 목사를 교섭하는데 건강도 그리 온전하지 못한 최흥서 장로님이 전주 서문밖 교회까지 직접 가셔서 교섭하여 성사되었다.
그 해 12월 둘째 주 일주간의 부흥회는 배은희 목사의 진가를 남김없이 발휘하여, 새 결신자 85명, 부흥회 헌금 600원 등, 심령상의 놀라운 축복과 아울러, 가시적인 새 신자 수와 헌금액에 제직 모두는 감격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흥분을 하였다.
(2) 제직회, 교회당 개축 결의하다
교회 개축은, 그 자리에 목조 근대식, 함석 지붕(亞鉛版 지붕) 30~40평 정도로 하고 재정의 부족하면 백마산 교회 묘지 일부도 처분하여 충당하기로 하며 공사는 가급적 빨리 착수하기로 하였다.
결정된 사항을 정리하여 본다.
◦ 책임자 선정
건축위원장 : 임영호 (피택)장로 부위원장 : 신덕칠 장로
현장 책임자 : 양해근 부 책임자 : 강순실
◦ 공사 진행 방식
공사 시작일 : 1933년 1월 16일(월)부터
공사 총 진행 책임 : 김득수 씨의 의견을 들어, 만자산 회관 건립의 경험이 있는 김석두 씨로 한다.
건축 기술자 채용 : 군산 등지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자 2인을 계약 청빙하고 기타는 지경에 거주하는 김영만, 양득철, 서정진 씨에게 맡긴다.
기타, 잡용 노동은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인원을 가감한다.
※ 선교부의 시장 전도, 방문 전도 시, 날연보로 사전에 헌신하기로 작정하는 (무료 봉사제)를 채택하여 인력을 확보하기로 하였는데, 의외로 많은 날연보 지원자가 있어 기적 같은 기쁜 일이 되풀이 되었다.
◦ 나머지 봉사
식사 : 교회가 실비 제공, 여전도회가 식사 준비 봉사.
※ 공사 현장 풍경
지경 천지에서는 처음 보는 웃음, 기쁨, 땀, 보람을 느끼는 축제 같은 나날이었다고 한다. 날연보꾼, 안 믿는 이웃들도 호미, 삽, 곡괭이를 들고 나오고, 여신도들은 갖가지 먹을 것 등을 갖고 나오는데, 이것이 모자라거나 남으면 안 되니까 이런 일을 조율하는데 양해근 장로 강순실 집사 등은 이런 일 정리에 생각지 않은 힘을 쓰게 되었다.
웃음과 유머, 찬송 .... 공사 중인 매일 매일이 잔치와 부흥회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 성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점점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총 건평 35평+(다락 양측 2곳), 공사비 총 1,680원이 들어 완공하였는데 예정대로 교회 묘지 일부를 매각하고도 부채가 남았는데 다음 1년 6개월 동안에 완전히 갚았다는 기록이 다음해 노회 시찰 구역 보고에 나와 있다.
4) 교회 기관들의 활동 상황
(1) 여신도들의 활동
지경 교회 부인 조력회의 조직은 1926년의 일이지만 실제로 여신도회의 활동은 교회 창립기로 소급해 올라간다.
최매리(상영 최부인), 정부인(김득수 씨 부인), 유은덕 전도사 등의 활동으로, 여신도들의 대내 활동 뿐만 아니라 선교부의 시장 전도나 원거리 전도까지도 참여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여 성경학원이나 여 사경회에도 집단으로 참석하여 만자산 시대부터 지경 교회 부인회 활동은 널리 알려졌었다. 앞서 거론한 세 분들의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그리고 효율적인 지도로 지경 교회 여신도들의 전도력은 크게 성장하였다.
지경교회 여신도들의 뛰어난 잠재력의 배경을 짧게 소개해 보기로 한다.
◦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기도에 열심인 고 학력자들이 많다. 군산 멜본딘→ 서울 정신 여고보로 연결되는 출신만 해도 이순길, 장은숙, 최영순, 최영님, 정옥선 등, 광주 스피아여고 김명은, 함흥 영생으로 석정순 등 초창기의 그들이 전도, 봉사, 친교의 전통을 이룩해 놓으니 수많은 후배들이 그 전통을 잘 이어가고 있다.
◦ 1905년 구국 기도회 때부터 주일 새벽 기도회는 여신도들이 앞장 서 교회의 정식 프로그램이 되고 있으며 이것이 더 승화되어 “철야 부대”라는 별명이 붙은 여전도회 고유의 철야 기도회까지도 있다.
◦ 공동 작업으로 명성을 날리는 공동 작업반은 불신 사회에서까지 인정을 받는 모내기 반, 벼 베기 반 등 평야지 교회의 특성을 살리고 있다. 이와 같은 공동 작업반에는 교인 아닌 주민도 가입해 있으며 비신자들도 일감을 맡기곤 하였다.
① 지경 교회 부인 조력회(婦人助力會) 조직—창립 총회
창립 연월일 : 1929년 1월 8일 오후 1시 30분~
모친)
설교 : 부위렴 선교사
설교 제목 : 착하고 진실한 종
성경 : 마태 25:14~30 찬송 : 211장
참석 회원 : 43명
(임원 선거)
회장 : 유은덕 부회장 : 석정순
서기 : 김길례 부서기 : 차보배
회계 : 김명은 부회계 : 장은숙
※ 조력회 표어 : “주께서 말씀을 주셨으니 전파하는 여인이 큰 무리로다.”
(모든 회원이 일어서서 암송함)
기도부장 : 석정순 (차장) : 장한나
전도부장 : 유은덕 (차장) : 김길례
성미부장 : 차보배 (차장) : 정옥선
제1원주회 … 만자, 하리, 내상, 차상 (회장) 다음에 정하기로 함.
제2원주회 … 백마, 우덕, 백월 (회장) 다음에 정하기로 함.
제3원주회 … 산월, 보덕 (회장) 다음에 정하기로 함.
미진 안건은 다음 임시 총회서 정하기로 함.
축도 : 부위렴 선교사
※ 1. 상리(원주회 예정지) 인도자 결정
매월 2주일씩 도와주기로, 주은덕, 장한나씨 선임함.
2. 각 원주회 권찰 : 1원주회-박성여, 2원주회-손덕자, 3원주회-김부선
※ 참고사항 : 전북노회(제21회) 정기노회(1927. 6. 7 후8시)
각 시찰 보고(군산 동남지방)
∙지경교회는 부인 조력회를 조직하여 진행 중에 재미가 많사오며, ......
② 지경 교회 부인 조력회 제 5회 정기 총회
때 : 1933년 1월 15일(주일) 후2:00~
곳 : 교회당 부속 야학당
사회 : 석정순 회장, 기도 : 장한나
회무 처리에 앞서 개회 예배를 드리다.
설교 : 고성모 목사(당회장)
제목 :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할 것
성경 : 롬 15 : 1~4
개회 특별 기도 : 양해근 피택 장로
표어 제창 : “주께서 말씀을 주셨으니 전파하는 여인이 큰 무리로다.”
임원 선거
회장 : 석정순 부회장 : 김명은
서기 : 차보배 부서기 : 김길례
회계 : 장은숙 부회계 : 정옥선
기도부장 : 장한나 차장 : 주은덕
전도부장 : 유은덕 차장 : 차보배
성미부장 : 서현순 차장 : 박봉례
노회연합회 총대 : 석정순, 장은숙
각 원주회장
제1원주회장 : 박성여
제2원주회장 : 서현순
제3원주회장 : 김부선
결의사항
1. 조력미 주머니를 만들어 전 회원에게 나누어주기로 함.
2. 지난 해 수재의연금 부족분을 본회 재정에서 갚기로 함.
제3장 찬송 후 고목사님 축도로 페회함.
(2) 지경 교회 주일 학교 활동
① 지경 교회 유년부(유년 주일학교) 조직(1925)
교장 : 하위렴 선교사
부장 : 신덕칠 서기 : 김명은 회계 : 정옥선
○ 교사(남) : 양해근, 강순실,채규일, 이원석, 최양선, 강순봉, 라반석, 최양옥
○ 교사(여) : 석정순, 주은덕, 장한나, 장은숙, 강순금, 정옥선, 최영훈,
이순애, 강신순, 서현순, 이달주, 고복선
○ 업무 분담
설교 : 신덕칠, 양해근, 석정순, 김명은
동화 : 강순봉, 라반석, 이달주, 양해근
음악 : 이달주, 석정순
각반 담임
유치부(남여 합반) : 주은덕, 장한나
남1 : 강순봉 남2 : 나반석 남3 : 채규일 사범반(합) : 석정순
여1 : 장은숙 여2 : 정옥선 여3 : 서현순
○ 시간표
ⅰ. 개회 예배 : 찬송, 기도, 성경 봉독, 설교, 기도
ⅱ. 분반 공부 : 출석, 헌금, 공부
ⅲ. 전체 합반 : 각반 성적 보고, 생일 축하, 우승기 수여, 표창
ⅳ. 광고, 찬송, 기도, 행진(풍금 반주)-“돌아갑시다”(노래)
※ 직원 회의 : 주일 일과 마친 후
② 주일학교 (장년부) 조직
교장 : 하위렴, 부장 : 고성모, 서기 : 신덕칠
구역 책임자 (심방, 구역 전도, 관리)
ⅰ. 보덕, 산월 : 임영호, 라반석.ⅱ. 상리, 차상리 : 최찬경
ⅲ. 지경(백마, 우덕) : 양해근 ⅳ. 지경(만자) : 최흥서, 강순실
ⅴ. 소차 : 김우봉 ⅵ. 하리 : 윤응칠
ⅶ. 내상 : 최재선 ⅷ. 발산 : 신덕칠
ⅸ. 통사 : 채규일 ⅹ. 복교리 : 이원석
※ 구역 책임자의 책임 사항
ⅰ. 매주 토요일에 자기 구역 교인들을 한 번 심방한다. 주일 아침에는 출결 사항을 확인하여 서기에게 보고한다.
ⅱ. 구역 책임자의 보고를 종합하여 서기는 공부 시간에 전체 출결 사항을 보고한다.
ⅲ. 장년부 교재는 서회 발행 “주일 학교 월보”를 구입하여 활용한다.
ⅳ. 부장이 분주하거나 유고시에는 서기가 교수한다.
위의 책임사항은 1926년(신년 초)부터 시행한다.
③ 하기 아동 성경학교 개설(開設)
때 : 1925. 7. 27(월)~8. 9(일) 14일간
곳 : 지경교회 예배당, 만자산 회관
특별 강사 : 채아녀 선생
교육 대상 : 보통 학교 학생(주일 학교 학생 중심으로)
교육 과목 : 성경, 동화, 유희, 공작, 게임 등
※ 특별 강사 담당 : 연속 동화, 게임, 유희
저녁 시간 : 교사 강습-교수법, 아동 심리, 내일 프로그램 준비
○ 강사 소개
채아녀 선생은 성산면 고봉 채씨로 기전 여학교와 선교부 별과(교육) 2년을 마치고 지경 교회로 3개월 실습 파견되어 최흥서 장로 댁에서 숙식을 하고 교회 봉사를 하였음.
선교부의 유치원에서 근무하다 해방 후 미군 군종실 주선으로 도미하였음.
1989년 뉴욕 한인 교회에서 필자와 만나 대화하면서 자기 집 아파트로 초대하여 누렇게 낡아진 서류 꾸러미를 내놓고 회고담을 나누며 기록해 둔 것임.
처음 열린 하기 학교는 당초 계획으로는 1주일간 이었으나 대성황으로 1주일을 연장하여 주일 학교 학생 출석수는 처음 이틀간은 50~60명이었으나 그 후로는 200~300명으로 늘어나 장소가 좁아 부락 회관과 분리 수용하는 등 대 성황이었다. 특히 강사의 연속 동화 “집 없는 아이”, “암굴왕” 과 게임 등은 대 인기였다.
하기학교 기간의 교사 훈련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차후의 주일 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채아녀 선생과의 작별 인사는 지경 역에 100여명의 아이들까지 나가 참 정겨운 광경을 이루었다. 그녀는 그때의 지경 역전 광경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고 하였다.
그녀는 뉴욕 시내의 독신노인 아파트에 살면서 필자와 교신하면서 고향의 그리움 속에서 매년 빼놓지 않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았었는데 2005년 성탄카드를 마지막으로 103세로 소천하셨다.
그녀의 서한에 오르는 이름은 최흥서 장로, 장한나 아줌마, 이순길 선생, 양요한(해근 장로) 등 다채로 왔다.
④ 어린이용 찬송가의 애용 권장
○ 복음 주의 선교사 통합 공의회(재한 장·감 교회)는 1910년대에 주일 학교 어린이들이 부를 수 있는 찬송들을 편찬하였는데 여러 곡을 넣었다.
(예) 예수 사랑하심은(190장), 그 어리신 예수(71장), 우리 구주 나신 날(65장), 온유하신 예수여(60장) 예수께서 오실 때에(258장), 나의 사랑하는 책(285장),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183장)
○ 남궁억 선생의 민족 교육 찬송
지경 주일 학교가 힘써 부른 민족 교육의 노래들
ⅰ) 꽃피는 삼천리 방방 곡곡이
조선의 아가야 우리 아가야
손과 손을 잡고서 손과 손을 잡고서
꽃피는 동산에 봄마중 갈거나
얼사얼사 좋구나 앞날의 조선은 우리의 것
얼사얼사 좋구나 절시구 좋구나
ⅱ) 거친 산 등성이 골짜기로
봄볕은 우리를 찾아오네
아가는 움트는 조선의 꽃
아가는 움트는 조선의 꽃
ⅲ)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훈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 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빛 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조선족
백화가 만발하는 무궁화 동산에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백천만 화초가 웃는 것같이
⑤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 참가
주최 : 전북 노회 군산 동남지방 시찰회
때와 곳 : 1926. 3. 17~19(3일간), 지경 교회
강사 : 곽진근 목사
교사 참석수 : 약 80명(매일 평균)
※ 강사 숙식비 및 사례는 시찰회가 담당하고 강사 및 인솔 교역자들의 중식비는 지경교회가 부담함.
