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세례 (1502)
조반니 벨리니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가 1500-02년에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는 사건의 시간적 묘사가 뛰어나다.
르네상스가 한참 무르익어갈 무렵에 베네치아 화가들은
빛과 대기의 변화에 민감했고,
피렌체 화가들과 달리 시간대가 자연스럽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벨리니는 성경의 사건을 풍경화의 바탕 위에 완성했다.
그는 살아있는 자연을 감각적인 색조로 표현하여
공간의 원근감을 강조하는 화법을 사용했으며,
여기에 중심인물들을 자연스레 배치하는 독특한 공간 구성을 구현했다.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도시인 비첸차의 영주
잔바티스타 그라지아니 가르자도리는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하던 중,
요르단강을 건너면서 위험한 순례를 무사히 마치면
자신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을 위해 경당을 봉헌할 것이라 다짐했다.
예루살렘에서 안전하게 돌아온 가르자도리는 맹세한 대로 세례자 요한을 위해
성당 내에 경당을 세우고 그곳을 자신과 가족들의 무덤으로 쓴다.
벨리니는 그라지아니 가문을 위해 만들어진 제대에 제단화로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린다.
두 손을 경건하게 가슴에 모은 예수님과 팔짱을 끼듯 엇잡은 예수님의 손,
세례자 요한이 붓는 그릇에서 떨어지는 물,
성령 비둘기와 성부 하느님이 일직선상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자
신성을 지닌 분이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물을 부어 세례를 주고 있다.
광야에서 생활했던 요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요한의 왼손에는 갈대로 만들어진 십자가와
“Ecce, Agnus Dei”(보라, 하느님의 어린양)라고 쓴 두루마리를 들려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높은 곳에 서 있지만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혀 예수님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기 때문이다.(요한 3,30)
하늘에는 성령 비둘기와 성부 하느님께서
케루빔과 세라핌을 거느리고 구름을 타고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셨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성부 하느님은 팔을 벌려 외아들의 현존을 기쁨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부 하느님과 성령 비둘기와 성자 예수님은
그림의 중심부에서 세로축으로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러한 삼위일체 상징은 요한의 발아래 토끼풀에서도 알 수 있다.
하나의 줄기에서 세 잎이 돋아난 토끼풀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그림 전경에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붉은 털과 회녹색 날개의 앵무새는
일반적으로 설교자와 같은 ‘웅변의 상징’을 나타낸다.
앵무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선포한 요한의 설교를 강조하는 것이다.
앵무새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자연의 깊은 곳까지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림 왼쪽에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창세 18,1)
세 천사를 상기시키듯 떡갈나무 아래에 세 인물이 보인다.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을 받은 벨리니는 아름답고 우아한 세 인물을
서로 다른 색의 의상과 몸짓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흰색과 녹색과 붉은색 옷을 걸쳤는데,
이는 향주삼덕(向主三德)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상징한다.
이들 중 두 인물은 예수님이 벗어 놓은 옷을 들고 있고,
두 인물은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있다.
이 동작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고 완전히 비우는
케노시스(Kenosis)의 겸손을 실천한 것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의 종이 되시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부의 사랑스러운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모든 것을 비우시고
요르단강 한가운데 서시어 우리를 응시하고 계신다.
하늘에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듯 새벽빛이 비치고,
그 앞에 산과 골짜기가 있는데,
이는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5) 하고 외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연상시킨다.
또 요한의 뒤에 있는 동굴은 광야에서 은수자처럼 살았던 요한의 삶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