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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상관님의 수련법이라는 군요 인정상관님이 누구냐 하면 "도시속의 신선이야기"에서 짤막하게 등장? 하시는 분입니다. 태어날때부터 "맥이"라는 기이한 고대 신수의 모습으로 태어나셧다가 얼마후, 그 허물을 벗으시고 10년동안 천지공사를 펼치셧다는 분입니다 이 분의 유일한 제자로 최영단할머니 (정읍할머니) 가 계셧으며 , 옛날에 보기만 해도 병이 났는다고 해서 유명했었다는 군요, 후에 박문기 씨가 최영단할머니를 통해 인정상관님의 수련법을 알게 되시고 그걸 정리하셧습니다 저도 인터넷을 떠돌다 우연히 알게 된것이고, 출처는 http://suchnje.co.kr/suynje/oimu/sijag.php입니다 , 이 사이트는 백학농원홈페이지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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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부란 무엇인가?
1) 공부의 목적 2) 공부의 연원 3) 공부의 내용
2. 공부의 배경
1) 인간의 본질 2) 몸의 구조 3) 마음의 작용 4) 기초기술 - 惺惺(성성)법 - 寂寂(적적)법 - 隨然호흡법
3. 공부의 방법
1) 본성의 구현 2) 능력의 향상 - 인지능력의 향상 - 실행능력의 향상 築基(축기), 孕胎(잉태), 養胎(양태), 出身(출신), 乳抱(유포), 分身(분신)
4. 이전공부와 이후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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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부란 무엇인가?
1) 공부의 목적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잘 살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는 내적으로 인간성이 완벽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면 외적으로 아무리 많은 능력과 조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잘 살수는 없다.
둘째는 외적으로 인간적 자연적 환경에 정확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당위가 제대로 실천되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비록 다른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하더라도 잘 살수 없으며, 또한 본성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인간관계가 올바르고 조화롭게 이루어졌다하더라도 자연적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잘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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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부의 연원
사람이 처음 생겨났을 때에는 모두가 大人(대인)이었다. 대인은 내적으로 인간성이 완벽하게 구현된 사람이며 배우지 않아도 외적으로 당면한 일에 정확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즉, 대인은 大德(대덕), 大慧(대혜), 大力(대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神人合一(신인합일)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떤 연유로 인하여 점차 부족한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사람은 내적으로 인간성이 부족하였고 외적으로 당면한 일에 정확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많은 문제점이 일어나게 되었으므로 그 부족한 사람을 대인으로 회복시켜야할 필요가 생겼다. 그때부터 부족한 사람이 대인으로 회복하기 위해 행하는 공부란 것이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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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부의 내용
공부는 크게 두 측면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인간 본래의 본성을 구현하는 것이며, 하나는 외부적인 환경에 정확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인간 본래의 본성이 구현되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베푸는 것이 있게 되는데 이 베푸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덕은 본성의 확충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본성의 확충은 인간의 도덕적인 당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능력의 향상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인지능력의 향상이고 다른 하나는 실행능력의 향상이다. 인지능력향상은 사람의 인지기능자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실행능력향상은 기존의 몸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갖는 새로운 몸(三元體)을 만들므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구현하여 큰 덕을 쌓은 것을 大德(대덕)이라 하고 인지능력이 극대화된 것을 大慧(대혜)라 하고 실행능력이 극대화된 것을 大力(대력)이라고 한다. 이를 다 갖추면 神人合一(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내용이 [三一神誥삼일신고]에 있다. - ...神在無上一位, 有大德大慧大力, ...自性求子... -
이 德(덕), 慧(혜), 力(력)을 쌓는 공부의 세 과목이 아주 고대에는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 부분씩 강조되어 세개의 가르침으로 나뉘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儒家(유가)와 佛家(불가)와 仙家(선가)이다. 儒家(유가)는 德(덕)을 중시하였고 佛家(불가)는 慧(혜)를 중시하였고 仙家(선가)는 力(력)을 중시하였다. 최고운 선생께서 말씀하신 고대에 있었다는 三家(삼가)를 회통하는 우리 고유의 玄妙之道(현묘지도)는 德(덕), 慧(혜), 力(력)의 세 과목이 융합되어 있었던 [三一神誥삼일신고]의 이 가르침을 말한다.
이 德(덕), 慧(혜), 力(력) 세 과목의 본질을 살펴보면 德(덕)은 인간의 본성을 구현한 것이요 慧(혜)와 力(력)은 능력이다. 물론 세 과목이 모두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의 측면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중심이 되는 體(체)는 德(덕)이요 慧(혜)와 力(력)은 用(용)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뉘어진 가르침 중 儒家(유가)는 우리 본래의 가르침의 중심인 것이다.
