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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Ⅳ. 행복의 발견과 창조 Ⅱ. 개념의 변천 Ⅴ. 비판적 검토 Ⅲ. 18세기의 경제생활 |
Ⅰ. 머리말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행복'은 만족이나 기쁨을 나타내는 심리 상태를 뜻한다. 각 시대마다 만족을 일으키는 내용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행복은 개인이 경험하는 주관적 정서다. 이런 점에서 행복감은 시대를 넘어 사람에게 공통된 감정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제각기 느끼는 행복은 근대 이후에 일반화된 주관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경험과 일상생활에서 행복감을 찾으려는 경향은 근대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물론 감성은 한편으로는 인간 본능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감성구조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철학 및 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그 구조 자체가 역사의 산물이며 역사적으로 변모해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감성에 대한 역사적 접근의 필요성은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는 근대 유럽, 그 가운데서도 18세기 영국 사회에 초점을 맞춘다.
왜 18세기인가.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시기의 영국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활력이 넘치고 역동적인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상업과 해외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세속적인 삶의 태도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렸고, 개인주의와 감성적인 자아의식이 종교와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감성과 시장경제는 처음부터 함께 맞물려 출현했던 것이다. 로이 포터(Roy Porter)가 보기에, 18세기 영국인들은 “새로운 도덕적 가치, 맛, 사교(sociability) 스타일” 등 이전에 없던 규범들을 만들어냈다. 이들 규범은 “도시재개발, 병원, 학교, 공장, 감옥의 설립, 교통의 발전, 상품, 소비자행동의 확산, 새로운 상업 및 서비스 시장의 창출”과 직간접으로 관련된다. 일상생활의 분위기도 급속하게 바뀌었다. 사람들 사이에 행복을 추구하고 즐거움을 찾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으며 이것이야말로 영국 근대사에서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영국의 경제발전, 특히 국제무역 주도와 소비 증가에 힘입은 것이었다. 영국이 해외무역과 식민지 경영의 중심국가로 떠오르면서 이전보다 더 다양한 소비재가 유입되었다. 에스파냐의 포도주와 오렌지, 이탈리아의 견직물과 기름, 인도 및 아메리카의 면직물〮・차・인디고・담배・커피・설탕 등이 대표적인 수입품이었다. 실제로 18세기 런던 중심가에는 값비싼 해외 소비재를 취급하는 상점들이 급증했다. 물론 영국에 수입된 해외상품들이 모두 국내시장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수입품 가운데 상당수는 대륙의 다른 나라로 다시 수출되었다. 특히 담배, 커피, 설탕과 같은 기호품의 경우 재수출 비율은 더욱 더 높았다. 런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해외무역의 번창을 지켜보면서 당대의 문필가 조지프 애디슨(Joseph Addison)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세계 여러 지역에 그 축복을 내리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사람들의 상호 교류와 거래를 목적으로 전 지구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 서로 의존관계를 맺고 또 그들 공동의 이익을 위해 결합하니 말이다. 거의 모든 등급의 지역마다 고유의 독특한 무엇인가를 생산한다. 종종 어떤 농산물은 특정한 나라에서만 재배하며, 어떤 양념은 또 다른 나라에서만 생산된다.”
18세기 물질생활의 향상과 행복감의 변화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드물다. 다만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로이 포터의 계몽운동: 브리튼과 근대세계의 창조(2000)다. 이 책은 장기 18세기 계몽운동과 사회변화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탐사한다. 제목 부제에서 나타나듯이, 이 책에는 근대세계가 기본적으로 영국 문화를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자긍심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계기가 18세기라는 것이다. 영국의 계몽운동이 대륙의 그것과 다른 점은 단순한 지적 차원을 넘어 구체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사회 분위기에서 개인의 감성과 개성을 발현하고 쾌락과 기쁨을 추구하는 풍조가 전사회적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세계다. 그는 특히 계몽운동 11, 12장에서 행복의 탐닉과 새로운 감성의 출현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는 포터의 서술 내용을 소개하고 18세기 영국에서 행복 추구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간략하게 검토하려고 한다.