※ 지경 교회 주일 학교 교사 참석 수 : 1일 평균 16명
⑥ 하기 학교 강습회 참가
때 : 1928. 6. 27~29
곳 : 이리 교회당
강사 : (하기학교) 전국 총무 김형식 선생
참가 교사 : 86명
⑦ 제 1회 전북 노회 주일 학교 대회(종교 교육부 주최) 참가
때와 곳 : 1930. 3. 4~10, 전주 신흥학교
특별 강사 : 정인과 목사(조선 주일 학교 연합회 총무)
곽진근 목사(노회 종교 교육 부장)
김종만 교수(협성 신학교 교수)
등록 회원 : 300 여명
주요 행사 : 노천(운동장) 강연-1,000 여명
연합 예배-주일 학생 3,000 여명, 일반 교인 1,000 여명
음악, 가극, 시내 행진. 기타 대성황
지경 교회 교사 참석 : 5명
※ 곽진근 증경총회장 : 1941년, 45세에 소천
(3) 교회 청년들의 교육과 활동
① 기독 청년 면려회(CE) 창립 총회
창립 총회
1922년 2월 19일(주일) 후7시 30분
지경 교회당. 참석 회원 28명
사회 : 김옥여 장로
기도 : 고윤팔(안수집사)
성경 : 딤후 2:3
설교 : 십자가 군병이 되자(김옥여 장로)
찬송 : 십자가 군병 되어서(353장)
임원 선거
회장 : 김옥여부회장 : 임영호 집사
서기 : 고윤팔 부서기 : 신백선
회계 : 양해근 부회계 : 신덕철
고문 : 부위렴, 최흥서
전도부장 : 최찬경 차장 : 최재선
지육부장 : 고윤팔 차장 : 채규일
계사부장 : 임영호 차장 : 김우봉
사교부장 : 신백선 차장 : 강순실
음악부장 : 양해근 차장 : 최양선
※ 전주 서문밖 교회 청년 면려회장 김가전 장로(목사, 전북중 교장, 전북 도지사) 축사 있었음.
결의 사항
○ 매월 첫주일 헌신예배 실시함
○ 매월 1회 통상 예배와 토론회, 간담회 하기로 함.
○회비는 매월 5전으로 하고 빠지지 않고 납입하기로 함.
※ 통상예배, 헌신예배 자로는 회지 “진생”에 있음
지경교회 청년 면려회는 이미 조직되어 일정 수준의 운영을 해왔다. 특히 기미년(1919)의 독립 만세 운동에서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점차로 삭으라드는 듯하였고, 상당 기간 침체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청년회를 발전시켜 어려운 시대에 교회의 활력소가 되게 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의논하고 협의한 끝에 청년회를 개편하고 좀더 젊은 층을 많이 흡수하도록 결정을 하였다.
※ 청년회 임원을 젊은 층 특히 다른 기관과의 중복을 되도록 피하기로 함.
② 제 5회 정기 총회(지경 기독 청년 면려회)
때 : 1926년 5월 2일 저녁 헌신예배 후
주제 : 평화(롬5:13)
설교 : 임영호 집사(회장)
공동 설교자 :
양해근 :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그리스도(엡2:14)
채규일 : 신앙으로 얻는 평화(롬5:1)
임원 선정
고문 : 고성모 장로, 최흥서 장로
서기 : 강순봉 부서기 : 최양옥
회계 : 신덕칠 집사 부회계 : 윤응칠 집사
전도부장 : 채규일 집사 차장 : 최재선 집사
지육부장 : 강순실 집사 차장 : 강홍선
계사부장 : 임영호(겸) 차장 : 최순열
사교부장 : 이원석 차장 : 김우봉
음악부장 : 석정순 차장 : 라반석 집사
결의사항
○ 매월 첫주일 청년 면려회 헌신 예배 하기로 함.
○ 청년 면려회 잡지「眞生-진생」을 정규 구입하여 회의 운영 지식을 넓히기로 함.
○ 중앙에 연락하여 청년회 강습회를 개최하기로 함.
○ 헌신 예배 시에는 회원 호명을 하면 각자 성경 한 구절씩 암송하여 대답으로 하기로 함.
③ 면려회 강연회 및 강습회 개최
면려회가 정체를 벗어나 더욱 활력을 찾기 위하여 면려회 본부에서 파송한 강사를 모시고 집회를 가졌다.
(ⅰ) 지경 교회 기독 청년 면려회 집회
때 : 1927. 4. 10(주일) 저녁 8시
곳 : 지경 교회 예배당
특별 강연 제목 : 면려회의 목적과 회원의 할 일
강사 : 김경호 씨(면려회 전국 연합회 임원)
※ 당일 예배 설교는 강연으로 대체함.
(ⅱ) 면려회 강습회
때 : 1927. 4. 11(월) 오전 11시~오후 4시
강사 : 김경호 선생, 김가전 장로(전북 노회 면려 회장)
강습 내용
1. 면려회 운영의 이론과 실제 : 김경호 씨
2. 회의 진행법, 토론과 토의 : 김경호 씨
3. 면려 청년회가 하여야할 일 : 김가전 장로
※ 당일 등록 회원의 점심 대접은 지경 교회가 담당함.
眞生(진생) 1927년 5월호 참조.
④ 전북 지방 기독 청년 면려회 조직
때 : 1925. 1. 6 후4시
곳 : 전주 보이열 선교사 댁
회집 대표자
전주서문밖 : 김가전,전주남문밖 : 오원퇴
김제읍 : 윤식명 군산개복동 : 박상건
지경 : 고성모
임원 선임
회장 : 김가전 부회장 : 박상건
서기 : 오원퇴 회계 : 양해근
고문 : 윤식명, 고득순, 홍종필
※ 규칙 : 면려 연합회 규칙을 준용함.
⑤ 기독 면려회 조선 연합회 제 1회 총회
때 : 1928. 7. 26
곳 : 경성시 외 연희 전문학교
사회 : 안대선 총무(앤더슨 선교사)
개선된 임원
회장 : 이대위 부회장 : 오근묵서기 : 이양섭, 김경호
총무 : 안대선, 홍병덕회계 : 최석주, 임성록
계사부장 : 김가전 부원 : 전북 양해근 외 각 노회별 각 1인(20명)
지육부장 : 전필순 부원 : 이대위, 이용설, 최석주, 이기태, 유동
고문 : 경기 차재명, 전북 홍종필 외 각 노회 1인씩(합 20명)
결의 사항
-. 전선(전국) 각 면려 회원 각 1인당(1년) 10전씩 납입, 각 개 지회가 내년 5월 말일까지 본 연합회로 송금할 것.
-. 각 지회는 각각 계독부(戒毒部)를 두어 금주 단연을 철저히 실행 장려할 것.
-. 내년도 총회 총대는 지회마다 2인, 지방 연합회 1인씩 참가하되 필히 천서와 보고서 및 건의안을 작성하여 지참할 것.
-. 본 연합회가 경영하는 “眞生(진생)”을 더욱 확장할 것(보급할 것)
(기타 생략)
지경 교회의 청년 운동은 체계적인 조직체로는 1922년에 면려회(勉勵會)-(CE -Christian Endeaver)로 시작하여 김옥여 장로가 1~2대 회장을 역임한 후에 작고하시어 임영호 장로가 운영하였다. 기독 청년 면려회란 말이 청년회이지 아래로는 10대 후반의 중학생부터 50~60대의 노년층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남·녀 신도회와도 같은 성격의 조직체이다.
기독 청년 면려회란 글자는 그대로 기독 청년으로서 힘쓰게 하는 모임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헌신 예배, 통상 예배를 통하여 성경을 읽고 말씀을 증거하는 훈련을 하고 신앙을 연단하고, 회의·토론·토의를 통하여 표현력, 발표력를 기르고 훌륭한 크리스찬이 되도록 훈련하는 조직이다.
다른 교단, 교회도 그러리라 생각되지만, 지경 교회에서 집사, 장로, 전도사가 된 사람 중에서 면려 청년회의 수련을 안 거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면려회가 있던 시절에 한한 말임)
성경 학원, 도 사경회 등이 평신도의 신학 입문과정이라면 면려 청년회는 평신도의 신앙 생활 훈련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경 교회 직원 중 면려 청년회를 통하여 명성을 높인 분 중에 대표적인 분은 제 5대 회장이었던 양해근 장로일 것이다.
그분은 영명 학교 중등부만을 나온 중산층에 속한 분인데 성품이 온유하고 성실한 분이어서 대하는 이마다 존경하거나 호감을 갖게 하는 매력 있는 분이었다. 면려청년회장을 몇 년을 했는지는 기록을 한참 찾아야 알 수 있을 정도다.
일정 말엽에 면려 청년회가 해산되고 광복 후에 교회 청년회로 재출발할 때, 1945~47년까지 역시 회장이 되셨다.
전북 지방 면려 청년회 회계를 맡은 후, 회장인 김가전 회장과도 친구가 되어 전국 연합회 제 1회 총회에도 동행하게 되어었고, 김가전 장로가 계사 부장, 양장로는 그를 돕는 전북 대표 계사 위원이 되기도 했다.
양해근 장로는 전북 노회→ 군산 노회→ 전북 노회→ 군산 노회(기장)로 노회가 이합을 반복하는 동안, 노회 회계 12회, 노회 대표 총대 18회를 맡는 무거운 책임을 다하였다.
그가 남긴 미담은 수없이 많은데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4) 찬양으로 봉사하는 성가대
① 지경교회 찬양대—제1기(1926년 조직)
대장 : 고성모 장로 (부) : 신덕칠 집사
간사 : 양해근 집사
반주 : 석정순 선생
특별지도 : 최영순 선생
고문 : 부위렴(당회장)
대원(남) : 강순실, 채규일, 강순봉, 이우석, 이원석
(여) : 최정애, 장은숙, 서현순, 정옥선, 김명은, 강현순, 이달주(부반주)
② 지경교회 찬양대 (제2기—1933년 재편)
고문 : 고성모 목사 반주 : 석정순, 이달주 선생
대장 : 양해근 장로 총무 : 채규일 집사
대원(남) : 강순실, 강순봉, 최양선, 최양옥, 윤광옥, 라반석, 이원석, 김학신
(10명)
(여) : 강순금, 임순덕, 최영훈, 양정순, 이순애, 고신애, 강신순, 강현례,
고주일례, 강복근, 정옥선 (11명)
(후보생) : 최복순, 최귀례, 유경희, 양정은 (4명)
③ 찬양대 조직에 얽힌 일화 한 토막
한국의 저명한 여류 음악가의 한 사람이 된 최영순씨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녀가 교또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재학중인 1925년 12월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휴가차 고향에 돌아와서 주일 대 예배 때 특송을 하였는데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최영순씨의 아름다운 찬송소리에 사람들은 한참 숨도 멈춘 듯 있다가 큰 박수들을 쳤다.
노래를 마친 후 인사를 하면서 여러분도 열심히 연습을 하면 좋은 음성을 낼 수 있고 좋은 찬양이 있으면 더욱 좋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
금번 한 이십여 일, 집에 있는 동안에 여러분이 원하시면 다같이 음악 공부를 하여 찬양대를 조직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자기는 고향 교회를 위해 여러분을 도와드리고 싶다고 하여 다시 큰 박수를 받았다.
그 다음날, 바로 당회가 모여 그 일을 상의하였고 매주 월~토요일 6일간 저녁 6시부터 1시간씩 기초 공부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희망자들을 열심히 모집하였다. 처음에는 마음이 있어도 부끄러워서 못 나오는 사람이 많았으나 점점 회원들이 많아져 1개월 후에는 찬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찬양대는 점점 자신이 생겨 시골 교회의 찬양대지만 손색 없는 좋은 예배의 도움이 되었고 지경 교회의 자랑스러운 모임이 되었다.
최영순씨에 이어서 석정순, 이달주 반주자들이 열심히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 좋은 찬양 대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선교부 주최 성가 경연 대회에서는 입상도 하였다.
이일을 위하여 음악에 조예가 있는 고성모 목사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경 교회 출신 성악가로는 최영순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최여사 직계로 신경욱, 신경준 형제 등, 이우석 목사계의 이용일, 이봉일 형제들, 양장로님 집 양정신, 외손녀인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 교수 정영자, 고규환 목사의 두 아들로 한국을 대표하는 테너, 한양대 음대 학장인 고성현, 그 제자인 양선웅 등으로 이어진다.
5) 민족의 수난의 실상(實相)과 전망
조선에 대한 총독 정치가 일제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그들의 치밀한 계략대로 되어가 조선 반도는 명실 공히 일본의 대륙 침공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일본의 전진기지를 통하여 대륙 침공의 속도를 더욱 높혔다. 그들의 야욕을 부풀려 폭주를 제어할 능력을 잃은 듯하였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군부의 일당이 일으킨 것이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이긴 것이 되지 못하였다.
만주사변은, 일본에 이로울 게 없는 중일 전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둘째로 이 사변은 일본을 국제적으로 고립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쓰라—타프트 밀약에 따른 미—일간의 밀월(蜜月도 깨졌다. 영—일간의 우호 관계도 깨어졌다.
중일 전쟁이 전개되면서 일제(日帝)는 큰 난관에 부딪졌다. 그들은 명치유신 후 처음 겪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동안 승승장구하던 침략의 의기는 꺾이고 일본의 국가적인 힘의 한계에 이르른 것이다.
