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가가 오르는 것은 달러 약세로 인해 (투기)자금이 상품시장으로 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에너지계의 그린스펀'으로 불리는 알리 이브라힘 알 나이미 사우디 아라비아 석유장관.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Aramco)의 회장이자 13년째 사우디의 석유장관을 맡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지난 15일 서울대 문화관 대강당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는 이날 오후 서울대로부터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500여명의 학생.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시간동안 특강을 했다. 160cm가 조금 넘는 그는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을 하며 불안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수급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며,(투기자본이 득실거리는)금융시장 탓"이라고 또박또박 설명했다.
그는 다음날 이장무 서울대 총장과 대담을 비롯, 여러 스케줄이 잡혀 있었고 18일 출국할 예정이었다. 그거나 그는 15일 서울대 관계자들과 서울 강남 메리어트 호텔에서 만찬을 한 뒤 모든 일정을 최소한 채 전용 비행기를 타고 본국으로 날아갔다.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국왕으로부터 빨리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
그는 다음날 압둘라 국왕과 함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맞이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자리에서 천정부지로 치솟는 국제 유가를 잡기 위해 사우디가 석유 생산량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다. 하니만 알 나이미 장관은 서울대 특강에서의 논리를 되풀이 했다. 그는 "현재 전 세계의 석유 수급은 잘 맞춰지고 있다"며 고유가는 공급 부족이 아니라는 논리를 펴며 부시에게 무안을 줬다.
"사우디는 지난 10일부터 하루 생산량을 30만배럴 늘렸어요. 여러 석유 수요처의 증산요구에 따른 것이었고 대부분 미국에서 요청한 것 아닙니까? 더 이상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지요?" 부시는 지난 1월에 이어 알 나이미 장관에게 두 번째 최짜를 맞고 돌아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 대통령이 체면을 깍인 사건을 두고 '부시 대통령의 구걸 외교'라고 꼬집었다.
사우디가 미국의 증산 요청을 사실상 거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 석유시장에서 유가는 더욱 무섭게 치솟고 있다. 니난 21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7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는 배럴당 133.17달러까지 올랐다. 전날보다 4.19달러 오른 것이며, 올 들어서만 38.7% 급등했다.
베테랑 트레이더인 네일 맥마흔은 "이런 가격 점프는 처음 봤다"며 석유공급이 곧 바닥날 것이라는 공포가 시장에 퍼지면서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 놓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도이치방크의 석유시장 수석이코노미스트인 아담 지민스키는 위클리비즈와의 인터뷰에서 "1970년에서 1980년까지 10년동안 유가가 10배 뛴 전례도 있어 2000넌에 25달러이던 유가가 몇 년후 250달러까지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석유 매장량 자체가 기록적으로 낮은 수준은 아니지만 새로운 유전개발에 대한 투자가 늦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10년전 유가는 배럴 당 15달러였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가가 100달러가지 간다'고 예측했던 이들은 '비관론자' 혹은 '언론에서 튀고 싶은 사람'으로 분류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유가 200달러 이야기가 공공연히 오간다.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 중 원유 거래 규모가 가장 큰 골드만삭스는 이달 초 유가가 6개월에서 2년내에 200달러로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유가가 배럴당 55달러에 거래되던 2005년 3월에도 100달러를 넘는 초유가 시대를 정확하게 예측한 바 있어, 석유 시장에 영향력이 크다.
유가 100달러와 200달러를 차례로 예견한 골드만삭스의 아준 N.무르티 애널리스트는 지금 월가에서 가장 만나기 힘든 인물이 됐다.
Weekly BIZ도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10분 단위로 짜인 박빡한 일정을 들며 양해해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 만일 유가 200달러 시대가 닥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일상 생활에도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 전문가들은 유가 상승이 급격할수록 우리가 받는 충격은 가공할 정도로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교외 아파트 가격 하락, 노숙자 급증...생활 급변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두바이유 기준)가 되면 국내 휘발유 소비자 가격은 리터당 2500~3000원 수준이 된다. 이렇게 되면 연료비 부담이 피부로 확 와 닿고, 자가용 이용이 눈에 띄게 줄어 들 수 있다.
자동차로 출퇴근하고 쇼핑을 해야 하는 대도시 교외 아파트 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 교외의 대형 할인점은 파리를 날리는 대신, 구멍가게나 동네 슈퍼마켓이 뜰 수 있다.
물가를 잡기 위해 중앙은행이 금리를 크게 올리면 은행 대출 금리가 급등하고, 이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크게 늘어 노숙자가 새로운 사회 분제로 '떠오를 것이다. 농촌에선 유류비와 비료값 부담으로 소가 쟁기를 끄는 재래식 농법이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사료값 부담으로 소, 돼지 대신 사료가 덜 드는 닭 사육이 늘게 되고 식탁은 닭이 육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프로야구 야간 경기가 줄어들고, 밤 거리를 수놓고 있는 화려한 간판도 사라질지 모른다. 대신 에너지 절약서비스 컨설팅이 부상하는 등 서비스산업이 재편될 수 있다.
증시도 큰 타격을 입는다. CJ투자증권은 단기간 내에 유가가 200달러를 웃돌게 되면 주가지수가 30%이상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박상현 연구원은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를 넘게 되면 증시에 주는 충격은 2차 오일쇼크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유가가 올들어 지금까지의 배럴당 평균 100달러에서 100%상승해 200달러가 될 경우 소비자물가는 2%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충격은 올해로 끝나지 않는다. 내년에 4%P,3년째엔 5%P상승하는 등 물가에 주는 충격은 해가 갈수록 커지게 된다. 삼성경제연구소 분석에 의하면 유가가 1년에 100%오를 경우 성장률은 3.5%하락하고, 200억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급증하는 에너지 수요
그렇다면 유가 200달러 시나리오는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을까?