Ⅱ. 개념의 변천
고대 희랍어나 중세 영어에서 ‘행복’을 가리키는 단어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갖지 않았다. 예를 들어 희랍어에서 '행복’에 해당하는 'eudaemonia’는 물론 행운(luck)이나 축복(bless)의 의미를 포함하지만, 원뜻은 ‘선한 정신’에 가깝다. 중세 영어에서도 형용사 'happy'의 어근인 ’happ'는 기회(chance) 또는 행운(fortune)을 뜻했는데,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가리켰다. 15세기 이전의 용례에서 그 말은 흔히 순진한(silly)이라는 뜻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만족 또는 만족한 상태의 형용사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아주 기쁘고 만족한'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고전고대의 지적 전통에서 행복은 주관적 정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어떤 상태를 나타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목적론적 개념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 자체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목적은 이성의 풍성한 경작, 이성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것, 곧 덕(virtue)의 실천이다. 행복은 그런 삶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니코마스 윤리학에서 행복이란 “덕에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부유하는 감정이나 부질없는 열정이 아니라 완전한 삶의 산물인 것이다. 키케로를 비롯한 로마시대의 지식인들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했다. 심지어 18세기에 고전교육을 받은 상당수의 저명인사들도 여전히 행복은 감정의 기능이 아니라 덕의 기능이며, 때로는 헌신과 희생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중세 기독교 전통에서 진정한 행복은 인간과 신의 관계, 즉 인간이 신의 뜻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적 영혼이라는 개념을 기독교에 적용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혼이 있는 존재이고 그의 육체는 오직 영적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만 이용된다. 행복을 덕의 추구 또는 덕의 완성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기독교 전통의 행복관은 고전철학의 인식과 공유점을 지닌다. 덕의 추구가 고귀한 것이며 이를 위해 때로는 헌신과 희생과 고통이 뒤따른다고 보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는 원죄 때문에 행복의 완성이 지상에서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궁극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하더라도, 그 완전한 행복은 육체가 죽은 후에 영혼과 신의 합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예수 자신이 수난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고, '산상수훈’의 가르침 또한 현실의 가난, 애통, 박해 등에 대한 천국의 보상을 약속했다. 지상의 고통과 천국의 행복이라는 이미지가 현세의 고난을 정당화했으며,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구약의 약속이 천국으로 옮겨진 셈이었다. 현재의 행복을 즐기기보다는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메시지에는 “인생이라는 사막을 방랑하는 순례자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적 행복관의 아이러니가 있다.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그리스 고전철학의 전통 일부를 이어받아 덕의 완성에서 행복을 찾고, 완전한 행복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의 고통과 천국의 보상을 연결함으로써 행복의 내용에 세속적 요소를 포함시켰다. 중세 기독교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덕을 위해 고통을 겪는다면 그대는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의 보상을 얻을 것이다.” 이 영원한 기쁨이야말로 지고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행복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일이다. 르네상스 지식인들의 상상력은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더 소망하는 태도를 낳았다. 사실 그들 이전에 토머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철학자들도 원죄의 결과와 함께 덕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지상의 삶을 스스로 향상시켜 나갈 여지를 남겼다. 물론 완전한 행복(beautitudo perfecto)은 사후의 은총에서 오지만, 인간의 삶의 완성을 향하는 길을 따라 불완전한 행복(beautitudo impertecto)을 고양함으로써 그 완전한 행복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 에라스무스나 토머스 모어의 견해와 연결된다. 즉 현세는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vale of tears)’가 아니며 따라서 지상의 삶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종교개혁가, 특히 칼뱅주의자들의 의도는 이와 같이 현세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경향에 제동을 걸려는 데 있었다.
18세기 행복론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존 로크(John Locke)의 저술이다. 그는 내란기에 크롬웰을 지지했으나, 정통 칼뱅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인간오성론(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89)에서 제시한 메타포 '백지장(tabula rasa)'은 원죄의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사람의 정신이란 원죄와 관련이 없이 기쁨과 고통의 지각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었다. 이 책 제 2권에서 그는 ‘행복의 추구(pursuit of happiness)'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과학지식에 익숙해 있던 그는 자신의 서술 곳곳에서 뉴턴적인 메타포를 사용한다. 낙하하는 돌이나 큐로 맞힌 당구공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의 삶의 공간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체이다. 로크는 그 추진력을 행복에의 열망에서 찾는다. 행복의 열망이 고통과 기쁨을 중력처럼 밀고 당기는 작용을 한다. “우리 안의 기쁨이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우리 안의 고통은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완전한 행복이란 결국 인간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지고의 기쁨과 동의어가 된다. 로크는 인간이 이성의 인도를 받아 행복을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내 자신에게 추천하는 그 행복, 온갖 순수한 유희와 쾌락을 성실하게 추구할 것이다. 그것이 내 건강에 도움이 되고 나의 자기 계발과 나의 상태와 나의 다른 진짜 기쁨인 지식과 평판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그것들을 즐길 것이다.
일단 삶의 기쁨과 쾌락을 지고의 선이자 행복으로 여기기 시작한 후에 계몽사상가들은 그 기쁨에 이르는 수단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였다. 이제 행복과 덕이 반드시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에 자명했던 이 같은 질문과 대답은 이제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삶의 욕구와 그 욕구의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행복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지고의 기쁨이나 안락한 상태를 찾고서 이것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분위기에 점차 익숙해졌다. 행복감이란 당위적인 어떤 수준을 전제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경험에 대한 주관적 정서의 일부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행복에 관한 논의는 오히려 상투적인 사회조사에서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라는 설문에 대한 응답유형은 아주 행복, 상당히 행복, 그다지 행복하지 않음 등으로 구별된다. 이제 대중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표준화된 내용을 담고 있다. 소득, 생활수준, 가족관계, 건강, 직업만족도 등이 행복이라는 주관적 정서를 결정하는 주요 척도로 인식된다.
