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날려 보내기
하희경
잠이 얇아졌다. 어쩐지 이부자리가 편하지 않다. 베갯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잠은 오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는다. 어디선가 밤을 잊은 새 한 마리가 지저귄다. 마치 너 혼자가 아니라며 위로라도 건네는 것 같다. 새 소리에 귀를 열고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왜 잠을 못 이루는지 헤아려본다.
그러니까 명절 전전 날이다. 명절이라고 서울에서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온 딸과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딸이 아빠에게 내일 드라이브하자고 한다. 누구에게든 거절하는 법이 없는 남편이 그러자고 답한다. 딸은 신세계 백화점에 가고 싶었는데 휴무일이라니 현대 아울렛에 가자고 한다. 남편이 알았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오후엔 집에 있어야지 싶어 일찍 나갈 준비를 했다. 어머니도 오랜만에 딸과 나갔다 오겠다고 하니 별 말씀 안 하신다. 마음 변하시기 전에 얼른 출발했다. 차가 동네를 막 빠져나가는데 전화가 왔다. 큰 형이 곧 도착한다며 바로 들어오라는 말씀이다. 나를 바라보는 남편이 안쓰러우면서도 화가 난다. 난 남편에게 준비는 다 해놨으니 알아서 점심 차려 먹으라고 했다. 결국 남편은 현대 아울렛에 우리를 내려주고 바로 돌아갔다.
아울렛이 뭐하는 곳인지 몰랐는데 고가 제품들을 모아 할인해서 파는 곳이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모자랄 정도로 큰 규모에 놀랐다. 딸 뒤를 졸졸 따라 걷다가 문득 남편 생각이 났다. 딸에게 웃으면서 ‘아빠가 일찍 돌아가길 잘 했네, 이런 곳에 다니려면 숨 막힌다고 힘들어 했을 텐데’ 하고 말하니 딸도 웃으면서 ‘그러게 엄마, 아빠는 이런 곳에 다니는 거 싫어하는데.’ 한다. 그 말이 맞다. 남편은 이런 곳에 다닐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이다. 몇 년 전에 큰 아들이 와서 아빠에게 메이커 신발을 사 준다며 롯데 백화점에 갔을 때도 머리 아프다고 한 사람이다. 명절 전날 집을 비운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열심히 구경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방과 옷, 신발들이 줄을 이어 있어서 눈요기라도 실컷 할 요량으로 발에 힘을 주었다. 보통 50~70퍼센트 할인해서 파는 물건이 생각 외로 높은 가격이었다. 물건 살 생각은 없었지만, 딸에게 필요한 게 있나 보다 하며 짐작하고 따라다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모피 매장을 보았다. 딸이 성큼 들어가더니 옷을 하나 꺼내어 몸에 걸친다. 역시 강남 물을 먹어서 그런지 잘 어울린다. 잠시 후 내게도 하나 입어보라고 하면서 은색의 긴 코트를 건넨다. 거울 앞에서 입어보니 어울리긴 하는데 길어서 그런지 무거웠다. 웃으면서 무거워서 못 입겠다고 했다. 판매원이 웃더니 짧은 길이의 디자인을 이것저것 보여준다. 딸을 보고 난 됐으니 너에게 어울릴만한 것으로 잘 골라 보라고 하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딸이 청색 빛이 나는 코트를 입어보며 나에게도 입어보라고 한다. 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거울 앞에서 입었다. 그 정도 디자인이라면 나도 부담 없이 입을 수 있겠다 싶어 몰래 가격표를 보았다. 헉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고가였다. 모르는 척 벗어서 딸에게 건네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딸이 코트가 어떠냐며, 엄마 마음에 들었냐고 묻는다. 디자인이랑 색상이 괜찮고 잘 어울린다고 했다. 가격을 묻는 딸에게 판매원이 신상품이라며 40퍼센트 할인해서 사백구십만 원이라고 한다. 속으로 매우 비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 딸은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매장에서 나와 물건보관함에 넣어두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속이 안 좋다며 두부요리를 선택한 딸을 보면서 직업이 미용사라 제 시간에 밥을 못 먹어 속을 버렸나보다 했더니 딸이 웃는다. 문득 고등학교 때 공부에 취미 없다며 돌아다니는 딸을 붙들고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탐구하던 게 생각났다.
