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담쟁이 덩굴 /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조원 1968년 경남 창녕 출생. 동의대학교 미술대학 회화 전공. '잡어' 동인. [심사평] 격조 높은 사랑 고백 그윽한 울림 따로 예심을 거치지 않고 심사위원 세 사람이 응모 작품 전체를 나누어 읽었다. 생각과 말의 균형이 일그러져 있거나, 유행을 추수하고 있거나, 겉멋에 치우쳐 있거나,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작품들을 제외하고 일차적으로 서른 명 남짓을 추렸다. 이를 다섯 명으로 줄이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서진 씨의 '물의 씨앗'은 어조가 활달하고 상상력의 전개가 볼 만했으나 관념을 구체화하는 데 미흡했다. 이와 반대로 이규 씨의 '해바라기 노란 열쇠'는 시가 대상의 구체적 형상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해서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최정아 씨의 '그의 우화(羽化)'는 재기 넘치는 상상력과 감각으로 일상을 성찰하는 시인데, 그 상상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아 아쉬웠다. 김승원 씨의 '다시, 봉천고개'와 조원 씨의 '담쟁이 넝쿨'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능숙하게 끌고 가면서 일상적인 소재를 적절한 이미지와 결합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다만 김 씨의 작품은 일부 상투적인 표현을 노출하고 있어 아깝지만 뒤로 제쳐두기로 했다. 당선작 '담쟁이 넝쿨'은 담쟁이 넝쿨이라는 시적 대상에다 건강하고 격조 높은 사랑의 고백을 매우 탁월한 기법을 이용해 얹어놓았다. 이 시가 발산하는 그윽한 울림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함께 응모한 '시루 속 콩나물'의 대담한 상상력도 이 시인을 믿음직스럽게 만들었다. 축하드린다. 김종해 강은교 안도현 시인 =====================================
[200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 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 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 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 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 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 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 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 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 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 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 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 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 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약력〉본명 도순태 ▷1957년 경북 경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9년 신춘문예] 시 심사평 긴 시를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 돋보여 경향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보내온 많은 시들을 읽었습니다. 다양한 시의 형식과 더욱 다양한 주제들 앞에서 심사위원은 고심하면서 오랫동안 시를 읽었습니다. 그렇게 거르고 걸러 '꽃들이 타오르는 이유'(신원희), '꽃게와 발레리나'(박세랑), '장롱을 열어놓고'(박종인),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도미솔) 등 4편의 시를 최종심에 두고 또한 오랜 토론이 있었습니다. '꽃들이 타오르는 이유'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좋은 시였는데 함께 보낸 다른 작품과 편차가 심해, '꽃게와 발레리나'는 발랄하고 감성적이어서 좋은 시였는데 그래서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다음 기회로 넘겼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장롱을 열어두고'와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두고 두 분 다 표제작은 물론 함께 보내온 탄탄한 구성의 시들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온 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장롱을 열어두고'는 맑은 서정과 부드러움이 빛나는 시였고,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는 시가 갖는 힘과 긴 시를 흔들리지 않고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이 돋보이는 시였습니다. 심사위원은 '장롱을 열어두고'가 가지고 있는 반복적 구성이 결점이 된다고 지적하면서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된 것과 우리 사회의 구조조정이란 문제를 서정적인 문체로 제시하며 '희망'이란 메시지를 선물하고 있는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당선작과 같이 보낸 시들의 어떤 작품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어 그런 신뢰가 당선자의 앞으로 활동에 큰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당선자 도미솔 씨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다음에도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말을 전합니다. 본심 심사위원 천양희 정일근 문태준(시인) ========================================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 당선작] 오늘은 달이 다 닳고 /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민구 ▲1983년 인천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신춘문예 시 부분 - 심사평] 특별함 끄집어내는 시적 상상력 보여 우리 두 심사위원은 각기, 김다연씨의 '얼음왕국'과 민구씨의 '오늘은 달이 다 닳고'를 당선작 범위 안에 든 작품으로 올려놓았다. 