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녹연(智祿延)은 음서로 내알자(內謁者)에 임명되었고, 동북면병마판관(東北面兵馬判官)으로 나가서는 재간이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숙종(肅宗) 9년(1104), 여진(女眞) 정벌에 공을 세워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승진하였다. 인종(仁宗) 때에는 여러 차례 승진하여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가 되었고, 내시(內侍) 김찬(金粲)·안보린(安甫麟),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고석(高碩)과 함께 이자겸(李資謙)·척준경(拓俊京) 제거를 모의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자겸이 오탁 등을 죽였고 아들 이지보(李之甫)를 시켜 지녹연을 순천관(順天館)에서 결박하여 매질하게 하였다. 참혹하게 하여 거의 죽게 되자 당여인 윤한(尹翰)을 시켜 먼 곳으로 압송하여 유배 보냈다. 충주(忠州)에 이르자 병으로 거동할 수 없었으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 윤한이 〈지녹연의〉 팔다리를 절단하여 길 가에 묻고 돌아왔다.
처자는 적몰되어 주군(州郡)의 노비가 되었다.
이자겸이 패망하자 지녹연의 아들과 사위에게 벼슬 한 등급을 올려주었고 다시 〈지녹연을〉 장사지내게 하였다. 지녹연은 사람됨이 거칠고 방자하며 학문과 품행[行檢]이 없으면서 스스로 지략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자겸·척준경을 제거하려다가 계획이 졸렬하여 도리어 화를 입었다. 아들 지지용(智之勇)은 후에 이심(李深)과 함께 변란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