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절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소망의 안내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으신 분이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죄 지은 인간을 구원해서
하나님께 안기게 할 수 있는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친절한 품에 안기세’
하고 우리는 찬송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안겨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복음의 말씀을
이상하게 여기게 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아버지 품에 안기게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 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진리이시므로 하나가 되어 생명을 얻어
한 생명으로 아빠 아버지로 부르면서 주의 친절한 품에 안기는 겁니다. 아니 성령의
기름부음 안에 아들과 아버지 안에 이미 안겨져 있습니다(요일2:24) 듣고 믿으면 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어떤 인간도 아버지 품에 안기지 않고는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앞에 가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거기가 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품에 안기지 않고는
진정한 안식이 없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 품에 안기게 합니다. 그 원리를 우리는 반드시 터득해야만 됩니다.
창3장에서 ‘그 날 바람이 불 때’하면 하나님도 시원할 때 산책을 나오셨구나 생각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음같이 너희를 모으려함이 몇 번이더냐?’
하신 것처럼 언제나 그 분은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서 성령을 통해 우리 영혼을 암탉이 병아리를 모음 같이
안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 성경대로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이거나
또 그날 바람이 불 때에 아담을 붙잡으려 오셨습니다. 아담을 안으려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숨어버립니다. 무화과 잎으로 옷을 해 입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가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포지션입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입니다.
한 쪽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고 한 쪽에는 여호와 신이 수면에 운행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선악간이라는 게 이런 상태입니다. “마음은 원 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부끄러움과 부끄러움입니다.
하나님께는 두렵고 사람들에겐 부끄럽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왜 숨었는데?’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 ‘누가 네게 가르쳐주더냐?’ 그만 아담이 대답을 못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알뿐입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까?
바로 선악과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부끄러움을
느끼느냐 두려움을 느끼느냐 죄의식을 느끼느냐 속에 있는 선악과 독소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독성에 위해 그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뭅니다.
이 진노 자체가 모든 스트레스입니다. 위에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짓누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들의 위치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까이 오셔서
암탉이 그 병아리를 모음같이 우리를 붙잡으십니다.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셨다는
것은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담을 품으시려고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죄가 있으니 아담이 도망갑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평화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다’
예루살렘이 바로 ‘평화의 도시’인데 평화의 도시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암탉이 새끼를 모음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고 한 것이 몇 번이더냐? 지금도 마찬가지죠.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다가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품으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성령을 거역합니다. 모셔 들이지 않습니다. 왜?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이라는 날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리거든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믿음이 뭐냐면 그리스도를 주로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지금 임하여주시옵소서’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망갑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품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모르고 슬슬 피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책감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신앙생활의 잔재입니다. 우리가 한참 정신을 팔고 나면 자신의 죄가
예수의 피 값보다 커 보입니다. 그렇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건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주의 친절한 품에 안기세’ 하면서 무턱대고 찬송하지 마세요. 히브리서를
통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 품에 안기게
하시는지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까. 이 과정을 따라가면 분명히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 품에 안기게 하십니다. 안식을 얻게 하십니다. 이 원리를
생각하며 찬양과 경배를 해야 됩니다. 트롯처럼 신나게 부르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조직과 제도의 법에 묶여 있으면 아직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병자들과
같습니다. 성경은 새 계명을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놀라운
새 계명을 잘 모릅니다. 요13장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주께서 무엇을 주시느냐 새 계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 계명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 새 계명을 모르면 결코 ‘서로 사랑’이
안 됩니다. 이 새 계명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영접해 줬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영접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서로 사랑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새 계명을 알아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는데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짐(멍에)을
지는 비밀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찬양이 없습니다. 왜 율법에서 벗어나도 지금 자기
혼자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하면서 낑낑대는 사람이 어떻게 찬양을 하겠습니까?
‘새 계명을 주노니’ 옛 계명은 밖에 있는 계명이고 새 계명은 안에 오신 계명입니다.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새 계명입니다.
예수로 오셨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보좌에 오르신 다음에 보내신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하신 이 새 계명을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19절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므로 땅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 성소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따라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온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요1:17)는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통해
받은 진리를 따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비밀통로를 가지고 있음은 어마어마한 복입니다.
첫댓글
아멘 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생명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누구나 한번 죽음 후엔 하나님의 심판과 셈하는 날은 반드시 온다고 생각할때... 늘 코람데오 자세로 살아야 됨을 깨닫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들이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훅 가는것을 보니...마음이 아픕니다.
매 순간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 날벼락 속에 지인의 사위도 포함이 되었으니 결혼한지 9개월 만에...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