이 단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맹을 조직하여(1937) 국민들의 자발적인 단결과 결의를 다지는 방향으로 국민 총력 연맹까지 조직하곤 하였다.(1940)
그동안 안태하던 조선총독부는 이 방향에서 조선의 내지화, 내선일체를 표방하며 국난 극복에 최대한 이용하려는 정책을 추진한다.
이를 3종류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황민화(皇民化) 정책
① 황국 신민 서사 제정 (1937)
②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구성(1938. 1 )
③ 창씨 개명(1939.11~1940. 2. 실시)
④ 국민 총력 연맹 조직(1940. 5)
(2) 군수 물자 동원
① 농산물 공출제 강제 집행(1941. 8)
② 금속류(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공출 강제 징수(1942)
③ 미곡 강제 공출(1944)
(3) 군,병 모집(지원병→징병제)
① (총독부) 학도 정신대 조직(1931)
② 청년 특별 연성소 입소식(1942)
③ 학도병제 강행(1943. 10)
④ 조선 육군 지원 병령(令)(1938)
⑤ 징병제 실시(1943. 3. 1)
(4) 대(對) 교회 관련 사안
① 신사(神社) 참배(參拜) 결의 강요(1938)-제27회 총회 가결
② 신사 참배 거부 학교-자진 폐교
③ 조선 장로교단 해산-일본 기독교단으로 편입(1943)
④ 신사 위패 봉안(奉安) 강요-천조대신(天照大神) 위패 봉안
(5) 조선장로교단을 통한 신앙 억압
① 구약성경과 신약(요한계시록)의 사용 금지
유대교 시온이즘과 종말론을 배격하기 위한 조치로 “조선 장로 교단 실천요목”-교회의 혁신“에 따른 지시로 강행.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비기독교적 유대사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그 적당한 해석 교본을 편찬할 것”
“예배할 때에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치 말고 4복음서만 사용할 것과 집회시간을 단축하여 주 1회만 집회하여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할 것.”
② 찬송가의 수정과 삭제
(총회 종교 교육부 긴급 통보로 신편 찬송가 일부 삭제의 지시를 내렸다.)
때 : 1941. 10. 2
“본 장로회 전용인 신편 찬송가 제54장, 220장, 245장, 395장은 현 체제하에 불합하므로 자진 금지하는 바이오니 각 교회 담당자는 주의하여 예배시나 어디서나 전혀 부르지 않도록 하시고...
․제54장 만왕의 왕-가사가 천왕제에 상치됨.
․제220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가사의 투쟁적 반일성
․제245장 예루살렘 금성아-시온이즘과 가사의 맥이 통함
․제385장 종소리 크게 울려라-현세 부정적인 종말사상, 반전사상
ⅰ) 전장 삭제(1942. 1) (총 12장)
․제32장 예수의 이름 권세
․제33장 면류관 가지고 주 앞에 드리세
․제54장 영화롭다 주를 보라
․제69장 그 밝고 환한 밤중에
․제201장 세상과 마귀 합하니
․제20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제206장 피란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제222장 십자가 군병들아 주위해 일어나
․제224장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제286장 영원한 문아 열어라 새 임금 들어가신다
․제337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제398장 예수의 이름 권세여
ⅱ) 부분 삭제 (총 9장 12구절)
① 제38장 3절② 제52장 4절③ 제86장 1절④ 제86장 2절
⑤ 제273장 4절⑥ 제292장 2절⑦ 제355장 4절⑧ 제292장 2절
⑨ 제355장 4절⑩ 제374장 3절⑪ 제385장 2절⑫ 제395장 4절, 5절, 6절
ⅲ) 가사 자구 수정 (총 41장 90절)
이에 해당하는 대상으로
① 왕권 칭호 ② 투쟁적 용어 ③ 통치적 용어 ④ 국민의 개념
⑤ 역사관 등의 상치점
※ 신도들의 찬송에는 지시대로 먹칠, 쪽지를 붙이는 등 만신창이 된 찬송을 사용하였음.
③ 교회 예배 횟수의 제한
교회 주일 오후 및 야간 집회, 수요 기도회의 금지 (주일 낮예배 1회만의 예배 허용)
※ 1943년 9월-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④ 교회당의 통폐합 조치
(근접한 교회의 합병, 미약한 교회의 강화, 여타 교회의 매각 처분)
예; 지경—발산의 재결합, 개복동—동부—구암—복음교회 통합, 이리제일—
이리중앙, 원당—신관, 동련—신황등.
(6) 지경 교회가 겪은 실제 사례(事例) 들
일제 36년의 수없이 많은 죄악상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고 우리 교회와 직접 관련된 것만을 적어보기로 하겠다.
① 최문환 목사 위임식
때 : 1943. 5. 23(주일 오후)
佳山 (최) 문환 목사 위임 식순
국민의례 -. 묵도 -. 찬송 ------
사회자 : 군산 시찰장 牧山(마끼야마-李) 창규 목사
※ 국민의례(國民儀禮)
가. 국가 봉창(國歌 奉唱)
일본 국가 “가미가요—천황의 세대(世代)는 조그만 돌멩이가 바위만큼 커져서 이끼가 낄 때까지 --- 천대(千代), 8천대까지 이어가리라!----
나. 궁성 요배(宮城 遙拜)
모두 동쪽(해 뜨는 곳)으로 향하여(구령에 의하여) 경례
- 일본 동경의 궁성(宮城-皇居)이 있는 곳, 동쪽 방향(方向)
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천황나라(日本) 신민의 맹세
[번역]
-. 우리들은 황국 신민이다. 충성으로 군국(君國)에 보답한다.
-. 우리들 황국 신민은 서로 신애 협력하여 이로써 단결을 굳건히 한다.
-. 우리들 황국 신민은 인고(忍苦) 단련, 힘을 합하여 황도(皇道)를 선양(宣揚)하련다.
라. 묵 도(전몰 장병의 명복과 제국 장병의 무운 장구를 비는 묵념)
② 전북 교구 군산 지구회 창립 총회
때 : 1943소화(昭和 8)년 8월 3일 10:00~16:00
司會 : 전북 교구장 金世烈雄(김세열 목사)
주관자 : 佳山 文煥(최문환)
서 기 : 良原 海根(양해근)
※ 당일 점심은 본 교회가 제공했으며 찬양대 찬양함.
③ 주일 밤 예배 중지 명령 시행(교단 본부 영달)
※ 교단 본부 令達 제 1호 “당분간 주일 밤 예배를 정지할 것”에 따라 소화18년 8월 29일에 주관자가 이를 선포키로 함.
④ 비행기 100대 헌납에 관한 성금
소화 18년 10월 12일 조선 국민 총력 운동의「비행기 100대 헌납 운동에 관하여 “일금 5 환야”를 富本光一(나광일) 집사에게 위임, 송금키로 함.
⑤ 성탄절 주일 낮 예배외 모든 행사 중지
⑥ 해군 휼병(恤兵)금 헌납
1943년 12월 18일 대야 주재소(지서) 지시에 따라 성탄절과 연말에 있어 해군 휼병금(위문금) 일금 20원을 헌납함.
⑦ 학생 입영 축하 예배
상부 지시(총력 연맹 지시)에 의하여 학병 입영 축하 예배를 드림
(때 : 1944. 1 . 23.)
⑧ 전북 교구회 목사 근로 보국대
때 : 1944. 3. 1~3. 5 전북 교구회 목사 근로 보국대에 가산(佳山) 문환 목사 출두하여 3월 10일에 귀가함.
⑨ 비행기 헌납금
1944. 4. 2. 비행기 헌납금 70원을 헌납함.
전북 교구회 목사 근로 보국대에 가야마(최)목사, 1944. 6. 10~20, 옥구 불이(不二)농촌 강산촌(岡山) 주민 중 입영 및 응소자 가정의 농번기 작업에 협력하고 귀가함.
⑪ 종교 간부 연성회 참가
주최 : 국민총력 전북도연맹
때 : 1944년 11월 21일~25일
곳 : 김제군 금산면 금산사
출두 : 가야마 (최) 목사
⑫ 조선 전시 종교 보국회 발회식
1945 3. 18. 10:30~ 총독 고사(告辭) 철저 주지 건, 상회의 통첩에 의한 식순 집행
⑬ 전몰 장병 위령제 (1945. 4. 1.(주일) 11:00
1. 국민의례(① 국가 봉창(奉唱), ② 궁성 요배(宮城遙拜), ③ 필승 기원 묵도)
2. 찬송 252장
3. 기도 : 가야마 목사
4. 성서 : 요한 12:24, 25
5. 식문(式文) 낭독
6. 황국 신민 서사
7. 우미 유까바(바다에 간다면)- 군가
⑭ 궐기대회 (45. 4. 8 10:30~ ) 본부 통첩
궐기 신도 대회(부활절 예배, 성찬 예식 거행)
⑮ 군사 원호 강습회 : 1945. 4. 10
최문환 목사 전주 출석
⑯ 본 교회당—군부대가 접수(1945. 6. 27)
만자리 회관 빌림(1945. 7. 1~ )
⑰ 교회 점검 일군 철거
8. 20 오후 4시 30명 전원 퇴거
⑱ 삼일 기도회
수요 예배 겸 교회 수복 결례(潔禮)
6) 국난 극복에 몸을 던진 열사,
지사(志士), 순교자들
(1) 강대옥(姜大玉)-전주고보 퇴학당하다
성격이 온화하고 성실한 강대옥은 강용회씨의 장남으로 수옥의 친형이다. 지경교회 면려회(청년)에서도 대표적인 학생으로 강홍선 선생(당숙)의 지도를 받았다.
전주 고보 2년 재학 중에 광주 학생 사건의 여파로 전주고보 학생들의 거동이 심상치 않아 경찰이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강대옥은 친구들과 협의하고, 상급 선배들과 광주의 울분을 폭발시킬 전주 모임을 준비하고 동분서주하다 발각되어 경찰에 구금되고 이로 인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그의 애국심은 끓어올랐다.
강홍선은 그의 배재고보 편입학을 성사시키고 학업을 마친 후, 강대옥은 보성전문에 입학하여 열심히 학업과 축구 선수 생활을 하던 중, 아깝게도 병마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전주 경찰서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의 재발에 1938년,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온 교회가 슬픔에 잠겼었다. (1914~1938)
(2) 이요순(要淳)—일어 시험 거부, 동맹휴학으로 퇴학되다.
이요한 장로의 동생인 요순은 영명 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 고보에 입학하였다. 평소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시골서 올라갔지만 3학년 급장이 되었다.
아주 못된 일어 선생이 있어, 입버릇처럼 조선, 조선 사람을 폄하하여 학생들과 말싸움이 자주 있었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일어 시험 거부 사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요순은 학급 반장으로 당연히 앞장섰다.
그로 인해 그는 퇴학 처분되고 그는 경찰서에도 여러 차례 소환 조사를 받았다. (1920)
그는 동대문 밖에 있는 근역사연구회(槿域史硏究會)-(민세 안재홍 씨 주간)에 열심히 출입했는데 거기서 알게 된 고창고보의 역사와 독일어 교사인 김교문 교사의 지도로 고창고보에 편입하여 졸업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의학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어 큰형 용재씨의 함흥병원에서 일했으나 그도 역시 경신고보 시절 경찰에 불려 다니며 받게 된 고문과 폭행의 후유증으로 만성 지병이 되어 의사된 지 4년도 넘기지 못한 채, 폐결핵으로 작고했다.
필자가 군산중학교 3학년 시절, 김교문 선생이 군중 교장으로 부임했는데 교장실로 찾아가 요순 숙부한테 들은 말을 하며 인사드렸더니 깜짝 반가와 하며 옛 이야기를 하셨다.
“그는 참 성실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좋은 학생이었는데 참 아깝다.”
고 하면서 그가 좀 건강하게 오래 살았더라면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귀한 일을 많이 했을 텐데 참 애석한 일이라고 하시고, 가끔 나를 불러 특별한 훈도를 하기도 하였다. 결국 뜨거운 애국심이 일경의 폭력을 맞게 하고 애국심이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상리 최종희씨는 통사리 고란엽씨에게로 시집가 2년 뒤엔 귀한 옥동자를 얻었다. 그들은 귀한 아기를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기로 결심하고 정성을 다하였다. 1913년의 일이다.(출생)
고 규 영 |
한 겨울 12월이 닥쳐왔다. 불안해하고 있던 규영이 집에는 난데없이 김제 경찰서에서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규영이 건강이 좋지 않아 방면하니 속히 데려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소란 떨지 말고 조용히 치료하고 있으라는 것도 첨부되었다. 급하게 김제서에 출두한 규영이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고 찍으라는 도장만 찍고 중환자처럼 늘어져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30리 길을 어떻게 온지도 모르게 돌아왔다.
가석방으로 집에 데려온 아들, 갈만한 병원도 없고, 정성을 다하여 한약을 다려 먹이고 했지만 집에 온지 7일 만에 숨지고 말았다. 온 식구들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1932년 12월 21일의 일이다.
고성모 목사를 비롯하여 신덕칠, 임영호 장로, 양해근, 채규일 집사와 많은 신도들이 모여 정성을 다하여 엄숙한 장례를 치뤘다. 모두들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빌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광주 학생 사건의 여진은 전주로, 이리로 그리고 수원으로 퍼지는데 긴장한 일제 경찰은 예비 검속에 나섰고, 수원 농대(당시는 고농)에서만도 7~8명이 체포되었으며 구속된 규영이도 주모자나 동료 이름을 불어댔으면 훈계 방면되었을 텐데 끝까지 내용을 불지 않고 호되게 당하게 된 것이었다. 자기가 희생 될지언정 친구 동지들을 지켜주겠다는 눈물겨운 신념과 애국심이 그런 슬픈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었다.
그 당시 그 학교의 선배요 강사였던 현신규 장로(수원교회)는 대략 이상과 같이 이야기하며 눈물짓는 것이었다.