대야발 선생께서 지으신 [檀奇古史단기고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신하나 사신의 물음에 대답하신 역대 단군들의 말씀은 하나같이 儒家(유가)의 시각이다. 그 이유는 지금의 儒家(유가)가 원래 우리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儒家를 夏族의 사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의 역사가 특히 고대사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래 우리가 살았던 곳이 지금의 중국 땅이었고 나중에 그곳에서 밀려서 이곳으로 왔던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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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부의 배경
1) 인간의 본질
인간은 천지가 만물을 生(생)하는 마음을 본성으로 삼아 태어난 존재로서 만물 가운데 靈長(영장)이며, 또한 천지를 완성시키고 만사를 주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원래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원래 사회적인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단순히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사이 또는 인간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 놓여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관계가 원활히 유지될 때 비로소 인간으로써의 완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관계성을 대표하는 것이 五倫(오륜)이다. 이 오륜 가운데 인간관계의 근본 출발은 혈연관계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이 혈연관계에서부터 바른 인간성을 길러 다른 사람 및 사물에까지 미루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孝(효)를 강조해 왔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관계에서 이러한 관계를 원만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본은 상대에 대한 사랑과 배려와 더불어 이를 사리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근거하여 실천하는데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은 이를 실행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자기의 私慾(사욕)에 끌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욕에 끌려가지 않고 公心(공심)을 실현하는 것이 공부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 私慾(사욕)은 形氣之私(형기지사)에서 파생되는 욕구이다. 形氣(형기)는 태어날 때 입는 형상과 기운이고 私(사)는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는 것이다.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形氣(형기)를 사사롭게 여기므로써 私慾(사욕)이 파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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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몸의 구조
사람의 몸은 三體(삼체)의 구조로 되어있다. 三體(삼체)는 心體(심체), 氣體(기체), 身體(신체) 이다. 이것은 기능을 중시하여 분류한 것이다. 만일 구성원소를 중시하여 분류하면 身體(신체)를 精體(정체)와 肉體(육체)로 더욱 세분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四體(사체)로 구분되게 되는데 그 四體(사체)는 구성원소를 중시하여 神體(신체), 氣體(기체), 精體(정체), 肉體(육체)로 불리어 진다. 그 중 神體(신체), 氣體(기체), 精體(정체)를 합하여 三元體(삼원체)라 한다.
心體(심체)는 의식작용을 하는 부분으로서 神(신)이라는 자재로 만들어져 있고 신을 소모하며 작동되는 조직체이다. 그런데 이 心體(심체)는 識神(식신)과 本神(본신)의 이중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氣體(기체)는 천지의 기와 상호작용하는 부분으로서 氣(기)라는 자재로 만들어져 있고 기를 소모하며 작동되는 조직체이다. 身體(신체)는 精(정)이라는 자재로 만들어진 정체와 육으로 만들어진 육체를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身體(신체)는 心體(심체)와 氣體(기체)가 의지하여 거처하는 곳이다. 이 삼체가 겹겹이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작동한다.
물질외에 이 三體(삼체)의 원자재가 되는 精氣神(정기신)을 三元(삼원)이라고 한다. 삼원은 피를 精製(정제)하여 만들어진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그것을 정제하면 피가 된다. 피를 정제하면 精(정)이 된다. 정을 정제하면 氣(기)가 된다. 기를 정제하면 神(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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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음의 작용
보통사람의 경우 의식이라 함은 識神(식신)을 말한다. 식신의 의식작용은 覺知(각지)작용과 感動(감동)작용으로 나누어진다. 覺知(각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는" 의식작용이다. 이 각지하는 마음을 照心(조심), 道心(도심), 心君(심군)이라 하며 이것이 인지기능자이다. 感動(감동)은 외물에 感(감)하여 動(동)하는 의식작용이다. 이 감하여 동하는 마음을 動心(동심), 人心(인심)이라 한다. 보고, 듣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려하는 등의 생겨서 움직이다가 없어지는 生滅心(생멸심)이 모두 動心(동심)이다.
本神(본신)이란 사람의 몸 즉, 心體(심체)와 氣體(기체)와 身體(신체)를 만드는 자이며, 육체가 소멸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 本神(본신)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본신은 그러한 수많은 환생을 통하여 습득된 방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그와 달리 識神(식신)은 入胎(입태)된 이후부터 본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태어난 이후 우리의 의식작용을 주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識神(식신)은 본신과 달리 그가 생겨난 이후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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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초기술
- 惺惺(성성)법
惺惺(성성)은 인지기능자인 照心(조심) ( = 心君 )이 "깨어있는 상태" 또는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그 알아차리는 정도는 뚜렷할 수도 있고 희미할 수도 있다. 보통사람의 일상생활에서는 흐릿하게 알아차리고 있다가 사이사이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하면서도 그것을 선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며 또 그 사이사이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말한다. 이 照心(조심)을 뚜렷하게 또 계속하여 깨어있게 함으로써 照心(조심)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성성법이다.
성성공부를 하려면 맨 처음 필요한 것이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몸으로 체득하여 알아야 한다. 그것은 깨어있지 못한 상태와 대비하여 그 차이를 분명히 체감하면 체득이 된다. 이를 위한 간단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이것을 체득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아주 없는 상태와 분명히 있는 상태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체감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여러 번 체감하면 체득된다.
방을 약간 어둡게 하여 몰입하기 쉽게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재미있는 영화를 본다. 한창 몰입되어 있을 때 보조자가 불을 켜든지 소리를 내든지 하여 그 몰입상태를 갑자기 깬다. 그러면 몰입에서 깨어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이때 바로 직전의 몰입하여 “모르는” 상태와 비교하여 차이점을 감지한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의 차이이다. 이것을 체득될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하면 된다.
몰두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알아차리는 상태"로 되었을 때 그 "알아차리는 상태"를 직전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와 비교하여 그 차이를 감득하는 것이 요점이다.
알아차리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몰두하기 쉬운 것을 이용하는 데, 대개 사람이 무엇에 몰두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쉬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든 무어든 그 사람이 쉬이 몰두하는 것을 택하여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꼭 그러한 특정한 매개체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 사람이 무엇에 몰두하여 있을 때 깨워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또한 보조자 없이 스스로가 언제라도 막 알아차리는 상태로 돌아왔을 때 직전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가 그렇지 못한 상태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체득하였으면 비로소 照心(조심)의 능력을 강화하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는 희미하지 않고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차리는 상태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각각의 효용이 있다.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照心(조심)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고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지구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 照心(조심)의 능력이 효율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고 있지 않다면 알아차리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공부능률에 차이가 생긴다. 심한 경우 거의 공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대상이 알아차리기도 쉽고 그 알아차리는 상태도 잘 유지되는 것이 있는 반면 알아차리기도 어렵고 그 알아차리는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를 본다고 하자. 처음에는 "動心(동심)이 그 물체를 보고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그 알아차리는 照心(조심)은 어디로 가버리고 동심만 물체를 쳐다보고 있게 된다. 즉, "動心(동심)이 그 물체를 보고있는" 상태는 유지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없는 상태이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그 보는 동심조차도 어디로 가버리고 맨 눈만 멍하니 물체를 마주하고 있게 된다.
