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문헌 사료를 통해 통일 신라의 서쪽 강역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현재 강단사학에서는 통일 신라의 강역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으며 이는 교과서를 통해서도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과연 이 내용이 사실일까요?
조금만 문헌 사료를 연구해 보면 이 내용은 모두 거짓임을 알수 있습니다.
1. 신라의 서쪽 경계 안동도호부의 위치
먼저 신라와 경계에 있는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 도호부에 대해 사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진晉나라 때 평주를 설치했던 지역에 후위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고 당나라 때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箕子後 封遼之樂浪 今平州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德以遼爲箕州八年 而高麗亦其地
기자는 뒤에 요(요수)의 낙랑에 봉하였다. 오늘날의 평주 노룡현 지역으로 여기에 조선성이 있다. 그러므로
무덕 연간에는 요주를 기주로 삼았다. 무덕 8년이다. 그런데 고구려도 또한 그 지역(평주 노룡현)에 있었다
『노사(路史)』
咸寧二(276)年 十月 分遼東 昌黎 玄兎 帶方 樂浪 五郡爲平州 後還合爲幽州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 5군으로 나누어 평주(平州)로 삼았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幽州: 현 북경)로 삼았다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
즉 사료를 보면 안동도호부의 위치는 북경과 가까운 하북성 지역임을 알수 있습니다. 고지도에서도 명확히 나타나는 데, 평주는 안동도호부에 설치된 곳으로 그곳에 갈석산(碣石山)과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가르는 요수(遼水)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통일 신라의 서쪽 경계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즉 신라의 서쪽 경계인 안동도호부의 위치는 하북성과 갈석산과 관련있는 지역이며 강단사학과 교과서에서 주장하는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많은 내용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2. 신라왕의 낙랑군왕 지위
두번째는 신라와 낙랑군공 지위와의 관계에 대한 기록입니다. 삼국사기와 구당서를 보면 신라에게 낙랑군공, 낙랑군왕이라는 지위를 내려 줍니다.
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26년 봄 2월,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武德] 七年(624), 遣使册拜金眞平爲柱國, 封樂浪郡王·新羅王
[武德] 7년(A.D.624; 新羅 眞平王 46) 에 使臣을 보내어 김진평(金眞平)에게 柱國을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북제의 무성황제는 6세기의 인물이고, 진흥왕은 6세기, 진평왕은 6~7세기의 인물입니다. 이 기록은 신라가 낙랑군 지역까지 차지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구당서에서는 중국왕조들이 신라왕들을 ‘낙랑군공 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의 강역과 낙랑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낙랑군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여러 문헌 사료에서는 신라가 차지한 낙랑의 위치가 한나라(漢代) 시기의 낙랑땅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之地
신라국(新羅國)은 본래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漢代의 樂浪 땅에 있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新羅, 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漢代의 樂浪[郡] 땅에 위치한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신당서에도 동일하게 그 위치가 漢代의 樂浪[郡]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지도에서도 표시하고 있습니다.
구당서, 신당서는 모두 당나라 시기의 내용의 역사서이므로 당시 신라는 하북성 낙랑 지역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중국 정사의 기록입니다. 신라의 강역에 대한 많은 왜곡하고 있는 지 알수 있습니다.
또한 당나라는 신라에 대해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합니다.
春秋卒, 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 爲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
[龍朔] 원년(A.D.661; 新羅 文武王 1) 에 춘추(春秋)가 卒하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太府卿 법민(法敏)으로 뒤를 잇게 하여, 開府儀同三司 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이는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6대 진평왕 부터 30대 무열왕까지 낙랑군왕 이라는 호칭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26대 진평왕: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
27대 선덕여왕: 낙랑공樂浪公 신라왕
28대 진덕여왕: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
29대 무열왕(김춘추) :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
30대 문무왕(법민) :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
신·구당서 뿐 아니라 이런 내용은 북사, 수서, 통고의 여러 기록에서도 “신라는 한나라(漢代) 때의 낙랑 땅에 있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종족이었다. 그 땅은 高[句]麗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북사(北史)』 「열전(列傳)」 신라(新羅)
新羅國, 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新羅國은 高[句]麗의 동남쪽에 있는데, 漢代의 樂浪 땅으로서 斯羅라고도 한다.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亦在 髙麗東南 兼有 漢時 樂浪郡之地)
신라국은 백제 동남쪽 500여리에 있다. 고구려 동남쪽이고 漢나라 때의 樂浪 땅에 있었다.
『통고(通考)』
그렇다면 당나라에 투항한 의자왕의 아들 백제 부여융에게 책봉한 웅진도독부에 대해서는 사료에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 까요?
儀鳳中, 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 遣歸國, 安輯餘衆.
〔당나라〕 의봉(儀鳳)연간(676~679)에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삼아 나라로 돌아가 남은 무리를 안정시키게 하였다.
『삼국사기』 百濟本紀 第六 義慈王
부여융에게 대방왕이라는 직위를 주었는데, 대방도 낙랑군과 같은 지역입니다.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건안(建安) 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낙랑군의 속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
결국 웅진도독부의 위치도 다 같은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문헌과 고지도등의 이런 많은 사료의 기록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신라가 한반도도 점령하지 못한 약소 국가로 거짓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현재 국사학계의 현실입니다.
3. 남북국 시대의 신라의 강역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 남북국 시대로 발해와 남북으로 나뉘어 지배하고 있었는데,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시대의 요사지리지와 신당서를 보면 발해 강역을 보면 사방 5천리로 현재 우리가 통설로 알고 있는 강역과는 매우 다름을 알수 있습니다.
祚榮 建 都邑 自稱 震王, 併吞 海北, 地方五千里,兵數十萬。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地方五千里, 戶十餘萬, 勝兵數萬, 頗知書契, 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땅은 사방 5천리이며, 戶口는 십여만이고, 勝兵은 수만이다. 書契를 제법 안다. 扶餘·沃沮·弁韓·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신당서(新唐書)』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渤海)」
남북국 시대의 신라의 강역이 고려의 강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며, 발해의 강역에 관해서는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귀중한 자료 고맙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뭐하는 곳일까요? 이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모국은 어느 나라일까요? 결국은 돈 때문이겠지요. 50년 후에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강단사학자들은 매국노였다'라고 실명으로 기록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