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미터 쯤 떨어진 손수레에서 초등학교 고학년과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엄마 옆에서 일하고 있다. 남자애는 연신 물동이를 들었다 내려놓고, 여자애는 오빠가 따라준 물에 설거지를 하고 있다. 뒤로 물러나 이들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사이 남자 아이는 꼬챙이에 고기를 끼우고 여자 아이는 프라이팬 안의 고기를 연방 저으며 익은 정도를 살폈다. 엄마는 양념 소스를 만들거나 고기를 썰며 이들의 작업을 지휘하고 손님을 상대한다.
노점에서 일하는 엄마와 아이들.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익숙한 것은 그 광경이 우리의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보았기 때문이고, 최근에는 그런 장면을 전혀 볼 수 없다는 데서 낯선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때 우리에게도 어린이 노동력이 가정 경제의 중요한 몫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거나 병중에 있어 어머니 혼자 생계를 꾸려나가야 할 경우, 대개 맏아들이나 맏딸은 자기의 노동력을 집안의 생계를 위해 희생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낯설거나 무리하게 여기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단짝였던 친구도 학교를 파하면 두어 시간 정도 친구들과 놀다가 어머니가 장사하는 시장에 갔다. 친구는 포장마차 뒤에서 보이지 않는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엄마, 출발한데이!” 끙, 하고 힘을 줄 때면 친구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것은 놀이할 때와는 다른 에너지의 분출이었다. 그 친구가 엄마를 향해 힘을 쓸 때면, 덩치가 나보다 작은 친구의 어딘가에 내가 알지 못할 힘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 힘의 정체를 내가 알게 되기까지는 철이라는 인생의 무게를 좀 더 들어야 했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친구는 앞자리에서 포장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이러한 노동을 시킨다면, 무능하다 못해 파렴치한 부모라고 비난 받기 십상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어떠한 행동을 할지 모를 일이다. '남보다 앞서기'의 광기 속에서 오로지 성적의 노예가 된 대한민국의 부모와 자식들. 거기에는 교육이 아니라 오로지 경쟁만이 도사리고 있다. 남보다 앞서야 하기에 지금 이 순간도 학원이나 학습지에 매달려야 하고, 부모나 주위 사람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어디에도 눈길을 줄 틈이 없거나 못 돌리게 하는 우리의 아이들. 그렇게 큰 아이들이 어떠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저 아이들의 노동에는 숫자나 영어단어에선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나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친구의 사려 깊은 어른스러움이 노동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저 아이들 역시 집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사려 깊고 강인하게 자라리라고 확신한다. 그들의 앞날이 이기(利己)에 찌들어 남을 나의 수단으로만 여기고, 그와 똑같이 나 역시 남에게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을 살지 않으리라고 본다. 찬란하지는 않을지언정, 욕망에 목말라 내내 신경이 곤두선 파리한 삶은 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지나가는 객의, 그것도 낯선 타국의 여행기분에다가 추억까지 버무려진 싸구려 감상일 수도 있고 혹은 섣부른 추측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알면 얼마나 알고 보면 얼마나 보았다고, 저들의 생활을 이해하며 저들의 심성을 속단하는가.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다. 저 아이들의 곱고 강한 심성을.
남매는 일을 하는 내내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힘든 내색 한 번 없다. 조금이라도 편하기 위해 요령을 피우지 않고, 오빠는 동생이 힘들까봐 궂은 일을 먼저 해치우고, 동생은 남자가 선뜻 나서기 어려운 설거지나 음식을 젓는 일을 솔선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무엇보다 남매의 얼굴에는 짜증기 하나 없이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밤거리의 네온보다 환히 빛나는 남매의 밝음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우리 아이들의 기준으로 보면 저들은 분명 불행에 치를 떨고 운명에 침을 뱉어야 했을 터인데.
나는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돼지고기냐고(Is this a pork?), 엄마는 영어를 모르는지 아니면 알아듣질 못했는지 가만히 있고, 여자애가 명랑하게 대답한다. 닭고기예요(It's chicken). 육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는 될 수 있는 한 야채 위주의 먹거리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들 남매가 있는 이 노점에서는 기름으로 범벅한, 아무리 느끼한 지방덩어리라도 나에게는 갓 밭에서 뽑아 물에 씻은 상추보다 더 신선할 것만 같다.