우리는 이들의 다른 응모작들을 포함하여 두 차례 더 읽어보았다. 민구씨의 '오늘은 달이 다 닳고'를 당선작으로 꼽는 것으로 합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민씨의 작품들은 시가 일상언어 사용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서 시 아닌 것들과 스스로를 변별케 하는, 고유한 층위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층위란 산문의 평지에서 좀 떠 있는 부력, 흔히들 말하는 시적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영역을 지칭하는 것인데, 민씨에게는 그러한 발견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새들은 (…)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라든가, 그의 다른 시 〈배가 산으로 간다〉에서의 "물속에 매달아 놓은 조등" 같은 대목은 범상치 않은 발견이다. 그것이 있을 때 시가 스스로 뜬다. 이런 좋은 부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방해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민씨에게도 있다. 다분히 서술적인 말투라든가, 시라고 하는 대단히 인색한 지면에서 동어반복하면서 낱말들을 낭비하는 것, 시적 상념이 더 깊은 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 등등이다. 이런 악습은 대부분의 응모작들에게 더 해당된다 하겠다. 특히 근래 판타지에의 경향성 속에서 스스로도 감당 못할, 실패한 은유들의 범람은 참 견디기 힘들다. 김다연씨의 '얼음왕국' 외 2편도 고루 시를 스스로 유지시키는 역량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텍스트 안에 반짝 전기가 들어오게 하는 발견의 신선함이 약하다 할까. 상념이 동화적이라고 해야 할지, 유아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심사자들에게 앞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시인의 이름을 부여하기에는 아직 실감이 덜 왔다. 양서연씨의 '붉은 귀', 한창의씨의 '어떤 행방'을 최종심에서 우리가 논의했다는 것은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의미한다. 이 땅의 싱싱한 시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모두의 정진을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황지우 문정희 시인 =====================================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인삼반가사유상 / 배우식 1 까만 어둠 헤집고 올라오는 꽃대 하나 인삼 꽃 피어나는 말간 소리 들린다. 그 끝을 무심히 따라가면 투명 창이 보인다. 2 한 사내가 꽃대 하나 밀어 올려 보낸 뒤 땅속에서 환하게 반가부좌 가만 튼다. 창문 안 들여다보는 내 눈에도 삼꽃 핀다. 무아경, 온몸에 흙물 쏟아져도 잔잔하다. 깊고 깊은 선정삼매 고요히 빠져있는 저 사내, 인삼반가사유상의 얼굴이 환하게 맑다. 3 홀연히 진박새가 날아들어 묵언 문다. 산 너머로 날아간 뒤 떠오르는 보름달, 그 사내 침묵의 사유가 만발하여 나도 환하다. 배우식 시인 충남 천안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시 전공). 1999년 [세기문학], [시문학]<신인상>으로 등단. 2004년 문예진흥기금지원대상자. 2005년 1월, 시집『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열린시학 시인선16 / 도서출판 고요아침) . 실명·뇌종양 10년간 사경···詩作에 몰두 새생명 얻어 시집 - 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 시인 배우식씨는 올해 쉰넷이다. 6년 전 ‘시문학’으로 등단해 이번에 첫 시집을 냈다. 한참 처진 걸음인데도 그에겐 다급함이 없다. 경기 강화도로 그를 찾아갔을 때 시인은 내내 편한 낯으로 웃었다. “살아 있는 게 기쁘고 숨쉬는 게 감사하다”고 했다. “시가 나를 살려줬어요.” 그는 3년 전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뇌종양 환자였던 그의 나머지 삶은 냉혹한 수치로 환산되었다. 의사가 일러준 생존확률은 15%. “수술후 살아남는다 해도 눈과 귀가 멀고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선고는 덤이었다. 수술은 기적처럼 행해졌다. 긴 마취에서 깨어난 그의 첫마디는 “새를 주세요”였다. “자유를 갈망하는 무의식적인 말이었어요. 그때 눈을 떠보니 세상이 환했습니다. 그후로 더욱 절실하게 저처럼 몸이 캄캄한 사람에게 등불을 켜주고 싶었어요. 시를 통해서요.” “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고요아침)는 그의 시집 제목이다. 그는 시로써, 시에 대한 맹렬한 의지로써 자신의 운명을 거듭 쳐냈다. ‘등불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대로 그의 시들은 온통 ‘희망’을 점멸하는 등대가 되었다. [경향신문 2005-02-18 15:03] [심사평] 잘 구워낸 소리와 빛깔 오늘의 시조가 어디까지 왔는가는 신춘문예 응모작품들이 내비게이션으로 보여준다. 분명 것은 시조가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행렬이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모국어의 경작을 꿈꾸는 천재들이 시조에 눈을 돌리거나 형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지 않은 속에서 새 모습의 시조를 들고 나오는 신인을 만날 때 그 기쁨은 더하게 된다. 장은수씨의 ‘새의 지문’ 변경서씨의 ‘일몰 앞에서’ 배종도씨의 ‘천마도장니’ 배우식씨의 ‘인삼반가사유상’이 각각 새맛내기의 솜씨를 보인 작품들이었다. ‘새의 지문’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있는 빗살무늬토기에서 새 한 마리를 꺼내들고 시간과 공간을 누비고 있는데 그만큼 한 깊이와 무게를 채우는데 틈이 있었다. ‘일몰 앞에서’는 지는 해가 연출하는 스펙터클을 강렬한 채색으로 그리고 있으나 사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지 않음이 걸렸다. ‘천마도장니’는 너무 사실(史實)에 매달려 더 넓은 시야를 갖지 못했음이 시를 가두었다. 