※ 그는 건국훈장 추서장이 추서되었다—2008. 8. 15
(4) 이우석(禹錫) 목사
이우석 목사는 부친 이선명과 모친 최선자의 장남으로 1901년에 태어났다. 그가 자라난 복교리(상리부락)는 글자 그대로 큰들 대야(大野면)의 남쪽 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넓은 벌판 10리 가까이 되는 교회 길을 소년 시절부터 그는 엄마 손을 잡고 내왕하며 믿음의 세계에 접하게 되고 13세 때에는 예수를 영접하게 된다.
어린 소년이지만 부위렴 선교사의 또박또박 들려주는 설교 말씀과 신비스럽게 들리는 트럼펫 연주 소리는 그의 심금을 온전히 사로잡았다.
1918년에는 영명 학교 보통과를 마치고 바로 평양—숭실 학교(고등과)에 유학하게 된다. 그가 평양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총명과 성실성 그리고 온전한 신앙을 꿰뚫어 보고 그를 큰 일꾼으로 키우려는 부위렴 선교사의 적극적인 주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23년에는 숭실 학교(고등과)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아무리 부위렴 선교사의 주선이 있었다고 해도 무일푼(자비)으로 유학길에 오른 그에게는 숙식비, 학비 등을 마련하는 일은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축복을 그에게 베푸셨다! 그가 부딪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흘린 눈물, 땀, 노동… 진지한 기도 그런 모든 시련과 간구를 통해 그를 주의 종으로 굳건히 세우시고,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고,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고난에 참여하는 애국 애족의 열정을 키우셔서 순국 순교의 대의(大義)를 이룩하게 하신 것이다.
이우석 목사는 부위렴 선교사가 고안한 “천막 전도”의 새로운 방편에 동반하는 복음 성가단 조직에 그 일원으로 참여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구성원은 12명인데 그 당시의 사진을 보면 현제명, 나귀용, 송기수, 양관대, 이우석 부위렴(단장)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우석 목사의 지혜와 타고난 소질은 바쁜 일상의 공부, 음악 연주(트럼펫 연주)를 병행하면서 달인(達人)의 경지에 이르렀다. 복음성가단의 연주와 부위렴 선교사의 강설(講說-강연과 설교), 연주와 간증, 잘 꾸며진 순서에 따라 압도된 청중들의 분위기는 가히 손쉽게 짐작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우석 목사는 귀향하여 고향 교회, 최찬경 장로의 딸인 최금례와 결혼을 한 후, 부위렴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그의 선교 사업의 반열에 서게 된다. 1926년에 남원읍 교회를 단독 목회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 목회는 그리 길지 않았다.
1927년 그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 수업(修業)과 순회 전도를 지속하여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장수읍 교회, 장계 교회, 고창읍 교회, 전주 동부 교회를 9년 동안 순회 목회를 하였다.
1936년 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북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김제 죽동 교회에 청빙을 받아 시무하는데 갑자기 신태인 화호교회로 이동하게 되고 다시 익산군의 웅포교회, 제석교회, 대붕암교회(이상 부위렴 목사 구역)에서 공동 시무 하였으며 나포, 서포, 성덕, 자양교회 등의 당회장직도 맡았다.
1939년 10월 군산노회 창립(분립)시는 동북시찰위원, 준비부(서기), 재판부(서기), 정식 헌금부(서기) 등 그리고 나포, 서포, 자양, 성덕 등의 당회장, 제석, 대봉암, 웅포의 담임을 맡으며 부위렴 선교단의 천막 전도에도 합류하여 타고난 재주와 정열을 모두 바쳤다. 노회의 주요 사업부서의 서기를 몇 개 겸임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능력은 노회 공천부에도 잘 알려졌던 것 같다.
그는 전남노회로 이명하려 했으나 다음 회기까지 보류되고 제 2회 제 2차 임시노회(40년 8월)에서 겨우 허락되어 전남 노회의 땅 끝 마을이라는 해남읍 교회를 시무하게 된다. 해남 제단에서 주의 종 이우석 목사는 외쳤다.
“애급 땅에 종살이 신세가 된 아스라엘 백성들을 실망의 광야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이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
나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교인들에게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사랑을 의지하여 소망을, 그리고 해방의 축복을 받자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총독부 관헌이나 일제 침략자들을 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엄위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불의를 저지르고 있으니 회개하고 용서받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칠 줄 모르는 위로와 축복의 말씀,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고 강조하는 설교에 전 교인이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때에 이 목사의 트럼펫은 하늘의 축복과 위로의 음향으로 회중을 감동시킨다.
이 장엄하고도 은혜가 넘치는 예배의 소문은 속속히 널리 퍼지고 해남서의 형사들에게 알려지는데도 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재 형사들의 감시와 면밀 검색으로도 별로 책잡을 것이 없지만 교인들에게 미치는 그의 언동에 그들도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마침내 구속 문초하기로 한 것이다.
해남 경찰서의 끈질긴 심문과 수사에도 이 목사는 흔들리지 않고 급기야는 고문과 유혹을 반복하면서 그를 뒤흔드는데도 성서적인 정론(正論) 답변 이외에는 일언도 하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형사들의 특성이 나타나 심한 매질과 고문으로 대응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별의별 간교한 수단을 다 써서 필요한 죄명을 붙이려 했지만 헛수고를 반복할 뿐이었다. 심지어 최금예 사모를 데려와 그를 회유해 보았지만 최권사는 오히려 이 목사를 격려하며 ‘아이들 걱정은 다 내게 맡기고 소신껏 성직자의 대의(大義)를 지키시라.’ 는 놀라운 응원과 격려를 하고 태연하게 나왔다.
형사들의 저열(低劣)한 고문 행위에 흥분하여 뜻밖에도 혀를 살짝 깨문다는 것이 의외의 상처를 내어 많은 출혈을 하고 쓰러졌다. 의외의 참상에 놀란 경찰은 이 목사를 갑자기 귀가시킨다. 목포 제중 병원을 거쳐, 응급치료만 한 채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게 되어 위급을 면하였다
상처가 웬만치 치유되자 교회 일이 걸려 급하게 해남에 내려와 보니, 교회 임지는 이미 보성읍 교회로 바뀌어져 있었다. 보성읍 교회에서도 완쾌되지 않은 몸이지만 애국 애족 설교와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목회는 지속되는데 대표적인 민족주의 열성 목사로 지목된 이우석 목사는 보성 경찰서의 상시 경계 대상이었다.
보성읍 교회 시무 중 경찰에 계속 시달리면서 발병한 임파선염에 체력은 약화되어 가는데도 무리한 선교 활동은 계속하면서, 부여 홍산 교회 부흥 사경회를 단독으로 진행하던 중, 힘겨워 중단하고 전주 제중 의원에서 배보석 장로의 최선을 다한 치료도 효험 없이 악화되어 본향을 찾는 심정으로 인력거에 몸을 싣고, 풍요한 넓은 벌판을 바라보며 대야면 지경리 본가에 귀가한 후, 1942년 11월 6일 오후 4시, 이우석 목사는 두 동생과 자녀들의 손을 붙잡고 찬송을 부르게 한 후 “믿음 …” 가느다란 목소리가 끊기면서 영원한 본향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발인 예배는 당회장인 이근호 목사의 사회, 본 교회 소학교 스승이자 선배 되시는 고성모 목사의 설교, 배은희 목사의 축도로 엄수되었으며 많은 동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회 서편에 보이는 백마산 기슭에 이 목사는 안장 되었다.
이우석 목사는 지경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와 나라를 위해 민족의 제단에 드린 순교의 제물 “자랑스런 순교자 제1호”가 된 것이다.
유족들 : 부인과 4남 2녀, 모두가 음악에는 전문인 급
미망인 : 최금례(정애) (지경 교회 권사, 작고)
장남 : 봉일 (장로, 인천 장로 합창단 단장)
2 남 : 용일 (장로, 뱅쿠버 한인 장로교회 성가대장)
3 남 : 영일 (원로 목사, 기장 군산 노회)
4 남 : 호일 (공로 목사, 군산 노회 증경 노회장)
장녀 : 영자 (권사, 카나다 뱅쿠버 한인 교회)
차녀 : 광자 (권사, 명성 교회)
(5) 김태성 전도사
— 賀川豊彦(KagawaToyohiko) 교수를 만나 기독교 인도주의(人道主義)와
열렬한 선교 정신을 배우다. —
김태성(泰星)은 만자산 김해김씨의 수장격인 김득수(得水)씨의 장남이며, 김근철(장로, 목사)의 백부이다.
6세 때, 모친인 하동 정부인(선교부 전도인)이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작고하여 계모인 서씨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총명하고 활달하여 때로는 계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군산 영명학교를 중퇴하고 당시 유행하던 중학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일본 고우베(神戶) 신학교 예과(豫科)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우베 신학교에서는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의 대가(大家)인 카가와 도요히꼬교수를 만나 그의 훈도를 받게 된다.
카가와 교수는 아라까와 빈민굴 전도를 1907년부터 시작하였는데 태성은 그를 따라 그 빈민굴 선교에 참여하면서 지도목사의 눈에 들게 된다.
그는 유아이가이(友愛會)라는 관서(關西)지방 노동 연맹의 말단 간부가 되어 미쓰비시(三菱) 조선소 노동 쟁의에도 참여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해독에 묻혀진 빈곤이라는 사회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으로 해결하려는 일에 적극 참여하여 카가와 교수와는 사제간 이상의 동지적 결속이 이루어진다.
노동 쟁의의 해결, 협동 조합, 요양소, 노동자 정당의 설립, 구체적인 노동자․농민 운동, 사회 사업 등에 교수를 도우면서 적극 참여하여 좋은 교육을 받아 신학교를 마치게 된다.
그는 그 동안 고생하면서 체득한 학문지식과 사회 활동 경험을 고향에 가서 봉사하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 일 때도 있었지만 그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일본의 정세가 급변했다. 전쟁은 확대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니 군부와 극우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노동조합은 자진 해산의 형식으로 해체되었다. 복지정책이니 노사협상이니 하는 그 동안의 꿈은 무산되고 군국 주의의 암흑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결심했다. 빨리 귀국해서 고향 사람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알려주고 무서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지도하리라는 것이었다.
가가와 선생은 그의 뜻은 알겠으나, 조선의 사정으로 보아 그의 신변이 위험하니 귀국하는 것을 말렸으나, 그는 잠깐만이라도 다녀오겠다고 하며 귀국하였다.
부산을 경유해서 고향에 와보니, 이곳은 닥쳐올 위기에 아직은 평온한 편이었다.
그는 교회와 마을에서 친지들에게 닥쳐올 위기, 즉 전쟁의 확대로, 이곳에도 곧 징집, 지원병 등으로 강제 입대시키고 징용으로 끌려가게 될 것, 그리고 양곡 공출, 물자 통제 등 무서운 시기가 금방 닥쳐 올 테니 좀 안전하게 피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리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재차 일본으로 떠났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떠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경찰과 헌병대가 그의 본가를 수색하고 체포하려고 비상선을 치곤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한 사람들은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의 동생인 태현, 조카인 근철 등은 만주로 피하여 무순 탄광의 잡역부로 들어가 강제 징용으로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면하고, 종전되자 바로 귀가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을 알게 되고 슬기롭게 처신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김태성은 그의 꿈은 광복 후의 다음 기회로 미루고 교회 제직들에게 짧은 인사만으로 일본을 향해 떠났다. 그의 활동 무대는 다음 광복 후로 미루어진다.
7) 폭풍우 몰아치는 언덕에 선 교회, 어디로 갈까?
(1) 제1회 직원기도회
① 1943. 9. 29 후 8시. 장하원 목사 인도
때 : 소화 18년(1943) 9월 29일 오후8시~9시 10분
곳 : 교회 주택(목사관)
참 뜻있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최문환 목사님의 지경 교회 위임식에는 난데없는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우상숭배 의식의 일부를 예배 서두에 실시하라고 하고, 교단 본부 영달(제1회)이라는 신앙 변절 단체(총회 강제 해산 후 생긴 친일파 총회)의 “앞으로 당분간 주일 밤 예배는 정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일제(日帝)의 교회 말살 정책은 이미 서술한대로 그들의 패색이 짙어 질수록 그들의 광분은 더욱 열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못 모이게 하고, 각종 모금은 강요하지, 군수물자 핑계로 각종 물품은 징발해 가지, 마침내는 쌀 공출까지 그리고 지원병 모병으로부터 징병, 여자 정신대 강제 연행에 까지 조선인의 생명, 재산,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생지옥 상태로 몰고 가니.....
이때에 우리교회는 어떻게 할까?
최문환 목사와 양해근 장로, 최재선, 라반석, 강순실 집사님 등은 고민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한 끝에 “서로 모여 간절히 기도할 것”을 생각해 냈다. 바로 월례(月例) 직원 기도회이다.
월례 직원기도회는 정규 예배 못지않게 엄숙 단정하게 진행 되었다. 교회 직원 전원 15~16명 되는 모임이 최소한 월 1회씩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친교하는 교회, 차례대로 윤번으로 모이는 이 교회 직원기도회가 지경교회의 선교 거점의 안전을 지키는 방풍제가 된 것이다.
기도회가 끝나면 정성을 다한 삶은 계란, 보리개떡, 찐 고구마 등 형편 따라 천국과 지상의 사랑 넘치는 잔치도 열렸다.
처음 날인 제 1회 기도회에는 특별히 장하원 목사님도 시찰회 서기로서 참석하여 좋은 설교말씀을 주셨고 신덕칠 장로의 개회기도, 최문환 목사의 폐회기도로 막을 내렸다.
※ 성경 구절 : 마태25:14~30절
오랜만에 우울증이 풀린 듯, 모두들 기쁨 넘치는 반기는 얼굴들을 하였다.