나는 한 접시를 달라고 했다. 그런 다음 아주 맛있게 그리고 더 없이 담백하게 접시를 비웠다. 먹으면서 몇 학년이냐고 물으니 남자애는 오학년이고 여자애는 삼학년이란다. 여자애가 또르르 굴러가는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일본? 타이완?" "코리아란다. 코리아, 아니?" "네~에. 나는 비를 좋아해요" 한다. '비? 한국의 비(rain)?' 순간적으로 착각했다. 지구촌 시대에 문화적 코드는 공간이 아닌 세대로 구분되는 모양이다. 적어도 대중음악에 관한 한 이 애는 또래의 한국 여자애와 나보다 더 가까운 것이다.
접시를 비우자 장사를 해야 하는 이들 앞에서 나의 호기심만 자꾸 메워넣을 수는 없었다. 20바트의 요금을 지불하고 돌아서다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주머니에는 이들에게 기념이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아하, 나는 여행을 계획하면서 현지에서 보고 즐기고 취할 것만 생각했지 반대로 현지인에게 우리를 알리고 나를 소개할 것을 준비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이 생각은 태국을 여행하는 내내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마침내 지갑을 꺼내 우리 돈 천원짜리 한 장은 오빠에게 주고, 오백원짜리 동전은 동생에게 주었다. 오빠는 처음엔 쭈뼛하였으나 내가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니 고맙게 받는다. 곧이어 동생도 명랑하게 돈을 받는다. 그리고 자세히 살핀다.
내가 설명했다. 오빠는 1000이고 너는 500이란다. 동생은 생긋 웃으며 ‘괜찮아요, 문제없어요(It's Okay, No problem)’ 한다. 나는 속으로 그들 남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을 돈으로만 생각하지 말기를, 이 돈이 태국 돈으로 얼마인지를 먼저 계산하여 환전할 생각부터 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외국인이 집안일을 열심히 돕는 우리를 착하게 여겨 그 상으로 준 것으로만 생각해다오. 그리하여 이 돈을 볼 때마다 우리의 노동이 외국인의 눈에도 좋아 보일 만큼 값진 행동이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기 바란다. 유흥가의 질척한 밤거리에 핀 연꽃 두 송이를 보며 나는 방콕의 이 거리에 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매의 흐뭇한 장면을 간직한 채 이 이국의 밤거리를 그만 쏘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피로가 몰려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즐길 것이 아니라면 번쩍이는 밤거리가 나에겐 더 이상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마음 한 편에선 택시를 타고 편하게 가고 싶었지만 기왕 시내에 나온 거 BTR(태국의 지상전철)을 타보기로 맘먹었다. 카오산은 BTR 노선이 없어 중간에서 내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시내 관광지도를 보고 카오산 로드와 가장 가까운 역을 나름대로 정하고 일단 목적지를 거기로 했다.
실롬 역은 큰 길에서 보아 둔 탓에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막상 표를 끊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영어로 표기된 역 이름은 발음하기조차 힘들었다. 나의 발음이 그 역을 정확히 지칭하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따라서 창구에 가기보다는 자동발매기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이것 또한 한 눈에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때 ‘캔 아이 헬프 유?’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물론 베리 베리 땡큐바리다.
이 말이 상가나 유흥지에서 들렸다면 당연 긴장을 하거나 그 호의의 문장을 상술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전철 매표창구 아닌가. 게다가 가녀린 여성의 목소리라니. 뒤돌아보니 웬 태국 아가씨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쳐다본다. 차표발매기에 부착된 노선을 보며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해 도와줄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등 뒤에 인기척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내가 차표를 어떻게 끊는지 고민하느라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십 년만 젊었어도 그녀의 호의를 관심으로 유도할 궁리를 해보기에 충분할 만큼 그녀의 인상은 선하고 예뻤다.
목적지가 카오산이고,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을 가려고 한다니까, 그녀가 자기 표를 먼저 끊으며 나에게 시범을 보인다. 나 역시 똑같이 따라했다. 그녀는 내가 중간에 환승을 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마침 같은 방향이니 자기를 따라오면 내릴 곳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이런 행운이. 그녀는 영어도 유창하게 잘했다. 짧은 구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태국사람이기도 했다.
나이는 스물셋이고, 직장 여성이라고 했다. 섬유회사인데 무역파트에서 일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과 얘기하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오분 정도 가자 환승역이니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건너편 환승하는 곳까지 오더니 다시 돌아서는 것 아닌가. 당신도 나와 같은 방향이라고 하지 않았냐니까. 그녀는 웃으면서 자기는 환승하는 곳에서 나와 반대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내가 타는 곳을 찾지 못할까봐 일부러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세 정거장만 가면 된다고 한다.