당선작 ‘인삼반가사유상’은 오래 흙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태어난 인삼뿌리에 생각을 입혀서 소리와 빛깔을 알맞게 구워내고 있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 글감을 골라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사유를 명징한 이미지로 엮어내는 시적 기량이 믿음직스럽다. 앞으로 붓끝을 더 날 새워 시조의 틀을 새롭게 짜고 시상의 자유로움을 열어가기 바란다. -이근배 시인 ====================================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강지희 ▲1963년 영천 출생 ▲영남대·경주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재학중 ▲페이퍼 로즈 공예연구실 원장 [심사평] 최종심까지 올라온 8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 남은 작품은 이강해씨의 ‘집들이’, 강지희씨의 ‘즐거운 장례식’ 2편이었다. ‘집들이’는 탄탄한 내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점이 먼저 단점으로 지적됐다. ‘사랑은 시작하기도 전에 슬프고/ 살아보기 전에 무덤이다’ 등의 표현 또한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멋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져 자연히 ‘즐거운 장례식’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됐다. ‘즐거운 장례식’ 또한 단순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으나 그러한 단점보다는 죽음을 보는 눈이 새롭다는 장점을 더 높이 샀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존의 생각을 즐겁게 뒤집는 역설적 묘미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름대로 높은 시적 성취도를 이루고 있다. ‘관을 들어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작은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긍정성과 순응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자 기쁨의 축제다. 작은아버지는 ‘암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릴’ 정도로 오히려 남은 가족들을 위로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하는 이 반어적 발상을 통한 시적 구현은 이 시인의 앞날에 대한 신뢰의 깊이를 더해준다. 앞으로 한국시단을 빛내는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 [2009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게 세 줍니다 / 유금옥 나뭇가지에 빈 가게 하나 있었어요. 참새 두 마리가 날아와 화원을 차렸죠. (햇살 꽃방) 정말 그날부터 햇빛들이 자전거 페달을 쌩쌩 밟았다니까요 가게에 봄이 한창일 때는 산들바람도 아르바이트를 했죠 사랑에 빠진 벌 나비가 주 고객 이였는데요 창업에 성공한 사례였어요 참새들은 날개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요 가위로 꽃대를 자르다 서로 눈이 부딪치면 재재거리며 웃었어요 앗! 그때 여름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어요 가을이 이삿짐 트럭을 타고 지나간 다음 날 나는 보았죠 양은냄비 브래지어 구두 숟가락들이 낙엽이 되다니 아스팔트 바닥에 나 뒹굴다니 비 내리던 가을 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꽃방은 다시 문을 닫았어요 가랑잎 한 장만한 쪽지를 붙여 놓았지만 겨울 내내 가게는 나가질 않았어요 가게 세 줍니다 (연락처; 살구나무) 유금옥 1953년 강릉출생 200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심사평] 일상 속 깨달음 발견한 시적통찰 탁월 투고된 작품들을 몇 차례씩 숙독하여 마지막 까지 남은 작품은 ‘가게 세 줍니다’, ‘자작나무의 행로’, ‘정씨 목공예방’, ‘신발 속에서 걸어나오다’, ‘딱다구리 경전’, ‘꽃들의 언어’, ‘호수의 법문’, ‘안부’ 등이었다. 이 중에서 ‘가게 세 줍니다’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최후까지 겨룬 ‘자작나무의 행로’도 당선작으로 별반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미학적 완결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도전해 보시기 바란다. ‘가게 세 줍니다’는 스케일이 크거나 문제성을 지닌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평범 속에서 진리를,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발견한 시적 통찰이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미학적 차원에서 신선하게 형상화시킬 수 있는 언어적 감수성도 탁월하였다. 자연과 하나 된 인생의 참 모습이 나무의 사계절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다. 모든 훌륭한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감동을 주는 법이다. 굳이 어렵게 쓸 필요가 없다. 당선작은 이 같은 시의 원리를 잘 터득한 듯 하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시론에서 논의되고 있는 시의 보편적 원리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 시창작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 정석이다. 첫째 이미지의 등가적 반복이다. 1, 2연은 봄의 이야기를, 3연은 여름의 이야기를, 4연은 가을의 이야기를, 5연은 겨울의 이야기를 빌어 같은 자연의 의미를 네 번 굴절시키면서도 각각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둘째 상상력의 이원적 대립이다. 시인은 자연과 문명이라는 상반된 두 세계를 한가지로 일원화시킨다. 셋째 이미지들의 병렬적 기법이다. 1연에서 ‘자전거 페달’을 이야기한 것은 3연에서 ‘오토바이 질주’에 2연 ‘산들 바람’은 3연에서 ‘이삿짐 트럭’에 대응된다. ‘자작 나무의 행방’은 사유가 깊고 복선적이다. 그런 점에서 당선작보다 무게가 더 있어 보인다. 그러나 상상력의 논리가 부족하며 그런 까닭에 다소 산만하다. 주제 의식보다도 형상화의 완결성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바란다. 