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한국시학 / 한국경기시인협회

경기언론인클럽 <경기저널 2009년 여름호>     여름의 시, 신화 - 한 여름 밤의 꿈 김 광 기 / 시인 우리는 간혹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의식인 무의식의 영향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때가 있다. 어떤 대상에 몰입하여 삼매경에 빠져 있거나 또는 어떤 대상을 아뜩하게 잊은 상태에서 데쟈뷰처럼 보이는 현상이 파노라마로 무의식 속을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때를 말한다. 그것은 마치 한 여름 밤에 깊은 잠을 자며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몽롱함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꿈꾸는 반성적의식의 지향성(志向性)에 내재된 신화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때의 신화 속에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과 인간들, 그리고 개성 있는 신들이 함께 어울려 몽환적인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화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이야기가 언젠가는 신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현실에서도 신화는 존재하는 듯하며 우리가 읽는 고전이나 현대의 작품 속에서의 이야기는 확고한 신화적 분위기를 갖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여름 밤에만 일어날 수 있는 몽환적인 이야기, 한여름 밤 꿈의 이야기이다. 그리스의 고대국가 아테네에서 허미아는 부친이 정해준 디미트리아스가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라이샌더와 함께 도망치기 위해 요정들이 살고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간다. 디미트리아스는 허미아를 찾아 숲으로 들어가고, 디미트리아스를 짝사랑하던 헬레나도 디미트리아스를 찾아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는 많은 요정(妖精)들이 살고 있으며, 이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가 부부싸움을 하며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사랑의 비약을 가진 요정 파크가 뛰어들어 갖가지 우스운 일들이 전개되지만 결국 디미트리아스와 헬레나, 라이샌더와 허미아는 서로 맺어져 행복한 결말을 맺게 된다. 이외에 여러 사건들이 개입되지만 아테네 사람들과 요정들이 숲에서 한 데 모여 낭만적이고 몽환적(夢幻的)인 세계를 만든다는 내용이다. 한 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지는 ‘한 여름 밤의 꿈’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위에서 신화는 끊임없이 씌어지고 읽힌다. 우리 주위의 자연이나 사물, 사람의 일들도 신화처럼 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자연의 섭리처럼 읽히기도 하고 현실의 세계와 비현실의 세계를 넘나드는 신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여름과 호수가 서로의 잔등을 쓰다듬으며 끌어안고 잠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고요하고 매끄러운 손이 시간의 뿌리들을 감싸 안을 때 풀어진 바람소리들 흔들리다가, 희고 두터운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물속에서 흔들리는 풀이나 떠다니는 알로써 잠을 끌어안고 숨 쉬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눕는 호수가 어둠을 받아들일 때 물렁하게 엉긴 혀 같은, 누그러진 소리들이 질척거린다 물과 어둠이 만드는 틈, 켜켜이 포개진 잠의 문 을 어루만지며, 별 없는 밤 한때 팽팽하고 완강했던 누군가의 살갗이 힘을 풀고 세상의 소리들을 끌어당겨 제 속으로 깊이깊이 빨아들이는 것을 본다 -조창환, 「눕는 호수」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위의 시 ‘눕는 호수’도 ‘밤’과 ‘잠’ 속에서 형상화된다. 또한 ‘한 여름 밤의 꿈’에서는 진정한 사랑에 눈뜨는 주인공들을 통해 낙관적이고 희망 가득한 세계 속에서 인간적인 갈등이 화해하는 분위기를 갖지만 위의 시 ‘눕는 호수’에서는 시간적 의미의 ‘여름’과 공간적 의미의 ‘호수’가 ‘서로의 잔등을 쓰다듬으며’ 자연적 의미의 시간과 공간이 대화합하는 분위기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시에서는 ‘한 여름 밤의 꿈’에서처럼 사람의 일들과 화합이 작품 안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지극히 인간적인 화자가 생략된 의미로 형상화되어 자연과 시공을 초월하며 더욱 거대하게 존재하는 정황이 있다. 