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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유적지를 따라 한 인도여행(2)/ 김형근
네팔 대성석가사에서 기념촬영
우리 일행은 쉬라바스타의 기원정사를 뒤로 하고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로 향했다. 시속 40Km로 목적지 까지는 5~6 시간 걸린다고 한다. 룸비니는 인도가 아닌 네팔 영토이다. 쉬라바스타에서 룸비니로 향하는 길은 어제 길보다 훨씬 덜 붐빈다. 도랑을 막고 물을 품는 인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을철에 물이 빠진 도랑에서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고기와 게를 잡던 나의 어린시절을 생각하였다.
달리는 차에서 보는 인도 사람들의 모습이 흥미로워 나는 운전수 옆에 앉아서 구경에 몰두했다. 소 시장에서는 잠깐 내려서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인도 소시장은 10일에 한번씩 선다고 한다. 소를 파는 사람들이 많기는 했지만 신발수선하는 사람도 있고, 5~6세 보이는 소녀가 닭 한 마리를 놓고 혼자앉아 있는 모습도 있다. 아마도 엄마나 아버지가 잠깐 어데 간 모양이다. 장이라는게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했는데 그 분위기가 한국이나 인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장은 구경꾼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소는 인도사람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인도인의 80%인 힌두교에서는 소를 숭배사상이 있는데 인도 소에는 한국의 누런 소는 없었고 대개 흰 소 아니면 검정 소가 많았다. 목 부근이 푹 들어간 모습이 특이했다. 소는 한 마리당 $300~400 정도 한다고 한다. 소를 몰고 다니거나 소를 목욕시키는 모습을 종종 봤는데 집단으로 사육시키는 목장은 볼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는 인도인 럭끼씨에게 소에 관해서 몇가지 물어보았다.
네팔 국경도시변화모습 인도 소시장 모습
물음: 인도에 소 목장이 있는가?
럭키: 있다.
물음: 힌두교는 소를 먹는가?
럭키: 먹지 않는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햄 버거 등을 많이 먹는 관계로 먹는 사람들이 있다.
물음: 소는 인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럭키: 소는 인도인에게 우유를 주고, 소를 이용하여 논을 갈거나 농사를 짓으며, 소를 이용하여 짐을 나르고 있다. 소똥은 볏짚과 섞어서 말려 불을 피우며 음식을 만 든다. 소의 모든 것을 이용한다.
물음: 길거리에 죽은 소도 가끔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하는가?
럭키: 이 소들은 먹지는 않고 대개 묻어 둔다.
인도는 지방자치제인데 재정 형편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재원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차량에게 통행세를 받는다고 하는데 통과하는 차량을 통제하는 톨부츠가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 너무 재미있었다. 인도적이라고나 할까. 나무로 톨부츠를 만들어 놓은 것 까지는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이해가 되었으나 심한 곳에서는 도로에 길다란 나무를 내려놓고 돈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행위가 정말로 행정기관에서 하는 일이지 아니면 몇몇 사람들의 개인적으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때마다 인도인 안내인이 나서서 해결하였는데 정말로 합법적으로 돈을 내는지 아니면 불법이어서 나무를 치우고 그냥 통과하는지 궁금하였다.
나무를 놓고 통행세를 요구하는 곳에서 안내인이 나무를 치우는 모습과 인도 톨게이트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점심도 먹고 또 지나가는 길에 재미난 곳이 있으면 잠시 멈추어 구경도 하면서 인도와 네팔 국경지역까지 왔다. 국경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화물차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국경지역에는 트럭들이 쭉 줄지어 서 있었다. 넓지 않는 도로에 화물차가 줄지어 섰는데 그 틈으로 차가 용케도 빠져 나간다. 우리가 통과한 지역의 인도 국경도시 이름은 소노올리이고 네팔 도시는 벨와였다.
