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노협>주간노동정세동향112호(4/19)
[노조의 각종 회의, 모임 때 돌려 읽고 토론합니다]
◇ 노동소식 1. 4월은 산재사망노동자의 달 2. 최저임금노동자 매달 16만원 적자가계 ◇ 노동관계법 : 집행유예선고는 당연퇴직 사유가 아니다. ◇ 노동시론 : 정당한 투쟁을 뛰어넘어
◇ 노동소식 1. 4월은 산재사망노동자의 달
4월 28일은 전 세계 110개국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고, 한국에서도 4월에는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안전보건 관련 단체들의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3시간 마다 1명이 죽고 5분마다 1명이 다치는 산재왕국이다. 지난 10년간 노동부 공식 통계로만 산재 노동자 90만 4천8백5십8명이며 사망노동자는 2만5천1백4십5명으로, 년간 평균 9만여명의 산재노동자, 2천5백여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여기에 더해 산재은폐는 최근 5년간 정부가 적발한 건수만 9,013건이며 특수고용직 노동자(레미콘, 보험모집인, 덤프, 화물운송, 학습지 노동자, 배달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는 산재보험 접근이 어려워 집계도 안 되고 있다.
최근의 주요한 산재사망사고는 2010년 9월 7일 충남당진의 (주) 환영철강에서 29살 청년노동자가 작업 중에 1600도의 용광로에 빠져 사망했으며 이는 10만원짜리 펜스를 설치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이다. 2009년 7월 의정부 경전철 붕괴사고 5명 사망 8명 부상, 2008년 1월 경기도 이천시 (주) 코리아 냉동창고 화재사고 40명 사망 9명 부상당하기도 했다. 또한 4대강 건설공사 속도경쟁으로 노동자 9명 사망하기도 했다.
4월28일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의 날이다. 1993년 4월 10일 태국에서 “바트심슨”인형을 만들던 케이더 공장에서 대형화재 발생하여 188명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노동자들이 인형을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회사가 밖에서 공장문을 닫아 노동자들이 탈출할 수가 없어 참혹한 대형 사망사고로 이어졌다. 1996년 4월 28일 국제 자유노련 각국의 노조대표자들이 촛불집회 개최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 공식 추모의 날로 지정하였다. 이후 매년 전 세계 110국 이상에서 10,000건 이상의 직접행동을 진행하는 공동행동의 날이 되었다.(민주노총)
2. 최저임금노동자 매달 16만원 적자가계
최저임금 노동자들은 한 달 내내 일해도 매달 16만원의 적자 가계다. 5분위 소득 최하위층의 가계적자가 매달 17만원이다. 최저임금 노동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며, 저소득층에 불리한 세제와 4대 보험 미가입 때문에 비소비지출에만 한 달에 50만원 가까이 돈을 사용한다. 이는 전체 가계지출에서 30% 가까이 차지하는 막대한 돈이다. 저임금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4대 사회보험 감면제도 도입으로 근로빈곤층의 적자 가계부를 조금이라도 보전해야 한다.
저임금 노동자에게 문화생활은 그림의 떡이다. 늘어나는 물가 압력 때문에 식료품비는 한 달에 35만원을 써야 한다. 때문에 문화비 지출은 한 달에 6천원도 채 사용하지 못한다. 출퇴근을 제외한 교통비 지출도 억제할 수밖에 없다. 반면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 때문에 저임금 노동자의 의료비 지출은 한 달 17만원을 넘어 전국 가구 평균치인 15만원보다 높았다.
청년 노동자들은 20대 후반까지 등록금 대출상환금을 갚기 위해 적자 가계부를 면치 못하고 있다. 청년 노동자 역시 문화생활을 꿈도 꾸지 못한 채 높은 통신요금 지출로 문화적 욕구를 대신하고 있다. 청년 노동자들은 한 달에 10만원 넘는 통신비를 지출해, 민영화한 재벌통신사의 이윤놀음에 희생되고 있다.
정부가 고용을 늘리겠다며 지난해 발표한 ‘국가고용전략2020’에서도 고용 취약계층을 청년, 여성, 고령 노동자로 설정했다. 이번 가계부조사의 대상자 모두가 저임금의 청년, 여성, 고령 노동자다. 이들의 파탄난 가계부가 정책의 실패를 증명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양만 늘리는 고용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더 이상 국민을 기만하지 말고 저임금 노동자의 가계적자부터 해결해야 한다. 최저임금 현실화가 이를 위한 지름길이다. (민주노총)
◇ 노동관계법 : 집행유예선고는 당연퇴직 사유가 아니다.
법원이 주연테크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14일 금속노조 주연테크지회 곽은주 지회장과 이영신 부지회장에 대한 해고가 정당하다는 중앙노동위원회(아래 중노위) 판정을 취소한다고 결정했다. 중노위는 지난해 12월 사측이 이들을 사규에 의해 당연퇴직 처리한 것이 정당한 인사조치라고 판시한 바 있다.