이것은 사람 안에 우주가 깃들어 있는 더욱 큰 의미의 생략법(비유)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는 모든 꿈을 형상화시켜주는 어둠을 제 몸속 깊이 빨아들이는 작지만 큰 의미의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서사(또는 서사적 신화)는 비쳐지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 큰 의미가 내재되어 더 큰 세계를 비춰낸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사(또는 신화적 서사)는 전형적이고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일을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으로 또는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는 입장에서 어떤 대상이나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비춰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에서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매개로 나비를 등장시켜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 저 나비는 이승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여 오늘, 봄날의 이곳으로 나들이 온 것이다. 영산홍 철쭉꽃 피어 온 세상 화촉을 밝힌 듯 이상하게 환하던 날, 하얀 양초처럼 조금 어두운 흰빛 초상(初喪) 나비는 이승에 올해에도 봄이 왔느냐 몹시 궁금하여 지금 이 시간 죽음의 고치를 뚫고 하얀 쪽지편지처럼 이렇게 이승으로 날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저 나비와 나는 오랫동안 알아온 것이다. 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것이다. 오랫동안 안부를 물으며 저승과 이승에서 얼마나 떨리도록 연모해온 것이다. 아무도 하품하듯이 죽을 수는 없는데 왜 이리 하품하듯이 生이 졸리운가? 나비와 함께 아직 더 가야 할 꽃가마의 먼 길이 나에게 있는데……   -김승희, 「외할머니 나비」 나비는 영혼을 상징한다. 로마신화에 죽음의 잠을 뒤덮은 나비(프시케)의 이야기가 있다. 큐피드에 의해 구출되어 그와 결혼한 프시케는 신의 음료인 넥타르를 마시며 불노불사의 생명을 얻기도 한다. 이러한 신화적 상징이 아니더라도 위 시에서의 나비는 외할머니의 영혼으로 읽힌다. 또한 그것은 화자인 시인 자신의 영혼으로 보이기도 하며 죽음을 상징하는 외할머니와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나’ 그리고 두 사람 모두의 것이기도 한 영혼으로서의 상징으로 보인다. 나비라는 매개를 통해 이러한 삼각구도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으며 각각의 것으로 분리될 수도 있다. 그렇게 위 시에서의 나비는 외할머니와 ‘나’를 잇는 영혼으로서의 나비로 외할머니 시대와 나의 시대를 잇는 정신이며 화자인 내가 함께 열어나가야 할 미래의 동반자적 영혼이 된다. 현재든 미래든 나비가 없으면 화자인 ‘나’의 의미는 무색할 것만 같다. 인간에게서 영혼이 빠져나간다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시간과 공간이 나비라는 매체를 통해 일직선상으로 합일되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대화합의 구도라 아니할 수가 없다. 씨앗가게 앞에 서면 무 숭숭 구멍 뚫린 황망한 家系 사이로 좌르르 쏟아지는 어머니의 12월, 왜 들여다보고 싶은 지 어머니는 기집애가 참아야지 구신거리면 누나는, 엄만 왜 애먼 나만 갖고 그러냐고 앙당거리고 너도 애비같이 속창시 없는 것이라고 구신구신거리고 중학 안 보내줄 때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고 앙당앙당거리고 장지 덧문 사이로 더러 내리는 눈발도 한 번 기웃거리다가 참견하면서 그렇게 한 겨울 밤이 스르렁 넘을라다가도 구신구신 앙당앙당 어떻게 넘을까 싶은데 나는 건넌방에 누워 그 대화를 엿듣다가 말다가 눈 내리는 사정이 더 궁금해져 기어코 토방까지 기어 나오곤 했다 눈은, 웃뜸 영심이 고애 눈썰미처럼 참 곱게도 오는 것이어서 그 소리들은 오싹거리며 이부자리에 파고 든 이후에도 스멀스멀 내 꿈 사이를 기어다녔다 그 꿈의 웃시렁에 데롱데롱 매달린 씨 오쟁이에서는 까맣고 또글또글한 씨앗들의 소리가 밤새 티밥 튀며 날아오르기도 했는데 오늘 씨앗가게 앞에 서니 천안으로 시집 간 누나, 식당 주방에서 애들 학비는 거뜬히 번다며 웃던 누나, 보고 싶다 이 땅 여자들이 끌고 가는 단단한 삶의 알갱이들 단호한 응집력이 구신구신 앙당앙당 내 종아리를 푸르게 때리고 지나간다 - 이지엽, 「씨앗의 힘」 ‘가벼워짐에 대하여·10’라는 부제가 붙은 위의 시 ‘씨앗의 힘’에서는 누나와 얽힌 서사들이 가계(家系)의 구도를 형성한다. 고생스럽기만 했던 시절이 화자인 ‘나’를 객관화시키며 안타까운 설화처럼 펼쳐져 있다. 화자는 누나의 속상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모르는 척 딴전을 피우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 더 아프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삭이려 모진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진 세상과 누나가 부딪치는 상황을 모르는 척 피하고 있지만 설령 그것을 아는 척 한다고 해도 화자로서는 아픔 하나를 더 보태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억눌린 아픔들이 화자의 가슴에 알알이 맺혀 단단한 씨 알갱이로 굳어져 있다. 