Ⅲ. 18세기의 경제생활
18세기 영국 경제의 번영은 수도 런던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런던 '시티'의 가프 스퀘어(Gough Square) 17번지. 이 3층 벽돌집은 1740, 50년대에 문필가 새무얼 존슨(Samuel Johnson)이 저 유명한 영어사전(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원고를 집필하며 지냈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존슨은 런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특히 시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무역거래와 상업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더 나아가 런던이야말로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이 집대성되는 곳이었다. “런던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반경 10마일 이내 우리가 지금 자리한 이곳에 여타 세계가 가진 것보다도 더 많은 지식과 학문이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런던에 진저리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말하자면 인생 자체에 지쳐버린 사람이다. 왜냐하면 “런던은 삶이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존슨이 가프 스퀘어에 머물던 18세기 중엽 런던 인구는 대략 67만 명, 세기 말에는 90만 명 선에 이르렀다. 물론 전통적인 도심은 아직도 좁았지만 템스 강변에서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느낄 수 있었다. 기존의 항만시설만으로는 넘쳐나는 물동량을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블랙웰을 비롯해 새로운 부두가 템스 강 하안에 잇달아 신설되고 있었다. 18세기 들어 런던이 국제무역과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국력 신장의 자연스러운 결과였겠지만, 이와 함께 금융 분야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혁신에 힘입은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새로운 제도의 정착을 ‘금융혁명’이라 부른다. 그것은 주로 1694년 영란은행 설립과 국채 발행으로 요약된다. 당시 영국 정부는 전쟁자금으로 빌린 단기 부채를 장기 부채(주식)로 전환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국채라는 수단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 혁신은 당시 금융부문에서 이루어진 광범한 변화와 관련된다. 즉 화폐 재주조와 금본위제도, 시티의 상업은행 발전, 담보융자 시장의 성장, 환어음 이용 증가, 주식 거래, 해상 및 화재보험의 발전 등이 이 변화의 주된 내용이었다.
존슨 시대만 하더라도 런던의 경제 활동 중심지는 시티였다. 해외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도심에서 세계시장에 관한 여러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들의 사업장과 거주지 또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었다. 시티 주민의 정점은 해외무역 분야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설탕, 차, 모피, 향료 같은 해외 상품을 취급했으며 길드의 전통을 이어받은 제규회사(制規會社, regulated company)나 주식회사의 조합원으로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회사 조합원으로 가입할 때, 입회료를 납부한 후에 독립적인 영업에 종사하면서 무역 거래액 가운데 일정한 몫을 떼어 회사의 운영자금으로 지불했다. 이들 상인조합의 특징은 해외무역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특정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는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17, 18세기 영국 경제번영을 주도한 무역 상인들은 상업세계에서도 다른 집단과 구별되었다. 우선 그들은 전문가로서 자신이 취급하는 특정 산물과 관련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 산물의 거래지역에 대해서도 관습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해박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동시대의 루이스 로버츠(Lewis Roberts)는 이렇게 말했다. “상인은 훌륭한 서기이자 산술가 겸 회계인이어야 한다. 그는 여러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고 뛰어난 지리학자이자 숙련된 항해사, 그 동료들에 대한 최상의 판관이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의 생산물, 습관, 법률, 거래관행 등에 관해 정말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금융혁명 이후 해외무역상인 못지않게 영향력을 가진 새로운 집단이 출현한다. 국채 및 주식 투자, 보험, 해운, 금융 등 특화된 직종에 진출한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금전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화폐 신용을 다루기도 하고 운송중인 화물과 선박의 보험 업무에도 뛰어들었다. 특히 ‘금전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은행가의 기원은 두 직종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채권이나 공증문서 기록을 맡았던 공증인(scrivener)이 있다. 이들은 점차로 문서 기록 업무를 넘어서서 돈을 빌리려는 사람과 채권자를 연결하는 지위에 올랐다. 다음으로, 금세공인(gold-smith) 출신이 있었다. 이들의 원래 업무는 금을 가공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래 일부 부유한 금세공인은 손님의 주화와 귀금속 예탁 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영업장이 귀중품을 맡기는 데 안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활동으로 그들은 휴면중인 금전을 빌려주는, 진짜 신탁은행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해운, 금융, 보험에 관련된 다양한 직종들이 동시대 문헌에 나타난다. 대리인(agent), 팩토링업자(factor), 주식중개인(broker), 채권매입업자(negotiator), 보험업자(insurer), 할인업자(discounter), 주식매입업자(subscriber), 주식공모 청부업자(ontractor), 어음발행인(remitter), 주식매매업자(stock-jobber) 등이 기록에 보인다.
무역상인과 금전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주된 주된 활동 무대는 왕립거래소(Royal Exchange)였다. 이곳에서 온갖 상인과 중개인과 금융업자들이 서로 만나 거래했다. 문필가 애디슨은 이렇게 말한다. “거래소는 내게 비밀스러운 만족감을 안겨준다. 어느 면에서는 나의 허영심을 채워주기도 한다. 내가 영국인이어서 무수한 시골사람과 외국인이 개인 사업 분야에 관해서 상담하고, 이 수도를 지구 전체의 중앙시장으로 만드는 것을 보니까 말이다.” 18세기에 몇 차례 런던을 방문했던 볼테르는 그곳에서 개인주의와 관용의 정신, 그리고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목격하고서 찬사를 보냈다. “런던의 왕립거래소를 보라. 이곳은 저 수많은 법원보다도 더 존경받으며, 각국의 대표들이 인류의 복지를 위해 만나는 곳이다. 거기에는 유대인, 무슬림, 기독교도들이 마치 그들이 같은 신앙을 고백한 것처럼 함께 만나 일을 처리하며, 파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교도란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장로파 신자가 재세례파 교도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국교도가 퀘이커 교도의 말을 신뢰한다. 모두가 만족한다.”