나머지 시들도 모두 상당한 수준에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좋은 성과를 거둘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시 창작의 도움이 될까하여 여기서는 약점만을 지적해 보도록 하겠다. ‘호수의 법문’은 긴장감이 부족했으며, ‘안부’는 설명적이었으며, ‘꽃들의 언어’는 작위적이었으며, ‘딱따구리 경전’은 다른 시인들의 이미지와 유사한 점이 있었으며, ‘신발 속에서 걸어나오다’는 상상력의 비약이 지나쳐 보였으며, ‘정씨 목공예방’은 사실적이었다. 시ㆍ시조 심사평 /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 ========================================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술빵 냄새의 시간/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에 나오는 대사 김은주 △1980년 서울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성 포착 마지막까지 선자들의 눈길을 끈 이들은 ‘술빵 냄새의 시간’ 등을 투고한 김은주와 ‘꽃 피는 일’ 등을 보내온 류화, 두 사람이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과 돌파력이란 점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새벽녘 시장에서 돼지 잡는 장면을 다룬 ‘꽃피는 일’은 동물의 몸을 부위별로 분리하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처참한 장면을 복사꽃이 피어 가지를 타고 뻗어나가는 것과 중첩시킴으로써 기발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탐미적 시선이 공존하는 그의 시는 이미지의 조형 능력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질서를 투시하는 만만치 않은 인식의 깊이를 내장하고 있었다. 김은주의 작품은 심각한 현실에 정공법으로 대응하기보단 가볍게 우회해서 대응하는 여유와 다채로운 화법이 돋보였다. 비근한 현실에서 예기치 않은 놀라움을 끌어낼 줄 아는 이 응모자의 시는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한 양태를 포착하고 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이 있는 대신 단조롭게 여겨지는데 비해, 김은주의 작품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듯 대상에 따라 화법을 다채롭게 변주할 줄 아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축하와 더불어 정진을 당부한다. 이 밖에 선자의 관심을 끈 응모자로는 ‘바람 부는 날의 모과’의 박은지, ‘흰 개와 바다’의 이현미, ‘구불구불거리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의 진유경 등이 있다. [이시영 시인·남진우 시인] ======================================== [2009 영남일보 문학상] 나무의 공양 / 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온 몸 펼쳐 품안에 보듬는 저녁이라네 이경례 시인 2006 월간 심상 등단 울산문인협회 회원 울산시인협회 회원 [심사평] "투명하고 맑은 서정의 힘 돋보여" 예심을 거쳐온 20여분의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선자(選者)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줄글체의 중언부언들은 다소 걸러진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마지막까지 선고(選考)의 대상이 된 작품들은 '무릎' '유리주의' '흔적' '나무의 공양' 등이었다. '무릎'은 신체의 일부분을 일상의 틀 속에서 음미하면서 자성(自省)으로 이끌고 가는 노련함이 읽혔다. 시어의 경제를 실천하면서도 환상을 끌어안는 견고한 짜임새가 돋보인다. 또 다른 응모작 '둘레'도 이 응모자의 습작의 강도를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유리주의'는 대상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삶의 음영을 겹쳐놓는 시적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상상력의 결을 좀더 활달하게 풀어헤쳐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만든다. 한 작품을 지탱해 줄여타의 시편이 없다는 것도 이 응모자의 한계라고 판단했다. '흔적'은 당선을 두고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이다. 이 응모자가 선택하는 깊이 있는 시어들은 주제를 끌고나가는 끈질긴 사유의 힘과 어울려 상당한 설득력과 무게를 차지해 보인다. 그럼에도 당선작의 뒷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딘가 익숙한 수사로 가로질러 오는 언술들이 잦았던 탓이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낯선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무의 공양'은 오래 묵힌 소재를 활달하고 투명한 상상력으로 맑은 샘물처럼 산뜻하게 변주한 작품이다. 대상을 새롭게 부조하여 오롯이 완결된 한편의 서정으로 빚어내고 있어서 이 응모자의 숙련된 공력을 느끼게 한다. 시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얼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우친 결과이리라. 당선에는 다른 시편의 수준들도 함께 평가된 것임을 부언해둔다.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 심사위원 이하석(시인), 김명인(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2009 신춘문예 매일신문 시 당선작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 최정아 한 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삼십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긴 손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자 속에서 망사 모자를 집어 들었다. 망사 모자를 쓰자 세상도 온통 모자로 가득했다. 