이 직원기도회는 제 31회로, 해방 20여 일 전인 1945년 7월 23일까지 이어졌다. 하나님의 축복이 이 모임에는 늘 함께 하셨음을 누구나 다 같이 믿고 활력을 얻었다.
그것이 바로 지경 교회의 위기 극복의 저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월례 직원 기도회야 말로 지경교회의 강력한 기도의 원점이다.
② 제 2회(1943. 10. 13. 후 8:00, 양해근 장로 댁)
최문환 목사 인도, 성경 : 마태25:1~16, “오후 5시에 부름을 받은 자”
③ 제3회(1943. 11. 10. 후 8:00, 발산교회 신덕칠 장로 댁)
장하원 목사 인도, 성경 : 고후6:1~10, “하나님의 목적을 응하라”
④ 제4회(1943. 12. 14, 강순실 집사 댁), 최문환 목사, 딤후 10:20,
말씀 : “주의 쓰심 받도록”
⑤ 제5회(1944. 1. 9. 후 8:00~, 하리 윤응칠 집사 댁)
최문환 목사, 하박국 2:3~4, “너희가 기다리라.”
⑥ 제6회(1944.2.1. 후 8:00~, 만자 문동실 집사 댁)
성경 : 마 27:4, “기독의 침묵”
⑦ ※ 제8회(1944. 4. 7. 후 8:00~, 서현순 집사 댁)
성경 : 마태 5:14~16, 최문환 목사, “빛으로 나타나라”
⑧ 제10회(1944. 6. 9. 후 8:00~, 김은동 집사 댁)
성경 : 갈 6:9,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라”, 최문환 목사
◎ 다음 날, 근로보국대로 최목사 불이농촌 일본인 농장으로 떠남.
⑨ 제11회(1944. 7. 15. 후 9시~, 윤응칠 집사 댁)
최문환 목사 인도, 호1:7, “여호와의 구원”
⑩ 제12회(1944. 8. 3. 후 9시~, 목사관)
최목사 인도, 마태 24:13, “견인”, 기도-폐회
⑪ 제13회(1944. 9. 2. 후 8:00~, 양해근 장로 댁)
성경 : 고전 16:12, “대장부의 신앙”, 최문환 목사
⑫ 제14회(1944. 10 .4. 후 8:00~, 통사리 채규일 집사 댁)
군산 동부교회 米倉德信(이재봉 ?) 목사 인도
성경 : 히브리 16:19~26, 35,
“예수 기독의 혈(피)을 힘입어 담대히 성소에 들어가라”
(최문환 목사)
신앙 부흥 운동 - 새벽 기도, 정규적 작정 묵도, 가정 기도회(예배)
성경 공부 - 권면
(2) 발산 교회 분립 예배
때 : 1938년 8월 28일 11시(주일 낮 예배)
곳 : 지경 교회당
※ 발산 교회 분립으로 나가는 교인 수 : 신덕칠 장로, 최규일(안수집사)와 42인
개회
묵도 (송영) : 성가대
찬송 : 제 5장(할렐루야 찬송)
기도 : 최재선 집사
성경 봉독 : 사회자
찬양 : 지경 교회 성가대
설교 : 부위렴 선교사
기도 : 부위렴 선교사
인사 : 발산 대표 신덕칠 장로
기념품 증정 : (교회당 용 계종) 강순실 집사
찬송 : 288장(이전 보다 더 사랑함)
축도 : 부위렴 선교사
오찬 (국수와 떡)
다같이 오찬을 마친 후, 본동 교인들은 두 줄로 서고, 발산 교인들은 그 줄 안으로 한 줄로 걸어 나갈 때 본동 교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송하고 행사를 마침.
발산 식구 40여 명의 분립은 발산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신앙이나 지도력 그리고 뭉치고 단결하는 응집력이 본동 교회 인사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오히려 넘치는 활력으로 보면 나가는 숫자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본동 교회에는 당분간 그 빈 자리 뿐만 아니라 지도력이나 선교의 추진력에 있어서도 큰 공동이 생겨 당분간 이를 메우는데 힘써야 할 것 같았다.
(3) 부위렴 목사 송별 예배
곳 : 지경교회 예배당
주최 : 지경교회, 발산교회 공동 주최
◇ 1부 예배
사회 : 최문환 목사
개회사 : 최문환 목사
송영 : 지경, 발산 연합성가대
기도 : 신덕칠 장로
찬송 : 제 6장(도우심을 구함)
찬양 : 연합성가대
설교 : 고성모 목사
광고 : 강순실 안수집사
※ 부위렴 목사 부부는 상단 준비된 자리에 앉음.
◇ 2부 송별예배
개회사 : 최문환 목사
기념품 및 꽃다발 증정 : 불 목사 내외분에게
기도 : 양해근 장로
축창 : 성가대원 중에서
송별사 : 라반석 안수집사
답사 : (사랑하는 여러분과 작별하면서!) 부위렴 선교사
송별 기도 : 고성모 목사
축도 : 부위렴 선교사
찬송(다같이) : 236장(우리 다시 만나볼 동안)
예배 마친 후 국수와 떡으로 간소한 점심 잔치를 끝으로 부위렴 목사 내외의 선교 사역은 끝을 맺었다.
(4) 최문환 목사 위임식
때 : 1943년 5월 23일 후 3:00~
주례 : 군산노회 시찰장 이창규 목사
(국민의례)
예배
- 묵도송
- 기도 : 김호연 목사
- 성경봉독
- 특송 : 지경교회 성가대원 중
- 설교 : 최상섭 목사
- 찬양 : 본 교회 성가대
- 서약 - 선언 : (시찰장) 이창규 목사
- 권고
(1) 교회에 대하여 : 이수현 목사(개복동)
(2) 목사에 대하여 : 고성모 목사(이리 고현)
- 축문 피력 : 양해근 장로
- 답사 : 최문환 목사
- 송영 : 본 교회 성가대
- 축도 : 이창규 목사
※ 본 행사는 지경 교회 최초의 행사이다. 이전에 고성모 목사가 시무목사(담임)가 된 일은 있으나, 김제 대창교회와 공동 시무하였고, 또 본 교회 장로 출신이라 생략하고 큰 행사는 간단히 기도회로 마친 것 같다.
※ 최문환 목사는 본 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공부를 하였고 강도사 고사를 치룬 후 목사가 된 첫 취임식이었다. 1945년에 동련 교회로 옳겼으며, 전주중안→ 동련으로 이동하였으며, 마침내 기장 제 52회 총회장도 역임한 분이다.
(5) 연합 산상 예배
때 : 1943년 5월 30일 오전 11시~
곳 : 옥구군 개정면 통사리 뒷산
참가 : 지경, 발산 양 교회 어른 210명, 동 어린이 200명
주최 : 지경, 발산 양 교회 합동 주최
1부 예배 사회 : 최문환 목사
묵도, 찬송 281장, 기도 : 신덕칠 장로(발산)
성경 봉독(최문환 목사), 성가(지경 성가대)
설교 : “하나님의 사랑” - 고성모 목사, 기도
특송 : 발산 주교 학생, 찬송30장, 축도(고성모 목사)
폐회, 점심 식사
2부 어린이 예배 및 행사
찬송, 기도, 성경봉독, 별창(발산 유년주교)
아동 설교 : 최문환 목사, 기도
※ 양 교회 유년주교 특별 순서
(합창, 율동, 유희, 독창 등)
- 특별 동화 : 석정인 선생(함흥 영생교회 선생, 석정순 집사 여동생)
※ 매년 5월 꽃주일(어린이 주일) 또는 가을 소풍이 군내 주일학교 연합회 또는 제직회 주최로 있었으나, 최근에는 당국의 압력으로 중단되었으며, 금년에는 새 목사님 취임 축하 예배 겸하여 개최된 유일한 행사였고 매우 성대하고 뜻 깊은 모임이었다. - 일제 말기의 마지막 행사였다.
당일 화창한 늦은 봄, 통사리 뒷산에 두 교회 450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뜻 깊은 야외 예배와 즐거운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두 교회가 분리되어 서로 만나는 기회가 거의 없어져, 길게는 4년여 만에 상봉하는 이들도 많았다. 참 반갑고 뜻 깊은 모임이었다.
(6) 학병 입영 축하 예배
때 : 1944년 1월 25일 후 6시
곳 : 지경교회당
학도병 입영자 :
김순남 씨(장남) 김중현(동경제대 경제학부)
김석두 씨(2남) 김순만(수원고등 농림)
강태만 씨(장남) 강중철(명치대학 법학부)
당사자들은 이미 입대한 후여서, 사또 뜨자 나팔 부는 격이었고, 일본 당국의 강요에 의해서 축하 예배라는 이름은 억지로 붙인 것이고, 이 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이 침략자의 용병으로 강제로 끌려가는 것은 참기도 어려운 슬픈 일이었다.
(7) 최찬경, 양해근 장로 임직 10주년 기념식
때 : 1945년 2월 25일(주일) 오전 11시
예배순
1. 묵도 2. 찬송 1장 3. 기도 : 신덕칠 장로 4. 시편 23편
5. 취지 설명 (주관자) 최문환 목사 6. 특별순서 : 유년 수련회생
7. 찬송 228장 8. 성경 : 고후4:7~18 - 김-- 목사(서수)
9. 광고 : 이원석 집사 10. 약력 : 나반석 집사 11. 특순 : 유년주일학교생
12. 설교 : 김호연 목사(서수교회) 13. 기도 : 설교자
1. 독창 : 발산 교회 여 청년
2. 축사 : 신덕칠 장로
3. 예물 증정 : 교회 대표 - 강순실 집사, 여전도회, 발산 교회 채규일 집사
4. 답사 : 최찬경, 양해근 장로
5. 찬송 : 1장
6. 축도 : 최문환 목사
7. 사진 촬영
8. 폐회
8) 일정말(日政末)의 시련기 정리
(1) 현상유지와 신앙의 한계
일제의 끈질긴 억압과 견제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하거나 현상 유지를 하면서 1930년대 중반까지는 순조롭게 지내왔다.
1936년의 크리스마스는 글자 그대로 클라이막스 성탄절로 온 교인이 감사와 기쁨의 계절을 맞이하였다. 그 여세는 다음해 추석기의 부흥회에는 명 설교가 김윤식 목사를 모시고 깊이 있고 은혜로운 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상이 일제 치하 말엽의 지경 교회 전성기였나 싶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국력이 쇠약해져서 오히려 군부의 독주(獨走) 현상이 나타나고, 이는 교회 박해와 황민화 정책의 강화로 교회는 항거에 나섰으나 한계에 부딪치고 결국은 신사참배 결의로 신앙의 신성성(神聖性)은 훼절되고 말았다.
뚝이 무너진 듯, 교회의 신앙적인 저항력은 걷잡을 수없이 무너져 갔다. 수 많은 선열들과 순교자의 피로 물들인 한국 교회는 그 힘을 잃어갔다.
지경 교회의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은혜화 축복으로 이어져왔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의 대세는 어찌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2) 교회 내의 기구들
① 성가대
그동안 지경 교회 성가대는 꾸준히 발전해 왔고 오래 동안 전통 있는, 자랑스런 단체였으나 점점 그 수효가 줄어가고 왕년의 위력은 감소 되어갔다.
이를 만회하려고 양해근 장로까지도 딸들과 사위까지도 투입하여 전력투구를 했지만 현상 유지도 힘들었다. 양장로님의 사위인 정귀룡 씨는 그래도 그때가 제일 보람 있는 봉사를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원래 집은 임피읍내였으니까 상당한 거리였는데, 신앙의 열기는 거리와는 무관한 것인가? 그는 이리로 이사하였고, 그 축복의 덕인지, 그의 따님 정영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로 중앙대학 교수로 지금도 후진들의 양성에 여념이 없다.
그녀는 대통령 취임식에 독창을 하는 등, 한국교회의 음악가로 우리가 자랑할 만한 자랑거리이다.
② 유년주일학교
우리 주일학교도 자랑거리는 많다. 해마다 맞는 크리스마스 축제는 온 동네가 들썩거리는 마을의 평화와 희망이 차고 넘치는 축제였다. 멀리 개정이나 오산, 회현에서 관객은 줄을 이었다.
어린이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연극하며, 오늘날의 스타 이상의 인기를 몰았다. 교회당은 비좁아서 예정 없는 2일 공연하는 일도 많았었다.
이런 주일학교에 난데없는 마귀 역사가 나타났다. 1940년 크리스마스 행사 때, 열심히 가르치고 연습한 노래(춤)와 연극에서 일본 관헌의 방해가 일어났다.
이달주 선생(라반석 장로 부인)이 밤잠 설쳐가며 어린이들의 노래와 춤으로 엮어진 “삼천리 방방곡곡이”와 “우리의 웃음은---”이 진행될 때 관중들이 한참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중지하라!” 호루라기를 불며 뒷자리에서 평복한 순경인지 무엇인지가 2~3명이 나타나 성스러운 축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교회를 대표해서, 양해근 장로와 이달주 선생은 어둔 밤에 주재소에 끌려가 곤혹을 치루고 며칠 동안 매일 호출 취조를 받는 곤혹을 치루었다.
참고로 여기에 그 노래의 가사를 적어둔다.
◎ 우리의 웃음은 .... (남궁억 작사)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훈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3천만)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 살아라 삼천만의 조선족
----- (이하 략) -----
◎ 꽃피는 삼천리 방방곡곡이
꽃피는 삼천리 방방곡곡이
조선의 아가야 우리 아가야
손과 손을 잡고서 손과 손을 잡고서
꽃피는 동산에 봄마중을 갈까나
얼사얼사 좋구나 앞날의 조선은 우리의 것
얼사얼사 좋구나 절시고 좋구나
----- (이하 략) ------
그 사건이 있은 후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이 노래들이 유행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까지도 콧노래로 흥얼거릴 정도로 인기 있는 노래가 되었다.