18세기에 런던의 인구증가율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당시에도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소비시장이었다. 런던 여러 곳에 각 지방에서 생산된 생활 자료를 매매하는 전문 시장이 발달하고 있었다. 예컨대 철물・가죽・육류・낙농품은 리든홀 시장, 어류는 빌링스게이트 시장, 곡물은 퀴하이드 시장, 육류는 스미스필드 시장, 과일과 야채류는 코번트 가든 시장에서 주로 취급했다. 그러나 런던 시장에서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해외상품 소비였다. 그 유통 중심지는 도매시장과 행상에 의존하기보다는 시티와 웨스트민스터 구 등 좁은 도심에 빽빽하게 들어선 상점들이었다. 금은방, 서점, 양복점, 양장점, 향료점, 식품점, 커피상점, 주류판매점, 중국상품점, 담배상점 등 각종의 전문상점들이 좁은 거리에 가득 들어서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새롭게 등장한 상점들은 전통적인 상점과 성격이 달랐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상점은 도시수공업자의 영업장이었다. 그것은 고객을 맞고 상품 주문을 받는 진열공간과 작업공간과 생활공간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전통적인 도시수공업자, 이를테면 제화공, 양복공, 목공 등의 영업장이 그 전형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상점은 작업장을 겸한 공간이 아니라 순수하게 ‘기성품을 진열한 소매점’이었을 뿐이다. 이 소매점들은 도시민이나 도시를 찾은 외국인에게는 신기하면서도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18세기 후반에 런던을 방문한 독일의 한 여성은 소매점을 보고 이렇게 감탄했다. “모든 진열품이 파리나 다른 도시보다도 더 사람들의 눈에 띄고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유리진열장 뒤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정결하고 매력적으로 진열되어 있는데, 우리 욕심에 걸맞게 선택의 폭이 너무나 넓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18세기의 이러한 변화를 흔히 ‘소비자혁명(consumer revolution)'이라 부른다. 이제껏 부유층만이 독점했던 상품, 이를테면 안락의자, 식탁보, 유리제품, 중국산 도기, 차, 안경, 시계, 서재, 판화, 골동품이 일반 가정에도 등장했으며, 성서만이 아니라 잡지와 소설, 팸플릿 같은 인쇄물이 널리 퍼졌다. 이런 것들은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물질적 기대와 상상력을 증폭시켰다. 국내 및 해외 물품의 소비 증가는 물론, 부를 축적한 소비자들이 시간을 보내고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새로운 여가형식이 나타났고 이에 따라 여흥산업 또한 발전했다는 것이다.
Ⅳ. 행복의 발견과 창조
로이 포터는 우선 18세기의 주목할 만한 사회분위기의 하나로 종교적 감수성의 변화를 지적한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성과 신앙은 하나이며 함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국교회 중심의 전통에서 종파적인 균열 또한 용납하기 어려웠다. 1646년 국교회 주교 토머스 에드워즈(Thomas Edwards)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적 관용은 모든 악덕 가운데 가장 악한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교리에 대한 회의와 인생의 도피를 낳고 다음에는 무신론을 낳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종교와 신앙은 이성을 통해 분석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객관화 또는 객체화야말로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로 나가는 길을 닦았다. 국교회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전보다 더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만일 종교가 합리적이고 그 근본 진리가 명백하다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강제할 것이 있겠는가.”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가졌고, 그 의문은 곧바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1689년 관용법(Toleration Act)도 이런 분위기와 태도를 반영한다. 이와 함께 로크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성서의 권위에 직접 도전하지는 않았지만, 이성에 입각해 성서를 해석하려고 했다. 이 또한 성경의 모든 말이 성령의 계시에서 비롯된다는 프로테스탄트 성서주의에 대한 회의론으로 연결되었다.
계몽된 정신은 신앙과 일단의 계율체계-돌에 새겨졌거나 성서를 통해 전파되었거나 신앙에 의거하여 받아들였거나 또는 교회가 강제한-를 더 이상 동일하게 보지 않게 되었다. 믿음은 개인의 이성이 법적 관용에 따라 용인된 다종교문화 안에서 판단해야 할 개인적 결단의 문제가 되었다. 이 사이에 국교회는 교육과 도덕 진흥에 대한 그 독점적 지위를 잃었다. 종교가 이성에 종속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분석과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 그것은 회의주의 또는 부정을 의미했다.
