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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락사(十二月樂詞) 12월의 아픔 日脚淡光紅灑灑(일각담광홍쇄쇄)-해맑은 햇살이 대지 위를 불그스름하게 적시는데, 薄霜不銷桂枝下(박상부소계지하)-엷게 내린 서리는 계수가지 아래서 녹지 않는구나 依稀和氣排冬嚴(의희화기배동엄)-따스한 기운은 매서운 추위를 떠나보내는 듯, 已就長日辭長夜(이취장일사장야)-이미 긴 밤은 길어지는 낮에게 하직인사를 한다. 이하(李賀) 서리 맞아 고개 숙인 들국화의 모습처럼 멀어져가는 이의 뒷모습이 왠지 짠 하게 느껴지는 12월입니다. 위의 당시(唐詩)를 쓴 이하(李賀)는 중당(中唐) 때에 시의 귀재(鬼才)라 명칭을 얻고 24살에 백발이 되어 26세로 요절(夭折)한 불우한 삶을 산 시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6~70년을 살면서 겪는 인생의 고뇌를 26년 동안의 짧은 생애에 좌절된 인생에 대한 절망감을 굴절된 표현으로 노래하면서 생을 마친 천재 시인입니다. 그는 평소에 “부질없는 세상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라고 가르친 능가경(楞伽經)을 책상 위에 항상 두고 외우면서 마음을 다스리다가도 세상에 대한 원망을 떨칠 수 없을 때는 유향 (劉向) 이 쓴 굴원(屈原)의 글을 모은 초사(楚辭) 를 읽었답니다. 초사에는 “나라 안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던 굴원을 보고 “아, 나만 세상이 괴로운 것이 아니구나”라고 자위하다가 그래도 가슴이 답답하고 사는 게 부질없을 때는 꼭 머리가 희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살해버리겠다던 이하(李賀)였습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젊은 변호사 베르테르는 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했다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뇌에서 권총자살을 택한 주인공과 같은 인생관이었을까요. 시인은 말하기를 비록 햇살이 따스해도 엷게 내린 서리가 녹을 줄 모르는 것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 때문이며 이미 긴 밤은 길어지는 낮에게 하직인사를 하여 한해의 12월을 보내는 아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스무살이 넘으면 세월이 화살처럼 빨리 간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는” 스물이 빨리 오기를 바랐는데 야속하게도 우리는 스물을 느끼지도 못하고 언벙덤벙 건너뛰어 왔습니다. 12월은 인생을 짧게 산 이하(李賀)의 아픔과 베르테르의 슬픔도 박건호 시인이 저세상으로 떠난 아쉬움만 있는 계절이 아닙니다. 모질지 못해 지금까지 살아왔고 사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게 지나온 세월이 아까워 쇠가죽 같이 질긴 삶의 끊을 놓지않으려고 어리석게 매달리는 우리에게도 12월은 아쉬운 달입니다. 이미 긴 밤을 짧아지게 하고 다시 오는 새날에 영접을 받겠지만 어쩐지 한 장 남은 달력이 쓸쓸하게 보이고 자꾸만 원망스러운 달입니다. 12월의 엽서 이해인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 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 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 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들 곧 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 밖에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 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일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 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 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 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 내고 새 달력을 준비 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 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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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유산사(冬日遊山寺) 겨울 산사에 노닐며 12-4 暫遊禪室思依依(잠유선실사의의)-잠시 선방에 쉬니 온갖 생각 솟아나고 爲愛溪山似此稀(위애계산사차희)-산과 시내가 보기 드물게 고와라 勝境唯愁無計住(승경유수무계주)-좋은 경치에 오래 머물지 못함이 슬퍼서 閑吟不覺有家歸(한음불각유가귀)-조용한 시 읊으며 돌아갈 집도 잊었네! 僧尋泉脈敲氷汲(승심천맥고빙급)-스님은 샘물 찾아 먹을 물 길어내고 鶴起松梢擺雪飛(학기송초파설비)-학은 오갈 때마다 솔 위의 눈을 날리네. 曾接陶公詩酒興(증접도공시주흥)-일찍 시와 술 벗 삼던 도연명을 알았더라면 世途名利已忘機(세도명리이망기)-세상의 명리(名利) 모두 잊었을 것 아닌가 최치원(崔致遠)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제48대 경문왕에서 51대 진성여왕 시대 학자로서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이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다. 최치원은 불교나라인 신라시대에 대표적인 유교학자로 해동(海東)의 대문장가로 이름 지어져 있다. 경문왕(868)때 12세의 어린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7년 만에 19세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고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당나라 말기에 황소(黃巢)가 일으킨 민란(民亂)을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문장을 지어 난을 평정하여 대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17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신라로 귀국한다. 최치원은 중국 정사(正史) 역사(歷史)책 곳곳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의 정사(正史)인 신당서(新唐書), 중국 역대 정사(正史)인 예문지(藝文志), 사륙집(四六集), 등에 최치원이 소개되어 있다. 