주일학교는 그 일이 있은 후, 내리막 길을 가듯 위축되어 갔고 이달주 선생은 주일학교에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광복의 그날까지.....
※ 후일담
조선 기독교단에서는 찬송가 금지 지령에 이런 민족동요(남궁억 작) 등을 통보했는데, 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10회 이상 호출되어 야비한 욕까지 퍼부으며 겨우 훈계 방면 되었다고 한다. 땀은 양 장로님이 더 흘리셨을 것이다.
③ 여전도회, 청년회
여전도회는 제일 약한 단체 같으나, 가장 탄탄한 조직을 자랑할 만 하였다.
역대회장이, 석정순, 장은숙, 김명은 3인은 명문고녀 출신으로 조직 관리도 돋보였지만 일제의 야만적인 교회 억압 정책이 발동 되면서 여전도회는 달라졌다.
누가 앞장선 지도 모르게 심방 횟수가 늘어나고 성미 주머니가, 자기 식량도 부족할 때 금싸라기로 이름 지어진 성미로 넘치고, 눈물 섞인 그들의 기도 특히 새벽 기도회는 부인 전도회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쌀 공출로 바깥세상에서는 난리 난 것 같은 때, 우리 엄마들이 거출하는 성미는 교회의 평화와 사랑을 유지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이에 반하여 청년 면려회는 한숨만 흘러 나왔다. 그동안 면려청년회는 교회 일꾼 기르는 일과 담배, 술 금지등 절제 운동에도 큰 역할을 해왔는데 징병, 징집, 강제 모집(탄광)으로 하나 둘 줄기 시작하더니, 이제 늙은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단체가 되어버렸다.
이상과 같은 상황에서 정기 (직원)기도회는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어 광복의 그날까지 큰 힘을 쓰게 된 것이다.
3. 광복과 골육상쟁의 아픔
1) 교회의 정비와 성장의 새 출발
반세기에 걸친 일제의 강점(强占)으로부터 시작된 이 나라의 치욕과 고난의 역사는 끝났다.
광복의 기쁨에 앞서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이 나라의 광복을 위해 민족의 제단에 뿌려진 순국선열들의 공헌에 길이깊이 감사하며 새 시대를 맞이한다.
많은 상처를 남긴 교회의 시련기는 지나갔다. 우리는 주님의 크신 은혜로 교회의 새로운 성장기를 맞이했다. 그 첫 테이프는 끊었다.
(1) 옥구지방 대 사경회 개최
때 : 1945년 9월 24일~9월 30일
곳 : 지경교회당
참가 대상자 : 옥구지방 각 교회 제직 및 일반인
강사 : 장하원, 김호연, 최문환 (목사 3인)
① 준비 상황
옥구지방 임시 사경회 위원회는 9월 9일 본 교회에서 모여 「대 사경회」 개최를 결의하고 장소 사용과 참가자들의 숙식 시설의 제공을 요청하여 지경교회 제직회는 이를 받아들여 적극 협력키로 결의하였다.
② 지경교회 제직회
ⅰ. 참가자 숙소 배정(협찬자 명단)
양해근 장로, 김창호 씨, 최찬경 장로, 최순열 씨, 강순실 씨, 장한라 씨,
임현재 씨, 문동실 집사
이상 8가정 이외에 만자리에 3개처 예비로 준비함.
ⅱ. 참가자들의 식사는 본인 부담으로, 숙소별 자취키로 함.
③ 대 사경회 운영 실정
3년 만에, 선교부 철수 이후 처음 모인 집회로, 특히 광복 후의 첫 행사로 들뜬 분위기 속에 매일 매일이 감격의 연속 행사로 대 성황을 이루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그렇고 사경회 강의 내용도 앞으로 새 시대의 교회를 이끌어갈 인재양성 교육이라는 목표에 알맞은 좋은 모임이었다.
수강생들도 참 잘 적응하는, 대 성공한 첫 모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오는 새 시대의 교회 일꾼들을 길러내는 성공한 대회라 할 수 있다.
장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수강생들의 식사문제도 잘 협력하여 새 시대의 첫 연합행사에 좋은 봉사의 경험을 얻었으며, 사경회를 마친 후 작별의 정은 오래 오래 좋은 추억으로 이어질 것 같다.
사진에 보여진 대로, 십자가, 태극기, 미국기 등을 앞세우고 교회 앞을 떠나 대야역→ 지서 앞 시장 입구까지의 도로행진은 지경 거리 사람들도 처음 보는 광경인데도 조선독립 만세, 해방 만세 등을 호응하며 박수갈채로 환영해 주었다.
(2) 최문환 목사님 동련교회로 떠나심
최문환 목사(당시는 전도사)로 지경에 오셔서 목사 취임식으로 1943년 5월 25일부터 시작된 최목사님의 목회생활은, 광복된 1945년 1월 1일 저녁 8시, 제직회석상에서의 사의 표명으로 본 교회 역사의 한 장을 보내게 되었다.
지나간 3~4년 동안 전도사, 목사로 재임하면서, 지경교회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큰 수고를 하시면서 면면히 흐르는 지경교회 역사의 한 장을 이으면서 대임을 완수하신 최목사님께 감사하며, 최목사님의 목회에 큰 성공 있기를 빌면서 떠나시게 했다.
2) 광복기의 교회 직원들(1945~1960)
1945~최문환 목사,장로 :최찬경, 양해근
(안수집사) :강순실, 라반석, 최재선
집사 :이원석, 문동실, 이병화, 김은동
여집사 :석정순, 장은숙, 박성여, 서현순, 최정애
전도사 :임춘자
1946~ 이성춘 목사 :최찬경, 양해근
강순실, 최재선, (라반석→ 개복동)
이원석, 문동실, 최순열
유은덕, 석정순, 장은숙, 박성녀, 서현순, 최정애
최대원, 김창호 (집사)
최경순, 주은덕 (집사)
(여전도인) 권순정
1950이성춘 목사,장로 :김창호(5.11) 안수 임직(순국)
안수집사 :최대원(5.11) 안수 임직
집사 :유희열, 이관섭
(여전도인) :권순정
1951~이진휘 목사:최찬경, 양해근, (최대원), (이원석)
(안수집사) :최재선, 강순실, 문동실
집사 :이관섭, 유희열, 최순열, 양재순, 이선도, 김광련
여집사 :서현순, 장은숙, 주은덕, 최경순, 고영순,
김복례, 장한라, 강경옥, 최정애, 석정순
※ 주일학교장 :이원석, 학생회장 : 이길구
성가대장 :강순실, ◎ 최찬경 장로(52 4. 12 소천)
1952이진휘 목사, (집사) 이봉일, 최양원(4.18 피선)
(여집사) 임옥화, 박복례
1953 이진휘 목사, ※ 여전도회장 : 장은숙, 서기 : 김춘자, 회계 : 서현순
주일학교장 : 최대원, 서기 : 김종하, 회계 : 양재순
청년회장 : 이봉일, 서기 : 서용문, 회계 : 이관섭
학생회장 : 이길구, 서기 : 신영근, 회계 : 양기현
교회 회계 : 유희열, 서기 : 최순열
(집사) 이선도
(여집사) 조성녀, 김양희, 함순자, 채경이, 김예영
1954 이진휘 목사, ※ 여전도회장 : 장은숙, 서기 : 김춘자
주일학교장 : 문동실, 서기 : 신영근, 회계 : 양재순
청년회장 : 최순열, 서기 : 서용문
학새회장 : 김용환, 성가대장 : 이봉일
1955 이진휘 목사, (집사) 정광삼, 원영옥, 전이순, 김판례
※여전도회장 : 장은숙, 주일학교장 : 문동실
청년회장 : 이길구, 학생회장 : 양기영
성가대장 : 이봉일, 교회 회계 : 유희열
1956 이진휘 목사, (집사) 이길구
※여전도회장 : 장은숙
주일학교장 : 이길구, (부) 문동실, 서기 : 임복안
부서기 : 이호일, 회계 : 이준섭, 양재순
성가대장 : 이봉일
청년회장 : 이봉일, 학생회장 : 신영근
교회(제직회) 서기 : 이준섭, 최순열
교회(제직회) 회계 : 유희열
1957 양동조 목사, 장로 : 양해근, 이원석, (최대원 → 경창교회)
안수집사 :최재선, 문동실, 강순실
서리집사 :(전년과 동)
임복안, 유판동, 김우봉, 강복례, 문옥주
김판녀, 장만례, 박윤자, 김경숙
※ 여전도회장 :장은숙, 주일학교장 : 강순실
청년회장 :이길구, 학생회장 ; 신영근
◎ 제직회 서기 :서용문, (부) 이준섭, 회계 : 유희열
성가대장 :신영근
1958 양동조 목사, 양해근, 이원석, (유희열, 강순실) : 1957. 11. 17 임직
(집사) 최양선, 최지헌, 김종하 - 임명
(최덕례, 채보세 - 임명)
※ 여전도회장 : 장은숙, 주일학교장 : 최양선
청년회장 : 문동실, 학생회장 : 양대용
◎ 제직회 서기 : 서용문, (부) 이준섭, 회계 : 유희열
성가대장 : 최양선
1959 양동조 목사, 집사(신규) 문산곤, 한귀남, 방시남, 김판순
1960 김재석 목사, (전도사) 장정기
(기타 - 전과 동일함)
3) 이성춘 목사의 청빙
(1) 이성춘 목사의 청빙 경위
그 당시 보성교회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뿌리가 깊은, 광주나 목포교회에 뒤지지 않는 무게 있는 교회였다. 잠시 도미중인 황보익 목사 형제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황성수 씨(후에 목사로 종신함) 등이 자란 교회이다. 황성수 씨는 젊은 나이에 국회 부의장까지 오른, 그 당시 자연스럽게 이승만 박사의 후계자로까지 선망의 대상이 된 유력한 정치가요 웅변가로 널리 정치 지망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 교회 목회를 단단히 준비한 이성춘 전도사가 꿈도 꿔보지 않은 지경교회 청빙 초청을 받으니!
이 초빙의 성사에는 양해근 장로님 특유의 순발력이 발휘되었다. 이 교회는 우리 이우석 목사님이 순교한 목회지이기도 하였다.
이성춘 목사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1905년생이다.
1920년 신창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소학교를 거쳐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1935, 나주 도곡리 개척 전도 → 삼도리, 내산리, 송산리 그리고 전북 고창읍 교회에 부임함.
1935년 평양신학교 1년 수료 후 남평읍, 화순, 능주읍, 순천 낙안읍, 보성읍 교회에서 목회자의 길을 수업하였다.
1943년, 조선신학교에 편입 후 해방된 1945년 12월에는 제5회 졸업생이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가하자마자 지경교회 양해근 장로의 간곡한 청빙청원을 받아들여 같은 해 12월 21일에 지경교회에 부임하였다.
군산노회 제6회 노회 제1차 임시노회(1946.1.23, 전11:00, 이리교회당)에서 지경교회의 이성춘 목사 청빙서류를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이성춘 씨 임직 허락 → 강도사 시취, 목사 안수, 위임식 일체를 이창규, 이수현, 귄우진, 이재봉, 장하원, 최문환에게 일임함.
이성춘 목사의 강도사 시취 및 안수, 임직 절차 등은 전원 일치로 통과되어 아래와 같이 지경교회 위임식이 열렸다.
(2) 이성춘 씨 강도사 인허식
사회 : 이창규 목사
장소 : 지경교회당
일시 : 1946년 2월 4일 후8시
1. 기도 : 장하원 목사
2. 찬송 : 32장
3. 성경 : 요10:29~
4. 설교 : 이성춘 전도사 “요한의 기독관”
5. 기도 : 신덕칠 장로
6. 찬송 : 162장
7. 기도 : 이수현 목사
8. 문답 : 이창규 목사
9. 선언 : 이창규 목사
(3) 이성춘 목사 임직식
사회 : 이창규 목사
1. 찬송 : 228장
2. 기도 : 이재봉 목사
3. 성경 : 요한12:20~26
4. 설교 : “희생의 종교” 권우진 목사
5. 문답 : 이창규 목사
6. 안수기도 : 이수현 목사
7. 선언 : 이창규 목사
(4) 이성춘 목사 지경교회 위임식
사회 : 이창규 목사
1. 찬양 : 지경교회 찬양대
2. 기도 : 최문환 목사
3. 문답 : 사회자
4. 선언 : 사회자
5. 권면 : 목사에게 - 이수현 목사
교회에게 - 김호연 목사
6. 기도 : 장하원 목사
7. 선물 증정 : 지경교회, 발산교회
8. 찬송 : 3장
9. 축도 : 이창규 목사
※ 군산노회 제 6회 제 2차 임시회의록에서
장소 : 지경교회당
일시 : 1946. 4. 11. 전11시
① 이성춘 씨 목사임직에 대한 별위원 보고 다음과 같이 채용(採用)하다.
지경교회에서 목사로 청빙한 이성춘 씨는 전남노회에서 신학후보생 이명서가 왔으므로 신학준시부에 맡겨 시취한 결과 합격되었음으로 다음과 같이 집행하였나이다.
② 군산노회 부인 전도회 보고
1. 지회 수 : 40
2. 회원 수 : 2,270명
3. 총회의원 : 69명
4. 재정 수입 : 6,537,500원
5. 전도인 1명을 파송하여 각 5회를 순회전도하기로 하오며
6. 특별연보금 6,000원을 大韓 임시정부에 상납키로 하오며
7. 각 지회에서는 시찰위원을 선정하여 지회를 시찰하기로 하였나이다. 이상
1946년 5월 12일
보고인 이순길(군산노회 부인전도연합회장)
③ 지경교회 당회장 이성춘 목사
고 이우석 목사(순교자) 유가족 구제 청원의 건→ 사은부로 보냄 → 일금 6천원 노회 하명대로 進呈함.