그녀의 친절을 받아들이면서도 내 속에서는 시종 알지 못할 부자연스러움이 똬리를 틀고 있다가 고개를 들곤 했다. 잠시 후 그것의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그것은 이 아가씨의 친절을 자꾸 곡해하려는 내 마음의 관성 때문이었다.
이유 없는 친절을 무슨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 하고 경계하거나, 모든 행위에는 알고 보면 자기 이익의 동기가 숨어 있다는 식으로, 호의의 이면을 탐색하는 심리태도가 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심리 메카니즘이 타국이라고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본능처럼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손을 모아 태국 식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캅 쿤 카!(Thank!)"
전철역에서 내리니 번화가와 달리 역 주변에만 불빛이 있고 조금 벗어나면 컴컴하여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카오산으로 가자고 했다. 불과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카오산에 도착하니 마치 자기 동네에 온 것처럼 푸근해졌다. 이곳이 아마 여행자의 심리적 고향 역할을 하기 때문인 모양이다. 모든 여행자들이 서로에게는 이방인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여행하는 자의 공감으로 같이 묶이는 공간. 그곳은 그들의 영토인 동시에 신민(臣民)을 선언하는 곳이기도 하다.
카오산의 밤은 낮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낮이 보헤미안의 자유처럼 분방하다면 밤은 집시의 유혹처럼 관능적이다. 자유가 방종으로 변질된 느낌이다.
어떤 의미에선 실롬이나 팟퐁거리보다도 더 환락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그러나 이곳에는 나름의 문화가 있다. 실롬이나 팟퐁은 말 그대로 환락을 ‘소비하고 거래하기’ 위한 유흥가인 데 비해 이곳은 ‘즐기는’ 환락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골목 어디에서는 금지된 약물의 자극을 쫓는 무리가 있을 법하고, 대로 어디쯤에서는 행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길거리 쇼가 벌어질 것만 같다. 어떤 백인 남자는 웃통을 벗은 채 술병 주둥이를 입에서 떼지 않고 걸어가고, 출신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갈색 피부의 여자는 만망할 정도의 노출차림으로 걸어간다.
정장을 한 동아시아의 남자 몇이 노천카페에서 수군거리는가 하면, 아이의 손을 잡고 조신하게 구경하는 말레이계 사람들도 보인다.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들이 내리깐 눈을 살짝 치켜뜨기도 하지만, 터번을 쓴 인도계 털북숭이들이 큰 눈알을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지구촌 온갖 사람들이 카오산이라는 그릇에서 비빔밥처럼 섞여 있다. 혼융, 퓨전. 자칫 무질서해보일 수 있는 밤거리지만 나름대로 카오산을 드러내는 그만의 문화이다.
특이한 것은 이 모든 자유와 환락의 한복판에 사원이 있다는 것이다. ‘카오산’이 배낭여행의 메카를 일컫는 보통명사라면 이는 정확히 카오산로드와 람부티로드라는 고유명사 지역의 합이다. 카오산로드와 람부티로드를 가르는 도로에서 람부티 쪽 도로에 면하여 사원이 하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카오산 지역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안내 책자에는 쏭크람사원(SONGKHRAM WAT)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절의 생김이 태국의 다른 사원들과 조금 달랐다. 나중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지만 건축 양식은 태국의 전통과 달리 수수했고 건물도 일반적인 것과 달리 일자형 배치이다.
무엇보다 하늘 높이 찌르는 황금빛 수투파(탑)가 없고 그 대신 중국의 도교사원이나 동아시아의 절을 연상시키는 누각이 한가운데 있다.
문외한의 짧은 안목으로 보아도 이 사원은 남방 불교와 힌두양식 그리고 중국식 문양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카오산처럼 혹은 카오산의 앞날을 예견한 것처럼.
아마 시간상 카오산의 여행 메카지 형성보다는 사원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게스트하우스나 카페, 레스토랑, 상점 등이 사원을 둘러싸면서 그 범위를 점점 넓혀나가는 형국이다.
사원은 자유와 환락의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섬처럼 보였다. 그것은 세속의 타락에 저항하는 위태로운 성(城) 같기도 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에 마지막까지 문을 열어놓은 하얀 병원 같기도 하다.
그 어느 쪽이든 여행자의 시선에서는 들뜸과 가라앉음의 이중주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밤거리 카오산의 열락과 들뜸도 나의 피곤을 이겨내진 못했다. 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게스트하우스로 직행했다. 간단한 샤워 후 나는 저격당한 사람처럼 침대에 모로 쓰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