다음으로 포터가 강조하는 것은 '감성적 개인주의(affective individualism)'라고 불리는 새로운 태도다. 명예혁명 이후 인신보호율 같은 새로운 법령의 제정과 함께 개인의 자유, 법의 지배, 종교적 관용 등의 새로운 질서가 정착되었다. 여기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 중요한 아젠다로 등장한다. 완고한 전통과 연장자의 권위, 가부장적 가족의 규제, 귀족의 지배 등으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는 경향이 시대 조류로 점차 뚜렷하게 나타났다. 개인의 감성과 그것에 기초를 둔 자유로운 삶의 추구, 이것이야말로 '감성적 개인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풍조를 선도한 집단은 지식인 외에 아무래도 해외무역과 상업 분야에 진출해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상인들이었다. 포터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Albion)의 예절바르고 상업화된 사람들은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고, 칼뱅주의와 관습과 친족이라고 하는 철제새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리고 심지어는 일시적 충동에 탐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질적 욕망, 쾌락 추구, 감성적이고 에로틱한 자아 발견, 사회적 출세, 유행의 즐거움 등이 죄와 벌과 심판이라는 도덕적, 종교적 의상을 벗겨냈다.
물론 개인주의와 자유로운 일탈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히 강했다. 개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 바빌론과 로마, 이 모두는 급기야 멸망으로 이르지 않았는가. 포터에 따르면, 계몽주의 시대 영국 지식인들은 “자아해방과 쾌락 추구”가 “도덕적 폐해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함이 없이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명예혁명이야말로 전제에서 개인의 권리를 보장받은 정치적 기제이며, 시장경제 또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조화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 인간의 본질이 기쁨과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는 기계적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맨더빌(Bernard de Mandeville)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이기적 쾌락을 추구한다.“ 이기심이 공공의 덕에 바람직하다는 역설은 맨더빌 이후 데이빗 흄과 애덤 스미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포터는 감성적 개인주의가 소비 및 쾌락의 정당화와 연결되는 지적 계보를 보여준다. 이러한 정당화를 통해 세속적 행복이 바로 '지고의 선(summum bonum)'이라는 등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사실 계몽주의 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쾌락주의(hedonism)는 금욕주의(asceticism)의 위세에 눌려 사회분위기의 주류로 떠오를 수 없었다. 쾌락주의는 고전고대의 전통에서 에피쿠루스 학파나 바카스제(Bacchanalia)를 통해 명맥을 유지했지만, 플라톤주의자와 스토아학파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오직 진정한 축복은 절제와 금욕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중세 교회도 현세의 욕망이 에덴동산의 추방, 즉 원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암암리에 주입시켰고,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같은 언어를 통해 현세에서는 노동이 타락의 저주를 환기하는 것이고 이기주의란 악덕이며 스스로의 자존심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육신의 고행과 금욕만이 정신의 해방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청교도적 엄숙주의를 조롱하는 분위기에 점차 익숙해졌다. 소비와 쾌락에 관해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은 중도의 길을 택하는 것이었다. 청교도 엄숙주의에 못지않게 쾌락에 대한 지나친 탐닉도 경계할 일이 되었다. 사회 속에서 합리적 쾌락을 적절하게 추구하는 것이 지속적인 기쁨을 가져다준다. 문필가 조지프 애디슨의 이름에서 따온 이른바 애디슨주의(Addisonianism)는 런던을 비롯해 번영하는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도회성, 예절, 합리성, 온건함” 등을 강조하는 경향을 일컫는 말이었다. 애디슨주의자들은 가벼운 독서, 차마시며 환담하기, 도시의 적절한 향락, 이런 것들이 사회 전체의 조화와 연결되리라고 믿었다. 세련된 스타일과 멋 또한 삶에서 긴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소비와 쾌락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영국의 시장경제는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에 힘입어 더욱 더 탄력을 받게 되었다. 런던뿐 아니라 지방 소도시들의 재흥과 번영, 교통 및 서비스산업의 발전, 정보 및 레저의 산업화와 더불어 이전보다 한층 더 증가한 소비자들이 전통적으로 엘리트에게만 허용되었던 여흥에 참여했다. “행복이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오직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부도 권력도 지혜도, 지식과 강함도, 아름다움과 덕과 종교와 심지어 삶 그 자체도 행복을 낳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요컨대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의 다음과 같은 선언이 전혀 낯설지 않게 들리는 시대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오, 행복이여. 우리 인간의 궁극의 목적이여.
선, 쾌락, 편리, 만족! 그 무엇이든 그대의 이름일진저.
실제로 18세기 일반 서민이 행복을 추구하는 세속적 경향은 가정, 부모와 자녀관계, 사교, 각종 여흥행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족형태 또는 가정생활에 관해서는 로런스 스톤(Lawrence Stone)의 고전적 연구가 있다. 그가 제시하는 영국인의 가족 변화는 단선적인 진화 모델이다. 그것은 개방적 친족가족(open lineage family)에서 가부장적 핵가족(patriarchal nuclear family)을 거쳐 가정중심 핵가족(closed domesticated nuclear family)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18세기에 주류가 된 세 번째 형태는 바로 감성적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가족이었다. 스톤에 따르면, 그것은 개인 자율의 원리에 기반을 두었고 강한 애정적 결합으로 묶여 있었다. 남편과 아내는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했으며 자녀를 양육하는 데 이전보다 더 시간과 정력과 돈과 사랑을 쏟았다.