고려의 학자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최치원을 높여 기록하기를 중국 당나라 이십오정사(二十五正史)중의 하나인 당서(唐書) 열전에 최치원이 빠져있는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일부러 기록하지 않은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중국인의 콧대를 꺾는 얼마나 자존심 살리는 자랑스러운 말인가. 신라 진성여왕은 최치원에게 아찬(阿飡)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지만 쇠약해진 국운으로 사회는 혼란스러워 벼슬을 사직하고 강산을 유람하고 말년에는 해인사에서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다. 최치원이 대자연을 벗 삼아 풍류(風流)를 즐기며 주유(周遊) 하던 유적지(遺蹟址)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 몇 곳만 정리하여 본다. 부산 해운대(海雲臺), 하동군 쌍계사(雙溪寺), 경주 남산(南山), 합천군 학사대(學士臺). 거창군 고운정(孤雲亭), 양산시 임경대(臨鏡臺), 진해시 진해강선대(鎭海降仙臺), 거창군 고운정(孤雲亭)등은 최치원의 숨결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곳이다. 최치원이 한반도를 유람하면서 지은 아름다운 한시를 정리하다보면 글속에 담겨 있는 표현이나 감정이 1000년전 사람이 아니라 2~300년 전 사람같이 느껴진다. 위의 한시도 겨울 여행 중에 어느 한적한 산사(山寺)에서 심회(心懷)를 적은 글이다. 겨울산과 계곡으로 보이는 시내, 그 경치 좋은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나그네 신세를 시로 나타내고 있다. 겨울 산사에 샘물을 길러오는 스님과 눈 덮인 소나무 위의 학(鶴)은 신선(神仙)과 같다. 천년전의 최치원이 600백년을 앞서간 도연명을 일찍 알지 못했던 것을 한탄한다. 도연명이 누구인가 ! 도연명은 1600년전 중국 동진(東晋)의 시인 아닌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무엇인가? “나는 5두미(五斗米-봉급)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며 벼슬을 집어던지면서 발표한 퇴직 성명서 아닌가! 명리(名利)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간 최치원과 도연명이 우리의 가슴에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은 이 시대에는 두 사람처럼 과감하게 벼슬과 재물에서 벗어나는 멋있는 사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열흘 피는 꽃이 없고 10년 가는 권세가 없다고 하였는데 불과 5년의 권력을 마치 500년으로 착각을 하고 한때 잘 나가던 사람들이 명예도 부끄럼도 모르고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온갖 부정으로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법의 심판대위에 서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불쌍하게 여겨져 최치원의 한시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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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大雪)12-8
已訝衾枕冷(이아금침냉)-잠자리가 차가움을 이상히 여겨
復見窓戶明(부견창호명)-다시 보니 창문이 밝게 보이네
夜深知雪重(야심지설중)-깊은 밤 함박눈이 내린 줄 아는 건
時聞折竹聲(시문절죽성)-이따금 부러지는 대나무 소리 때문.
백거이(白居易)
어제 일요일이 대설(大雪)이다.
대설 무렵에 내리는 함박눈과 은빛세계로 덮여진 아침을 맞는 기분과 풍경은 대도시와 옛 시골의 정서가 많이 다르다.
어렸을 때 음력 동지 무렵이면 “미덕골”이라는 산골에 있는 큰아버지 댁으로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려 간다. 자정 무렵 제사를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온 산골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는 때가 있다. 밤중에 소리 없이 눈이 내린 것이다.
그때는 전부 초가 집이였는데 어린 눈으로 보아도 신비경 같은 눈 덮인 산골 전경에 말할 수 없는 희열(喜悅)을 느낀다. 간혹 초가집 굴뚝에서 아침 밥짓는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 그때야 그곳에 사람 사는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중유인가(雪中有人家)!
마당에 내려가 손으로 눈을 모아본다. 차가움 속에서도 뽀드득 찰기 있게 다져지는 눈뭉치 양쪽에는 내 작은 손자국이 붕어빵 문양처럼 파여 있다.
그 순간 집주 위를 뺑 둘러있는 대나무 밭에서 “지지찍 쩍”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대나무 가지와 잎에 쌓여있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리가 활처럼 휘어진 대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인 것이다. 순간 쏟아지는 눈사태!
대나무는 워낙 낭창낭창해서 웬만한 바람에도 부러지는 일이 없지만 폭설이 내리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다 못해 부러지는 일이 간혹 있다.
덩달아 놀란 까치 한 마리가 장독대 옆에 있는 석류나무위를 날고 마루 밑에 삽살개가 움찔한다. 외양간에서는 암소가 “움~머” 하고 돼지우리에서는 머리에 볏짚을 둘러쓴 놈이 꿀꿀거린다. “아이고 밤에 눈이 왔는가배!”
눈이 내리는 밤이면 막연히 아늑한 행복감이 든다. 그때는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여름의 우박이나 겨울의 함박눈이 쌀이나 사탕이었으면 하던 생각이 기억난다.
어린나이에 깊은 생각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행복감은 아마도 자연 속에서 동화되는 삶의 근원적 기쁨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다.
눈 덮인 세상은 사물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시공을 잊고 우주에 우뚝 선 느낌을 받는다.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것을 보면 순간의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산봉우리와 숲의 나무들은 허공에 이어져 하늘과 땅, 들과 개울의 구분이 분명치 않다. 논 두름도 웅덩이도 거름더미도 기와집도 초가집도 높고 낮음의 차별을 두지 않고 어쩌면 저렇게도 공평하고 깨끗하게 베풀어 줄수 있을까.
그때의 느낌은 눈의 차가운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솜처럼 따스한 안도감이었다.