이에 대한 시각은 크게 엇갈린다. 4년 뒤 500달러로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는가 하면, 내년에는 80달러대로 다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비관론자들은 세계 석유 생산량이 머지않아 피크에 달해 근본적인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이 같은 불안이 유가에 반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투기 세력이 유가 상승을 부추기고 있으며, 버블이 꺼지면 유가는 결국 정상적인 수준으로 돌아갈 것으로 본다.
어떤 편에 서든 세계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중국, 인도 등 인구 거대국이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2025년엔 세계 인구가 80억명이 된다. 급증하는 글로벌 중산층은 에너지 소비의 새 주역으로 떠오를 것이다. 심지어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석유를 사재기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2030년의 석유 수요는 지금보다 3200만 배럴(하루)늘어날 전망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000만 배럴(2006년 기준)에 불과하다. 2030년까지 3개의 사우디아라비아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천연가스 역시 2030년까지 수요 증가분을 충족시키려면 세계 최대 LNG수출국인 카타르가 70개 필요하다. 문제는 이만한 수요를 충족시켜줄만한 공급을 기대할 수 있느냐이다.
■엇갈리는 의견:피크오일이냐 투기세력이냐?
이에 대해 유가 200달러 시대를 예견하는 비관론자들은 세계 석유 생산량이 정점에 도달해 수급 불균형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일명 '피크오일(peak oil)'이론에 바탕을두고 있다.
대표적인 비관론자인 시몬스앤컴퍼니의 매튜 시몬스 회장은 "전 세계가 오래되고 점점 줄어드는 , 몇 안 되는 거대 유정에 목을 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30년 동안 하루에 100만 배럴 인상씩 생산해 낼 수 있는 거대 유전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고, 현재 우리가 쓰는 석유의 20%는 40년이상 된 늙은 유전에서 충당하고 있다.
세계 2대 석유 생산국인 러시아의 석유 공급은 지난 4월 10년만에 처음으로 감소세를 보이기도 했다. 러시아 석유회사인 루코일의 헤오니드 페둔 부사장은 "러시아 석유 생산량은 이미 정점을 지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크 오일 이론은 아직은 소수설이다. 미국의 권위있는 에너지 예측 기관도 이 이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에너지업조청의 더그 매켄타이어 석유시장 수석분석가는 Weekly BIZ와의 인터뷰에서"골드만삭스가 유가 200알러시대를 예견한 근거인 오일피크 이론에 동의할 수 없다"며 "당분간 사용할 수 있는 석유량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며 생산량이 정점을 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현진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는 "과거에도 석유 매장량이 얼나 남지 않아 생산량이 곧 정점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매장량은 계속 늘어왔다"면서 "이는 석유 탐사와 채굴 등 생산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달되고 있기 때문이며 석유 매장량은 얼마든지 변동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산유국들은 최근 유가 급등원인을 투기에 돌린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현재 석유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고, 상품시장에 진입한 추기자본이 유가를 올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 달러 가치가 급락하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자 세계투자자금이 위험 회피 수단으로 석유를 사들인다는 분석이다.
비즈니스위크는 맥그로우힐사를 인용, 세계에서 가장 생산비가 높은 유정의 경우에도 원유 1배럴의 생산비는 유전 탐사 및 개발 비용, 12~15%의 마진을 감안해도 70~80달러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결국 현재 우가 수준은 투기적 요소에 의해 최소 30달러이상 부풀려져 있다는 설명이다.
이유야 어떻든 유가 급등은 세계적으로 에너지의 정치화를 유발하고 있다. 미국의 석유 증산 요청을 사우디아라비아가 거절하자 미국 의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무기 수출을 제한하는 조치가 논의되는 것이 일례다. 미국 등 석유 수입국은 유가가 급등하는데도 석유공급이 늘어나지 않는 것과 관련, OPEC이 시장 논리를 무시하고 공급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을 갖고 있다. 김현진 교수는 "에너지 안보를 위한 자원 확보 전쟁은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자원 개발 확대라는 시장 논리를 왜곡시켜 자원 가격의 추가 급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고 말했다.
■미 경기 침체 장기화되면 100달러 이하로 안정될 수도
낙관론 진영에서는 향후 유가가 하향 안정될 요인도 많다고 지적한다. 미국 EIA의 매켄타이어 수석분석가는 "에너지 효율성이 높아지고 석유 의존도가 낮아지는 추세"라면서 "올 연말쯤이면 정상 수준인 100달러 근처로 최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가의 하향 안정을 예상하는 논거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미국 경기 침체가 지속될 경우 에너지 수요가 줄어들어 유가 상승 속도가 떨어질 것이란 시각이다.
둘째, 달러 환율이 강세로 전환되면 유가 하락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셋째, 유가가 과도하게 오르면 소비 기반을 무너뜨려 급격한 유가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OPEC이 증산에 나설 수 있다. 넷째, 장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에너지의 석유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이 가시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유가가 이어질 경우 세계 졍제는 어떤 충격을 받을까? 당장의 걱정은 인플레이션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장크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총재는 "급등하는 원유 및 식품 가격은 아주 험난하고 어려운 시기를 예고한다"면서 "무엇보다도 인플레 압력이 임금인상으로 연결돼 인플레가 장기화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유가가 폭등하면 전 세계적으로 '생산비 상승->물가 상승->구매력 저하->소비 위축->투자 및 생산 감소->무역량 감소'로 이어져 경제 성장 둔화가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