이에 비하여 궁금하여 알고 싶은 어떤 한 가지 의문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면 비교적 알아차리는 것을 뚜렷하고 오래 유지할 수 있다.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고 있다면 그 상태를 뚜렷하게 유지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으므로 대상은 어떤 것이든 별로 상관이 없다.
일상 생활에서는 일의 처리를 위하여 生滅心(생멸심)이 사용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照心(조심)이 뚜렷이 깨어 있을 수 있다면 그 생멸심의 생멸중에도 照心(조심)의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간단없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 또한 照心(조심)을 유지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照心(조심)의 힘이 강화되면 그러한 생멸심조차도 세세히 照觀(조관)할 수 있으므로 그 생멸심의 선악을 변별하여 그 생멸심을 선으로 향하게 하고 악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덕을 닦는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된다. 이것을 省察(성찰)이라고 한다.
照心(조심)이 照觀(조관)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動心(동심)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은 照心(조심)은 惺惺(성성)하고 動心(동심)은 寂寂(적적)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상태를 惺惺寂寂(성성적적)이라한다.
照觀(조관)의 대상을 照心(조심) 자신으로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를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이것을 回光反照(회광반조)라 한다.
照心(조심)의 능력이 어떤 정도이상으로 강화되면 肉身(육신)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인지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肉眼(육안)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肉耳(육이)가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本神(본신)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즉, 本神(본신)이 나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니 父母未生前(부모미생전)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된 선입관 등을 소멸시킬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形氣(형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자기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며 그것이 자기의 사유물이라고 잘못 인지하여 그것을 사사롭게 여겼던 形氣之私(형기지사)가 있다. 만일 그것을 살펴본다면 그 형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독립된 개체가 아니며 더구나 자기의 사유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사사로움은 자연히 소멸되게 된다. 그리하여 公心(공심)을 회복하게 되며 형기지사로부터 파생되었던 사욕도 근본적으로 소멸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아무리 인지능력이 강화되었다하더라도 그러한 점을 실제로 살피지 않는다면 그 형기지사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능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가 더 중요하며 그것은 그의 가치관에 따르는 것이므로 어떤 가치관을 갖느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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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寂寂(적적)법
動心(동심)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寂寂(적적)이라 한다. 動心(동심)을 사용하여 일을 하다가 일이 끝나고 그 動心(동심)이 소멸되어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寂寂(적적)상태이다. 만일 惺惺(성성)의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여 照心(조심)이 동심의 동태를 照觀(조관)할 수 있다면 寂寂(적적)의 상태가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 있고 동심의 생멸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게 되지는 않으므로 寂寂(적적)상태를 구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요령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 요령은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한 종류는 의식을 이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한 종류는 호흡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적적의 상태에 놓여지면 심신의 모든 기능이 깊은 휴식을 취하게 되고 많은 양의 三元(삼원)이 응결하여 經絡(경락)에 모여들게 된다. 이 현상은 三元(삼원)의 정제효율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즉 三元(삼원)의 정제량이 많아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제는 三元(삼원)의 휘발과 응결을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정제량이 많지 않은 것은 휘발은 많이 되지만 응결되는 양이 적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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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隨然호흡법
호흡은 本神(본신)의 관장하에 쉬임없이 실행된다. 이것은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실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몸에 비정상이 생겼을 때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하는 특수한 호흡이다. 그것은 한숨과 흐느낌이다. 本神(본신)이 사용하는 이 특수한 호흡법을 의식적으로 잘 활용하면 생명력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호흡은 심신의 침잠을 유도하는 좋은 방법이 되며 그 침잠의 결과 삼원의 정제량이 많아져서 삼원의 보유량을 늘일 수 있다. 그리하여 三元의 최대 보유량을 확보하는 데에도 이 호흡법을 사용할 수가 있다. 호흡법에는 많은 종류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이러한 호흡법을 편의상 "隨然호흡법"이라 하기로 한다.
한숨은 가슴에 火氣(화기)가 찰 때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나온다. 한숨을 쉬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가슴의 火氣(화기)가 좀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잘 활용하면 이 한숨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心火(심화)와 관련된 고혈압, 당뇨 등과 火痰(화담)이 관련된 여러 질병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속을 끓일 일이 많이 생긴다. 속을 끓이면 火氣(화기)가 치솟게 되는데 이 火氣(화기)는 水氣(수기)를 말리며 痰(담)을 생기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水氣(수기)가 마르는 것은 곳 생명력이 줄어드는 것이고 痰(담)이 생기는 것은 곳 병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한숨이 효과가 있다.
남이 보는데서 한숨을 쉬는 것은 우리 풍습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므로 남이 보지 않는 혼자만의 장소에서 한숨을 쉬면 될 것이다. 한숨을 쉬면 가슴속에서 무언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며 속이 시원해진다. 그러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또 한숨을 쉬면 마음이 더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렇게 여러 번 연속하여 한숨을 쉬면 마음이 매우 차분히 가라앉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 매일 하루에 한두 번 이렇게 하면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매우 효과가 있다.
연속하여 한숨을 쉴 때 어떤 때는 시원하지 않고 오히려 불편할 때가 있다. 그것은 한숨을 잘못 쉬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 흐느끼면 그 상태가 해소된다. 아이들에게서 이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아이가 심하게 울고서 그 울음이 어느 정도 그쳐지면 그 때 흐느낌이 나온다. 흐느낌은 외호흡과 내호흡의 조화가 깨어졌을 때 그것을 맞추기 위하여 실행되는 것이다. 내외호흡의 조화가 깨어지면 기의 수급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묘한 이치가 있다. 무엇인가 하면 내호흡과 외호흡의 일치정도가 내호흡의 활성도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호흡이 일치한 상태가 계속되면 내호흡의 활성도가 점차 낮아진다는 것이다. 내호흡의 활성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심신의 활동이 줄어들어 점점 침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심신의 활동이 거의 없는 깊은 침잠상태에 이르게 된다.
