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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규의 실전 風水|전라도 갑부 ‘박팔만’의 당대 발복과 몰락] |
재물이 불꽃처럼 피고 진 바위 명당 |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dgkim@core.woosuk.ac.kr |
일제강점기 때 전남 최고 땅부자로 보성의 박남
현(1864~1930)과 강진의 김충식 (1889~1953)을 꼽는다.
이들에 관해서는 많 은 전설이 전하는데 ‘일본 천황 생일에 초대받 았다’, ‘전남에서 신의주까지 자기 땅만 밟고 다 녔다’ 등 촌로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박남현은 별명이 ‘박팔만’이었는데 팔만석지기에서 붙여진 것이다.
김정호 가 쓴 ‘땅부자의 흥망’(김형국 편 ‘땅과 한국인의 삶’에 수록)에 박남현에 대 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박남현의 아버지 때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할아버지 묘를
미력면 대룡산에 모신 뒤 집 안의 빈 독에 쌀과 돈이 차올라 큰 부자가 되었
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묘가 일대(一代) 발복의 명당이었다.
박남현이 죽자 마자 3500평 터에 세운 8채의 집이 불타는 등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말았 다.
대한제국 말 부호들이 그랬듯이 축첩(蓄妾)에 의한 후손들의 재산 싸움으
로 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을 답사하기 전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당대에 그렇게 큰 부자
가 되었으며, 그렇게 갑자기 몰락할 수 있을까? 전설대로 할아버지 묘를 명
당에 쓴 덕분에 부자가 된 것일까?
조부 무덤 거대한 암반 둘러싸인 곳
그러나 답사를 하면서 얻은 결론은 앞에서 소개한 내용과 달랐다.
우선 흥망사다. 어떻게 큰 부자가 되었는지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문자 그
대로 팔자를 잘 타고났거나 명당 발복이란 이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반면 박남현 후손의 몰락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시대의 불운 탓이었다
고 증손 박형준(66) 씨는 전한다.
“증조부가 당대 거부이었던 것은 사
실이다. 수만금을 출연, 향교를 수선
하고 성계안, 사마안 등을 간행했을
뿐만 아니라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지원했다. 화순 쌍봉사에서
임시정부 밀사들을 만나 자금을 전했다는데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없다.
더 욱이 박남현의 아들 박태규(박형준 씨의 조부)는 광복 후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도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고 건준 세력이 관제공산당으로 몰리면서 모 든 재산을 잃고 말았다.”
또 하나의 궁금증은 당대 명당 발복지로 알려진 곳이 정말 풍수 고전서적에
서 말하는 기준과 부합하는가다. 박남현 조부 묘는 대룡산(大龍山)에 있다.
대룡산의 옛 이름은 활용산(活龍山)으로, 대룡산이 위치한 미력면의 영산
(靈山)이다. 멀리서 보아도 웅장하고 서기(瑞氣)가 서려 보인다.
이곳에는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臥牛形), 나는 용이 강을 바라보는 비룡망
하형(飛龍望河形),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등 숱한
명당이 있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무덤을 썼다.
대룡산은 마치 종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또 무덤에서 앞을 바라보면
보 성강 물이 무덤을 향해 흘러 들어오는 모습이다. 이렇게 종을 엎어놓은
듯한 주산 무덤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 길 모양은 모두 재물이 모이는 지세
라고 술 사들은 해석한다.
특이한 것은 박남현 조부 무덤을 2~4m 거대한 암반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풍수에서 바위는 매우 극단적으로 평가된다.
바위가 좋으면 명당 발복이 신속하고 강력하게 이뤄지지만, 바위가 나쁘면
재앙이 순식간에 발 생한다고 하여 일반 풍수사들은 ‘바위 명당’ 쓰는 것을
두려워한다.
좋은 바위란 생김새가 둥글거나 반듯하고, 일정한 방향성을 갖춰 나열된 것
을 말한다. 또한 바위들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무덤이 그 바위들 중
심에 있어야 한다. 박남현 조부의 무덤은 이른바 바위 명당에 위치하고 있
었다.
그렇다면 재물이 왜 순식간에 흩어졌을까? 풍수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는 것이 술사들의 주장이다.
바위 명당은 신속하고도 강력한 발복을 가져다주는가 하면 반대로 주변에
까지 파장을 일으키면서 시기와 질투, 관재구설을 부른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한 번에 몰락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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