4) 이성춘 목사의 목회 사역(1946~50)
(1) 교회의 기구 조정
① 당회, 제직회의 합동 회의
때 : 1946. 1. 2(수) 후8:00~
곳 : 교회당 내
안건 :
∙교회당 청소는 당분간 문동실 집사가 맡기로 함.
∙목사님(이성춘 목사) 이사 오시는 데는 이원석 장로가 가기로 함.
∙헌금 수전(收錢)은 남녀 집사가 2개월씩 교대로 하기로 함.
∙제직회 서기 : 장은숙, 부서기 : 라반석
∙부흥회는 2.18~7일간 이성춘 목사님을 강사로 하기로 하고 목요일부터
3일간 준비기도회(시간: 밤8:00~ )를 하기로 함.
∙매 금요일 밤에 순회기도회, 토요일에 장년 공과 준비하기로 함.
∙최정애 집사 주택 주워주기 위해 특별연보 하기로 함.
∙기타 사업은 관례대로 실행하기로 함.
② 제직회 부서 책임자 선정
회계 : 김창호, 부회계 : 최순열
식량 지원 : 강순실, 최정애, 시탄위원 : 문동실
영선위원 : 이원석, 최대원
교회 청소 : (예년대로)
1월 : 문동실, 석정순. 2월 : 최순열, 최경순
3월 : 김창호, 서현순. 4월 : 이원석, 치정애
5월 : 강순실, 유은덕. 6월 : 최대원,장은숙
7월 : 최재선, 주은덕. 8월 : 문동실, 석정순
9월 : 최순열, 최경순. 10월 : 이원석, 최정애
11월 : 강순실, 유은덕, 12월 : 최재선, 주은덕
③ 주일학교 직원 선정(예비—차후 계속 임명)
강순실, 문동실, 이원석, 최대원, 최순열
이영섭, 서현순, 이영례, 고영순, 이현식
임금순, 김송자, 장영자, 오기영, 송경애, 김순예.
◎ 기타 사항
ⅰ. 성가대 부서
총지휘 : 강순실, 대장 : 오기영
대 원 : 이영섭, 이현식, 이봉일, 이용일, 신영길
김용환, 양만영, 박금순, 원영옥, 김순례
서현순, 김송자, 이영예, 양정희, 양정님
양민자, 최귀재, 임해정.
ⅱ. 기도처 증설 : 천수동 구봉리
ⅲ. 유년주일학교 교사(1948년도)
유년부 교장 : 최순열, 부 : 오기영
남선생 : 이관섭, 이영섭, 양재순, 이봉일
이현식, 고처원, 이용일
여선생 : 고영순, 김송자, 송경애, 이춘자
양정님, 양민자.
※ 이성봉 목사님 부흥회는 대성황이었고 큰 은혜가 있었으니, 모두 개인전도에 힘쓰기로 함.
(부흥회 결과로 세벽기도회, 저녁예배 후의 기도회에 불이 붙었음.)
명년(1949) 1월 2일부터 부흥회(강사 이대영 목사)를 하기로 하고 12월 1일부터 준비기도회 하기로 함.
(2) 주택 앞 물치장 신설, 성전 의자 발주
① 교회 물치장(2칸, 10만원)을 주택 앞에 건축(1948년 봄) 하기로 함.
② 교회 의자 40개(개당 4인석, 630원씩) 서정래 목수에게 발주함.
(3) 장로 1인 선출
1946년 10월 27일에 노회의 허락을 받은 장로 1인을 선정하는 공동의회를 개회하여 선거 투표한 바 문동실 씨가 피선되었으나, 본인의 고사로 피택 수속을 하지 못하다가 1949년 4월에 다시 선거를 시행하였다.
재선거는 다음과 같이 열렸다.
때 : 1946. 10. 27. 후 0시 10분
찬송 : 350장, 성경 : 딤전2:1~7, 봉독, 기도
장로 1인 선거 투표 실시 : 김창호 씨 당선(총 74표 중 54표 득표)
(4) 50주년 기념식, 김창호 장로 장립식, 문동실․최대원 집사 안수식
때 : 1950. 5.11. 오전 11시~
① 50주년 기념식
사회 : 이성춘 목사
묵도 : 다같이
송영 : 성가대
기도
성경봉독 : 왕상 7장15~22 김호연 목사
찬양 : 성가대
설교 : “성전의 기둥” - 고성모 목사
기도 : 설교자
② 장로 임직식
개식사 : 이성춘 목사
서약 : 장로에게 - 이성춘 목사
교회에게 - 장하원 목사
안수기도 : 이성춘 목사
선언 : 이성춘 목사
장로 임직패 증정 : 이성춘 목사
③ 집사 안수식
개식사 : 이성춘 목사
서약 (문동실, 최대원, 교인에게) : 이성춘 목사
기도 : 이성춘 목사
안수례 기도 : 이상귀 목사
집사 임직패 증정
― ∽ ―
권면 (임직 장로, 집사에게) : 이수현 목사
(교인들에게) : 최문환 목사
축사 : 이근호 목사
임직 인사 : 김창호 장로
광고 : 양해근 장로
찬송 : 70장
축도 : 이재봉 목사
5) 한국동란과 순교자들
제50주년 기념식과 장로 집사 임직식이 끝난 지 겨우 1개월여가 지난 1950년 6월 25일 6.25동란이 일어나 경남북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토가 무서운 전쟁터로 변하였다.
동란 1개월만인 7월 21일엔 이곳 대야지역도 남침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우리교회에서도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대야지역도 타처의 점령지역과 마찬가지로 점령자인 공산군이 현지인 공산 세력과 결합하여 소위 “인공시대”라는 처참한 시기를 연출하게 되었다.
현 성전 자리에 있던 “옥구고등학원” 직원실이 공산군 점령군의 지휘소가 되고 우익진영 사람들을 수사 및 심문하는 본부가 되었다. 정치보위부 지부라고 하는 이도 있고 군당 수뇌부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확실치 않고, 이곳에 교회 지도자들이나 소위 반동분자들이 잡혀와 조사를 받고 발산국민학교로 끌려가는 요소이었다.
교회는 텅 비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잠시 김제쪽으로 피하였고, 주택에는 권순정 전도인 가족들이 내노라 하고 살고 있는 것이 이상하였다.
자기들도 월남 피난민이라고 하여 월남 교역자를 통해 소개받고 우리 교회 전도인으로 왔는데, 알고 보니 속여서 들어왔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이 아닌 것은 곧 들어났다.
교회의 값되는 물건은 없어지고, 중요한 문서들은 파기해 소각되곤 하였다. 그들은 다시 수복되지 않고 교회는 문 닫는 것으로 알았던 것 같았다. 그들 덕분에 이성춘 목사님은 더 곤혹을 치렀다. 행적에 대한 세밀한 밀고를 계속 한 것 같았다.
김제 만경의 김창호 장로 인척집으로 모여 1박한 후에 김창호, 양해근, 이성춘 목사는 따로따로 지경으로 돌아오고 이요한, 장하원 등은 곧바로 부산쪽으로 남하 하였다.
문제의 비극은 지경쪽에서 일어났다. 이성춘 목사는 교회 주택에 석양녘에 들어와 보니 집은 앞서 말한 대로 권순정 일족이 차지하고 이상한 거동을 보이는 것이다.
주택에서 바로 나와 동생 집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에 그들의 말대로 자수를 하러 갔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수하러 가라기에 갔는데, 그로부터 매일 수모를 당하며 오라 가라 하다가 발산의 창고(수용소)에 수용되어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에 김창호 장로는 체포되어 바로 구금되었다. 누구나 뚜렷한 죄상은 모르지만 김장로는 돈이 있는 놈이고 대한민국에 충성한 반동분자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친일파 노릇을 하며 돈을 모았다는 것이고 역시 그도 풀어주었다 구속했다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1) 양만영, 최옥종 사건
교회 지도자들이 묶여 다니고 구타당한 상처가 얼굴에도 확연한 모습을 보고 어린 심정이지만 그들의 가슴은 비분으로 터지는 것 같았다. 눈물도 흘렀다.
그들이 교회 뒤편 그늘에 앉아서 인민군 집합소(고등학원 직원실) 쪽으로 묶여 들어가는 이 목사님 일행을 바라보고 뛰어가 보았다. 바로 쫓겨났다.
그들은 어디론지 사라졌는데 그 다음날 일이 난 것이다. 인민군과 좌파들을 욕하는 선전 삐라 15~6매가 그들의 정문 안에 뿌려진 것을 위병이 발견하고 질겁을 하고 소리치며 수거해간 것이다.
그 위병은 전날부터 젊은 아이들 두세 명이 정문 가까이까지 와서 기웃거리고 이 목사나 김 장로 등이 끌려들어가는 것을 안 좋은 얼굴을 하며 지켜보던 모습이 생각나서 그대로 보고한 것이었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는 그들 두 사람이 잡혀갔고 그 후에 그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8월 15일경, 발산 사무소 창고 앞에서는 양 손이 묶인 채로 트럭에 실려서 전주로 압송되는 사람들이 보였다. 트럭은 모두 3대였다.
거기에 김창호 장로님 그리고 양만영, 최옥종이 태워져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전주형무소로 이송되어 간 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았다. 9.28수복으로 UN군이 이 고장에 진주하게 되자, 전주형무소에서 공산군에 의해 수감자들이 대량 학살된 것이 들어난 것이다. 소식을 듣고 뛰어가 보니, 김창호 장로님, 최옥종 군의 시신은 발견이 되어 잘 수습하여 안장하였고, 만영 군의 모습만은 찾지 못하고 슬픔의 드라마는 끝나고 말았다.
이성춘 목사님은 정치보위부(?)의 눈치가 수상하여, 다시 부를 때 오시라고 친절하게 보내주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고 그길로 상리, 경창리로 이원석 장로, 이선도 장로님의 도움을 받아 위급을 면하였다고 한다.
이성춘 목사의 혐의 죄목은 공산당에 가까운 옥구고등학원과 옥구중학교를 합쳐야 한다는 주장은 자기들을 크게 불리하게 하는 억압이요 박해의 죄이며, 설교에서 친 정부적인 반공 설교를 했다는 것인데, 자기는 악의적인 선전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고 그의 자서전에 적고 있다.
우리는 6.25남침으로 미수복된 기간 동안 앞으로의 활동이 크게 기대되던 신임(新任) 장로 4개월만에 “예수교회 악질 장로”라는 누명으로 숨진 김창호 장로님과 착한 두 소년, 어른들도 감히 생각지 못하는, 보위부 앞뜰에 삐라를 던지는 대담한 양만영 군과 최옥종 군을 잃었다. 극히 불행중 다행했던 일은 문동실, 이영섭 등에 대한 개인적인 충동은 약간 있었으나 지경교회에 대한 집단폭행이나 조직적인 박해는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에서의 마찰이나 충돌로 상처를 입은 일은 별로 없으나, 국군에 응소하여, 6.25전쟁에 참여하여 희생된 사람으로 신영길, 강상옥, 강남순, 최영훈, 김기철, 장명석, 김병만, 김종철, 최길생, 이화춘, 장광석, 김근섭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이 열거된다.
이성춘 목사는 상리, 경창리 등지를 전전하다가 서부 미면쪽으로 까지 피난 반경을 넓혔는데 마침 해성교회의 홍삼봉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미면의 큰 학살사건으로 홍 장로 집안도 큰 희생을 당했는데, 거기서 함께 교회를 건축하고 새 출방하자는 권유를 받고 주저 끝에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경을 떠나게 되었다.
(2) 아성춘 목사의 지경교회 시무 업적들
지경교회 시무기한이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긴 업적은 적지 않다. 이것이 잘 지속 내지 지켜지기 위해서 적어두기로 한다.
① 교회 선교부서의 정비
당회, 때로는 제직회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여, 교회 각 기관(주일학교, 청년회, 부인회, 성가대 등)의 효율적인 확충과 적재적소의 인원 배치, 차기 인재 양성을 계획 진행을 강조했다. 주일학교, 성가대 등에 연소한 사람들을 발탁하여 후보생 교육을 시키는 등 그 효과가 막 나기 시작할 때에 떠나게 된 것이다.
② 교회 재정의 합리적인 관리
본당 예배용 장의자 50기 발주, 대지의 작은 공간 활용-물치장(物置場) 설비 등, 화려한 시설물이 아닌 실용적인 시공 등, 좋은 본보기가 된다.
③ 좋은 강사 초빙으로, 심령운동과 성경(복음) 교육의 조화를 유지함
이성봉 목사(국내 최고의 부흥사), 이대영 목사(중국 선교사) 등의 초빙으로 건전한 부흥회로, 고영순, 최지헌, 채보세, 김근홍, 최양원, 이선도, 이장순, 양재순 등이 불같은 심령의 감명을 받는 등 전교회적으로 복을 받는 집회의 전례가 되었다.
④ 온전한 애국정신의 고취
해방 후의 방종, 유행 열기, 좌우 분열과 갈등 등에 흔들리지 않고 건전하게 민주국가 건설을 고대하는 정신 교육을 추진하였다. 예수교장로회 중진들로 구성된 조선독립촉성 군산(노회)지회 부회장으로 배은희, 이갑성, 함태영 목사 등과 돈암장(이승만) 경교장(김규식) 등과의 긴밀한 제휴를 하였으며 1948년 제1회(제헌국회) 총선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⑤ 교인증(Certification Card) 발급
새벽기도회 기타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는 야간통행, 신분 검문 등에 도움이 되는 교인증명서(국․영 양면)를 발급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특히 비행장 출입, 미군인 검문 등엔 오늘의 “여권”같은 효과가 있었다.