원래 국경도시는 무역이 발달하는 법이지만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까지 본 인도의 어떤 곳보다도 물건의 양도 많고 종류도 다양했다. 비자를 받는 동안 잠시 내려 국경의 인도쪽과 네팔쪽을 걸어서 다녔다. 이 눈에 띈다. <불교항공>이라는게 어는 정도 규모의 항공사인지 궁금했다. 멕시코와 카나다 국경을 보아온 필자에게는 이들 나라의 국경이 흥미로웠다. 이 지역에서는 네팔과 인도인들은 비자가 필요없다고 한다. 여기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만 보고도 이들이 네팔과 인도인을 안다고 한다. 네팔쪽 상점에서 필름을 샀는데 필름 가격이 서울 김포공항의 면세점에서 파는 필름값과 비슷하게 쌌다.
한밤중에 네팔 룸비니 동산 근처에 있는 대성석가사에 당도하였다. 주지 법신스님과 명선회 회장 명선행 보살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법신스님의 은사이신 도문큰스님께서 필자의 결혼식때 서울에서 뉴욕까지 오셔서 주례를 서 주셨다. 이런 관계로 법신스님은 서울 대각사에서 총무로 있을 때 자주 만났었다.
96년 스님이 이곳으로 오시면서 뵙지 못했는데 오래만에 만나니 반가웠다. 우리 일행은 대성석가사에서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침 예불에 참석했다. 새벽의 어둠을 깨고 예불을 올리는데 여우의 울음소리도 똑똑하게 들린다. 염불소리와 여우의 울음소리가 묘하게 어울리는 가운데 예불이 끝났다. 6시에 아침 공양을 했는데 아침예불에 없던 사람들 수십명을 식당에서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배낭족이라고 한다. 본국에서 히말라야 산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대성석가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공양을 마치고 법신스님과 함께 부처님께서 출가전에 왕자로서 살으셨던 카필라성 유적지가 있는 틸라우라코트로 갔다. 가면서 법신스님으로부터 네팔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스님에 의하면 ‘네팔은 14개 도로 되어있는데 현재 룸비니 동산이 있는 이 부근은 룸비니도라고 한다. 농촌지역에 사는 네팔사람들은 보통 8세에서 12세에 부모님이 정해주는 상대와 결혼을 한다. 결혼식을 올리고 각자 집으로 와 몇 년 지내다가 15세 17세 사이에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 일주일 살다가 신랑 집으로 돌아간다.
그후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양가 부모가 합의하여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간다’고 한다. 인도도 마찬가지이지만 네팔에는 짓다 만 집들이 많았다. 스님에 의하면 ‘짓다 만 집들은 돈이 없어서 그만 둔 것이고 돈이 생기면 또 짓는다. 2층 집을 지은 사람은 제대로 사는 사람이고 3층까지 지으면 그 집안은 아주 성공한 집안이다.’
차가 가는 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티울리하와의 큰 도로를 통과하여 갔는데 병원, 호텔, 경찰서, 관공서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한국에서 보던 제비가 보여 반가웠다. 이 제비들은 이 지역에서는 1년 내내 산다고 한다. 이곳을 잘 아는 사람들은 틀리다고 하는데 여행자의 눈에는 이 곳은 네팔이지만 사람들 모습 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풍습이 인도와 똑같았다.
타울리하와에서 북서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틸라우라코트라는 마을이 있다. 약 20여가구가 모여 사는 아주 작은 이 마을 안쪽의 숲에 부처님이 출가하기전 사시던 카필라 성의 유적지가 있다. 아침 8시 30분경 서쪽문 터를 통과하여 유적지 내부로 들어서니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벽돌 유적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법신스님의 황홀한 설명을 들으며 부처님이 사시던 집과 모습을 상상하였다. 법신 스님의 설명은 자세하고도 재미있었다.
이 성터의 면적은 거의 사각형 형태인데 남북 500m, 동서450m 이다. 성터는 높은 언덕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물에 잠기지 않는다고 한다. 부처님이 사시던 궁궐터는 건물공사할 때 기초부분에 해당하는 부분만 붉은 벽돌이 남아있었다. 이 궁궐은 봄.가을에 주로 이용하였고 여름에는 여기서 20km 떨어진 히말라야산 부근인데 여기에서 히말라야 산맥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 궁궐터는 히말라야 팔천고봉의 정중앙 명당이다.’라는 법신스님의 설명이 뒤따른다. 이 궁궐터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오늘날 사마이 마이(Samai Mai)사원이라 불리우는 한쪽 벽면이 나무와 벽돌이 한데 엉긴 매우 오래된 작은 사원이 있었다. 이 사원안에는 몇 개의 신과 여신들의 형상이 모셔져 있고 그중 붓다의 탄생장면을 묘사하는 마야데비 왕비의 형상으로 추정되는 하나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마야데비 사원
카필라 성터는 주위가 한국의 해안통제구역에서 볼 수 있는 뾰족한 철사로 주위를 둘러 쳐 놓았다. 아마 일반인들에게는 통제구역인 듯 한데 이곳을 가로질러 어린이들이 학교를 가고 있고 어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다.