빌딩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꽃들은 모자를 벗겨달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새떼들은 모자를 물고 날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죽은 친척들도 줄줄이 모자를 쓰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는 꽹과리를 치고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바다로 간다. 둥둥둥 북을 친다. 풍랑에 빠져죽은 영혼들이 줄지어 걸어 나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갈지자로 걸으며 손을 흔든다. 친척들은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버지 모자를 다시 구름이 빼앗아간다. 본명 최정순 ▷ 1950년생 ▷ 장안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중앙대학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 예심을 거친 21명의 작품을 읽으면서 대체적으로 신선한 감각에 호감이 갔다. 그러나 거개의 작품이 산문적인 발상이거나 묘사에 그쳐 있어서, 패기 있는 언어의 구조물이라는 느낌은 주지 못했다. 시가 삶이나 자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이라면 그 과정에는 날카로운 인식과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런 뜻에서 최정아의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이정희의 「광흥창문 두드리는 것들」, 류화의 「그녀의 검은 봉지」, 김승훈의 「곤달걀의 비명」, 김지훈의 「바다 복사실」, 이담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정학명의 「구름정원의 기억」 등은 사물을 보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해서 시의 기초가 튼튼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봉지」는 이야기체를 못 벗어나는 한계를 보였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가상의 공간을 제시하는 만큼 리얼리티가 부족한 것 같았고, 「곤달걀의 비명」은 곯아버린 병아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돋보였으나 강한 인상을 줄 만한 이미지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광흥창문 두드리는 것들」은 베란다의 식물을 극화한 것은 신선했으나 역시 식물들의 구체화가 아쉬웠다. 「바다 복사실」, 「구름정원의 기억」,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는 현실과 상상, 외계와 내면을 무리 없이 넘나드는 만만찮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바다 복사실」은 재깍거리는 복사실의 이미지를 바다 이미지와 멋지게 오버래핑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효과를 내는 데는 미숙해 보였다. 「구름정원의 기억」은 터프한 호흡이 매력적이었지만, 사물을 형상화하는 능력에서는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만 못했다. 최정아의 이 작품은 활달한 상상력에서 터져 나오는 내면세계가 제의적(祭儀的)으로 살을 채워나가면서도 상당한 예술적인 즐거움과 깊이를 주어,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는 긴 논의가 필요 없었다. 박재열(시인. 경붇대 교수) 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 ================================= [2009 경향 신춘문예]시 당선작 맆 피시 /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양수덕 (55·본명 양선희) 시 부문 심사평- 개성있는 언어 활달하게 구사 예심을 통과해 본심의 대상이 된 열다섯 분의 작품 가운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정수연씨의 ‘숙련공’이었다. 시를 쓰고 있는 자기 세대의 어법을 개성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행과 행의 관계를 긴밀하게 조직하는 힘이 부족해 보였고, ‘숙련공’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감각적인 표현에 구체적인 사유를 담지 못한 허약한 표현이 많았다. 시에서 강한 정신력과 숙련된 언어는 함께 이루어진다. ‘도원역’과 ‘아주 조금만 남은 것들’을 쓴 김우찬씨는 언어를 정제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갈고 닦은 언어는 새롭다기보다 익숙하고 편안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언어나 세계를 향한 모험이 보이지 않는다. 시에 지루한 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안웅선씨의 ‘창밖으로 오분’은 창을 내다보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개성적인 어조로 붙잡아내는 그 착상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해 환상으로 잇대어진 연결 부분은 실감이 부족했다. 감탄어미와 ‘치명’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시의 끝을 맺고 있는 것도 안일한 수법이다. 양수덕씨는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개성있는 언어를 활달하게 구사하고 있다. 언어에 개인적 표현이 많아 소통부재의 위험이 보이기도 하나, 당선작 ‘맆 피쉬’에서는 지하도의 걸인이라고 하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대상을 섬세하게 구현해내었다. 말은 자신의 생각을 갈고 닦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을 이 세계로 실어보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신춘문예의 당선을 계기로 세계 속으로 자아를 밀고 나갈 수 있는 힘도 함께 얻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황지우·최정례> ======================================================