사건을 담당한 법무법인 시민의 이영직 변호사는 “법원이 조합원들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이 당연퇴직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우리 주장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이 변호사는 “회사는 재판 결과를 가지고 사규에 따라 당연퇴직 처리한다며 징계 절차도 진행하지 않은 채 고용관계를 종료했다”며 “다른 판례를 보더라도 금고 이상 형이 확정됐다고해도 자동적으로 고용관계를 종료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지회는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지회는 2008년 8월 회사의 일방적인 전직원 희망퇴직과 공장 이전 통보에 항의하며 본사 농성 투쟁을 벌였다. 회사와 근거리 공장 이전에 합의하고 농성을 해지했지만 그 해 10월 회사는 지회 전조합원을 감금 및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곽 지회장과 이 부지회장은 이 건으로 2010년 8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회사는 이를 근거로 두 명에게 당연퇴직을 통보했다.
지회는 회사의 해고 통보 이후 해고자 복직, 중고부품 사용 중단,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안양공장 안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금속노조)
◇ 노동시론(時論) : 정당한 투쟁을 뛰어넘어
노동자의 투쟁은 언제나 정당하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는 자신의 몸뚱이로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 복지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낮고 노동유연성, 노동착취율이 높은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하 국제비교는 OECD국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산재사고가 가장 많은 나라의 노동자 투쟁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십 몇 위라고 하지만 노동소득분배율은 몇 십위로 처지는 나라에서 노동자 투쟁은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다는 최소한의 항거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고 사장으로 위장시킨 특수고용노동자를 양산하는 나라에서 노동자 투쟁이 없다면 그건 유령이 사는 나라이다. 그래서 세상을 뜨자는 사람들이 많으니 자살율이 높다. 죽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해서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아지고 있다.
그렇다. 한국의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정당한 저항이다. 공무원의 노조설립조차 허용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시국선언을 했다고 교사를 해고시키는 국가는 또 어디에 있는가. 노동조합 전임자의 임금을 법으로 금지시키는 나라는? 도대체 한국처럼 노동자 투쟁으로 구속자가 많은 나라를 찾을 수 있는가? 노동투쟁에 집회금지 가처분이 내려지고 손해배상, 가압류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국가는? 이런 나라에서 노동자의 투쟁은 단지 노동자의 권리찾기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헌법수호투쟁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정당한 노동자 투쟁은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내지 못하고 있는가? 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25년, 노동자투쟁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 청년 활동가는 중년이 넘어가도록 끊임없이 투쟁하였고 어느새 거의 한세대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왜 비정규직은 늘어났고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는가. 어째서 대안으로 외쳤던 산별노조는 구호로만 그치고 정치세력화는 지지부진한가. 노동자 세상을 꿈꾸었지만 왜 여전히 노동탄압에 허덕이고 있는가. 이대로 얼마나 더 투쟁을 이어가야 노동이 존중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정당한 투쟁을 뛰어넘어야 한다. 노동자 투쟁이 '내 몫 찾기', '조직노동자 권리 찾기'에만 머물 때, 그 투쟁은 '그저' 정당한 '그들의' 투쟁이다. 그들의 투쟁은 정당하지만 우리의 투쟁이 되지 못하면 사회의 근본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어디까지가 '내 몫'이고 '조직노동자의 권리'인지 깊이 생각하고 노동자 투쟁의 기본 가치를 재구성해야 할 때이다.
공무원과 교사, 공공부문의 정당한 노동3권을 쟁취하고 정당한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 내의 비정규직과 함께해야 할 뿐 아니라 사회적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직사회개혁, 참교육실현,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가 '내 몫 찾기'의 치장이 아니라 실제 활동의 중심이 될 때 노동자 투쟁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될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선 대기업노조는 노동자 투쟁의 결과물로 얻은 근로조건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을 허용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업주의 당연한 탄압에도 '그 근로조건이라도' 지키기 위해 민주노조를 버리는 역설 앞에 서 있다.
이치는 당연하다. 자기 것을 나누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순 없다. 내 것을 조금 이라도 더 가지려 하면서 세상을 바꾸자면 누가 그 세상에 동의하겠는가.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비하면 나는 중간밖에 못 가졌으니 인정해달라고? 자기 것을 줄여야만 사회적 힘을 얻는다. 사회적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자기도 적절한 수준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다. 특히 앞에 있는 집단은 자기 헌신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3년 동안 임금을 동결 할테니 내 부문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시켜라'며 파업을 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얼마이상 받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 년 동안 동결 할테니 최저임금을 이만큼 올려라'는 정도는 되어야 노동단체가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왜 우리 것을 줄이면서 자본과 정권의 책임을 면해주는 방식을 택하는가? 내 몫도 찾고 다른 사람 몫도 올리는 방식으로 투쟁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는 그런 방식으로 여태껏 근본적 변화를 이룰 수 없었다. 역사의 가르침은 간단하다. 세상의 올바른 변혁은 앞선 사람, 앞선 집단이 헌신하였을 때 가능하였고 앞선 사람, 앞선 집단이 권리를 누리려고 할 때 그 사회는 후퇴하였다.
노동자 투쟁이 '조금 더' 가지려는 방향으로만 진행될 때, 물론 자본주의에서 정당한 투쟁이지만, '더 많이' 착취하려는 자본가들 철학에 파묻혀 버릴 수밖에 없다. '나'와 '노동자'의 물질적 욕망의 수준을 사회적으로 조절하고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제시할 때만이 노동자투쟁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정당한 노동자 투쟁에서 '함께 사는' 노동자 투쟁, '함께 나누는' 노동자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평상시에 '함께 살자'고 운동해야 지배자들의 실체가 더욱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지배자들에게만 '함께 살자'고 주장하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나 집단에게 내주기 인색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은 바뀌지 않고 있다.(일반노협 최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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