두 호흡을 아주 일치시킨 상태로 계속 호흡하면 내호흡의 활성도가 낮아져 점차 내호흡량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외호흡량도 같이 줄어든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내외호흡을 거의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자연적인 상태이며 호흡을 의도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므로 이 숨쉬지 않는 상태를 3,40 분씩이나 오래 유지하더라도 생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음식을 먹으면 이것이 소화 흡수되어 영양소가 되는데 이를 精製(정제)하여 피를 만든다. 피를 정제하여 精(정)을 만든다. 精(정)을 정제하여 氣(기)를 만든다. 氣(기)를 정제하여 神(신)을 만든다. 이 과정들은 항상 실행되지만 몸이 침잠상태에 있을 때 정제하는 양이 더 많아진다. 이 침잠상태는 일종의 휴식상태로서 잠을 자는 것도 이것의 한 종류이다. 그러므로 낮에 움직일 때 보다 밤에 잘 때 정제량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좀더 깊은 침잠상태를 만들면 그만큼 더 정제량을 늘일 수 있다.
침잠상태를 유도하는 데에는 옛부터 수많은 방법들이 동원되어 왔다.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그 중의 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호흡법의 일종인데 몸의 자연적인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므로 아무 위험성이 없는 것이 제일 큰 장점이다. 그리고 잘못하게 되면 불편한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으므로 호흡을 잘못하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장치의 성격도 있다.
지구에서 산소는 생명체와는 매우 특별한 관계가 있다. 공기중의 산소는 외기로부터 폐로 들어가 몸속에 흡수되어 산화되고 그 산화된 결과물인 이산화탄소가 폐로 이동되어 다시 외기로 나간다. 내호흡은 폐에서 산소를 취하는 것에서부터 세포에서 산화되고 이산화탄소를 폐에서 배출하는 것까지의 과정을 담당하며 그 본질적 성격은 "요구"이다. 산소가 들어와야한다고 "요구"하고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외호흡은 이 "요구"에 응답하여 "지원"해주는 것뿐이다.
이 호흡법의 어려움은 내호흡을 아는 것이다. 내호흡을 안다는 것은 앞서 말한 그 "요구"를 느끼는 것이다. 한숨을 푸-욱 쉬면 무언가 수-욱 "내려가는 것"이 가슴속에서 느껴진다. 이것이 내호흡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호흡의 거동"인데 그냥 "내호흡"으로 줄여서 말한다. 한숨을 계속 쉬어보면 그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한숨을 쉴 때 숨을 내쉬기 전에 들여 쉰다. 즉, 크게 들여 쉬었다가 푸-욱 내쉬게 된다. 그런데 들여 쉴 때는 무언가 "올라가는 것"이 가슴속에서 느껴진다. 이것은 내어 쉴 때 느꼈던 바로 그 내호흡이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요구의 방향이다. 올라가는 방향은 들여 쉬어달라는 요구이고 내려가는 방향은 내쉬어달라는 요구이다. 그 요구에 따라가면 제대로 숨을 쉰 것이고 그 요구에 맞추지 못하면 숨을 잘못 쉰 것이다. 숨을 잘 쉬면 편안하고 숨을 잘못 쉬면 불편하다. 그 편하고 불편한 것을 잘 느껴서 호흡을 인도해주는 표지로 삼아야 한다.
이제 내호흡을 알았으니 이 호흡을 할 수 있다. 아침 저녁으로 한시간 정도씩 하는 것이 좋다. 반듯하게 앉아서 하는 것이 좋은데 굳이 결가부좌를 할 필요는 없다. 눈은 감아도 좋고 떠도 좋다. 활원운동을 한 다음 이어서 이 호흡을 하면 호흡이 더 잘 될 것이다. 침잠후에는 몸의 활동량을 서서히 늘여야 한다. 이때 활원운동으로 몸을 풀어주면 더욱 좋다.
내호흡이 올라가면 그것을 따라서 들여 쉰다. 올라갔다가 방향을 전환하여 내려가면 그것을 따라 내어 쉰다. 이렇게 계속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내호흡이 올라가므로 거기에 따라 숨을 들여 쉬는데 전환점에 이르러 방향을 아래로 바꾸어 내려가지 않고 위로 향한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리되면 호흡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은 지원이 부족하여 요구가 충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요령은 요구에 대한 부족을 채워주기 위해 강력하게 지원하는 것이다. 즉, 짧고 강하게 들여 쉬는 것이다. 그리하면 요구가 충족되어 내호흡의 방향이 바뀐다. 만일 한번으로 안되면 두번, 세번, 네번 그렇게 해준다. 대개 그 정도면 요구가 충족된다. 요구가 충족되면 내호흡의 방향이 바뀌어 내려가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따라 내어쉬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속하여 수 차례 짧고 강하게 들여 쉬는 것이 흐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내호흡과 외호흡의 조화가 깨어졌을 때 조정하는 기술인데 사실은 어린아이도 이것을 알고 있다. 어린아이가 울음을 그치면서 흐느끼는 것은 누구나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태어난 후 識神(식신)이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本神(본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외호흡의 조화가 깨어졌을 때 그것을 조정하기 위해 本神(본신)이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환점의 위치는 本神(본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즉 識神(식신)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몸의 상태에 의해 저절로 결정되는 것이지 識神(식신)이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성들여 호흡을 해보면 어렴풋하지만 내호흡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올라갔다가 방향을 바꾸어 내려간다. 주-욱 내려가서 아랫배 어디 정도에 가면 또 방향을 바꾸어 올라간다. 이러한 거동이 연속하여 느껴지는 것이다. 외호흡은 이 내호흡의 거동에 간발의 차이를 두고 계속하여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래에서도 위에서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다. 내호흡이 내려갈 때 숨을 내쉬는데 전환점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올라가지 않고 방향을 아래로 둔 채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것도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원이 부족하여 요구가 충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단지 방향만 반대일 뿐이다. 이 문제의 해결 요령 역시 위에서와 같이 강력하게 지원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반대로 짧고 강하게 내어 쉰다. 그리하면 요구가 충족되어 내호흡의 방향이 위로 바뀐다. 만일 한번으로 안되면 두번, 세번, 네번 그렇게 해준다. 대개 그 정도면 요구가 충족된다. 요구가 충족되면 내호흡의 방향이 바뀌어 올라가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따라 들여쉬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전환점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곳이 하단전의 위치이다.