[20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전주 삼천변에 자원재활용센터 요요자원이 있다 ◆약력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현 한국전력 전주전력관리처 근무 [시 당선작-심사평] 촘촘한 얼개, 지난한 삶 극복의 따뜻한 주제의식 전북 거주의 응모자가 많았음을 큰 기쁨으로 생각했다. 작품 수준도 크게 향상되었음을 읽었다. 응모작들의 문법은 거의 정확했다. 구조의 탄탄함도 믿음직했다. 시대나 사회적인 문제의식보다는 시 본연의 감각과 감수성을 기조로 한 시들이 만만치 않았다. 다만 장광설 또는 단순 처리로 아쉬움을 준 시, 명쾌해야 할 전달력이 불투명하게 처리된 시도 없지 않았다. 걸러내고 걸러내다 보니 최종심에 오른 시는 강영식의 '삼거리 외눈부처'와 '물수제비', 이연아의 '대팻밥을 담으며', 안성덕의 '구두병원'과 '입춘' 등이었다. '삼거리 외눈부처'는 개성미와 형상성이 괜찮았으나 울림이 부족했고, '물수제비'는 깨끗하고 투명한 이미지가 좋았으나 단순 처리된 것이 흠이었다. '대팻밥을 담으며'는 수준급에 달했으나 부분적으로 산문형태의 상투성이 눈에 거슬렸다. '대패질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의 돌출로 말미암아 아차, 하는 사이에 당선권에서 밀려났다. 상식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구두병원'은 어둡고 구석진 삶의 단면을 걷어내고 윤끼 반짝이는 건강성을 보이고 있으나 끝 연의 처리가 안이하게 풀어져 균형을 잃고 말았다. 당선작 '입춘'은 구조의 일관된 응집력과 나무랄 데 없는 언어표상, 그리고 선명한 주제와 함께 시의 내면을 가득 채운 따뜻한 훈김이 삶을 지탱하게 하는 역동성으로 작용하여 당선작 선택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읽을수록 깊이 깨물려 단물이 고였다. 참신한 이미지의 거듭됨이 안정된 어조로 짜여 있다. 더할 수 없이 살기 힘든 현실의 가난과 외로움을 따뜻이 끌어안고 삶의 밑바닥을 뒤지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웃의 아름다움이 측은지심을 넘어 감동을 이끌어낸 수작이다.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처럼 생명감이 넘치는 노래다. 재활용품 수집이 생계수단인 할머니와 어린 손주, 이들 가족사의 진정성을 뒷받침해줄 끝 부분의 희망의 불씨 또한 시의 완성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심사위원 : 이운룡(시인·문학평론가) 정양(시인·문학평론가) ====================================== [2009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심사평] ˝메시지 분명하고 시적 논리 합당˝ 예심을 거쳐 선자들에게 넘어온 스무 분의 30여 편의 시들 중 선자들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당선을 겨룬 작품은 다음 세 편이었다. <멀리 보는 잠언>은 요즈음 유행하는 시들의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식하는 감각은 신선했고 형상화 방식 또한 개성적이었다. 특히 “석양 무렵 던져진 새들에게서 붉은 사과향이 난다”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 그는 느낌을 형상화하는 데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시상의 전체적인 전개가 추상적이고 모호했으며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그 메시지가 불분명했다. 시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의 한 양식인 한 추상적 전언의 약점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다. <허물어지는 것들>은 앞의 작품과 달리 이른바 메시지가 분명한 사실주의적 기율의 시였다. 그러나 그의 시는 현실의 ‘재현’에 충실한 나머지 그 현실적 모사를 한 단계 뛰어넘는, 이른바 시적 비약의 순간을 자기 작품에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약점을 범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들이 피랍선원들과 아홉시 뉴스, 조간 속 활자들을 거쳐 지난 암흑의 시절 “외삼촌이 허물던 야심한 밤들”에까지 육박하고 있으나 그 너머, 다른 세상을 구현하려는 데까진 미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현실의 모사 속에 갑갑하게 갇히고 말았다. 네루다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지만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 또한 죽은 시인이라는 말을 이 시인은 명심하기 바란다. <비 온 뒤>는 우선 깨끗하게 정돈된 작품이며 메시지가 분명하고 시적 논리가 합당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의 결점을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는 작품이었다.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또르르! 굴러/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라는 첫 부분의 표현들에서 보듯 이 시는 어느 날 우연히 목격된 ‘빗방울들’에서 시적 사념을 출발시켜 그것을 약동하는 언어의 충전으로 끌고 나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시로써’ 터트릴 줄 아는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괜스리 어렵거나 추상적이거나 한 표현 한 구절 없이 자기 소리를 하나의 작품 안에 오롯이 담아낼 줄 아는 그 시적 절제 또한 믿음직스러웠다. 한마디로 싱싱하고 단정하며 마지막 연에서 보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배시시 행간 밖으로 삐어져나올 듯한 작품이다. 선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그의 감각이, 그의 언어가 사념과 철학을 동반하며서, 오늘의 유행에 주눅들지 않으면서 더욱 깊은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세영 이시영) =============================== [2009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 윤은희 1 골목의 연탄 냄새 부풀어 전생의 어스름 빛으로 울적한 저녁 길바닥의 검푸른 이끼들 엄지손톱 半의 半 크기 달빛에 물들었다 아르정탱Argentan * 에 맨발로 들어가 자주 꾸는 꿈 벗어두고 나왔다 2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전설 알고 있다 아,르,정,탱, 하고 불러보는데 안쪽 벽 타고 ‘돌돌돌’ 물소리 흘러내린다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 쉼 없는 흐름에 세월 함께 묻혀졌다 무대 뒤쪽 갤러리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The