아침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앞들과 언내들 고요한 은세계에 얼창고개로부터 아침햇살이 비치면 마을은 동화속의 설국(雪國)이다.
요즘에야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전부 보일러 난방으로 밤낮없이 방이 따듯하다. 60년대 무렵만 해도 땔감으로 방에 불을 지폈다. 저녁밥 지을 때 불을 넣고 땔감이 넉넉하면 별도로 “군불”을 땐다. 저녁에 군불을 지펴놓으면 대체로 새벽까지는 온기가 지속되는데 한겨울에는 그 온기가 자정을 넘기기도 전에 식는 경우도 있다.
위의 당시(唐詩)를 쓴 백거이는 중국 사람이기 때문에 중국은 온돌이 아니므로 초저녁 온기가 더 빨리 식을 것이다. 한참 잠을 자다가 문득 한기(寒氣)가 느껴져 잠을 깬다.
이불을 끌어 덮어도 계속되는 한기(寒氣)에 백거이는 눈을 뜬다. 시계는 없지만 느낌으로 깊은 밤중이다. 잠에 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창문이 훤하다.
잠든 사이에 눈이 소복이 쌓였고 달빛에 반사되어 창문에 비친 것이다. 정적 속에서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조용한 적막을 깬다.
필자가 한시를 정리해본 경험으로는 봄과 가을 풍경을 노래한 한시나 당시는 많은데 여름과 겨울 한시는 매우적다. 눈이 내린 풍경을 노래한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필자의 자료가 부족한 점도 있지만)
아마 “눈”이라는 순백(純白)의 자연표정(自然表情)앞에 말문이 막혔는지도 모른다. 백거이(白居易) 만큼의 대가(大家)가 아니고서는 눈 내린 대설(大雪) 밤의 풍경과 느낌을 이렇게 잘 그려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추울 때도 되었지만 대설을 알리는지 어그제부터 전국적으로 한파가 몰아치고 폭설주의보가 전달되고 있다. 눈이 많이 내리면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도로가 막히고 각종 재해가 따른다. 안타깝게도 겨울의 아름다운 정서가 재산을 망치고 인명을 앗아가는 천재(天災)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대설 무렵의 눈은 예나 지금이나 겨울 이맘때면 항상 자연스럽게 찾아왔었다. 다만 사람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기 보다는 인간에게 억지로 맞추려고 자연을 상처낸 아픔에 대한 인과응보를 받은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과 친하여야만 낭만의 대설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농월-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팔미환(八味丸)
한의학적으로 인체의 생명활동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물질로 위기(衛氣)와 영기(營氣)가 있다. (衛氣)는 피부와 살갗에 분포된 양기(陽氣)로서 혈맥(血脈) 밖으로 순환하면서 피부를 튼튼히 하고 땀구멍을 여닫는 기능을 하면서 외부로부터 병사(病邪)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는 에너지다. 영기(營氣)는 혈맥 안으로 순환하면서 혈액(血液)을 생산하고 온 몸의 영양(營養)을 좋게 하는 자양(滋養) 물질로 음식물에 의하여 비위(脾胃)에서 생기는 영양물질이다. 이 위기(衛氣)와 영기(營氣)를 일반적으로 정기(精氣)라 한다. 정기(精氣)는 생명활동의 근원적인 기운(氣運)으로 다시 신음(腎陰)과 신양(腎陽)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음(腎陰)이 충실하면 심혈(心血) 간혈(肝血) 폐혈(肺血)이 건강해지지만 반대로 신음(腎陰)이 약해저서 신양(腎陽)인 비위(脾胃)의 소화작용이 안되고 허열(虛熱)이 생기면 이를 상화(相火)라하여 인체의 균형을 잃게 된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정력(精力)이 약해졌다”는 신음부족(腎陰不足)을 말하는 것이다. 한의학적으로 정력(精力)이란 좁은 의미의 성적(性的)인 기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체의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다. 나이 50세를 넘기면 자연적으로 인체에 신음부족(腎陰不足)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흔히 “양기(陽氣)가 부족하다” “정기(精氣)가 약해졌다” 하는 증상이다. 즉 늙어서 “양기(陽氣)가 부족하다. 정력이 약하다” 하는 것은 신음부족(腎陰不足)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증상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헌약이 육미지황환(六米地黃丸)이다.