내호흡이 방향전환을 하지 않을 때 방향전환을 유도하는 방법이 한가지 더 있다. 그것은 止息이다. 외호흡을 멈추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내호흡이 슬며시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외호흡도 따라서 움직이면 된다. 이 방법은 침잠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인데 너무 긴 시간동안 내호흡이 움직이지 않으면 더 이상 이방법을 사용하기 곤란하다.
이 두 가지 요령은 외호흡을 이용하여 내호흡을 조종하는 기술인데 기본적으로는 외호흡이 내호흡을 따라가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렇게 외호흡으로 내호흡을 조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호흡을 조종하는 기술은 방향전환시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호흡의 전체 움직임중 어디에서나 사용될 수 있다.
외호흡이 내호흡을 앞서가도 안되지만 뒤쳐져서 간격이 커도 안 된다. 뒤 따라 가되 간발의 차이로 거의 같이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오르락내리락 계속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 하부 전환점에서 상부 전환점까지의 내호흡의 상승높이가 바로 내호흡이 요구하는 외호흡의 호흡량이다.
이렇게 계속하면 하부 전환점은 그 위치가 아랫배에 그대로 있는데 상부 전환점은 조금씩 내려간다. 즉 그 요구량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호흡을 계속 유지하면 결국 내호흡의 상승높이가 영(0)에 이르게 된다. 즉 상승하지 않고 방향만 위로 - 아래로 천천히 바뀔 뿐이다. 이때 호흡요구량은 없고 따라서 외호흡은 없다. 이때가 가장 깊이 침잠된 상태이며, 적적의 상태이며, 삼원의 정제량이 가장 많은 상태이다. 이 상태의 호흡이 胎息(태식)이다.
호흡을 할 때 호흡량의 크고 적은 것에 관심을 두면 안 된다. 중요한 점은 호흡량이 크든 적든 내외호흡의 일치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호흡량이 크더라도 일치상태를 잘 유지하면 자연의 이치에 의해 점차 호흡량이 줄어드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호흡량이 크든 적든 내외호흡의 일치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 입에 침이 고이고 몸이 노곤해지는 것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水氣가 상승하고 火氣가 하강하는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호흡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깊은 침잠의 상태에 있다가 평상의 상태로 돌아오면 심신의 상태가 굉장히 상쾌해졌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것은 심신의 모든 기관이 휴식을 취한 점과 三元이 다량으로 정제되어 보유량이 많아진 점 때문이다.
이 수연호흡법은 원래 몸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식적으로 하려하면 그렇게 쉽게 금방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연호흡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그 절차대로 숙달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
1 단계 : 1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을 아는 것이다. 한숨을 내어쉬면 가슴께에서 무언가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있는데 이것이 내호흡의 거동이다. 아하! 이게 내호흡이구나. 라고 미세하지만 분명히 체득될 때까지 한숨을 쉬어보야 한다.
2 단계 : 2 단계의 목표는 상부전환점에서의 호흡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숨을 내어쉬기 전에 먼저 한숨을 들여쉬게 되는데 이때 가슴께에서 무언가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 있다. 이것이 한숨을 내어쉴 때 내려가는 느낌이 있었던 바로 그 내호흡이다. 한숨을 들여쉴 때 내호흡이 올라가는데 그 내호흡이 방향을 전환하여 내려가면 외호흡이 이 내호흡을 따라 내어쉬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내호흡이 시원하게 내려가면서 외호흡도 편안하게 내쉬게 되며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않게 된다. 이것은 내호흡이 먼저 움직이고 외호흡이 그를 따라 움직인 것으로 호흡이 제대로 잘 된 것이다. 이렇게 호흡이 잘되면 느낌이 매우 편안하다. 만일 내호흡이 방향전환을 하여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외호흡이 먼저 움직여 내쉬게 되면 이것은 호흡을 잘못한 것이다. 호흡을 잘못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편하고 불편한 것을 감지하여 호흡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다. 분명히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보아야 한다.
3 단계 : 3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의 상부전환점에서의 방향전환이 잘 되지 않을 때 그 방향전환을 유도하는 요령을 숙달하는 것이다. 방향전환이 잘되지 않는 이유는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요구를 충족시켜주면 내호흡이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때 이 요구를 적극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요령이 흐느끼는 것이다.(본문참조) 상부전화점에서의 방향전환이 잘 되지 않을 때 능숙하게 요령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숙달시켜야 한다.
3 단계까지의 숙달만으로도 상당히 깊이 침잠할 수 있다. 그 침잠되었을 때의 평안함을 향유해보는 것은 심적 고통이 있는 사람에게 훌륭한 치료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단계 : 4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의 거동을 하부전환점에서도 감지하는 것이다. 심신이 침잠되면 상부전환점에서만 감지되던 내호흡이 하부전환점 근처에서도 감지된다. 호흡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되었다 하더라도 할 때마다 모두 그렇게 깊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잘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잘 되지 않기도 한다. 열번 호흡에 들어갔을 때 서너번 정도 감지 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된다.