Flower Vendor를 힐끔,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호흡이 울다가 지쳤나보다 3 나무로 된 제단(祭壇)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높지 않은 천장과 벽을 지나 기억字 다락방에 들어갔다 먼지 깔린 마루 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눈꺼풀 깜빡인다 습기 묻어 닳은 웃음 나무 계단을 미친 듯 닦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없었다 4 하루 종일 굶었다 마티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은그릇 반짝거림이 딸꾹질 한다 이슬 맺힌 잎사귀 후려치는 듯, 벽난로의 기둥이 꽃화분 훔쳐보고 있다 5 미친 여자의 하이힐처럼 똑딱대는 子正무렵 오늘은 '도둑맞은 시간에 걸어오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연인을 능욕한 천박한 권태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손도 닿기 전에 시들기 시작하는 마른 허브잎 그날은 불안을 잠식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심은 달착지근한 냄새로 붙어 있었다 6 詩를 생각하다 그만, 생선 눈알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子音들, 꼭꼭 밀어 넣어 반죽한다 슬픔 뚝뚝 떠내어 ‘대리만족’ 이라는 수제비를 굽는다 기호를 품지 않은 낱말 대리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조롱거리 내 몫이 아니지 7 물안개 추파秋波처럼 미끄러지다 까무러치는 호수 주변을 손잡고 뛰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맹세는 황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입술의 냄새는 서걱거리는 먼지처럼 까칠해졌다 사나흘 내린 비 끝에 다시 아르정탱에 갔습니다 본능의 능숙함이 당신의 입술을 더듬거렸습니다.당신의 입술은 나의 미각만을 기억할 뿐 두 시 방향으로 기운 햇살의 온화함이 묻어 있어요 8 주인장 오늘은 Leonard Cohen의 Famous Blue Raincoat를 들을 수 있겠소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약하게 슬어지는 音調, 불구가 된 기억에는 없다 건너 편 테이블의 핑크재킷과 홍차 사이에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할 수 없는 어색함 감돌았다 다만 성스런 스푼이 빛바랜 비단옷 차림으로 춤추고 있다 9 그날은 교리의 꽃봉오리에 충실한 교회 사람들 마음씨 좋지만 우둔한 젊은 청춘들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조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땀이 나도록 문질러도 손이 헤지 않을 그런 신부와 결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각별한 의식儀式 주인장이 누구에게나 봄소식 하나 던져 준 날이다 10 오늘은 여자들 불편하게 하는 소박한 음악 연주회가 있어요 콘트라베이스를 든 남자의 팔뚝이 검게 그을다만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어요 첼로의 숨결소리, 매일 밤 떠오르는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라토를 죽이지는 마세요 수족관의 주홍빛 물고기들 살아, 살아 외침을 거듭하고 있다 함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 소녀를 위로하는 무조건적인 달, 높이 떠올라 호수는 물안개의 소름으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끝 적셔주는 빗방울 떨어져 분열증 낚아챌 때,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해요) 11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기다린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표준말에 서투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투리에 서투르다 그런데 표준말을 잘하고 또한 사투리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 무슨 뜻, 어떤 의도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 12 남자 둘 여자 하나 쭈그린 술친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맹세가 나뭇가지 위 잔설殘雪에 반짝이고 있어요 술 그리고 여름날의 여자만 저울질하겠다 말했지요 맥주의 쓴맛을 혀 위에 굴리며 곁눈짓으로 농담을 엿들었다 혼자 잠드는 침대처럼 사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면 Bevinda의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 떠올랐어요 13 '장미빛 인생'을 닮지 않은 장미 입술에 입맞춤 한다고 장미가 웃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울었지요 그대 떠났을 때 나는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질 거예요건너 보이는 트라이엄프 아파트의 커튼 찢겨져 방향 없이 나부낀다 不在의 냄새, 비온 후의 버섯이 되었다 14 서리 내리는 차가운 11월 골목길 빠져나오는데 검은 상복 벗어던지지 못한 숙녀의 얼굴 빤히 쳐다보는 여름날의 구름은 못내 불편하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가 구름의 맥박은 거의 고동치지 않았다 15 밤이면 내 꿈을 흔들어 놓던 그대는 홀린 듯 둥글게 닫힌 가방을 열고 몰래 감추어둔 햇빛을 쏟아 부었다 -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빛이 필요해 16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경절형 심장이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55m 종루에 사로잡혀 길게 하품하더니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다트의 화살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는구나 17 빵 굽는 냄새 속, 기억은 회초리 맞은 情에 사로잡혀 한낮의 깊은 그림자 소진해 버렸다 걸어 두어 목이 잘린 꿈 외투 걸치듯 입고 나왔다 * 대구 수성구 파동 664번지에 있는 카페 윤은희 ▲경북 경주 출생 ▲계명대 일반대학원 영문학과 졸업 [심사평] 시적 요건 장치 담긴 총체적 기상도 '신춘문예'는 한 신문사의 대단한 일년농사다. 