스톤의 견해는 귀족 편향성, 선별적인 자료 예시, 지나친 단순화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부부 사이의 결합이 더 굳어졌고 부모와 자녀 관계도 보호와 애정에 토대를 두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많다. 특히 도제 수업을 마친 젊은 상인들은 자신의 선호에 따라 배우자를 고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18세기 런던 도심에는 전람회, 박물관, 인형극, 서커스 등 어린이의 흥미를 자아내는 시설물과 행사가 곳곳에서 세워지거나 열렸는데, 이 또한 당시의 새로운 변화를 반영한다. 18세기 복음운동(evangelicalism)도 새로운 가족의 출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 운동은 가정의 평화와 구원을 연결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애정과 유대야말로 기독교인이 받는 축복의 징표였다. 구원의 적은 가족 사이의 증오와 질시,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바깥의 온갖 유혹이었다. 복음운동가들은 외부의 유혹에서 멀리 떨어진 가정, 그리고 애정이 충만한 그 가정의 수호자로서 아내의 모습을 내세웠다.
여기에서 포터는 애정에 바탕을 둔 가정의 출현에 관해 특히 로크의 영향을 중시한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귀족층 집안에서 어린이에 대한 태도는 아주 전제적이고 난폭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의 증거도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로크의 팸플릿 교육에 관한 성찰(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1693)이 출간된 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크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유연한 존재, 그리하여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했다. 인간의 형성은 학습경험의 산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열에 아홉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유익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교육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낳는 것은 바로 이 교육이다.
그는 어린이의 정신이야말로 자신의 메타포 ‘백지장’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생각했다. 어린이야말로 원하는 대로 주조하고 형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부모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었다. 부모는 아이의 소유자가 아니며 신이 요구한 대로, 그 아이를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기독교인으로 양육할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린이의 순수성을 절대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후일 낭만주의자들의 어린이 숭배와는 다른 견해를 가졌다. 포터에 따르면, 로크의 교육에 관한 성찰은 유럽 각국에서 열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 발간 후 70년 사이에 그의 책은 영국에서 25쇄, 프랑스에서 16쇄, 독일 3쇄, 이탈리아 6쇄, 네덜란드 2쇄 등 판을 거듭했다. 1762-1800년간 영국에서 출간된 교육에 관한 팸플릿과 책자는 200종에 이르렀는데 그 대부분이 로크의 교육관을 언급하고 있다.
포터는 18세기 행복 추구가 사교, 여흥, 여가의 상업화로 곧바로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식사와 사교파티에서 맛과 멋에 대한 관심, 성애소설을 비롯한 에로틱문화의 확산, 자유연애, 정원에 대한 애호 열기 등을 다양하게 소개한다. 이를테면, 식사에서 즐거움은 파인애플과 같은 이국의 산물이 싼 가격으로 들어오면서 더 배가되었다. 식탁에서 도수 높은 술을 드는 것 또한 새롭게 등장한 흥취였다. 실제로 새무얼 존슨은 식탁에서 음주야말로 인생의 두 번째 즐거움이라고 자랑한 바 있다. 이들 여흥은 주로 새롭게 조성된 정원 안에서 이루어졌다. 18세기 이른바 잉글랜드풍 정원은 이 다양한 행복 추구방식을 종합한 무대인 셈이었다. 같은 세기 중엽 런던만 하더라도 휴식과 여흥을 즐길 수 있는 정원이 200여 곳에 이르렀다. 넓은 정원과 유원지는 양어장, 불꽃놀이, 음악회, 가면무도회, 밀회장소이기도 했다. 복스홀(Vauxhall)은 아마 최초의 상업적 유흥지였을 것이다.
한편, 정원 못지않게 여흥의 중심지가 된 곳은 극장이었다. 포터에 따르면, 근대성의 제단 가운데 전형이 극장이다. 영국 내란기에 극장은 신의 질서를 위협한다는 비난 아래 잠시 폐쇄되기도 했다. 왕정복고 후 런던의 유서 깊은 극장들은 주로 왕실 및 귀족의 후원으로 운영했으나, 18세기에 들어와 눈에 띄게 확장되었다. 수요 증가에 따라 공연장을 넓혔으며 그와 더불어 더 광범하고 다양한 관객의 취향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에 대표적인 극장 중의 하나인 드루어리 레인(Drury Lane)극장은 3,611석을 갖추었고 헤이마켓(Haymarket) 극장도 그 규모에 못지않았다.
한번 물꼬가 터지면서 여가의 상업화는 시대적 추세가 되었다. 포터가 보기에, 일부 비판이 있었음에도 “사회변동과 상업적 편의주의”가 도덕론을 앞질렀다. 새로운 여흥 양식은 싫든 좋든 유행을 타게 마련이었다. 극장, 크리켓경기, 상금 걸린 격투기, 구경거리, 온천장에 열광하면서 사람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전문배우, 극장관리인, 화가, 운동가, 예술품거래인, 비평가들이 주도하는 여흥산업이 나타났으며 그것을 일단의 문화상인들이 뒷받침해주었다. 이 모든 변화의 배경에는 시장이 있었다. 포터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발전에서 중요한 것은 시장의 힘이었다. 조지 왕들 치세 하의 잉글랜드에서 박물관과 미술관 열풍은 레저 및 교육 사업가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기물들을 사람들에게 열람시키기고 진기한 것, 골동품, 돈벌이 기회, 경험을 쌓고자 하는 일반 공중의 욕구 등을 이용해 이윤을 얻고자 했다. 이 여가의 상업화는 전통적인 민중 여흥을 도태시킨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어떤 점에서는 아마추어나 공동체 활동을 고양시키기도 했다.