또 이곳 카필라 성에서 북쪽으로 논 길을 따라 약 700m 들어가면 큰 나무 밑에 높고 큰 것과 낮고 작은 스투파 유적이 남아있는데 각각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이 열반탑을 둘러본 후 다시 논길을 따라 카필라 성쪽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도 역시 논길이었는데 논사이에 난 배수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카필라 성터의 숲속에서는 원숭이 들이 뛰어 노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 다시 대성 석가사를 거쳐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동산으로 가는 길에 니가리사가르 마을의 니갈타 연못 주위에 1895년 3월에 발견된 두 동강난 아쇼카 석주가 있었다. 이곳은 틸라우라코트에서 차로 약 20분 쯤 걸렸는데 길은 비포장이었다. 이 석주에 새겨진 글을 학자들이 해석한 바에 의하면 이 석주가 세워진 곳이 현겁 제2불 구나함모니불의 탄생지라 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비록 부러지기는 했지만 그동안 말로만 듣던 아쇼카 석주를 처음 볼 수 있었고 만져볼 수 있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 사진의 보이는 곳이 부처님이 태어난 바로 그 자리다.
다시 티울리하와를 통과하여 대성석가사를 거쳐 룸비니 동산으로 갔다. 룸비니 동산 주위에는 한국계 대성석가사 뿐만 아니라, 중국,티벳,독일,베트남,네팔,태국,프랑스,미야마,독일,일본 등 세계 각국의 여러나라에서 경쟁적으로 사원을 세웠거나 세우고 있다. 룸비니 동산 가는 길에 여기저기에 각 나라의 사찰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었다.
룸비니 동산에 다다르자 소풍갔다 오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필자의 초등학교시절 소풍갈 때 가끔은 함께 가는 엄마들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선생님의 가족들과 함께 간다고 한다. 선생님에게 어린 아이들이 있으면 학생들이 업거나 안고 함께 간다는 것이다.
동산에 들어가자 관리인이 단체로 오는 사람들은 한사람만 사진기로 촬영하는 것이 여기 규칙이라고 한다. 마야데비 사원이 입구에 있었다. 이 사원안에는 BC 3세기 초에 부처님 탄생장면을 새긴 돌 부조(浮彫)가 있다. 얼굴 부분이 파괴된 돌 부조 옆에는 AD1230년경 밀라왕에 의해 새로 조성된 비슷한 형태의 부조가 나란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한 사람씩 들어가 그 부조를 향하여 절을 하였다.
룸비니 동산 아쇼카 석주 앞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정확한 장소를 1999년에 알아내어 이곳에는 화려한 천으로 장식을 하여 표시하고 있는데 통제구역이라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똑똑히 보였다. 이 동산에는 무엇보다도 아쇼카 석주가 눈에 띄었다. 이 석주는 1896년 독일 고고학자 휘러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250년 전에 아쇼카왕이 이곳을 방문하고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7.2m의 이 석주에는 다섯줄의 브라흐마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파야다시(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왕은 즉위한 지 20년이 지나 친히 이곳을 찾아 참배하였다. 여기 붓다 샤카무니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馬)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도록 했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했음을 경배키 위한 것이며,(이에) 룸바니 마을은 조세를 면제하고 생산물의 1/8만 징수케 한다. (다른 지역은 1/6을 징수했다고 함.)
아쇼카 왕(B.C.273~236)은 최초로 인도 대륙을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아쇼카왕은 통치 20년째인 B.C.249년에 룸비니를 참배했다. 그는 폭력이 아닌 법에 의해 통치하겠다는 마애법칙 등 윤리칙령들을 영토의 구석구석에 남겼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법아육(法阿育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부처님과 관계되는 유적지들을 순례하며 남긴 기둥들은 후일 불교 유적지를 찾아내려던 고고학계의 귀중한 전거가 되었다.
