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산책63. 기제(旣濟) - 가진 사람의 도리
제63괘 기제(旣濟)
- 가진 사람의 도리 -
旣濟 亨 小利貞 初吉 終亂(기제 형 소리정 초길 종란)
曳其輪 濡其尾 无咎(예기륜 유기미 무구)
婦喪其茀 勿逐 七日 得(부상기불 물축 칠일득)
高宗伐鬼方 三年克之 小人勿用(고종벌귀방 삼년극지 소인물용)
繻有衣袽 終日戒(수유의녀 종일계)
東鄰殺牛 不如西鄰之𥍃祭 實受其福(동린살우 불여 서린지약제 실수기복)
濡其首 厲(유기수 려)
** ⓵륜(輪)은 ‘바퀴 륜’입니다. ⓶유(濡)는 ‘젖을 유’입니다. 젖다, 은혜를 입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⓷불(茀)은 ‘풀 우거질 불’입니다. 풀이 우거지다, 수레의 포장을 의미합니다. 수(繻)는 ‘고운 명주 수’입니다. 녀(袽)는 ‘해진 옷 녀’입니다. 약(禴)은 ‘종묘 제사이름 약’입니다. 약소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
우리 사회에선 결재과정에서 결재가 완료된 것을 기제, 아직 검토 중인 것을 미제라고 하지요. 물을 건너지 못했다, 이미 건넜다 하는 단어가 여러 곳에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입니다. 이에 관한 『주역』의 이야기는 구절구절이 금과옥조입니다.
기제 형 소리정 초길 종란(旣濟 亨 小利貞 初吉 終亂).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거나 초반 운이 좋아 일찍이 성공해서 젊은 시절 윤택하게 살게 된 경우를 기제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기제란 말 그대로 하면 이미 큰 강을 건넜다는 것이니 애시 당초 태어나길 유복하게 태어나거나 일찌감치 사업에 성공하거나 고시에 합격해서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말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기제의 운을 타고 난 사람이라도 가진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말년에 얻는 것이 적어지고, 초반 길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훗날 어지럽게 끝나기도 합니다.
⓵ 예기륜 유기미 무구(曳其輪 濡其尾 无咎). 바퀴를 끌다가 꼬리를 적셨지만 허물은 없다고 합니다.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수레를 끌며 새로운 시도를 하다가 꼬리를 적시듯 약간의 손실을 입었으나 크게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 있는 사람들이 약간의 손실을 감수하고 사업을 하는 것은 할 만한 일입니다.
⓶ 부상기불 물축 칠일득(婦喪其茀 勿逐 七日 得). 부인이 수레의 가리개를 잃어버려도 되찾으려 쫓지 말라는 것입니다. 7일이면 되찾는다고 합니다. 명예나 재물을 약간 잃는다고 그걸 회복하기 위해 애쓸 필요 없습니다.
⓷ 고종벌귀방 삼년극지 소인물용(高宗伐鬼方 三年克之 小人勿用). 현명한 왕이 못된 짓을 일삼는 지방을 치리니 삼년이면 물리칩니다. 그러니 소인배들과 손을 잡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장 급하다고 검증 안된 사람을 쓰면 낭패를 당합니다. 선거 때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낙선하더라도 사술을 쓰는 사람을 피해야 다음에라도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⓸ 繻有衣袽 終日戒(수유의녀 종일계). 비단옷을 입었지만 헝겊으로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하다는 말입니다. 종일토록 경계한다는 것은 행동을 절제하고 형편이 어려운 주변을 돌본다는 말입니다. 검소와 절제, 베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있는 사람의 덕목입니다.
⓹ 동린살우 불여 서린지약제 실수기복(東鄰殺牛 不如西鄰之𥍃祭 實受其福).
동린이 소를 잡음이 서린이 간소한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실로 그 복을 받음과 같지 못합니다. 오행 상 동쪽은 상극이니 화려하게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도 상생의 서쪽 사람들이 간소한 제사를 지내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많은 재물을 가지고 화려하게 행사하지 못하고 검소하게 행사를 치러야 하는 형편일지라도 상생의 복을 받을만한 일을 하라는 충고입니다.
⓺ 유기수 려(濡其首 厲). 꼬리를 적시는 것이야 허물이 안 되지만 머리를 적시는 것은 위태한 일입니다. 재물을 모두 잃는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머리를 적시는 것은 생각이 바르지 못하거나 건강한 정신을 갖지 못한 것이 더 위태롭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산의 목민심서에는 권력자나 부자가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나라다운 나라가 되고 기업다운 기업으로 발전하는지 이야기한 대목이 있습니다. 제5부 이전육조 중 제1조 속리(束吏) 편에는 “윗사람들은 흔히 형벌과 무서운 매질로써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청렴하지도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하면서 사나움을 위주로 한다면 그 폐단은 난(亂)에 이를 것이다”라고 말해 혹독한 처벌만을 단속의 방편으로 삼는다면 끝내는 난리가 나고 말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아전을 단속하는 근본은 자기를 단속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아전은 실행한다고 합니다. 제2조 어중(御衆) 편에는 어리고 약한 자는 마땅히 사랑으로 길러줘야 한다고 합니다.
공자의 이야기도 같습니다. 아랫사람들을 대하면서 관대해야만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다(寬則得衆)고 합니다. 권력자이면서 관대하고, 부자이면서 예의와 염치를 지켜주어야 세상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자공(子貢) 공자에게 여쭈었습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지만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라고 하자 공자께서는 “훌륭하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자이면서도 예의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學而편)”라고 대답하여 권력자나 부자들의 최고의 경지는 예의를 의무로 여기는 게 아니고 아예 좋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자와 권력자의 갑질이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주역』의 가르침이나 다산의 경고나 공자의 혜안은 그래도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전도서 11장 1-2절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개역한글판]
돈이 있거든 눈 감고 사업에 투자해 두어라.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윤이 되어 돌아 올 것이다. 세상에서는 어떤 불운이 닥쳐올는지 모르니, 투자하더라도 대여섯 몫으로 나누어 하여라. [공동번역]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투자할 때에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 하여라. [표준새번역]
너는 물질을 후하게 나누어 주어라. 언젠가는 그것이 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 땅에 무슨 재난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현대인의성경]
**. 제가 무척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번역본마다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모든 번역의 이야기가 다 마음에 닿습니다. 『주역』의 ‘기제’ 괘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취지로 읽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