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연의 법칙
일신교와 다신교는 모두가 신을 비롯한 초자연적인 실체에 대한 믿음에 초점을 맞춘다. 인도의 자이나교와 불교, 중국의 도교와 유교, 지중해 분지의 스토아철학, 견유철학, 에피쿠로스주의자와 같은 종요들의 특징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세상은 초인적 질서나 신의 의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법칙의 소산이라 한다. 신들도 자연법칙을 맘대로 바꿀 수 없으며, 대표적으로 불교가 그렇다.
불교의 중심인물은 신이 아니라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다. 싯다르타는 인간은 무엇을 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을 두고 고민하였다. 인간은 끝없는 욕망으로 인하여 끝없는 괴로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살다가 결국 죽음이라는 최후를 맞는다. 그 순간 그 동안 쌓은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삶은 극심하고 무의미한 생존경쟁이다.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싯다르타는 29세에 출가하여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러 방랑길로 나섰다.
그는 6년간의 고행과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 번뇌의 원인은 불운이나 사회 불공정, 신의 변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행동하는 양상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고다마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게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불만을 낳는다. 마음은 불쾌한 것을 경험하면 제거하려 하고,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사람은 꿈꾸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이루어도 만족할 줄 모른다. 상대가 떠날까봐 전전긍긍하거나 아니면 좀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 것 같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위대한 신들은 인간에게 비를, 사랑을, 돈을, 정의와 권력을 줄 수도 있지만, 이 중의 어느 것도 우리의 기본적 정신패턴을 바꾸지 못한다. 위대한 왕이라도 슬픔과 번민으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며 더 영원히 큰 즐거움을 뒤쫓는 번뇌 속에 살 운명이다.
고다마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즐거운 일이나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다. 슬픔을 경험해도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게속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지만 않는다. 실제로 슬픔 속에 풍요로움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되 그 것이 계속 유지되며 더 커지지를 집착하지 않으면, 당신은 마음의 편화를 잃지 않고 계속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을까? 고다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이 같은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고다마는 이런 명상기법을 일련의 윤리적 규칙들 위에 구축했는데, 그 규칙들은 우리가 집착이나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실제 경험에 초점을 맞추기 쉽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살생, 음행, 도둑질을 피하라고 했는데, 이런 행동은 반드시 집착(권력, 감각적 기쁨 및 부에 대한)의 불을 지피기 때문이었다. 불이 완전히 꺼지면 집착은 완벽한 만족과 평온의 상태와 자리를 바꾸는데.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열반이란 불끄기란 뜻). 열반에 이른 사람은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다. 이들은 실재를 분명하게 경험하며, 환상이나 망상에서 자유롭다. 이들도 분명 불쾌함이나 고통에 맞닥뜨릴 테지만, 그런 경험은 이제 아무런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고통 받지 않는다.
고타마는 열반에 들었으며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부처란 깨달은 자를 말한다. 부처는 모든 사람이 고통에서 벋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여생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발견을 전하는데 바쳤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한 가지 법칙으로 요약했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나는 것,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체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법(Dharma, 다르마)으로 알려진 이 법칙은 불교도에게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통은 집착에서 생긴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진리다. 불교도는 이 법칙을 믿고 모든 행동의 지주로 삼는 사람들이다. 한편 신에 대한 믿음은 그리 중요치 않다. 일신론적 종교의 제1원리는 “신은 존재한다. 그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인 반면, 불교의 원리는 “번뇌는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불교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신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신들은 집착에서 고통이 일어난다는 법칙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만약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다면 어떤 신도 그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고, 반대로 마음에 집착이 일어나면 어떤 신도 그의 번뇌를 구해주지 못한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것이 아닌 번뇌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불교도의 99%는 열반에 이르지 못했다. 또한 설령 언젠가 내세에서 열반을 이루기를 원했다 할지라도 현세의 삶 대부분은 세속적 성취를 추구하는데 바쳤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영향력이 있는 신을 섬겼다.
게다가 여러 불교의 분파들이 부처와 보살들로 구성된 만신전을 발전시켜 나갔다. 보살은 해탈할 능력을 가졌지만 부처와 함께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에 번뇌에서 해방되지 않고 있다. 이런 깨달은 자들은 불행의 덫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신도들은 이들을 숭배하고 열반에 이르게 도와 달라 할뿐만 아니라 세속의 문제들을 부탁하기도 한다.
7)인간 숭배
유신론적 종교는 신에 대한 숭배에 초점을 맞춘다. 인본주의적 종교는 호모 사피엔스를 숭배한다. 인본주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특유의 신성한 성질이 있고, 이 성질은 다른 모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믿음이다.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성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나고 믿고, 그것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최고의 선은 호모 사피엔스의 선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숭배하지만 인간성(humanity)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두고 3가지 분파로 나뉜다. 첫째,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인간성의 신성성은 모든 개인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에 처한다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 인간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손상이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 부른다. 과거와 달리 현대에서는 살인자라 하더라도 바로 고문하거나 처형하지 않는다. 그 대신 범죄자를 최대한 인도적이라 생각하는 방법으로 처벌함으로써, 인간으로서 그의 존엄을 지켜준다. 이를 통해 모든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되새기며 질서를 회복한다. 살인범을 보호함으로써 그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이는 일신론적 신앙인 기독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인의 자유롭고 신성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의 영혼을 믿었던 전통에서 유래한다. 이는 영원한 영혼의 창조주인 하나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또 다른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개인의 내면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인류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추구하는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이들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 존엄성에 e한 최악의 모독이다. 자유는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특권을 누리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바탕에서 출발하였다.
마지막으로 진화론적 인본주의가 있다. 국가사회주의, 나치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나치의 주된 야망은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보적 진화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치가 인류의 가장 발전된 형태인 아리아인을 보호 육성해야 하고, 유태인, 집시, 동성애자, 정신병자 같은 호모사피엔스의 퇴화된 종류들을 격리하거나 심지어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첫댓글 제가 읽어본 것 중에서 불교를 간략하고도 가장 잘 설명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