필자는 중국의 북경 근처를 이틀동안 관광한 적이 있었는데 북경의 자금성, 서태후와 관계있는 중국 최대의 황실정원 이화원 등을 보고 그 규모의 방대함에 놀란적이 있다. 인도도 하루에 아쇼카 석주 2개를 보면서 대륙인들의 기질을 보는 것 같았다. 신라시대의 진흥왕이 순수비를 4개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까지 진흥왕순수비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이 정도로 큰 비석을 세웠다면 설사 파손되었다 할지라도 그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되었다. 어째든 서 있는 석주를 보니 역사의 현장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룸비니 동산은 역사적인 명소이고 풍치가 좋아서 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놀고 있었다. 어린애와 같이 온 엄마들도 많고 나들이 온 사람들도 눈에 보였다. 커다란 보리수 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는 마야부인이 출산후 목욕을 했다는 싯달타 연못이었다. 이 연못을 현장스님은 "전천(箭泉)에서 동북쪽으로 80-90리 가면 룸비니 숲에 이른다. 이곳에는 석가족들이 목욕하던 연못이 있다. 물은 맑아 거울과 같은데 갖가지 꽃이 다투어 피고 있다"라고 했는데 오늘의 연못은 가장자리를 시멘트로 하였고 물은 맑지 않았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는 힌두교 몇 사람이 않아 명상과 독경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각국 사찰들의 숫자에 비하면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의 숫자는 적어 보였다.
이곳에서 겸손함과 부지런함으로 우리 일행에 큰 감동을 주신 법신스님과 헤어져 우리 일행은 부처님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로 향했다. 이곳에서 쿠시나가르까지는 오후 내내 달려야 한다고 한다. 한참 달리다 운전수가갑자기 섰다. 운전할 때 고양이가 앞을 지나가면 한참 있다가 가는 것이 인도의 풍습이란다. 가만이 보니 차 뿐만 아니라 자전거와 오토바이도 함께 섰다. 우리 일행은 밤에 쿠시나가르에 도착하였다. 숙소인 호텔에 도착하니 서울 구로구에 있는 보현사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가 미국에서 왔다고 하니 아주 반가워했다.
우리는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 동산을 보고 열반지 쿠시나가르로 왔지만 부처님께서는 라즈기르(왕사성)를 떠나 나란다와 파트나를 거치시고 강가강을 건너 바이샬리의 암바팔리 동산, 벨루바 마을, 암바라촌, 염부촌,부가성, 파바(현지명;화질나가르)마을에 있는 춘다의 동산을 거쳐 쿠시나가르에 이르셨다. 파바 마을에서 쿠시나가르로 오시는 도중 무려 25번이나 휴식을 취하신 부처님께서 히란야바티 강을 건너 두 그루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마련한 다음 머리를 북쪽에 두고 얼굴은 서쪽으로, 오른쪽 옆구리를 침상에 붙인신 채 두발을 포개어 옆으로 고요히 누우셨다고 한다. 이렇듯 부처님께서 자리에 누우시자 양 옆에 심어진 사라나무는 일제히 꽃을 피웠고, 그 피워진 꽃잎은 부처님께서 누워계신 곳에 마치 겨울의 눈과도 같이 내려 덮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은은한 향내음이 진동하였고, 하늘 천녀들의 노래소리가 사장에 울려 퍼지기도 하였다.
부처님의 시봉을 하는 아난이 부처님께 "세존께서 세상에 계실 때 우리는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가르침을 원해도 받을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그때가 되면 아난다야, 너희는 모두 네 장소를 생각할 것이다. 곧 여래가 태어난 곳, 그리고 여래가 법을 설하던 곳과 열반에 든 곳을 생각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 네 곳을 생각하므로 해서 여래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가르침을 상기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또한 아난다야, 여래가 열반에 든 것을 보고 정법이 끊겼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나는 너희 비구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고 법을 설파하였다. 이제 그것이 너희 비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아,내가 열반에 든 다음에도 청정한 계율을 존중하기를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자가 빛을 귀하게 여기고 가난한 자가 보물을 얻은 것처럼 하여라. 청정한 계율은 너희들의 스승이기 때문이며, 내가 살아 있음과 같은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비구들을 불러 모으신 부처님께서는 무엇이건 의심나는 점들에 대해 묻도록 하셨다. 아무 물음도 없자 “비구들이여,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할 것이다”이 최후의 말씀을 남기시고 바이샤카(인도력 2월:4~5월)월 보름날 밤 부처님은 열반의 세계로 드셨다.