그리고 이 일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겐 두꺼운 지층을 열고 나온 새싹의 그 파릇한 정신과 가능성을 보여드리는 일이다. 세상이 저물고 나서야 떠오르는 얼굴, 새해의 일출이다. 무등산의 저 너른 오지랖을 덮어버릴 넘치는 그 일출 같은 생명력이 당선자라면 이것만으로도 '신춘문예'가 작품을 읽어낸 독자들에게 보답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남겨진 작품들은 '트래픽 잼', '새벽, 삼당 민박집 콩밭을 걸으며', '엄마가 움직이지 않아요', '프레임 아웃', '하회탈', '딱지를 접으며', 그리고 당선작으로 뽑은 '아르정탱(Argentan)안을 습관적으로 엿보기' 등이었다. 이들 작품들은 저마다 신인에게 필요한 패기와 발랄함, 시적 개성 등이 숨쉬고 있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에 올려도 손색이 없겠다 싶었다. 허나 선택에는 항시 '보다 더 좋은'이라는 조건이 걸리는 터여서 '아르정탱…'이 뽑힌 것이다. 당선작은 우선 시적 길이부터가 근년의 경향에서 조금 예외이다싶게 장시적 모습을 띠고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그리고 당선작이 지닌 장시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갖가지 시적 여러 요건이나 장치들이 담겨 있어서 그야말로 시에 대한 총체적 기상도를 읽어낼 수 있다. 이같은 길이를 파탄 없이 끌고 가는 시인의 저력이 돋보였고 후일의 야심 또한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손끝에 달린 몇개의 감각과 재주로 세상에 덤비는 얄팍함도 덜어낼 수 있었다. 덧붙여 동반 응모작품 또한 고른 수준을 보인 점도 이 시인을 더욱 미덥게 한 부분이다. 그래서 '아르정탱…'에게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당선작'이라는 배 한척을 내어드리기로 한 것이다. 응모자 모두의 건승을 빈다. 김종 시인 ======================================== [200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 기와 이야기 / 이수윤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아팠던, 그리고 달던 들숨과 날숨의 흔적에 풀꽃을 피우며 결리는 어깨뼈를 겯고 너나들이를 한다 그러다 문득 세월은 생각을 돌려놓는 큰손이라며 기와는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본다 된장 꽃으로 핀 푸른곰팡이도 밉지만은 않은 객 선선히 걷어내면 풋고추가 달다는 어머니는 먼데 소식에 귀를 세우는 능소화 하늘을 능멸하고 조소하는 그것을 왜 심으셨나 기와는 말없이 다 알고 있다 어머니의 젊음, 비릿한 날개를 단 붉은 꽃잎이 기와의 머릿속에 별처럼 누벼질 때 어머니는 오이냉국에 찬 밥 한 그릇의 밥상을 받기 위해 칠십 평생 달려온 밭고랑을 또 달린다 모서리가 닳아서 어머니 같은 기와 속엔 시간의 붉은 피가 이야기로 갇혀 있다 이수윤 △1961년 진도 출생 △광주대 대학원 석사, 희곡창작 전공 △시조시집 '은행이 익어 갈 때'출간 [시 심사평] "평범한 삶의 풍경 따스한 표현"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이른 서른 분의 작품을 차례로 읽는 동안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응모 편수가 장르 불문하고 두 배로 늘었다는 담당 기자의 전언이 있었거니와 본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이 상당한 것이었다.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숙독하는 과정에서 선자의 초점은 새로움이었다. 삶과 언어를 대하는 관점이 새로우면서도 이미지의 전개 속에 시인이 꿈꾸는 따뜻한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윤은희, 이병승, 고민교, 김재준, 최인숙, 정영희, 이명순, 일곱 분의 작품들이 최종심에 남았다 윤은희, 이병승, 고민교 씨의 응모작품들은 자유롭고 열린 시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대상을 거칠게 몰아가는 힘이 느껴졌고 상상력의 분출 또한 보기 좋은 것이었다. 문제는 이 시편들이 인간의 삶을 보다 따뜻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 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세계를 끌어안기에 이 진술들은 개인적인 사유 쪽에 더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재준, 최인숙 씨의 작품들은 전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전적인 소재와 언어 속에서 오늘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창작의 주요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아함이 새로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신의 깊이를 지녀야 할 것이다. 최종까지 선자에게 남은 작품은 정영희 씨의 '봄, 감전되다' 와 이명순 씨의 '기와 이야기'였다. 정영희 씨의 작품들은 언어가 지닌 풋풋한 상상력의 꿈이 최대의 아름다움이었다. 한 무리의 냉이꽃이 하얗게 잔물결 진다/ 마당 가득 돋아난 저릿한 음표를 밟고/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와 같은 서정의 전개는 요즘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이명순의 '기와 이야기'는 우리 일상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따스한 힘이 핏줄로 스며드는 우직한 느낌이 있다. 두 분의 작품 중 어느 분을 당선작으로 선정할 지 선자에게 몹시 난해한 일이었다. 숙고 끝에 '기와 이야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면서도 자꾸만 정영희 씨의 작품들을 돌아보게 된다. 우직하게 다가오는 따뜻한 삶의 꿈을 선자가 새로움으로 해석한 결과이지만 정영희 씨의 미래에도 함께 박수를 보낸다. (곽재구 시인ㆍ순천대 교수) ==================================== | |
첫댓글 고맙습니다.소정씨,작품을 모아주어서 공부잘하겠습니다. 금년에 더큰 성취를 기다립니다.
소정 지은님. 천천히 읽어 볼게요. 아주 힘든 작업 하셨네요. 우리 보라빛 사랑의 노래 카페인들에게 훌륭한 보시가 될 거예요.
모두 읽지는 못했지만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읍니다. 소정님 감사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