신음부족(腎陰不足) 현상에 대하여 한의학의 기본의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과 방약합편(方藥合編)의 기록을 살펴본다. ★동의보감(東醫寶鑑) 적응증-신음부족(腎陰不足)으로 몸이 여위고 허리와 무릎에 힘이 없으며 시큰시큰 아프고 어지러우며 눈앞이 아찔해지곤 하는데, 귀에서 소리가 나며 잘 들리지 않는데, 유정(遺精) 몽설(夢泄)이 있고 식은땀이 나며 소변이 자주 마렵고 잘 나오지 않는 데, 양기부족으로 발기가 안될 때, 미열(微熱)이 있으면서 기침이 나는데, 신경쇠약, 만성신염, 당뇨병, 고혈압증, 폐결핵 때에 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력부족(精力不足)의 대표적인 보약이다. ★방약합편(方藥合編) 신음부족(腎陰不足)을 다스린다. 신체가 초췌(憔悴수척한것)하고 허약할 때, 요통, 잠자리의 식은땀, 깨어있을 때 땀을 많이 흘릴 때, 식욕부진, 어지름증, 이명(耳鳴귀울림), 유정(遺精), 당,뇨 소변살이 약할 때, 중풍, 야뇨증 소변이 자주 나올 때, 소변이 잘 안나올 때, 등에 사용한다. ★참고자료 *신음부족(腎陰不足)-인체는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있는데 신음(腎陰)은 물질 적으로 양기(陽氣)의 기초기 되는 것이다. 즉 양기가 부족하다는 것은 신음부족(腎陰不足)이 부족한 것을 말한다. *유정(遺精)-정액이 저절로 흘러 내오는 것을 말한다. 음기 양기가 허하여 심화(心火)가 부족하여 하초(下焦-불알부근)가 항상 습기가 있어 축축하다. *몽설(夢泄)-꿈을 꾸면서 정액이 배설되는 병증. 꿈에 성교를 귀교(鬼交)나 성적(性的)욕망이 병적으로 과대하여 인체의 비뇨기적인 양기(陽氣)가 지나치게 활성화되어(상화相火) 생긴다. ★일반적으로 노년에 기력이 약하거나 병으로 몸이 허약하고 원기가 부실할 때 쓰는 보약인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이나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을 사용하면 매우 좋다. 이약들은 중초(中焦)인 비위(脾胃)의기능을 강화시켜 면역력을 증강하고 몸에 활기를 돋우는 약이다. 또한 비뇨기 분야의 정기(精氣)가 허약하여 위의 동의보감이나 방약합편에 기록된 증상에는 아래의 육미지황환을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다.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 숙지황320g 산약160g 산수유160g 택사120g 목단피120g 백복령120g ☆팔미환(八味丸)은 육계40g 포부자40g을 추가하면 된다. 사용-위의 약을 환(丸-알약)을 만들어 한번에 50~60알씩 데운 술이나 따듯한 물로 1일 3회 식후30분에 복용한다. ★약효를 더 좋게 하려면 아래와 같이 수치(修治)하면 매우 좋다. 수치(修治)란 약효를 높이기 위하여 별도로 가공을 하는 것이다. 숙지황-정종이나 막걸리에 반나절 담근후 꺼내어 햇볕에 말린다(4~5회 반복) 산약-깨끗이 씻은후 말려서 그대로 사용한다 산수유-깨끗이 씻은후 정종에 반나절 담근후 찜통에 찐후 말려서 사용하면 정력보전(補腎澁精)에 좋다 택사-깨끗이 씻은후 간간한 소금물에 반나절 담구었다가 말리어 냄비에 적당히 볶아서 사용한다. 보약에 사용할 경우다. 목단피-깨끗이 씻은후 정종에 반나절 담근후 찜통에 찐후 말려서 사용 한다 백복령-깨끗이 씻은후 말려서 사용한다 육계-따뜻한 물에 반나절 담근후 말려서 사용한다 ※그러나 포부자는 열이 너무 많기 때문에 몸이 매우 찬사람을 제외하고는 사용 안하는 것이 좋다. ★한약의 복용방법은 아래의 3가지가 있다 ☆탕약(湯藥) 한의의 임상에서 흔히 쓰이며 흡수가 비교적 빨라 쉽게 약의 작용이 나타나므로 갓 생긴병과 급성병에 주로 쓰인다. 약 1첩에 450~500미리리트의 물을 부어 불린다. 물이 약재에 다 잦아들면 물을 적당히 더넣고 약탕관에서 끓인다. 달이는 시간은 따로 규정한 것이 없으면 약재가 끓기 시작한 때로부터 보약은 1~2시간 일반약은 30~40분 방향성(芳香性)약은 29~25분 동안 끓이되 보약은 불을 약하게 하여 천천히 달이고 일반약은 불을 세게하여 빨리 달여 식기 전에 거른다. 탕제는 주로 급성 병에 쓰인다. ☆산제(散劑) 가루약을 말한다 산제는 먹은 다음 흡수가 물보다는 느리나 환제(丸劑)보다는 약효가 빨리 나타난다. 또 한 가지고 다니기 편리하고 필요에 따라서 양을 조절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약재로 만들 때는 고루 섞어야 독성이 있는 약재가 뭉치지 않는다. ☆환제(丸劑) 알약을 말한다. 종류에 따라서는 밀환(蜜丸꿀) 수환(水丸물) 호환(糊丸풀)등으로 만든다. 환제는 먹기 편리하고 흡수가 비교적 완만하며 약효력이 오래간다. 오래 두고 먹는 보약은 환제를 쓰는 것이 좋고 보통 만성병에 쓰인다. ★위의 육미지황환(六米地黃丸)에 대하여 한의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이론을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약(韓藥) 특히 보약(補藥)에 대하여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어디 어디에 무슨약이 좋다” 하면 그 말 한마디에 앞뒤 생각 안하고 그냥 약을 먹는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약(藥)이란 뜻은 독(毒)을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일상으로 먹는 음식(飮食)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쑥”을 음식으로 먹을 때와 약으로 먹을 때는 다른 기능을 나타낸다. 보약(補藥)이란 함부로 먹는 것이 아니다. 보약(補藥)이란 나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 한다는 뜻이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보약을 먹을 필요는 없다. 순전히 기분상이다. 이것을 약에 대한 심리효과인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 한다. 약은 병이 들었을 때 먹어야 하며 아프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먹지 말고 반드시 해당 의사의 처방에 따라 먹어야 한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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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할때 죽어야지 12-10 自憐阿堵已飛花(자련아도이비화)-스스로 가여워라, 눈이 이미 흐려졌으니 尙且逢場發興多(상차봉장발흥다)-그래도 친구를 만나니 무척이나 흥겹다 可笑此翁猶矍鑠(가소차옹유확삭)-우스워라, 이 노인 늙어도 오히려 건장해지니 百端無計住昭華(백단무계주소화)-그렇지만 젊음에 머물 방법은 아무데도 없구나! 