5 단계 : 5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의 하부전환점에서의 방향전환이 잘 되지 않을 때 그 방향전환을 유도하는 요령을 숙달하는 것이다. 이때 적극적으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흐느끼는 것의 반대로 짧고 강하게 내어쉬는 것이다.(본문참조) 또 한 가지 요령으로는 止息이 있다. 이것은 숨을 멈추고 조용히 내호흡의 움직임을 조관하는 것이다. 조관하고 있으면 슬며시 내호흡이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게 된다. 이 방법은 호흡의 활성도를 올리지 않으려는 것으로 침잠이 어느정도 되어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6 단계 : 6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의 전체 경로상에서의 거동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신이 얼마나 침잠되었느냐에 좌우된다. 중요한 점은 침잠에 이르기 위해서 외호흡을 줄이려는 의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은 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체의 의도를 가지면 안된다. 오직 외호흡은 내호흡을 간발의 차이를 두고 충실히 따라가기만 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요령이다. 내호흡의 전체 경로상에서 일순간의 빈틈없이 계속하여 내호흡의 거동을 감지하고 있으면서 그것에 간발의 차이를 두고 외호흡이 따라가는 것 이것뿐이다. 그 결과 점차 내호흡의 요구량이 줄어들고 나중에는 내호흡의 요구량이 없어진다.
지금까지 설명한 수연호흡법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숨과 흐느낌은 겉으로 보기에는 각각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보면 그 작용은 같다. 그것은 내호흡을 확실히 앞세워서 호흡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그 결과 호흡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호흡이 가라앉으면 마음도 가라앉게 된다. 이러한 내부적인 작용의 시각에서 보면 한숨은 한 번 길게 하는 흐느낌이며, 흐느낌은 여러 번 짧게 하는 한숨일 뿐이다.
한숨이라는 이름은 호흡량을 크게 하여 숨을 쉬기때문에 붙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호흡량은 중요한 점이 아니며 호흡의 질서 - 내호흡을 앞세우는 것 - 이 중요한 점이다. 숨을 크게 쉬는 이유는 단지 요구를 충족시켜 내호흡을 앞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다. 흐느낌도 단지 요구를 충족시켜 내호흡을 앞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다.
수연호흡법은 이러한 한숨을 계속하는 것이다. 즉 계속하여 내호흡을 앞세움으로써 호흡의 질서를 바로잡아 가는 것이다. 내호흡이 앞서게 되면 호흡의 질서가 바로서게 되고 질서가 바로서면 호흡이 가라앉게 된다. 호흡이 가라앉으면 마음도 가라앉게 되고 점차 호흡량도 줄어들게 된다.
여기까지는 상부전환점에서의 호흡법이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침잠을 얻을 수 있다. 이 상부전환점에서의 호흡을 충분히 익히고 그 침잠과 편안함을 마음껏 향유하면 된다.
좀더 깊이 침잠하고자하면 그 침잠을 바탕으로 하부전환점도 감지하여서 상하부의 두 점환점 모두를 아우르는 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속에서 호흡량 즉, 하부전환점으로부터 상부전환점까지의 높이가 점차 낮아져서 나중에는 그 높이가 영(0)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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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부의 방법
1) 본성의 구현
본성을 구현하여 덕을 쌓는 공부는 天理(천리)를 보존하고 人慾(인욕)을 막음으로써 公心(공심)을 실현하는 데에 있으며 이는 도덕적 당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도덕적 당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다 갖추는 것이 효율적이다. 하나는 안에서 마음을 정밀하게 살펴 밖으로 중도(中道) - 적중하는 것. 정확하게 대응 하는 것. - 를 잡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밖에서 우리의 행동을 禮(예)로써 제약하여 우리의 행동이 법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함으로써 안으로 점점 우리의 마음이 안정되어 천리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내외의 두 가지 측면을 다 아우르는 공부가 敬(경)이다. 心君(심군= 照心)을 항상 惺惺(성성)하게 유지하는 常惺惺(상성성), 動心(동심)을 그 일어나는 기미에서부터 선악을 살펴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省察(성찰), 動心(동심)을 한 가지에 專一(전일)하여 다른 곳으로 움직여가지 않게 하는 主一無適(주일무적), 그리고 禮(예)에 따라 몸가짐을 반듯하고 엄숙하게 가지는 整齊嚴肅(정제엄숙) 등이 敬(경)을 구성하는 세부방법이다. 이 중에서 常惺惺, 省察, 主一無適은 내면을 바로잡아 외면으로 드러나게 하는 공부방법이며, 整祭嚴肅은 외면을 다스림으로써 내면을 바로잡는 공부방법이다.
禮(예)는 외면을 다스림으로써 내면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 나아가 예의 실천은 공부의 완성이전에도 우리의 행위를 천리에 맞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禮(예)는 사람의 情(정)에 근본하여 그것을 節文(절문)함으로써 잘못을 미연에 막아주는 것이다. 예는 인간의 심성이 타락하고 지혜가 어두워지자 형식적인 규범을 통해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형식적인 규범으로써의 예의 유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있다. 인간이 만약 본래의 완전함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면 외면적인 규범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禮(예)는 만사가 도리에 합치되게 해주는 도구이며 이로써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예는 인간의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바깥을 꾸며 내면을 깨우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에게 당위의 규범으로 제시된 예는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는 굴레가 아니라 인간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예는 인간의 본성인 仁(인)의 덕을 근본으로 樂(악)과 더불어 인간사이의 조화를 이루며 천리를 실현하게 해주는 것이다.