두 돌이 될 때까지 보호자가 여러 번 바뀌는 탓에 일상의 모든 것에 서툰 아이였다. 그 후로도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느라 공부에는 끝내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 내내 뒤쳐진 학과를 따라가느라고 애를 쓰다가 간신히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대학은 포기하고 말았다. 딸과 함께 직업군에 대한 책들을 살펴보면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의논하다가 미용을 선택했다. 미용이 힘든 걸 알기에 다른 방향으로 유도해도 그것 외에는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딸을 미용학원에 보냈다. 공부라면 미리 도망부터 가던 아이가 미용사 자격증 시험을 보려고 밤잠도 설친다, 코피가 나도록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딸이 눈앞에서 웃는다. 대견한 마음에 마주보고 웃으면서 나이 들수록 몸이 더 힘들어지니 관리 잘하라고 했다. 옆에 있으면서 밥이라도 챙겨주면 좋았을 텐데 멀리 있어 안타깝다. 밥을 먹다가 딸이 말한다.
“엄마, 아까 그 코트 엄마 입으라고 산 거야.”
“‧‧‧‧‧‧ 엄마가 그런 옷을 어디서 입는다고, 너 입어 너에게 잘 어울리던데”
“엄마, 나 지난달에 엄청 많이 벌었어. 관리하는 원장님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매출이 올라서 보너스까지 받았어. 그래서 작정하고 온 거야. 엄마가 가방 좋아하니까 비싼 가방 하나 사 드리려고 했는데, 엄마 마음에 드는 가방이 없는 것 같아서 그걸로 한 거야. 그러니 아무 말 말고 그냥 입어.”
“‧‧‧‧‧‧ 하지만 너무 비싸. 엄마에게 그건 도가 지나쳐.”
“엄마, 나는 은색 긴 코트가 마음에 들었는데 엄마 스타일을 아니까 그걸로 산 거야. 엄마가 평소에 입기에 그나마 무난하다 싶어서, 그리고 이제 그 정도는 입어도 돼.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따듯하게 입고 다녀. 엄마 겨울에 힘들어하잖아.”
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얼떨떨하게 해치우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딸의 말에 더 이상 뭐라 못하고
“고맙다. 잘 입을게, 엄마가 딸 덕분에 완전 호강이네.”
커피를 마시고 난 뒤, 집에 있는 남편과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서 두 사람 옷을 하나씩 사고 딸이 마음에 들어 하던 카드지갑을 하나 사 주었다. 생각지도 않은 지출을 하게 되었지만 딸이 한 지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어쩐지 묘하다. 고맙고, 미안하고,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한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쇼핑을 하다 보니 시간도 많이 지났고 짐도 많아 남편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한 뒤 기다리면서 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대전에서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서울에서 하고 싶다며 훌쩍 떠나 십 년이 지났다. 통통하던 얼굴이 강남 아가씨들 따라가느라 홀쭉하게 변했다. 내가 보기엔 날씬한데도 딸은 뚱뚱하다고 수시로 다이어트를 한다. 그런 딸에게 다이어트 너무 심하게 하지 말고 몸 생각하면서 지내라고 당부를 한다. 그리고 힘들게 번 돈 엄마에게 쓰지 말고 열심히 모아서 원하는 가게도 차리고 결혼도 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하니 ‘알았어, 엄마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할게 걱정하지 마.’하면서 웃는다.
언젠가 슬쩍 둥지 안에 들어온 뻐꾸기 알을 품고, 감당하지 못해 헤매던 시간들이 있었다. 서로의 날선 시선이 부딪쳐 흘린 눈물은 또 어떤가. 서툰 엄마를 깨우치게 하고 함께 울며 성장한 딸이다. 제대로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인데 어느새 딸은 엄마보다 더 큰 새가 되어 있었다. 내가 왜 잠을 못 이루고 있는지를 이제야 깨닫는다.
이제 뻐꾸기를 날려 보내야 할 것 같다. 더는 엄마에게 매이지 않고 넓은 세상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딸의 모습을 보고 싶다. 잠시나마 뻐꾸기 알을 품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온다. 딸아이의 힘찬 날개 짓을 마음 깊이 축복하면서 새로운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