이른 새벽 아니룻다는 쿠시나가르에 살고 있는 말라족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입멸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난다를 그들이 살고 있는 성안에 보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 입멸의 소식을 전해들은 부족의 슬픔은 그칠 줄 몰랐으며, 이윽고 그들은 향과 만다라 꽃다발로서 석존의 유해를 장식한 다음 그곳에서 6일동안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부처님 입멸후 7일째 말라족 사람들은 부처님 유해를 화장하고자 유해를 메고 성의 동쪽밖에 위치한 그들의 성지 마쿠타반다나 차이트야로 옮겨 장례준비를 하고 화장을 위해 향나무를 쌓아올린 관에 여러차레 불을 당겨 보았으나 어쩐 일인지 관은 타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기이하게 생각한 말리족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아니룻다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쿠시나가르의 부처님 열반탑에서 기념촬영
"지금 부처님 수제자 마하가섭이 500명의 비구들을 이끌고 부처님을 뵙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하가섭이 부처님을 뵈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늘의 신들이 관을 불붙지 않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또 얼마를 지나 마하가섭과 500명의 비구들이 이곳 쿠시나가르에 도착하였다. 마하가섭이 예배하기 위해 부처님 관 앞에 나아가자 부처님 두 발은 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예배가 끝마침과 동시에 부처님 발은 다시 관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부처님께 예배를 마친 마하가섭은 곧이어 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읊었다. 마하가섭이 게송을 마치자 향나무 더미에서는 스스로 불이 일어났으며, 이렇게 하여 부처님 장례식은 거행되었다.
우리 일행은 이런 유서 깊은 쿠시나가르에서 하루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방에 짐을 풀고 정리를 하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 한바탕 소동을 벌렸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지 방에는 성냥과 초가 준비되어 있었고 모기향도 함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열반경을 설하신 마타 쿠아르 사원을 찾았다. 숙소에서 100m도 채 못되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이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 주위는 안개가 자욱하다. 대지가 안개를 품고 있고 새들만 날아가고 있는데 가끔씩 차 시동 소리만 멀리서 들려왔다. 주변의 풍경은 고향 생각이 날 정도로 한국의 농촌 풍경과 비슷하였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은 우리 일행을 따라 다니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우리 일행에게 문이 아니더라도 뒤쪽으로 가면 들어갈 수 있다고 옷을 잡아 끌고 간다. 20분 쯤 기다리니 관리인이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참배를 하고 이곳에서 1Km 떨어진 부처님 다비장으로 갔다. 다비장은 붉은 벽돌이 높이 쌓여 있었고 부처님을 화장한 장소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예불을 드리고 절을 올린다음 열반사로 이동하였다. 열반사에 들어가니 이미 미얀마를 비롯한 남방불교의 여러나라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정현스님을 선두로 이순배 거사님이 목탁을 치면서 부처님 열반상을 세 번 돌았다. 목탁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니 분위기를 압도하였다. 부처님께 참배하고 참선에 드니 옆에 있던 모든 스님들이 물끼얹듯 조용하게 우리 일행의 참선을 도와주었다. 참선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 곁에 있는 스님에게 어느 나라에서 온 스님이냐고 물었다.
인도스님이라는 대답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후에 인도인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이들은 모두 가짜 스님이라고 한다. 인도 스님이라고 하면 한국, 일본, 태국등 타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보시금도 주고 여러 가지 선물도 주기 때문에 가짜 인도 스님들이 부처님 성지 곳곳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미야만 스님이 심었다는 두 그룻의 사라나무 곁을 지나 유마거사의 고향인 바이샤로 향했다.
<계 속>
2001년 2월 1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