禮(예)실천의 근본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으로서 상대에 대한 존중, 배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천리에 근본하지 않으면 예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는 단순히 사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기준(宜)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天理(천리)에 근거하여 인간의 마땅한 행위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예의 규범은 현실적으로 공부가 완성되지 못한 인간들의 삶에서 나타나게 되는 많은 문제점들을 미연에 막아줄 수 있는 효용을 갖는다는 점에서 예는 공부가 완성되지 않은 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부족한 자라 하더라도 이 예의 실천을 통해 나의 사욕이 극복되어지고 公心(공심)이 실현되면 공부의 목표인 大德(대덕)의 경지에 점차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본성을 회복하는 敬(경)공부가 또 다른 용어로 표현된 것이 "操心(조심)"이라는 말이다. 操心(조심)은 잡을 操(조), 마음 心(심). 무슨 마음을 잡는다는 말인가? 잡히는 마음은 心君(심군)이다. 操心(조심)은 이 心君(심군)이 없어지도록 버려두지 - 放心(방심) - 말고 잡아서 살아 있게 하라는 말이다. 즉, 惺惺(성성)하라는 말이다. 요즈음은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필자의 어렸을 때만 하여도 "조심하라"는 말이 일상에서 많이 쓰였다. 이는 우리 조상들께서 敬(경)공부를 일상에서 늘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일상의 언어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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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능력의 향상
- 인지능력의 향상
인지능력향상은 인지기능자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인지기능자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것이 인지기능자인지를 정확하게 체득해야 한다. 인지기능자는 "알아차리는 자"로서 照心(조심)이다.
照心(조심)은 識神(식신)의 일부로서 神(신)이라는 자재로써 만들어진 조직체이다. 이것의 능력이 강화된다는 것은 이것을 개선하여 성능한계를 계속 높여가서 그 성능을 극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 개선하는 방법이 "照心(조심)의 惺惺(성성)"이다.
照心(조심)은 神(신)이라는 원료를 소모하며 작동하므로 최고 성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원료인 神(신)을 충분히 공급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照心(조심)이 아닌 動心(동심)이 신을 소모하는 낭비를 줄여야 한다. 또한 인지기능이 고도화, 정밀화할수록 인지를 방해하는 잡음신호를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動心(동심)의 寂寂(적적)"이다. 寂寂(적적)은 또한 三元(삼원)의 정제량을 늘이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惺惺(성성)하면서 동시에 寂寂(적적)한 것은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다하더라도 照心(조심)을 강화하는 주 요소는 어디까지나 惺惺(성성)이지 寂寂(적적)은 아니다.
照心(조심)이 성성하거나 아니한 경우, 動心(동심)이 적적하거나 아니한 경우, 이 둘씩의 경우가 조합되면 모두 네 가지의 마음의 상태가 있게 된다. 이 중에서 惺惺(성성)寂寂(적적)인 상태를 유지하다가 적적은 계속되지만 성성은 하지 않는 상태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을 落空(낙공)이라 한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공부에 손해가 크므로 주의해야 한다.
惺惺(성성)寂寂(적적)을 오래 하면 照心(조심)의 성능이 개선되어 인지능력이 점차 강화된다. 識神(식신)의 인지능력이 극대화되면 현재의 자신(識神)을 만든 本神(본신)을 인지하게 되고 이 本神을 통하여 本神(본신)이 아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 이것을 大慧(대혜)라 한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眞身(진신)을 만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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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행능력의 향상
먼저 인지능력을 강화하여 識神(식신)이 本神(본신)을 인지하고 협조체제를 구축한 다음 본신의 능력으로 실행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몸을 만든다.
실행능력향상은 기존의 三元體(삼원체)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능을 갖는 새로운 三元體(삼원체)를 만듦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인지능력만을 극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지기능을 갖는 神體(신체)뿐만 아니라 氣體(기체)와 精體(정체)도 모두 극대화된 성능을 갖는 새로운 三元體(삼원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 극대화된 성능을 갖는 三元體(삼원체)를 眞身(진신)이라 한다. 그 과정은 그 새로운 몸이 삼원체이므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아이가 孕胎(잉태)되고, 養胎(양태)되어 태어나서 강건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일단 하나의 진신이 만들어 지면 추가로 삼원을 확보하는대로 새로운 진신을 계속 만들수 있으므로 매우 많은 숫자의 진신을 만들게 된다. 그 진신 하나하나가 보통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는데 그러한 진신의 숫자가 많으므로 그 결과 그가 갖는 엄청난 실행능력을 大力(대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새로운 몸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와 능력은 본신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신은 새로운 몸을 만들고자하는 뜻이 없기 때문에 그 뜻을 가지고 있는 식신이 본신과 결합하여 본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이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래서 식신의 인지능력을 극대화 하여 본신을 알고 본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 공부는 다음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본신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식신이 본신과 통하여 스스로 알게 된다. 그래야 그것을 바탕으로 올바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고 남에게 들어 알게 된 지식으로는 전혀 바른 결과를 얻을 수 없고 오히려 몸만 다치기 쉽다.
築基(축기)
축기는 새로운 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三元(삼원)의 최대 보유량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삼원의 최대 보유량이 확보되면 三光(삼광) - 精光(정광), 氣光(기광), 神光(신광) - 이 뜬다. 이것이 後光(후광) 또는 光背(광배)이다. 축기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작업은 採藥(채약)과 精製(정제)이다. 채약은 精(정)이 발동할 때 흩어지기 전에 채취하는 것을 말한다. 정이 발동하는 그 때를 活子時(활자시)라고 한다. 三元(삼원)의 정제는 九轉(구전) - 휘발과 응결을 아홉 번 반복하는 것. - 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원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제효율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 대개 기운의 經絡流周(경락유주)를 동반한 호흡법을 사용한다.
孕胎(잉태)
삼원(三元)의 최대량이 확보되었으면 자기 몸 안에 있는 離(이)중의 음과 坎(감)중의 양을 결합하여 道胎(도태)를 형성한다. 이는 마치 육신의 태아가 형성되는 것과 같이 三元(삼원)을 자재로 형성된 태아이다.