남재(南在) 고속버스 터미널 부근에 있는 강남성모병원에서 방배동을 거쳐 신림동으로 오는 버스 안인데 예술의 전당 앞에 왔을 때 한 할머니가 “ 기사 양반 날 동대문에 내려주슈” 하는 것이었다. 버스 운전기사가 “할머니 이차는 동대문 가는 게 아니에요 차를 잘못 타셨어요” 하니까 “그러면 날 종로 5가에 내려 줘” 하는 것이었다. 버스 안에 승객이 일제히 할머니에게 눈이 쏠렸다. 약 80세 넘어 보이고 산발된 하얀 머리에 목에 수건을 감고 지팡이를 들고 몸은 뚱뚱하였고 눈은 초점을 잃은 듯하였다. “할머니 집이 어디세요” “응 나 이천 대광리 산골에 있어” “서울에 왜 오셨어요” “응 나 추워서 내의 하나 살려고 왔어” “이천에도 옷가게가 있는데” “응 이천에는 멋있는 내의가 없어” 멋있는 내의 살려고 서울까지 ? ? ?--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평균수명이 80세가 되었다. 이제 60 70은 후반기 청년이다. 한술 더 떠 레이 하몬드 미래학자는 그의 저서 “2030년의 삶”에서 2030년이 되면 평균수명이 130세가 된다고 예측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래 살면 서민이라도 “영감” 벼슬을 받았다. 성종 때 법제화된 노인직 또는 장수를 기념하는 수직(壽職)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의 경우 80세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90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100세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의 위계를 내렸다. 물론 실제로 권한을 행사하는 벼슬은 아니고 품계만 주는 이름뿐인 공명첩(空名帖)이다. 해마다 년 초에 관찰사가 양반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80세 이상 노인들을 조정에 추천했다. 노인을 흔히 “영감(令監)”이라 부르는 것도 조선시대 노인직 제도에서 비롯됐다. 정2품 이상은 대감(大監)이라 불렀고, 종2품~정3품 당상관은 “영감(令監)”이라 했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재물과 생명연장에 끝이 없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도 생명이란 조물주가 주신 단 하나이므로 죽고 나면 끝나는 것이고 연습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건강이 젊음을 유지하면서 산다면 백년이 아니라 천년이면 길다고 하겠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제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더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죽는 것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치매(癡呆)”가 들어 인간 괴물이 된 모습을 상상하면 끔직하다. 늙어서 제일 무서운 것은 치매(癡呆)다. 또 치매 증세가 있는 늙은이가 오래 산다. 젊은 사람은 줄어들고 마귀(魔鬼)같은 늙은 괴물만 우글거리는 시대가 오고 있다. 생명공학이 발달했다고 좋아할 것 없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면서 죽을 때 죽지 않고 억지로 자연에 항거하여 생명을 연장 시킨 인간이 저지른 인과응보(因果應報)인 것이다. 늙은이가 대접 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얼마 안 있어 늙은 숫사자처럼 무리에서 노골적으로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60세 이상 되는 젊은 영감(令監) 들에게 권하고 싶다. 병원에 가면 치매신경검사 노인우울 척도검사 MRI등이 있으므로 제정신이 있을 때 한번쯤 치매에 관한 진찰을 한번쯤 받아 보는 것이 어떨까. 사람일이란 알 수가 없다. 그래야 “동대문” 차를 바르게 탈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좋다고 보약들 먹지 말자 보약먹고 오래살면 자식에게 천대 받기 꼭 알맞다. -농월-
가정을 다스린 후에 국가를 경영해야 12-11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 선치기국)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옛 선인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 欲治其國者先齊其家(욕치기국자선제기가) 그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가정을 바르게 하고, 欲齊其家者先修其身(욕제기가자선수기신) 그 가정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몸을 닦고, 欲修其身者先正其心(욕수기신자선정기심) 그 몸을 닦으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欲正其心先誠其意(욕정기심선성기의)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뜻을 정성스럽게 하며, 欲誠其意者先致其知(욕성기의자선치기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 致知在格物(치지재격물) 지식을 갖추는 것은 사물을 밝히 보는 데 있다. 대학(大學) 1장 8조목 위의 글은 유학(儒學)의 4서5경(四書五經)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이다. 유교는 오경(五經)중심과 사서(四書)중심으로 중국사의 상식이다. 송(宋)이후 청조(淸朝)까지 약 1천년 동안 가장 존중시 되며 읽혀온 경전이 사서(四書)였고 대학(大學)은 이 사서 학문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 조선이나 중국에서 학자가 공부를 할 때에 먼저 대학(大學)을 공부하고 다음에 논어(論語) 다음에 맹자(孟子)를 배우고 마지막에 성인(聖人)의 학문이라는 중용(中庸)을 공부하는 순서이다. 대학은 공자(孔子)가 후세에 남긴 책으로 초학자가 도덕(道德)관의 학문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입문서(入門書)이며 사람의 도리(道理)를 가르치는 기본 학문(學文)인 것이다. 위의 글을 대학(大學)의 8조목인데 문장을 구분하여 정리를 하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고 한다. 여기서 격물치지(格物致知)란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성의정심(誠意正心)이란 마음은 몸의 주인이므로 참된 마음을 바르게 지속하는 것이다 그다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먼저 자신의 마음이 깨끗해야 몸가짐이 바르게 되고 다음에 가정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고 그다음에 나라를 경영할 수 있고 그다음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학(大學) 1장 8조목을 우리들은 흔히 사회지도자나 정치인들에게 많이 요청하고 있다. 