Ⅴ. 비판적 검토
2001년 11월 30일 영국 학술원(British Academy)은 로이 포터의 계몽운동을 비롯한 6종의 저서를 ‘학술원 저작상’ 수상작으로 뽑았다. 잘 알려진 대로, 학술원은 1902년 국왕 칙령에 의해 설립된 인문학 및 사회과학 분야의 학술단체이다. 이 저작상은 학술적으로 뛰어나면서도 비전문가 독자층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연구서의 저술과 출판을 장려해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2001년에 처음 제정되었다.
이 책이 역사가들을 넘어 일반 독서층 사이에서도 커다란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포터는 의학사에서 문화사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저술활동과 방송출연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가이다. 그럼에도 아쉽게도 이 책을 출간한지 불과 2년 후에 5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아쉬움이 이 책에 대한 관심을 더 증폭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술을 관통하는 일관된 입장이 영국인들의 구미에 맞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저변에 흐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잉글랜드 중심주의다. 포터는 18세기 계몽운동이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에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린다. 18세기 잉글랜드 계몽운동 또한 영향력 면에서 대륙의 운동에 못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다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 그의 잉글랜드 중심주의는 '계몽운동'이라는 지적 계보에서 잉글랜드의 위상 찾기를 넘어서, 영국 계몽운동이 낳은 '근대성'이 바로 근대세계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포터 저술의 이면에 자리 잡은 이 잉글랜드 중심주의, 특히 영국 문명이 근대세계를 창조했다는 신념은 상당수 영국 근대사가들이 공유한다. 여기에서 필자는 포터의 잉글랜드 중심주의 자체를 거론하지는 않겠다. 따라서 잉글랜드 계몽운동이 매우 중요했고, 그 운동이 낳은 근대성이 후일 근대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그의 메시지를 직접 비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계몽운동의 주요 논지에 내재한 한계점을 지적하는 선에서 멈추려고 한다.
계몽운동은 18세기 영국사에 관해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연구가 아니다. 이미 한 세대 전부터 18세기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근대세계의 원형들을 찾으려는 시도가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소비자혁명, 세속화, 과학지식의 유포, 감성적 개인주의, 시장경제 이데올로기 전파 등의 표제를 중심으로 18세기사를 재해석해왔다. 포터는 이러한 연구들을 종합해 18세기를 한 마디로 계몽운동의 시대로 압축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터의 저술에서 어떤 한계를 지적할 수 있을까?
우선 후방가늠자식의 서술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어렵다. 포터는 현재 영국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와 현상을 기정사실로 설정하고 그 18세기적 기원 또는 18세기적 양상을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세속화 또는 탈기독교화 문제에 접근하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영국은 유럽 국가들 가운데서도 탈기독교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된 나라로 손꼽힌다.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 국교회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변화다. 영국 국교회를 보더라도 1968-99년 사이에 신자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국교회 주일예배 참석자 수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에서 1.9%로 낮아졌다. 2006년 영국의 한 사회조사에서는 설문 대상자의 33%가 기독교를 포함해 특정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 반면, 63%는 무종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사 대상자의 83%가 종교를 사회 혼란의 주요 원인이라고 응답해 종교 일반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재의 탈기독교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고, 어느 시기부터 가속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분명한 것은 19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영국인들은 국교회나 또는 비국교회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 종교적 윤리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영국 사회가 보여주는 탈기독교화 문제는 적어도 19세기 말 이후의 사회변화와 관련지어 해명해야 한다. 물론 18세기에도 지식인들 사이에 기독교 비판이나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영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 지식인사회에 국한된 것이었다.
다음으로, 포터의 서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대 지식인들의 저술, 팸플릿, 서한 등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는 구체적인 사회양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지식인들의 담론과 견해를 추출해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양상과 사회변동을 재현한다. 여기에 담론과 현실의 괴리가 있다. 특히 그가 그 시대의 텍스트 가운데 자신의 논지 전개에 유리한 것만을 선별적으로 예시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18세기 행복의 추구와 관련된 여러 주제들에 대해서도 그가 제시한 견해와 상반된 문헌과 진술 또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사 서술에서 지식인의 견해만을 주로 다루고 그마저 선별적인 방식을 택한다면, 실제 사회에 가능한 한 가깝게 접근했다고 할 수 없다.
한편, 18세기를 번영의 시대로 일반화하고 상류사회에 나타난 행복 추구의 경향이 사회 전체에 걸쳐 파급되었다는 견해는 너무 낙관론에 치우지지 않았나 싶다. 18세기 번영의 배후에는 오리혀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명예혁명 이후 나폴레옹 몰락기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로 전쟁을 벌였다. 이 시대의 전쟁연대기는 잘 알려져 있다. 에스파냐계승전쟁(1701-14),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 7년 전쟁(1756-63), 미국독립전쟁(1976-81), 나폴레옹 전쟁(1792-1814) 등 18세기 전 시기에 걸쳐 간헐적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 대부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쟁이 장기화되자 영국 정부는 그에 뒤이은 후유증에 대처해야 하는 또 다른 부담을 안게 되었다.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기의 동원체제와 전후의 동원 해제가 반복되면서 사회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발생했다. 전후 대규모 소집해제는 실업자 증가와 범죄율 상승이라는 이중의 사회문제를 낳았다.
