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
Édith Giovanna Gassion
1915년 12월 19일- 1963년 10월 10일 (향년 47세)
프랑스의 가수. 샹송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국민가수이며 프랑스의 대중가요 역사상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최고의 가수로 불리기도 한다.
생애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Édith Giovanna Gassion)은 가난한 서커스 단원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서커스단 단원으로 한 몸 건사하기조차 벅차했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포주였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에디트를 맡겼다. 어린 나이에 백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를 겪다가 7살 무렵에야 간신히 회복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키는 142cm에 불과했고, 이것이 피아프(piaf), 참새라는 뜻의 그의 별명의 유래가 되었다. * 작은 참새 La Môme Piaf | The Little Sparrow
14살 때부터 어린 에디트 피아프는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를 유랑하면서 노래하며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훈련도, 타고난 미성도 얻지 못했던 그였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는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유랑생활이 다 그렇듯이 벌이는 안정적이지 못했고, 간혹 돈이 다 떨어질 때면 그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시절로 회귀해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또한 열일곱에 첫아이인 딸 마르셀(Marcelle)을 출산했지만 아이는 2살의 나이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하나뿐인 딸을 잃고 크게 충격을 받고 자신은 부모 자격이 없다며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에디트 피아프의 소문을 들은 클럽 르 제르니의 대표 루이 루플레라는 인물이 그에게 주급이 보장되는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가 얼마 뒤 살해당하면서 관계자였던 피아프는 졸지에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진범이 잡혔고, 풀려나온 그는 어느 새 퍼진 명성을 바탕으로 노래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오로지 노래 하나로 성공한 에디트 피아프였지만, 불행이 끊임없이 뒤를 따라다녔다. 성공한 뒤에도 교통사고를 네 번이나 겪었고, 평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비행기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다. 에디트의 연인인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 1916-1949)은 뉴욕에 있는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1949년 10월 28일 포르투갈 인근의 아조레스 제도에서의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에디트 피아프는 이때 큰 충격을 받았다. 후술하는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는 바로 이 사고를 계기로 발표한 노래이다. 이후 만난 어떤 애인은 연예계 경쟁자로 변모하고, 어떤 애인과는 폭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었다.
에디트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그리스계 가수인 테오 사라포(Theo sarapo. 본명은 Theophanis Lamboukas). 1936년생으로 에디트 피아프와는 20살 차이였다. 에디트 피아프의 두 번째 남편이었으며 에디트와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1962년 결혼하였고 다음 해인 1963년에 에디트가 사망해서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게다가 에디트가 사망한 뒤 약 700만 프랑의 채무를 지게 되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테오 사라포는 1970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으며 에디트의 무덤 옆에 장례를 치렀다.
말년의 에디트 피아프는 관절염과 불면증으로 수년간 다량의 약물과 알콜을 남용하여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또한 교통사고의 후유증도 있었다. 1951년에 교통사고로 팔과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후 모르핀과 알콜 중독에 빠졌고 중독 때문에 또 고생하였다. 이후에도 심한 자동차 사고를 몇 번 더 겪어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재활치료에 들어갔으나 결과는 신통찮았다. 1959년에는 위궤양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다. 간이 급격히 나빠졌고 수혈도 필요했다. 체중도 심각히 줄어 1963년에는 30kg밖에 되지 않았다. 수개월간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결국 1963년 10월 10일 프랑스 남동부 그라스(Grasse)에 있는 그녀의 빌라에서 간부전으로 인한 동맥류로 47세에 사망하였다. 시신은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나치 스파이 의혹
프랑스 국영 채널 다큐멘터리 《의혹의 그림자》(L'Ombre d'un Doute)에서 에디트 피아프가 나치의 스파이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필 그녀의 최대 히트곡인 <사랑의 찬가>에 '당신을 위해서라면 조국도 친구도 버리겠다'는 가사가 있어 의혹이 더해진 듯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선 코코 샤넬, 모리스 슈발리에 등 유명인사들의 나치 의혹을 다뤘다.
음악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는 자신의 비극적인 삶의 반영이었고, 특기인 심금을 울리는 발라드는 애끓는 목소리로 가창되었다. 주요곡으로는 "Les Trois Cloches"(골짜기에 울리는 세 개의 종, 1946),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1946), "Hymne à l'amour"(사랑의 찬가, 1949), "Milord"(신사, 1959),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1960) 등이 있다.
Edith Piaf - La vie en rose (Officiel) [Live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rzeLynj1GYM&t=19s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1946年)
많은 가수들이 커버하는 노래 중 하나인데 오드리 헵번이 영화 사브리나에서 직접 부르기도 했다.
창법
창법은 프랑스 고전 “샹송”의 전형으로서 격정적이고 때로는 극적이며, 폭넓고 빠른 떨림의 비브라토로 가사의 마지막 하나까지도 심금을 울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