한나라의 지도자는 이와 같은 도덕성이 반드시 요하는 자리인 것이다. 지도자 자리는 개인의 명예나 권력에 국한된 자리가 아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고 국가 존망을 책임지는 자리다. 오죽해서 천명(天命)으로 내린 자리라고 하겠는가. 하늘이 내린 지도자에게 국민이 최소한의 바라는 소망이 대학의 8조 덕목인 것이다. 부패한 고려를 개혁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코자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였다. 혁명(革命)이란 하늘의 명(命)을 바꾸(革)는 것이다. 하늘의 명이란 곧 백성의 명(命)인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독특한 정치구조를 형성하여 왔다. 조선왕조는 표면적으로는 전제군주(專制君主)의 왕조(王朝)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왕이 마음대로 전행(專行)을 할 수 없는 구도였다. 조선왕조는 임금 자리를 다투기 보다는 왕과 신하가 서로 유리한 정치적 입지(立地)를 마련하려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다툼 이였다. 조선왕은 임금이라고 마음대로 관직을 임명하고 죄를 주지 못했다. 일일이 신하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신하들의 요청에 의하여 정사를 집행했다. 그리고 신하들은 경연(經筵)이라는 군주의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훌륭한 임금이 되도록 유교의 경서(經書)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임금을 감시 하였다. 조선왕조의 정치제도를 잘 나타낸 것이 주례(周禮)의 육전(六典) 시스템을 참고로 한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구상한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정보위(正寶位)이다.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하여 피살되므로서 조선왕조를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려는 원대한 포부를 이루지 못했지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정신은 500년 역사의 바탕이 되었고 서구 민주주의보다 훨씬 진보된 정치제도 였음을 자부한다. 기회있는 대로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세계사에 드문 왕권과 신권과의 균형을 이루는 정치 체제로서 조선왕조 500년의 긴 역사를 이루는데 중요한 바탕인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보면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의 대통령 보다 전제군주제 조선왕권이 훨씬 약하다고 볼 수 있다. 법으로 정해져 있는 대통령 임면권 행사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아무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조선조에서는 왕족들을 관리하는 관청인 종부사(宗簿寺)를 두고 종친들을 교육시키는 종학(宗學)을 두어 종친들을 교육시키고 관리 감독하였다. 종친부(宗親府)는 조선시대 왕실 일가친척의 일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왕자들을 감독하고 왕실의 잘못을 찾아내 규탄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조엔 임금 친인척 비리에 대한 단죄가 엄했다. 그들이 비리를 저지르면 반드시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고 살인범이나 강도범처럼 무거운 벌을 받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본인이나 친인척 비리가 없는 지도자를 찾아 볼수가 없다. 국가적으로 참 불행한 일이다. 하늘이 내린 자손만대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재물을 치부하는데 이용하는 친인척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보인다. 대통령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몸 바쳐 일하라고 하늘이 내린 자리를 친인척으로 인하여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지도자의 단호한 결단이 요구된다 국민을 신명나게 하고 오래도록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되려면 이(利)에 눈을 돌리는 소인(小人)이 되지 말고 의(義)에 몸을 바치는 대인(大人)이 되어야 한다. -농월-
제사상의 홍시(紅柿) 亡父嗜柿 故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감을 즐기셨으므로
每秋 擇柿二百個藏諸窟中 해마다 가을에 감 200개를 골라 굴 안에 묻어 두는데 而至此五月 則完者不過七八 다음 5월에 이르면 완전한 것이 불과 7~8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今得五十個完者 故 心異之 올해는 완전한 것이 50개나 되어, 마음속에 이상하게 여겼더니, 是天感君孝 이것은 하늘이 그대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다 遺以二十顆 하고는 20개를 내주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효행편(孝行篇) 위의 본문(本門) 내용은 삼국유사에 있는 이야기를 명심보감에 기록한 효행이다. 요즘 세상은 영농기술이 발달하고 저장 시설이 좋아서 계절을 불문하고 각종 먹거리가 입맛대로 있어 제철음식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어그제 집사람과 잘 익은 “홍시(紅柿)”를 먹으면서 “요즘에는 세상이 좋아서 마트에서 효자 노릇을 한다” 하니까 아내가 “마트가 무슨 효자 노릇을 해요?” 하고 묻기에 들려준 것이 명심보감의 도씨(都氏)효행 이야기다. 도씨(都氏) 어머니가 봄에 병이 났는데 제철에 없는 홍시가 먹고싶다기에 도씨가 혹시나 하고 감나무 밑을 날이 저물 때까지 찾았지만 봄에 홍시가 떨어져 있을리 없다. 그때 호랑이 한 마리가 앞길을 가로막고 타라는 뜻을 표시하였다. 도씨가 호랑이를 타고 어느 동네에 이르러 한 집 마당에 내려 주어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밤중에 집주인이 제삿밥을 차려 내오는데 상(床)에 홍시가 있었다.