(3) 9.28 수복․(전승) 기념음악회 개최
때 : 1950. 11. 26.
곳 : 대야초등학교 강당
주최 : 지경교회 성가대와 청년회
(출연자)
성가대 :이봉일(지휘), 이관섭, 이영섭, 이현식, 이용일, 라용식, 육기술,
원영옥, 박금순, 김순례, 송경애, 신경은, 최용주, 양정임, 최귀재,
이혜구, 이란구, 최용희, 이현복, 김순길, 최귀순(외 1명)
이성춘 목사, 최순열 장로, 이인식(소년-강남교회 원로장로), 이길구
당일 행사는 유사 이래 최고의 음악행사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회중을 감동시켰다. 이 모임을 연장시켜 이 지방의 합창단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야심도 가져볼만 한데.... 아쉽다.
최흥서 장로의 증손녀인 청순한 이미지의 최용주(경기여고, 서울공대 재)가 아라비아 무희로 가장한 춤을 추는 데는 모두가 박장대소하였다.
이진휘 목사, 지경재단에 서다(1951~1955)
(1) 전북노회 이진휘 전도사,
우리의 지경을 넓히는 전도의 포문을 열다.
4월 22일 주일예배 때, 예고한 대로 “전도 북”연보를 실시하니 16만 5천원이 헌금되어 원하던 북을 구입하고 바로 그날부터 전도의 포문을 열었다.
전도의 일정은 이러했다.
4월 23일 저녁~25일 저녁(3일간 3회) : 상리
4월 26일~27일(2일간 2회) : 구복리
4월 30일~5월 1일 : (2일간 2회) : 경창
5월 17일~19일(3일 밤낮) : 지경
5월 21일~22일(2일간 2회) : 풍촌
5월 23일~24일(2일간 2회) : 성산
전도 강연 순서
1. 다같이 환경을 정비하고 2. 묵도 이어서 찬송 합창 3. 기도 : 장로 또는 집사 중 1인 4. 강사 소개 5. 성경 봉독 및 강연 : 이진휘 목사 6. 기도 : 이진휘 목사 7. 광고(안내) 해산 |
전도 강연회 평가
이진휘 전도사의 전도 강연 목표는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① 강연 장소의 불신자들은 못 듣던 북소리에 뛰어나와 정열적이고 정연한 젊은 사람의 웅변과 “인생의 행복” 이야기에 감동을 느끼고 이튿날도 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② 장로, 집사, 평교인 남녀 30인 가까운 인원이 부인회에서 준비한 저녁 식사를 교회에서 마치고 현장으로 나갔는데 그들에게는 전도와는 별도로 자신의 신앙을 깨우치는 은혜의 부흥 시간이 되었다.
③ 이진휘 전도사의 인기는 결과적으로 치솟을 대로 치솟게 되었다.
(2) 이진휘 전도사의 부임
이진휘 전도사를 모셔오기까지는 장로, 집사 몇 분 이외는 아무도 몰랐다. 여기에 양해근 장로의 노회 정치의 거물다운 실력 모습이 보여진다.
양해근 장로는 먼저 이진휘 전도사의 장인인 김학순 장로, 아버지인 이보련 장로를 만나 설득한 뒤, 3인이 합동하여 이 전도사의 동의를 얻기 위해 4인이 합석하였다. 이보련 장로는 명령에 가까운 어조로 지경교회에 가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다음은 양해근 장로의 차례다.
그는 부드러운 설득조로 우리가 잘 모셔서 훌륭한 성직자가 되도록 힘껏 받들테니 용기를 내고 결심해 주시라고 공손히 말을 건넸다. 사실 양 장로는 이 전도사에게는 처 외할아버지 뻘이 되니까 더 낮추어서 말할 수 있는 처지인데도.....
이어서 장인인 김학순 장로도 비슷한 말로 지경교회가 앞으로 크게 부흥할 교회라면서 사위에게 권고하였다.
이 전도사는 묵묵부답,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알았습니다.” 하고 입을 열었다. 그 당시로는 이 전도사에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장로 세 분의 권고이니 피할 수 없는, 가타부타 선택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문제는 신상교회의 신도들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전도사님! 제발 지경에 가지 마세요! 우리를 떼놓고 가시지 마세요! 애절한 교일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심정, 그에게는 추상같은 명령보다도 무거운 어른들의 분부는 어떠한 이유로도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심지를 이해시키는 데는 2주일이 걸렸다.
이진휘 전도사는 1951년 3월 18일 아침 일찍 지경교회에 와서 예배에 첫 설교를 하였고 3월 23일에는 이삿짐을 풀고 지경교회 시무가 시작되었다.
(3) 지경교회 학생회 조직
때 : 1951년 5월 6일(주일 저녁예배 후)
곳 : 지경교회당
학생회 조직 발기인 : 김근철, 이길구, 장작문, 양정님, 최완열
발기인 대표 이길구 씨의 취지 설명 후 임시 의장으로 이길구 씨를 선출하여 개회로 들어가다.
① 개회 기도회
찬송 296장 부른 후, 이진휘 전도사 기도 후 회무처리에 들어가다.
② 회무 처리
a. 임시 서기 선임 : 신영근
b. 회칙 통과 :
(전문 5장 20조)의 규칙(안)을 임시 의장의 설명을 듣고, 다음 선출되는 임원회에서 심의하여 통과시키기로 하고 오늘은 임시로 회칙(안)에 따라 진행키로 결의함.
c. 임원 선거
회장 : 이길구, 부회장 : 김근철, 양정임
총무 : 장작문
서기 : 신영근, 부서기 : 최은실
회계 : 양기영, 부회계 : 황성렬
전도부장 : 김종하, 차장 : 김선자
지육부장 : 최완열, 차장 : 최귀순
봉사부장 : 양기현, 차장 : 최은실
음악부장 : 이용일, 차장 : 최귀재
이하 생략
③ 학생회 임시 활동(개항)
a. 기독학생 토론회 : (제목-신앙생활에는 성경이냐 기도냐?)
6월 10일(주일 밤)
b. 예배당 수리 돕기(6월 7일)
c. 성경 암송대회 (7월 15일, 마5:1~16)
d. 꽃주일 축하행사(6월 17일 밤)
(4) 목사 임직식, 지경교회 위임식
① 목사 임직식
사회 : 이상귀 목사
찬송 : 228장
기도 : 오기준 목사
성경 : 마태25:21
설교 : “착하고 신실한 종”-정진철 목사
문답 : 이상귀 목사 ↔ 이진휘, 한완석, 조원곤 강도사
안수기도 : 이창규 목사
선언 : 이상귀 노회장
임직된 이진휘 목사 이외의 한완석 목사는 예장(통합)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군산 동부교회, 광주 중앙교회를 시무하다 소천하였고, 조원곤 목사는 개정, 이리 신광, 서울 신당동 중앙, 광주 양림교회를 시무하다 미국 이민으로 재미(在美) 중이시고, 김성희 사모는 우리 교회 3․1만세 공로자(대구고법 판결 6개월 징역) 김준실 의사(醫師)의 외딸이다.
(5) 이진휘 목사 위임식
때 : 1951년 7월 6일(금) 11:00
곳 : 지경교회당
개회 송영 : 지경교회 성가대
기도 : 최문환 목사
찬송 : 296장
성경 : 고전4:1~2
성가 찬양 : 지경교회 성가대
설교 :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장하원 목사
권면 : 목사에게-김현정 목사
교회에게-이수현 목사
기도 : 이성춘 목사
선물 증정 : 지경교회 외 일동
찬송 :3장
축도 : 이상귀 목사
광고, 인사 : 양해근 장로
(6) 고 김창호 장로, 양만영, 최옥종 청년 추도예배
때 : 1951. 9. 16 (주일) 곳 : 지경교회당 사실 : 이진휘 목사
개회 묵도 찬송 : 53장 기도 : 문동실 집사 성경 봉독 : 마5:10 말씀 : “위를 위하여 죽은 자들”-이진휘 목사 기도 : 이진휘 목사 추도사 : 이길구 학생회장 유족 인사 : 양해근 장로 찬송 : 205장 축도 : 이진휘 목사 |
추도식이 끝날 무렵, 회중이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김창호 장로의 큰아들 용환 군이 먼지를 둘러 쓴 군복을 입은 채로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서울대 독문과에 재학 중이었으나, 동란 통에 갑자기 소집 영장을 받고 입대하여 전방 전투에 배치되어 교전하다가 포로가 되어 북송되는 도중, 칠흑같은 암야에 대담하게 탈주하여 1주일 이상 굶은 채로 산골짜기를 누비며, 기적적인 생환을 하게 되고, 마침 그날 사랑하는 아버님의 추도예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여기서 김 장로님과 두 청년의 신상을 소개코자 한다.
① 김창호 장로님은 1907년 김제군 만경 출생으로 소년시절 일본으로 떠나 독학으로 (교또) 상업을 나와 성실하게 상업활동을 하여 한국에서 보면 큰 돈을 벌은 정도의 생필품 상점을 차려, 25세에는 고향에 돌아와 강경옥(집사)과 결혼하고, 홀로 계시는 어머니 (공) 집사님과 함께 일본에서 3인 가족으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성실 근면하여 이웃에 널리 알려져 상업은 크게 확장되고 삼대독자인 김 장로는 아들딸을 많이 두는 축복까지 받았다.
참 감사할 일은 교또 한국인 교회 김덕수 장로는 일본의 대표적인 장로로 존경받는 분인데 그분의 전도를 받게 되어 교또(京都)교회 교인이 되었다.
어머니는 입교 3년 만에 집사가 되고, 강경옥(집사)는 시어머니 따라 열심히 배우고 믿으며 자녀 귀한 가정에 3남 3녀의 보물 같은 자녀의 축복을 받고 일본이 망하기 2년 전인 1944년, 가산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지경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경 역전 양 장로님의 이웃이 되고 두 분이 힘을 합하여 교회 발전에 큰 힘이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된다. 외롭게 교회를 받들어오던 양해근 장로님의 좋은 동반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 김창호 장로님이 교회나 사회를 위해 공헌할 기회가 막 닥쳐올 때 6.25 사변이 나고 그해 9월 26이 새벽 6시, 전주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했으니, 이는 그 가정 뿐 아니라 우리 교회에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계속 전하겠다.
김용환 씨는 전주 해성고등학교에서 실력 있는 교사로, 교감으로 봉직하면서 동생들을 잘 길러냈다.
② 양만영 군은 1932년 생으로 양해근 장로님의 장남이다. 성격이 온순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누구와도 다투어본 일이 없는 청년이 어떻게 그런 대담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양해근 장로님은 추도일에도 눈가에 이슬 맺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 만영 군은 군산중학 5년(6년제) 재학 중이었다.
최옥종 군은 대야국민학교를 나온 후 서울 고모댁을 의지하고 상경하여 마침 이영갑(장로)의 주선으로 기독교교육협의회 사환으로 근무하는데 그는 총명하고 민첩하여서 사무실의 귀염둥이 노릇을 잘 하였다. 야학으로 종로의 중학교에도 열심히 다녔다. 사변 전에 서울에서 자주 만났었다. 참 착한 아이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길게 남는다.
(7) 청년회 정기총회
때 : 1952. 1. 6 (저녁예배 마친 후)
곳 : 지경교회당
사회 : 회장 이원석(피택 장로)
개회 : 묵도
찬송 : 24장
기도 : 부회장 최순열 집사
성경봉독
회장 기도 후 회무처리로 들어가다.
회원 점명 : 35명 중 25명 출석-서기 보고하다.
임원 선정
회장 : 최순열 집사, 부회장 : 문동실 집사
서기 : 이봉일 부서기 : 한강희
회계 : 이준섭 부회계 : 양기현
전도부장 : 서용문, 차장 : 장동선
지육부장 : 이길구, 차장 : 채용석
음악부장 : 이용일, 차장 : 신영근
체육부장 : 양재순, 차장 : 최행웅
절제부장 : 이관섭, 차장 : 양기영
고문 : 양해근 장로
(8) 학생회 제2회 정기총회
때 : 1952. 1. 13 (저녁예배 마친 후)
사회 : 회장 이길구
회장 기도 인도 후 바로 회무처리로 들어감.
임원 선정
회장 : 이길구 (유임)
부회장 : 김용환, 양정임
기타 임원 : 전원 유임
다음 안건 : 임원회에 맡기고 폐회함.
(9) 군산노회(분립노회)—기장 총회 출범에 한 걸음 앞서…
때 : 1952. 5. 22(금) 11:00~
곳 : 지경교회당
개회 예배
사회 : 이성춘 목사
설교 : “강하고 담대하라 -장하원 (직전 노회장)
(성경 : )
기도 : 정진철 목사
임원 선정
노회장 : 이상귀 목사(이리제일)
부노회장 : 장하원 목사(신황등)
서기 : 이성춘 목사(해성)
부서기 : 이진휘 목사(지경)
회계 : 양해근 장로(지경)
부회계 : 홍삼봉 장로(해성)
총회 총대 : 이상귀 장하원, 이성춘 (목사)
양해근, 박석동, 홍삼봉 (장로)
※ 당일 성가대 준비 및 총대 중식은 지경교회가 담당함.
(10) 옥구지방 연합 야외예배
때 : 1953. 5. 5 (음 3. 22)
곳 : 임피 굴바위 동편 산
주최 : 옥구지방 주일학교 연합회
예배 설교 : 이진휘 목사(지경)
사회 : 이호섭 목사(서수)
프로그램 : 어린이 노래자랑(주일학교 대항), 보물찾기, 기타
※ 참여 인원 : 6개 교회 (합) 1,200명
※ 오후 5시 행사 마친 후, 쓰레기 줍기 등 청소 후 귀가함.
교사 협의 : 매년 1회씩 각 주일학교가 윤번으로 주관하며 야외예배를 실시하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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