사실 17세기에는 전쟁기간에 범죄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동원된 군인들이 규율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전장은 대부분 해외였다. 전쟁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와 심지어 죄수까지도 동원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범죄율이 떨어졌지만, 동원이 해제된 이후에는 대다수 병사들이 제대하면서 자연스럽게 범죄율이 올라간 것이다. 전후 제대군인들의 유랑은 특히 사회적으로 골칫거리였다. 미국독립전쟁이 끝난 후에 이들 유랑집단은 10여년 이상 존속하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부상자에 대한 치료 및 연금지급 등으로 지방정부는 물론 중앙정부의 활동영역도 갈수록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상자와 사망자의 고통, 그 가족들의 고난이 일반 사람들의 정서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전쟁 후유증만 하더라도 18세기를 번영의 시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마지막으로, 포터는 18세기 지식인과 부르주아의 정서와 문화에만 시선을 둘 뿐, 그 밖의 다양한 집단들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농민과 수공업장인, 도시민중 또한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18세기에 민중문화의 전통이 약해졌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대체로 감성적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연대에 기초를 둔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행복감은 어떤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 나름의 행복 추구의 방식은 어떠했는지 아직은 미지의 세계에 남아 있다. 아마 포터는 문화의 확산, 달리 말해 위로부터 아래로 감성적 개인주의 정서와 행복 추구 풍조가 퍼져나갔으리라고 단정하는 것 같다. 수 세기의 역사변화를 통해 그러한 확산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라는 특정한 시기를 그 같은 장기지속적인 경향에 미루어 재조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빈번한 전쟁과 경제적 번영의 이면에 감춰진 양극화 현상은 역설적으로 행복감이 불행의식의 만연과 맞물려 전개되었으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포터가 주목한 행복 추구는 불행감의 확산이라는 사회적 현상과 맞물려 전개된 것이었다. 실제로 전쟁의 상흔과 그 후유증은 물론, 민중의 삶에 드리운 궁핍화는 18세기 번영의 뒷면에 자리 잡은 다른 현상이었다. 더욱이 의회 인클로저와 함께 농촌 주민의 상당수가 마을을 떠났고,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선대제에 종속된 농촌수공업자와 도시 수공업 장인들의 노동조건도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아직은 시론적인 주장에 불과하지만, 근대성으로서의 행복감을 이야기하려면 오히려 근대성으로서의 불행감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이와 같이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한다고 해서 근대성으로서의 행복 추구 경향이 18세기에 출현했다는 로터의 견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원과 일반적 경향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포터는 근대성의 기원을 밝히는 선에 그치지 않고 행복 추구가 일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침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적어도 18세기에 이러한 경향은 사회 소수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새로운 삶의 분위기와 태도 못지않게 전통지향적인 태도 또한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이러한 병존은 19세기에도 오랫동안 계속된 것처럼 보인다. 산업혁명이 본격적인 단계에 이르러 일상 용품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고 가격이 상당한 수준으로 하락한 이후에야 서민들은 물질적 소비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행복 추구의 일반화를 강조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19세기 후반의 시점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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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Abstract】
Happiness as Modernity: A Historical Approach
Lee, Young-Suk
According to a dictionary definition, happiness means a mental state representing contentment or pleasure. It belongs to individual sensibility. But the present trend that many people seek happiness in everyday life, is the characteristic of the modern society, and a feeling of happiness is also one of modernities. Because many intellectuals, from the ancient times to the middle age, have thought that happiness meant the completion of virtue rather than the pursuit of pleasur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consider happiness as modernity by examining Roy Poter's Enlightenment: Britain and the Creation of the Modern World (2000) critically. Porter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English Enlightenment in the Eighteenth Century. According to his explanation, the trend that everybody tried to represent his own sensibility and to pursuit pleasure became stronger and stronger at that times, which would mean the creation of the modern world.
The appearance of the attitudes was based on the development of commerce and foreign trade in England. With the financial revolution and commercial trade, the so-called consumer revolution was developed, and rich people bought exotic goods and enjoyed various types of leisure. In this process the campaigners for enlightenment stimulated individuals to express their personalities and emotions beyond the boundary of religious belief or tradition. It is called affective individualism.
The pursuit of happiness as modernity seems to have been a long-termed phenomenon. By emphasizing the enlightenment too much, Porter regarded the consuming movement of the minority of the society as one of the majority. Furthermore, it seems that he re-interpreted eighteenth-century England on the base of the present English society in which is de-christianized and is becoming the higher mass-consuming society. I think that his view would be more suitable to late nineteenth-century England.
주제어: 로이 포터, 근대성, 행복, 감성적 개인주의, 소비자혁명, 여가의 상업화 key words: Roy Porter, modernity, happiness, affective individualism, consumer revolution, commercialization of leisu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