도씨가 너무 기뻐 늦은 봄에 귀한 감의 내력을 묻자, 주인이 말하기를,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감을 즐기셨으므로 해마다 가을에 감 200개를 골라 굴 안에 저장하여 두는데 5월이 되면 완전한 홍시가 불과 7~8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올해는 50개나 되어 마음속에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것은 하늘이 그대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다.” 하고는 20개를 내주었다. 도씨가 사례하고 문밖에 나오니, 호랑이가 아직도 엎드려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닭이 울었다. 뒤에 어머니가 천명(天命)으로 돌아가시자, 도씨는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효행(孝行)이란 부모를 잘 섬기는 행실을 말한다. 효해에 대한 이야기는 유교적인 도덕이 중요시되는 우리사회에서 효도야말로 오륜의 으뜸이고 인간의 본분이라고 평가되었기에 효자에 대한 전기나 효행설화가 문헌에 기록되어 백성을 가르치는 훈민(訓民)의 표본으로 삼아 왔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효행설화가 실려 있다 미천한 백성으로서 역사 속에서 주목 받은 인물이 아니더라도 효행이 특별하면 열전에 기록을 하였다. 예를 들어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부모의 약을 만든 향덕(向德)과 성각(聖覺), 자기 몸을 종으로 팔아 부모를 봉양한 지은(知恩)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이다. 삼국유사에도 효선편(孝善篇)에 효행설화가 있다. 손순(孫順)이 부모 봉양을 위하여 자식을 땅에 묻으려 했다가 하늘로부터 복을 받은 이야기는 효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희생효설화(犧牲孝說話)의 대표적이다. 구약 성경 창세기 22장 8~11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번제(燔祭)물로 아들 이삭을 바치자 축복을 받은 이야기와 비슷하다. 고려사 열전에도 효우편(孝友篇)을 두고 효행설화를 수록하여 백성들이 귀감이 되도록 하였고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추적(秋適)이 효행을 모은 명심보감이 그중 하나이다. 효행에는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 이야기도 있다 효불효교(孝不孝橋)의 이야기에서 홀어머니가 밤에 외간남자를 만나러 다니기 좋게 자식들이 다리를 놓았다 하여, 외로운 어머니에게는 효행이지만 죽은 아버지에게는 불효라고 하였다. 또 며느리가 홀시아버지를 장가들이기 위하여 묘한 연유로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장모가 되었다는 것은 효행에 시비가 따르는 이야기도 있다. 부모를 물질로 받드는 효도 중요하지만 나를 낳아준 부모를 진심으로 받드는 반포지효(反哺之孝)의 마음이 있어야 물질효도가 빛이 날 것이다. -농월-
방생(放生)이 죄가 되어서야 新種魚苗未滿寸(신종어묘미만촌)-새로 나온 어린고기 한치도 못되는 걸 已看穉子却敲針(이간치자각고침)-어린 놈들 보자마자 낚시질 하는구나 爾莫洋洋欣得所(이막양양흔득소)-살 곳 얻어 꼬리치며 기뻐들 하지말라, 放生元是殺生心(방생원시살생심)-방생이란 원래가 살생할 마음인 것을. 작자미상(作者未詳) 한 양반이 길들인 매를 가지고 산중으로 꿩 사냥을 나갔다. 얼마 후 꿩을 발견하고 매를 날려 보냈는데 매에게 쫓긴 꿩이 급한 김에 산속에 있는 외딴 오막살이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때 부엌에는 그 집 딸이 있었는데 매에게 쫓긴 꿩이 불쌍하여 땔감 뒤로 숨겨 주었다. 조금 후에 양반은 매와 같이 와서 꿩을 찾지 못하자 그대로 돌아갔다. 사냥꾼이 간 후에 처녀는 꿩에게 “이제 사냥꾼이 갔으니 앞으로는 조심” 하라고 타이르고 날려 보냈다. 저녁에 일터에서 돌아온 부모에게 낮에 일어난 꿩 이야기를 하였더니 부모는 꿩을 살려준 것은 잘한 일이지만 권세 좋은 양반의 사냥감을 감추었으니 틀림없이 뒷조사를 할 것이니 큰 후환을 만들었다고 걱정이 태산 같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에 양반집에서 알아볼 일이 있으니 집으로 좀 오라는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양반집으로 갔다. 방으로 안내된 처녀 아버지는 방안에 진수성찬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웬 음식상이야. 먹이고 죽일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양반은 벌벌 떠는 촌부를 보고 앉으라고 권하면서 “우선 식사와 술이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촌부는 속으로 기왕 죽을 거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생각으로 눈 딱 감고 먹고 마시었다. 얼마 후 양반은 이제 이야기를 하자면서 사냥하던 날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고 촌부는 머리만 조아렸다. 양반이 하는 말은 “사실은 내가 당신집 부엌으로 꿩이 들어가는 보고 부엌에 있는 딸에게 물으니 꿩이 없다고 하기에 속으로 하, 산중에서 고기가 귀하니 나중에 잡아서 먹으려고 거짓말 하는 것이구나 하고 다시 숨어서 보았다 그런데 딸은 꿩을 타이르면서 살려주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당신 딸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탄하여 내 며느리를 삼으려고 당신을 부른 것이다” 하고 혼인을 요청하는 것이다. 한편 집에서는 날이 저물어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정말 죽었구나” 생각하고 시체라도 찾을 생각으로 문밖을 나가니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이고 살았으니 다행이다. 얼마나 맞았기에 저처럼 몸을 가누지 못할까” 하고 달려가니 술이 곤주박이 되어 있었다.