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리고 아린 아픔을 꼭꼭 다져놓은 ‘단호한 응집력’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어 삶의 더 큰 의미들을 구축하는 힘이 될 것 같다. 누나와 황망한 가계(家系)와 ‘나’의 합일 속에서 화자는 자신만의 삶이 아닌 가족 모두의 삶을 그러한 씨앗의 힘으로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품속에 고이 간직한 한 장의 흑백사진 같은 설화로 굳어 언젠가는 신화가 될 것만 같다. 다음의 시는 구체적으로 전래되는 설화를 또 다른 측면으로 형상화한 예라 할 수 있다. 어두운 산 능선 아래 한 무더기의 별들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꿈에 본 거인은 할망, 산에서 살았다는 설문대 할망, 오백 명의 아들을 낳고도 늘 기운이 넘치던 그녀, 하루는 할망이 거대한 솥에다 팥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주걱과 함께 머리 위에서 태양이 함께 돌았다. 간을 보려고 솥 안으로 머리를 숙이는 순간 미끌, 발을 헛디딘 할망이 솥 안으로 빠지고 말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비명과 함께 붉게 물들어가는 죽, 까마귀들이 산 위로 푸드득 날아올랐다. 산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저녁 무렵 사냥을 간 아들들이 돌아왔을 때, 할망은 보이지 않고 팥죽만 끓고 있었다. 배고픈 아들들이 순식간에 죽 그릇들을 비웠다. 밤이 되어 아들들의 걱정은 산 능선만큼 깊어졌다. 막내아들이 어머니를 찾아 나섰고 남은 아들들도 곧 뒤를 따랐다. 거인의 빗장뼈 같은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며칠 후 막내아들이 험난한 계곡을 지날 때였다. 솥단지처럼 생긴 거대한 계곡의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 어머니의 애잔한 울음소리, 아득하고 컴컴한 메아리를 듣는 순간 막내의 몸이 소금기둥처럼 얼어붙었다. 차갑게 돌이 되어가는 긴 그림자. 시간이 흐르고 아직 할망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들이 계곡을 지나다 우연히 본 바위 하나, 막내의 모습을 닮은 바위가 능선을 향해 화살을 당기고 있었다. 아들들은 참담하고 아득하여 막내의 몸에 다투어 손을 뻗쳤다. 그 순간 깊은 계곡을 휘감는 메아리와 함께 남은 아들들도 순식간에 모두 돌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들의 염원에 따라 한라산을 지키는 오백장군이 되었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것들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그날 이후로 꿈을 꾼 적 있다. 신화 속 거인들이 드넓은 세상을 지키는 꿈. 오랫동안 잠 밖을 서성이던 별들이 능선 사이로 숨는 걸 본다. -박현솔, 「산 그림자를 헤아리다」 ‘오백장군과 설문대 할망’이란 부제가 있는 위 시에서의 거녀 ‘할망’은 500명의 자식을 낳고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500명의 자식들을 먹이려고 팥죽을 끓이다가 그녀는 자신이 끓이던 팥죽 솥에 빠져 죽게 된다. 사냥을 나갔다가 집에 돌아온 자식들은 아무 생각 없이 끓고 있던 죽을 퍼먹는다. 그들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노모를 함께 끓여먹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예상치 못한 업보를 짊어지고 가게 된다. 그렇게 짊어지고 가야할 업보는 운명적으로 그들 모두를 고난과 파멸에 빠트리게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계기가 된 듯도 하다. 그들이 운명적인 업보를 넘지 못하고 모두 돌이 되었지만 그들은 신들의 염원으로 하나로 융화된 막강한 힘을 가진 오백장군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할망’의 살신성인이 그들을 융합시켜 시공을 초월하게 하였기에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영물로 남아 한라산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문대 할망’과 오백 아들들의 이야기처럼 신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가 합일되는 기운을 갖게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승과 저승,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며 합일된 새로운 구도로 신과 인간, 사물이 하나로 존재하는 혼융의 세계를 제시한다. 또 그러한 신화는 여름과 무관치 않다. 여름은 응고의 시간이 아니라 용해되어 융합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여름, 여름밤은 짧지만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다. 잠은 삶을 죽이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살찌우는 시간이다. 한 여름 밤의 꿈을 꾸며 신화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