養胎(양태)
도태는 중단전에 두고 키운다. 키우는 과정은 육신을 뱃속에서 키우는 것과 동일하게 열 달이 소요된다. 단지 차이는 몸의 구성자재가 肉(육=물질)을 제외한 三元(삼원)이라는 것뿐이다. 축기과정에서 삼원의 최대량을 확보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도태를 충분히 키우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다량의 三元(삼원)을 추가로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띠를 잡아먹어야 한다. 띠는 짐승의 기운으로서 태어날 때 사람의 삼원체와 함께 같은 몸에 거주한다. 이 과정이 생사를 가르는 어려운 고비이다. 만일 이때 오히려 띠에게 잡혀 먹히게 되면 본신과 함께 그의 삼원체 전체가 소멸되므로 결국 그 육신이 죽게 되며 환생의 본체인 본신이 없어졌으므로 환생도 없게 된다. 이는 진정한 종말이다.
出身(출신)
양태가 다 되면 눈이 오는 것처럼 하늘에서 꽃송이가 떨어진다. - 天花亂墜(천화난추), 우담바라. - 그러면 도태를 상단전에 올려 붉은 뱀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붉은 뱀이 인당을 뚫고 들어와 - 赤巳鑽入(적사찬입) - 출신준비를 마치면 天門(천문)으로 도태를 출신시킨다.
乳抱(유포)
어린 眞身(진신)은 멀리 보내지 말고 육신 가까이에 두고 키워야 한다. 대략 삼 년 정도 키우면 육신과 같은 크기로 자라는데 그 때에는 멀리 보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眞身(진신)은 보통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分身(분신)
다 자란 眞身(진신)은 삼원이 확보되는 대로 자기와 똑같은 수천 수만의 分身(분신)을 키워낼 수 있으며 그들을 모두 동원하면 보통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을 大力(대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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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전공부와 이후공부
당위를 실천하여 덕을 닦는 공부는 이전공부나 이후공부나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능력을 키우는 공부는 그 이치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전공부로서는 더 이상 공부가 되지 않게 되었다.
이치가 바뀐 첫번째 것은 몸밖의 음양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전의 공부는 자기 몸 안의 음양을 활용하여 인지능력을 강화하고 자기 몸안의 음양을 결합하여 도태를 만들었으므로 자기 홀로 공부할 수 있었고 또 삼원의 허비를 막기 위해 이성을 멀리하여 독신으로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몸밖의 음양 즉, 다른 사람의 음양이 필요하므로 남자는 여자의 음이 있어야 하고 여자는 남자의 양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공부를 하려면 남녀가 결혼을 해야만 하며 이전처럼 독신으로는 공부가 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결혼이라는 것은 남녀의 육체적 접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기운을 나의 기운처럼 사용할 수 있는 기운의 연결관계가 형성되어야함을 말한다. 즉, 결혼을 하면 남녀의 기체가 윤기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치가 바뀐 두번째 것은 식신의 개입없이 본신이 바로 진신을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는 식신의 인지기능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본신과 협조하여 본신의 능력으로 진신을 만들므로써 다른 모든 기능도 극대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이후공부는 이와는 달리 식신의 개입 없이 본신이 곧바로 진신을 만들므로써 모든 기능을 극대화시켜서 그것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식신을 본신과 결합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본신의 이 작업과정에 식신이 인지하여 들여다 보거나 개입하면 만들어지는 진신이 불량품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識神(식신)의 개입이 전혀 필요 없으며 개입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식신의 입장에서는 능력 공부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우리(식신)가 해야 할 것은 당위를 실천하여 덕을 닦는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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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셧다시피 인정상관님이 알려주신 수련법을 통해 만들어진 양신이나 정통선도에서 말하는 양신은, 여러개로 분화시켜서 나툴 수 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명상수련 하시는 스님과 선도수련을 하시는 분이 서로 내기를 하셧는대, 앉아서 멀리 떨어진 꽃을 꺽어오는 내기였다고 합니다. 결국 스님의 음신은 꽃을 따오지 못했지만, 선도수련자의 양신은 꽃을 따왔다고 하는 고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인정상관님이 보여주신 각종이적을 보면 양신은 분명 나름대로의 물리적영향력을 발휘할수 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한낱 잡귀도 염이 강하면, 폴터카이스트 라는 물리적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양신은 그런게 없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도화재의 양신이 현실구상력도 없고, 호환성도 없는건 허상의 빛(도계의 빛) 으로 양신을 만들고 키우기 때문입니다, 허상의 빛으로 만든 양신이고 그 양신으로 가는 세계이니 현실구상력이 있을 리가 없으며, 호환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도화재의 양신이 현실구상력과 호환성이 있을려면 더 이상 허상의 빛으로 양신을 키우지 말고, 집적 수련해서 만든 진기로 여의주를 닦든가 양신을 키워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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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정상관님은 "본주(상,하)/박문기 저/ 정신세계사(1995)"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도시속의 신선이야기/ 일사 민경환 저/석문출판사(1997)"권말 부록으로 "호월 권진홍 구도 체험기"에서 [전라도 정읍에 "보기만 해도 병을 낫게 하는 할머니"를 찾아가 정읍이 증산의 활동무대였으므로 증산에 대해 물어보니 그 분의 아버님이 증산 추종자였다 하시며 증산의 기행 이적에 대한 실화를 몇 대목 들려 주셨다. "증산께서 미륵불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습니까?" "내 생각에는 인정상관이 미륵불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정상관'은 또 누구란 말인가? 우리 나라에는 별 희한한 도인도 많구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책에서돈으로영성을사는것은책을사거나저명한분에게강의를받는것이라하던데..좋은자료감사합니다구해서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