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들은 가족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드디어 혼례를 치루고 처녀는 양반집 며느리가 되었지만 시어머니와 아들은 산골처녀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아버지가 정한 일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도 새며느리에게 집안 살림을 인계하면서 집안의 전통인 “불씨”도 같이 인계하였다. 지금이야 라이터 성냥 전기등 불이 흔하지만 60~70년 이전만 해도 성냥이 귀하여 저녁밥 지은 후 아궁이에 불을 묻어 두었다가 다음날에 불을 살려서 사용하였다. 지금도 전통을 중요시 하는 가문에는 대대로 불씨를 전승시켜 오고 있다고 한다. 양반집 시어머니도 대대로 내려오는 불씨를 새며느리에게 인계하면서 절대로 꺼지지 않게 잘 보존하라고 당부하였다. 며느리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저녁밥을 지은 후 아궁이 불씨를 정성스럽게 단단히 묻어 두었다. 다음날 아침 부엌에 들어간 며느리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누가 아궁이 불씨를 파헤쳐놓고 심지어 물도 뿌려놓아 불이 꺼진 것이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시어머니도 새며느리라 한번은 봐준다면서 용서를 하였다. 며느리는 다시 단단히 불씨를 묻었다. 그런데 뒷날 아침 또 다시 불은 꺼져 있었다. 며느리는 죽을죄로 용서를 다시 빌었다. 시어머니는 야단을 쳤지만 별수 없이 다시 용서를 하였다. 그날 밤 며느리는 남편에게 오늘밤에 잠을 자지 않고 부엌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속으로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어머니가 혹시 불을 일부러 끈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어머니가 들키면 큰일이라 여겨 부엌 지키는 것을 말렸지만 며느리는 듣지 않았다. 밤 자정이 넘어 대 문 여는 소리가 나면서 한 동자가 부엌으로 들어와서 아궁이 불을 파헤친 후 그 위에다 오줌까지 싸고 나가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뒤쫓아 가 동자를 붙잡으려 하였지만 걸음이 빨라서 잡을 수 없었다. 며느리는 이 동자를 잡아야 누명을 벗을 것이라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뒤쫓았다. 동자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큰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며느리는 따라 들어가지를 못하고 동자가 굴에서 나오지 못하게 동굴 앞에 돌을 쌓아 구멍을 막기 시작했다. 한편 집에서는 며느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아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사방으로 풀어 찾으면서 산속 동굴 앞까지 오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굴속에는 아무도 없고 구석진 곳에 큰 독이 하나있었다. 독을 꺼내어 안을 보니 안에는 황금이 가득 들어 있고 글씨가 쓰인 종이가 한 장 있었다. 글 내용은 자손이 없는 한 부자가 죽으면서 전 재산을 황금으로 바꾸어 굴에 묻어두고 다음에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여 이 황금을 다시 찾을 것이며 만일 자기보다 먼저 이 황금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주인이라고 하였다. 양반은 며느리 덕분으로 더욱큰 부자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어젯밤 TV에 한 스님이 인과응보에 대한 설법내용을 두서 없이 정리한 것이다-- 불교인들이 사월초파일에 물고기를 방생(放生)하는 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부처님의 자비로 구속되거나 어려움에 처한 생명을 구하는 선행이다. 방생이란 곧 자비이다. 자비란 물고기 뿐만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뜻하지 않은 재난에 처했을 때 그 위기를 모면시켜 생명을 보존시키는 보시 행위다. 불자들이 초파일에 물고기를 잡아서 강에 풀어놓고 큰 선행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방생이 아니고 죄를 짓는 것이다. 방생(放生)이란 글자대로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의미한다. 물기나 모든 생물은 자기가 항상 사는 환경에서 살아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잡아서 다른 환경으로 옮기면 제대로 살지를 못한다. 잘 살고 있는 물고기를 일부러 잡아서 다시 강이나 바다에 던지는 것은 마치 놀부가 제비 다리를 부러트려서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것과 같은 것이다. 굳지 물고기를 방생할려면 오염된 하천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찾아 맑은물에 소생시켜 방생하거나 공해로 말라죽는 가로수에 거름을 주고 약을 처서 살리는 것이 옳은 방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하는 불교인들의 물고기 방생은 형식적인 자비를 베푸는 위선행위다. 이 위선행위에 말못하는 물고기들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생명은 진실이다. 다른생명의 희생의 대가로 복을 받을 생각을 해서는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진정한 방생은 꿩을 살려준 산골처녀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진정한 방생이요 자비다. 그리고 멀쩡한 물고기를 억지로 잡아 강에 던지는 형식적인 위선을 하지 말고 겨울 철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진정한 방생이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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